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이 대학에 붙고 우리 결혼 20주년도 기념하고 내가 시간이 있을 때 여행을 하기로 했다. 몇년전 이태리 출장 때 혼자 가 보았던 이태리를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어 거기로 정하고 급하게 마일리지로 항공사에 예약을 했다. 일주일을 계획했으나 비행기 좌석이 여의치 않아 10일로 늘어났다. 날수가 늘어나니 욕심이 났다. 남부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떠나기 전 준비>
- Hertz에 렌트카 예약 (로마 구경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로마를 떠나면서 픽업하기로 하여 우리가 묵을 로마 중앙역인 Termini에서 차를 픽업하기로 예약했다) - 가이드북을 읽으며 세세한 일정계획을 세웠다 - 로마와 베네치아에 민박을 예약하고 나머지 장소는 현지에 가서 예약하기로 하고 전화번호, 위치 등 정보만 챙겨갔다. 호텔은 저렴하다는 ETAP호텔 체인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 Yahoo.com의 지도 서비스를 통해 도시간 거리 및 소요시간을 정리 - 여행관련 기행문 등을 읽다가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그라나다 소재)과 스페인 톨레도를 여행지에 추가 - 비용절감을 위해 라면, 햇반, 연양갱, 쵸코파이를 구입하고 전열기와 냄비를 준비물에 포함시켰다. - 환전을 했다. 500유로를 1800원으로 환전했는데 나중에 200유로를 더 1850원에 환전했다. 그 새 환율이 더 올랐다. (결국 이것도 부족해서 현지에서 현금서비스로 200유로 더 찾았다.) - 디카와 찍은 사진을 저장할 UBS메모리를 챙겼다. - 소매치기 대응연습을 했다. 누가 말 시키면 절대 대응하지 않도록 가족에게 당부했다.
<2월 15일: 출국 => 로마에서 숙박>
1시 55분 발 대한항공인데 기다리는 동안 모닝캄 회원자격으로 라운지를 사용하려고 했더니 3명까지 가능하다고 해서 아내는 밖에 남기로 하고 애들 둘을 데리고 라운지에 가서 요기를 좀 시켰다. 미안해서 나는 일찍 나가 아내와 함께 했다.
비행기는 현지시각 오후 6시 15분 밀라노에 도착했다. 우리는 잠시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다시 탑승하여 저녁 8시 10분에 로마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이 오래 걸렸다. EU와 Non-EU를 차별했다. 공교롭게 우리는 다른 비행기로 입국한 방글라데쉬인 뒤에 줄을 서서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기다리다 결국 늦게 다른 줄로 옮기는 바람에 수속이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짐을 찾아 민박집을 통해 픽업 서비스를 부탁한 사람과 만나 차를 타고 로마시내로 들어왔다. 민박집은 로마 중앙역 Termini 근처라 동네 첫인상은 좀 험악해 보였다. 민박집에 들어서니 여행 온 여학생들 열 명 정도가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방은 퀸사이즈 침대 하나와 벙크형 이층침대가 놓여 있었다. 로마에서의 첫밤을 곤하게 잤다.
(민박집 4인용 가족실)
<2월 16일: 로마 시내 관광>
시차 때문에 나는 새벽 3시부터 잠을 설쳤다. 5시에 모두 기상하여 씻기 시작했다. 7시에 민박집에서 아침을 주었다. 오뎅국, 계란말이, 돈까스, 오이지, 땅콩절임, 깍두기가 반찬으로 나왔다. 애들이 잘 먹었다.
민박집을 나와 우선 전철을 타고 오타비아노역으로 갔다. 전철 1회는 1인당 1유로. 5유로 지폐를 넣고 승차권 자동발매기에 넣고 거스름돈이 안 나와서 당황했다. 자세히 보니 거스름돈이 나오다가 턱 같은 곳에 걸려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기계를 몇 번 치니 나왔다. 치면서도 누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이 쓰였다. 전철 플래포옴은 우중충하여 뉴욕 맨하탄을 연상시켰다.
전철에서 내려 산피에트로성당으로 갔다. 아침 일찍이라 한적했다. 성당의 규모가 압권이었다. 베드로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성당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성당 입구 근처에 박물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두리번거렸다. 입장료를 받는 곳이 보여 박물관이냐고 물으니 맞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규모가 너무 작아 보여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와 바티칸박물관을 물으니 바깥으로 크게 우회해야 한다고 했다.
(산피에트로성당 앞 광장. 중앙에 오벨리스크가 있다.)
(산피에트로성당 정면)
(산피에트로성당 내부)
산피에트로성당 오른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걸으가니 바티칸박물관이 나왔다. 어른은 14유로, 학생은 8유로를 받았다. 학생증이 필요하다고 들었으나 말로 때웠더니 통했다.
