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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항3봉-주흘산(847-1,106m : 경북문경)
*일 자 : 2004. 8. 22(일), 산나라 산악회원(40명), 날씨(종일 七夕 비)
*코 스 : 하늘재-계곡입구-700고지-고인돌-월항삼봉(=탄항산)-825봉-월항재-959봉-주흘산
-(조곡골-조곡관 제2관문) 또는 1016봉-혜국사-여궁폭포-주흘관 제1관문
→백두대간 28소구간 일부(하늘재~959봉 구간)
*소 시 : 오전 10시 03분 ~ 오후 3시 3분 완료 → 총 5시간 소요
月項蔘峰(=炭項山).
경북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경계선상에 있는 월항삼봉은 봉화를 올리던 봉수터가 있던 자리로 백두대간 제28소구간이 통과하는 산으로 월항마을 사람들은 봉화등이라고 부른다. 또 이곳 일대에서 산삼을 많이 채취했다하여 蔘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노송과 깎아지른 절벽이 어우러져 959봉을 허리로 주흘산과 마주하는 산으로 그 전망 또한 일품이다.
主屹山!
백두대간이 흐르는 부봉 동쪽 959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에 우뚝 선 주흘산은 문경시내를 감싼 주산이다. 산의 동남쪽은 절벽을, 서쪽은 완만한 사면을 이루며 조령천 계곡의 훌륭한 절경을 연출한 명산이다. 유명한 여궁폭포와 파랑폭포, 그리고 혜국사가 자리한 곡중골 계곡의 신비함과 제3관문에서 제1관문에 이르는 00Km의 옛길은 언제 걸어도 좋은 데이트 코스이자 대화의 코스다.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이다. 진산(鎭山)이란 풍수지리적 용어로 옛 도읍이나 성시(城市) 등의 뒤쪽에 있는 큰산을 이르던 말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 지난날 매년 나라에서 향과 초를 보내 일년에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에 전한다.
헬수 없는 애환과 사연을 간직한 문경관문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 옛길인 주흘관(제1관문)-조곡관(제2관문)-조령관(제3관문)과 원터, 그리성 성터 등 문화재가 깔려있고, 주흘관 서쪽 산록에 마련된 TV드라마 왕건 세트장은 새로운 관광 명소로 각광이다.
새벽 5시 41분 우장산역 발 전철.
예약자 두 명(오희숙, 김자연씨)이 새벽 갑자기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정재근씨의 전언이다. 산나라 산악회 출발지점인 2호선 전철 교대역 9번 출구 외환은행 앞에 도착한 시각은 6시 45분이다. 오영삼씨 부부가 예약대로 참여했다.
출발예정시간인 7시에 엘리트관광(충남70바1921, 박종수 011-756-5131) 버스는 움직였다. 서초구청, 복정역을 지나 중부고속도로 東서울 톨게이트에 진입했다. 하늘은 예보대로 먹구름이 낮게 깔려있다. 오늘 산행 역시 우중산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바라건대 豪雨가 쏟아지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휴게소에서 다른 산악회 산행(운달산-성주산)에 참여한 양경태-황경희-김종석-김창돈씨 일행을 만났다. 그동안 RTNah 진행과정을 대한 설명이 있었다. 또 다른 산악회에 참여한 유인용씨와의 조우도 있었다.
괴산IC를 빠져나온 버스는 597번 지방도로를 타고 기룡목재를 너머 금년 봄 3학년 학생들이 수련회 장소로 치른 사조연수원 앞을 통과했다. 2박3일 수련회 기간동안 머물며 사조 연수원 앞, 뒷산을 등반하던 기억이 새롭다. 버스는 수안보시내를 지나 문경으로 향하는 고속화도로에 올랐다. 이화령터널을 지나 901번 도로로 들었다. 좌측에 신북천을 끼고 북향하던 버스 좌우엔 과수원의 붉게 물든 사과가 풍성하다. 더위 탓인지 금년 과일은 그 당도와 맛에서 뛰어나다.
사과나 배 등 과일을 종이봉지로 곱게 싼 모양이 질서정연하다.
