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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의 경우는 분류가 복잡한데 제작 방법에 따라 단순궁, 복합궁, 합성궁이 있고 휘임 정도에 따라 직궁과 곡궁이 있고 소재에 따라 각궁, 목궁, 철궁, 죽궁 등이 있으며 용도에 따라 군궁, 예궁, 평궁, 육량궁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활은 흑각궁인데 흑각궁은 합성궁에 속하며 군사용으로 주로 쓰이는 이중 만곡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합성궁은 단순궁처럼 한 가지 재료로만 활채를 만드는 게 아니고 또한 복합궁처럼 활채의 인장 강도를 높이기 위해 나무껍질이나 힘줄 등을 덧대어 묶은 것도 아닌 나무 활채에 쇠뿔, 쇠심줄을 대고 민어부레풀(어교)을 이용해 접착하여 재료 간의 연신율을 줄여 탄성력을 극대화시킨 활이라 할 수 있는데 유목 민족이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중만곡궁이란 건 활채가 손잡이라 할 수 있는 줌통 양쪽에서 한 번 휘고 시위를 거는 고자 부분에서 또 한 번 휘었다고 해서 칭하는 분류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활을 보면 m자 형에 가깝게 휘어있는데 시위를 풀어놓으면 반대쪽으로 c자 형으로 말려버리는데 이걸 반대로 뒤집어 꺾어서 시위를 걸면 탄성력이 극대화되는 구조입니다
우리나라는 농경국가임에도 아주 먼 옛날부터 각궁을 썼는데 삼국사기에 보면 동천왕이 오나라의 손권에게 각궁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고 5세기의 무용총 수렵도 벽화에도 무사들이 활채에 재료를 덧댄 각궁을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죠 활에 관한 한 아시아 국가들은 타문명에 비해 대체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이테크를 보유했다고 볼 수 있죠 영국의 장궁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활이지만 실제로 세계 역사를 뒤바꿔놓은 활은 훈족이나 몽골족, 투르크족, 파르티아 등의 유목 민족의 활이었으니까요 우리나라의 각궁도 이들과 계보적으로 동일한 유파이면서도 이들에 못지 않은 위력을 지녔습니다 실제로 동북아 삼국에서 우리나라만큼 활에 대해 자타가 공인하는 하이테크를 보유한 나라도 없으니까요
역사적으로 왜 아시아 유목 민족에게서 이런 강력한 합성궁이 개발됐는지는 합성궁의 창시자가 명시된 것도 아니고 이게 어느 민족이 처음 개발한 건지도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활이 바꾼 세계사라는 책에서는 합성궁의 효시가 한민족의 선조인 예맥인들의 각궁에 있다고도 하는데 정설은 아닙니다.. 다만 유목 민족은 말과 친숙했고 기동 전술에 능했기 때문에 말 위에서 쏠 수 있는 가볍고 강한 활을 이용해 농경 민족의 보병 부대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기사술에 적합한 짧고도 강한 활을 추구해왔고 그 결과 다양한 재료를 조합하여 합성궁이라는 강궁을 개발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활의 종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조선시대에 사용된 활은 매우 종류가 많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활은 흑각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활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활채의 안쪽에 열대 지방의 물소뿔을 길게 덧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선시대 활의 종류가 많지만 대개는 활채의 안쪽에 대는 재료에 따라 나눠집니다 즉, 강도를 높이고 탄력을 강화시키는 재료로 물소뿔을 쓰면 흑각궁, 황소뿔을 대면 백각궁(향각궁), 통짜 물소뿔 대신 조각난 물소뿔을 대면 흑각후궁, 사슴뿔을 대면 녹각궁, 부러지기 쉬운 활채를 산뽕나무 대신 쇠로 만들면 철궁, 뿔 대신 저리갈나무를 대면 교자궁, 앳기찌라는 나무를 대면 목궁이라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과거 시험에서 궁력 시험을 위해 사용한 육량궁, 향사례나 대사례에서 쓰는 예궁 등이 있었습니다만 재료나 제작 기법이 특별한 건 아니고 단순히 용도의 차이 정도였습니다