온 벽면과 천장이 작은 작품들로 메워져 있는 복도, 현대 작가들이 그린 성화 전시실, 라파엘로의 작품들로 가득찬 방들을 지나 드리어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예배당에 들어갔다. 시스티나예배당은 생각보다는 좀 작았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벽에 그려져 있고 천장에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등이 연결되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가득 찬 복도)
(일부를 확대한 사진)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시스티나예배당의 '최후의 심판')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좀더 오래 천천히 봐야 하겠으나 애들의 안목을 넓히려면 두루 보이려고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만큼 10시 좀 넘어서 박물관을 나왔다. 바깥은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산탄젤로 성 앞으로 나아가 로마의 테베레강을 보면서 쵸코파이를 하나씩 나눠 먹었다. 나보나광장으로 갔다. 오벨리스크와 분수가 멋있는 광장이다. 오벨리스크 아래 '강의 분수'는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나일, 갠지스, 다뉴브, 라플라타강을 의인화하여 만든 바로크 조각의 걸작이다. 아그리파의 기부로 기원전 27년에 완성한 판테온으로 갔다. 판테온 내부로 들어가는 데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판테온을 본 후 점심을 먹었다. 어느 조그만 식당에서 피자를 시켜 먹었다. 콜라가 2.5유로라고 적혀 있었으나 계산시에는 5유로를 받았다. take-out과 앉아서 먹는 것은 가격 차이가 있다고 설명을 했다. 기분이 나빠 팁을 주지 않고 나왔다. 트레비분수에서 애들에게 동전을 하나씩 주며 던지라고 했다.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는 주술이 되길 빌면서. 트레비분수는 1762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로마의 다른 유적에 비하여 비교적 최근의 건축물이다. 그래도 다른 유적과 더불어 꼭 방문해야 할 장소로 되어 있으니 잘 만들고 좋은 전설이나 신화 ('동전을 어깨 너머로 던지면 다시 온다.'는 것과 같은)를 만들면 명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지난 출장 때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져 넣었기에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산탄젤로 성) (산탄젤로성 앞 다리 위에서 본 테베레강. 멀리 산피에트로성당이 보인다) (나보나광장. 오베리스크 아래 분수는 베르니니의 작품. 교회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베르니니의 경쟁자가 만든 교회가 무너지면 큰 일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이다. 이런 것이 '바로크의 장난'이다.) (판테온) (판테온 내부) (트레비분수)
계속 구경하며 걸으니 날씨도 쌀쌀해서 애들은 지쳐가고 아내는 앨러지로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래도 구경은 계속해야 하기에 베네치아광장을 지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으로 갔다. 이태리를 통일한 사람을 우리는 세계사에서 가리발디장군이라고 배웠는데, 그는 통일 후 권력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주고 물러났다고 한다. 대단한 위인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은 여러 유적에 남아 있는데 가리발디란 이름은 여행 중에 보지 못했다. 1911년에 완성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여러 곳이 부실해서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2천년된 로마제국의 건축물보다 더 부실한 것이다. 그것이 이태리의 지금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선조가 세웠던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흔적을 가지고 먹고 사는 백성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베네치아광장에서 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 보다가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갔다. 미켈란젤로가 건축을 했다고 하며 광장의 중앙의 기마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라고 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서 많은 우상을 파괴했는데 많은 황제상들을 파괴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동상만 남긴다고 한 것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것이라고 하니 아이러니칼하다. (포로 로마노. 로마제국 정치의 중심이었다.) (캄피돌리오언덕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동상)
콜로세움을 거쳐 숙소까지 걸어오니 오후 3시. 모두 지쳐 낮잠을 잤다. 민박집에서 주는 저녁을 7시에 먹고 나니 힘이 나서 무료로 한다는 야간 투어에 가기로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과 콜로세움) (네로황제의 황금궁전(도무스 아우레아) 가는 길 위에서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테르미니역에 8시에 모이니 가이드 한 분이 와서 모인 사람들을 이끌고 전철을 타고 Spagna역으로 갔다. 그 곳이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스페인광장이다. 스페인 대사관이 근처에 있고 스페인사람들이 많이 거주한 지역이라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스페인광장에서 가족사진) (스페인광장의 야경)
다음은 걸어서 트레비분수로 갔다. 가이드는 트레비가 '삼거리'란 의미가 있다고 했다. 분수 뒤의 건물의 오른쪽 창문 중 하나가 가짜라고 하며 그것이 '바로크의 장난'이라고 했다.
(트레비분수의 야경)
베네치아광장을 거쳐 캄피돌리아언덕으로 갔다. 가이드는 캄피돌리아언덕에 서 있는 쌍둥이 대두상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며 그 동상들이 5등신이라고 했다. 광장 바닥에 있는 무늬가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이라면서 위에서 보면 연꽃 모양이라고 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의 야경)
마지막으로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콜로세움의 야경도 참 멋있었다. 보통 출장시에 관광을 다닐 때는 밤에 다닌다는 것은 시도도 하지 않았기에 이번에 야경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참 좋았다.
(콜로세움의 야경)
<2월 17일: 로마 => 피렌체 => 베네치아>
8시에 렌트카를 픽업하러 갔다. 수속이 늦어 한 시간 후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이태리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다. 네비게이션을 달고 차의 여러가지 시스템에 적응을 한 후 출발을 했다. 네비게이션의 멘트가 한글로도 나와서 감짝 놀랐다. 다만 영을 제로라고 하고 Resume을 '재개'가 아니라 '개요'라고 번역한 것이 옥에 티였다. 차는 르노의 시닉이었다. 4년전 아내와 독일을 여행했을 때와 같은 차종이다.
로마를 빠져 나오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토목기술의 전통이 제대로 살아 있는지 길은 훌륭했고 이태리의 교통문화도 훌륭했다. 주행 중 늘 라이트를 켜는 문화였고 추월문화가 아주 훌륭했다. 주행선을 달리다가 추월을 할 때만 추월선을 사용했고 뒤에서 함께 추월하던 차는 거의 대부분 앞 차와 함께 주행선으로 들어섰다가 앞 차를 추월하더라도 했다.
12시 넘어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광장에 도착했을 때 비는 계속 내렸고 온도도 낮았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 있는 다비드상, 비에 젖은 피렌체의 전경만 내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나는 예전에 둘러본 적이 있었지만 아내는 무척 섭섭해 했다. 두오모의 쿠폴라에 올라 가서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인공들의 애틋한 사랑을 느껴보려 했건만. 피렌체와의 인연은 거기까지로 하로 우리는 차를 베네치아로 몰았다.
(차안에서 찍은 미켈란젤로 광장. 빗물에 굴곡이 졌다.)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두오모를 배경으로 찍은 큰아들) (베키오다리를 배경으로 찍은 둘째)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가려면 아펜니노산맥을 넘어야 한다. 아펜니노산맥은 우리 태백산맥처럼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의 피렌체에서 동쪽의 베네치아로 가자니 자연히 넘게 되었다. 산악지대로 접어드니 짙은 안개까지 끼어 베네치아의 날씨가 걱정되었다. 산악지대를 지나니 날씨가 거짓말처럼 쾌청했다. 온도마저 훈훈해졌다. 이태리의 푄현상인가. 아무튼 베네치아의 석양을 볼 수 있겠다는 설레임이 일었다. 계획대로 피렌체를 구경했다면 베네치아엔 밤에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베네치아를 구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베네치아 진입시 신설도로 때문에 네비게이션이 잘못 가르쳐줘서 베네치아 출구를 놓치고 계속 신설도로 위를 달렸다. 걱정과 달리 많이 우회하지 않고 베네치아의 동쪽으로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한 곳에서 22유로를 달라고 해서 너무 비싼 것 같아 다른 곳에 주차를 했다. 나중에 계산할 때 24유로를 내어야 했다. 서너시간 주차에 너무 비싸다. 수상버스인 바포레토의 1회 이용권이 인당 6.5유로. 너무 비싸다. 1회권을 끊어 일단 산 마르코광장으로 갔다. 배 위에서 석양을 보았다.