새나 곤충으로부터 과일을 보호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다른 이유가 숨어있다. 과일이 뿜는 에틸렌 가스는 과일을 붉고 노란 색깔로 익어가게 하는 화학물질이다. 이 에틸렌은 휘발성 물질로 한 과일에서 만들어지면 주변으로 퍼져 덜 성숙한 과일에게 전달되어 성숙하게 만든다. 에틸렌은 성숙시기를 알리는 메시지다. 따라서 주변의 과일이 거의 동시에 익어간다. 그런데 과일을 싸고 있는 종이봉지는 에틸렌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씌워주면 주변과일로 전달됨이 없이 자기만 빨리 성숙해 그 크기와 맛이 극상점을 이룬다. 인간의 욕심이 만든 약삭빠른 경제적 행위다. 사과 과수원을 지나며 생각나는 것을 옮겨보는 거다.
오전 9시 10분.
관음리를 지나 하늘재 마루에 올랐다.
삼국시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이 전개됐던 전략상 요충지다.
들머리가 충주인 미륵리 세계사로 알았는데 정 반대방향인문경시 하늘재 마루다. 포장도로가 끝나며 가사철망으로 통행을 제한하는 경고문이 가로막는다. 우측에 포암산 안내도 간판이 서있다. 40여명의 회원들이 내린 하늘재의 하늘은 심상치 않게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음력 7월7일 칠석이다.
옛날 하늘의 목동 牽牛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織女가 열애에 빠져 게으름만 피우는데 노한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은하수 동, 서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는데 그 별이 견우성과 직녀성이다. 갈린 견우와 직녀의 애태우는 두 남녀를 보다 못한 까치와 까마귀들이 매년 칠석날 밤이면 옥황상제 몰래 하늘로 날아가 날개를 펼쳐 烏鵲橋를 놓아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는데 이날 저녁에 내리는 비는 두 남녀가 해후하며 흘리는 눈물이며, 이튿날 오는 비를 이별의 눈물이라고 한다. 중국 漢나라 때 俗節이 고려 공민왕 때 전해져 왕이 왕후와 함께 대궐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도 이날은 잔치를 벌이고 성균관 유생들에겐 節日製 과거를 시행했다. 밀국수와 호박무침이 이 때의 節食이다. 1년에 한 번 邂逅의 눈물을 흘리는 칠석이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의 눈물을 타고 오늘 산행을 마쳐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내일은 여름더위가 가신다는 처서(處暑)다.
입추 15일 이후로 8월 23일경이 된다. 태양은 황경(黃經) 150。에 달할 때부터 15。사이의 곳이 처서의 구역인데 음력으로는 7월의 중기이다. 입추도 지나고 백로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서퇴(暑退)의 시기이다. 가을 채소의 씨앗을 파종하는 시기이다. 옛말에 처서에 비가 오면 십리에 千石이 감하고, 백로에 비가 오면 白石이 감한다고 했다. 이 뜻은 처서 날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처서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세분하여 ①매가 새를 잡아 늘어놓고 ②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하며 ③논벼가 익는다고 하였다. 질척거리며 내리는 비가 오늘로서 끝나기를 빈다.
하늘재 마루. 백두대간 제28소구간이 시작하는 지점이다.
낙엽송 숲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들머리다. 완만하던 오르막이 갑자기 가파르다. 능선 좌측에 철조망이 쳐있고, 그 안에 무성한 잡초가 덮인 헬기장이 있다. 올라가는 능선 바닥엔 軍用통신선이 묻혀있거나 지표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강활, 며느리밥풀꽃, 뚝깔, 고본, 꼭두서니 등이 길섶마다 흥건하다. 새벽부터 만난 오영삼씨 안색이 좋지 않다 싶었는데 2진으로 주흘산만 오르겠다는 의사를 휴대전화로 알려왔다.
지난 주초 위-십이지장궤양으로 1주일간 입원치료로 지난 주 지리산(삼정-영원산) 산행에 불참했던 정재근씨가 치료를 위해 금연-금주에 들어간지 보름째다. 무엇보다 금연이 그에게 준 영향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오르막을 올라가는 품새가 보름전의 그가 아니다. 뒤따라가며 바라본 그의 행보가 이젠 제대로 된 산꾼이 되어 감을 느끼고 의미 있는 미소를 그의 뒤 꼭지에 흘렸다. 돌올한 작은 전망지점이다. 그러나 코스는 예서 우측 산 사면방면으로 떨어진다. 얼마 후 다시 완만한 오르막을 만난다. 좌측 골짜기에서 상승기류를 타고 불어온 기분좋은 서늘한 바람이 좋았다. 덥다는 핑계로 벗은 우의지만 시종 고르게 내리는 이슬비로 상의는 꽤 축축해진 상태다.
