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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대사전
그리스도교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데, 불교와 이슬람교에 비해서 역사적 종교이며 선교종교라는 현저한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한 구석에서 탄생한 지 얼마되지 않아 지중해 세계로 확산되고, 이어서 서유럽에 들어가고, 17세기에는 바다를 건너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본격적으로 동양에 전래된 것은 16세기 예수회가 최초인데, 19세기 후반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한 대규모적인 활동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거의 전지역에 미치고, 신도수는 10억을 넘는다. 이런 진전은 물론 한 줄의 직선이 아니라 서로 얽힌 복수의 선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정체와 비약의 양면을 지니고 있지만, 전체적으로서 민족ㆍ문화ㆍ시대 등의 제약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큰 운동이 되었다. 또한 이 종교를 형성하고 있는 교회ㆍ교파에 대해서 말하면, 1세기의 원시 그리스도교는 2세기에 들어와서 로마제국 내의 제도적 교회(고(古)가톨릭 교회)가 되고, 이것이 후에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로 나뉘어져서 각자 전개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프로테스탄티즘)가 갈라져 나왔다. 이는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 및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가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국민교회로 바뀐 앵글리칸 처치에 대해서 퓨리탄 혁명이 있으며, 그후 많은 교파가 부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3대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내 교파로 이루어져 있다. 교파의 수는 매우 많아서 일견 사분 오열의 느낌도 없지는 않지만, 여기에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내적 발전을 수반한 역사적 운동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서술은 단순히 교회의 역사적 변천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역사적이며 세계적 종교로서 성립시키고, 이를 유지하고 전개시키는 고유한 다이내미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 다이내미즘은 단순한 진보나 유기체적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과 다양, 정통과 이단, 중심과 주변, 연속과 비연속, 정체와 전진 등의 대극형식하에 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전개는 환경세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구분하면 고대의 헬레니즘화, 중세의 게르만화, 근세의 세속화가 있으며, 그중에서 신앙의 결단이 어떤 일관성과 우연성을 가지고 행하여졌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는 19세기 중반에 규범적ㆍ이념적 의미를 가지고 이용된 것으로 별로 적절하지는 않지만,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ㆍ<초대 교회>라는 말도 정착되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오늘날의 비판적 연구에서 보면 그리스도교는 예수에서 시작된다든지, 그 내용은 <사랑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지지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종말적 구세주)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교회의 건설을 명령하거나 세례ㆍ성찬이라는 절차를 설정한 적이 없다. 이들은 복음서에 쓰여져 있다고는 하지만, 예수 이후의 교회의 자기 이해 중에서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출발은 그리스도 부활의 신앙 중에서 『구약성서』의 예언을 매개로 그리스도의 의의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구할 수 있다. 지상의 예수는 이 기초를 만들었지만 창시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7년부터 기원후 4년의 사이로,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죽은 것은 30년부터 32년 사이로 그 공적활동은 수년간의 짧은 시간이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회개설교를 계승하는 형태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유대교의 내부개혁을 의도하였던 바리새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성당과 공통되는 자세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에서 유대교와의 상위점이 나타난다. 그것은 유대교가 중시하는 번잡한 율법을 물리치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 그 자체에 따를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때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를 요구하였는데, 예수는 사람이 그를 따르는 한 회개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회개는 종말론적인 새로운 존재를 부여한다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며, 예언자의 최후의 말이며, 실제로 그것은 『요나서』와 같은 예언의 최후의 단계에 비로소 이야기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가 가난한 자에게 주목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항상 이야기되며, 특히 바빌론 유폐(㉮ 바빌론 유배) 후의 예언자에 의해서 강조되어서, 예수는 이에 따라서 사회 빈곤층에 무조건적인 구원을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구원은 인간의 <업의 의> 즉, 휴머니즘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주장한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하였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바로 존재의 전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창조(존재)와 구제의 일치중에 행동하고, 따라서 예수 안에서는 말과 영은 전혀 분리 되지 않는다. 이는 즐겨서 이야기된 비유가 기적의 업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사태를 가리키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예수는 유대인에게 미움을 사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반란자로 의심받아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그의 죽음에 이은 부활은 그에 있어서의 창조와 구원의, 또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가장 확실한 일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성립된 교단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상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 시작은 제자들의 부활신앙의 성립과 동시이다. 이것이 갈릴레아로, 또한 예루살렘 환상 중에 나타난 것은 확실히 각 복음서의 편집의도의 상위를 나타내는데 지나지 않는데, 행적으로서 말하면 예언자 에스겔(㉮ 에제키엘)이 바빌론과 예루살렘에서 동시에 환상을 보고 예언했다는 이중성과 동일하며, 또한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 문학에 보인 사후 예언의 중합과 동일하다. 이로써 두 개의 다른 장소에서의 운동이 역사적으로는 하나의 예언과 성취중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즉, 최초의 교단은 예루살렘에서 탄생하였는데, 여기에 그치치 않고 갈릴리(㉮ 가릴레아)라는 이방인과의 경계지역으로 향하는 운동을 해서, 이 운동이 예수 부활의 목격과 제2의 부활인 재림의 희망 사이의 중간시로서 파악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의 원시교단이 실제로 갈릴리를 넘어서 이방인 세계로 들어가는 예는 거의 없었다.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유대교로부터의 공격이라는 외적 조건이 출현해야 하였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의 역사적 조건을 자각하고, 그 범위 내에서 종말론적인 영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는데 여기에서 최초의 교회적 자각의 탄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상의 예수와의 관계는 <최후의 만찬>을 종교적 생의 상징으로서의 애찬(아가페)이라는 공동 식사에 결부시킴으로써 유지되었다. 이 상징화는 정신화와 물질화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세례의 제정이라는 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단은 확대되어 전도를 진행시킴에 따라서 유대교의 공격을 받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헬레니즘화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신자가 됨으로써 유대교로부터의 구속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많은 헬레니즘의 우주도식으로서 신앙고백을 형성하였다. 거기에서 예수는 오로지 강림할 메시아=그리스도라고 하고, 이에 <기리오스(주)>나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헬레니즘적, 오리엔트적 칭호가 주어졌다. 그 결과 예수의 최초의 제자들이 가진 묵시적 미래관은 상실되고, 종말이 현재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렇지만 이 경향이 그리스도교에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런 위험성을 찰지하고,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교와 결합하는 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형태를 형성한 것은 바울이다. 지상의 예수를 모르는 그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 교도를 박해하였는데, 그런 가운데 묵시적인 환상 중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와 접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의 초기의 활동은 확실치 않지만, 만년인 50년 전후에 안티오키아에서 나와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본토에서 활발한 전도를 하였는데 『신약성서』에 보이는 그의 편지는 모두 그때의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신앙만>의 신앙이 신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리스도 신자가 된 사람이라고 모두 유대교의 율법과 의례에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오래된 율법은 죽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 따라서 희망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계율에 따르는 윤리를 만드는 것이다. 바울의 종말론은 현재화되어 있지만, 윤리적 긴장을 잃지 않고 각자의 부활은 미래의 일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열광적 자유주의자에 의해 주장되었다. 마지막에 쓴 『로마서』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하는 신의 계획과 선택을 강조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성을 신학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바울은 64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 원시 그리스도교의 무대는 다시 팔레스타인에 가까운 지역으로 돌아온다. 4개의 복음서는 65년경부터 95년경에 걸쳐서 쓰여지고, 그것은 모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경계지역인 교회의 것이다. 『베드로전서』ㆍ『히브리서』ㆍ『요한계시록(㉮ 요한묵시록)』도 모두 그런 경계성을 지니고 있다. 『디모데전서(㉮ 디모테오 전서)』나 『디도서』는 그 경계를 나와서 초기 가톨릭시즘에 근접한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인데,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의 관점에서 약간의 정정을 필요로 한다. 바울 이후의 문서는 모두 어느 정도 바울을 전제로 하고, 『요한복음』 또한 계시와 신앙의 질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후에 일어난 유대인의 재결집을 강하게 의식해서 유대교와의 대립을 강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와 비례해서 그 경계역에 사는 만다교도의 그노시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빛과 어둠의 이원론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는 신으로부터 떨어진 이 세상에 도래하는 예수의 구원은 동시에 이 세상의 위기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로써 그노시스의 자연주의를 극복하였다. 요한은 또한 그리스도 가현론에도 대항해서, 이 세상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신과 세계가 요한에 있어서는 대립하거나 분리하지 않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교에 고유한 종말론적 사유에 의한 것으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세계주의의 기초가 형성되는 것이다.
