바람이 불었다. 아직은 한기(寒氣)를 머금었지만 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었다. 조금 전 한계령을 넘을 때만 해도 폭설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섰었는데 한계령을 넘자마자 이렇게 날씨가 달라진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오늘 아침 강원도 산간지방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듣고도 4월 초에 내리는 눈이 얼마나 심할까 싶어 방심한 게 화근이었다. 눈은 무릎 높이만큼 쌓여있었다. 한계령 입구엔 설해대비 안전장구를 갖추지 않은 차량은 우회하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며칠 전, 자동차 트렁크를 정리하면서 체인 등 설해 장구들을 일찌감치 치워버린 게 후회가 되었다. 국도유지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불도저로 눈을 치우며, 체인을 감지 않은 차량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한계령을 넘지 않으려면 인제 쪽으로 다시 나가 상남면, 내면을 거쳐야만 양양으로 갈 수 있었다. 아니면 아예 홍천까지 나가서 중앙고속도로를 타던가. 하지만 한계령만 넘으면 30분 정도면 양양에 도착할 수 있는데 돌아가려면 두 시간 이상은 더 돌아야 했다. 상남면, 내면 쪽의 31번, 6번 국도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수해복구 현장을 지원하는 긴급차량이라는 핑계를 대며 간신히 한계령 코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눈은 많이 왔다. 액셀레터를 밟는 발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진즉에 국도유지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시킨 대로 31번 국도로 우회할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드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한계령을 넘자마자 44번 도로와 7번 도로가 만나는 북평리 근처에 이르자 눈은커녕, 해안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봄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항상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손바닥만하다고 불만이었었는데 고개 하나 사이에 겨울과 봄이 상존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멀리, '양양 30km'라는 도로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7번 국도로 내려서자 모든 것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눈이 부셨다. 석양빛임에도 바다가, 모래사장이 토해내는 모든 것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눈(雪) 속에 핀 꽃 한 송이를 대하는 기분이랄까.
옆 자리의 광명이 “이제 다 왔네.” 하며 마른기침을 뱉듯이 짧게 말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흡사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바람소리를 닮았다고 생각을 했다. 차창이 열렸다가 닫힐 때 사라지는 바람의 파열음처럼 그의 목소리는 무척 건조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원종을 만난다는 생각에 조금은 긴장된 듯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리라. 우리 셋은 하루도 떨어져서 살 수 없을 만큼 붙어 다니던 단짝들이었으니까. 그 세 명중, 죽은 줄로만 여기고 있던 원종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긴장이 되리라. 그러고 보니 서울을 떠나 지금까지 네 시간이 넘도록 광명이 입을 연 것은 지금 내뱉은 ‘이제 다 왔네.’ 이 말이 전부였다. 내가 원종의 소식을 전하고 그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그는 무척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가 망설이는 모습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내심 그가 함께 동행해주기를 바랬었다. 가슴에 묻어둘 이야기야 묻어두어야겠지만 풀어야 할 것은 풀어야 했으므로.
달래천 주변으로 공사용 차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토사를 실어 내가는 차, 골재를 싣고 들어오는 차, 흙먼지를 뒤집어 쓴 차량들이 술 취한 사람처럼 삐뚤빼뚤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작년 9월초 태풍 루사가 이 근처를 한바탕 쓸고 간 뒤, 달래천 입구에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수해복구 설계 계획을 설명하던 일이 떠올랐다. 흙탕물에서 건진 시신을 부둥켜안고 누가 책임을 질 거냐며 울음 울던 아낙, 술 취한 이장, 삽자루를 들고 우릴 죽이겠다고 설쳐대던 청년회장 등등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중학교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학교 담장엔 흙탕물 얼룩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담장 반쯤까지 흙탕물 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홍수가 그만큼 올라왔을 터였다.