10시 20분, 700고지다.
주변이 산죽지대다. 국립공원과 대간을 알리는 높이 40~50Cm의 사각형 표시석이 촘촘히 보인다. 우중에 잔득 물기를 머금은 부처손, 지난 지리산에서 만났던 난장이바위솔이 반갑다. 우측에 두부모처럼 깎인 암벽지대를 지났다. 누릿대가 지천이다. 비가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보는 거의 속보다. 염려했던 정재근씨의 행보가 사라지니 오늘의 산행은 한결 편안하게 마칠 것이란 생각이다.
10시 39분.
북한산 승가사 뒤편에 있는 紗帽바위처럼 생긴 거대한 고인돌이 넓적한 암반 위에 올려있다. 개념도에 표기된 고인돌 지대다. 잠시 일별하곤 행보를 서둘렀다.
10시 52분.
개념도에 표기된 전망지대에 올랐다. 우측 세계사에서 확성기를 통해 방송하는 염불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듯 했다. 비안개로 전망은 제로다. 시계도 4~50m 내외다. 날이 좋았다면 주흘산 영봉과 주흘산, 운달산도 한 손에 쥘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바위에 우뚝한 노송들이 君子처럼 위대하게 다가든다. 잠시 멈춰 땀을 씻고 우의를 걸쳤다.
10시 57분.
<백두대간 炭項山, 2002년 2월 산들모임산악회>
차돌로 된 자연석에 새긴 월항삼봉 표지석이 공터 정 중앙에 앉아있다. 사방이 開敞된 조망이지만 지금은 예외다. 조금 갑갑하다는 생각이다. 아까부터 50대 주부 일행 한사람이 친구삼아 뒤따라오며 이야기를 걸어왔다. 825봉을 소리 없이 지났다.
11시 15분. 내리막이다.
3분 후 내려선 해발 755m 월항재(=평천재)마루다. 월항재 안부 우측은 세계사로 내려가는 깊숙한 계곡길이다. 다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다. 비바람은 여전하다. 어느 지점은 골바람이 손이 아릴 정도로 서늘하게 불어왔다. 벌써 가을인 우리 곁을 한참이나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흰 송이풀 군락지대다. 카메라에 담았다. 길이 150m 가량의 로프가 걸려있는 깔딱 오르막이다. 비로 인해 바닥이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신경이 모아지는 오르막을 따라 오르면 959봉 갈림길 삼거리다.
11시 40분.
<하늘재 3.2Km, 부봉 1.3Km, 제3관문 4.7Km, 주흘산 2.6Km>
서쪽에 돌올한 釜峰과, 남쪽의 주흘산으로 내려가는 능선이 갈라지는 959봉 3거리 분기점이다. 이 지점에서 대간은 서쪽의 부봉을 지나며 서북방향으로 고개를 잠시 들어올렸다가 마패봉에서 빙점이하로 떨어지는 겨울철의 수은주처럼 갑자기 고개가 꺾여 남향으로 조령관-깃대봉-조령산-이화령-황학산으로 이어간다. 우리가 걸어온 대간은 경북과 충북의 道界가 속리산-추풍령-우두령을 너머 석기봉 아래 삼도봉까지 기다랗고 지루하게 이어갈 것이다.
다음 주 동대문 한솔산악회 산행지(월항삼봉-부봉)를 생각해서 남아있던 리본을 여기까지 매어놓았다. 지난 지리산 산행 때처럼 말이다. 원 타임으로 숨을 돌린 후 계속 주흘산을 향해 남쪽 능선으로 내려섰다. 좌측 등산화에 빗물이 조금씩 침윤하고 있음이 느껴왔다.
11시 52분.
사릿골재다. 능선 좌측을 타고 노타임 행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속보다.
995봉도 노타임이다. 정재근씨 행보도 오늘로서 수준급에 올랐다.
12시 20분.
실제 주흘산 정상인 영봉이다.
<主屹山 靈峰 1,106m>
선착한 부부로 보이는 장년 남자가 정상주라며 소주 한잔을 따라준다. 동행이던 정재근씨는 애써 외면이다. 우중이건만 그에게 카메라를 주며 촬영을 부탁했다. 잠시 내렸던 배낭을 걸쳐 매며 일어섰다. 주흘산은 문경쪽에서 바라보면 학이 내려앉는 형상이다. 학의 머리는 주봉이고 제2관문방향인 꽃밭서들은 학의 목이며 주봉능선은 왼쪽 날개다. 주흘산에서 부봉 구간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구릿대 군락지대를 지났다.
