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을 하다보면 이따금 갈등에 젖는다.
하프를 뛸까, 아니면 내친김에 풀을...
생수를 마실까 이온음료를 마실까, 바나나를 먹을까 쵸코파이를 먹을까,
완주등정에 나선 달리기 전사들중에는 달리기를 재촉하면서도 5km마다 바쁘게 두리번 거리는 경우를 본다. 갈등의 증거다.
개인적으로는 바나나보다는 쵸코파이를 먹는다. 별 이유는 없다. 다만 바나나가 귀하던 시절, 어릴적 할머님의 말씀 때문이다.
"사내는 물컹스런 것 먹으면 힘 못써. 그저 알밤이다 호두다 잣처럼 단단한 놈을 먹어야 힘쓰는 법이야"
그 "단단한 놈"의 의미는 먼 훗날 알게됐다.
호두를 까먹으며 달릴 수도 없고 해서 마지못해 쵸코파이를 먹지만 침만 닿으면 스르륵 녹으니 이 또한 할머니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소변의 문제도 마라토너에게는 이따금 갈등을 던진다.
버릴까 말까, 아냐 힘이 드니까 소변을 핑계로 잠시 쉬고 싶은 것이야, 아니야 정말 못참겠어, 아니야 보스턴을 가려면 참고 달려야해...
누가 보든 말든 길옆에 비켜서 바지 내리는 경우도 순간적인 판단이 아니라 갈등의 결과라는 생각이다. 힘이 모두 소진돼 달리는 육체가 나인지 아니면 그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마음이 나인지 구분이 안갈때쯤이면 정말 소변을 핑계로 잠시 쉬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어느해 겨울 독살스럽게 춥던날 이 같은 갈등에 젖다가 그만 낭패를 본 일이 있다.
그 시절 혹한기 야외훈련을 생각하며 여의도나루에서 동호대교간을 왕복키로 하고 달리는데 돌아오는 길 철탑쯤에서 갈등에 싸이기 시작했다. 반포대교 오르막쯤인가에 왔을 때는 이미 갈등의 시기가 훌쩍 지나 소변이 발등의 불로 다가섰다. 날씨탓인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전같으면 예비신호가 오면 어느 정도까지는 참을 수가 있었는데 직방으로 방광이 발광을 시작한다.
어쩐다 어쩐다 하면서도 어느새 눈치빠른 눈은 사방을 휘둘러 으슥하고 후미진 곳을 살핀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슬며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별안간 뒷덜미가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불현 듯 역도부시절 화장실이 아닌곳에서 서서쏴를 하다 송낙호 형에게 혼났던 일이 생각났다.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그 시절의 낙호형이 음흉한 미소를 감춘채 뒷덜미를 잡으려는 것이 아닌가? 다급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져 시공을 초월해 낙호형의 허상이 보인 것이 아닐까? 아니다 아니다를 거듭 외치며 어찌 지금 이 마귀의, 알통의 덜미를 잡을 수가 있는가 하며 계속 후미진 곳을 향했다. 그러나 뒷덜미는 여전히 간질간질 했다.
결국 도리없이 돌아서야 했다.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 아닌가? 으슥하고 후미진 장소는 모두 가 유용한 곳이 아니던가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티켓이 뭔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잡는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어도 기초질서란 놈이 알통의 덜미를 잡다니...
그러나 잠시도 잡념에 젖을 겨를 없이 꽉찬 방광은 발광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 좋다. 저기 저 고개만 넘으면 반포고수부지 늘어선 것이 화장실이 아니던가. 참고 달리자. 터질듯한 수도꼭지를 걸어 잠그고 난생 처음 마하의 속도로 달려봤다.
이 추운 날씨에 누가 화장실에 들어 앉아 있겠느냐는 생각에 노크는 생략키로 했다.
