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당시 한껏 주목받았던 장르 영화가 일반에 공개된 뒤 터져나오는 비판은 늘 비슷하다.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다. 감독 중심의 작가주의 영화가 아니라 기획 상업 영화인 경우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각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좋은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것인가? FILM2.0은 7회에 걸쳐 단계별로 한국영화를 점검, 업그레이드를 도모한다. 그 첫번째 프로젝트는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취약지구, 시나리오다.
"잘 만든 상업 영화" 한 편 제작하겠다고 벼르는 A 영화사 대표 B씨는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디 쓸만한 작가 좀 없어?" 돈도 있고 '죽이는' 아이템도 있는데 정작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뽑아낼 사람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믿고 맡길 만한, 이른바 '준비된' 작가는 그 수가 워낙 빤한 데다 그나마 다른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으니 어디로 가란 말인가. 간혹 영화사 문을 두드리는 작가 지망생들은 빛나는 예술혼으로 똘똘 뭉친 고독한 작가주의의 신봉자이기 일쑤다. 고심 끝에 시나리오 공모도 해봤다.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한 실력 있는 작가를 건질 수 있을까 해서. 그러나 그 역시 신통치 않다.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 딱히 눈에 띄는 인재가 없다. 그러는 동안 B씨의 아이템을 거쳐간 작가만 대여섯 명. 문제의 아이템은 벌써 2년째 '시나리오 작업중'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갈증은 충무로 제작자들 대부분의 공통 분모다. 그렇다고 작가의 절대적인 수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일례로 현재 영상시나리오작가협회(이사장 유동훈, 이하 작가협회)에 등록한 회원은 줄잡아 300명. 실제 영화로 제작된 시나리오를 한 편이라도 썼거나 각종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선한 경력이 있는 사람만도 150여 명에 달한다. 1년에 50편 정도가 만들어지는 한국영화의 규모에 비춰 그 3배수의 작가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문제는 B씨의 하소연대로 정작 "쓸만한 작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엔 물론 재능 있는 작가들이 부족하다는 원인도 있지만, 그보다는 '쓸만한' 재목들이 직업인으로서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꺼린다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쉽게 말해 한국 영화계에선 '전업 시나리오 작가'로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여기엔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과 대우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다. 상당한 개런티를 보장받는 A급 작가들조차 감독 데뷔를 준비중이다. 영화 한 편이 개봉하면 감독과 배우만 부각시킬 뿐 작가는 찬밥신세가 되는 현실,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긍심을 갖고 버티기가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에 매진하는 전문 작가들이 부족하다 보니 좋은 시나리오가 안 나오고, 그러다보니 좋은 영화가 나오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을 역으로 되짚어보면, 대중들이 좋아하는 양질의 소재를 발굴해 이야기로 만드는 전업 '스타 시나리오 작가'의 탄생이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다. 시나리오 창작 단계의 비중이 높아지고 진보하게 되면 자연히 스타 배우, 스타 감독 못지않게 스타 시나리오 작가가 나올 것이고, 이것은 곧 좋은 시나리오와 고도화된 시나리오 창작의 시대가 도래했음과 동의어가 된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향해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전문 작가실을 운영하라