『신약성서』 중의 사서 『사도행정』은 바울의 로마 도착으로 끝나며, 로마에서의 사도들의 활동이나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필자의 의도로서, 선교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스도 교도의 박해에 대해서는 타키투스 등의 사가도 언급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초대 교회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교의, 전례, 교회조직에 관한 확실한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1세기 말의 사도교부 클레멘스가 고린토 교회 앞으로 보낸 『클레멘스의 첫 번째 편지』를 보면, 이미 로마 교회가 고린토 교회의 내분에 대해서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스도교는 도시형의 종교로, 도시를 중심으로 교회를 구축하였다. 2세기 전반에는 교회의 조직도 대개 고정되어서, 사도의 권능을 계승하는 에피스코포스(episkopos, <감독>이라는 뜻에서 <주교>라고 번역한다)가 교회의 대표가 되며, 사제가 신자의 사목과 전례의 집행에 임하며, 사제의 보조자로서 부제가 있었다. 이상은 성직이지만, 그외에 교회의 관리나 운영에 임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역직은 당연히 신자단의 선거로 선출하였다. 또한 교회는 로마제국의 행정구분에 준해서 관할 범위를 정했다. 따라서 이 원칙에 의하면 제국의 수도와 속주의 수도인 에피스코포스는 다른 도시의 교회에도 관할을 미치게 되었다. 전례의 중심은 성찬식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만든 빵과 포도주를 모여든 신자가 함께 먹는다는 신비였기 때문에, 신자 이외에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일반 집회에서 사도가 전한 문서를 읽고, 기도를 하는 습관은 유대교의 관행을 계승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초기까지 단속적으로 국가의 박해를 받았다. 그 원인과 실제의 경과는 불명한 점이 많다. 로마에서는 동방으로부터의 외래종교는 처음에는 다소 박해받았으며, 그리스도 교도가 황제숭배의 풍조에 익숙치 않았던 점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타키투스가 언급하고 있듯이, 제국내의 이질적인 분자로서 미워한, 환언하면 유대인 박해의 일환으로서 탄압되었다고 생각하면, 초기의 박해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해는 법적 근거에 선 일관된 정책이 아니라 황제의 징벌권의 행사로, 시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다. 박해에 의한 <순교의 피>는 오히려 그리스도 교도의 저항을 강화시키고, 박해가 없는 시대에는 교회조직이 확대되었다. 2세기 말까지는 로마제국의 거의 전역과 메소포타미아까지 조직을 굳히고, 제국의 중요도시 로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3세기에는 국가종교의 제의를 거부한 그리스도 교도에게 박해가 가해지고, 40년 정도의 간격을 둔 303년, 만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대박해를 개시하였다. 지금까지의 박해가 주로 성직자나 신자 개인에 대한 것임에 반해서, 이 대박해는 교회당의 파괴와 성서의 분서를 수반한, 물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박멸을 도모하는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그때의 그리스도 교도의 세력은 어느 추계에 의하면 인구의 1할에 이른다고 하여, 박멸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대박해의 원인은 불명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리치니우스 황제가 발령한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공인종교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를 그리스도교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틀안에서 성장할 숙명에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교회 관할구에도 제국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또한 로마제국을 <지상의 왕국>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판도 밖으로 확대된 후에도 교의 확정 등의 중요 문제를 제국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에 조금도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공인 종교가 된 교회는 몰수재산이 반환되고, 성직자에게는 조세부담면제의 특권이 주어지고, 신자간의 투쟁에 주교재판권이 인정되었다. 이런 조치는 교회가 제국의 통치기구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교는 공인과 함께 변질되어서, 속권 지배에 가장 유효하게 적응할 수 있는 체질을 구축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여러 이단을 극복하고 세계종교가 된 요인이다. 그러나 공인의 대상은 교회제도는 물론 교의, 전례에 이르는 속권, 구체적으로는 황제의 간섭이었다. 황제로서는 국가기구 중의 공인종교를 유효하게 기능시키기 위해서 그 내분에 간섭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도나투스파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에 개입하였는데, 그 방법은 각지의 교회 대표인 주교를 불러서, 공의회라고 불리는 대규모 회의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의회는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고의 기관인데, 적어도 제7회 공의회까지는 황제가 소집하고, 경비는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였다.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결정된 자의 처분은 교회 내부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손에 위임하였다.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국가종교가 되자 속권의 개입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황제라고 하여도 교회전체의 의향에 거역하는 정책은 곤란하였다.
한편 공인 전후의 교회는 아직 교의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4복음서의 권위가 확립된 것은 2세기 말로, 『신약성서』의 정전이 오늘날에 전해지는 형태를 취한 것은 4세기이다. 원래 교의는 성전에 입각하는데, 성서가 교의의 미묘한 문제를 규정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그리스도 교도는 신앙의 증거로서 자신이 믿는 가르침을 요약한 <신조>를 제창하고, 세례의 경우에도 그것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신조는 지역과 교회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식과 내용이 있었다. 그리스 철학의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 개종하자, 당연히 신조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거기에서 문제가 된 것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으로, 전자에 대한 의문은 그리스도 종속론으로서 나타났다. 아리우스가 그 대표로 니케아(㉮ 니체아) 공의회(325)는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하였는데, 이 문제는 4세기의 교회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리고, 최종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론이 확정되었다. 이에는 알렉산드리아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초인적인 노력과 갑바도키아 교부의 조정이 필요하였다. 이어서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의념이 나타나고,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라는 대조적인 이단을 낳았다. 이 문제는 칼케돈(㉮ 칼체돈) 공의회(451)에서 결착되고, <칼케돈 신조>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양성(兩性)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단성론파 문제는 꼬리를 물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교회가 점차로 이반하였다. 교회정치의 면에서는 교의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지위향상이 현저해져, 로마의 교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대교회에서 조직ㆍ전례ㆍ교의가 일찍이 정비된 것은 동방에서이며, 로마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에서가 아니다. 그러나 서방 라틴교회는 일찍부터 하나의 성격을 지녔다. 동방교회가 그리스도교를 지적 체계로 이해해서 그리스 사상을 원용하고, 조직적인 신조를 만들고, 또한 신비체험을 종교적 생의 정점에 두는 것에 대해서, 서방교회는 법적 사회안 실천을 중시하고, 성서의 전통에 의거해서 실제적인 법과 습관을 형성하고, 교회를 형성해서 그 권위를 확립하는 것을 과제로 하였다. 성서는 사변적인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에 따라서 구체적인 생활 중에서 증언되어야 하였다. 1세기 말에 로마의 클레멘스는 감독ㆍ장로직을 교회에서의 권위로 세웠는데, 이는 바울적 전통의 연장으로 보인다. 또한 3세기의 테르툴리아노는 사죄에 관한 윤리적 법의 체계를 세운 것 외에 로마에서의 베드로 전승에 따라서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고, 후에 카르타고의 주교 치푸리아노가 이를 고정화하였다. 교황 갈리스도 1세(재위 217~222)가 로마와 비잔틴의 정치적 대립을 완화한 것에 대해서, 치푸리아노는 로마 교회의 우위에 의거한 교회의 일치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여서, 보편적 교회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동방의 <황제교황주의>에 대한 서방의 <교황제>의 시작이다. <교황(papa)>의 호칭을 로마주교에 대해서 이용하게 된 것은 레오 1세(재위 440~461) 이후라고 한다.
동방 교회에서 형성된 신학은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 서방의 것으로 바뀌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처음에 암브로시오와 함께 그리스도교적 플라톤주의의 권내에 있었는데, 『고백록』에서 볼 수 있는 구원의 체험을 통해서 서방적 전통에 선 교회형성에 노력하고, 펠라지우스와의 논쟁시에는 바울에 의한 신앙의화(信仰義化)와 은혜의 가르침을 밝혀서 종교개혁으로 연결되는 선을 낳고, 또한 『신국』에서는 국가와 교회의 투쟁 및 교회의 최후의 승리를 제시하고, 역사 중에서의 교회의 목표를 밝혔다. 이 책의 집필 직전인 410년, 로마는 서고트족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졌는데, 교회는 소멸하지 않고 이어서 다음 시대를 준비하였다.
