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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적정기술
1.
6년 전에 전남 장흥으로 귀농하면서 처음 한 일이 가족이 함께 살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쌀부대에 흙을 담아 짓는 ‘흙부대집’을 짓게되었습니다. ‘흙부대집’은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저의 첫번째 적정기술인 셈입니다.
귀농하게 되면 자급, 자족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그 첫번재 대답이 ‘집짓기’였지요. 건축 방법은 다양하지만 산업적 건축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생태적인 건축 방법을 선택한 겁니다. 생태건축 방법도 다양한데 제가 흙부대집을 선택한 이유는 ‘내 손으로 직접 집짓기에 적당한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딱 맞는 답변이었죠. 물론 ‘조금이라도 돈이 적게드는 건축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도 그 대답은 흙부대집이었죠. 다른 영역의 ‘적정기술’ 역시 일종의 ‘대안’을 묻는 이들이 찾아내는 응답입니다.
2.
두번째 접한 적정기술은 ‘로켓화덕’입니다. 농촌에 살다보면 큰 가마솥에 곰국을 끓이거나 시레기를 삶거나 , 장을 만들기 위해 콩을 삶는 등 화덕을 사용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 화구만을 남겨둔 채 시멘트 블럭을 원형으로 둘러쌓거나 드럼통을 적당히 잘라 이 위에 솥을 얹어서 사용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장작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어찌어찌 장작을 마련한다해도 나이들면 도저히 못할 일 같더군요. 화목 준비하는 일이 녹녹치 않습니다. 저도 어깨 넘어로 본 대로 돌과 흙을 이용해서 화덕을 만들어봤는데 연기도 심했고 불도 잘 붙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보다 좋은 화덕을 만들기 위해 효율좋은 화덕을 찾다보니 해외 환경단체들이 보급하고 있는 ‘로켓 화덕’를 알게되어 만들어봤는데 여간 효율이 좋은 게 아니었어요. 나무 연료가 1/6 정도로 줍니다. 열효율도 좋았지요. 이때부터 전 세계의 화덕 자료를 모으고 철판화덕, 피자화덕, 가마솥 화덕들을 만들었는데, 로켓화덕과 중국의 개량화덕을 응용해서 만든 이중열기고리를 가진 가마솥 화덕은 귀농자들을 중심으로 곳곳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개량화덕 역시 ‘화목 사용을 줄이고 산림훼손을 조금이라도 줄이면서 열효율이 높은 화덕은 어떤 구조일까?’, ‘저렴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무하는 수고를 좀더 줄일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의 결과였습니다.
적정기술로 화덕을 말하면 시시하게 생각할 이들이 있을 지 모르겠네요. 하긴 국내에 적정기술 붐이 일고 있어요. 국가와 대기업이 지원하고 있는데다 적정기술 관련 국내 단체들만 100여개가 넘어요. 그런데 대부분 국제원조활동에 ‘적정기술’을 활용합니다. 많은 단체가 선교단체이거나 자선단체지요. 물론 소수의 기술연구단체도 있지만 연구의 결과물 역시 제3세계를 위한 기술입니다. 인도적 지원이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 편으로 적정기술이 정부의 외교와 대기업의 자원개발, 시장개척을 위한 마케팅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 적용할 적정기술은 무엇일까?’ 묻고 찾고 적용하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에너지, 자원, 마을 공동체, 빈곤의 해결책 운운하면서 대부분 산업자본주의화 된 국가들은 자신의 사회에 적정기술을 적용하려 하지 않았어요. 여기에 ‘오만’이 숨어 있습니다. 적정기술은 자신의 구체적 생활의 필요로 부터 시작하는 기술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술문화에서 그 변화 요구를 포착하고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기술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물어야합니다. ‘제3세계를 위해 만들어진 저 많은 적정기술들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활용될 수 있는 기술은 무엇일까요?’
3.
