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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접지역인 소재지 서편의 팔공산과 동북쪽에 위치한 화산에는 폐허된 옛 절터와 그 흔적이 많이 산재하고 있으며 현존(청통면소재)하는 거조암(오백나한절)은 고려때 지눌스님이 그때의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서 동지들을 모으고 수도(修道) 하였는데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장소가 협소하여 지리산의 조계산(曹溪山)으로 옮겨가서 고려의 불교를 혁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화산 넘어 인각사(군위 골면소재)에서는 고려때 승 일연(一然)이 그 유명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전하며,우리지역의 화남리에는 임진왜란때 권응수 의병장군의 기념관이 있으며, 연정리에는 한송계(韓悚溪)선생 서원이 건립중에 있다.
여러곳에 재실과 사당등 정자의 이름만 있으며, 지금 남은 성황산 환벽정의 그 오랜 역사와 아름다움이 우리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리고 봉화재의 봉수대, 치산계곡의 치산(팔공)폭포, 화산벌의 옛 성터, 화성리의 향교, 성황산의 6.25신녕전투 기념비, 신녕면사무소에 있는 30여개의 비석군, 신녕역앞 한들의 입석(立石), 그외에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조선왕조 말기 동학(東學)의 창교자 최제우의 하치욱 접주, 하처일 제자, 해방후 김법린 문교부장관, 권중돈 국방부장관 등 인물이 배출된 지역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신녕은 다른 읍면과는 달리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를 계승발전시켜 향토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많은 향우회가 활동하고 있다.
선정비 외 24비가 있다. 옛 고을현감등 지역을 빛내거나 거쳐가신분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로 원래는 신녕면일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인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소재 신녕면사무소에 옮겨 관리중에 있다.
장군의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본관은 안동이며 능라군 덕신(綾羅君 德臣)의 아들로 1549년(명종 1년 병오)에 화산면 가상동(花山, 가상)에서 태어나 10살 때 화북면 금호동 중리에 이사해와서 자랐다. 태어났을 때 시조 사당에서 옥피리 부는 소리가 들렸다고 전함은 보통사람과 다른데가 있고, 18살 때 이웃동리인 화북면 오동에 살던 안 도(安道)의 딸과 혼인했는데 장모되는 분의 꿈에 자기집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사랑에 가보니 더벅머리 총각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장차 크게 될 사람이라 짐작하고 혼인을 치루었다고 한다.
39살에 별시 무과에 올라 경상좌수사 박 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1592년 4월 13일(선조 25년 임진) 47살 때 임란이 일어나자 박 홍이 겁을 먹고 적과 대항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다.
무력한 관군을 보다못한 국민은 전국 각처에서 벌떼같이 일어나 나라의 원수왜군을 무찌르려고 했다. 영천은 예나 지금이나 군사적으로 요충지대이다. 우리 군민은 분명히 일어섰다. 이 무렵 적은 여러곳에 분산하여 주둔하며 노략질을 일삼고, 영천의 적은 신령, 의흥, 안동의 적과 서로 연락하며 서로 수만이었다. 이에 권장군은 구국의 격문을 돌리니 구름같이 몰려든 의병과 동생 응전(應栓), 응평(應平), 같은 고을사람 이 온수(李蘊秀), 집안의 장정들을 데리고 그해 5월에 대동, 화북면 한천에서 적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또 적에게 붙어서 주민을 괴롭히던 관노 희손(官奴希孫)을 잡아죽이고 그의 무리 수백명을 토벌했다.
7월 14일 적은 '봉고어사'라 속이며 300여명이 군위에서 영천으로 내려왔다. 권응수 의병대장은 신령의병 이 온수, 정 응거(丁應据), 박 응기(朴應淇)등과 박연(朴淵, 지금의 화산면 석촌)에서는 의흥의병장 홍천뢰, 하 양의병 장 신 해등이 합세하여 왔기에 이들을 영솔하여 적과 싸워 참수 30 여 급, 총통 25자루, 창검40여 와 말들을 뺐으니 군성이 크게 떨치게되었다.
22일에는 달아난 적을 의흥 소계(小計)까지 쫓고, 또 화북면 사천에서 최인제(崔仁濟), 전 삼익(全三益)형제와 함께 적을 물리쳤다.