조선시대 활의 제작에는 여러가지 재료가 필요했는데 이는 일단 활채에는 대나무로 손잡이 부분을, 산뽕나무로 활채의 양 날개 부분인 고자를 만들었고 활채의 안쪽에는 쇠뿔이나 탄력 좋은 재료를 댔고 활채 바깥 쪽에는 질긴 쇠심줄을 댔습니다 그리고 부러지기 쉬운 줌통(손잡이)에는 참나무를 덧댔습니다 이 때 각 재료는 그냥 덧댄 게 아니라 어교라 불리는 민어부레풀이라는 접착제를 써서 단단히 붙였습니다 어교는 마른 후에도 실리콘처럼 유연하기에 성질이 다른 재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고 접착력이 우수하여 덧댄 재료들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활채를 만들면 겉표면에 화피(산벚나무 껍질)로 감싸줍니다 화피는 탄력이 우수하여 변형이 심한 활의 표면을 감싸도 찢어지지 않고 방수 효과도 우수했습니다 참고로 고급 활은 화피 대신 옻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줌통에 종이 등을 덧대고 그 위에 삼베로 여러 번 감아 손으로 잡기 좋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줌통의 윗 부분은 화살과 마찰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에는 쇠가죽 조각을 덧대 활의 손상을 막아줍니다
마지막으로는 시위를 거는 부분인 세코를 파야 합니다 세코를 깎은 후에는 어교를 먹인 쇠심줄을 감고 그 위에 다시 가죽을 붙입니다 그 다음에 색종이를 붙여 세코를 장식해줍니다 그리고 세코 밑에 활 시위 매듭과 활채가 만나는 부분에는 가죽을 덧대 화피의 손상을 막습니다 참고로 시위는 비단실과 면실을 여러 겹으로 겹치고 여기에 밀랍을 바릅니다 화살을 거는 부분에는 붉은 실을 여러 번 감아 놓습니다
조선시대 활의 제조법은 생각보다 복잡하며 단순히 나무를 휘어 만든 활이나 몇 가지 나무를 합쳐서 묶은 활에 비해 여러 탄성력 좋은 재료를 덧대고 그 재료 간의 성질을 어교를 통해 연신율 차이를 줄이는 방식을 통해 탄성력을 안정적으로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활은 c자 형으로 말려있는 형태를 띄게 되는데(사진 참조) 이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 꺾어 시위를 걸면 아래와 같이 됩니다 이 때에 활채 안쪽의 물소뿔과 활채 바깥 쪽의 쇠심줄이 활의 복원력(물체에 변형을 가했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힘)을 극대화시켜 크기는 작아도 강한 장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살의 종류도 활의 종류 못지 않게 많습니다만 그나마 많이 쓰인 군용 화살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조선시대에 전투용으로 가장 널리 쓰인 화살은 류엽전인데 이 화살은 이름 그대로 촉이 버들잎처럼 뾰족합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화살의 사거리를 늘리는 데 주력하여 화살촉이 가볍고 화살깃이 작은 류엽전을 기본적인 군용 화살로 썼는데요 다른 이름으로는 장전, 마전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류엽전이 기본형이라면 갑주를 관통하기 위한 화살로는 착전이 있었습니다 착은 구멍을 뚫는 데 쓰는 전통 끌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화살촉이 길고 뾰족하여 갑옷을 뚫는 데에 적합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화살은 제조된 수량은 많지만 기록에서 많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은 대우전이라는 화살인데요 이름 그대로 화살깃이 큽니다 거기다가 화살촉도 무거운 편입니다 이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사거리가 짧아지면서 정확성과 위력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제조 단가가 류엽전의 10배에 달해 사냥이나 의전용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육량전은 영화 최종병기 활에도 등장하는 화살인데 본래 조선의 것인데 영화에서는 만주족이 쓰더군요.. 어쨌든 일반 화살보다 화살촉의 무게가 여섯 배에 달하는 중량물인지라 위력이 강했습니다 본래 목적은 강한 활로 쏘아서 적의 방패를 깨뜨리는 등의 무력 시위용이었지만 지나치게 무거워 팔을 상하게 한다는 이유로 무과 시험에서 궁력을 시험하는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다음은 화전인데요 화살촉 뒷편에 유황 같은 발화성 물질을 삼베로 감고 실로 묶은 뒤 심지를 꽂아 불을 붙여 쏘는 방식이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화살 끝에 직접 불을 붙여 쏘면 날아가다가 화살이 불에 타버릴 수도 있고 화약주머니가 쏘기도 전에 터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약주머니에 달린 심지에 불을 붙여 쏘면 표적에 박힌 후 폭탄이 터지듯 화공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에 쓰인 화살 중에 가장 위력적인 것은 편전 즉, 애기살이었습니다 이 편전은 고려시대 말에 몽골족과 싸우던 김강신이란 자가 전투 중에 화살이 떨어져 적의 화살 하나를 줏으면 네 토막을 내서 통아를 이용해 쏘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위기 상황에서 쓰인 임기응변적 재치라고 할 수 있죠