(주차장 앞 바포레토를 기다리며 본 베네치아의 끝자락)
(베네치아 아드리아해 너머로 지는 태양)
산마르코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내려 있었다. 가면무도회의 계절이 되었는지 곳곳에 가면을 쓴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이 내린 산마르코 광장 방면. 중앙의 건물이 총독청.)
둘째가 소변이 마렵다고 해서 아까 주차장 화장실에 갔더니 1유로나 달라고 해서 참고 산마르코 광장에 있다고 들은 맥도날드를 찾으러 다녔으나 못 찾고 결국 거기 공중화장실에 갔더니 1.5유로를 달라고 한다. 둘째는 정말 비싼 소변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가면을 쓴 사람들의 모습들을 즐기고 있을 때 공룡 네 마리가 나와서 공연을 했다. 움직임이며 소리가 정말 공룡처럼 보였다.
(가면을 쓰고 식사 중인 베네치아인들) (가면을 쓴 사람) (석우와 재우가 가면 쓴 사람들과 함께 찍었다) (또 다른 사람과 찍었다)
(공룡의 공연)
(산마르코광장의 야경. 뒤에 보이는 것이 산마르코사원, 오른쪽이 총독청.)
제 철에 와서 베네치아의 가면무도회의 한 면을 볼 수 있어서 의미로웠던 밤이었다. 바포레또를 다시 타고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베네치아가 빛과 물결에 몽환적으로 출렁거렸다. 이제 가족에게도 보였으니 다시 일부러 구경하러 올 일은 없으리라. 치아오 베네치아!
메스트레역 근처에 있는 민박집으로 갔다. 역 앞인데도 거리가 깨끗하고 안전해 보였다.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잠을 청했다.
<2월 18일: 베네치아 => 밀라노 => 깐느>
민박집에서 차려준 고등어구이로 아침을 먹고 메스트레역 앞을 출발했다. 주차비는 16유로나 나왔다. 밀라노 가는 길 멀리 흰 눈 덮인 알프스가 간간이 보였다. 12시 가까이 되어서 밀라노에 도착했다. 주차할 곳을 찾느라 고생을 했는데 한 곳을 찾아 주차를 하고 보니 무료였고 두오모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었다. 이런 행운도 있구나.
보고 싶었던 밀라노의 두오모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두오모가 아름다웠다. 고딕예술의 걸작인 두오모는 14세기 후반에 착공하여 19세기초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광장에는 흑인들도 많이 보였는데 비둘기 모이를 건네려고 접근해서 거절해야 했다.
(두오모 앞에서 가족 사진)
(두오모 내부) (스테인드글래스) (두오모 정문의 조각) (두오모 외벽의 조각) (두오모 출구 쪽 벽면의 부조)
두오모 바로 옆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를 갔다. 1877년에 완성되었다는 현대식 쇼핑센터이다. 유명 브랜드 매장이 즐비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세트 메뉴로 4인분을 먹었는데 23유로가 나왔다. 지금 환율로 치면 이태리가 우리나라 보다 3배 정도 비싼 셈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 입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 내부 천장)
갤러리 뒤편으로 나와 레오나르드 다빈치 동상이 서 있는 스칼라극장 앞으로 갔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시내를 좀 산보한 후 2시에 출발을 했다. 전차가 많이 다니고 좁고 미로 같은 길과 약간 랙이 걸린 네비게이션 때문에 몇 번이나 길을 놓쳤다. 시내를 빠져 나오는 데에 30분이 걸렸다. 이런 길에 적응해서 사는 밀라노 사람들이 대단하다. 서울은 천국이다. 우리 같으면 다 부수고 새로 지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 물려받은 것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새로운 것도 만드는 중용의 길을 찾는 것이 맞을 터이나 그 선을 정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이다.
"미국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유럽 오면 큰 일 나겠다. 한국 들러서 유럽 와야 소프트랜딩할 수 있겠다." 내가 한 마디 하자 아내가 컥컥대며 웃는다.
(스칼라극장. 앞에 선 동상이 레오나르드 다빈치.) (밀라노 거리)
고속도로를 올라타서 제네바 가는 길을 달리다가 서쪽으로 빠졌다. 이제는 알프스산맥을 넘어야 프랑스로 접어든다. 터널이 무척 많이 나왔다. 터널을 24개째 지나니 바다가 보였다. 모두 환호했다. 터널이 설마 50개 넘겠느냐 했던 게 그것을 훌쩍 넘어 나는 또 설마 100개를 넘겠느냐 했는데 그것마저 우습게 넘어 버렸다. 우리는 터널 세는 재미에 빠졌다. 아니 할 게 없으니 그것이라도 재미 삼아야 했다는 게 정확하다. 118개를 지날 때 이태리를 벗어나 프랑스로 접어 들었다. 재우가 한 마디 했다. "지독한 이태리 이제 벗어났네." 우리는 그 때부터 이태리 앞에는 '지독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불렀다.
이태리를 벗어나면서 빈 라디오 주파수가 잡혀 석우가 가져온 아이팟을 차 오디오로 잘 들을 수 있었다. 석우는 프랑스가 벌써 마음에 든 눈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본 지중해와 바닷가 마을)
간간이 보이는 그림 같은 마을을 보면서 깐느까지 총 139개의 터널을 지났다. 알프스가 이렇게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줄, 바닷가까지 막고 있는 줄은 예전에 몰랐다.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장군은 대단하고, 나폴레옹도 위대하다. 프랑스로 접어드니 라이트를 켜는 차들이 드물게 보여서 나도 라이트를 꺼고 달렸다. 깐느는 어둠이 내려서야 도착했다. Etap 호텔에 도착하니 저녁 7시. 방 2개에 아침까지 포함시키니 123유로. 카드로 선불하고 방에 들어가 보니 전화기, 옷장 등등 모든 군더더기는 제거되어 있었다. 가져온 취사도구로 라면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2월 19일: 깐느 => 아를 => 마드리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궁전을 일정에 넣음으로써 오늘은 가장 운전을 많이 해야 하는 날이다. 깐느에서 마드리드까지 달려야 한다.
