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64년 겨울
- 김승옥
▶ 작품의 길잡이
1965년 <사상계>에 발표.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나’와 ‘안(安)’이라는 새로운 인물 유형이다. 선술집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25세의 동갑내기인 이들은 결코 그들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 느꼈던 것만을 주고받는다. 이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우리는 도시적 삶의 파편화(破片化), 곧 개인주의의 심화를 읽어 낼 수 있다.
▶ 작품의 이해와 감상(1)
이 소설은 ‘나’와 ‘안(安)’이라는 25세 동갑내기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결코 자신들의 진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심각하고 진지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나 가치 지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과 내적 연관을 갖지 못한 주관적이고 자의식적인 사소한 대화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두 사내는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고 말구요. 시체의 아랫배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요. 여하튼. 나는 그 아침의 만원 버스 칸 속에서 보는 젊은 여자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 해지고 맑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움직임을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이 두 사람에 비해서 삼십대의 외판원 사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얘기하면서 자신의 고뇌와 비애를 공유(共有)할 것을 간청한다. 이를테면, 고통의 분배를 통한 인간적 연대 의식을 상대방에게 솔직히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나’와 ‘안(安)’에게 그 사내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둘은 외판원 사내의 동행 요청에 마지못해 응하고 있고 내심으로 빨리 떠나고 싶어한다. 이러한 기미를 사내가 눈치챘음일까, 화재(火災)가 난 곳을 찾아가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버리는 행위는, 허위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분노요, 절망의 표현일 것이다. 즉, 삼십 대의 외판원 사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고뇌와 슬픔을 공유(共有)하기를 바라나 ‘나’와 ‘안’은 받아 주지 않으며 부담스러워한다. 세 사내가 여관으로 와서도 각각 다른 방을 쓰게 되고, 또 안씨의 경우 외판원 사내가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이를 말리지 않은(못하는) 사실에서 인간적 유대가 없는 소외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나’, ‘안(安)’, ‘사내’ 등으로 익명화(匿名化)되어 있다. 현대 도시인의 삶이 그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자기 중심주의, 언어 불소통을 암시하는 문학적 의도이다. 또한, 그들의 신원(身元)만 단편적으로 제시될 뿐, 개개인의 개성이 서술되지는 않은 것도 소외 의식(疎外意識)을 심화시키는 문체적 특징일 것이다.
▶ 작품의 이해와 감상(2)
1. 나의 독서 체험기 - 시인 정성욱 [부산일보] 95. 7. 1
나는 김승옥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비애 속의 희망을 느낀다. 타락한 문명의 장소인 도시와 도시인들 속에서 비만하고 허황한 가치 추구의 제 양상을 작가는 드러낸다. 그것은 분명 우리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야유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약삭빠르게 욕심부리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생명력을 잃고 있음을 개탄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우리 도시인들 제행태의 자화상인 셈이다.
2.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김승옥씨 <서울 1964년 겨울> -[한겨레신문] 1996. 7. 12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광고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중)
1964년 겨울 서울의 한 포장마차에서 세 남자가 만난다. 김이라는 성을 가진 `나'는 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고, 대학원생 `안'은 부잣집 장남으로 두 사람은 모두 스물다섯 살이다. 서른대여섯 돼 보이는 또 다른 사내는 서적 외판원. 처음에 말문을 튼 안과 `나'는 학력과 처지의 천양지차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과는 겉돌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나중에 합류한 제3의 사나이는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숨지자 그 시신을 병원에 판 뒤 낙담과 죄책감으로 시체 판 돈을 다 써버리자고 스물다섯살짜리들을 유혹한다. 억지로 돈을 쓰러 돌아다니던 세 사람은 불자동차 뒤를 쫓아가 불구경을 하는데, 상처한 사나이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남은 돈을 던져버린다. 세 사람은 그날 밤 같은 여관의 서로 다른 방에 투숙하며, 다음날 이른 아침 상처한 사나이가 밤사이 자살한 것을 알게 된 두 젊은이는 몰래 여관을 빠져나와 기약없이 헤어진다….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쓴 것일까. 젊어서 이미 늙은 것들의 말장난 같은 대화와 상처한 중년의 자살로 채워진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 그것도 한국 소설사에 우뚝한 작품이 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제목을 `서울 1964년 겨울'이라 단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1964년 겨울로 돌아가 보자.