제작자들은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는 일단 50%는 먹고 들어간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 먹음직한 50%가 만들어지는 시간은 바로 기획 단계, 즉 프리 프로덕션 단계다. 과거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한국영화의 프리 프로덕션은 최근 인식의 변화와 시스템 구축을 토대로 진화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분석한 뒤 그에 조응하는 양질의 상업 영화 프로젝트를 쉼 없이, 혹은 동시에 서너 개씩 진행하도록 구조화되는데, 그 핵심은 응당 시나리오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영화산업은 작가 양성과 수급 시스템을 아직 치밀하게 갖추지 못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알음알음 인맥을 통해 부정기적이고 우연적인 형태로 '운 좋은' 시나리오가 제작자의 책상에 올려지기 일쑤인 것이다. 물론 그런 방법을 통해서도 좋은 시나리오는 발견되지만, 과학적인 기획을 토대로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기획 상업영화 시장에서 그것은 무모하고 위험하며 허점이 많다. 제때 적합한 시나리오를 생산해내거나 좋은 아이템이 있을 때 그것을 순발력 있게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 그런 방법 속엔 없기 때문이다. 씨네2000의 한 관계자가 지적하듯이 "다양한 장르의 각 프로젝트마다 딱히 떠오르는 작가가 없는" 것이다. 이에 영화사들은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내에 전문 작가팀을 두고 공동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쿠앤필름은 일찌감치 사내 시나리오 작가팀을 구축했다. 한 프로젝트를 작가 한 명이 전담하는 게 아니라 서너 명의 작가들이 아이템 발굴에서 취재, 집필까지 공동으로 한다. 다다필름 역시 2년 전 자체 작가팀을 꾸려 시나리오 개발에 나섰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한 아이템을 집단 창작하는 것보다는 한 작가가 아이템 하나씩을 맡아 동시다발적으로 개발하는 방식이 좋다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쌓았다. 좋은영화는 공동창작 체제는 아니지만 프리 프로덕션에 좀더 힘을 쏟기 위해 지난해 시나리오 작가를 공모하고 기획실과 별도로 시나리오 개발팀을 운영하고 있다. 15명 정도의 작가가 소속된 온라인 작가방을 운영하고 있는 씨앤필름의 관계자는 "한 사람의 감에 의해 영화를 제작하는 건 1년에 한 편 만들던 시절 얘기"라고 잘라 말한다. 씨앤필름은 이들로부터 수시로 아이템을 제안받고 각 아이템의 성공 가능성을 검증한다. 기획 영화의 경우 다양한 관객층을 만족시킬 전략적 시나리오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 시나리오 전문회사를 세워라
최근엔 아예 이런 작가그룹의 역할을 특화해 아이템 개발, 시나리오 집필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도 등장했다. 지난해 크게 히트한 코미디영화 <두사부일체>의 시나리오를 개발한 네오픽션(대표 하원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5명의 작가가 모인 이 회사는 <두사부일체>의 시나리오 초고를 넘겨받아 몇 가지 새로운 설정과 에피소드를 첨가하는 등 코미디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강화해 흥행에 일조했다는 평을 얻었다. 일종의 맞춤 시나리오 납품회사인 셈이다. 하원준 대표는 "더이상 글만 잘 쓴다고 훌륭한 작가가 아니"라며 "이왕 상업 영화를 만든다면 철저한 기획 마인드와 서비스 정신에 입각해 시나리오를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들의 공동작업은 프리 프로덕션을 고도화시키기 위한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처음부터 제작사가 원하는 기획의도에 맞게 상품성과 대중성을 갖춘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음직한 작가가 턱없이 모자란 현실에서 나온 고육지책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야기에 목마른 제작자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진통제일 뿐 작가 기근을 완치할 치료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공동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개성보다는 팀워크를 강조하다보니 애초에 내세웠던 작가 발굴의 의미가 퇴색한다는 점이다. 류승완 감독과 함께 <피도 눈물도 없이> 시나리오를 쓴 정진완 작가는 "작가 개개인의 성향과 정확한 능력에 대한 통찰 없이 그냥 모아놓고 일을 맡긴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충고한다. 네오픽션의 하대표는 "작가 마인드는 제작자 마인드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데 영화사에 소속한 작가는 결국 제작자 마인드를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충무로의 한 시나리오 작가는 "기획할 때는 떠받들어 주다가 영화 한 편 만들고 나면 작가를 용도폐기하는 관행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공동작업과 사내 작가팀 운용이 산업 고도화의 한 대안임엔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론 전문 작가들을 양성하고 스타 시나리오 작가를 키워 양질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 데 부족함이 있다는 얘기다.
