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개항이래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에 들어왔으며 주로 조선정부의 초청으로 중앙정부와 부속기관에서 배치되어 정책 수립과 기술 전수를 위하여 배치되었다. 또한 외국인들은 선교 목적으로 입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는 적지 않는 수의 의사가 있었다. 이들은 병원을 세우고 전염병을 예방하며, 국왕을 비롯한 천민까지 모든 계층을 진료함으로써 자유·평등·박애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고, 그에 의한 사회적 변화까지 이루어 갔다. 또한 이들은 높은 벼슬과 신임을 바탕으로 의사의 신분 상승을 가져오게 하기도 하였다.
분쉬(Richard Wunsch)는 1901년 11월부터 4년 가까이 고종 황제의 侍醫로서 그 직위을 누리면서 외과의로 한국의 서민들을 진료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나누어 썼다. 1902년 여름 분쉬는 콜레라 방역에 관한 건의문을 내부 대신에게 보내기도 하고, 병원을 설립하려는 노력도 하였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분쉬에 관한 자료로는 그의 딸인 클라우센-분쉬가 정리한 『동아시아의 의사(Arzt in Ostasin)』(1976)라는 책을 김종대가 번역한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1999)가 있 다. 분쉬에 관한 연구로는 조영렬의 연구가 있으나 한말 서양의학의 수용측면으로만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한말의 국제질서 속에서, 의료체계는 전통의학이 지배하는 속에서, 독일의 의학교육을 받은 분쉬가 보는 한말의 의학의 상태는 어떠했으며, 그는 어떠한 노력을 했는가를 살펴보며, 오늘의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가 찾아보기로 하겠다.
2. 착실한 의사, 현실적인 사람
한말 대한제국에서는 한방의료 외에 서양의료도 채택하였다. 1899년 11월 궁내부에서는 영국 여의사 쿡(Cook)를 고빙하여 궁내부인과 대관 가속의 치료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계약 기간은 3년으로 월급은 은화 300원이었다. 1901년 11월에는 남자 어의를 독일에서 초청하였다. 그가 분쉬였다. 분쉬는 1869년 독일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의 히르슈베르크(Hirschberg)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의사의 길을 착실히 걸어 외과 전문의가 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외과 전문의로 수련 받고 병리학까지 배웠다. 독일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 대학에서 1894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모교 외과의 헬페리히(Helferich)교수에게서 외과의로 수련하였다.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겨 피르호(Rudolf Virchow)교수 아래서 수련의로 일하며 병리학을 이수했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 있는 독일 병원에서 일하던 중 대학의 스승이었던 헬페리히(Helferich)교수의 추천과 도쿄대학 내과교수인 벨츠(Erwin Bælz(1849-1913))의 주선으로 고종의 시의가 되었다.
분쉬가 한국의 불안한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온 동기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으의 런던 생활은 금전적으로 궁핍하며 일은 어렵고 진급도 느려 고생이지만, 한국에 가면 적어도 생계는 해결되리라 생각해서 궁리 끝에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한국 황실과의 계약 기간은 3년이며, 그의 월급은 600원이었다.
분쉬는 중국을 거쳐 1901년 11월 2일 제물포에 도착했다.(표1 분쉬의 주요일정 참조) 그가 제물포를 보며 받은 첫인상은 "맑고 신선한 공기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제물포 바다는 호수처럼 보이며, 언덕 위에 높은 탑이 있는 두 개의 신축 교회는 독일 교인들도 감탄할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분쉬가 서울에 도착하여 받은 첫인상은 정반대였다. "서울의 길거리 청소는 개들에게 맡겨놓은 상태다. 곳곳에 널린 대변을 개들이 먹어치우니, 길의 청결 여부는 개의 식욕에 달려있다고 할 정도이다.
