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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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시 |
내 용 |
탑쌓기 (죽장리 오층석탑)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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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51:52 |
선산읍 죽장리 죽장사지(竹杖寺址, 現 法輪寺 境內)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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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화강석으로 된 약 10m의 거대한 오층석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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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두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서로 재주를 자랑하다가 오빠는 다른 곳에서 누이 동생은 죽장사에서 석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누가 먼저 세우는가 내기를 걸어 경쟁을 하였는데 누이가 먼저 우아하고 웅장한 이 석탑을 세워서 이겼다는 전설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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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의 맥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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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忠臣)의 아들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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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51:22 |
단종(端宗)을 위하여 충절(忠節)을 다하고 세조(世祖)의 참혹한 형벌을 당하여 죽음을 털끝같이 여기며 대의(大義)를 태산처럼 지킨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이신 단계(丹溪)하위지(河緯地)는 네 아들과 한 딸이 있었으니 장자는 호(琥), 둘째는 박(珀)이라 하였다. "호"는 이미 생원(生員)에 올랐으나, "박"은 아직 어린아이를 면치 못하였으니, 두 아이 모두 어린 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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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서당에서 글을 익힘에 있어 열성이 남달랐는데 아버지가 단종을 위하여 복위를 꾀하다가 형(刑)을 받고 돌아가신 뒤, 조정에서 내린 엄한 명으로 이 네 아들마저 죽게 되었다. 호와 박의 형제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돌연히 들이닥친 형리(刑吏)들에 의해 온몸이 포박되어 형장(刑場)으로 끌려 오게 되었다. 온 고을은 물끊는 듯한 소란과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이 형제의 참형(斬形)을 구경하려고 온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호의 형제는 어머님과 이미 이 화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였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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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는 충성의 불타는 단심(丹心)이 어찌 단계 한사람에게만 있으랴? 실로 하씨 한가족은 하늘이 내린 충(忠)의 화신(化神)이었던 것이다. 형리(刑吏)의 명령대로 땅에 꿇어앉은 "호"에게 수령이 묻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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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비가 충성(忠誠)하지 못해서 죽었음을 알진대 마땅히 자식된 너희도 어찌 죽음을 | ||||
면하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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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수그린 채 "호"의 대답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하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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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일을 거역한 죄로 아버지가 이미 죽은 뒤에 자식들이 어찌 살아 한 생명을 아끼리 | ||||
요마는 한가지 소원이 있으니, 청컨대 들어 주오리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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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냐? 말하라" 수령은 묻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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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은 집에 어머님이 계시는지라 잠깐 나아가 이별을 고하고 올 것이니 여가를 허 | ||||
락하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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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체포되어 온 것이 아니라 형제는 서당에서 붙들려 온 것이다. 수령은 이형제의 효도하는 마음에 감복하고 기특히 여겨 또 마음속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어 드디어 잠시동안 이별을 고하고 올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형제는 곧 집으로 달려가 어머님을 뵙고 엎드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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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는 아버님의 뒤를 따라 오늘 죽음에 나가오나 한가지 아뢸 말씀은 원컨대 누이 동 | ||||
생으로 하여금 불량한 무리들의 종이 되게 말으시고 어머님은 평안하게 만수무강 하소 | ||||
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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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사당(祠堂)에 절한 후 형장에 돌아와 조용히 죽음에 이르니 그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하고 "범이 개를 낳지 않는다."하며 하위지 부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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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군지(善山郡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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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성(天生山城), 미덕암(米德岩)의 전설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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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51:01 |
인동의 구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4km되는 지점에 사방이 자연 석벽으로 된 절험의 산이 있으니 이 산이 바로 천생산성이다. 이 산의 서쪽에 불쑥 튀어 나온 큰바위가 자리 잡고 있으니 <>의 천생산성조에 의하면 밀득암(密得岩)이라 한다. 근세에 이르러 미덕암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쌀(米)의 덕을 보았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옥산지(玉山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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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세칭 홍의장군이라 불리워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모아 천생산성에 집결시켜 왜적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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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성은 천연적으로 깍은 듯이 험준하게 생긴데다가 곽장군의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요새지로서 왜군이 아무리 공격해도 함락할 수가 없으므로 공격에 지친 그들은 한 계략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왜군은 인근 민가에 내려가서 저 산성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물이라고 하였다. 이 귀중한 정보를 탐지한 왜군은 이 산 기슭에다 큰 못을 파니 산위의 샘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산성 안에서는 식수가 적어서 큰 고난을 겪었지만 이에 홍의장군은 굴하지 않고 기발한 계책을 세워 이 산성에 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왜군에게 보이기로 계획을 꾸몄다. 홍의장군은 밀덕암 바위 끝에다가 백마를 세우고 말 등에다 쌀을 주르르 부으면서 말을 씻는 모습을 하였더니 멀리서 바라보는 왜군은 마치 물로써 말을 씻고 있는 것같이 보였던 것이다. 이 것을 바라 본 왜군들은 자기들이 정보를 탐지한 것과 달리 산성에 물이 많아서 말까지 씻기니 공격을 단념하고 물러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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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내고장전통가꾸기(구미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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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전(趙娘傳)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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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50:27 |
조랑은 선산부사 조공(趙公)의 딸이었다. 사우(祠宇)는 출장소에서 서북쪽 두어 걸음 밖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으므로 옛날 어느 시대의 일인지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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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娘)은 부사의 딸로 부친재관(父親在官)의 고을에 따라 온 것이다. 혼기(婚期)에 들자 연미한 자태와 요조한 의표(儀表)로 당시에 유명하여 일향(一鄕)의 추중(推重)하는 바 있었다. 불행히도 무례한 통인(通引)의 강제 겁탈의 변을 당하게 되어 위급한 경우에 있어서 처사한 일이 떳떳한 일이나 또 어려운 일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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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를 지키고 목숨을 버렸으니 랑의 죽음이야말로 가위 옳은 죽음이며 열렬히 천추에 불사(不死)의 지조가 있다 할 것이다. 봄기운이 완연하며 밤이 깊어 달빛이 숲속에 깃들고 미풍이 죽림을 흔들 무렵이었다. 관각(官角)은 이미 잠들고 성문은 굳게 잠겼는데 관노가 화음월색(花陰月色)의 틈을 타고 감히 불칙한 의사를 내었으니 만약 범염한 처녀였다면 어두운 야음에 사람들이 모르리라 하여 순순히 따를 수도 있으려니와 랑은 그렇지 않아 칼을 받으면서 오욕을 받지 않았으니 진실로 의랑(義娘)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일 부사의 가족들은 가정의 한 소소한 수치로 알고 절대 발설을 금하며 덮어 두어 정려의 포상도 엄금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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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군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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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우전(義牛傳)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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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50:03 |