원종을 만난 것은 해질녘 땅거미가 흘러내리는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감리단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현장 점검 중이었는지 사무실에 없었다. 감리단 최단장에게 원종의 취직자리를 흔쾌히 받아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최단장이 궁금해 하는 설계도면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불쑥 그가 들어왔다. 바닷바람을 쏘여서인지 그의 얼굴은 꺼뭇꺼뭇 초췌한 모습이었다. 숫 많은 구레나룻이 그의 얼굴을 더욱 초췌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원종씨, 이사님과 친구 분이라며? 최단장은 원종에게 나를 가리키며 웃어보이다가 이윽고 사무실을 나갔다. 내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끝에 작은 진동이 일고 있었다. 7년만의 만남이었다. 1주일 전, 불쑥 그가 전화를 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나, 원종이야.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그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 그동안 절에 들어가 있었어. 수도(修道) 좀 하고 왔지… 이윽고 그의 목소리에서 예의 호탕한 웃음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그제야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 나는 그 소리가 목구멍에서 스며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야, 임마 그렇게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연락도 않고… 내 목소리에서 마치 어리광부리듯 치기가 스며 올라왔다. 원종은 몇 마디의 말을 더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자리나 하나 알아봐주라. 기왕이면 서울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원종의 전화를 받고 수소문 끝에 자리를 알아본 곳이 작년 가을 내가 수해복구 설계를 해준 현장 감리단이었다. 최단장으로서도 감리를 하는 동안 내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것이었으므로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듯 했다.
― 잘 있었어?
그는 전과 달리 왜소해보였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단단한 체격이었던 그가 이렇게 야윈 것을 보면 객지 생활 7년 동안 그의 고생을 어림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종은 대답대신 안전모를 책상 위에 벗어던지며 내 손을 잡았다. 예전에 느꼈던 따스한 손이 아닌 차고 투박한 손이었다. 가설재로 만든 감리단 사무실 천정의 형광등이 을씨년스런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창틈을 흔드는 윙~하는 바람소리가 형광등 소리와 어울려 가볍게 귓가를 흔들고 지나갔다.
― 도대체 7년 동안이나 잠적했던 이유가 뭐야. 그렇게 증세가 심했던 거야?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7년 동안 그로 인해 쌓인 궁금증이 너무 많았다. 궁금증이 쌓이다 못해 오죽했으면 죽은 놈이라고 포기했을라고. 그는 사무실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가 나와 광명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그의 입술에 잔 떨림이 스쳐 지나가가고 있었다.
― 나가자,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며 이야기하자고
광명이 원종의 등을 떼밀 때야 우리는 비로소 어둑어둑해진 달래천 현장으로 걸어 나왔다. 어느새 공사용 덤프트럭들은 한 대도 없이 사라지고 달래천 주변은 어둠의 적막과 고요만이 을씨년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쌓여있는 흙더미들과 정지해둔 포크레인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작년 수해 때 건져진 시체들처럼 괴괴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등허리로부터 전율이 느껴졌다.
―현장 생활은 할만해?
그 전율을 털어버리려는 듯 사래질 치며 원종을 바라보았다.