12시 51분.
<주흘산 1,016m>
삼거리 갈림길 1016봉이다. 우측 곡충골로 내려가는 지점이다. 제3관문 방향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은 낭애다. 주흘산 일대는 제3관문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과 이미 선등해 버너와 코펠에 음식물을 끓여먹는 사람들로 온통 북새통이다. 산악회 리본이 보이지 않아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다.
문경군청 등산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있고 떡갈나무에는 판목이 걸려 있다.
"정상이란 그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의미하는데 주흘산 정상은 이곳 주봉으로부터
약50분 거리 북쪽에 위치한 주흘영봉(1,106m)을 가리킵니다"라고 쓰여 있다.
날씨가 좋으면 여우목에서 운달산-단산을 거쳐 오정산으로 이어지는 문경대간과 시루봉- 성주봉-어룡산-작약산, 그리고 소백산과 속리산, 덕유산의 무주리조트 스키 리프트까지 보인다고 한다. 모든 조망을 앗아간 오늘이 서운했다.
오후 1시 4분.
안부에 내려서서 비로소 1985년대 기억이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제1관문 3.5Km, 혜국사 2.2Km, 주흘산 0.1Km, 제2관문 4.2Km>
누릿대, 벌래가 달라붙은 모양인 흰 진범 군락, 짚신나물, 붉은 물봉선이 환하게 깔려있다. 남쪽지점 바위에 섰다. 아래로는 운무가 덮인 천길 낭애다. 구름 위에 떠있는 지금 이 자리가 천국이다.
1시 12분.
대궐터 능선에 내려섰다.
<제1관문 3.2Km, 주흘산 0.5Km>
주흘산 주봉인 1075봉 바로 아래 지곡리로 내려가는 잘록한 지점에 위치한 전좌문(殿坐門,또는 전좌바위)은 주흘산 대궐터 일대에 머물던 공민왕이 파발을 기다리며 앉아 기다렸다는 곳으로 좌우의 바위가 마치 문의 형상을 갖춰서 전좌문이라 한다. 대궐터는 정상부근 능선 못 미친 곳으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머물던 곳이다. 또 연중 물이 나오는 이 곳의「대궐샘」에는 물맛이 좋아 등산객들로부터 인기다. 문경의 한 산악회에서는 매년 여기서 새해 해맞이 객들에게 "주흘산 대궐샘 어수(御水) 복떡국"을 끓여 대접해 오고 있다.
1시 24분.
해발 850m 대궐터 샘터다.
주변은 온통 붉은 봉선화 밭이다. 언뜻 섞여있는 노란 짚신나물 꽃이 퍽 조화롭다. 모처럼 샘물을 한 컵 받아 마셨다. 오늘 산행 중 처음 마시는 물이다. 파이프를 통하여 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조그마한 돌판에
"주흘산 백 번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랴"
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 대궐 터에서는 매년 새해 첫날 문경 산들모임 산악회에서 떡국을 끓여 준다고 한다.
산죽이 카펫처럼 깔린 내리막이 퍽 운치가 있었다.
1시 43분.
<안정암 해발 640m, 주흘산 1.6Km, 제1관문 2Km>
주변은 하늘 키재기를 하는 소나무, 전나무, 떡갈나무들이 들어 차 있다.
만발한 송장풀에 렌즈를 맞췄다. 山두꺼비 한 마리가 마실을 나온 모양이다.
뒤뚱거리며 걷는 품새가 여간 코믹한 게 아니다. 우리가 옆에 있어도 吾不關焉이다.
뱃보 하나는 튼실하다.
1시 58분. 혜국사 바로 아래다.
<혜국사 0.2Km, 주흘산 1Km>
빗줄기가 다소 소강상태다. 벌개미취, 층꽃풀(?), 고추밭을 일별하며 산록 위에 자리잡은 대웅전을 향해 길게 올려다 보이는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갔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대웅전이 있고 후면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 풍광이 빼어나다. 대웅전 주위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전나무, 단풍나무가 적당히 섞여 있어 문경사람들은 이 소나무들을 "주흘목'이라 부르며 아낀다고 한다. 사찰규모에 비하여 요사채가 더 크다.