옛날에 김기년이란 사람이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해 여름 이 소와 밭갈이를 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뛰어 나와 소를 덮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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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며 갖고 있던 괭이로 마구 싸우니 호랑이는 소를 두고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이때 소가 크게 우짖고 뿔로 호랑이와 싸워 물리치고 주인을 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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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있은지 얼마 후 주인이 호랑이와 싸움에서 얻은 상처로 죽자 소도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3일만에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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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소의 주인에 대한 충성을 기려 그 사실을 돌에 새겨 소의 무덤가에 세웠다. 1630년 선산부사 조찬한이 의열도에 의우전을 기록하였으며 소의 무덤은 지금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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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의 맥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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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義湘大師)와 약사암(藥師庵)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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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8:55 |
의상대사(義湘大師)는 신라 문무왕(文武王)때 가장 유명한 승(僧)으로 처음에는 금오산봉 동쪽 바위 밑에 움막을 치고, 그 속에서 수도 성불할 때 선녀가 하루 한끼의 밥을 내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암자를 지었으니 곧 약사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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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도승의 탐방은 물론이요, 일반인의 참선도 많으며 이 암자에 참선해야 극락에 갈 수 있다하여 음력 4월 8일 석가탄신일에는 백발노인들의 참선함을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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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성불한 의상은 뒤에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해동 화엄종(洞海 華嚴宗)의 대종사(大宗師)가 되었다. 약사암이란 약사여래(藥師如來)에서 기인된 명칭이며 또한, 민족의 거사(巨事)인 3ㆍ1운동때 33인의 대표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과 같이 불교계의 대표로 백용성(白龍城)스님이 이곳에서 참선득도(參禪得道) 했다하니 더욱더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하겠다. | ||||
의구전(義狗傳)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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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8:11 |
약 3백년전 선산의 동쪽 연향(현, 해평면 산양리)에 살던 우리(郵吏) 김성원이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황구(黃狗)가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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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주인이 이웃 마을에 놀러 갔다가 말을 타고 돌아오는데 술이 취하여 말에서 떨어져 길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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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곁에서 불이나서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개는 낙동강 물을 온몸에 적셔 불을 끄고는 죽었다. 주인이 술이 깨어 일어나서 개가 자기를 구하고 대신 죽었음을 알고 크게 감동하여 거두어 묻어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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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주위 사람들이 그 개의 충성된 의로움을 기려왔으며 1665년 선산부사 안응창은 의열도에 의구전을 기록하였고 이 개무덤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지금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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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의 맥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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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샘에 얽힌 사연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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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7:23 |
금오산 마애보살입상(磨崖菩薩立像) 옆 절벽밑에 옹달샘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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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샘에는 용이 못된 강철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름하여 이무기라고 전한다. 이 이무기는 길고도 모진 천년이란 세월을 지난 후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등천(登天)의 날이 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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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따뜻한 봄날 바위를 타고 천지가 진동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하늘로 오르고 있던 그때 공교롭게도 언덕 아래 양지편에서 산나물을 캐던 아낙이 너무나 뜻 밖에도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등천(登天)하는 광경을 보는 순간 놀란 나머지 방정맞게 요망스럽게도 그만 "저 이무기 봐라"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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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묵은 이 이무기는 원통하게도 용(龍)이 못되고 「처절-퍽」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으니 천애(天涯)의 낭떠러지 암벽(岩壁)엔 떨어질 때의 흔적으로 홈이 패였고 비늘 자욱이 남아 있으니 이 바위를 용회암이라 하며, 절벽밑의 이 옹달샘을 용샘이라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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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처에 묘(墓)를 쓰면 가뭄이 온다고 해서 가뭄이 심할 때면 주민들이 묘를 찾아 파해치면 그날 밤부터는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하는 영험있는 곳이라 전하고, 가물 때는 기우제(祈雨祭)을 올리기도 했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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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蓮池)의 신비(神秘)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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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6:49 |
해평면 소재지에서 금호리 고갯길을 건너 가기 전 국도변에 4만㎡에 가까운 큰 못이 있다. 일정한 수원(水源)도 없이 큰 가뭄에도 마르는 일이 없고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그 연대는 미상이나 창림저수지에 보조 수원지로 논에 물을 대주어 이 곳 곡창을 채우는데 큰 몫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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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못의 수면을 뒤덮은 연꽃은 갖가지 전설을 안고 피고 또 졌다. 한국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이르기를 "이 못에 연꽃이 길이 피거던 나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알아 달라"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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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가을비를 수천년을 되풀이 해온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꽃을 먹고 연뿌리를 캐곤하지만 시들고 쇠할줄을 모를뿐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무성히 만발하던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나라가 점령당하자 왠일인지 점차로 연이 줄어들고 꽃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해방 전해까지만 하여도 몇 포기만 남아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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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되자 기적적으로 포기가 늘어나 연못을 꽉 채워 오늘의 성황을 보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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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도화상의 얼이 깃들었다는 증좌의 상징인가? 아니면 이 고장 사람들이 잘 가꾼 탓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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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18일 도리사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발견되면서부터 연꽃은 더욱 무성하여 이제는 낚시를 드리울 틈도 없이 되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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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피면 녹색 이불을 덮은듯하고 꽃이 피면 빨간 수를 놓은 듯하여 싱그러운 향기 또한 온 들을 뒤덮어 지나는 길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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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전설을 지닌 이 연꽃들이 이 일대가 불교의 발상지임을 증명해 주는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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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군지(善山郡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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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못(狐池)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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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6:30 |