호텔의 아침은 콘티넨탈식 부페이기 때문에 애들은 빵을 무지 많이 먹었다. 식반 가득 빵을 담아 와서 남 부끄럽기까지 했다. 7시 반에 호텔을 나서 8시에 깐느 해변에 도착하여 주차를 했다. '쪽빛 해안'이라는 뜻을 가진 꼬뜨다쥐르 (Cote d'Azur) 지방에 속해 있는 깐느는 전형적인 휴양도시의 모습이었다. 깐느 영화제 홀이 주차한 곳 바로 근처에 있었다. 레드카펫 앞에서 사진도 찍고, 배우들의 핸드 프린팅도 보고, 스파이드맨, 잭 스패로우 등의 실사모델에 자기 얼굴을 내밀고 사진도 찍었다.
(깐느 해변) (깐느 영화제 메인홀 앞 레드카펫 위에서) (재우가 스타워즈 실사모델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석우는 스파이더맨과 함께) (브루스 윌리스의 핸드프린팅)
아를 (Arles)로 이동했다. 깐느에서 해안선을 따라난 고속도로를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나온다. 아를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속한다. 오늘 마드리드까지 갈 길이 멀지만 아를에 들러기로 한 것은 식구들이 너무 차만 탄다는 생각이 안 들게 짬을 낸 것이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아를을 보고 오는 길에는 님과 아비뇽을 볼 계획이다. 아를은 반 고흐가 작품활동을 오래 했던 지방이고 로마제국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지방이다. 공원에 가니 반고흐의 두상이 보였다. 교회, 로마의 고대극장, 로마 원형투기장 등을 둘러 보았다.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에서 많이 보았던 터라 큰 감흥은 일지 않았다. 미스트랄이 부는지 바람이 무척 거세었다. 구경을 다닐 때도 바람 때문에 무척 쌀쌀했지만 운전할 때 차가 많이 흔들렸다. 프로방스지방의 미스트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름정원 안의 반 고흐 두상) (로마의 고대 원형극장) (생 트로핌교회) (로마 원형투기장)
오후 3시에 스페인국경을 통과했다. 이제는 피레네산맥이다. 터널은 거의 전무했다. 대신 길이 많이 구불구불했다. 우리의 예전 대관령고갯길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피레네산맥 구간을 지나 휴게소에서 쉴 때 여행안내소가 보여 지도를 좀 얻었다. 바르셀로나 지도는 주면서 마드리드 지도는 없다고 했다. 카탈루냐지방의 강한 자부심이 보였다. 바르셀로나 근처로 오니 온도는 12도를 넘어섰다. 바르셀로나를 경유하여 사라고사를 지나 마드리드로 갔다. 사라고사를 향해 달릴 때 석양이 졌다. 석양이 추상화처럼 아름다웠다. 장엄한 무거움보다는 화려하고 경쾌했던 스페인의 석양. 화려하고 경쾌한 탱고 같았던 석양. 차량이 드물어 석우에게 운전을 좀 시켰다. 석우에게 미리 경고를 했다. 원래 운전연습 때 부부싸움을 많이 한단다. 부부가 그럴진대 하물며 부자지간이랴. 내가 혹여 큰소리 치더라도 마음에 두지 말아라. 걱정과 달리 잘 해서 큰 소리칠 일이 별로 없었다.
(바르셀로나 - 사라고사 간 고속도로에서 본 석양)
사라고사를 경유해서 마드리드로 향할 때 산악지대여서 커브가 많았다. 밤길을 달리려니 피곤했다. 다른 차의 미등을 몇 차례 쫓아 달렸다. "석우야, 대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기를 살려야 하는 것이다. 기를 맘껏 살려서 신나게 대학생활해라." 큰 아들에게 정작하고 싶은 말은 잔소리 같아서 삼켰다. '게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게임은 너를 좀 먹고 네 기를 뺐는단다.'
나는 원래 운전할 때 졸음이 많이 오는 편인데 이번 여행에는 졸음이 잘 오지 않았다. "역시 유럽이 나랑 맞아." 석우가 "쳇." 했다. 녀석은 날 닮아 좀 시니컬하다. 그러나 난 자주 "쳇."하지 않는데 할머니 버릇이 건너 뛰어 간 모양이다.
하루 종일 운전을 했더니 피곤하다. 마드리드 Etap 호텔에 10시에 도착을 했다. 재우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물어 "아빠, 수고했어요."하고 엎드려 절받기라도 받고 싶은 것은 나이 드는 증거인가.
<2월 20일: 마드리드 => 톨레도 => 그라나다>
아침에 재우가 코피를 터뜨렸다. 나도 입술에 조그마한 물집이 잡혔다. 모두들 피곤한가 보다.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앞 지하에 주차를 했다. 프라도미술관을 구경하려고 처음엔 계획을 잡았으나 톨레도를 들러기로 하면서 생략을 하기로 했다. 프라도미술관에는 고야, 엘 그레코 등 거장의 작품이 많다고 가이드북에는 설명이 되어 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프라도미술관)
프라도미술관에서 소피아왕비 예술센터를 거쳐 마요르광장으로 갔다. 4층 건물에 둘러 쌓여 있는 마요르광장의 중앙에 펠리페3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마요르광장) (마요르광장의 황소 모형에 재우가 헤드록을 걸었다)
마요르광장에서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펠리페5세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한 왕궁은 1764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바깥에서만 보고 왕궁 앞에 위치한 오리엔테광장을 둘러 본 후 스페인광장으로 갔다. 스페인광장에는 우리와 친숙한 돈키호테와 산쵸, 그리고 그 작가 세르반테스 동상이 있었다. 사진도 찍고 휴식도 취하면서 스페인광장에 좀 머물렀다.