― 네 덕분에 단장님이 잘해주셔서…
옆에 걷고 있는 어둠 속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볼 순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등 하나 없는 달래천변엔 아직도 젓가락처럼 부러져나간 전신주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달래천 급곡부에 유로(流路)가 바뀌어 파괴된 집은 작년 현장 조사를 나왔을 때와 똑같이 피사의 사탑처럼 기우뚱한 그대로였다. 인가 없는 현장을 지나 멀리 불빛이 바라보이는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작년 루사 때 인명을 9명이나 잡아먹었다는 달래천은 아름다운 이름과는 판이하게 어둠 속에서도 죽음의 소리를 킬킬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원종과 광명, 나 이렇게 셋은 고등학교 3년 동안 떨어져서는 못살 정도로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광명은 평범하게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는 녀석이었지만 원종은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글쓰기에 심취해 있던 나는 녀석과 금방 친해질 수가 있었다. 3년 동안 짝꿍이란 인연도 인연이었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녀석과 내가 가까워 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선생님들에겐 골칫거리의 대상이었다. 공고에 들어왔으면 자격증이나 취득해서 산업일군이 되든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대에 진학할 생각이나 할 것이지 주제넘게 무슨 음악이고, 문학이냐는 비난과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창 혈기 왕성하던 고등학교 시절, 나와 원종은 누구 하나 자기의 꿈을 접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질 않았다. 만일 그런 말을 먼저 꺼내기라도 하면 의리를 배반하는 배신자가 될 것처럼 그 험한 비난과 협박을 받아가면서도 의리를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난 마흔 네 살이 되면 자살할 거야
원종은 졸업 후, 술만 취하면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서른세 살에 죽었다는 소월(小月)보다 꼭 열 한 살만 더 살고 죽겠다고 했다. 그때 난 그의 말이 너무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산다는 것. 그 말의 진의를 따지기보다는 그런 말을 한 그가 너무 멋있게 보였다. 나는 그에게 칭송과 예우를 보냈다. 죽음을 예고하고 사는 친구를 걱정하기보다는 그의 멋진 말에 건배, 건배를 외치며 그의 예고대로 살기를 바랬으니까. 공대에 진학해서도 그의 음악과 나의 문학은 항상 비웃음거리의 대상이었다. 간단한 계산식에도 항상 산출근거를 붙여야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계산기에 의해 그 답이 확인이 안 되면 신뢰받지 못하는 공학도들에게 애초에 음악과 문학은 유희일 따름이지 생활이 될 수는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G. Celfs가 부르던 ‘I understand'였다. 가끔 그는 그 노래를 동생 소연과 함께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그의 음악을 무시하던 친구들도 감탄을 자아내곤 조용해지곤 했다. 우리보다 서너 살 아래였던 소연은 그때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종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 하지 않는 치부를 일부러 들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때문에 소연은 우리들과 어울릴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녀는 우리들과 다방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때로는 술집 출입도 함께 하기도 했다.
원종의 가족은 모두 인물이 좋았다. 같은 남자이면서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원종과 소연이는 TV 속에 나오는 탤런트들보다 더 나으면 낫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도 인물이 좋았지만 이따금 그의 집에서 보게 되는 누나들 역시 평범한 미모는 아니었다.
그 당시 그의 집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술을 마셔야 했던 시절. 그의 집은 항상 예외였다. 우린 돈 없고 술 생각이 날 때쯤이면 그의 집으로 몰려가곤 했다. 때로는 그의 어머니가 술상을 준비해주기도 했지만, 우리한테 술상을 베풀어 주는 사람은 대부분 그의 외삼촌이었다. 그의 어머니보다 열 살 아래인 외삼촌은 그의 집,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외삼촌은 키가 150cm도 안되는 꼽추였다. 6․25때 월남을 한 그의 어머니는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외삼촌을 쉰 살이 되도록 함께 살고 있었다. 외삼촌은 양정고보를 나온 분으로 몸은 불편하지만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을 모아놓고 과외 선생으로 살아가는 분이었다. 언젠가 원종의 어머니는 양정고보에서 수석만 하던 재원이었는데 불구만 아니었으면 큰일을 했을 거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때 외삼촌은 ‘아이, 누님 됐어요. 저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라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려 조마조마하던 우리들의 가슴을 풀어 줄만큼 호탕한 분이었다.
외삼촌은 친구들 중에서도 나와 광명을 특히 좋아했다. 광명은 그때 S대 공대에 진학을 한 탓에 외삼촌의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순전히 3년 동안이나 원종의 짝꿍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외삼촌은 우리들과의 술자리를 즐기는 편이었다. 처음엔 우리들이 찾아갔을 때 예의상 우리들을 대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들이 그의 집을 찾지 않고 전화로 불러낼라치면 외삼촌이 전화를 받아 밖에서 그럴 것이 아니라 집에서 한 잔 하라며 우리를 불러들이곤 했다.