동남으로 배고개(梨峴:이현), 서남으로 쌀고개(米峴:미현), 동북으로 가마고개(釜峴:부현), 북으로 봉곡(蓬谷)과 망장(綱障)고개를 넘어야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이곳이 들성이란 동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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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읍 원호리, 문성리가 분지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뒷산은 구름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미는 형상이며 푸른 송림이 우거진 앞산은 부채를 거꾸로 세운 듯하며 아래엔 거울같이 고요하고 맑은 호수(둘레 1,115m)가 한폭의 그림인양 펼쳐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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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줄곧 인근 동리에 물을 대주어 곡창지대를 이루게하고 봄, 가을은 낚시군들의 소일 터가 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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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이야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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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 보니 지금 있는 못 둑 모양으로 짚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므로 농민들은 의아해 하다가 문득 생각나는게 있었다. 간밤에 앞산에서 여우가 몹시 울더니 이는 반드시 여우의 짓이다. 이대로 둑을 쌓으라는 뜻인줄 알고 그대로 파고 둑을 높이 쌓아 지금의 깊고 넓은 호수가 되었으나 둑이 터저 피해를 본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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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가지 기이한 일은 둑이 터지는 해 봄이면 앞산에서 반드시 여우가 울어서 피해를 예고하였다고 하는데 한번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여우가 우는 봄이면 여름이 오기전에 둑을 튼튼히 하여 피해를 미리 막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앞산에 여우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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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과 제사를 지낸 뒤부터는 한번도 둑이 무너진 일이 없었으며 굿하는 날은 인근 동네의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리하여 "못"이름을 여우못(狐池:호지)이라 하고 매년 봄에는 좋은 날을 가리어 여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여우사당의 터만 남아있고 수십년 전부터 못굿도 행하지 않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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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군지(善山郡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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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못된 선산(善山)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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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6:04 |
낙동강으로 흐르는 감천(甘川) 강변의 선산 앞들 가운데 괭이를 거꾸로 세운 듯한 동산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곳은 늙은 잡목(雜木)이 검은 바위 사이로 숲을 이루어 아담한 풍치를 보여준다. 산으로 보기엔 아담하고 자연적으로 생겼다면 그 모습이 너무나 기이(奇異)하여 이 동산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로운 감마저 느끼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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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임금이 서울을 옮길 것을 계획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평안할 수 있는 왕도의 터를 찾아 금수강산 곳곳을 아무도 모르게 순행 다니시다가 선산읍에 당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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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의 산천을 돌아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곳보다 왕도(王都)로서 가장 적합한 곳이다. 북서쪽으론 병풍 같은 자연의 산성이 둘러 있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동으로 낙동강, 남으론 감천(甘川)의 두 강이 있어 또한 적을 방어하기에 좋으며, 하늘에 우뚝 솟은 금오산, 냉산, 갈미봉은 먼 곳의 적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봉화대(烽火臺)로서 천연의 요새지(要塞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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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넓고 기름진 들판은 도성내(都城內)에 거주하는 관리와 국민의 식량을 충분히 댈 수 있는 곡창지대이니 이 모두 하늘이 내린 서울자리라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임금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고을은 장차 현명한 제상과 훌륭한 장군과 더불어 영웅달사(英雄達士)가 많이 나올 성스러운 곳이 듯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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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제일 먼저, 첫째 조건인 산골을 일일이 세어 보았더니 백 골짜기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아흔 아홉 골이라 왕도(王都)로서 첫째 조건이 미비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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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고 원통하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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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치고 애석해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않은 왕(王)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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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하나가 부족하다고 해서 왕도(王都)가 못되다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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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크게 낙심하는 것이다. 선산땅을 서울로 정하지 못한 애석감을 이기지 못하여 왕은 이틀을 이곳에 더 머물다가 또 다시 도읍터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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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읍내 로상리(路上里) 산 밑에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농민이 살고 있었다. 그는 육십 고개를 2, 3년(年) 앞둔 늙은이었는데, 그에겐 나이 열아홉 살과 열일곱 살 되는 두 딸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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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도 없는 그 늙은이는 수년 전부터 맏딸이 혼처(婚處)를 백방(白方)으로 구하였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시집갈 나이 지난 맏딸은 때때로 짜증을 내고 투정을 하며 늙은 부모의 간장을 태우곤 하였다. 그런데 노부부는 둘째 딸을 혼인(婚姻)시켜 자식 대신 데릴사위나 맞아 여생을 의지할까 하고 서로 약속한 듯 마음먹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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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처녀는 눈이 오고 몹시 추운 긴 겨울을 늘 어두운 방안에서 우울하게 지내오다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이 옴과 동시에 싹이 트는 풀과 나무같이 봄기운의 충동인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설레임을 어찌할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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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오늘은 어쩐지 내 가슴이 울렁거리며 숨이 가쁘다. 날씨도 따뜻하고 하니 들나물 | ||||
도 캘겸 앞들에 나가 놀다 올까 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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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언니에게 졸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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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냐? 어머니께서 아신다면 다 큰 처녀들이 들에 마구 다닌다고 야단이 | ||||