편전은 이름 그대로 조각난(짧은) 화살인데 이는 류엽전의 길이가 대략 80cm인 데 반해 편전은 25~30cm에 불과해 매우 짧았습니다 이런 화살은 그냥 시위에 걸고 쏠 수 없고 대나무 대롱을 반으로 쪼갠 통아라는 보조 기구에 덧대야만 쏠 수 있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이 경우 화살이 상대적으로 가벼워 탄속과 사거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반면에 무게가 가벼워 탄도가 불안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빠른 탄속으로 인해 전체적인 위력은 보완되며 이 때문에 다른 화살보다 먼 거리에서 적을 쓰러트릴 수 있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무려 천 보를 날아갔다는 말도 있지만(1보=1.2m) 실제로는 400~500m 정도의 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반 장전이 200~250m 정도를 날아가는 것에 비해 어마어마한 차이죠 또한 작은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기 때문에 적이 보고 피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따라서 편전은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태종에 의해 조선군의 제식 무기이자 아국장기, 즉 우리나라의 강점이자 적진을 무너뜨리고 적의 사기를 꺾는 데에 최고의 무기라고까지 평가받습니다 심지어는 세종 당시의 과학자 이천은 화포 개량 사업을 반대하면서 당시에 쓰이던 지자포, 현자포 등이 편전에 비해 사거리도 짧고 형편 없으니 모두 깨버리자고도 하며 또한 인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등장하여 각궁이 무력화되는 시기에도 "병졸의 기예로 말하건대 우리나라는 활과 화살이 으뜸인데 편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서 그 묘법은 조총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받습니다 실제로 성종시대에 조선을 방문한 명의 사신 동월이 지은 조선부라는 글에는 편전에 대해 "쏘면 능히 멀리 나가고 또한 반드시 명중하기 때문에 그 신비한 기술은 만주의 야만인들이 매우 두려워한다"라고도 하며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는"유붕수(柳鵬壽)란 사람이 있으니, 이는 나의 외서숙으로 활을 잘 쏘았다. 사신 최황을 따라서 중국에 갔었는데, 이때 오랑캐가 크게 몰려와 산해관을 포위한지 14일이나 되었다. 그러나 중국 장수는 성을 닫고 나가지 못했다. 붕수가 편전을 가지고 적을 쏘아 맞히어 죽이니 오랑캐들은 크데 놀라 말하기를 "고려 군사가 왔구나"하고 모두 도망해 버렸다. 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비단을 주게 하고 그를 상주었다 최간역의 글에 "전에 우리나라의 무인로서 사신을 따라 요동에 나갔던 자가 오랑캐가 성을 포위하는 것을 보자 한두 개의 강한 화살을 쏘아 수만 명 군사를 물리쳐서 지금까지 유명하다"라고 한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여 편전의 위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위력을 묘사한 것은 임진왜란을 겪은 정탁의 약포문집에 나온 것인데 "편전은 멀리 쏘는데 장점이 있다”며 “30~40보 거리에서는 2명을 쓰러트릴 수 있고, 100보까지는 1명을 쓰러트릴 수 있으며, 200보(240m)까지도 중상을 입힐 수 있다"라고 하며, 명청교체기에 명과 후금의 사르후 전투에 도원수 강홍립의 원정군과 함께 출전한 종사관 이민환은 "적(만주족)들은 먼 곳에서도 갑옷을 뚫을 수 있는 편전을 가장 두려워한다"라고 하여 편전의 위력이 가공할 만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나 임진왜란은 한중일 삼국의 군사력이 한 자리에 모이는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의 삼국의 각 장점을 조선 후기 무예백과사전인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삼국의 정예가 한 자리에 모였으니 중국의 창법, 조선의 편전, 일본의 조총이 그것이다."