(왕궁) (왕궁 앞 오리엔테공원에는 과거 스페인 왕들의 동상이 줄지어 있다.) (왕궁의 다른 편에서 왕궁을 배경으로 한 컷) (스페인광장.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 뒤에 세르반테스가 앉아 있다.) (스페인광장의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
큰 길이라는 의미의 그란비아를 걸어서 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로 갔다. 이곳은 국도의 기점에 해당되며 스페인 각지로 통하는 10개의 도로가 뻗어 나간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큰 길이라는 뜻의 그란비아) (푸에르타 델 솔)
마드리드는 파리와 유사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현대와 고대가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이 활기 있어 보이고, 광장과 녹음이 많은 도시여서 마음에 들었다. 과거만 괴괴이 고여 있는 도시보다는 진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10시 반에 톨레도를 향해 출발을 했다. 중세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560년에 서고트왕국의 수도였던 톨레도는 711년부터 약 4백년간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다가 1085년 다시 기독교도에게 재정복(레콩키스타)되었기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톨레도는 화가 엘 그레코의 고향이다. 그는 톨레도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비사그라문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델아라반성당 앞을 지나갔다. 델아라반성당은 무데하르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레콩키스타 이후 신앙, 관습을 유지하며 스페인에 남아 있던 이슬람교도가 만든 양식을 말한다. 조금 경사진 길을 좀 오르니 소코도베르광장이 나왔다.
(비사그라문) (델아라반성당. 무데하르양식이다.) (경사진 좁을 길을 걸어 올라야 소코도베르광장이 나온다.)
소코도베르광장에서 학생들이 숙제로 설문조사를 한다며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느냐, 몇 살이냐 등 몇 가지를 묻고 우리 가족과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중에 재우가 물었다. "아빠는 남이 말 걸어오면 대답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세뇨리타가 너무 예뻐서, 허헛." 소코도베르광장의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소코도베르광장. 맥도날드 2층에서 찍었다)
요새인 알카사르를 지나 1493년에 완성되었다는 카테드랄로 갔다. 잠시 앉아 숨을 돌리고 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부러 미로를 거쳐 돌아오는 길을 찾았는데 지도를 보면서도 방향 잡기가 어려웠다. 좁고 비뚤비뚤한 미로를 헤메다가 내려가는 길 쯤이라고 생각한 곳에 뜻밖에 에스컬레이터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편하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구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강 건너편 사진 찍기 좋다는 곳으로 이동하여 톨레도 전경을 배경으로 하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그 전경에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알카사르) (톨레도의 대부분의 길은 이런 좁은 미로로 되어 있다.) (카테드랄) (톨레도의 전경의 배경으로 가족사진)
(너무나 아름다운 톨레도의 전경)
톨레도에서 그라나다까지는 4시간이 걸린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서 가야 한다. 여기도 터널 없이 곡선길이 계속되었다. 시에라네바다를 넘다가 보니 정말 이번 여행은 무모하다싶은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펜니노산맥,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시에라네바다산맥 등 4개의 대형산맥을 넘어 가고, 또 넘어오는 길이 아닌가. 바닷가로 둘러 가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산맥이 바닷가까지 뻗어 있어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모르는 사람 당할 자 없다고 내가 몰라서 이 무모한 일을 감행했던 게다.
그라나다에 7시 반에 도착했다. 호텔이 Etap 체인 중 가장 저렴했다. 아침식사 포함해서 94유로. 전반적으로 스페인의 물가가 프랑스, 이태리에 비해 10~20% 저렴했다. 호텔값도 그렇고 기름값도 그렇고. 스페인 넘기 전에 기름 가득 채우고 프랑스로 가리라.
<2월 21일: 그라나다 알함브라궁전 => 바르셀로나>
6시에 아침을 먹었다. 애들은 여전히 식반 가득히 바께뜨를 담아서 먹는다. 7시가 되어도 아직 어둡다. 스페인은 이태리에 비해 1시간 늦게 해가 뜨고 1시간 늦게 해가 진다. 경도가 다른데도 같은 시간대를 쓰기 때문이다. 그라나다의 좁은 골목길을 헤메다가 알함브라궁전 초입으로 갔다. 한번은 길이 바뀌어 일방통행길인데 네비게이션이 모르고 있어 오는 차와 마주쳐서 낭패를 당할 뻔 했다. 7시 40분 궁전 주차장에 도착하여 매표소로 가니 벌써 십여명이 줄을 서 있었다. 8시에 매표를 시작했다.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며)
먼길을 온 보람이 있어 나스르왕조궁전은 이슬람 예술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이슬람왕국이던 그라나다왕국은 기독교도에 의한 스페인 재정복(레콩키스타) 와중에 가장 오래 존속하였다가 1492년에 이사벨여왕에게 나라를 내어 주고 만다. 나라가 망하기 전 나라를 다스리던 나스르왕조의 왕들이 거처하던 궁전이 나스르왕조궁전이다. 궁전은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수많은 손길로 만들어진 궁전의 화려한 문양과 디자인. 지금 같은 작업을 하려면 인건비가 도대체 얼마나 들겠는가. 천장의 종유석 장식 디자인도 압권이었다. 정원의 물 흐름도 잘 안배가 되어 있었다.
(메수아르궁이라고 하는 왕궁 방문자들의 대기실) (메수아르궁 벽면의 문양)
(코마레스궁. 앞에 연못이 있는 곳이 아라야네스 안뜰. 알함브라궁의 대표적인 사진)
(코마레스궁 통로의 문양)
(궁전 한 가운데 위치한 라이온의 안뜰) (종유석 모양의 천장 디자인) (벽과 창문의 문양)
(파르탈정원과 뒤편의 귀부인의 탑) (파르탈의 정원에 있을 때 열기구가 떠 있어서 찍었다.)
카를로스5세 궁전은 이질적이었다. 외관은 프랑스궁전과 비슷했다. 1526년 (그라나다 왕국은 이미 스페인에 통합된 이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5세가 신혼여행 중 알함브라궁전에 머물렀을 때 건설하기로 마음 먹고 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카를로스5세 궁전) (카를로스5세 궁전의 내부)
알카사바는 난공불락의 요새의 위용을 가지고 있었다. 건너편 언덕의 알바이신지구에빼곡히 들어선 안달루시아지방 특유의 흰색 집들이 아름다웠다.
(알카사바의 벽에 올라간 석우) (알카사바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알카사바) (알카사바에서 내려다 본 알바이신지구의 하얀 집들. 안달루시아지방의 특색이다.)
