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은 한민족의 젖줄이다.
우리 국토 허리부문을 휘감아 흐르고 있는 큰강이다.
온조임금이 한강 유역에 한성백제의 터를 잡고 500여년동안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었다.
또 고조선의 광활한 옛 영토를 회복하려했던 고구려의 혼이 여기 남았다.
신라도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통일의 시대를 열었다.
고려도 송도에 도읍을 두고서도 남경을 제2의 도읍지로 삼아 지금 서울에도 470여 년의 고려인의 문화를 남겼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한지 한 달만에 '한양으로 가자"며 다른 유력한 후보지를 따돌리고
한양을 조선의 도읍지로 500년 조선의 역사를 열었다.

한강은 옛 말로 한가람이다.
한은 '크다' '넓다' '가득하다' '밝다' 등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강은 '아주 깊고 큰 강'이다.한은 참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순수한 우리 말이다.
한은 전체(全)의 뜻도 가진다. 한은 하나(一)이면서 동시에 많다(多)는 뜻을 가진다.
가람은 강의 옛 이름이다.
한강은 시대별로 이름을 달리하였다. 중국의 한나라와 위나라에서는 대수(帶水)라고 했다.
한반도의 중간허리 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라고 했다.
고구려에서는 아리수(阿利水)라 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한강을 그렇게 불렀다.
이때 '아리’는 깨끗하고 큰’ 이라는 뜻이다. ‘아리수’는 ‘맑고 큰 강’을 의미 한다.
백제는 한강을 욱리하(郁理河)라 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한산하 북독이라고 표기하였다.한산이란 한산주(漢山州)이며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를 말한다.
또 독이란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란 뜻이다. 북독이란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큰 강을 의미한다.
신라는 한강의 상류를 니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 불렀다. 왕봉하의 전설이 있다.
이경재의 ‘한양이야기’에서 그 전설은 옮긴다.
“백제 때 행주에 한 처녀가 신분을 숨기고 행주에 와 있던 고구려 왕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왕자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후일을 약속하고 행주를 떠났다.
왕자가 떠난 뒤 새로 부임한 이 지역의 사또가 처녀에게 수청을 들기를 강요했다.
그 처녀는 왕자와의 약속을 지키며 수절을 했다. 사또는 그 처녀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기로 한다.
이때 고구려의 왕이 된 왕자가군대를 이끌고 행주로 내려와 처녀를 구출한다.
바로 이곳이 한강변의 한 마을이어서 이때부터 한강을 왕봉하(왕봉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 때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 불렀다.
그 이전에 백제가 동진(東晋)과 교류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漢水)라 불렀다.
그 뒤부터는 옛 이름은 차츰 없어지고 마침내 한수 또는 한강(漢江)으로만 불리어졌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의 한 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고어로 크고 넓은 강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광나루부터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을 경강 바로 서울 강(Seoul River)이라고 외국 문헌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