외삼촌은 친구들이 모여 술자리가 거나해지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한자 휘호를 써서 우리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는 걸 즐기는 듯 했다. 가끔은 우리들에게도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불러주며 직접 붓으로 써보라며 명령을 내리곤 했다. 나는 가끔 그 순간을 즐기곤 했다. 공대에 다니는 친구들에 비해선 문학잡지를 보느라 한자에 조금 자신이 있던 나는 외삼촌이 내게 명령을 내리길 은근히 기다리곤 했다. 간혹 내가 모르는 글자가 나올 때는 술 마시는데 열중한 척 빼기도 했지만, 내가 아는 글자가 나오면 슬며시 외삼촌 쪽으로 다가가서 친구들에게 한 번 써보라고 권유(?)하다가 결국엔 내가 붓을 받아들고 외삼촌의 칭찬을 독차지 하곤 했다. 그때 외삼촌이 우리들에게 자주 쓰게 한 한자어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한자어였다. 그 글자를 쓰고 나면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끼리 모여야 한다며 사내대장부는 모름지기 의리를 중요시해야 한다며 우리들에게 의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 네 증세가 어머님 장례 때 오지도 못할 정도로 심했었니? 소연이와 누님들도 보이지 않던데…
현장 노무자들 함바집으로 급조한 ‘달래막국수’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내가 입을 열었다. 원종의 얼굴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탁자를 내려다보던 그가 담배를 피워 물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 그의 표정은 어느새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 난 어머니 장례소식을 듣지 못했어. 아마 소연이와 누님도 그랬을 거고…
난 그가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제일 궁금했었다. 얼마나 병이 위중했기에 어머니 장례에도 참석 못했었는지. 나 같으면 기어서라도 참석을 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소연이와 누님들은 어떻게 된 건지.
오남매나 되는 그의 형제들은 어디 가고 장례식 땐 그의 형 혼자만이 상주노릇을 하고 있었다. 원종은 고사하고 누나 둘, 소연이까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원종의 형님에게 물어보려고 했었으나 그때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원종의 형님과 대화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장례식 때 원종의 이야길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않는 형님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었지만 혼자 상주노릇을 하는 그의 형을 붙들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의 형은 우리들에게는 항상 경외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이 원종의 집을 찾아가서 술판을 벌일 때에도 그의 형은 항상 우리를 못 본 듯이 대했다. 그렇다고 우리를 특별히 싫어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반기는 눈치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는 항상 별개로 행동하는 듯 했다.
― 형님이 고생 많이 하셨어.
광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그 분은 내 친형님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원종의 말에 나와 광명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원종은 막걸리 잔을 들이켰다. 어느새 함바집 안엔 장비운전사와 덤프운전사들이 합세를 해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목수들은 목수들대로, 콘크리트공은 그들대로 제각기 같은 공종 기술자들끼리 모여앉아 술 추임새를 벌이고 있었다. 안주래야 머리고기 눌린 것 밖에 없는데도 술집 안 분위기는 벌써 흥건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 우리 아버지가 순직하셨다는 이야기 했었지?
갑자기 그가 이야기 방향을 바꾸었다.
― 그래 네 아버님이 순직하셨다는 이야길 들었었지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아버지는 순직하신 게 아니고 자살하신 거였어.
그가 잠시 말을 끊고는 우리들을 마주 보았다. 그의 고집스런 짙은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막걸리 잔을 비웠고, 광명이 그의 잔에 술을 채우며 상체를 탁자 앞으로 당겼다.
―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난 건 술집에서였어. 어머닌 요정의 마담이셨지. 황해도에서 피난 나온 여자가 불구 동생을 데리고 먹고 살기 가장 좋은 방법이 그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성동경찰서장이셨던 아버진 사별을 한 상태였고. 두 분은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지. 그런데…
나는 원종의 집에 걸려있던 경찰관 제복의 사진을 떠올렸다. 사진 속 얼굴과 원종의 얼굴, 두 개의 영상이 오버랩 되더니 어느새 하나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 그때 외삼촌의 병이 악화가 됐나봐. 적지 않은 수술비가 필요했지. 공직자인 아버지는 그 수술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어머니는 동생 때문에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거야. 어머니는 다시 요정에 나가기 시작했지.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상태였고. 하지만 요정에 나간다고 수술비가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머닌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고 말았지. 어머닌 단 시간에 목돈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인 현지처 노릇을 택하고 만 거야. 물론 아버진 모르는 일이었고. 다행히 목돈을 마련한 어머니는 외삼촌의 수술비를 준비했지만 외삼촌은 수술에 성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꼽추로서 살게 되었지.