혜국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 末寺로 경북문경시 상초리 13번지에 위치한 혜국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신라 문성왕 8년(846년) 보조국사 體澄(804~880)이 開創한 천년고찰로 고려말기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이곳으로 몽진한 곳으로도 유명한 사찰이다. 개경에 환궁한 공민왕이 치하로 내린 재물로 가람을 중수하고 공민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惠國)로 초기 이름인 법흥사에서 혜국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조선 고종10년(1873년) 송장-지성 스님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최근에는 1977년 대웅전-만덕전의 단청불사와 금강문을 신축했다. 1980년 이후 현재의 聖叢스님이 주석하여 1989년 가람을 대대적으로 중수했다고 한다. 지금은 수행도량과 지역주민들의 기도처로 이용한다는 <전통사찰총서>의 소개가 있다.
제1관문에서 1.2km 지점에 위치한 여궁폭포.
20m의 높이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져 여름철 더위를 식히는 곳으로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다는 여궁폭포(파랑소, 여심폭포) 관광은 포기하고 갈 之자 이어진 사찰용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섰다. 북한산 승가사 오르막 포장소로와 비슷하다. 포장당시 시멘트 바닥에 갈림질 미비로 빗물이 베인 급경사 커브바닥은 상당히 미끄러웠다. 스님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다. 가느다란 실선에 의지해 만발한 붉은 물봉선을 신비함을 두고 동행하던 정재근씨와 몇 마디 나눴다.
2시 45분, 왕건 세트장에 내려섰다.
관광코스가 된 세트장이 관리가 너무나 허술한 게 눈에 띠었다. 또 세트를 만든 원자재도 지나치게 형식적이거나 1회성이고, 그로 인한 영구성의 결여가 우리들의 한계로 보였다. 제1관문으로 내려가는 좌우 공터엔 드라마 촬영을 위해 목재로 만든 갖가지 전투장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괸리 부실로 전시가 아닌 방치상태다.
3시 3분. 제1관문 주흘관에 닿다.
들머리였던 미륵리-하늘재-월항삼봉-959봉-주흘산-1016봉에서 곡충골로 빠져 주차장에 이르는 11Km 거리에 5시간이 소진됐다. 우중인 관계로 관광객이 뜸했다. 한창이면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일 이곳이 오늘만큼은 한산하다는 생각이다.
조령관문(이 항목은 인터넷 참조)
사적 147호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 차 이곳을 지날 때 성주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조령이라고도 부르는 새재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옛날부터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렸다. 육로보다 수로가 교통의 중심을 이루었던 조선시대, 영남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은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새재를 넘어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한양까지 뱃길로 편하게 갈 수 있으니 그만큼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새도 넘기 어려운 높은 고개라 하여 조령(鳥嶺)이라 하기도 하고, 새(억새의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자란다 하여 새로 생긴 길이라 하여 새재라 불린 이 고개는 통칭 문경새재라 불린다.
이 길을 따라 영남의 무수한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꿈꾸며 서울로 갔고, 또 문경(聞慶)이란 지명도 경사(과거에 급제했다는)를 제일 먼저 듣는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문경새재는 오늘날에도 의미 깊은 고개로 남아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관통하고 문경새재 곁에서 이화령 신작로가 난 뒤에 영남대로의 관문이었던 새재는 한때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문경새재는 포장을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 두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시 예전의 지위를 찾았다. 주막터가 복원되고, 원님이나 관리들이 묵어 가던 동화원 터가 복원되고, 조령 1,2,3관문이 복원되면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더욱이 차량의 통행을 막고 걸어서만 넘게 되었으니 옛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가게 된 것이다.
*주흘관(제1관문)
조선 숙종 34년(1708)에 축성하였으며 초곡성 또는 영남 제1관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면3칸 측면2칸, 협문2개,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3.6m, 폭3.4m, 길이5.4m이다. 좌우 석성은 높이4.5m, 폭3.4m, 길이188m이고 부속산성은 높이1~3m, 폭2~4m, 길이 동측500m, 서측400m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조곡관(제2관문)
조선 선조 27년(1594)에 축성하였으며 중성, 조동문, 주서문으로 불라고 있다. 선조27년에 충주 수문장 신충원이 단독으로 축성한 곳으로 중성이라고도 하며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구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제3관문)과 초곡성(제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만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고 문루를 옛 이름 도동문이라 부르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누각은 정면3칸, 측면2칸, 좌우 협문2개, 8작 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3.6m, 폭3.56m, 두께11cm, 좌우 성벽높이4.5m, 폭3.3m, 길이73m 좌우에 부속된 산성 높이2m, 폭2.3m길이 동측 400m, 서측이100m 이다.