<동방 정교회>라는 명칭은 1054년의 동서양 교회의 최종적인 분리 후의 동방의 칼케돈파 교회, 즉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할하의 비잔틴 교회와 다른 약간의 교회(발칸반도와 러시아), 그루지아 교회, 이슬람 칼리프 왕조 지배하의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칼케돈파 교회의 총칭이며, 현재에는 위의 여러 교회가 유럽,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에 확대되어서 설치된 교회도 포함한다. 따라서 1054년 이전에 칼케돈파 교회는 불안전하나마 하나로 정리된 상태로, 그중의 동방의 교회를 동방 정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며, 오해를 낳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동방의 칼케돈파 교회의 역사도 취급한다. 칼케돈파라는 것은 그리스도론에 결착지은 <칼케돈 신조>(451)를 교의의 근간에 두는 교회로, 후의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나아가서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대부분이 포함된다. 그에 대해서 칼케돈 공의회의 전후에 그리스도론에 관한 견해의 상위로 분리한 교회, 구체적으로는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성론파 교회를 일괄해서 <동방교회>라고 한다. 그중에는 후에 그리스도 단의론을 받아들인 마론파 교회도 포함된다. 또한 아리우스파는 물론 비칼케돈파 교회이지만, 동방 교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로마제국에서의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국교화가 속권과의 관계로 교회의 변질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는데, 그 국면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공교롭게도 로마 교회가 아니라, 제국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였다. 이민족의 침입과 서로마의 멸망(476)에 의해서 동쪽 제국의 지배에서 사실상 떨어진 로마교회는 속권의 보호를 잃고 여러 가지 고난을 당했는데, 오히려 교회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또한 서방에서는 심각한 교의논쟁이 없었으며, 수도의 교회처럼 황제의 전횡에 휘둘려서 이단의 가르침을 무리하게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로마교황 중에서 이단으로 몰린 자가 거의 없었던 것도 로마 교회의 교의면에서의 안전성을 증명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제국의 국교로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기구의 일부를 이루었기 때문에 교권의 독립성은 약했다. 물론 교회의 수장인 총주교(서방의 교황에 필적)는 명분상으로는 선거로 선출되었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지명과 다름없었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속권과 교권의 관계를 <조화>의 원칙으로 규정하였는데, 속권이 교권을 보호하는 이상, 속권의 우위는 의심할 수 없다. 또한 수도의 총주교에 속인이 임명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이도 비잔틴 교회의 지위를 여실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속권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수도원인데, 수도원이 성립하지 않았던 동방에서는 수도원의 횡적 연대감이 약하였다. 수도사에는 열광적인 신앙으로 세속을 버리는 자와 적극적으로 교회정치에 관여하는 자가 있었다. 주교 이상의 고위 성직자는 수도사제에서 등용되었기 때문에, 아내가 있는 재속 사제는 세습의 직업이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장년의 교의 논쟁을 해결하였는데, 동방의 교회는 새로운 혼란에 말려들었다. 단성론이 거의 지배적이 된 이집트와 시리아는 중앙에 대한 반감도 있어서 제국에서 이반하는 세력이 되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탄압과 타협을 반복하면서 단성론파의 이반을 막으려고 하였다. 타협책은 <칼케돈 신조>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잔틴교회 내부의 혼란을 일으키고, 로마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시대는 황제의 교회정책의 이전삼전으로 혼란이 극에 이르고, <삼장(三章)문제>에서는 이미 해결된 네스토리우스 신학이 다시 공격을 받았다. 이 문제에는 서방교회도 말려들어서 동방에 대한 불신감을 높였다. 그러나 단성론파와의 타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성론파 되돌리기의 최후의 시도는 그리스도 단의론으로, 이는 단성론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집트 교회는 황제측의 이런 종류의 술책에 편승하지 않았다. 단의론은 제6차 공의회에서 이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의 석권에 의해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는 제국에서 멀어졌다.
단성론파를 잘라버린 비잔틴 교회는 평화가 되돌아온 얼마 후, 8~9세기에 이코노클라즘(성상파괴운동)의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는 교회내부에서 일어나, 황제 레오 3세,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등이 추진한 사회운동이다. 그리스도 교도는 우상숭배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셈족의 심정을 계승하였는데, 도상표현에 관대한 헬레니즘에 물들자 추상적, 상징적인 표현에서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아가고, 형태있는 것이 신앙생활과 결합되었다. 4세기의 예루살렘 부흥과 성지순례, 성유물 숭배가 이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화상 그 자체에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신 숭배이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다. 한편 민중의 신앙심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성유물이나 이콘처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교회로서는 신학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콘 숭배의 풍조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풍조가 결국 폐해를 낳게 되자, 당연히 반동이 생기고, 그 분위기를 소아시아 출신으로 반헬레니즘적 체질의 황제와 군대가 이용한 것이다. 서방의 교회는 이코노클라즘과 같은 원리주의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동서양 교회 분리의 원인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이코노클라즘에 반대한 수도원세력이 큰 타격을 받았다. 2기에 걸친 이코노클라즘은 9세기 중엽에 종결되고, 이콘에 대한, <숭배>와 <숭경>을 구별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는데, 문제의 본질적 해결은 되지 못했다.
한편 동서양교회의 관계는 선교지의 관할과 전례를 둘러싸고 점차로 악화되었다. 모라비아에서는 프랑크교회가 비잔틴교회를, 불가리아에서는 비잔틴교회가 로마교회를 배제하였다. 서방 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로마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방패로 비잔틴교회의 내분에 개입하였다. 전례와 교회 관행의 차이는 두 교회의 관계가 정상일 때는 눈에 띠지 않았지만, 그것이 악화되자 반목의 씨앗이 되었다. 교의면에서는 성령의 출발을 둘러싸고 신조에 <아들에게도 필리오퀘(filioque)>의 삽입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서방에서는 <필리오퀘>의 삽입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비잔틴교회는 그에 반발하였다. 이렇게 해서 1054년 하찮은 사건으로 서로 파문장을 내고, 두 교회는 이후 900년 정도 분리하게 된다. 오스만제국의 발칸공략이 진행되는 중에 비잔틴 측은 서방의 원조를 구하고, 그 대상으로서 두 교회의 관계수복, 즉 서방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회합동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교회합동은 일단 성립하였지만, 실행으로 이행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하였다(1453).
동방 정교회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루지아 등을 제외하고 모두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는 정교도의 밀레트의 수장으로서 발칸반도나 이집트, 시리아 등의 교회도 자기의 관할하에 두었다. 신앙의 자유는 보증되었지만, 신학의 수준은 저하되고, 총주교좌는 권력투쟁의 장이 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정교회의 세력은 저하하였고 종교개혁의 여파는 동방에도 미쳤지만, 다소의 혼란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의 오스만제국의 쇠퇴와 함께 발칸반도의 제국은 독립해서 총주교를 받드는 민족교회를 형성하고,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지위는 명목상의 것이 되었다.
다음에 비잔틴교회의 이민족에 대한 확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제국 내에 이주한 이민족, 즉 6세기에 대량으로 이입한 슬라브족 등은 때로 동화하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제국 외의 여러 민족, 여러 국가에 대한 포교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또한 항상 조직적으로 행하여지지도 않았다. 6세기에는 누비아에 대한 포교가 행하여져 단성론으로 달린 아르메니아 교회의 되돌리기 공작이 진행되었다. 9~10세기에는 제국 주변에 정주한 이민족, 그중에서도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가 시도되었다. 이 시기는 주된 슬라브족의 국가 형성기에 해당하며, 그리스도교는 문명사회에 참여하는 조건으로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라비아선교는 실패하였지만, 그때 고안된 슬라브문자와 슬라브어로 번역된 전례서와 교회문헌이 후에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마자르족에 대한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불가리아는 864년에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수용하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동방전례를 받아들였다. 세르비아에서도 비잔틴교회는 로마교회와의 포교경쟁에 승리하였다. 현재의 루마니아는 불가리아의 영향하에 그리스도 교화를 이루었다. 988년에는 키예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대공이 세례를 받아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화를 이루었다. 11세기 전반에 불가리아왕국은 멸망하였는데, 슬라브어 문헌은 러시아에 가져와서 러시아문화의 형성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키예프 러시아는 몽고인의 침입에 의해서 멸망하고 <타타르의 멍에>의 시대에 러시아의 중심은 북방으로 옮겨졌다. 키예프부 주교좌도 14세기 전반에 모스크바로 옮겼다. 수도생활의 이념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하고 그중에서도 아토스산에서 행하여진 비잔틴 신비주의가 이식되었다. 비잔틴제국의 멸망과 함께 러시아의 교회는 독립하고, 1589년에는 모스크바부 주교가 총주교로 격상되어, 명실공히 동방 정교권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폴란드ㆍ리투아니아 영내의 다수의 정교도는 가톨릭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16세기 말에 합동교회로 수용되어 그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투쟁이 계속되는데, 문화적으로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접점이 되어, 정교회 그 자체의 근대화에도 공헌하였다. 오스만제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피한 모르다비아와 바라키아(양국은 현재의 루마니아에 해당한다)의 교회는 비교적 순조로운 발전을 이루고,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17세기 중엽, 전례의 개혁을 둘러싸고 심각한 분쟁이 발생하고, 개혁에 반대한 일파는 라스코리니키(분리파)로서 이탈하여 교회전체의 활력이 약화되었다. 피터대제는 교회개혁의 일환으로서 총주교제를 폐지하고(1721), 대신에 시노드(종무원)을 설립하여 국가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동방교회라는 것은 칼케돈 공의회의 전후에 분리한 비칼케돈파 교회의 총칭인데, 그중에 대부분이 후에 이슬람 교도의 지배권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세력이 현저하게 감퇴하여, 오늘날 다소라도 정리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이집트의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레바논의 마론파 교회 등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스도교 세계전체에서의 영향력도 한정되어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네스토리우스가 창설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 교회는 동시리아를 거점으로 하였는데, 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5세기 후반부터 페르시아에서 세력확대를 시작했다. 페르시아에서 단성론파와 대립하면서 교회조직과 수도제를 확립하고, 국교 조로아스터교의 우위가 흔들리지 않았던 페르시아를 나와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최대규모의 포교활동에 임하였다. 선교의 경로는 북쪽의 크루티스탄에서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터키, 중국, 몽고, 시베리아에 이르는 육로와 아라비아반도에서 인도에 이르는 해로의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635년에 장안(서안)에 이른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세력이 신장하지 못했는데 후에 이 교파를 우대한 몽고인의 원 시대에 다소 확대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이슬람교의 칼리프 왕조 및 초기 몽고인 지배자에게는 우대받으면서 이슬람교와 대항하기도 하였다. 12세기에 서구에서 행하여진 프레스타 죤인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의 국왕의 전설은 네스토리우스파로 개종한 터키ㆍ타타르계의 케레이토족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이슬람교로 개종한 몽고계의 칸국에서는 역으로 박해를 받아 급속히 몰락하고, 이어서 티무르의 원정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박해를 피한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는 크루티스탄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인도의 마라발지방에는 4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도래하였는데, 16세기 말에 포교한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받아 교회가 분열되었다. 로마와의 합동에 따르지 않았던 교파는 시리아의 단성론파인 야곱파에서 주교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네스토리우스파를 이탈한 것이 된다. 또한 가톨릭교회 도래 이전의 인도의 그리스도 교도를 토마스파로 총칭하는데, 이에는 네스토리우스파 이외의 그리스도 교도도 포함된다.