■ 저작권을 보장하라
또한 지금처럼 기획 영화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방식에서는 저작권도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러 명의 작가를 거쳐 완성한 시나리오의 경우 저작권을 누구 소유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주유소 습격사건> <선물> <신라의 달밤> 등을 쓴 박정우 작가는 "회사에서 내놓은 아이템을 집필하는 경우 작가가 저작권을 주장하기가 애매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정사> <반칙왕>으로 유명해진 김대우 작가는 "우리나라는 시나리오, 감독, 연출부의 경계가 불분명해 60%는 작가가, 40%는 감독과 연출부가 쓰는 경우가 많다"면서 "만일 누군가 저작권 문제를 제기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작가협회가 추진하고 있는 저작권 신탁관리 제도가 눈길을 끈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들로부터 저작권 관리를 일임받은 작가협회가 제작사와 계약을 맺을 때 작가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받는 제도다. 이 제도는 1차 저작권은 물론 방송, 비디오 판권과 해외 판매 등으로 얻은 수익금에서 일정 부분을 작가에게 귀속시키는 이른바 2차 저작권 보호도 목표로 한다. 유동훈 이사장은 "현재 제작사측에서 거부하고 있지만 3월 안에 독자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라며 "불공정 계약의 관행이 두드러지는 제작사의 경우 고발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된다면 작가의 권익은 크게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작가들이 작가협회에 큰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또 많은 작가들은 여전히 작가의 '파워'가 턱없이 낮은 것에 불만을 터뜨린다. 제작사가 자의적으로 작가를 교체하는 관행이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제작사가 마음대로 수정하는 관행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공동작업의 경우엔 작가의 위상이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작사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협업을 근간으로 하는 영화 작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술가적 자존심만 내세우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충무로 영화사의 한 관계자는 "작가 지망생들 가운데 작가와 감독, 제작자의 상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비롯해 상업 영화 제작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지적한다. 또다른 관계자는 "작가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주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우를 받을 만한 작가가 없는 것도 사실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과연 이렇게 상반된 양측의 입장 차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는 걸까? 이를 두고 영화인들은 조심스럽게 '작가 에이전시'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 작가를 매니지먼트 하라
지난해 감독들과 전속계약을 체결한 영화사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전속계약은 아니더라도 시나리오 작가 역시 이와 유사한 형태로 에이전시에 소속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작가 매니지먼트 개념이다. 그렇게 되면 제작사는 안정적인 작가 수급 시스템을 확보한다는 장점이 있고, 작가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기관을 통해 공정한 계약과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에이전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네임 밸류를 갖고 있으며 검증된 능력을 갖춘 작가들의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충무로의 작가들은 "영화산업의 발전과 함께 차츰 고급 인력이 유입되고 있다"며 "2, 3년 안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대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충무로 작가들 사이에서도 작가 에이전시 형태의 권익보호 및 관리회사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스타 시나리오 작가가 지속적으로 탄생하는 것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보다 시급한 것은 영화사 스스로 스타 작가를 키우겠다는 자세다. 할리우드영화의 경우 감독, 배우와 함께 시나리오 작가가 마케팅 포인트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만큼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 시나리오 작가가 자기 이름을 걸고 책임과 권한을 갖는 것이다. 동시다발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현 시스템에서 안정적인 작가 수급 구조는 제작사 쪽에서 서둘러야 할 문제다. 그렇다면 자체 작가그룹을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에서 가능성 있는 작가를 적극적으로 발굴, 전략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눈엔터테인먼트가 <번지점프를 하다>를 제작하면서 고은님 작가를 적극 부각시키고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며 스타 파워를 키운 사례는 다른 영화사에서 충분히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현재 고작가는 눈엔터테인먼트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믿을 만한 시나리오 보급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 발견하지 말고 만들어라
작가가 보다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제작사가 양질의 시나리오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작가 한 사람의 역량을 문제 삼거나 제작자의 마인드 전환만을 요구할 일은 아니다.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충무로 제작사와 작가들은 입을 모아 "지금은 과도기이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하면서도 "모두가 작가 기근 현상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누구도 먼저 나서서 총대를 매려 하지 않는다"고 근심한다. 작가들의 연합 단체가 결성 움직임을 보이다가 번번이 실패하거나 제작사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작가를 수급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공동창작 방식, 영화사 내 작가팀 운용, 전문 시나리오 창작 회사, 작가 매니지먼트 제도나 에이전시 형태의 기관을 업그레드 프로젝트의 여러 대안들로 조심스레 타진하며 제안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자, 한국영화 업그레이드의 출발점은 시나리오고, 우리는 이 단계에서 스타 시나리오 작가 만들기를 제시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예측인 동시에 시나리오의 총체적 발전에 대한 상징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작가는 운 좋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작가는 적극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첫댓글 발견하지말고 만들어라...이말 정말 공감가네요 시나리오뿐만아니라 만화역시 이시스템이 도입되야하는데..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