아내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자꾸 머뭇머뭇거린다. 먼 전생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인가. 천생 공주다.
또 바르셀로나까지 먼 길이다. 도로가 지겹지 않았다. 구릉지 위에 길을 올려 놓아서 상하좌우 굴곡이 많은 길이 자주 나왔다. 산이 멀리서 달리다가 다가왔다가 다시 뒤로 훌쩍 물러선다. 동굴 속에 집을 지어 사는 주거지도 간간이 보였다.
(바르나셀로나까지는 구릉 따라 난 길을 달린다) (약간 산악지대인 곳도 있고) (사막 같은 곳도 있다)
점심은 휴게소 사인을 보고 나기니 시골의 레스토랑 같은 것이 나왔다. 진열되어 있는 음식을 손으로 가르켜 계란찜, 고르케 같은 것을 빵과 함께 먹었다. 안달루시아식 음식이련가. 스페인은 통행료가 없는 고속도로가 많았는데, 그 경우 진출입이 자유로운 출구가 많이 나왔고 휴게소는 마을 어귀에 동네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발렌시아를 지나면서 통행료를 받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 인근의 Etap 호텔은 7시에 도착했다.
<2월 22일: 바르셀로나 구경 => 님 => 아비뇽>
아침 식사를 하면서 다음날 일정을 정하기 위해 가족들의 의견을 물었다. (1) 프랑스 망통 숙박 => 피사 => 로마, 또는 (2) 피사까지 가서 숙박 => 피렌체 구경 => 로마. 애들은 (1)안을 선호했다. 지독한 이태리에 조금이나마 늦게 들어가고 싶은 것인지, 피렌체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인데 굳이 다시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건지. 피렌체에 미련이 남았던 아내는 순순히 애들의 의견에 따랐다.
오전 8시에 바르셀로나 시내로 진입해서 Casa Mila로 갔다. 성가족성당은 9시가 넘어야 문을 열기 때문에 그 전에 볼 수 있는 것을 먼저 보기로 한 것이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까사밀라는 곡선미가 아름다웠다. 일요일 아침 일찍이라 주차도 길가에 세우고 얼른 얼근 구경을 했다. 다음은 까사 바트요. 까사밀라에 비해 좀더 색상이 가미된 작품이다.
(까사밀라. 가우디의 작품. 건물에 곡선미를 도입한 것이다.)
(가우디 작, 까사 바트요)
시간이 더 남아 람블라스거리로 차를 몰았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람블라스거리를 걸어 부두가에 서 있는 콜롬부스동상까지 갔다.
(람블라스거리. 일요일 아침이라 한적하다.) (콜롬부스동상)
드디어 성가족성당으로 갔다. 입장료와 엘레베이트 이용료를 합하니 모두 50유로. 지금도 짓고 있는 성당의 건축에 도움이 되리라. 가우디의 손길을 곳곳에서 느끼며 성당 내부를 둘러 보았다. 가우디는 풀, 꽃, 나무잎, 나무등걸, 벌집, 달팽이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디자인에 많이 응용했다. 성당을 1882년부터 짓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100년은 더 지어야 한다니 대단한 공사다. 가우디 한 사람이 바르셀로나의 관광사업에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을 자꾸 만들고 세워야 할 것이다.
(성가족성당 앞에서 가족사진) (정면 입구의 조각들) (정문 입구의 조각상 일부 확대) (스테인드글래스. 현대적이다) (성당 내부. 아직 공사중이다. 기둥은 나무의 옹이를 표현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찍은 첨탑의 꼭대기. 자연의 과일을 표현) (성당 본체 중간의 조각. 뜻 모를 글자도 새겨져 있다) (달팽이관을 닮은 계단) (후문 쪽에 있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소년기를 표현한 "탄생의 정면")
성가족성당을 뒤로 하고 가우디의 또다른 작품인 구엘공원으로 향했다. 가이드북에 주소가 정확히 나오지 않아서 네비게이션으로 찾는데 애를 먹었다. 지도의 거리를 대충 찍어 가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영어를 하는 한 사람의 도움으로 공원 근처 골목에 차를 세우고 구엘공원으로 걸어 올랐다. 알고 보니 공원 후면으로 접근하는 길이었다. 언덕 같은 곳을 걸어 올라 공원 입구에 가니 문이 잠겨 있었다. 그냥 물러서면 한국인이 아니다. 둘러보니 길이 있었고 거기로 가니 철책에 개구멍이 있어 모두 거기로 입장을 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게 구엘공원은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토속적이면서 서민적인 소재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었다. 우리의 돌담 혹은 토담과 색색의 타일이 만나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민들이 휴일을 맞아 넘치듯 나와서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의 예술가와 노점상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넘치는 사람 속에서 한 컷) (구엘공원 정문의 수위실) (돌로 쌓은 터널 같은 곳) (구엘공원의 광장과 뒤편의 숲. 저 숲 뒤에서 우리는 나왔다) (공연을 하는 것인지 도를 닦는지 모를 인도사람. 쉬지 않고 긴 피리를 불고 있었다) (솥뚜껑 같은 것으로 오묘한 소리의 연주를 하는 거리예술가)
구엘공원까지 둘러 보니 가우디 (1852~1926) 한 사람이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록 가우디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바르셀로나 구경이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가우디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구엘공원을 끝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1시에 출발하여 휴게소에 들러 쌀요리 파에야 등을 시켜 먹었다. 처음로 제대로 된 요리 식사를 했다.
프랑스로 접어들어 프로방스지방에 들어서니 예의 미스트랄이 차를 심하게 흔든다. 스페인에서는 길의 굴곡이, 프랑스에서는 바람이 운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님(Nime)의 Pont du Gard에 5시 15분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없고 주차비만 5유로를 받았다. 늦어서인지 다소 한적한 곳을 걸어서 로마제국의 토목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수도교를 보았다. 로마제국이 상수도물을 흘리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일정한 경사가 있어서 물이 자동으로 한 방향으로 흐른다. 높이는 48미터, 당시에 수원지에서 님까지 50Km를 상수도로 연결해서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2000년 전 로마제국의 토목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님의 수도교 앞에서 가족사진)
(다른 편에서 본 수도교) (수도교 위에서 찍은 풍경)
국도로 아비뇽으로 갔다. 론강 다리를 건너니 Etap이 보여 예약없이 들어가서 방을 확인하고 체크인을 했다. "Etap이 우리 상 줘야 해." 아내가 한 마디 한다.