제가 사는 집은 기름보일러와 축열식 벽난로로 난방을 해결합니다. 처음에는 기름보일러만 사용했는데 귀농할 때 한 드럼에 15만원 하던 기름값이 지금은 27만원 정도로 올랐어요. 치솟는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었죠. 에너지위기는 사회적, 환경적 이슈에서 제 삶에 닥쳐온 생활 이슈로 바뀌었습니다. ‘기름값이 더 올라가면 어떡하지?’, ‘그래 석유정점에 다다른 게 분명해, 에너지 위기가 본격적으로 닥쳐오고 있는데 어떡하지. 무얼 준비해야 하지?’ 거창하게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에너지 위기의 대안’ 운운하진 않겠습니다. 삶에 닥쳐온 불안감에 대한 대안으로 제가 찾은 기술이 인류가 수 만 년 사용해온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화목난방이었습니다. 시골 뒷산에 간벌한 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었지요. 사람이 참 이기적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화목난로와 보일러, 벽난로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에 보급된 화목난로나 화목보일러가 효율이 아주 낮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그 이후 화목난로나 화목보일러를 개량해서 열효율을 높이고 나무연료 사용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기 시작했어요. 작년 겨울 아내의 생일 선물을 핑게로 본채에 축열식 벽난로인 러시아 페치카를 만들었습니다. 그 덕에 기름보일러가 보조난방 수단이 되고 벽난로가 주난방 수단이 되었습니다. 화목난로든, 화목보일러든, 벽난로이든 한 편으로는 기술적 완성도와 효율을 높여가면서도 ‘개인 또는 공동체가 익힐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서 좀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어설프지만 적정기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화목난로나 보일러, 벽난로 모델을 제시하기 시작했어요. 이 두 가지 질문에 적당치 못한 기술은 종종 보편적 보급이라는 점에서 실패하는 사례가 많지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현대산업기술문명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웬델 베리[온삶을 먹다, 지식의 역습]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나름의 기술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적정기술에 대해 물어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
하나, 새로운 도구는 이전 것보다 경제적이어야 한다.
둘, 규모에서 이전 것에 비해 작아야 한다.
셋, 이전 것보다 분명하고 명백하게 더 작업 효율이 좋아야 한다.
넷, 이전 것보다 에너지 소비가 적어야 한다.
다섯, 가능하면 인간의 노동력이나 태양에너지와 같은 자연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여섯, 보통 사람들이 기본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수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 가능하면 집 가까운 곳에서 구입할 수 있고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여덟, 유지나 수리를 위해 다시 맡길 수 있는 작은 개인 가게나 상점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아홉, 가족이나 공동체 관계 등을 포함한 기존의 어떤 좋은 것들을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4.
내년에는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인 봉화 적정기술센터의 이재열 소장이 소개하고 있는 ‘햇빛온풍기’를 지붕에 올리려는 데 누구나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기술이예요. 최근 정부는 전국 여러 마을을 에너지 자립마을로 선정하면서 마을마다 수십억씩 지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 보면 마을 사람들 집은 바뀐게 없어요. 영혼이 없는 건축업자들과 공무원들의 합작으로 마을에 큰 ‘센터 건물’만 들어서요. 태양광발전, 태양열온수, 지열, 풍력, 패시브하우스 등과 관련된 건축업자와 에너지 시스템업자들이 이런 것을 만들고 떠나면 그곳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산업적으로 만들어진 온갖 에너지 시스템이 적용된 센터가 만들어져도 마을 사람들의 낡은 집들은 여전히 그대로 난방비 많이 들고 전기세 많이 드는 집들로 남아 있습니다. 가가호호가 모여 마을이 되는 거예요. 개인들의 집집이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개량해야 해요. 개개인들의 집이 바뀌지 않고 에너지 자립마을이란 ‘정책 관광’을 위한 수단입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마을이, 개인이 주체가 되어 제 손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에너지 적정기술은 무엇일까?’ 묻기 시작했고, 그런 사람들과 단체들이 모여 ‘지역에너지 자립을 위한 적정기술 네트워크’란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적정기술은 끊임없이 ‘기술의 주체성’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5.