당도하기가 무섭게 만만해 보이는 화장실 하나를 골라 문고리를 잡아 끌었다. 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릴 듯 열릴 듯 해도 문은 안 열렸다. 순간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자리도 아름답다던데 몹쓸 사람들이 공중화장실을 함부로 사용해 문을 뻑뻑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 저것 따질 형편이 못된다. 힘껏 당기자. 온 몸의 기력을 팔뚝으로 모아 힘껏 당겼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화장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한 아주머니가 엎어지시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는 문고리잡고 힘겹게 버티다 역도로 단련된 알통의 무지막지한 힘에 이끌려나와 바지 올릴틈도 없이 나뒹구신 것이다. 이렇게 황당하고 민망하고 경망스럽고 죄송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민망하고 송구스러우면 마음 따로 말 따로 따로국밥처럼 사과는 커녕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머니 남자화장실을 사용하시면 어떻게 해요?"
아주머니는 고개도 못들고 바지를 끌어 올리시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달아나셨다. 죄 진놈은 따로 있는데 아주머니가 놀라서 출행랑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왕 내친 일 따질 겨를도 없이 화장실로 뛰어들어야 했다. 방금전의 해프닝에 대한 기억은 가신듯 사라지고 배뇨를 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숨을 길게 내쉬으며 허리춤을 추슬렀다. 시원한 배뇨의 즐거움이 벌써부터 떠올려졌다. 그 시원함이란 사막에서의 호프500cc의 즐거움과 맞먹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 즐거움을 맛보려면 손쉽게 바지만 내리면 된다. 바지를 내리자. 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지가 내려지지를 않는다. 그렇지 얼마전에 고무줄을 끈으로 바꾸었지. 그래 끈을 끌르자.
주섬주섬 두손이 허리춤을 헤맨다. 어 그런데 역시 예감이 이상하다. 급속해체를 위해 고리가져 있어야 할 끈의 감각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이런 서둘러 겹겹이 껴입은 웃옷을 배꼽 위로 잡아올리고 고개를 숙여 끈의 고리를 찾았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배를 움켜잡고 달려올 때 고리가 풀러져 옹매듭이 지어졌던 것이다.
야속하게도 방광이란 놈은 조금도 참아줄수가 없다며 비상수단이라도 강구하라고 거세게 주먹질을 해댄다.
순간 더하기가 안되면 빼기를 하라는 누군가의 말이 불현 듯 스쳤다.
부랴부랴 두 손끝을 입에 물고 장갑을 벗기가 무섭게 허리를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움켜잡아 빼내려고 했다. 그 순간 요망하게도 황새가 긴 모가지를 시원스럽게 빼내는 택도 없는 상상이 떠올려진 것은 왜인지 모른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뿐 현실은 너무나 야속했다. 추운 날씨에 자라 모가지 움추려지듯 기어들어간 녀석은 아무리 잡아끌어도 전설따라 3cm다. 고무줄도 한계가 있는데 하물며 살고무줄이라고 무한대로 늘어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잡아빼면 뺄수록 고통만 더해 갔다. 아쉬운대로 1cm만 더 길어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가 있을텐데 원통하다 그놈의 1cm...
고개숙여 내려다 보니 흉물스럽기는 왜그리 흉물스러운지 모르겠다. 개량종도 아닌 조그만 재래토종 밤톨 하나가 허리춤에 걸려있는 형상이다. 힘도 없는 아이가 턱걸이를 겨우 한번을 하고 철봉에 턱을 걸고 힘겹게 버티며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타고난 외눈박이 주제에...
그 순간에도 방광은 주먹질을 해댔다. 이번에는 허리를 구부려 고개를 숙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놈을 빼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또 한번 시도하려는 순간 세상에 보이는 모든 영상이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녹화테입이 끊어져 주사선이 "치지직"대듯 그림이 사라진 것이다.
힘도 없고 맥도 없는 놈, 예상은 했지만 방광의 주먹질에 결국 굴복하고 만 것이다. 그 것도 허리 구부리고 고개숙여 내려다 보는 순간 방광의 팽창에 맞서지도 못하고 수도꼭지를 터트리고 만 것이다. 뜨끈한 물이 카메라 렌즈까지 적셨으니 영상 녹화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영상이 지워진 것 까지는 좋았다. 왜 그리 맵고 재채기가 나오는지 머리가 띵했다.