<2월 23일: 아비뇽 => 마르세유 => 모나코 => 망통>
아직 프랑스다. 이틀 후면 로마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데 아직 우리는 프랑스에 있다. 아침에 짐을 챙기는데 여행용 트렁크 닫기가 훨씬 수월하다. 우리가 먹은 만큼 짐이 줄어들어 그런 것이다.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아침을 먹고 아비뇽 유수로 유명한 교황청과 프랑스 동요에 나오는 아비뇽다리를 보러 성곽 내로 걸어 갔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성곽이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도시이다. 1309년부터 68년간 교황이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다. 교황이 프랑스왕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때를 아비뇽유수라고 하는 것이다.
바람이 너무 강했다. 가끔은 발을 못 옮길 정도의 강풍이 불었다. 우리는 교황청 앞으로 해서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교황청 꼭대기의 성모 마리아상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상을 내려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언덕에서 아비뇽다리와 론강을 보았다. 바람이 너무 세고 추워 얼른 사진만 찍고 서둘러 차로 돌아왔다.
(아비뇽 교황청 앞에서 세 모자) (꼭대기의 성모상이 아래 그리스도상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아비뇽의 다리를 뒤로 하고 사진. 바람이 심해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아비뇽에서 1시간 거리의 마르세유로 갔다. 점심을 해산물요리로 사 준다고 약속한 터라 애들의 기대가 컸다. 먼저 파로공원에 가서 마르세유 시내 전경을 보았다. 성채와 많은 요트, 그리고 넓고 푸른 지중해.
(파로공원에서 본 마르세유)
차를 다시 몰아 시내의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부둣가를 걸었다. 해산물 거리를 전시하고 있는 식당의 노변탁자에 앉아 연어구이, 홍합요리, 해산물파스타를 시켜 먹었다. 나는 여행 후 처음으로 생맥주를 한잔 시켜 마셨다. 애들은 프랑스 요리를 프랑스에서 먹게 되어서 즐거워했다. 카드가 안 된다며 현금을 요구해서 현금을 주고 상술이 괘씸해서 팁을 주지 않았다. 68유로를 내고 나니 현금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마르세유 부두가) (마르세유에서의 프랑스 요리 점심)
마르세유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모나코공국으로 갔다. 꼬뜨다쥐르 지방에 속해 있는 도시국가 답게 알프스 산자락 끝에 걸쳐있는 좁고 협소한 나라였다. 홍콩처럼 좁은 곳에 고층빌딩을 올리고 살고 있었다. 그레이스 켈리와 박주영이 생각나는 나라. 박주영이 뛸 운동장 공간도 없어 보일 정도로 복잡하고 좁아 보이는 나라였다. 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프랑스에 병탄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카지노 앞을 지나 바다를 구경하며 대공궁전쪽으로 걸어갔다. 궁전은 조금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길에서 만난 노부부가 친절하게 걸어가는 길을 안내해 줘서 어렵지 않게 찾아 갔다. 대공의 궁전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그 언덕에서 보는 모나코의 전경이 아름다웠다. 돌아와서 주차비를 내니 6유로, 지독한 이태리에 비하면 껌값이다.
(대공 궁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본 모나코 전경) (대공 궁전) (대공궁전 옆 벤치에서. 어떤 프랑스 할아버지가 찍었는데 구도가 별로다. ㅜ.ㅜ)
모나코 바로 인접한 망통의 Etap을 찾아 갔는데, 예약을 안 했더니 방이 없다고 했다. 망통의 레몬축제 기간이라서인지 카지노 때문인지 모르겠다. 근처 비슷한 가격의 호텔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한 곳을 찾아 갔더니 마침 방이 있었다. Family room을 85유로에 빌렸다. 방은 더블과 싱글 침대가 놓여 있어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협소한데 또 간이침대를 하나 더 놓아 네 명이 잘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잠만 자면 되니 상관이 없었다. 마지막 남은 라면을 끓여 먹고 나는 아내에게 갖은 아량을 다 떤 후 겨우 카지노에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100유로만 들고 지갑은 둔 채 카지노로 갔다. 마침 걸어갈 만한 거리에 카지노가 있었다. 여권을 확인하고 입장을 시켰다. 카지노에서 금연을 하고 있어 놀랐다. 테이블게임 쪽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이 블랙잭을 하고 있어 나도 합석했는데, 그 한 사람이 유색 프랑스인인데 다혈질이었다. 내가 받는 카드를 일일이 간섭을 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아무튼 나는 감정을 조절하며 대응하지 않고 내 카드에 집중했다. 한참 지나니 사람들이 늘어났다. 예의 그 유색 프랑스인이 카드를 더 받겠다고 했다며 딜러와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 나는 카지노를 떠났다. 11시경 호텔에 들어오니 "당신 없으면 난 잠 못자는 것 알지 빨리 와요."하던 아내는 잠만 잘 자고 있었다. 딴 돈을 흔들어 보여주니 좋아한다. 참, 여자란...
<2월 24일: 망통 => 피사 => 로마>
호텔의 아침식사가 부페식이 아니라서 애들 양이 적을까 걱정되어 우리 몫을 애들에게 좀더 주었다. 7시에 출발하니 다시 예의 터널 세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망통에서 밀라노 갈림길까지 100개, 제네바까지 143개, 총 184개까지 세었다.
피사에 11시경 도착했다. 거리에 주차후 주차기계에 2유로를 넣고 영수증을 차에 대쉬보드에 놓아 두었다. 피사의 사탑이 있는 곳에 들어서 먼저 사탑에 오르는 표를 끊었다. 30분에 40명씩 끊어 입장시키기 때문에 사람이 많으면 너무 늦게 볼지도 모를 염려가 있었으나 12시 입장으로 끊을 수 있었다. 애들이 화장실을 찾아 가더니 다니 내게 뛰어왔다. 30센트 내어야 한다면서. 재우가 "역시 지독한 이태리야." 한다.