원래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던 이집트의 그리스도 교도는 네스토리우스 탄핵에 성공했지만, <칼케돈 신조>에 대해서는 네스토리우스적 편향으로 정면에서 반발하였다. 그에 민족적 감정도 가해져서 칼케돈 공의회 이후 곧바로 대립주교를 선출, 자파의 교회를 조직하였다. 칼케돈파 교회는 이집트, 시리아에서는 소수파로 메르키타이(황제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리아에서는 이집트보다 약 1세기 늦게 6세기 중엽에 단성론파 교회가 형성되었다. 이 교회는 조직자의 이름을 따서 야곱파 교회로 불린다. 야곱파는 아라비아, 페르시아에도 진출하였는데, 페르시아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에 밀려서 열세였다. 단 교의면에서 대조적인 이 양파는 고전 그리스의 학문을 시리아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이슬람 세계에 전한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의를 가진다. 다음에 로마제국보다 빨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한 아르메니아는 에베소(㉮ 에페소)의 <도적교회회의>(449)의 단성론파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동로마제국측의 공작에 저항하고, 또한 칼케돈파의 그루지아와의 관계도 있어서, 결국에 단성론에 그쳤다. 아르메니아교회는 초기의 빛나는 문화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교도의 침입 후에는 혼미를 계속하였는데, 셀주크 왕조의 압박으로 11세기부터 키리키아의 소아르메니아 지방에 할거하고, 거기에서 로마 교회와 접촉해서 합동 교회가 성립하였다. 이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가톨릭측의 합동공작이 비교적 성공한 예라고 한다.
이집트, 시리아의 단성론파는 이슬람 칼리프 왕조하에서 오히려 신앙의 자유를 향수하였는데, 이 지역의 아랍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교세가 쇠퇴하였다. 그래도 콥트교회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단성론파교회는 고유한 콥트어에 의한 전례를 유지하는데, 아라비아어의 우세는 부정하기 어렵다. 이집트와 관계 깊었던 에티오피아교회는 복잡한 경위로 단성론을 수용하고, 이슬람군의 정복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16~17세기에는 예수회에 의한 강인한 가톨릭화가 도모되었는데, 그것은 단명으로 끝났다. 그후 에티오피아가 쇄국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도 세력을 온존하였다. 레바논의 마론파 교회는 7세기 전반에 그리스도 단의론을 받아들인 마론 수도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십자군과 접촉해서 가톨릭의 교의를 수용해서 16세기 이후, 점차로 라틴화되었다. 현재에는 동방전례 가톨릭교회의 일부로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동방교회는 그 지역이 대략 이슬람교의 포교권과 겹쳐지기 때문에 신흥 이슬람교에 패퇴하는 운명을 지녔다.
800년의 크리스마스에 프랑크왕 칼 대제가 로마교황 레오 3세에게 관을 받아서 로마인의 황제가 된 것은 서유럽에서의 중세 그리스도교의 성립을 상징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칼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재흥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 로마적 전통을 유지하고 정치적 안정하에 교권의 진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원래 교회는 고대에 이는 중세를 한꺼번에 만든 것이 아니다. 게르만민족에 대한 전도는 이미 3세기에 시작되고 5세기에는 앵글로 색슨족에 대한 전도도 이루어지고, 7세기에 들어가면 베네딕도회가 이에 가담해서 활발한 이민족 전도를 행하였다. 윌리브로드(Willibrord 739년 사망)와, 후에 보니파시오(Bonifatius)라고 불린 윈프리드(Wynfrid, 754년 사망)의 활약이 특히 기억된다. 이로써 서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와 이슬람 교도의 압박을 배제해서 자립하는 동시에, 고대의 전통을 중세에 매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가톨릭교회는 이민족 전도에 의해서만 성립된 것은 아니다. 처음에 게르만인에게 전해진 것은 아리우스파의 신앙이었으므로, 이는 3, 4세기의 교의논쟁을 거쳐서 확립된 전통신앙에 의해서 구축되어야 하며, 나아가서 교황권과 왕권, 성사와 통치를 일체화해서 보편주의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앞에서 멜로빙 왕조 피핀이 도유(塗油)를 받고(752), 칼 대제 후에 오토 1세가 왕관을 받았다(962)는 것은, 그들에게 교회의 보호자 지위를 법적으로 준 것이 된다. 여기에 중세 가톨릭교회의 독자적인 형태가 있으며, 이는 하르나크에 의해서 <그리스도교의 게르만화>라고 불리며 헬레니즘화에 이은 교회사의 제2의 큰 사건이다. 문화(그리스)와 군사(게르만)와 종교(그리스도교)와의 통합은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게르만인 교회는 로마인의 도시형의 조직적인 <주교의 교회>와 달리, 농민의 사적 소유권과 자주성을 유지하는 <사유 교회>로, 설립자인 군주의 지배를 받고, 주교의 서임이나 회의의 소집도 소유자의 의지에 따라야 했다. 이것이 군주의 권력증대와 함께 지방교회가 되고 칼 대제하에 국교가 된 것인데, 중세에 고유한 교회와 국가의 문제는 교회의 이 특징 중에서 발생하였다. 교회는 국가의 보호하에 세력을 확대하고 기부지를 증대시킴에 따라서 세속적인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바라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오토 3세(재위 996~1002)는 <왕으로서 제사>라는 고 게르만의 사상에 의거한 교회통치권을 행사해서 주교를 서임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선거에도 가담하고자 하였다. 하인리히 3세(재위 1039~56)는 포티오스에 의한 동서교회의 분리(867) 이후 약체화된 교황청을 자신의 손으로 개혁시키고자, 독일인 교황을 세웠다. 거기에서 교황 측은 교황권 지상주의를 주장하고 그 보편주의를 각 국왕의 분립주의에 우선시키는 투쟁을 개시하였다. <서임권 투쟁>이라고 하는 이 운동은 910년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하는 개혁운동을 전제로 한다. 이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수도원 내부의 부패를 <베네딕도의 회칙>의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 정결해지고, 교회에 대해서는 사제의 결혼과 성직매매(시모니아) 및 독일왕에 의한 주교와 대수도원장의 서임의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오 2세(재위 1058~61)는 1059년의 로마회의에서 교황선거에 세속인의 참가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서 정치적 권력에서 떨어진 <교회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클뤼니의 수도사였던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법학자 페틀스 다미아니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서 1076년의 보름스회의에서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이듬해 이 황제가 카노사에 가서 참회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카노사의 굴욕). 투쟁은 1122년의 월무스협정 및 이듬해의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독일 황제는 교회로부터 받는 반지(주교권을 상징하는 것)와 사목장을 방기하고, 한편 교황은 국왕의 선거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어서 종식되었다. 이는 어느 한쪽의 승리는 아니다. 교황권의 보편주의와 지상주의는 관철되었지만 국가의 탈신성화는 중세사회의 봉건제로부터의 탈피를 조속히 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후 교황 우르바노 2세 때에 십자군이 발족하여(1096) 교황권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지배권을 획득하고, 영국에서는 존왕을 굴복시켜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성립의 계기를 만들고, 제4차 십자군과 소년 십자군을 일으켜서 동방 정교회의 로마에 대한 종속이라는 역대 교황의 꿈을 실현코자 하였는데, 이는 서임권 투쟁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 사이 교회법은 그라시아누스와 같은 우수한 학자를 얻어서 발달하였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가 1302년에 발령한 교서 『우남 쌍탐(Unam Sanctan)』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영계와 속계의 두 개의 검을 가지는 것, 즉 후자를 행사하는 것은 왕과 기사라도, 명령을 내리는 것은 교황측에 있다고 주장하고,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은 영혼의 구원을 담당하는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선언하였다(양검론). 