분쉬의 일과는 의사로서의 경제적 문제로 한국에 왔지만 의사로서의 본분은지켜나갔다. 9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집과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10시까지 독서를 했다. 10시에 두 명의 젊은이에게 조수와 보조의가 되도록 인체구조의 용어를 독일어로 가르쳤다. 이때 한국인이 오면 이 젊은이들이 통역을 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유럽인 환자에게 왕진을 갔다. 오후 2시 30분에서 4시30분까지 한국어를 배웠다. 황궁에는 5∼6시에 들어가고 집무 끝나는 시간은 7시였다. 이와 같이 그의 일상생활을 보면 주로 오전에는 한국인을 진료하였고 오후에는 외국인을 진찰하였던 같다. 또 의학지식을 그의 조수와 보조의에게 부지런히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분쉬는 자기 일에 충실하고 착실한 의사임을 알 수 있다.
분쉬가 자기 일에 충실하고 현실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하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약값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환자를 돌봄에 있어 정부의 보조금은 한푼도 없어도 하루에 3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며 약을 지었다. 이런 분쉬는 환자들을 돕는 무료 봉사하는 마음이 값진 것이라 믿으며, 이 일을 인정받아 최신 시설을 갖춘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설립한 종합병원의 원장이 되기를 꿈꾸기도 하였다. 그는 수술하는 법을 잊지 않으려고 연습하고 있는 상태지만 훗날에는 돈을 내게 할 것이라 하였다. 분쉬가 보기에는 돈을 받기 어렵게 하는 이유 중에 다른 하나는 선교의사들은 전도하듯이 지나치게 열심히 의료행위를 하는 바람에 의사로서 물질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인 의사의 진료행위를 낮게 평가되게 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분쉬의 정신은 희생이나 봉사정신으로 판별하기보다는 의사의 권위와 경제적인 면을 고려된 현실적인 면도 보였다.
서울 인구 30만 중에 60명 정도의 백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 독일인은 7명이었다. 황실의 가사를 돌보는 알사스 출신의 손탁(Antoinette Sontag), 독일어 선생, 궁정악장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 상인, 영사인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 1855-1905) 그리고 분쉬였다. 분쉬는 독일 정신을 말하는 독일인이었으나 황인종이 유럽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황인종이 위험하다는 것은 빌헬름 황제가 만든 말로 순간적인 착상에서 나온 인종차별적 견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쉬는 당시에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값싼 인건비로 많은 하인을 거느렸다. 그에게 조력하는 사람들은 수석 통역관과 조수, 차석 통역관과 조수, 사환, 요리사, 마부, 수석 인력거꾼, 차석 인력거꾼, 마부의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티베트산 개까지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분쉬는 생각과 행동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예는 취미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검소하게 집과 정원을 돌아보길 좋아했으나 뒤에는 승마를 즐겼다는 사실은 그의 생각과 행동의 차이가 있음을 또 한번 보여준 것이 된다.
승마를 즐겼던 것처럼 분쉬는 원래 허영심이 있어 보인다. 그의 서울 생활은 외교관 중에 한사람의 모습이었다. 주로 저녁에는 사교적인 모임이 많았는데 각국 공사관의 향연에 좋은 대접을 받는 고등외교관들과 자리를 함께 하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1902년 신년 하례식에는 에케르트가 작곡한 한국의 애국가를 처음 연주하는 자리와 고종 황제 탄신 5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하였다.