지금 거의 완성 단계인 사랑채에는 개량식 구들을 놓을까해요. 전통 구들은 사실 연소효율이나 열이용률, 연료소비 차원에서 그닥 효율좋은 난방장치만은 아니예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개선할 여지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욕 먹겠지요. 전통 구들에 대해 조선 말의 북학파 선비들도 신랄하게 조목조목 개선점을 지적했습니다. 옛날에는 방습, 단열재, 내화재가 없었기때문에 전통구들은 연소효율이 높지 않았고, 열손실도 제법 컸지요. 전통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며 보존하고 고수만 하는 것을 넘어서야 해요. 전통을 현재화해야 하죠. 지금 전통기술을 현재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합니다. 새로 다가올 세대를 위한 기술, 미래의 전통기술로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서양 벽난로 이론과 전통 구들을 결합해서 개량구들을 놓기 시작했고, 지속적인 개량을 시도하고 일정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리 호이나키가 그의 책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통해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무엇이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자립적인 농부였던 아버지”를 회고합니다. 저 역시 그런 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자립적인 농부에게 필요한 농촌 생활기술의 보고는 전통기술입니다. [농업이 문명을 움직인다]를 통해 요시다타로는 “전통기술 가운데는 보전할 가치가 있는 많은 기술이 있다. 근대적인 진보를 거절하지 않지만 고대의 방법이 더 알맞는다면 그걸 활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통기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UN은 전통기술의 가치를 새롭게 주목하고 ‘전통지식세계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전통지식세계은행을 설립하면서 발표된 글인데 잠깐 소개해보죠.
“전통 기술은 우리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켜온 가장 근원이 깊은 인류 고대의 지식과 생활 상의 필요를 해결하면서 지구의 지표 위에 이루어진 모든 문화적 전경과 환경을 관리하고 창조해온 토착 기술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 지식과 기술들은 적은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하면서 발전할 수 있게 하는 해결책이자 환경 변화와 위기, 재앙에 유연 하게 대응할 수 있는 다기능의 대안이다. 환경 파괴와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전통 지식과 기술은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그 잠재성을 확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환경과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지 알려주고 있다.”
적정기술이 에너지와 자원, 환경 파괴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라면 그 뿌리는 토착기술, 전통기술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전통기술이야말로 전통기술의 보고이죠. 다만 우리의 전통구들처럼 개선할 점들이 있어요. 전통기술을 개선해서 현재화시키는 작업,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통기술로 만들어 가는 작업의 결과가 적정기술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떤 기술을 물려주어야 할까?’ 진지하게 묻고 탐구해야 합니다.
“토착기술은 제한되고, 다각적이며 그 기술이 등장한 문화와 개인들의 특성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현대기술은 모든 토착적이고 개인적인 조건을 기술 자체의 이미지로 바꾼다. 그것은 점차 획일화되고 거대해진다. 개성적이었던 토착사회에 소외와 박탈을 낳고 사람들을 원자화시키며 기술을 상실한 단조로운 기술문명의 이미지로 바꾼다.”
기술지배문명에 대해 비판적인 데이빗 왓슨이란 사람이 한 말입니다. 이분의 통찰에 귀 기울여보아야 합니다. 기술지배사회에 반대하며 폭넓은 다양성과 개인적 삶에 의해 변주되는 사회를 만들어갈 새로운 토착기술은 무엇일까요?
6.
