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
이예(李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되어 있는 충숙공(忠肅公)의 기사집(記事集) 보기 |
시조 유래 |
공의 선대는 고려조의 명문이었으나 려말 왕조 교체때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의로운 절개를 지킴으로써 전락하여 향리 신분이 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선대의 충절을 핏속에 간직한 공은 일찍부터 향리로 출사하여 태조 五년에는 二十四세의 약관으로 지주관의 서기관이 되었다. 고려말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는 새 왕조가 교체되어서도 쉬지 않아 세조 一년 五월에는 조정에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함에 이종무로 삼군도체찰사를 삼고 공으로 중군 병마부수를 삼았다. 태종 一년 조정의 명을 받들고 대마도에 가서 납치된 사람을 구출한 뒤로부터 왜인에 대한 대소사는 직접 간접으로 공이 관여하였는데, 태종 十六년에는 멀리 유구국에 가서 왜구에게 납치되어간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왔고 대마도로 납치되어간 명나라 사람도 공의 힘으로 돌려 보내는등 四十여차에 걸쳐 사명을 받들고 우리 백성과 명나라 사람을 수 없이 구출하여 왔다. 왜구 금알의 발본색원책을 강구한 세종 二十五년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의 성립에는 공의 직접 간접의 공이 컸던 것이다. 공은 태조이래 세종조에 이르는 동안 국왕의 신임을 받아 대외관계와 국방책에 허다한 공적을 남겼으며 특히 화통 완구의 무기와 병선 제조법등의 제안하여 국방과 조·일관계에 이바지한 공적이 지대하였다. 공은 태종 一년 벼슬에 등용되어 봉렬대부 예빈소윤 행좌군사직이 되었고 세종 一년 중군 병마부수를 거쳐 세종 三년에는 공패를 받고 절충장군용양위사 상호군이 되었으며 누진하여 자헌대부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세종 二十七년 二月 二十三日 정묘에 七十三세를 일기로 하세하셨다. 영조 十三년에 향사를 세워 공의 영현을 봉안하였고 철종 十四년 상충사의 비석을 원문 밖에 세웠으며 융희 四년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화관광부에서 2005년2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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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 유래 |
조선 때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용기 위사상호군 (折衝將軍龍騎衛司上護軍)에 올랐고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한 예(李 藝) 할아버지를 시조로 한다.
후손들은 시조의 발상지인 학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
지 명 |
학성은 울산(蔚山)의 별칭으로 울산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원래 진한(辰韓)의 땅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하였고, 고려 현종 때에 울주 (蔚州)로 개칭하였으며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별호를 학성이라 하였다. 1397년(조선 태조 6)에 진을 두었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使)를 겸임하였으며 1404년(태종 3)에 울산이라 개칭하였다. 1931년에 면에서 읍으로 승격 하였고, 1962년2월에 시로 승격하였고, 97년7월에 울산광역시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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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울산읍성(蔚山邑城)
읍성은 고려 우왕 10년(1384)에 왜구로부터 읍인(邑人)을 보호하고자 이문화(성균관사예)가 성을 쌓기 시작하고, 지을주사 김급이 완성했다. 그 후 조선 태종 16년에 증축하고 성종 8년(1477) 10월에 성둘레가 3639척(尺) 성높이 15척으로 완성했다. | |
가문 소개 |
예(藝)의 손자 직겸(直謙)은 군자감 판사를, 직유(直柔)는 사재감 부정을, 직강(直剛)은 훈련원 봉사를 역임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겸수(謙受)는 나라에 공이있어 원종훈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남강사(南岡祠)에 제향되었다. 현담(玄聃)은 문장과 학행으로 당대에 뛰어났으며, 양오(養吾)는 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반계집(磻溪集)을 남겨 학성이씨를 빛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때 6의사(경연 인상 겸수 겸익 봉수 열)를 배출해 충의의 가문으로 더욱 빛난다. 이경연(李景淵)은 임진왜란이 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때는 곽재우와 함께 경남창녕의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 큰공을 세워 경성판관에 임명되었다. 이인상(李仁常) 역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전투에서 왜적과 분전하여 공을 세우고 도산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며, 이겸수(李謙受), 이겸익(李謙益)형제는 당시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정세탐정에 큰공을 거두어 이겸수는 정주판관을 제수받았고 이겸익은 현종때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냈다. 이봉수(李鳳壽)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진중에서 순직하여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녹봉되었다. 이열(李說)은 전란이 평정된 뒤 전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조선 현종때의 대문장가 이동영은 국난에 전공을 세워 관직을 받고도 이를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함께 노닐었던 할아버지 이한남의 뜻을 기려 현종 3년 봄 태화강변에 이휴정을 지었다. 학성이씨는 이외에도 이양오(李養吾), 이근오(李觀吾)와 이준민(李俊民)같은 문장가들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이어왔다. |
계 파 |
곡강파(曲江派) 농소파(農所派) 서면파(서면派) 월진파(越津派) 청량파(청량派) |
인 구 |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성이씨는 남한에 총 4,625가구, 18,8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11월1일 실시한 전국인구조사 현황 결과를 보면 6,615가구에 남자 10,965명 여자 9,999명으로 총 20,964명이며, 15년 동안 가구수 1,990(43.0%)가구 인구수 2,905(11..%)명이 증가 하였으며, 인구수에 비하여 가구수의 급격한 증가는 핵가족화 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총 286개 성씨와 4,179개의 본관이 있고, 이씨는 283개의 본관이 있으며 우리 학성이씨는 그 중 29위 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 성씨 본관별 가구 및 남녀인구 현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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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성 촌 |
경북 포항시북구 흥해읍 덕성리 울산광역시 울주군 농소면 신천리 울산광역시 북구 신천동,약수동,달천동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경남 양산시 웅상면 주남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