분쉬는 불안한 국제정치 상황에서 그것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었다. 1902년 12월 일본 사람들의 행동은 어느 때보다도 도전적이었다. 일본 군인들은 시내에서 온갖 불법행위를 하는가 하면 소란을 피우고 황궁 앞에서 집단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분쉬는 러일전쟁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승리할 경우, 대한제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외국인과 맺은 계약은 어떻게 처리될지 궁금했다. 분쉬는 1904년 4월에 만약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게 되면 일본인 의사에게 그의 자리를 내주고 자기는 계약에 따라 기꺼이 해약할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1904년 8월 분쉬는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 고용된 외국인들은 대략 5∼6개월 뒤에는 귀국해야 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해약할 의사와 떠날 수 있음을 일본공사관에 알렸다. 1904년 10월 서울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1905년 2월 분쉬는 시의 계약을 3년 더 갱신하였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분쉬는 국제적 상황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려는 인물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2달 뒤인 4월에는 그가 떠나야만 했다. 일본인이 결정하여 시의가 떠남을 황제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불행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1905년 4월 23일 분쉬는 분에 넘친 고별 사열을 하며,"사람은 편한 생활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게 되나 봅니다."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말하였다. 황제는 분쉬에게 1년치 은급을 주고, 3등 공훈 훈장까지 내렸다.
분쉬는 일본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채 2년 가까이 머문 뒤 유럽으로 돌아갔다. 1908년에 중국 교주(膠州)의 청도(靑島)에 일자리를 얻어 다시 아시아로 오게 된다. 그 곳 병원 환경은 나빠서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1911년 3월 13일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분쉬가 사망한 뒤 미망인 마리 숄(Marie Scholl)은 세 살 된 딸과 한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에 돌아가자마자 어린 아들은 죽었고 미망인도 그로부터 얼마 후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남아 어렵게 성장한 딸 클라우센-분쉬 여사는 부친의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내었다.
3. 한말의 의료 활동
분쉬는 시의라는 직위를 누리면서 한국의 서민들에게 외과의로 진료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 수술실과 진찰실을 꾸몄고, 본채에 달린 한옥으로 된 바깥채에는 입원실로 꾸몄다. 그가 이렇게 자기 집에 병원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계약조건이기도 하였고 부피가 큰 의약기구와 수술실 설비며 제약실 설비에 필요한 물품은 베를린에서 가져 왔기 때문이다.
분쉬는 한 사람의 의사의 길을 착실히 걸어 전성기의 독일 의학을 익혀왔다. 독일 의학계는 19세기 말부터 코흐(Robert Koch). 클랩스(Edwin Klebs), 에셰리히(Theodor Escherich), 뢴트겐(Wilhelm Conrad Roentgen)등 새로운 세균학의 권위자, 선진적인 진단기법을 가능하게 한 발명가, 새로운 항균요법의 대가들을 배출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런 의학을 익힌 분쉬의 진료는 그의 전문이기도 한 외과 환자가 많았다. 분쉬는 골절상, 사지절단, 골저 수술 등과 같이 정형외과 영역은 물론 복부, 방관, 위절개, 흉골절제, 항문탈장 등과 같은 일반외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수술까지 모든 수술을 하였고, 파상풍, 화상치료와 위장병, 신경쇠약과 같은 외과· 내과 환자까지 치료하였다. 이러한 시기적으로 수술은 거의 모두 그 분야에서 '최초' 혹은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술은 이때까지 한반도에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收支父母)라는 유교적 개념으로 인하여 몸을 신앙과도 같이 온전히 보존해야만 했던 당시는 엄격한 금기사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던 시기에 산부인과 수술과 부검을 실시한 것은 몸을 중히 여기는 관습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표. 2 분쉬의 진료내용〉는 이러한 진료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 외에 그가 의사로서 한일은 제중원에서 에비슨이 의뢰하는 수술해야 할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고 프랑스와 벨기에 공사관의 공의도 맡았었다.
분쉬는 의학교육에도 역할을 하였다. 시의 분쉬는 정부에서 인건비의 일부를 보조받는 조수와 보조의가 있었다. 이 두명은 허(Ohin In Hu)와 김(J Ho Kim)으로, 분쉬는 이들에게 독일어 의학용어를 가르쳤고, 체온을 재고, 붕대를 만들고 감으며, 약을 조제하는 일, 수술도구를 준비하는 수술보조 역할을 시켰다. 월급은 한 명에게 20원, 다른 한 명에게는 15원이 탁지부에서 지불되었다. 후에 이들은 관리직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분쉬는 자신이 가르친 보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선교병원에 있는 교육을 잘 받은 영국인 간호사와 같은 독일 간호사를 서울에 데려올 필요성을 느끼기도 하였다.