그가 심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 그때 태어난 분이 우리 형님이야. 형님 밑으로 누나 둘, 나, 소연이를 낳기까지 그 일에 대해선 아무 문제가 없었어. 문제는 소연이가 태어나던 해였어. 우리 형님이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언젠가 학교에서 혈액형 조사를 했나봐 우리 아버진 B형이고 어머닌 O형인데 형님의 혈액형이 AB형인 거야. 아버진 실망을 하셨지. 어느 날,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하신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어.
― 그 형님이 일본사람의 자식이었다는 건가?
― 그런 셈이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달라지셨어. 아버지가 없으니 생계수단을 어머니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머닌 형을 학대하기 시작했어. 아니, 어머닌 형을 학대 했다기 보다는 차라리 당신을 학대하신 거야. 어머닌 다시 그 일을 시작하셨지. 나중에 누나들이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어머니는 누나들을 학교에 진학시키질 않았어. 누나들도 그곳에서 경리를 보며 일을 거들었던 거야.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누나들도 술 취해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지만
원종의 목소리가 담배연기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무언가 결연함이 가득해 보였다.
―내가 그 사실을 안게 바로 대학2학년 때였어.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난 견딜 수가 없었지. 나는 그때가지 순직하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겐 너무 큰 충격이었지. 소연이와 나만 그걸 모르고 자랐던 거야
소연이의 이야길 꺼내며 원종이 광명을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광명을 바라보던 원종이 말없이 광명의 술잔에 잔을 따랐다. 광명은 원종이 내미는 술잔을 받으며 장비기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비기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 야 새꺄, 흙을 실을 때 바가지를 적재함에다 털면 어떻게 해
― 내가 언제 거기다 바가질 털었단 말이야
장비 기사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리들은 침묵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들은 흠칫흠칫 우리 자리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 적재함에다 바가질 털면 차가 다 망가지잖아 새꺄
― 야 새꺄, 차를 그렇게 아낄려면 집에다 모셔두지 왜 노가다판엔 끌고 나와
장비기사의 목소리가 높아지다가 그의 눈이 원종의 눈과 마주친 것 같았다. 갑자기 장비 기사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우리 쪽을 힐끔 힐끔 눈짓하더니 어느새 그들은 함바집을 나가고 없었다.
원종과 술자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 문학을 포기하고 원종이 다니는 K공대 토목과에 입학을 한 신입생이다. 원종은 같은 학교 선배인 셈이었다. 그는 학교축제 때 과대표로 출전한 노래 솜씨를 인정받아 학교대표로 대학가요제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 녀석은 그때 술에 절어 살 때였다. 그는 학교 앞, 생음악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항상 적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불러 받을 아르바이트비보다 그곳에서 먹어대는 술값이 항상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의 노래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어 술집주인은 술값은 더 나와도 좋으니 노래나 잘 불러달라는 일종의 공짜 묵계가 이루어질 즈음이었다.