적정기술 붐이 일면서 과거의 IT 벤쳐처럼 적정기술을 주제로 한 사회적기업을 만들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 친구들한테 적정기술에 대해 근본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네요.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한편으로 인도를 정치경제적으로 식민지배하고 있던 영국이 인도에 도입한 섬유산업기술을 간디는 반대했습니다. “거대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 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 고 간디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대기계의 이러한 경향에 저항할 수 있는 기술은 무엇일까요? 그는 “그것은 물레다.”라고 답했습니다. 물레는 전통기술을 상징합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저 파괴적인 거대기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역시 의심해야 합니다. ‘저 거대기계에 저항할 수 있는 기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시대 원전은 권위적으로 계층화되고 관료화되고, 권력화된 거대 산업기술을 대표합니다. 우리는 간디가 물었던 것처럼 ‘저 거대산업기술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적정기술의 아버지 슈마허 역시 적정기술에 대해 레디컬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대규모 기계화는 인간이 살아 있는 자연과 진정으로 접촉하는 것을 불가능 하게 만든다. 사실상 폭력, 소외, 환경 파괴와 같은 근대의 가장 위험한 경향을 지지한다. 경제주의라는 우상숭배의 필연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대규모 기계화에 저항하는 기술은 무엇일까요? 슈마허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중간기술이다. 호미와 트랙터의 중간에 해당하며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술, 작은 규모로 생산 가능하며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돈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저항의 기술’입니다. ‘경제주의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한 기술입니다. 적정기술이 회자되고 있지만 이 점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적정기술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더라도 적정기술의 근본적인 ‘저항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7.
웬델 베리의 이야기를 또 들어보죠.
“산업 기술은 적절한 규모와 응용의 타당성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파괴 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의 기준은 장소와 생물의 개별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의 용량에 의해 결정된다. 산업기술은 자기 자신을 생명체에 적응시키는 대신 생명을 단순한 기계적 과정이나 화학적 과정으로 취급하면서 생명을 자기 자신에 적응시키려 한다. 산업기술은 사랑, 상상력, 친근감, 연민, 두려움, 공포와 같은 감정의 작용을 억제한다. 일상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고 노동의 과정은 단축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잃게 된다.”
귀농해서 약간의 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벼를 수확할 때 요즘은 사용되지 않고 있는 중고 4조식 컴바인을 귀농자들과 함께 사서 아랫 논을 수확할 때 이용하고 있습니다. 윗 논은 마을 귀농자들과 일종의 협동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낫으로 베고 경운기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반자동식 탈망기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완전 수동식인 일명 왕왕이라 불리는 손발 탈곡기도 사용해보았는데 낙곡이 너무 많기도 하고 지나치게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 다른 농가에서는 완전 자동식 컴바인을 사용합니다. 수동에 가까울수록 여러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 합니다. 반 자동식으로 수확할 때는 귀농자 가족들이 모두 나와서 함께 일합니다. 4조식 컴바인만 해도 최소 3~4인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협동하게 되고 일이 끝나면 함께 밥을 먹으며 웃고, 일하며 헛소리도 해가며 얘기 꽃을 피우고 노래도 한가락씩 뽑아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마을 어르신들이 부러워하더군요. 그러나 완전 자동식 컴바인으로 수확하면 운전자 혼자 일을 다 해낼 수 있습니다. ‘협동’이 ‘자동’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거대기계의 반대는 또 다른 기술이 아니라 ‘협동’입니다. 적정기술이든 그 어떤 기계이든 마을의 협동을 유지할 수 있고, 협동에 기반한 소통과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지 생각해봐야합니다.