1902년 4월경에 분쉬의 개인병원은 점점 좋아졌다. 어떤 달은 수입이 좋아서 봉급에는 손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분쉬는 계속 정착할 생각도 하며 자신에 차서 영국인·러시아인
· 미국인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외국인 모두를 진료할 때가 오리라 믿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자신을 위한 것보다는 선교사를 위한 자선하는 입장에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료비를 내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워낙에 돈을 내는 습관이 들지 않고, 돈도 없었다. 오히려 한국 사람은 외국인 의사한테서 약 한 병쯤 선물 받는 것은 예사로 알았다. 선교의사들은 전도하듯이 지나치게 열심히 의료행위를 하는 바람에 의사로서 물질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데도 의사의 진료행위를 낮게 평가되게 하였다. 한 한국인 의사는 일본 사립대학에서 5년간 공부했지만 한국 사람한테는 진료비는 못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분쉬는 치료비 조로 닭 열 마리와 달걀 100개를 받은 일도 있고, 해산을 도와준 대가로 참외 한 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분쉬의 속마음은 의술을 사랑하니 건실하게 무료 봉사하면서 수술하는 법을 잊지 않으려고 연습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돈으로 내게 할 것이라는 의도가 생겨나고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 1월 4일에 새 관제에서 전의사(典醫司)는 태의원(太醫院)으로 바뀌었으며 그 우두머리도 도제조(都堤調)로 승격되었다. 1899년 11월 궁내부에서는 영국 여의사 쿡(Cook)를 고빙하여 궁내부인과 대관 가속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서양인 시의인 분쉬도 받아들여졌다.
황제는 날마다 한의사들이 진맥을 하고 한약을 마시고 겨우 회복하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서양인 시의로서 분쉬의 역할은 내세울만한 것이 못되었다. 궁내 사무실이 1901년 12월 15일에 마련되었으나 그 사무실에서는 궁중관리들이 찾아와 의학에 관한 문제를 떠난 에피소드나 유럽 대도시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뿐이었다. 결국 분쉬는 시의로서의 의미는 미약했다.
앞의 언급처럼 시의로서의 역할은 미약했지만 치료의 흔적들은 차자 볼 수 있다. 분쉬는 고종 황제를 진맥하며 체온을 잴 기회도 있었다. 이러한 진찰은 그가 온 후 약 1년만에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손탁 그리고 통역관 주씨가 주선해서 이루어졌다. 황제는 만성감기가 들기 좋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저는 저녁 늦게 황제 앞에 불려가 그의 만성감기에 대해서 아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황제에게 생활방식이 뒤틀려 그런 감기에 걸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황제는 어려운 정무를 수행하는 동안 내내 지독하게 뜨거운 열을 뿜는 두 쇠난로 사이에 앉아 있는 답니다. 그리고 황제가 집무하는 공간의 바닥은 차고 벽은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으며, 기름종이로 가장자리를 둘러쳤습니다. 황제는 낮에 잠을 자고 오후 3시에 일어나서 새벽 3∼4시나 동틀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 있으며 가끔 마당을 가로질러 궁 안의 이 건물 저 건물로 건너다닌다고 합니다. 쉽게 차거워지는 비단 옷만 입고 있는 것도 발병의 원인이었습니다.
한편 고종 황제의 구강상태는 양호하지 못하였다. 황제는 호박엿(당분)에 의하여 손상된 치아를 가지고 있었고 황제는 또한 식물 색소의 침착으로 색이 변해 있는 치아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불량한 황제의 치아는 조개를 드시다가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부러진 치아를 치료한 기록이 분쉬의 일기에 보이고 있다.