24일에는 영천복성을 위해 영천, 신령, 하양, 경주의 관군 및 의병과 의흥, 청송의 의병등 총 3,500여명이 다시 모여 합세하고, 경상 좌도 병사 박진(박진)은 안강에 있었는데 군과 변 응규를 시켜 군기와 화약류를 보내왔다. 이에, 창의정용진(昌義精勇軍)의 깃발을 세우고, 서로 약속하기를
싸움에서 대오를 잃은 사람은 참형으로 다스릴 것을 다지고, 마현산(馬峴山, 지금의 뒷동산)과 성주위의 마른 나무와 섭나무 등치를 많이 준비토록 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사들 틈에 세우고 나무를 베어 긴 사다리를 만들게 했다. 이날 적은 남천에서 수백명이 세마하다가 의병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25밤 권 장군은 동생 응평과 성밖의 버드나무에 올라 성안을 살피니 잡혀간 우리 동포가 일군에게 포위당해 있음을 봤다. 이에 활을 쏘아 적을 죽이니 성중이 들끓었다. 한편 냇가 숲속에 숨은 400여명의 장사가 물을 길러가는 적을 쫓으니 적은 그 후로부터 물이 없어 마른 곡식을 먹게 되었다. 이때 우리 진에서는 한가롭게 피리와 나팔을 불게하니 적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이날 의용군이 냇가까지 진군하니 명원루(明遠樓, 지금의 조양각)에서 적장이 "너희들은 어떤 무리들로 몇날이나 싸우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느냐? 서울이 함락되고 전국이 무너졌는데 너희같은 무리가 우리를 당하겠느냐? 살고 싶거든 내일 아침까지 너의 장수사 항복해 오너라."고 외치기에 권 장군은 말을 몰아 적장을 쏘아 넘어뜨리니 적은 숨어버렸 다.
27일 아침 성밑까지 진격하 여 방패를 짊어지고 긴 사다리로 성벽을 넘어들어 가 고 성문을 부수었다. 권장군은 전열에서 전진하지 않는 상람을 크게 호령하며, 큰 도끼로 성문을 부수었다. 우리 군사들은 서로 다투어 쳐들어가고, 적은 몹시 무서워 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총약이 날려 적은 총을 쏘지 못하는 틈에 수백명을 베니 적은 병기를 버리거 도망치기 시작했다. "불을 놓을테니 빨리 도망쳐 나오라"고 외치니 잡협던 우리 동포들은 도망쳐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섭나무에 불을 일제히 질렀다. 불길은 하늘을 찌르고 적은 산불 속의 새떼처럼 되었다. 남문쪽의 적은 앞강에 뛰어들었다가 칼날에 죽고, 성을 넘던 서북쪽 적은 도망치다 창에 찔려 죽고 살아남은 겨우 수십명이 경주로 달아났다. 적의시체는 산을 이루고 시체 타는 냄새는 10리 밖까지 풍기었다 한다. 총통창검이 900여자루 말 200여필을 빼았다. 우리 군사 전사자 80여명, 부상자 200여명이고, 포로되었던 사람이 1,900여명이었다.
이 영천복성은 우리 군민의 애국충정의 산 증거이며, 경상좌도를 확보 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영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임란 3대첩과 버금가는 승전이었다.
다음해 2월에는 순찰사 한 효순과 당교(唐橋)에서 적을 파하고 또 산양 탑전(山陽榻前)에서 적병 100여급을 베고 안동 모은루(募恩樓), 구담(九潭), 밀양, 황룡사 부근, 창암(昌巖 : 충청도) 형상강(兄上江)등지에서 적을 대파하고, 정유 재란때는 자기집의 양곡 200석을 내는등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고 달성, 경주 도산(도산)등지에서 적을대파, 또 원병온 중국장수 양 호(陽鎬), 마 귀(麻貴)를더와 울산에서 두 번이나 적을 부찌르는 등전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권 장군은 1604년 선무공신 2등 화산군으로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고, 1607년 공조판서, 1608년 남영장을 거쳐 한 평생 전장터를누비던 역전의 용사는 63세 되던 1608년 2월 선조대왕 승하로 서울에 갔었다가 병을 얻어 7월에 여관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 임금은 조례를 거두셨고, 시민은 철시했으며,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의(忠義)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빛나는 공훈은 우리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며, 그의 넋은 귀천서원에서 편안히 잠드시고 있다.
한광사는 영천시 신녕면 화남동(新寧面 花南洞)에 있다. 영천에서 안동쪽으로 국도를 따라 50여리쯤 가면 신령면 소제지가 나온다. 면 소재지에서 농로를 따라 동쪽 계곡을 들어가면 마을이 하나 나온다. 이 마을 어귀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 대장을 혁혁한 공훈을 세운 권 응수 장군의 유적지가 나온다. 이 마을을 지나 동쪽 산기슭을 향해 계속 올라가면 아담하게 자리잡은 조그만 사찰이 있다.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주목을 그는 것은 불좌대(佛座坮)와 삼층석탑이다.