날 것이다. 꾸중들을 짓을 아예 그만 두는 것이 좋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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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쏘아 붙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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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뒷 산골에 팥밭 갈러 가셨고 어머니는 빨래하려 가셨으니 돌아오시기 전에 우 | ||||
리 둘이 들 구경 갔다가 먼저 돌아와서 모른 체 하면 될 것 아냐, 언니들 구경 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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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또 한번 조른다. 과년한 언니도 춘정은 아우만 못지 않아 마음속으로는 몹시 가고 싶던 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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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열 아흐렛날이라면 봄 향기가 무르익어가는 계절이다. 말 같은 두 처녀는 드디어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앞들을 향해 나선 것이다. 3월 19일에 꽃다운 나이의 처녀 자매가 길을 떠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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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는 구실냉이 달냉이랑 많이 캐서 쌀뜨물에 따끈히 국을 끓여서 어머니가 빨래 | ||||
갔다 오면 드릴테야, 봄나물 국은 보약보다 더 좋대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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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있는 동생은 앞으로 나가면서 나물을 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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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얘야 난 쓴냉이 뿌리랑 모메 뿌리랑 캐어 삶아 무쳐서 아빠가 팥밭 갈고 오시면 | ||||
반찬으로 드려야지. 모메 뿌리는 동삼보다 더 좋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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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언니의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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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처녀는 이 논둑 저 밭골로 나물을 캐면서 가다가 어느덧 감천 가의 백사장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의논이나 한 듯이 나물 바구니를 옆에 놓고 걸어온 길을 돌아 보면서 나란히 앉았다. 삼단같이 땋은 머리채를 뒷 등으로 휙 넘기면서 '후유'하고 이마에 어린 땀을 소맷자락으로 닦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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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아른거리며 무르익어 가는 봄날의 정경은 한 폭의 그림만 같았다. 멀리 병풍처럼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노상리는 복숭아와 살구꽃 속에 잠겼고, 듬성듬성 서 있는 단계(丹係)방천의 버드나무도 연녹색으로 봄빛이 완연하다. 역촌 화조리(驛村-花鳥里)의 동산에 늙은 소나무는 오늘따라 유달리 푸른 듯하고, 성황당(城隍堂)은 산그늘에 덮여서 알 수 없는데 죽장리 5층탑은 새터고개가 가로막아 방향만을 분간할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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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우리 집 어디쯤 있노? 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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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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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몰라 등신 바보야? 보나마나 노상리 제일 막바지 별남이 집이지 뭐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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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명스런 언니의 대답이다. 동생은 이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가졌던 호미로 무심히 땅만 그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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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감천 물 역시 말없이 백사장을 흐르고 강건너 부래산(浮來山)은 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저편 봉산리 동네의 오고 가는 사람과 소와 말 뿐이다. 언니는 무슨 불만이나 있는 듯이 굳센 팔에 힘을 주며 자기도 모르게 호미로 자꾸만 앞을 찍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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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모래밭은 푸른 하늘과 맑은 강물과 어울려 유난히 흰빛을 자랑하고 물 건너 부래산 마루 끝엔 낚기는지 낚기지 않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낚시하는 늙은이의 무심한 표정이 고요 속으로 저물어지고 있다. 강 건너 실버들은 봄의 흥취를 못 이기는 양 봄바람에 나부끼고 요란한 종달새는 따사로운 이 봄을 하늘 높이 찬미하는 듯 하며, 멀리서 소를 타고 한가히 논길을 가는 목동의 보리 피리는 풍년가를 부르는 농부와 어울러 한 폭의 그림인양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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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것 하나 덧없이 깊어 가는 봄의 여신을 원망하며 흐르는 세월을 아끼지 않음이 없고, 나이든 처녀 총각들의 춘정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없다. 꽃을 찾아 바삐 날아다니는 쌍쌍나비는 청춘 남녀들의 화신인양 두 처녀의 눈 앞에 어른거려 그렇지 않아도 가슴에서 치솟는 춘정을 부채질하며 지나간다. 두 처녀는 미친 듯이 벌컥 일어나서 호랑나비를 잡으려고 쫓았으나 좀채로 잡히지를 않는다. 한참을 이러다가, 숨이 가쁜 이들을 쫓던 나비를 그만 두고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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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야 언니는 시집을 어디로 갈까? 내가 호미를 던저 맞춰 볼께, 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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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동생이 수작을 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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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울분이 터질 지경이데 그 따위 말은 듣기도 싫어. 난 시집 안 갈테야 그 따위 말 | ||||
말고 입 딱 다물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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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흘기며 내뱉는 언니는 무뚝뚝한 대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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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야 내말좀 들어봐 응, 요전날 밤에 엄마와 아빠가 둘이서 얘기하는걸 들었지 뭐야. | ||||
앞 집 김도령은 인물도 마음도 좋고, 농사도 많이 지어 좋다지만, 언니가 아무리 좋아 | ||||
한 대도 엄마 아빠가 그리론 언니를 안 보낸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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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보낸다더냐! 난 죽어도 가겠다. 왜 그럼 집에서 묶어두고 늙힐 작정인가? 머슴 | ||||
삼아 부려먹기만 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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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김도령집은 잘 살아도 선채 돈도 작게 줄라하고 나락 한 섬도 주지 않을테 | ||||
니 그래서 뒷집 최도령을 사위로 삼는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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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집 최도령에게는 죽어도 안 갈테야. 스물네살 이라는 게 키다리 장승같고 얼굴은 검 | ||||
붉고 어느새 수염이 꺼멓게, 거기다가 말더듬이라 속이 꽉 막히더라. 보기만 해도 지긋 | ||||
지긋한 녀석한테 누가 시집갈까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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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아무리 그래도 안돼. 최도령을 사위로 삼으면 우리 집 일도 잘 해주고 선채 돈 | ||||
도 많이 받고 나락도 닷 섬이나 준다면서 우리 집은 잘 살아 나가게 된대 뭐? 뒷집 최 | ||||
도령네 집하고 이미 말이 다 있었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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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녀석이 요전에 내가 샘에서 물을 이고 오니까 뒤따라오더니 히히 웃곤 내 머리 | ||||
댕기를 잡아당기더라. 등신 병신과 같은 자식 꿈에도 보기 싫어. 정말 시집 안가고 도 | ||||
망가는 것이 더 좋을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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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아무리 그래봐도 엄마 아빠는 앞 집 김도령한테는 시집 안 보낸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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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말을 들은 언니는 흥분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호미 자루를 내동댕이치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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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도 앞 집 김도령하고 둘이 살짝 만났는데 아무도 모르게 둘이 손잡고 어디 | ||||