물론 두 개의 검은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권위 또한 창조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되기 때문에 모순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결국 교황이 실패해서 세속의 권위를 폐할 때까지 교황은 세속의 것에 지나치게 개입하였다. 실제 이 교서는 프랑스왕 필립 4세(재위 1285~1314)의 반항을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그 결과 국교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은 잡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왕은 템플기사단원의 대학살(1312)로 유명하다. 그후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으로 옮기고(1309), 그 땅에서 프랑스 국왕의 지지를 받아서 교황청을 통솔하게 되고, 이 극적인 변동에 의해서 교황지상권의 꿈은 깨졌다. 계속되는 6대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으로, 70년에 미치는 <교황의 아비뇽유폐>가 된 것이다. 이후 각국의 주교는 총주교를 통해서 국왕의 통치에 복종하고, 때로는 교황에 반대하고 국가에 충성하게 되었다. 교황지상주의에 대해서 회의주의가 일어난 것도 이 무렵으로, 영국의 신학자 그로스테스트나 오컴이 강력하게 지지하고, 교황권 제한주의를 주장하는 국민주의적인 프랑스인도 이를 받아들였다. 유폐는 그레고리오 11세의 귀환으로 끝났다고 하지만,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클레멘스 7세(재위 1378~94)를 아비뇽에서 로마에 대한 대립교황으로하고, 1417년까지 <대이교(大離敎)>라고 불리는 이 분리를 계속했다. 거기에서 공의회도 실효성이 없게 되었는데, 마침내 49년에 피렌체회의에서 니콜라오 5세를 선거해서 이 분리에 종지부를 찍었다. 니콜라오는 로마에 돌아와서 50년에 과거에 보니파시오 8세가 1300년에 행한 것과 같은 규모의 축년제를 거행하고,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예술문화를 거점으로 세력 과시에 노력했는데 니콜라오를 포함해서 10대의 교황을 <르네상스 교황>이라고 한다. 식스도 4세(재위 1471~84)는 바티칸 도서관을 개조해서 시스티나 성당을 세우고, 또한 율리오 2세(재위 1503~13)는 성베드로대성당을 세웠는데, 이들이 교황의 영적 권위를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에서 그리스도교의 게르만화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황권과 황제권과의 대립 중에서 자유와 저항권의 확보를 둘러싸고 일어났는데, 이를 더욱 내측에서 살펴보면 수도원의 성립과 거기에서 발생한 경건과 학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원은 최초 동방교회에서 발생해서 예로니모가 이를 서방교회에 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충분한 의미에서 정착한 것은 베네딕도에 의해서이다. 그는 529년경 몬테 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칙>을 정했다. 그것은 동방의 은수사에게서 볼 수 있는 금욕수행이나 특별한 신비체험으로 교회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과 질서있는 생활을 유지하고, 겸허로서 신과 교회에 바치는 것을 취지로 하고,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가 그 모토였다. 또한 빈자의 구제나 병자를 돌보는 등의 사회활동을 교회를 위해서 행하였다. 이 수도원은 동 고트의 고관이었던 카시오도루스와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지지를 받아서 각지에 세워지고, 프랑크족과 앵글로 색슨족에 대한 전도를 도와주었다. 마침내 자신이 부속학교(스콜라)를 세우고 대성당 부속학교와 함께 민중 교화와 교육에 노력하여 후의 스콜라학의 바탕을 이루었다.
10세기에 들어와서 클뤼니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단순히 수도원의 자기정화만이 아니라, 로마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수도원을 조직해서 차세대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수도원에서 성유물숭배가 이루어지고 민중의 순례가 활발해졌는데, 그 에너지는 십자군을 일으키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수도회(오르도(ordo))>라는 것이 이 무렵 처음으로 성립하였다. 즉, 수도원은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신설을 금지할 때까지 많은 수도회를 낳았다. 그것은 가말돌리회, 카르투지아회, 시토회, 프레몽트레회, 기사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회, 나아가서 탁발수도회 등으로, 그외에도 여자만의 제2 수도회나 남녀의 제3 수도회도 성립하였다. 새로운 경건과 <하나님(㉮ 하느님)의 나라> 운동을 결합하는 이 개혁은 12세기에 들어와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서 정점에 이르고, 또한 아시지의 프란치스코와 같은 독특한 인격을 낳았는데, 이들 사람에게서 보이는 신비주의는 교회에 대립하는 이단의 등장과 무관계하지 않다.
중세의 이단은 고대 교회의 아리우스파와 같이 교의와 신조를 둘러싸고 논쟁하고 교회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으며, 오히려 교회적 통일에 거슬러 그 권위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열광적인 행동을 일으키거나 권위와 이성의 대립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배경으로서는 교회의 봉건화, 도시의 발달에 의한 교통의 자유외에, 십자군에 의한 동서 교류를 들 수 있다. 12세기 초에 나타난 카타리파는 동방의 이단 보고밀파의 지맥이며, 마니교적인 이원론적 도덕에 따라서 금욕 청정(그리스어로 카타로스(katharos))의 삶을 영위하고, 독자적인 교계제를 세워서 세속화한 교회에 대항하였다. 또한 왈드파는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왈드가 1176년의 기근시에 재산을 빈자에게 주어서 무일푼이 되어서 사도적 생활을 사람들에게 주장하면서 돌아다닌 것에서 탄생한 것으로, 많은 유사한 운동과 함께 때로는 카타리파도 포함해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에 진출했다. 이 파는 많은 설교사가 있어서 오랫동안 교회와 대립하고, 15세기에는 후스파에 합류하였는데 소멸하지 않고 실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아시지의 프란치스코는 1207년에 제단의 십자가의 소리에 촉진되어서 청빈과 설교 생활에 들어가 교회와 대립은 하지 않았지만, 그 수도회는 도미니코회와 투쟁하고, 후에 요아킴 데 프로리스의 <영원한 복음>을 계승하는 성령파를 낳게 되었다. 이들 이단은 13세기에 들어와서 형태를 정비한 이단 심문제도에 의해서 탄압되었는데, 청빈과 설교의 생활이 베르나르나 에크하르트를 비롯한 많은 신비가에게 계승되어서 새로운 경건과 지(知)의 형태를 낳은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와 다른 민중의 경건이기도 한데, 15세기의 토마스 아 켐피스 작이라고 하는 『준주성범(Imitatio christi)』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것은 없다.
이와 같은 10세기의 수도원 개혁에서 발생해서 때로는 이단과 접하면서도 심화한 경건은 교회의 학문인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 신학은 교의를 조직해서 체계지어 해석하는 것에 주력하였는데, 방법으로서는 이성 수행에 위임하고, 이단과의 절충을 포함하고, 체계 전체의 의미부여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그것은 고대 교회의 교의논쟁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 신학은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싹텄으며, 후자의 『삼위일체론』과 『신국』은 모든 점에서 중세 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11세기의 안셀무스는 『왜 신은 사람이 되었는가』에서 종래 밝혀지지 않았던 수육과 속죄의 연관성을 나타내었다. 그의 신학이 자유의 확립과 의지의 구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와 신앙의 정신기반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아벨라는 이성의 자유를 강조해서 이단시되었다. 13세기에 들어와서 베드로 롬바르두스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구축하는 스콜라학의 장대한 체계(『명제집』이나 『신학대전』)은 교황지상주의와 중복되어도, 이로써 영혼의 구원을 지향하는 신비주의적 경건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그렇지만 체계 자체는 14세기에는 무너져서 회복의 기미가 없었다. 오컴의 유명론적 이성주의는 일단 이를 보충하였지만, 구원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성사주의를 넘는 하나님(㉮ 하느님)의 자유를 동시에 나타내서, 신앙의 새로운 형태를 다음 세대에 요청하였다.