*조령관(제 3관문)
조선 숙종 34년(1708)에 축성하였으며 문경새재 고갯마루에 위치하고있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 34년에 축성하였으나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 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 정면3칸, 측면2칸, 좌우 협문2개,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3.88m, 폭2.9m, 길이6.12m, 좌우 석성의 높이4.5m, 폭2~3m, 길이185m, 부속산성의 높이 2~3m, 폭2~3m, 길이는 동측이 400m,이다
*신립과 조령관문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연파하고 한양으로 향한다. 그들 역시 영남대로를 따라 거슬러 오던 站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신립 장군에게 왜군을 격퇴할 것을 명한다. 신립은 어디서 적을 막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제일감으로 떠오른 것이 새재다. 새재는 넘는 길을 제외한 주변의 산세가 가파르고 험해 새재에 든든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험한 산 위에서 공격을 한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신립이 새재로 향하던 어느 날 밤,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탄금대에서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치고 싸운다면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신립은 꿈속에 나타난 여인의 말을 따른다. 그러나 신립이 이끄는 군사는 노도처럼 밀고 오는 왜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탄금대에서 전멸하고 만다. 이 싸움을 두고 훗날의 사가(史家)들은 새재에 방어막을 쳤더라면 속절없이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새재에 3개의 성을 쌓고 문을 만들었다. 조령 1, 2, 3관문이 그것이다. 성문은 모두 남에서 치고 올라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북쪽에서 잠그게 만들었다.
연애시절 부인과 함께 이곳 관문을 찾아왔다는 장황한 이야기가 곁들였다.
특히 금연 이후 심장이 좋아졌다며 두고두고 반복한 보람이라고 뱉는다. 심장은 내장의 맏형이다. 내장이 튼튼해야 심장이 산다. 따라서 심장이 안 좋으면 장기 자체가 나빠진다. 간, 신장, 담낭 등이 잘 돌아가려면 대장이 좋아야되고, 대장이 잘 돌아가면 심장이 튼튼해진다. 심장병은 게으른 사람에게만 있다는 어느 예방의학자의 강의내용이 생각났다.
4시 15분.
제2주차장을 출발했다. 오전 내려오던 길을 그대로 復碁하듯 되밟는 운행이다.
교대역 원점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시였다.
정재근씨와 화곡역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받은 양경태씨 연락으로 염창동 도시가스 정류장에서 또 다른 회동을 가졌다. 강태영, 김종석씨가 동석했다. 양경태씨가 RTNah 카페제작과 주인을 맡아주기로 약조했다. 기타 잡다한 이야기가 가양동 로터리까지 이어진 시각은 밤 11시 48분까지였다.
귀가 이후 소화불량으로 자정 이후의 밤이 어설프고 고달팠다.
과음을 자제해야 함에도......
*교통 :
-대중교통[동서울터미널에서 30분 간격운행 점촌행 직통(우등)을 타고 문경버스터미널에 서 내려 관문행 버스로 갈아타거나 택시(택시로 5분 거리)를 이용
-서초동 남부터미널~수안보 1일 5회 운행→ 수안보~미륵리~송계리 1일 11회 운행
-승용차[서울-중부, 고속 여주휴게소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591번 도로
-기룡목재-수안보-이화령-901번 도로-하늘재]
*숙식 :
-점촌[대웅장(054-555-4802), 모전장(-555-2650)]
-제1관문매표소 앞 집단시설지구 일대[최신시설의 문경관광호텔(☎ 054-571- 8001) 20여 곳 민박집 다수. 여기서 5분 거리 문경읍 시내에 여관 다수.
-미륵리[돌밭민박(043-845-6486), 포암산민박(-846-6732), 주야민박(-846-1624).
미륵가든(-8486612), 과수원민박(-846-1624)]
-연풍[새재파크(043-833-8902)]
-수안보[수옥파크(043-833-6594), 이화장여관(-833-3657), 산그림호텔(-833-8814),
조령가든(-833-5677),
*기타 : 사문리 매표소(043-846-0672), 문경새재박물관(054-511-5816)
문경터미널(054-571-0343), 점촌터미널(054-555-2540),
괴산터미널(043-833-6594), 상주터미널(054-534-9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