로 가자 하더라. 얘야 내가 호미 자루를 던져 보고 네가 시집갈 데를 알아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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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에 젖은 언니는 자기 사정을 잊은 듯 동생한테 이런 말까지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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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난 싫어. 언니가 말 아니해도 나는 맘에 드는 총각이 있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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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듯 나지막한 대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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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침마다 우리 집 앞으로 책을 옆에 끼고 글방에 다니는 강진사(康進士)댁 맏아들 | ||||
말이지? 얘, 그 총각은 나도 맘에 슬며시 들더라. 길다랗게 땋아 느린 머리끝엔 깜둥갑 | ||||
사댕기며 하얀 버선이랑 녹색 가죽신발은 더욱 사람의 간장을 녹이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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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말 마라. 부끄러워 집안도 좋고 논밭도 많고 일가도 많고 하니 말이다. 넌 예쁘지 | ||||
만 우리 집 같은 상놈 가난뱅이의 딸을 누가 며느리로 삼는대? 양반집안의 부잣집 딸 | ||||
들한테서도 많은 청혼이 있다는데. 참 그리고 명년 봄엔 서울로 과거보러 갈려고 열심 | ||||
히 공부한다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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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언니는 어째서 그렇게 잘 알고 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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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이가 열하고도 다섯 살 신랑감이 됐거든. 꼭, 장가 갈거야. 나하고 결혼하고 나서 | ||||
과거에 급제하면 서울 양반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서울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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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듯 홍조를 띄운 동생은 장래의 꿈에 가슴이 부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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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봐라,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데 강진사댁이 우리와 사돈한다든? | ||||
어림도 없는 말이야. 그만 둬, 요전날 밤에 엄마 아빠가 얘기하는걸 나는 자는 체하고 | ||||
다 들었단 말이야. 우리 집은 아들이 없고, 엄마 아빠도 늙어셨으니, 너는 다른데 시집 | ||||
보낼 수 없다면서 재 너머 외딴집 박첨지네 셋째 아들 삼돌이를 데릴사위로 삼는다더 | ||||
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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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 난 싫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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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호미 자루를 잡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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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도 호미 자루를 잡고 함께 모래 위를 이리저리 밭 갈 듯 무언가 그리고만 있었다. 두 처녀는 나물 캘 생각도, 집으로 돌아갈 마음도 없이 멍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요란스런 종달새도 잠시 노래를 멈추었다. 읍내 쪽에서는 마을 아낙네들이 점심밥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나는 듯 이쪽으로 오는 것이 여기 저기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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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였다. 어디선가 우렁찬 음악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리고 들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두 처녀는 본정신으로 돌아와서 귀를 기울이며 이 음악소리를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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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天使)들의 노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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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 후창 | ||||
선산이라 좋은고장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한골없는 백골이라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하느님이 선사하사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이동산을 보내신다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뒷골백골 수채워서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좋은왕터 되옵시고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시화연풍 국태민안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길이길이 번영하라 에이야 어영차 영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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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노래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두 처녀는 문득 동시에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멀리 금오산 저편에서 뒷골 갈미봉까지 오색이 찬란한 쌍무지개 다리가 하늘 높이 놓여 있고, 수많은 어린 천사들이 산봉우리를 메고 이쪽을 향하여 두둥실 떠오르것이 아닌가? 얌전한 동생은 겁을 먹고 얼굴을 언니 치맛자락 속에 푹 파묻고 쥐죽은듯이 일어서서 두팔을 들고 고함을 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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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동네 사람들 큰일났오. 산봉우리가 하늘 높이 떠오니 이 고장 사람들은 다죽었 | ||||
다 다죽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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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처녀는 혼비백산하여 바구니, 호미, 짚신을 그 자리에 둔 채 허둥지둥 맨발로 집까지 뛰어와서 방안에서 이불을 푹 덮어쓰고 죽은 듯이 숨어있었다. 이 광경을 본 어린 천사들은 발걸음을 멈추며 두 처녀의 행동이 요사스럽고 불길한 징조라 하여 메고 오던 산봉우리를 두 처녀의 놀던 자리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시에 하늘에 먹장 같은 구름이 순식간에 모여 들더니 천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찬란하던 쌍무지개도 자취가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다만 들 가운데에는 여태껏 없었던 한낱 동산이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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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고을 선산(善山)의 밤은 깊었다. 늦게 돋은 하현달이 수많은 별들의 속삭임을 비추어 주며 듣고 있었다. 첫닭 소리가 들리기 조금 전이었다. 웬일인지 먹물 같은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삽시간에 암흑세계로 변하여 우뢰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번개불은 세 번이나 번쩍이곤 하였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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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이 고장 사람들은 어젯밤에 일어났던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또 하나의 기적은 노상리 막바지에 있던 집과 두 처녀와 늙은 부모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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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군지(善山郡誌) ㆍ구전(口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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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바위(愛岩)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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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5:33 |
명금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다리이니 옛날에는 작은 폭포라 해서 이 근처 경관이 매우 좋아 산에 높게 오르지 못할 사람들은 이 근처에서 시원한 물과 바위로 산의 정감을 만끽하던 곳이나 명금교가 가설되고 부터는 금오산의 명소 한 곳이 없어진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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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금교 아래 물이 고여 머물다 흐르는 작은 웅덩이가 있는데 그 물 속에는 작은 바위 하나가 솟아 있어 언제부터인가 다리 난간에서 동전을 던져 물 속의 바위에 얹혀지면 곧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동전을 던지건만 사랑을 이루기란 이처럼 어렵던가 물의 정력에 의한 저항을 받아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잡히어 좀처럼 얹혀지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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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로마의 애천(愛泉)이라는 인공(人工)샘이 있어 외국의 관광객이나 로마 시민(市民)이면 너도나도 동전을 던져 점을 치던 풍속에서 연유인가 이 바위를 사랑바위(愛岩)라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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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의 유래(飛鳳山의 由來)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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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5:10 |