대학가요제 출전을 얼마 앞두고 그의 누나가 경영하는 목욕탕 건물 4층 방에서 창문을 열고 창틀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아래로 추락을 하고 만 것이었다. 뇌는 손상되지 않았지만 척추가 부러져서 살아나도 병신이 될 거라고 했다. 다행히 두 번의 수술을 받고 원종의 상태는 호전되어 갔다. 척추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두 번이나 한 끝에 그는 러닝셔츠 모양의 깁스를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원종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친구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친구들에게는 소연을 접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도 병문안 핑계로 병원을 찾아들었다. 그만큼 소연인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 역시 소연이와 접할 기회가 생긴 게 은근히 기대가 되는 상황이었다. 평소 활달한 편인 소연이는 그의 집에 갈 때마다 영화구경을 시켜 달라느니 맛있는 걸 사달라느니 애교를 떨었지만 나는 항상 숙맥이었다. 그저, 응, 응 하며 그 자리를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때 내가 소연이의 제의에 흔쾌히 동의를 하지 못한 것은 내가 숙맥이라서 보다는 원종이 때문이었다. 친구의 동생과 몰래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 민망하기도 했고, 원종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싶어서였다. 언제든 기회만 되면 원종에게 허락을 받고 데이트 신청을 하리라. 하지만 원종이 병석에 있을 때여서 기회를 미루고 있을 때였다. 병원을 드나들면서 알고 보니 소연이를 좋아하는 녀석은 나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아니, 그때 병원을 드나드는 녀석들은 모두가 소연이 때문에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연이는 어느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곰살맞은 동생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원종의 어머니가 소연이의 신랑감으로 광명을 지목했을 때, 우리는 모두가 닭 좇다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부모 없이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온 광명은 국비장학생으로 유학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여서 은근히 결혼을 서두르는 처지였다. 원종의 어머니가 광명을 지목했을 때 그도 무척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그 일 이후로 광명과 소연이 함께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우리와 마주치면 어색한 듯 떨어져 있다가도 얼마 있어선 아예 보란 듯이 팔짱까지 끼고 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두어 달쯤 뒤의 일이었다. 입빠른 친구들에 의하면 광명과 소연이 여관에서 나오는 걸 보았다는 둥, 소연이와 술집에서 자주 마주친다는 둥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병원을 찾던 친구들의 발걸음도 뚝 끊어졌다. 광명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병원에서 소연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어졌다.
얼마 후 광명을 만나 소문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광명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렸다. 여자보다는 친구를 택하겠다고 공언을 하던 나이. 그 여자가 다름 아닌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이거늘 친구와 여자를 함께 다 버린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 소연이가 술집에 나간다는 사실이 정말이냐?
― 원종의 치료비를 보탠다고 나가기 시작했나봐…
― 소연이가 애를 뱄다는 사실은…
심문하듯 물어대는 내 질문에 광명은 고분고분 대답을 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부정의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결혼 전에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그것도 친구의 동생을. 그러나 광명의 대답은 여지없이 나의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소연이 애를 밴 것은 사실이며, 자기도 그 책임감으로 결혼을 결심했었노라고.
― 그런데 지금에 와서 헤어지겠다는 건 뭐야
―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소연이 생각이었어.
광명의 말로는 얼마 전, 소연이 임신 사실을 그에게 알리곤 산부인과에 동행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는 거라고 알고 동행을 했는데 그날 소연이 낙태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연이 자기에게 헤어지자는 말과 함께 돌연 행방을 감추었다는 말이었다. 소연이가 우리 머리 속에서 잊혀지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원종의 결혼식 때 먼발치에서 보기는 했지만 벌써 십여년이 지난 일을 들춰내어 상처를 만들고 싶진 않았으므로 나는 그때 광명과 약속을 했었다. 어차피 저질러진 일은 저질러진 일이고, 묻어야 할 일은 묻어야 했으므로 그 일을 소연이가 원종에게 말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어두기로… 우정을 위하여.
― 우리 어머닌 외삼촌을 위해 희생하셨고, 우린 어머니에 의해 희생이 된 거지.
원종의 입 언저리에 막걸리 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그의 수염에 걸린 방울 하나가 전등 빛에 반사되어 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 네 어머니한테 외삼촌은 자식 같은 분이었으니까…
내 머리 속에 그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 언제나 화장을 짙게 하고 오똑하니 앉아계시던 모습. 언제나 헝클어진 머리로 부스스하던 우리 어머니에 비해 얼마나 부러운 모습이었던지.
― 내가 불효자지?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을 못했으니?