그해 겨울은 추웠다.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나선 군사정부에 의해 패퇴했다. 4․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을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소장. 그를 상대로 한 싸움을 별러왔던 학생들의 반격이 6․3사태로 불리는 64년 여름의 용틀임이었다. 그 용틀임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제 학생들에게 남은 것은 개인 차원의 사소한 실천뿐이었다. 그것은 또한 재래적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단자(單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포장마차에서 만난 세 남자는 사회이면서도 사회가 아닌 독특한 동아리를 이룬다. 그들은 포장마차라는 동일한 공간에 각자 술을 마시러 왔다는 공통점으로 묶이지만, 그것이 어떤 유의미한 공동체의 형성에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세 사람은 각자의 고독과 상처로 자은 고치 속에 웅크리고 틀어앉아 있을 뿐 고치 밖의 세계로 나올 염을 내지 못한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는 지문은 그들이 함께 그러나 따로 든 여관방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모두가 몸 부리어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 참고 문학이론 <벽(壁)> )
그런 점에서 김승옥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개인의 발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까지의 한국 소설은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개인의 존재에 눈뜨지 못했었다. 소설이 개인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 개인은 공동체의 역사와 현실에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사이비 개인이었다.
김승옥 소설은 또한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감수성으로써 두드러진다. 혁명으로까지 일컬어지는 그 감수성은 사물에 대한 상투적인 인식을 거부하고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봄으로써 결국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게 된다. <무진기행> 중 안개를 묘사한 저 유명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김승옥씨의 소설들이 발아하고 무르익은 곳은 작가가 다니던 서울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 일대였다. 작가에게 서울은 전쟁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폐허 같은 도시였다. 서울 토박이라고는 구렁이 같은 복덕방 영감과 앙칼진 목소리의 셋방 주인 아주머니 정도일 뿐 나머지 서울 주민은 월남 피난민들과 자식들 교육을 위해 상경한 이농민들이었다. 이들이 얽히고 설켜 생존을 위한 악다구니를 펼치는 살풍경이 서울의 모습이었다.
“파괴의 폐허 위에서 새로 시작되는 한국, 특히 서울에 대한 관심은 내 소설의 테마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처럼 작가로서 흥미로운 도시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에게 서울이란 평생 그물을 던져도 고갈되지 않는 황금어장과도 같다.”
60년대의 서울이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었고(`서울 1964년 겨울'), 70년대의 서울은 이상문학상을 주었다(`서울의 달빛 0장'). 그렇다면 96년 여름의 서울 하고도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과 대학로는?
1996년 여름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늦은 오후의 그곳은 저마다 세상으로 열린 숨구멍이라도 된다는 듯 허리께에 호출기를 찬 젊은이들로 채워진다. 관악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서울대가 있던 마로니에 공원이 그들의 주요 집결지다. 이 거리의 명물인 아마추어 화가들과 가수들, 엔비에이(NBA)의 환상을 사고[買] 또 사는 [生] 아이들, 새 상품 홍보를 위해 목걸이 볼펜을 나누어주는 언니들, 다른 대책이 서지 않아 하릴없이 앉아 있는 연인들, 나름으로는 이곳의 터줏대감인 몇몇 알콜중독자들, 아이스크림 장수, 외국에서 산 장신구와 기념품을 늘어놓고 여행경비를 마련하려는 외국인 배낭여행자…. 이들은 무책임한 구경꾼이자 스스로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즐기며 96년 여름 서울의 대학로를 수놓고 있다.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가가 90년대 소설에 관해 말한다.
“언어에 관한 자의식이 강해졌다는 것은 장점이다. 반대로, 싸워야 할 적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는 것은 단점이다. 개조를 위한 욕구와 절규가 보이지 않는다.”
알다시피 그는 결코 민중문학론자도 실천으로서의 문학의 신봉자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는 4․19와 6․3을― 그 성취와 좌절, 영광과 수치까지를 포함해 ―청춘의 훈장으로 간직한 전투의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 배경 : 1964년 어느 겨울 밤, 서울 거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제재 : 연대성(連帶性)이 없는 세 사내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함께 지낸 이야기
․ 주제 : ① 뚜렷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심리적 방황과 인간적 연대감의 상실.
② 현대 사회의 지식인 내면의 고뇌와 인간 소외(익명성)
․ 출전 : 1965년 [사상계]에 발표
▶ 등장 인물
․ ‘나’(25세) : 육사(陸士) 시험에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스물다섯 살 난 시골 출신 사내.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 안(安)(25세) : ‘나’와 동갑내기로 부잣집 장남이며 대학원생. 삶을 냉소하면서도 자기 구원을 시도하는 인물
․ 외판원(35-6세) : 서른 대여섯 살의 가난한 사내. 마누라 시체를 병원에 판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여관방에서 자살함.