선산읍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飛鳳山)은 글자의 뜻 그대로 봉황이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봉황은 역사상 상스러운 새로 생김새는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 등을 하고, 키는 6척 가량이며, 목과 날개에는 5색 빛 찬란하고 다섯가지의 울음소리를 내며 성품이 어질고 청결하여 나는 새 가운데 왕이라 칭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순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신성한 물만 마시고 산다고 하며 성인군자가 나야만 이 새가 나타나는데 용, 거북, 기린과 함께 사령(四靈)이라는 전설의 성스러운 새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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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설에 의하면, 비봉산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에 날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 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있어, 두 날개이며 출장소 뒤의 봉우리가 몸과 모가지가 된다. 가운데의 봉우리 아래에 출장소가 자리잡고 있어 봉의 입이 옛 군청사를 문 것과 같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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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것일까? 날으려는 것일까? 늠름한 기상, 수려하고 장엄한 기상은 정말 선산의 진산(鎭山)이요, 산중의 산으로 명산(名山)이며 산의 조종(祖宗)임에 틀림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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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산의 모양으로 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옛말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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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은 북쪽에서, 금오산은 남쪽에서 서로 안을 지키고 감천은 동으로 흘러 낙동강과 이어져 외부를 지키면서 아주 튼튼한 천연의 성을 이루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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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산읍민들에겐 큰 걱정이 있었다. 비봉산의 봉새가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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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친다는 의미로 동네 이름을 "망장(網張)이라 했으며, 물목동네 뒷산을 "황산(凰山)"이라 이름 지어 짝을 맞춰주기도 했다. 그것은 봉(鳳)의 수컷이요, 황(凰)은 암컷이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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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산읍 사방동네를 죽장(竹杖)이라 하여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순으로 먹이를 대어주고 화조리 또한 봉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만화백조(萬花白鳥)가 있다는 뜻이며, 다시 동리 이름을 영봉리(迎鳳里)라 한 것은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며. 무래리(舞來里) 역시 봉황이 날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봉황은 알을 다섯 개를 낳는데 한 개는 이미 앞들에 있는 동산이므로 다시 네 개의 동산을 만들어 다섯 개의 동산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이 다섯 개의 알을 봉황이 품고 영원히 깃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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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섯 개의 동산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허물어져 1966년 경지 정리에 따라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한 개의 동산만이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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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임진왜란때에 명나라 장군이 이 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봉산 주령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큰 쇠못을 꽂았다고 전하여 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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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택리지(擇理誌)ㆍ선산군지(善山郡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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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과 꿀 [백(栢)과 밀(蜜)]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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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4:47 |
연산군(燕山君)의 잘못을 항언(抗言)함으로서 영덕(盈德)으로 유배된 신당 정붕(新堂 鄭鵬)은 도학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친 분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다시 벼슬을 주었으나 병이라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배들을 위해 학문을 가르치는데 전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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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내려온 뒤에도 여러차례 나라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그 후 그의 친우인 좌의정(左義政) 성희안(成希顔)의 간절한 소청으로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역임하였다. 탁월한 기량과 청렴결백한 천성은 또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으니 부사로 있을 때, 성희안(成希顔)이 서신을 보내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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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마을에는 마땅히 잣과 꿀이 많을테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 달라"고 하여 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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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부사로서 이 고을 청송의 잣과 꿀을 많이 거두어 먹을 것이며 또는 생기는 것도 많을 것임에 틀림 없으리라 생각 함이리라. 서신을 보고 난 선생은 태연게 즉석에서 답장하는 붓을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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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백성의 집 꿀통 속에 있으니 부사가 어찌 이것을 구할 | ||||
수 있으랴? (栢在高山絶頂上 蜜在民間蜂桶中 爲太守者何由而得之)"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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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본 성희안은 크게 부끄러워하여 앞서의 잘못을 크게 후회한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탐관오리(貪官汚吏)들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 없으며 국가의 직책을 가진 이로 하여금 길이 사표(師表)가 되고, 귀감(龜鑑)이 된다 아니할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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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일선지(一善誌), 교남지(嶠南誌), 신당집(新堂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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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의 유래(由來)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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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4:27 |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은 변모하지 않고 변화에 따라 문명사회(文明社會)를 자애(慈愛)에 가득찬 표정(表精)으로 바라보는 듯 이곳을 거치는 사람마다 주목을 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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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新羅時代)에 나당연합군이 이 백제(百濟)를 칠 때 당(唐)나라에서 판견된 한신(韓信)이라는 장군(將軍)이 어느 전장(戰場)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 백제군(百濟軍)의 포로(捕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보살(普薩)이 희모시자(希毛待者)(중국 항주의 승려회통에 기록)로 변신하여 나타나 도망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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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신장군(韓信將軍)은 본국(本國)에 무사히 돌아갔지만 생명의 은인이었던 희모시자(希毛侍者)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얼굴이 생각되어 이곳 황상동(黃桑洞)의 암석(岩石)에 조각(彫刻)하였으니 곧 마애여래입상(摩崖如來立像)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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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보물(寶物) 第1122號로 지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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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佛像)을 조각(彫刻)한 뜻은 신라(新羅)의 영원(永遠)한 통일(統一)을 기원(祈願)하며 사방정토(四方征討)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이 땅에 성취(成就)하기 위함이라 한다. 오늘도 이 석불상(石佛像)에 진심(眞心)을 가지고 기원(祈願)하게 되면 모든이 즉 중생(衆生)들의 병(病)을 낫게 한다고 하여 신자(信者)들의 발걸음이 끓이지 않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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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전암(祿傳岩)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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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3:54 |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700리 중간 지점에 돌섬이 있으니 곧 녹전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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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바다와 맞닿은 강구(江口)인 다대포(多大浦)에서 역류하여 350리요, 낙동강의 수원(水源)인 소백산 황지(黃地)에서 순류하여 350리로 꼭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곳이다. 