"바로 일주일 전, 그러니까 일요일 밤에 황제의 앞니가 하나 빠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케겔씨 송별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궁으로 불려갔다. 새벽 2시에 내가 궁궐 앞에 다다랐을 때 손탁 여사 댁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전해 받았다. 바로 그 소식이었다. 그래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미국인 치과의사에게 전보를 보냈고 화요일에야 그가 황제를 진료할 수가 있었다. 그 의사는 사기질 치아를 만들어 금죔쇠로 붙였는데, 나는 금죔쇠를 만드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치과의사는 황제의 입안에 씻지도 않은 손을 휘저으면서 '폐하' 혹은 '황제 폐하'라고 말을 붙였다. 다 만들어진 두 개의 이빨 가운데 하나가 꼭 맞았다. 이빨을 끼워 맞추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황제는 놀라울 정도로 멍청해 보였다. 황제는 일본 천황도 미국인 의사의 치료를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 의사에게 1,000엔을 지불했다. 그리고 나에게 독일에서 치과의사를 데려오라고 제안해 그렇게 하려고 한다."
위의 치과 치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독특한 내용은 고종 황제가 보철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비위생적이고 초보적인 보철 시술은 미국인 치과의사 소어스(James Souers)에 의하여 행하여 졌다. 이 고종 황제의 보철 치료로 이 빠진 데에는 이를 해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보철의 일반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 일반화는 절대권자인 황제의 보철 때문에 촉진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치료법은 증상에 대한 치료로 약물을 사용하여 통증을 회피하려고만 하였으며, 치아의 경우에는 보존하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이 빠진데는 이를 해넣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런 보철에 대한 생각의 전환으로 치과의사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분쉬와 궁내부 관리인 고희경이 치과의사의 초빙을 위하여 직접 힘쓰고 손탁이 관여하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이 때의 과도한 사례비로 대금지불은 출장 오는 치과의사가 여러 명이 생겼고 상주하는 외국인 치과의사가 오게 되었으나 비싼 치료비가 문제되기도 하였다.
분쉬는 1902년 3월에 병상이 90∼120개정도 되는 병원을 설립하려 하였다. 그 병원은 분쉬와 함께 탁지부 대신 이용익과 궁내부 관리인 고희경이 의논하며 추진하였다. 그는 몇 달 동안 한국의 대신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사들을 만나고 궁중 나인들을 조찬에 초대하는 등 힘을 썼다. 바이페르트 독일 영사와 협의하며, 제중원을 맡고 있는 에비슨을 만나 조언을 들었다. 그렇지만 러일전쟁의 전초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정치상황 때문에 재정적인 도움이 없는 관계로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분쉬의 계획이 무산 된지 몇 년 후인 1905년 1월 황제는 다시 병원을 지어주고 운영하게 해주겠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왔다. 이에 분쉬는 독일 공사관이나 독일 은행에 10만엔을 기탁하고, 중심지에 있는 전에 에비슨이 사용하던 병원 부지인 시가 3만5000엔의 땅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와의 면담에서 10만엔 중 절반은 삭감되었고, 원하던 땅은 클럽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거절되었다. 그 무렵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의 정치를 주도하면서 궁중 시의였던 분쉬가 한국을 떠나게 되어 병원설립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의사로서의 분쉬를 좀더 파악하기 위해서는 알렌과 비교할 수 있다. 알렌은 분쉬보다 앞서 1884년 9월 20일에 한국에 와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의료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알렌(Allen)은 국립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고 의학교육을 실시하면서 서양 의학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렌은 병원을 세우고 전염병을 예방하며, 국왕을 비롯한 천민까지 모든 계층을 진료함으로써 자유·평등·박애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고, 그에 의한 사회적 변화까지 이루어 갔다. 