그는 이제 확연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함바집 나무 벽에 매달린 둥근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없는 시계여서 시계가 죽은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함바집 주인 여자의 설거지 손놀림이 빨라지고 있었다. 우리 쪽을 건너보는 간격이 빨라지는 게 어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 우리 형님은 마지막으로 어머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거야. 사실, 우리 형제들은 내가 대학2학년 때 이미 형과는 남남이 되어버렸으니까. 아버지를 죽게 한 것도 그런데 우리 형님이 왜놈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니…
단정 짓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원종은 막걸리 잔을 쥔 손에 힘을 한껏 주었다가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며
― 결혼 이후, 난 하루도 술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어.
―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모두 널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 우리 어머닌 내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면 내 아내를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내 아내를 시장에도 못 가게 할 만큼 집안에만 잡아두셨지. 처음엔 잘 버티던 아내도 어느 순간 질식할 정도로 미쳐버리고 말더군…, 난 아내를 위해 내가 해줘야 할 일을 찾고 있었어. 내 아내를 어머님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은 아내가 나를 버리게 만드는 일이었어.”
원종이 결혼을 한 것은 서른여섯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원종의 아내는 거제도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올라온 스무 살의 앳된 아가씨였다. 그녀는 아직도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가씨였다. 모두들 원종을 도둑놈이라고 놀려댔다. 딸 같은 마누라를 얻는 놈이 어디 있냐고. 그러면서도 모두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원종은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게 그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와 잘 아는 분의 고향에서 중신을 해주었다고 했다. 몇 번인가 그가 여자를 데리고 신부감이라고 소개를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신부감은 시어머니인 자기가 골라야 한다고.
원종이 알콜 중독 치료를 위해 요양소에 갔다는 이야길 듣고, 1년쯤이 지났을 때 처갓집 부모들이 그녀와 아이를 강제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처가 부모들이 소송을 걸어 강제 이혼 정리가 되었다는 이야길 들은 것은 그 이듬해쯤의 일이고.
원종의 사망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새벽 5시,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 머리맡에 둔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최단장의 전화였다.
―이사님, 저 최단장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이 새벽에.
―사고가 났어요. 큰일 났어요.
최단장의 다급한 목소리로 보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원종씨가 오늘 새벽 8M 옹벽 위에서 실족을 했습니다. 콘크리트 슬럼프 검사를 하다가…
슬럼프 검사란 레미콘을 칠 때 물-시멘트의 배합상태에 따라 콘크리트의 강도를 나타내는 치수(대개는 8cm~15cm)인데 레미콘을 현장 인부들은 레미콘을 빨리 치기 위해서 레미콘에 물을 타는 경향이 자주 있는데 그렇게 되면 콘크리트 강도는 현저히 낮아지게 된다. 감리단은 현장에서 공사 인부들의 그런 일거수일투족 시방서(示方書) 규정대로 공사가 시행되는 지를 감시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옹벽 등을 타설할 때 레미콘 차에서 흘러내리는 콘크리트 시료를 직접 채취하여 시험을 하다보면 간혹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 잘은 모르겠으나 위독한 것 같습니다. 아까 119구급대가 왔을 때 머리를 흔드는 걸루 봐서는요. 엠블런스가 서울 병원으로 후송을 했으니 이리 오시지 말고 서울 성동병원으로 가보세요.
최단장의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이것이 예견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종이 7년 동안 연락을 끊고 살다가 불쑥 나타나 취직자리를 부탁할 때 서울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달라는 이야기와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친구가 자기 집안 내력을 소상히 밝히며 결연한 모습을 보이던 게 사전에 이런 일을 생각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괘종시계는 아직도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양양에서 서울 병원까지 후송되려면 빨라야 3시간은 걸릴 테니 아직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나는 서둘러 광명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원종의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내 전화를 받는 대부분이 어이없다는 태도였다. 아직도 원종이 돌아온 사실을 모르는 친구들은 모두 그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가 7년 만에 소식을 듣는 것도 어이없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또 사고라니 모두가 어이없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원종은 서울에 도착하기 전,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그의 시신을 확인한 나는 하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시신이 수습되어 영안실로 옮겨지고 영안실에 상청(上廳)이 차려질 무렵 소연과 그의 아내가 일곱 살배기 진호를 데리고 도착을 했다. 소연의 눈이 벌써 부어올라 있었다.