장갑을 어설프게 물고 있던 입으로 흘러든 것은 뱉으면 그만인데 고개숙인 코로 흘러든 물은 역류를 해서 기도로 갔는지 재채기를 촉발시켰다.
학창시절 데모대에 휩쓸릴 때 물대포를 맞아도 이토록 맵지는 않았다. 수중침투훈련시 집채만한 파도가 덥쳐도 이 만큼은 맵지 않았다.
"으지지지지 에취"
가슴팍을 흥건히 적시고서야 억지로 억지로 수도꼭지를 서둘러 걸어 잠그고 나머지 잔뇨 처리에 골몰한다. 이판사판으로 허리춤을 내리 밀었다. 허리끈이 살속으로 파고드는 고통이 느껴질때쯤 이번에는 뚝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바지가 흘러내려 종아리에 걸렸다. 허리끈이 끊어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서둘러 잔뇨를 처리했다. 시원했다.
잠시 멍한히 서있으니 오늘의 해프닝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은 죄값이다. 아주머니 강제로 끌어내 엉덩이 훔쳐본 추행죄, 무릅까지게 한 치상죄, 특정범죄 가중 처벌의 결과인 것이다.
순간 범죄라는 말이 떠올려지자 이번에는 두려움이 온 몸을 감쌌다. 바지를 급하게 추슬려 올려 허리춤을 한손으로 잡고 화장실 문틈으로 밖을 조용히 살폈다.
혹시 그 아주머니가 순찰중인 경찰을 데리고 오신 것은 아닌지 겁이 났던 것이다. 죄를 물으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군시절에는 헌병도 무섭지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겁이나지...
바지 흘러내릴까 두손으로 움켜 잡고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화장실문을 열고 나와 사방을 살폈다. 눈이 부셨다. 가슴팍에는 어린시절 이불위에 자주그렸던 세계지도 처럼 한폭의 샛노란 수채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날따라 새하얀 티셔츠를 겉에 입었기에 수채화는 빛을 발했다. 날씨탓으로 수분공급이 어려워 워터로딩을 제대로 못한탓에 더욱 샛노랗게 물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번의 경악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화장실 표시가 대문짝만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남자용 소변기가 없어서 어째 이상타 했는데 역시 뻔뻔스런 놈, 그러면서도 아주머니에게는 남자화장실을 사용하지말라고 했으니 아주 못된 놈이 아니고서야...
이지경에 이르니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럴때는 도피 및 탈출, 출행랑, 36계로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무장구보에 천리행군, 마라톤을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의도 나루까지는 줄잡아 6km, 풍귀터널까지는 대략 2km, 좋다. 앞 뒤 볼 것 없이 풍귀터널까지만이라도 달리자. 그 곳이라면 이 뻔뻔스러움과 세계지도 모두 그늘에 가려질 것만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허리끈 끊어진 바지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뛰어봤자 속도가 날 리가 없었다. 뒤에서는 늦게 도착한 아주머니와 경찰아저씨가 쫓아 오는 것만 같았다.
"저 놈 잡아라! 가슴팍에 세계지도 그린 놈! 언 얼굴에 오줌싼놈! 저놈 잡아라!"
사람들은 추운날 뭐하러 강가로 나오는지,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며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언 발에 오줌누기란 말은 들었어도 언 얼굴에 오줌싼 놈은 생전 첨일쎄. 쯧쯧쯧"
그 시절 아무데나 소변봤다고 다짜고짜 모질게 화를 내시던 낙호형이 또 한번 떠올려지면서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낙호형이 밉다. 두고보자. 언젠가는 만나겠지...
그러나 이날 망신살이 뻗쳤어도 한가지만은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도 있었다.
이 마귀, 알통의 강한 기초질서의식, 에티켓을 지켰다는 것-.
가끔은 술이 죄지만.....
ㅋㅋㅋ
후기 : 이 글은 몇년전 마라톤사이트에 올렸던 것을 부분적으로 각색해서 다시 올린 글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71.축산.김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