기계의 본질은 인간 개인의 노동력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 있습니다. 도구나 기계를 이용하면 한 사람이 할 수 없던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계가 점점 거대화되면서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 또는 거대 산업기계 시스템을 통제하는 사람의 힘을 강화하고 권력화합니다. 심리에 영향을 끼칩니다. 대형 트럭이나 버스 운전자들이 난폭하게 운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차를 몰면 자신들의 힘이 그 만큼 커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거죠. 거대기계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심리가 변합니다. 자신들을 권력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사실 권력을 쥐게 됩니다. 농촌에서 대형 농기계를 여러대 가진 청장년들 중에는 종종 자신들이 어떤 권력을 쥐고 있는 듯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농기계를 가진 청장년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큰 눈으로 보면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관계들이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노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대형 농기계를 가진 이들에게 읍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버린겁니다. 대형 농기계를 가지고 있으면 수만평 농지를 임대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됩니다. 귀농자들이 들어와 마을 구성원이 되면서 농토를 갖게 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노인들이 돌아가시면 마을의 농토를 독차지해서 대형 농기계로 광작을 할 수 있는데 새로운 경쟁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생각하게 됩니다. 대형 농기계의 도입으로 마을의 협동의 문화는 사라지고 있고 권력과 독점의 관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물론 농촌이 고령화되고 농촌의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농기계없이 농사를 지으라 강요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농촌인구를 늘리고 협동하는 마을을 되살리는 일,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노동력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농법의 개발,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면서도 협동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농기계나 도구 등 여러가지 차원에서 대안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단지 대안적 기계나 무조건적인 기계사용을 거부하는 것만이 대안이 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경지정리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농기계에 맞게 전통적인 논 200평 한 마지기, 밭 100평 한 마지기로 구획되어 있던 농지들을 1천평 정도 통합해서 그 규모를 확대해 놓았습니다. 이 규모는 사람의 힘으로 감당 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한 마지기는 한 가족이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 중간 참이나 식사 전까지 지치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는 일량을 전제로 삼고 있는 듯 합니다. 인간적 규모(Human scale)가 농기계의 도입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인간의 육체적 조건과 리듬이란 게 있는데 여기에 맞는 인간적 규모가 우리 삶의 곳곳에서 기계의 도입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있습니다. 적정기술은 인간적 규모, 인간적 리듬을 복원하는 기술이어야 합니다.
8.
25년 전에 저는 울산의 현대정공과 현대자동차에 위장취업해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 맡은 작업은 컨베어시스템에 계속 실려 나오는 자동차 유리의 고무 벨트를 끼우는 작업이었는데 도저히 그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컨베어 속도 보다 빨리 작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치 기계처럼 작업하고 있는 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현대자동차에서는 종종 컨베어벨트 속도를 이유로 잦은 쟁의활동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공장의 관리자는 컨베어벨트 속도를 점점 높였습니다. 그 만큼 단위 시간 당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더 많은 차를 생산할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말 쉴 틈 없이 그 속도에 맞춰야 했지요. 조금씩 빨라져가는 컨베어속도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안전사고 등 긴급 시에만 누르게 되어 있는 컨베어벨트 정지 버튼을 눌러버리면서 벌어지는 임시파업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 파업의 본질은 생산성, 경제성만을 따지는 거대산업 기계의 속도에 대한 거부와 인간의 리듬을 되살리고자 하는 저항입니다. 이러한 저항의 속성이 적정기술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기술의 마약과도 같은 효과-효율, 편의, 속도, 규모, 성장-에 중독되지 말고 어떤 기술, 어떤 기계를 선택하면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합니다. ‘어떤 기술을 선택할 것인가?’, ‘기술의 한계는 무엇이고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
9.
웬델베리는 “산업기술은 노동자에게서 자기 노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잃게 만든다.”고 지적했습니다. 분업화된 산업기술과 거대기계 속에서 노동자이든 소비자이든 우리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건들과 물질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리처드 세넷은 저서 [장인,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에서 “사물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눈이 아닌 손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Catch(잡다)’가 ‘이해하다’의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점을 그는 환기시킵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에서도 ‘이해하다’란 의미로 사용되는 ‘파악(把握)’의 본 뜻은 ‘손으로 잡아 쥐다’ 입니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머리만 가지고 않되요. 손으로 만지고 모듬고 일해야 진짜(real) 현실을 알게 됩니다.
현대인들, 특히 청소년들은 지나치게 간접적인 정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합니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가상화된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머리 속에 관념적인 물질세계를 재구성하죠.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과의 우종민 교수는 “인간의 뇌는 현실과 언어, 현실과 생각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수 많은 실험 결과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라고 지적했어요. 대부분의 인식오류는 언어를 듣는 귀의 한계이자. 우리 뇌의 오류 때문입니다. 눈에 대해선 더할 나위 없겠지요. '착시'는 흔한 현상이고 뇌는 시각 정보를 선별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예요.