루터에 의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매우 일회적인 독자적인 신앙원리에 의거한 것으로, 지금까지 교회내에 볼 수 있는 많은 개혁운동의 어떤 것과도 동일시되지 않지만, 물론 일정한 역사적 배경은 있다. 중세 말기에는 세속적 권력으로서의 황제나 국왕의 힘이 증대하고, 지방영주의 교회통치권이 강화되었으며, 그것이 교황권의 집중에 대항해서 지방주의, 국민주의를 형성하고, 또한 종교의 내면화운동을 일으켰다. 영국 국교회의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한 위클리프 운동은 마침내 보헤미아로 가서 대중 연설가 후스를 낳고, 그가 화형에 처해진 후에 체코 형제단이 결성되어서, 수도원과는 다른 새로운 생활형태가 시작되었다. 형제단은 각지로 확산되어서, 소년기의 루터를 키운 것은 마그데부르크의 형제단이었다. 한편, 15세기 후반의 <르네상스 교황>들은 대사(indulgentia)를 남발하였는데, 그 끝없는 재정정책은 지방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제후 영주와의 사이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향락을 좋아했다고 알려진 교황 레오 10세를 낳은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정면에서 충돌한 것은 사보나롤라였는데, 그에 의해서도 교황청의 개혁은 이루지 못했다.
루터는 최초 엘푸르트에서 오컴주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회에 들어가고, 다시 비텐베르크로 옮겨서 거기에서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가 되었다. 아마 1513년부터 15년에 걸친 『시편강의』 중에서 회심하고, 이은 『로마서 강의』에서 복음적인 <신의 뜻>의 인식으로 나아갔다.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문에 붙인 <95개 조문>은 대사에 대한 신학적ㆍ원리적 반론이었는데, 교회법이나 주교재치권에 저촉하는 점이 많아 교황청은 묵시할 수 없게 되어 하이델베르크 토론(1518)이나 라이프치히 토론(1519)을 거쳐서 보름스 국회(1521)에서 마침내 파문교서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이미 『그리스도인 귀족에 주는 책』, 『교회의 바빌론 유폐』,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을 간행해서 개혁을 널리 호소하였으며, 작센선제 후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지지로 정치적으로도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10개월의 바르트부르크의 체재 중에 이룬 『신약성서』의 독일어역(『루터역성서』)이 이룬 역할은 크다. 이때 멜란히톤은 『신학요의』로서 루터의 사상을 체계지으며, 이와 같은 협력자를 많이 얻어서 개혁이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교회에서의 미사의 남용과 수도사의 독신제에 향해지고, 그것은 루터의 부재 중에도 카를슈타트의 지도하에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되었으며 1523년까지 개혁의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중앙권력이 약했던 당시, 많은 영주가 협력하고, 독일기사수도회의 반로마운동도 이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츠위카우의 예언자들(Zwickauer Propheten)>에서 볼 수 있는 열광도 처음부터 존재해서, 이를 억제하지 않을 수 없는 루터의 개혁은 가령 교황을 악마로서 물리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가톨릭교회의 신중한 개조 이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예상되었다.
1524년 봄에는 그때까지 개혁의 협력자였던 뮌처에 의해서 농민운동이 일어나, 처음에는 개혁에 결부되었으나 결국에 떨어져나가 루터로부터 격렬하게 비난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제후로부터 심하게 대우받았다. 이를 계기로 개혁운동이 민중에게서 멀어지고, 이후 영방군주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고, 복음주의 내부에서의 교의논쟁에 움직여져서 개혁이 <동맹과 신조>의 레벨에서 행하여진 것은 종교개혁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 특히 루터는 게르만적 그리스도교의 지반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서원리>와 <신앙만>의 의인 이해는 이미 확실하며, <소명>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직업관과 윤리관도 점차로 확립되어서 복음주의 교회가 각지에 시작되고, 교육제도도 크게 변하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와 일치하지 않고, 『노예의지론』(1525)에서는 그 자유의지설을 철저하게 주장하였으나, 멜란히톤은 루터에 대한 협력을 멈추지 않고 인문주의를 살려서 대학개혁에 노력했다. 새로운 <루터 대ㆍ소 요리문답>은 1529년에 쓰여졌는데, 이는 멜란히톤이나 기타 여러 사람의 협력을 얻어서 30년 6월에 이룬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함께 복음주의 신앙의 모든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제2회 슈파이어 국회(1529) 때 생겼다. 복음주의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루터의 사후 9년으로,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회의에서이다. 이는 개신교와 가톨릭 쌍방의 신앙에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제후에게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주고 있다. 단, 교황령에서는 개신교로 바꾼 제후는 영지와 지위를 잃는다는 <교회보류권>을 붙여서 가톨릭교회의 존속을 보장한 것을 30년 전쟁에 관계를 미치는 대립을 남겼다.
루터의 저작은 바젤에서도 간행되어서 개혁은 스위스에도 미쳤다. 츠빙글리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후 취리히의 신부가 되었는데, 성서연구에 열중하는 중에 이에 공명하고, 1523년 1월에 <67개조 선언>을 발표해서 시의회에 교회개혁의 실행에 박차를 가했다. 이는 스위스의 자립한 소도시에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세례와 성찬에 대한 츠빙글리의 생각은 단순해서 그것은 본래적인 성사가 아니라, 교회의 상징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해석은 마르부르크 회담(1529)에서 루터와 일치하지 않아 결별했는데, 그것은 다분 쌍방에게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적어도 루터에게는 정교일치의 의도는 없으며, 그 조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마침내 전사하고 개혁사업은 파렐과 칼뱅에게 계승되었다. 칼뱅은 1536년, 파렐의 간청으로 제네바의 개혁에 가담하고, 일단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기독교 강요』를 고쳐쓰고, 41년에 돌아와서 마지막까지 이 땅에서 개혁에 몰두하였다. <제네바 신앙고백>과 『제네바 요리문답』에서 볼 수 있는 개혁의 초점은 <참된 교회>의 형성에 있으며, 신도는 선택과 소명에 따라서 교회원이 되고, 계약과 교섭하는 중에 살아가는 엄격한 훈련을 받는다. 세례와 성찬은 그 자체가 은혜가 아니고, 교회를 통해서 보아야 하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결합되기 위해서이다. 칼뱅은 설교직과 장로(감독)직을 겸임하고, 권위와 질서있는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것은 이미 시작된 가톨릭 측의 공세에 대해서 복음주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불가결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이단과의 대결도 피할 수 없고, 리베르탱(자유사상가)이나 인문주의자로 반삼위일체를 제창한 셀베투스에 대한 과혹한 처치가 눈에 띠었다. 1549년의 <취리히 협정>에 의해서 스위스개혁파교회의 기초가 정해진 이후에 칼뱅은 모국 프랑스의 위그노를 도왔으며, 또한 녹스를 지원해서 스코틀랜드에 장로파 교회를 세우고, 베이즈를 초대해서 각지에 대학을 건립하거나 개혁하였다. 칼비니즘이 네덜란드에 전해진 것은 1571년 이후로, <벨기에 신앙고백>을 낳았는데, 국민주의가 활발한 이 지역에선 예정설을 완화하지 않겠다는 아루미니우스파와의 논쟁이 나타내듯이, 종래의 엄격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의 시대적 한계를 나타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앙의인론에서 시작해서 성서원리에 따라서 성사와 교황권을 부정하기에 이르는 루터적인 종교개혁의 개념이 영국 국교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에서는 이전부터 교권과 왕권의 대립이 깊고, 로마에 대해서 지방교회적 성격을 지녔는데, 위클리프와 같은 반교황주의를 받드는 선구자도 있어서 앵글리카니즘이 강화되고, 1531년 이후, T. 크롬웰의 헌책으로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하고, 그 지상권을 인정해서 로마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이 이루어졌다(국왕지상법, 1534). 왕과 교회의 관계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정비되지 않았는데, 1688년의 명예혁명에 의해서 브리텐왕국은 앵글리카니즘을 국교회로 하고, 비국교도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서 자유교회를 만들 것을 허용하였다. 앵글리카니즘의 신앙내용은 1549년 『기도서』와 1570년의 <39조의 신앙고백>에 나타나고, 독자적인 사도전승을 가지는 방법으로 가톨릭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개혁은 교회의 정치적 독립의 과정으로도 보여서, 반드시 모두가 종교개혁은 아니다.