이은 높은 벼슬과 신임을 바탕으로 의사의 신분 상승을 가져오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알렌과 분쉬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분쉬는 독일인으로 처음부터 시의로 추천되어 온 반면에 알렌은 미국인 선교의사로 와서 갑신정변 후 제중원을 세우고 시의가 되었다. 분쉬는 처음부터 많은 급료가 지불되었고 병원 설립에 많은 돈이 요구되었으나 알렌은 그 자신과 동료 의사까지 선교의사로 무보수로 일하며 병원을 위해서 건물과 약간의 수리비만 요구하였다. 분쉬가 활동한 시기는 러·일전쟁 전후의 시기로 국제 정치적으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대륙으로 본격적인 침략의 야욕을 들어내었고 국내적으로도 자주권을 행사하기 힘들었으나 알렌이 활동한 시기는 문호 개방 후 서양 문물에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로 청·일간에 세력균형을 이뤄 국내문제는 자주권을 행사하던 시기이다. 특히 분쉬의 병원설립의 경우에는 도와주던 탁지부대신 이용익이 파면되는 수모를 당할만한 인물이었으나 알렌의 경우에는 실권자인 민영익의 목숨을 살린 은인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지금부터는 분쉬가 한국에 공헌한 위생분야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2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분쉬는 황실을 보호하려고 내부 대신을 통해 위생조치를 내렸다. 이 위생조치의 내용은 주로 사람의 분비물의 처리를 통한 병의 예방책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화장실 시설 때문에 수인성 전염이 되며, 소변이 하수구에 들어가 호흡기관에 공기전염이 된다. 이 하수구에 파리, 모기, 시궁쥐가 서식하여 흑사병의 원인이 된다." 이러하므로 개선책으로 "오물처리 용기와 장소를 청결하게 소독하며, 배수로와 하수구도 소독해야 하며 배설은 화장실에서 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다.
분쉬는 위에서 밝힌 위생조치에 이어 콜레라 방역을 위한 제안을 하였다. 그 내용은 의료청을 신설하고, 전염병 만연 시에 의사를 우대하고, 군대가 전염병 지역을 경비한다. 또 통신제도를 도입해서 경찰서에 보고하도록 해서 이를 통해 전염 여부가 전체적으로 파악되어 전염병 지역은 완전히 격리되도록 조처하는 제안도 하였다. 도로청소와 오물수거제도의 조직, 식료품 판매의 감독, 공동우물 관리와 예방접종을 실시할 것, 석회와 지사제를 판매할 것도 제안하였다.
분쉬의 이런 제안에 영향을 받은 고종황제는 궁내부고문인 미국인 샌즈(Sands)에게 칙령으로 방역사무국의 설치를 명하셨다. 이 방역국의 책임자로 경무사 이용익이 임명되었다. 이어 8월 2일에는 방역국이 임시 위생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책임자 이용익과 총무위원으로 샌즈, 분쉬, 밸덕, 에비슨, 복고록, 小竹武次郞에게 의료 관련사항을 담당시켰다.
1902년에 분쉬는 의사들과 한국인과 외국인들을 모아서 콜레라의 방역을 위하여 의료협의회가 결성하였다. 이해 가을에는 티푸스가 외국인들 사이에 만연해서 분쉬의 환자로 이탈리아 영사인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 백작과 미국인 백만장자 딸 크리스틴 콜브란(Christine Collbran)이 죽기도 하였다. 이러하므로 이 의료협의회는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에는 위생주의 조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연두 환자들이 많이 생겼다. 한국정부에서는 1895년 10월 7일 종두규칙이 마련되었고, 11월 7일 종두의양성소 규정이 공포되고 있었다. 종두의양성소를 졸업하고 종두의적에 등록된 종두의들은 서울과 각도의 종두사무위원으로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천연두의 예방을 위해 방역소를 세워 운영하였다. 이 방역소는 종두사라 부르는데 각 도마다 세워졌고 혈청제조법이 위생적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서울의 방역소의 소장은 박진성이었다. 분쉬는 이 박진성과 만나 천연두 예방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1904년 11월에는 궁중 안에 재상급의 의료청장과 그 밑에 고위 관직이 2명을 두고, 한의사 10∼15명으로 편성된 의료청이 신설되었다. 이러하므로 분쉬가 한국 위생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분명하다.
