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姓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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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산(李貴山) |
본관(本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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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延安) |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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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24(세종 6) |
자(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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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서(興瑞) |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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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은(槐隱) |
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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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산(李貴山) 조선(朝鮮)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이귀산(李貴山) 13??( ?)∼1424(세종 6) 조선의 문신,자는 흥서(興瑞)요 호는 괴은(槐隱,塊隱)이니 연안인(延安人)이다. 봉익대부 전공판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원발(元發)의 아들이이며 강호공 귀령(貴齡)의 아우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말을 익힐 무렵에 이미 책을 읽을 줄 알아 어른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스승앞에 나아가 수업하기 수년에 스스로 지업(志業-경국제세의 학문)에 힘써 문장이 일취월장하였다. 태조때에 과거에 올라 관은 태종 11년 신묘에 강원,전라,갑오에 경상관찰사등 도관찰(都觀察)을 거쳐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태종 13년 계사에 제조가 되어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조(軍調)와 도성수축에 참여하고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의 풍해에 공이 컷고 심만양병등 많은 창안과 진언을 통해 태종등 4조를 역임하며 국초 창업의 기틀을 닦는데 공헌하였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한다.말년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그루의 괴목(느티나무)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진안영모각에는塊隱)이라하며 마치 삿갓쓰고 밭갈며 강가에 낚시하니 범인들은 존귀한 분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한다. 세종6년 갑진에 돌아가시니 왕이 부의를 후히 전하시면서 이끼던 인재를 잃었다고 매우 애도하였다 한다. |
묘갈
이귀산묘갈, 묘표(墓表), 묘갈(墓碣),
공의 이름은 귀산이며 연안이씨이다. 6세조 습홍은 고려의 태자첨사를 지내시었고, 그 유학이 집안에 전승되어 큰 벼슬을 이어져 내려와 이름은 원발이고 호는 은봉인 분에 이르러서는, 본조에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가 좌의정으로 추증되시니 이 분이 바로 공의 돌아가신 부친이시다. 어머니는 송양군부인 성천김씨로 중랑장 남보의 따님이다.
공은 형 강호공과 더불어 두터운 덕을 갖추고 중망 받아 유명하여서 개국 초기에 강원 · 전라 · 경상 삼도의 도관찰을 역임하였다. 또 형조 · 호조 · 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배는 고령현부인 김씨로 고양부원군 남득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속은 부사요, 사위는 하동이다. 속은 4남 1녀를 낳으니, 아들 근강은 장사랑이요, 근건은 생원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근정 · 근수 등이 있고, 사위는 유방효이다. 지금에 이르러 20여 세손이 번창하여 다 기록하지 않는다.
삼가 살피건데 을사년, 갑술년의 두 차례 세보에는 공의 묘소가 용인 구수동에 있다고 되어있는데, 계유 족보에 이르러서는 묘갈의 음기가 모호하여 사적이 실전될 처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심히 불안하고 두려워 당장 옛 족보와 옛 묘갈 음서를 바탕으로 삼아 정통 3년 무오년 2월에 장례 지낸 지 484년후(순조 31, 1831년)인 신유 10월 10일에 다시 비석을 세우다.
19세손 가선대부 전 궁내부특진관 의덕 삼가 짓고,
17세 방손 통훈대부 전 중추원의관 병욱 삼가 쓰다.
李貴山墓碣
公諱貴山延安李氏六世祖諱襲洪高麗太子詹事以儒傳家籍組相承至諱元發號隱
峯 本朝抗節不仕 贈左議政寔公皇考也妣松壤郡夫人成川金氏中郎將南寶女
公與伯氏康胡公俱以厚德重望有名於開國初歷江原全羅慶尙三道都觀察又判刑戶
雨曹配高靈縣夫人金氏高陽府院君南得女生一男一女男續府使婿河洞續四男一女
男根剛將仕郎根健生員 贈吏議根精粹婿柳方孝今至廿餘世繁昌不盡錄謹按乙
巳甲戌兩次世譜俱云公墓在龍仁九水洞而至癸酉譜以碣記糢糊處云失傳事甚未安恐當以舊
譜爲遵舊碣陰書以正統三年戊午二月葬後四百八十四年辛酉十月十日改竪十九世孫
嘉善大夫前宮內府特進官義悳謹識 十七世傍孫通訓大夫前中樞院議官炳勗謹書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갑진(1424,영락 22)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