종교개혁이 진행됨에 따라서 유럽은 큰 혼란에 빠졌다. 독일영주간의 싸움,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이 계속 이어지고, 베스트팔렌 조약(1648)에 이르기까지의 1세기간, 신구 두 파의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에 인민주권의 사상을 일으키고, 30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을 소멸로 이끌었으므로, 그 사이의 가톨릭측의 <교회쇄신>과 이를 지지한 광범위한 재생운동은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해도 좋다. 그 재생운동은 중세와 마찬가지로 먼저 수도원에서 일어났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이슬람 교도의 침입으로 고통을 당하였는데, 1492년에 국가는 교회와 일체가 되어서 이를 추방하고, 아메리카 대륙도 발견하여서 한때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다. 이 무렵 엄격주의라고 불리는 신비주의가 성행하고, 아빌라의 테레사나 십자가의 요한이 그 선두에 섰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에 전파되어서 <오라토리오 운동>(오라토리움은 기도의 집으로, 여기에서는 미사를 올리지 않는다)을 일으키고, 오라토리오회, 살레지오회 등을 창설했다. 이들은 엄격한 회칙을 가진 수도회가 아니라, 사회적 활동을 지향하는 공동체이다.
가톨릭 종교쇄신의 담당자가 된 예수회는 이냐시오로욜라가 일으킨 것으로, 이는 <전투부대>라는 의미로 캄파니아라고 불렀다. 1558년의 회헌에 의하면 총회장 위에 교황이 절대적인 수장이 되고, 회원(會員)을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또한 특별한 신학적 훈련과 철저한 영조(영신수련)가 요구되었다. 예수회는 각지에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일념으로서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보냈는데, 그 점에서는 프로테스탄트에 한 걸음 앞섰다. 일본선교의 사비에르, 중국선교의 마테오 리치, 인도선교의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 등이 유명하다. 가톨릭 교회쇄신으로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1545년 12월에 열려서 63년 12월까지 3기에 걸쳐서 계속된 트리엔트 공의회이며 예수회는 이에 다수의 유명한 멤버를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는 고대의 신조를 확인해서 『불가타』(라틴어역 성서)를 결정하며, 사크라멘트의 취급을 엄격하게 하고, 나아가서 회의주의를 배제해서 교황권을 회복하고 가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중세 초기의 갈리아교회의 전통을 이은 갈리카니즘에 의해서 교회와 국가는 일체라고 생각했으며, 이에 의거해서 위그노를 압박하였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로마교황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절대 왕정을 대표하는 루이 14세는 <태양왕>으로 불리며, 자신도 <하나님(㉮ 하느님)의 대리자>라고 해서 위그노를 탄압하고, 나아가서 은혜와 자유의지의 문제로 예수회와 싸운 장세니스트를 탄압하였는데, 그 갈리카니즘은 교황을 억압하고, 예수회의 교회중심주의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1773년에 예수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는데, 그는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의 무익을 알았기 때문이다. 앞에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황권을 회복시켰는데,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수도로 하였기 때문에 교회령은 상실되고, 교황은 정치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었다. 중세 이후 국가의 독립과 발전과 함께 일어난 교권과 왕권의 대립은 여기에서 종지부를 찍고, 동시에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교회와 함께 교파적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는 『현세의 주권에 대해서』(1523)에서 2국론을 논하고, 교회의 비정치화의 방향을 지향했다. 실제 독일의 루터파는 열광파나 재세례파와 예리하게 선을 그어서 지방교회로서 자기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자기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이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구한다는 삶의 방식으로, 이로써 근대 프로테스탄티즘은 중세의 교권과 왕권, 교회와 수도원, 정통과 이단의 병행과 대립을 원리적으로 극복하는 수단을 얻었다. 근대화에 관해서 루터파와 개혁파가 걸은 그후의 경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현재 교회는 세속과의 대립을 항상 바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을 개방하고, 그로써 교회의 개혁은 교회자신이 이루는(<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표어) 것이 되었다. 여기에 신교의 자유나 사회윤리의 형성을 가져오는 근대 그리스도교의 <세속화>가 있으며, 가톨릭교회 또한 이를 쫓아갔는데, 이를 교회사의 제3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은 시대적 제약에서 오는 모든 불철저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서 중세와는 비연속의 씨를 잉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루터파교회는 1세기에 걸친 격동후에 경건주의에 의해서 근대화에 대한 길을 걸었다. 슈페나, 프랑케, 친첸도르프로 대표되는 3대의 발자취는 계몽의 진전과 중복되어 있다. 경건주의는 초자연적 이성으로 조직되는 정통주의 교의학을 배제하여 성서와 설교를 중시하고, 내적 경건의 풍요로운 신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적 실천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디아코니세라고 불리는 사회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인데, 그 정신은 경건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독일 신비주의, 프랑스의 키에티즘, 퓨리탄의 금욕 등에 관련된 점에 있으며, 그 점에서 경건주의는 고립된 운동은 아니었는데, <교회내의 소교회>를 표방하면서도 교파가 되지 않았던 점은 퓨리탄과 다르다. 친첸도르프는 체코형제단과도 협력해서 헬른푸트 형제단을 만들고, 아이슬랜드, 아메리카 신대륙, 동인도 등에 전도하였다. 슐라이어 마허는 이 형제단에서 키워지고, 마침내 근대주의의 신학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형식적인 교의학이나 신조에서 멀어진 신앙론, 종교론으로, <절대적 의존감정>으로서의 경건의 체험을 기술하는 것인 신학의 과제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계몽과 결합되어서 성서의 역사적, 비평적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것이 이 자유주의 신학과 일체가 되어서 19세기에는 과거에 유례없는 학문의 세기가 되고, 그만큼 그리스도교의 세속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 루터, 칼뱅의 개혁사상을 계승해서 국교회의 불철저한 개혁을 철저하게 해서 근대화의 길을 연 것은 퓨리탄(청교도)이다. R. 브라운, 그린우드(John Greenwood, ?~1593), 바로우(Henry Barrow, 1550년경~93) 등은 국교회에서 나와서 독립파(independents)가 되고, 회의제적인 장로파도 물리쳐서 개개 교회의 자유성을 존중하고, 교직ㆍ평신도의 구별이 없는 <만인제사>를 실현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회중파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퓨리탄 사상의 기초는 네덜란드 개혁파의 신학자 코체유스(Johannes Coccejus, 1603~69)의 계약신학이다. 이것은 선택과 계약에 의한 공동체의 성립을 구제사의 목표로 하고, 이 목표를 향해서 실천적 금욕을 중시한다. O. 크롬웰은 왕정과 귀족원을 폐지해서 공화정을 세우고(퓨리탄 혁명, 1649) 이상의 실현을 도모하였는데, 그후의 혼란 중에서 퓨리탄은 점차로 정권을 빼앗기고, 명예혁명(1688) 이후에는 오로지 교파로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중세에 볼 수 있는 분파와 달리, 국가권력을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교회 독자적인 힘을 회복하고, 세속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1620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필그림 파더스(<순례의 선조들>이라는 뜻)를 이어서 많은 퓨리탄이 뉴잉글랜드에 식민지를 세우고, 신정제를 완화해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인 타운 커뮤니티를 건설했다. 교파는 전통적 교회에서 헤어졌는데, 교회 본래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점에서 교회와 본질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파가 자유롭게 발달한 미국에서는 역으로 세속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서 세워진 분파가 되고, 비역사적 집단으로서의 데노미네숀도 다수 발생하였다.
근대의 중요한 교파로서는 이미 들은 장로파와 회중파 외에 침례파, 기독우회, 메서디스트를 들 수 있다. 침례파와 기독우회는 각각 내적ㆍ신비적 생명을 중시하며, 제도를 싫어해서 교회 밖으로 나와서 적극적으로 전도를 행하는 것 외에, 양심의 자유와 평화를 사회적으로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초기 침례자로서 J. 바니언이 유명하다. 한편 18세기 중반에 웨슬리 형제에 의해서 시작된 메서디즘 운동은 적어도 처음에는 독립된 교파를 만들고자 하지 않고, 신도 각자의 내적 각성이나 형제단적 활동을 추진함으로써 국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민사회와 산업사회에 적합한 길을 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메서디스트라는 것은 창시자의 정규적인 생활방법(메서드)으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메서디스트도 미국에서는 교파로서 성장하고, 침례파와 함께 2대 교파가 되어서 노예해방에 노력하고, 적극적으로 해외전도를 행하였다. 영국 본국 내에 머물러서 국교회를 개선하고, 사회문제나 노동문제에 관련된 것으로서는 19세기 중반의 광교회파를 들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신성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이어서 이탈리아 왕국건립과 함께 교회령을 잃고, 나아가서 1929년의 라테란 협정에 의해서 바티칸시국을 얻어서 이탈리아의 국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1500년에 이르는 교회 국가가 끝난 것이 곧바로 가톨릭시즘의 쇠퇴를 의미하지는 않고, 오히려 이를 통해서 현대의 종교로 탈피했다고 보인다. 300년에 걸쳐서 열리지 않았던 공의회는 1869~70년에 바티칸에서 열리고, <교황무류설>이 새로운 교의로서 성립하였다. 이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의한 가톨릭시즘의 쇠퇴에 항거해서 교황지상주의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이전부터의 운동의 성과이기도 한데 그 운동에 <울트라몬타니즘>이 있으며, 또한 예수회의 부흥(1814)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교의의 결정에는 공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선례를 연 것으로, 이 이후 가톨릭 내부에서 가톨릭을 비판하는 것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비판은 보편주의와 분립주의, 또는 교황지상주의와 회의주의의 대립에서 일어나는 종래의 정치문제와는 달리, 한층 종교적인 것이다. <고(古)가톨릭주의>운동은 울트라몬타니즘이나 네오토미즘(신토마스주의)과 같은 보수적인 것을 피해서 8세기 이전의 전통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으로, 각국어로의 예배나 교회합동에 대한 참가 등, 오늘날 활용되기에 이른 제언을 지녔다.