이처럼 편전은 조선시대 내내 핵심적인 병기로 평가받는 무기였지만 단점 또한 있었습니다 일단 일반 화살에 비해 사법이 복잡하고 통아까지 쥐어야 했기에 거추장스러웠으며 이는 말 위에서 편전 사격을 하기 매우 불리하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반으로 쪼갠 대나무살에 화살을 대고 쏘다 보니 화살이 이탈하여 사수의 왼손목을 뚫는 불상사도 종종 발생했고 무엇보다도 태평성대가 계속되는 조선시대에 전반적으로 군비가 허술해지다보니 병사들이 이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편전은 오랜 시간 궁술을 연마하는 무관이나 일부 군인 등에 한해 전승돼 왔으며 이런 요인 때문에 조총 도입 이후 각궁과 함께 점차 주도권을 내주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활을 쏘기 위한 부속구를 설명하자면 우선 동개와 시복을 들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활집과 화살집입니다(아래 사진 참조) 활집에는 활과 등채(채찍)를, 시복에는 장전과 편전, 통아를 넣었습니다 동개는 왼쪽 허리 아래 쪽에, 시복은 등의 왼쪽에 차서 화살깃이 오른쪽 어깨로 나오도록 패용했습니다 그래야 오른손으로 화살을 뽑을 수 있으니까요
동개와 시복
그리고 중요한 게 바로 깍지입니다(아래 사진 오른쪽 참조) 깍지는 시위를 당길 때 엄지손가락에 껴서 손가락 대신 시위를 당기는 도구인데요 각궁은 탄력이 매우 강해 맨손으로 시위를 계속 당기다간 손가락에 심한 부상을 입습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깍지를 끼고 저 튀어나온 부분에 시위를 걸고 당기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활을 쏠 때 줌손(활채를 잡는 손, 즉 왼손) 부분은 시위가 스쳐지나가며 팔뚝이나 소매를 칠 수 있기 때문에 팔뚝에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보호대를 덧댑니다 이것을 팔찌라고 부르는데요(아래 사진 참조) 요즘에야 소매가 옛날처럼 너풀거리지 않았기에 많이 쓰이는 장비는 아닙니다만 조선시대 군용으로 쓰인 팔찌는 가죽으로 만들고 양쪽 끝에 고리를 달아 팔에 감은 후 고리에 끈을 달아 고정시켰다고 합니다
이상을 통해 정리해본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에는 매우 활 문화가 발달돼 있었으며 이는 곧 군사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리의 활의 성능과 활쏘기 실력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무예 차원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겨온 국민 스포츠의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활을 지키기 위해 전국의 많은 국궁장에서 많은 분들이 습사를 하고 계시며 전통 활을 개량하여 현대인의 스포츠에 적합하게끔 보급하고 계시는 많은 장인들이 있기에 그나마 우리가 살아있는 전통 문화로서의 국궁을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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