위에는 냉산(冷山) 웅봉(雄峰)이 굽이 보고 아래로 매학정(梅鶴亭)을 바라보는 이 바위섬은 옛날 모든 장사군들이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상품을 배에 싣고 상주, 안동 방면으로 올라오다가 이곳에 와서 돛을 풀고 물귀신에게 순풍을 빌며 뱃길이 무사하기를 제사 지냈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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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된다(벽해상전 : 碧海桑田)는 옛말과 같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금은 강심(江心)도 변하여 포전(浦田)이 들 가운데 놓여있으니 들 이름도 녹전암을 따라 녹전평야라 한다. 지금의 해평면 금호리 앞들이 바로 이 녹전평야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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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정에서 가벼운 죄를 지어 이 섬으로 귀양온 인물도 있었다고 전하여 일명 충신암(忠臣岩)이라고도 하며 귀양살이 하던 인물이 뒷날 충신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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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설에는 야은 길재선생이 은둔생활을 할 때 나라에서 내린 록(祿)을 먹지 않고 이 섬에 쌓아 두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상세한 유래는 알길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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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선산군지(善山郡地)ㆍ교남지(嶠南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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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桃李寺)와 직지사(直指寺)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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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3:23 |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짓고 금산(金山)(지금의 김천시) 금릉땅을 바라보니 황학산(黃鶴山)중턱에 좋은 절터가 보이므로 승도들에게 손가락으로 절터를 가리켰다하여 절 이름을 직지사(直指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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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는 신라(新羅) 눌지왕 2年(418)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후 936년에 능여대사가 중건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입적(스님이 돌아가심)할 때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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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아래 큰 절터가 있음을 아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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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턱으로 가리켜 주었다 하여 "직지사"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고 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측량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가람(伽藍)이란 것이 이미 판명되었고, 아도화상이 수도했다는 곳에서 똑바로 정면에 직지사가 있는 것을 보면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비롯된 것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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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많은 승병을 이끌고 왜병과 싸워 전공을 세웠으며 일본과의 외교에서 많은 활약을 하여 포로를 구출한 사명당(四溟堂)이 13살에 직지사에서 수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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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도리사와 직지사는 불가분의 인연을 갖고 불도의 수련장이요 호국의 도량(道場)으로서 우리 겨레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함께하여 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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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산문답(冷山問答)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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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2:47 |
선산(善山)땅 비봉산(飛鳳山) 아래 자그마한 암자에는 오랜 세월을 두고 벽을 향해 문을 굳게 닫고 대학(大學)을 공부하고 있는 선비 한 사람이 있었으니, 연산군(燕山君)이 손수 그 아버님 성종(成宗)이 기르시던 사슴을 쏘는 것을 보고 장차 이 나라가 어지럽겠구나 탄식하고 높은 무관의 벼슬을 버리고 처자를 데리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선산으로 내려와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익힌 선전관 송당 박영(松堂 朴英)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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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송당이 글 읽기를 마친 뒤에 산쪽으로 난 창문을 열었다. 단정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옥을 깍아 세운 듯한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의 설경이 그림인 듯 뻗쳐 송당의 넓고 큰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설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구비쳐진 길 아래에 말방울소리가 달랑달랑 들렸다. 송당은 다시 귀를 기울여 방울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산모퉁이 구비진 곳에 나귀를 몰고 눈을 밟으며 암자를 향하여 올라오는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신당 정붕(新堂 鄭鵬)과 박경(朴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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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신당 선생께서 눈길에 어떻게 험한 길을 올라오십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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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도 구경할겸 자네 공부도 볼겸해서 박진사(朴進士)를 동반해 오는 길일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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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얼마나 공부를 하시기에 고생이 되시오 늦공부가 과연 힘들 것이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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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송당은 두 어른을 서재로 인도하니 신당은 방에 들어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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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동안 대학을 만번을 읽었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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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선생이 물은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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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래면 끝날듯 합니다마는 저는 그저 뜻을 모르고 읽기만 한 것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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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은 탄식하듯 옷 깃을 바로 잡고 대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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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올라 오다가 박진사 하고 이야기하고 웃었네마는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 | ||||
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알아서 깨닫는 경지에 이름) 공부 말이야. 지난 가을에 내가 저 | ||||
냉산(冷山)을 가리키며 저산 바깥에는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 | ||||
답도 못하지 않았나 이제 그만큼 공부를 했으면 짐작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번 대답해 | ||||
보게, 저산 밖에는 무엇이 있겠나?" 하고 신당이 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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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밖에는 다시 산이 있을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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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이 고개를 수그려 대답했다. 신당은 껄껄 웃으며 송당의 손을 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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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아 이제 자네의 글 읽는 공을 알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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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방긋이 웃을 뿐이요. 박경(朴耕)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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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송당이 글 공부가 이렇게 도저(到低)하단 말씀이요. 그야말로 참 갑자기 학식이 | ||||