프랑스의 근대주의자 로아지는 대학으로부터의 추방이나 파문에 굴복하지 않고, 프로테스탄트의 성서비평학을 도입해서 대담한 학설을 발표하였다. 현대의 가톨릭 신학자의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연구, 프로테스탄트 신학과의 대화, 신앙의 실존론적 해석 등을 행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65년에 열려 출석자 2800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것이 되고, 프로테스탄트 측의 옵서버도 이에 가담하였다. 그 사이, 교황 바오로 6세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앞에 두고 설교한 점, 또한 회기 끝에 과거에 동방 정교회에 던진 파문장을 파기한 점은 상징적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에 기록할 만한 일이었다. 회의는 4기로 나뉘어지고, 신앙의 내적 쇄신, 전례의 획일화의 정정, 교회일치운동의 추진, 전쟁회피를 위한 국제협력 등에 관한 선언, 교령이 채택되었다. 이 회의를 거쳐서 가톨릭교회는 비정치적 수단으로서 평화와 정의를 호소하는 신앙단체로 바뀌고 있다.
근ㆍ현대에서 동방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붕괴, 러시아 혁명이라는 두 건의 세계사상의 대사건에 의해서 큰 변동을 맞이했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구 비잔틴교회)는 정교도의 밀레트를 위임받고, 비잔틴시대보다 광대한 지역을 관할구로 하고, 나아가서 불가리아나 루마니아 등 과거에 슬라브어 전례가 확립된 지역에 다시 그리스어 전례를 강요하고, 교회의 그리스화를 도모하였다. 민족해방의 분위기가 고양되자, 총주교좌는 오스만제국의 대변자로서 그것을 억제하는 입장에 서서, 각지의 성직자나 수도사의 분노를 샀다. 19세기 전반부터 후반에 걸쳐서 발칸제국이 독립을 달성하자, 국가의 교회도 독립하고,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는 행정구분에 준한 교회 관할의 원칙에서 그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영토외의 마케도니아에 대한 관할을 주장한 불가리아 정교회와의 분쟁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그리스의 아토스산은 총주교좌의 관할에 머물렀다. 이렇게해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는 관할구역의 대부분을 잃고, 명목적인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제정 붕괴(1917)와 함께 피터 대제의 교회개혁(1721) 이후 폐지되었던 총주교제가 부활하였다. 신정권은 교회와 신자의 저항을 억압해서 정교분리, 교회소유지와 재산 몰수 등의 시책을 실행하는 것 외에, 정부에 충성을 서약하고 대립교회의 활동을 지원하고, 대규모적인 반종교 선전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다수의 성직자가 유럽으로 도망하고, 망명교회를 설립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제2차 대전과 함께 정부에 협력해서 전의 고양에 노력하고, 대신에 신학교육재흥 등의 양보를 얻었다. 전후에도 이 노선이 계속되어서 교회는 국제적인 반전회의 등에서 정부의 외교정책의 대변자가 되었다. 제2차 대전 후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한 동구제국의 정교회도 대개 러시아의 경우와 같은 지위에 놓여졌다. 이렇게 해서 동방 정교회의 세력은 현저하게 감퇴하였다. 그리스에서는 정교회가 국교의 지위에 있었는데, 현재의 헌법에서는 다소 후퇴해서 지배적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현재에는 대부분의 정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맹하고 에큐메니즘(세계교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1965년,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아테나고라스와 로마교황 바오로 6세가 1054년 이후의 파문을 서로 풀어서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와의 사이에 오랫동안의 적대관계도 해소되었다.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퓨리탄 이후의 교파 및 경건주의가 추진한 종교개혁의 근대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19세기가 되어서 무수한 교파를 낳은 점이나 시민사회의 윤리를 구하고 그 중에 매몰되었던 것에 대한 반성을 출발점으로 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세속화의 낙천주의를 노출하는 것이었다. 변증법 신학이라고 불리는 운동은 독일, 스위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을 배후에 가지며, 기적과 재림의 신앙으로 살아 온 블룸하르트 부자로부터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허무주의를 비롯한 문화의 위기와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종말이라는 역사의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종말론을 신앙의 중심에 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루터부흥도 이 운동과 결부되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길을 걸었는데, 바르트는 신학자로서 과거에 없는 큰 규모로 그리스도교, 특히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가톨릭과의 대화를 가능케하였다. 제2차대전 중에는 바르트나 니메라에 의해서 <바르멘 선언>이 나오고, 나치즘에 의한 유대인 박해나 그리스도교의 독일 민족화에 대한 반대가 이루어졌다. 봄헤파는 이 선언을 짊어진 고백교회에 속하여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가해서 붙잡히고, 패전 직전에 처형되었다. 그 <비종교적 그리스도교>나 <이 세상을 위한 교회>라는 사상은 전후의 그리스도교의 기둥이 되었다.
한편, 19세기 후반의 미국에서는 교파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 오늘날의 교회합동운동의 기원이 탄생했다. 그것은 기독교 청년회(YMCA), 기독교 여자청년회(YWCA),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등으로, 모두 평신도 운동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더 한층 본격적인 것은 1910년 에든버러에서 가져온 세계선교회의(후에 국제선교협의회 IMC)이며, 이는 다른 세계교회운동과 함께 48년 암스테르담에서의 세계교회협의회(WCC)로 전개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은 원래 국제정치에 의한 분단이나 정체를 자신이 극복할 만한 힘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그 동기가 서구에서의 교회의 다원주의에 대한 반성에 있으며, 따라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립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교회사상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스도교가 중앙아시아를 통해서 동아시아에 최초로 온 것은 네스토리우스파–중국에서의 경교–에 의해서이며(7세기 전반), 그 후 13,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에 의해서 인도에 전도되었다고 한다. 16세기에는 아시아 전도가 본격화되어, 1542년에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가 인도 서해안의 고아에 상륙하고, 그 후 10년 이내에 동아시아 일대를 가톨릭의 포교범위에 넣었다. 그러나 자비엘이 중국상륙을 앞두고 사망하고 예수회도 쇠퇴하여서, 17세기에는 전도 흔적은 거의 소멸하고, 겨우 필리핀에서만 이어졌다. 한편 프로테스탄트는 17세기에 들어와서 유럽 밖으로 전도를 시작해서 그것이 현저하게 활발해진 것은 침례자에 의해서이다. 케아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3년 벵골에 상륙하고, 후에 콜카타에 와서 벵골어 성서를 완성하였다. 이 침례자 사이에서도 전도협회가 설립되었는데, 그 후 95년에 설립된 런던 선교회의 활약은 현저하며, J.R. 모리슨, W. 밀른, 기츠라프를 파견해서 중국 전도를 행하였다. 기츠라프는 한역성서로 알려졌다.
19세기에 들어오면 더욱 많은 전도단체가 설립되어서 아시아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미국의 장로파, 침례파, 메서디스트의 선교사가 가장 많으며, 오늘날 일본이나 대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은 이들 교파이다. 물론 대영성서협회(1804년 설립)처럼 초교파적 전도를 지향하는 자도 많다. 1865년에 J.H. 테라에 의해서 시작된 중국 내지 전도회의 활동은 아시아 전도사 중 가장 기념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문화혁명에 의해서 추방될 때까지 머물렀으며 그 사이 본국 영국으로부터의 자금원조는 적었지만, 학교ㆍ병원 기타 사업에 손을 대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목적이 아니라, 단지 신앙에만 의한 복음의 선교가 목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