― 창훈 오빠
소연이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적셨다. 이혼을 했다지만 엄연히 아이의 아버지임으로 원종의 아내는 상청(喪廳)에 진열할 영정 사진을 올려놓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 옆에 서있는 진호는 갑자기 울어대는 어미를 바라보고 불안한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원종의 시신은 화장을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벽제 화장터에서 원종의 유해를 받아든 그의 부인과 아들, 소연을 태우고 우리는 원종의 유해를 양수리 근처 강물에 뿌리기로 했다.
원종의 아내와 아들을 태운 나룻배가 여기저기를 유영하듯 원종의 뼛가루를 한줌씩 뿌리는 걸 보면서 나와 소연, 광명은 제방 둑에 앉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 그땐 날 많이 원망했지?
원종의 유해가 강물에 뿌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광명이 입을 열었다. 4월의 봄볕에 오수에 잠긴 듯 멍한 모습으로 바라보던 소연이 고개를 들었다.
― 원망이라니요? 오빠한테 상처만 준 걸…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 그때 애기를 지우고 나서… 난 그 일로 인해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어.
광명이 말을 더듬더듬 얼버무리자 의외로 소연의 말이 또박또박 흘러나왔다.
― 저는 그때 오빠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저도 그때 그 아이가 오빠 아이길 얼마나 바랐었는지 몰라요.
소연이 나룻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20여 년 전, 우리가 그녀의 집에 드나들 때 보았던 그 청순한 얼굴은 어디 가고 그녀의 얼굴엔 세월이 많이 묻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 역시 벌써 마흔을 넘긴 여인이 되어 있었다.
― 저는 그때 돈 많은 일본인과 한 달간 계약 동거를 했었어요. 엄마 때문이었지요.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었어요.
소연의 볼 위로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러면서도 우리 엄만 절 오빠와 결혼하기를 바랬으니 얼마나 이기적이에요. 그러나 제가 그럴 수 없었어요.
―어머닌 딸들한테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기를 강요하면서도 올케언니한테는 빗장을 걸어 잠궜지요. 당신이 당했던 슬픔을, 아들과 손자한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 때문에… 올케언니는 시장도 갈 수 없었어요. 딸들을 내돌린 어머니는 며느리에게서 순결의 보상을 받으려 했던 것 같아요. 오빠는 그걸 견디지 못했구… 내가 오빠를 위해서 희생했다는 걸 알았을 때, 오빠는 올케언니와 진호를 데리고 어머닐 떠나고 싶어 했었어요. 하지만 어머닌 놓아주질 않았지요. 어머니에게 올케는 눈앞에 보여야만 안심이 되는 존재였어요.
내가 손수건을 내밀자 소연은 나를 찬찬히 바라보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손등엔 벌써 잔주름이 묻어있었다. 그녀의 손등을 보는 순간 갑자기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시 중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란 구절이 떠올랐다.
―저 오빠들 좋아했었어요.
소연이 일어섰다. 때맞춰 원종의 아내와 아이가 배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우리는 목례를 나누었다. 원종이 사라지고 없는 지금, 앞으론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오빠가 돌아가시기 전 날, 전화가 왔었어요. 창훈오빠와 광명오빠가 다녀가셨다고.
인사를 마치고 막 돌아서려는데 소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대답대신 빙그레 미소만 띄우고 있었다. 전 오빠의 죽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소연과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양수리 강물에 흩어진 원종의 영혼에게 인사라도 하듯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언젠가 던졌던 원종이 음성이 가슴에 쏟아졌다.
― 난 마흔 네 살에 죽게 될 거야. 우리 아버지처럼.
첫댓글 20여년만에 처음으로 쓴 단편입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10년 전에 초벌로 급하게 써놓은 글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