사탑을 오르기 전에 사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두오모와 세례당을 둘러 보았다. 두오모 내부의 벽화가 아주 멋졌고, 세례당은 보석함처럼 아름다웠다. 사탑은 1173년에 착공하여 건설되었고, 두오모는 1068년부터 50년간 지어졌고, 세례당은 12세기 중반부터 15세기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사탑 앞에서 가족사진) (재우가 손가락으로 사탑을 받치는 시늉을 하고 찍은 사진) (보석함 같은 세례당) (두오모와 사탑) (두오모 내부) (두오모 정중앙부를 확대)
12시가 다 되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배낭은 매표소 옆 사물함에 무료로 보관할 수 있었다. 재우가 다른 사람과 부딪쳤다면서 미안하다를 뭐라고 하는지 물었다. "Sorry라고 영어로 하면 돼." "스미마셍이라고 일본어로 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일본사람인 척 해." 이런 농담을 하면서 낄낄거리는데 앞에 선 남자가 우리를 뒤돌아 보았다. 동양인이다. 중국인으로 보이는데 우리말을 알아들었을까. 눈을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본다.
우리 차례가 되어 사탑을 걸어서 올랐다. 처음 사탑에 발을 디디는 순간 기울어져 있어서 조금 어지러웠다. 혹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제대로 된 게 아니고 사탑 속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바로 서게 되니 어지러운 것은 아닐까.
사탑 꼭대기에서 여러 개의 종이 설치되어 있어 사탑의 용도가 종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보는 피사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사탑 오르는 계단) (사탑 위에서 본 두오모와 세례당) (사탑 꼭대기에 선 세 모자)
점심은 이태리식 파스타, 라자냐, 치킨까스를 먹었다. 애들은 이태리음식에 매료되었다.
(제대로 된 식당에 앉아 이태리식사를 했다.)
1시 반에 피사를 출발하여 로마로 향했다. 마지막 여정이라서 그런지 운전하는데 졸립다. 애들과 함께 그 동안 다녔던 여행지를 복습하여 졸음을 쫓았다. 로마 가까이 오니 여우비가 내렸다. 내일 날씨가 좋아야 마지막 로마 관광을 잘 할 텐데... 로마에 접어드니 퇴근시간이라서 교통체증이 생겼다. 6시에 렌트카를 반납하고 가방을 끌고 민박집으로 걸어가는데 내 동네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인가 보다.
8일 동안 5,500Km를 달렸다. 길이 좋고 교통체증이 거의 없어 즐거운 드라이브였다. 석우는 음악 DJ로 수고를 했고, 모두 아프지 않고 사고 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하이 파이브로 우리는 무사귀환을 자축했다.
민박집 주인이 이태리 내에서만 다녔나고 묻길래 알함브라궁전까지 다녀왔다니 혀를 내두른다. 저녁은 삼겹살이 나왔다. 애들이 우리 없을 때 삼겹살 먹으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을 했는데 마침 삼겹살이 나왔다고 하니 민박집 주인이 웃는다. 방학이 끝나가고 있어 민박집에 사람이 적었다.
<2월 25일: 로마 관광>
오늘 귀국하는 날이다. 밤 10시 반에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아침에 마음껏 게으름을 피웠다. 이틀 동안 로마에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마침 오늘은 쾌청하다. 8시 반 넘어 길을 나섰다. 걸어서 인근의 산타마리아 마지오르성당부터 들렀다.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화려하고 멋있었다. 뒤에는 또 오벨리스크가 자리하고 있다.
(산타마리아 마지오르성당 외관) (성당 내부) (성당 내부의 한 방) (성당의 천장) (성당 입구의 문의 부조)
걸어서 레푸블리카광장에 있는 산타마리아 안젤리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유적 위에 그 유적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건축했다고 한다. 성화가 멋있었으며 미켈란젤로 답게 바닥에는 천문도와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다.
(성당 내부) (바닥의 천문도) (성화 중 일부)
전철을 타고 콜로세움으로 갔다. 이번에는 내부 관람을 하기 위해서다. 1인당 9유로, 전시관을 입장할 때에는 3유로 추가라고 되어 있는데, 무조건 12유로를 내라고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12유로라고 하든지. 지독한 이태리. 애들이 또 "낚였다" 했다. 국가차원의 낚음인가. 콜로세움은 웅장했다. 내부는 크게 볼만한 것은 없었고 아주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의미가 있는 듯했다.
(콜로세움의 내부. 그라운드 아래 지하에는 맹수를 가두어 둔 곳이다.)
콜로세움에서 멀지 않은 팔라티노언덕으로 갔다. 콜로세움에서 구매한 입장권으로 입장이 가능하다. 로마제국의 잔재랄까 흔적이랄까, 그런 것들이 잔뜩 흩어져 있다. 포로로마노도 내려다 볼 수 있다.
(팔라티노언덕의 유적) (팔라티노언덕에서 내려다 본 포로로마노)
다시 입구쪽으로 나와서 마시모경주장을 지나 "로마의 휴일"에서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성당으로 걸어갔다. 성당은 정말 작았으나 진실의 입 앞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인당 기부금 형식으로 50센트씩 받고 있었다.
(진실의 입 앞에서 가족사진)
다시 전철을 타기 위해 마시모경주장을 지나갔다. 로마제국의 전차경주를 하던 운동장이다. 배 고프다는 애들에게 과일과 간식을 먹이는 동안 나는 왕복 1킬로는 족히 되는 경주장을 한바퀴 달렸다. 로마의 장군이 되어 벤허처럼 전차를 몰고 마시모경주장을 달리는 꿈이라도 꾸길 바라며.
(마시모경주장. 뒤로 보이는 유적이 팔라티노언덕)
전철을 타고 다시 레푸블카광장으로 와서 아까 보아 두었던 맥도날드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느긋하게 아이스크림까지 사먹고 민박집으로 갔다. 오후 4시. 공항 가는 픽업은 6시에 오기로 했다. 대중교통수단을 사용하면 인당 11유로, 도합 44유로. 픽업은 50유로이니 편리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싸다.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 가족은 함께 카드 놀이를 했다. 석우가 고안한 '석사마게임'이라는 것을 하는데 시간이 금방 흘렀다.
지나치게 수박 겉핥기식의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이것은 개론이고 나중에 저희들이 커서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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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따라 길따라 원문보기 글쓴이: 然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