4. 맺음말
20세기초 세계 최고의 의학 수준인 독일 의학을 착실히 익힌 외과전문의인 분쉬가 한국에 왔다. 1901년 11월 2일 제물포을 통해 서울로 와서 고종황제의 시의가 되었다. 고종 황제는 날마다 전통의학인 한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어서 분쉬의 시의로서의 역활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시의라는 직위를 누리면서 외과의로 한국의 서민들에게 진료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분쉬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분쉬가 의사로서 한국으로 오게 주된 이유인 경제적 문제는 적지 않은 봉급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치료비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민 치료는 무료봉사였다. 또한 그의 의료행위는 자신의 수술법을 즐기며 잊지 않으려는 면이 있었으며 언젠가는 치료비를 받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희생이나 봉사가 아닌 의사의 권위와 경제적인 면이 고려된 현실적인 것이었다.
분쉬는 불안한 국제정치 상황에서 그것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한국이 일본에게 침략 당하자, 분쉬가 맡고 있던 황제의 시의라는 직책을 스스로 일본인들에게 넘겨주려는 점으로 보아서 분쉬는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황제의 시의라는 직책이 일본인에 의하여 좌우되는 불행한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1905년 4월 23일 분쉬는 한국을 떠나며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말하였다. "사람은 편한 생활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게 되나 봅니다."
분쉬의 의료행위는 공헌이 적지 않다. 첫째로 분쉬가 한 수술은 모두 그 분야에서 '최초' 또는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진료는 한국의 가난한 서민들을 대상으로 그가 전문인 외과 환자가 많았다. 정형외과는 물론 일반외과와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까지 외과적 수술이 많았다. 이러한 수술은 유교적 개념으로 몸을 온전히 보존해야만 했던 당시는 엄격한 금기사항이었다. 특히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던 시기에 산부인과 수술과 부검을 실시한 것은 이러한 관습을 뛰어 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둘째로 분쉬가 의뢰하여 치료한 고종 황제의 보철은 이 빠진 데는 이를 해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절대권자인 황제의 보철 때문에 보철의 일반화를 보다 쉽게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치아 치료법은 증상에 대한 치료로 약물을 사용하여 통증을 회피하려고만 하였으며, 치아의 경우에는 보존하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이 빠진 데는 이를 해 넣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셋째로 분쉬는 병원을 설립하려고 한국 정부의 재정적인 도움을 얻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한국의 정치를 주도하면서 그의 병원 설립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알렌과 분쉬의 병원 설립에 차이점은 비교되어 진다.
넷째로 분쉬는 전염병을 격리하고 위생관리와 예방접종 등 위생조치를 취했다. 콜레라가 발생 시 방역국를 설립하게 했으며 국제적인 의료협의회를 통해서 티푸스와 천연두 방역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04년 11월에는 궁중 안에 의료청이 신설을 보게되었다.
분쉬는 비록 자신의 경제적 문제로 한국에 온 의사였지만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켜 한국 의학사에 여러 면으로 공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1 분쉬의 주요일정〉
〈표2 분쉬의 진료내용〉 분쉬,『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종합 분석한 자료
參考文獻
1. 史料
관보
황성신문
The Korean Daily news
Hulbert, H. B. 'The Korean Review'
2. 出版된 一次 史料
리하르트 분쉬 저·김종대 역,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G. N. 커즌 저·라종일 역, {100년 전의 여행 100년 후의 교훈}(원제 : Problems of the Far East), 비봉출판사, 1996.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舊韓國外交文書』 第16卷 德案 문서번호2668,2676,2682,2683.
國史編纂委員會, 『尹致昊日記』 6,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