저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논생태의 충만한 생명을 느낄 수 있었어요. 손으로 김을 메고, 밭을 갈고, 직접 집을 짓고, 화덕을 만들면서 그제서야 책이나 컴퓨터의 정보로 알 수 없는 진정한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어떤 감동과 통찰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있어요. ‘우리가 진짜 물질세계를 긍정하며 알고자 한다면 마지막 남은 희망의 기술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손으로 구현되는 기술’이 아닐까요? 손 노동과 수공예를 우리 문명 속에 복원하고 그 가치를 근본적으로 다시 평가해야 합니다.
귀농하면서 저와 아내가 지금까지 두고 읽고 있는 핸드 메이드 라이프(Handmade Life)의 저자 윌리엄 코퍼스웨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공예술에 꽤 유능한 장인이 된다면 우리가 갖는 이해의 폭은 엄청나게 확대될 것이다. 삶의 밑바닥에서 부터 사람들이 자기 손을 충분히 활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사회적으로 우리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디자인과 물건들의 수준이 높아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0.
애플의 신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수 많은 젊은이들이 줄을 서고 있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최신의 전자기계를 가장 먼저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사실은 매스미디어를 통한 마케팅적 쇄뇌의 결과입니다. 저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데 단지 음성통화와 문자 송수신 기능을 주로 사용해요. 비싼 기기값을 지불하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구식 핸드폰만 있으면 되지요. 그러나, 이제는 구식 핸드폰을 구할 수 없어요. 기술, 기계에 대한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에너지 이용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는 핵발전이 강요되는 사회입니다. 곳곳에 이와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기술선택권이 제한된 편향된 기술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랏!’라는 노래를 알고 계실거예요. 그 노래말처럼 현대과학기술 사용을 멈추는 공간과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일종의 현대기술이 제한된 ‘기술적 게토’ 공간입니다. 어떤 공간, 마을, 지역, 건물, 방을 기술적 게토 공간으로 만들고 그곳에 어떤 기계, 기술을 가지고 들어갈 지 아닐 지를 ‘검문’해보고 선택하는 절차를 갖도록 만듭니다. 그곳에서 현대기술이 제거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생활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되살리고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러한 통찰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적정기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술게토의 아이디어는 볼라빈 태풍 피해로 4일 동안 전기가 끊겼던 나 자신의 시간과 공간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전기가 끊기자 집 안을 차지하고 있던 전동음, 전자음, 기계음, 현란한 빛이 사라지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새롭게 살아오는 풀벌레 소리, 풀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마당을 밟는 강아지 소리, 어떤 답답함과 모순되는 깊은 평안함, 사용할 수 없는 수세식 변기,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식수...급격한 변화에 대응한 임기응변의 경험들. 전기와 동시에 작동을 멈춰버린 현대적 기기에 의존한 생활의 취약함에 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은 마치 건강을 위해 금식, 단식, 소식하듯 우리 삶의 온전성을 위해서도 기술과 기계에 대한 의도적 회피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적정기술은 같은 맥락에서 기술을 근원적으로 묻는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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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적정기술에 대해 가져왔던 생각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했네요. 저는 사실 제가 지금 제 활동을 통해 소개하고 있는 기술들이 적정기술인지, 적당기술인지, 농촌생활기술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계속 질문합니다. 현대 산업기술지배 문화는 도대체 어디부터 문제일까. 문제가 있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기술의 한계는 무엇이고 어떤 기술을 선택해야 하는가? 모든 삶의 영역에 환경처럼 깃든 기술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 삶을 바꿀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제가 소개할 수 있는 기술들은 몇 가지 되지 못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이후의 세상을 살아갈 다음 세대들이 그 해답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앞선 세대들은 단지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현대의 기술문명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생태적 문명과 사회를 위한 새로운 기술을 찾아내고 실험하고 공유하고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교육이 필요합니다. 기술교육은 인문학이자 사회학이 되어야 하고, 과학이자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공돌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 세넷의 말대로 ‘생각하는 손을 가진 장인’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술교육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인문학적 기술교육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중요한 교육의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저는 끊임없이 기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하게 됩니다. 질문하는 적정기술은 그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