불좌대는 바로 면천정사(勉川精 )앞에 있는데 부분적으로 약간의 손실이 있고 표면의 조각이 크게 파멸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좌대의 높이는 80㎝쯤 도는데 균형있는 대석과 짜임새있는 조각의 형태로 보아 적조 조각의 완숙기인 신라말이나 고려초의 것으로 추측된다.
지대석은 8각으로 되어 있으며, 하대(下臺)는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는 8각의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상대는 연꽃이 위로 피어있는 모양으로 각 면마다 8부중상(八部神衆像)으로 보이는 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대좌 위에 앉혀 있던 불상은 누구의 손에 의하여 옮겨 졌는지는 모르지만 귀중한 문화재를 함부로 원형의 자리를 떠나게 하여 3층석탑의 하단 기단 안에 안치되어 있다.
면천정사는 거물 안에 걸려있는 현판 기문으로 보아 70여년전에 한광사(閑曠寺)라는 고찰이 있었는데 절의 건물을 헐고 그 재목으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건물은 안동 권씨 소유지지만 사찰 경내에 있어서인지 사실상 사찰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정사 좌우에는 애웅전과 요사채가 있는데 이절의 유일한 법당(法當인 대웅전은 초라하지 그지없고 요사채는 심하게 낡아 있어 마치 사찰이라기 보다는 면천정사의 풍류 지 같 은 인상이 짙다.
그러나 고찰의 옛터임을 증 명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 물이 있는데 바로 불좌대와 함께 보물 675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다.
원래는 이 절의 전면 동서로 가각 타이 있었는데 현재는 한기만 남아 있고 한기는 산산이 분해된체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되었거나 뜰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현재 보존되어 있는 탑도 제 위치가 아닌 것 같으며 동서 두 타 가운데 어느 것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물론 소중한문화재를 고의적으로 허물었거나 자리를 옮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욱이 이 지방은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6·25사변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격전을 치루었으니 무엇 한가지 온전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 정도로 보존된 것만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이 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것으로 높이가 3m정도이다. 기단부는 훼손으로 하층 기단 면석은 없고 잡석위에 갑석을 깔고 그 위에 상층기단이 올려져 있다. 이기단 안에는 전기한 불좌대의 불상이 옮겨져 앉혀 있는데 높이가 75m정도이고 결가좌(結跏坐)하고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옷자락이 팔목 가까이 까지 걸쳐져 있다. 불상의 전체적인 윤곽은 뚜렷하지만 표면의 조각이 마멸되어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다. 또한 무릎 이하가 땅에 묻혀 있는 상태다.
탑의 상층기단은 4장의 판석으로 사방의 면석으로 세우고 갑석(甲石)을 덮었는데에는 우주(隅柱)즉 모서리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하층의 폭은 1m 90㎝, 상층은 1m 32㎝, 그리고 상층 면석은 1m 18㎝에 높이가 72㎝이다.
탑신은 옥신(옥신)과 옥개석(옥개석)을 각각 같은 돌에 다듬은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이는데 옥신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그대로다.옥개석은 모두 4단 받침을 갖고 있으면 낙수면의 경사 가 적당하다. 탑신 부표면에는 이끼가 많이 끼여 있고 약간의 마멸은 있으나 떨어져 나간부분은 없으 면 탑 의 맨 윗부 분 은 반만 있고 그 위에는 자연석을 하나 올려놓 았다.
현재 탑의 높이는 2m70㎝정도이고 좌대나 불상과 함께 같은 연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아담하고 정연한 조탑 양식이다.
이 탑과 나란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또 하나의 탑은 완전히 해체되어 상·하층기단 갑석과 3층 옥개석이 포개어져 한쪽에 놓여져 있으며 그밖의 탑재들은 면천정사의 주춧돌과 계단등으로 사용되어 있다.
가능하면 몇 개의 탑재를 재외하고는 대부분 남아 있으므로 복원하여 옛 그대로 의 쌍탑을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또 완전한 형태의 석등 하대석도 남아 있다. 연꽃을 엎어 놓은 듯 조각한 이 하대석은 탑안에 그대로 방치하여 있다
신녕면 치산리에 소재 "수도사"의 이 괘불화는 그림 테두리 맨 윗쪽에 「圓滿報身盧舍那佛」이라는 글씨가 둥근 원에 쓰여 있어 노사나불」임을 알 수 있다. 둥근 얼굴에 화려한 보관을 쓰 고 원만상의 보살형태를 하고 있는 독존형식으로 연꽃줄기를 받쳐들고 있으며, 보관(寶冠) 주위로는 삼신불(三身佛)중 비노사나불(毘盧舍那佛) 형태의 화불(化佛)이 일곱분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