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흥군 할아버지 묘소
석흥군파
이무를 시조로 하고 이척·이여상·이유징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세거 성씨.
[연원]
연안이씨는 당나라 장군 이무(李茂)를 시조로 한다. 이무는 660년(무열왕 7)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동맹군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따라왔다가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향경위]
연안이씨 고창군 입향조인 이척(李惕)은 좌의정을 지낸 이원발(李元發:의정공)의 9대손이자 이대승(李大升:재령공)의 증손으로 1569년(선조 2) 서울에서 태어났다.
정국공신으로 석흥군(碩興君)에 봉해지고 조천부사(朝天副使)로 중국에 가서 ‘황극전(皇極殿)’ 액자를 써서 황제에게 영정·관대·필연·옥동자·교인갑 등을 받아 왔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할 때 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강상(綱常)을 바로 잡기 위해 극간하다가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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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상(李汝相)은 중종반정공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곤(李坤)의 5대손으로 1634년(인조 12) 서울 와우방
(臥牛坊) [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남하하여 고수면 부곡리 연동에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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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징(李悠懲)은 연령부원군(延靈府院君) 이주(李澍)의 증손으로 1644년(인조 22)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서 태어났다.
벼슬살이를 하다가 화를 피해 남하하여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에 은거하다가 아들 이장(李?)이 고창군 해리면에 살던 언양김씨 찰방 김명석(金命錫)의 사위가 된 것을 계기로 해리면 평지리(平地里)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현황]
2009년 현재 이척의 후손들이 부안면 검산리 수사, 고창읍 등지에 살고 있으며 종가에 중국 황제에게서 받은 물건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여상의 후손들이 고수면 부곡리, 흥덕면, 부안면 등지에 살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창군에 살고 있는 연안이씨는 총 153가구에 349명이다.
중시조 태자첨사공 太子詹事公 휘 습홍襲洪 ~ 의정공議政公 휘 원발元發 ~ 연성군延城君 휘 곤坤 ~
재령공 載寧公 휘 대승大升 ~ 석흥군 碩興君 휘 척惕
1569(선조 2)∼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정응두(丁應斗
일찍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참봉으로 근무하던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고, 1605년 순변사 이시언(李時言
이듬해 병조좌랑·예조정랑을 거쳐, 이듬해에는 지평·전적·지평을 차례로 제수받아 유희분(柳希奮) 등과 함께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
배천군수(白川郡守)로 있던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직재 첩의 사위인 황보신(皇甫信)을 체포한 공으로 가자되어 형조참의에 발탁되었고, 그 뒤 훈신으로서 상을 당하여 호상(護喪
1617년 서궁의 폐비 문제가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였고, 1620년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부임한 뒤 술에 빠져 오랫동안 좌아(坐衙)를 폐기하였다는 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석흥군(碩興君)으로 봉해졌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참고문헌≫ 仁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燃藜室紀述
첫댓글 1617년 서궁의 폐비 문제가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였고, 1620년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부임한 뒤 술에 빠져 오랫동안 좌아(坐衙)를 폐기하였다는 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이후 추가>
인목대비폐위에 관하여 이 어른게서는 특이한 행동이 소문으로 저명하신데
퇴청하는 길에 너무도 분함을 참지 못하시어
"쓰고 있던 관모(官帽)를 대권바닥에 동댕이치셨다"하였고
그후 이 말이 다리를 달아 " 발로 차버렸다" 까지 발전하여 소문이 헌부에 이르게 되어
턴핵을 당하시고 가까운 전북 임실로 귀양을 가시게 되는데.....그후 곧 복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