늘었어. 아주 놀라겠는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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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공경하여 탄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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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이제 의학을 좀 공부해야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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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은 신당을 쳐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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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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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시골 산천에 훌륭한 의원이 없어서 귀중한 생명을 버리게 되는 사람이 많습니 | ||||
다. 혹 의원이 있다해도 그나마 이름있는 양반집에만 드나들게 되니 가난한 백성이 자 | ||||
식으로 그 아버지가 운명을 한다해도 약한첩 못쓰고 팔짱을 끼고 들여다 볼 뿐이요 처 | ||||
자가 병들어도 약방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생죽음하게 되니 한심한 일이 아니오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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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의 높은 견식에 탄복하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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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이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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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과를 보지 아니하시려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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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이 송당에게 묻는 소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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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벼슬을 버리고 온 사람이 과거가 무엇이오니까? 무인이 싫어서 고향에 돌아온 것 | ||||
이 아닌 바에야 점필재를 보시고 탁영 김일손을 보십시오. 지금 벼슬을 할 때오니까? | ||||
자연을 칭찬하고 글 공부나 하며 성현의 길로 제자나 인도하고 의술과 약으로 백성들 | ||||
의 천대받던 목숨이나 구하여 주면서 남은 세월을 보내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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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송당의 말씀이 옳네, 비밀이지만 지금 과거를 보아 조정에 벼슬할땐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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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이 송당의 말을 받는 소리다. 송당은 신당을 선생으로 모시고 스스로 이르기를 대학동자(大學童子)라 하며 열심히 도학을 연구하여 많은 후학을 길러 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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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參考文獻) : 선산군지(善山郡誌)ㆍ금삼(錦杉)의 피 (박중화(朴重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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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金烏山)의 별명(別名)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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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2 오전 12:42:15 |
금오산의 높이는 976m, 중천에 솟아 사방의 여러 산을 호령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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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지(孫昭之)가 읊기를 "새파란 금오산 허공에 우뚝하다"라 하였으며 옛 글을 보면 고려말에 구미 인동ㆍ개령ㆍ성주 백성들이 왜구의 겁탈을 피하여 이 산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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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성 자취가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는 본도의 요충으로 성을 쌓고 병사를 두었는바 성장(城將)은 금오산 병마절제사겸 별장(金烏山 兵馬節制使兼 別將)이라 칭하여 병졸(兵卒) 300명을 두고 구미ㆍ개령ㆍ금산ㆍ지례 4군(四郡)의 병사를 관장하면서 서기 1895년까지 이르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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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이름, 물 이름, 땅 이름의 전설이 한갖 구호를 붙이기 위한 꾸민 말이라 하더라도 김천은 "금샘", "감천(甘川)"이란 어원이 "단샘" "달래"라고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있거니와 차라리 감천의 감(甘)을 한자형(漢字形)을 떠나 "감"을 "검"으로 통한다고 본다면 "감내"는 "검내"로 다시 이것을 "금내"로 관련지어 보는 것이 타당한 동시에 "감"은 검이란 뜻도 되나 "임금"의 금이 위대하고 크다는 의미로 연결시켜 보면 오늘날 금오산의 금이나 금천의 금이나 감천의 감이나 모두 같은 "김" "금" "감"의 어음을 넘나드는 것으로 이것은 옛사람들이 자기 고장의 지명, 수명, 산명을 덮어 놓고 위대하게 부른데서 금오산은 "검오산" "검산" 감천은 "감내" "검내"로 되지 않았는가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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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 지방 뿐만 아니라 타지방의 예를 보아도 "검뫼"(큰산) "검은 바위"(큰 바위)의 어원을 얼마든지 캐낼 수 있는데서 명백해진다. 금오산의 산명이 이 산에 금까마귀가 날아감을 보고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러한 신화도 최육당(崔六堂)의 학설과 같이 모계씨족사회(母系氏族社會)에 있어서 출중한 단군(檀君)을 임금으로 모시는 데에는 흔히 건국의 신화가 필요하듯이 이 위대한 인물을 왕손의 칭호를 붙여야만 되었던 것이며 "곰"은 "熊"이 아니라 "검" 또는 "금"에서 오는 말로 임금의 뜻을 가진 말이기에 이처럼 "곰"의 후손설이 생긴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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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에서 금오산을 보면 끝이 뾰족하여 붓끝 같으므로 구미 사람은 "필봉(筆峰)"이라고 불러 왔는바 구미에서는 문인, 명필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개령에서 보면 금오산봉이 꼭 도적놈이 무엇을 노리며 피신하고 있는 모양 같다고 해서 개령사람은 "적봉(賊峰)"이라 불러 왔는바 개령에서는 역사적인 큰 도적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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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금산에서 보면 부잣집의 노적(露積) 같다고 해서 "노적봉(露積峰)"이라고 불러왔는 바 자고로 금릉에는 부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또 인동에서 이 산을 보면 높은 사람이 관(冠)을 쓴 것 같아서 "귀봉(貴峰)"이라고 불러 왔다. 역시 인동에서는 귀한 사람, 큰 벼슬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성주에서 보면 음탕한 여인의 모습 같다고 해서 "음봉(淫峰)"이라고 불러 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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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내고장전통가꾸기(구미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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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혜암(掛鞋岩, 신걸이 바위)의 전설 |
이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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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1 오후 7:15:45 |
인의동(仁義洞) 네거리에 있는 선돌(立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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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인의동의 고을 관아(官衙)가 설치될 무렵 한 풍수(風水)가 이르기를「이 고장은 고을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까닭인즉 동쪽의 산이 고개를 내밀고 언제나 인동고을을 집어 삼킬 듯 도둑이 남의 집을 엿보듯 무엇을 훔치려고 넘어다 보고 있는 형상이니 여기에다 고을을 정하면 오래가지 못하여 망한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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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을 원님은 그 풍수에게 해결방도를 물으니 그 도둑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고을 입구 세곳에 세 개의 바위를 세우면 된다고 하여 세워진 바위중 그 하나가 괘혜암(掛鞋岩)으로 곧, 신걸이 바위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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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선조때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도임한 이등림(李鄧林)은 너무나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고을은 물론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부임한지 1년만에 다른 곳으로 전임되어 떠나게 되엇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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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한 여노비(女奴婢)가 짚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이등림(李鄧林)이 그 짚신은 왠 것이냐고 물으니 그 여노비는 '맨발로 나서는 것을 본 아전(衙前)이 신고 가라고 준 것입니다.' 하니 이등림이 말하기를 '그 짚신도 관물(官物)이니 사사로이 써서는 안 되니 이 바위에 걸어두고 가라' 하고 엄명을 내렸다. 이에 여노비는 짚신을 바위위에 걸어두고 떠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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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이 바위를 신을 걸었다는 연유에서 괘혜암 즉, 신걸이 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후세의 청렴결백(淸濂潔白)한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괘혜암이라 새겨 놓았으며, 이로부터 인동은 풍년이 들고 어진 원님이 뒤를 이어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주민들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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