▶ 작품의 구성
․ 발단 : ‘나’와 ‘안(安)’이라는 대학원생이 포장마차 술집에서 만나 무의미한 대화를 나눔.
․ 전개 : 낯선 사내가 말을 걸어오며 자신의 불행을 말하고 동행해도 좋으냐고 간청함.
․ 위기 : 화재(火災)가 난 곳에서 사내는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불 속에 던지고는 불안에 빠짐.
․ 절정 : 여관에 도착한 셋은 각각 다른 방에 투숙함.
․ 결말 : 다음날 아침, 사내의 자살이 밝혀짐. ‘나’와 ‘안(安)’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곳에서 헤어짐.
-- 작품 결말부 '개미'의 상징 : 꿈틀 거리고 있는 양심
▶ 작품의 줄거리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나’는 선술집에서 대학원생인 ‘안(安)’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새까맣게 구운 참새를 입에 넣고 씹으며 날개를 연상했던지, 날지 못하고 잡혀서 죽는 ‘파리’에 자신들을 비유한다. ‘나’는 이미 삶의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후였기 때문에 감각이 다소 둔해진 상태다. 부잣집 아들인 ‘안(安)’ 역시 밤거리에 나온 이유는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미소를 짓는 예쁜 여자가 아니면 명멸(明滅)하는 네온사인들에 도취해 보기 위해서이다.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섰을 때, 기운 없어 보이는 삼십대 사내가 동행을 간청한다. 중국집에 들어가 음식을 사면서, 자신은 서적 판매원이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나 오늘 아내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체를 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지만 아무래도 그 돈을 오늘 안으로 다 써 버려야 하겠는데 같이 있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셋은 음식점을 나온다.
그때 소방차가 지나간다. 셋은 택시를 타고 그 뒤를 따라 불구경에 나선다. 사내는 불길을 보더니 불 속에서 아내가 타고 있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갑자기 ‘아내’ 라고 소리치며 쓰다 남은 돈을 손수건에 싸서 불 속에 던져 버린다. ‘나’와 ‘안(安)’은 돌아가려 했지만 사내는 혼자 있기가 무섭다고 애걸한다.
셋은 여관에 들기로 한다. 사내는 같은 방에 들자고 했지만 ‘안(安)’의 고집으로 각기 다른 방에 투숙한다. 다음날 아침 사내는 죽어 있었고, ‘안(安)’과 ‘나’는 서둘러 여관을 나온다. ‘안(安)’은 사내가 죽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도리가 없었노라고,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혼자 두는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나’와 ‘안(安)’은 “우리는 스물다섯 살짜리지만 이제 너무 많이 늙었음”에 동의하면서 헤어진다. ‘나’는 ‘안(安)’과 헤어져 버스에 오른다.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 수행 평가
◎ 다음은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일부이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1-3]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 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환이 다쿠앙과 양파가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 나갔다.
“기분 나쁜 얘길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 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버리고 싶은데요.”
“쓰십시오.”
안이 얼른 대답했다.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함께 있어 주십시오.”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승낙했다.
“멋있게 한번 써 봅시다.”라고 사내는 우리와 만나 후 처음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는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 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 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하고 아저씨가 말했다.
“어디로 갈까?”안이 말하고,
“어디로 갈까?”라고 나도 그들의 말을 흉내 냈다. |
아무데도 갈 데가 없었다. 방금 우리가 나온 중국집 곁에 양품점의 쇼윈도가 있었다. 사내가 그쪽을 가리키며 우리를 끌어 당겼다. 우리는 양품점 안으로 들어갔다.
㉢“넥타이를 하나 골라 가져. 내 아내가 사주는 거야.”
사내가 호통을 쳤다.
우리는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하나씩 들었고, 돈은 육백 원이 없어져 버렸다. 우리는 양품점에서 나왔다.
“어디로 갈까?”라고 사내가 말했다.
……<중략>……
택시가 우리 앞에서 멎었다. 우리가 차에 오르자마자 사내는,
“세브란스로!” 라고 말했다.
㉣“안 됩니다. 소용없습니다.”
안이 재빠르게 외쳤다.
“안 될까?”
사내는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1. ㉠과 ㉢은 아내의 시체를 돈을 받고 병원에 판 ‘사내’의 말이다. 여기에 담겨 있는 그의 심리를 40자( 띄어쓰기 포함) 내외로 설명하라.
<모범답> 해부 실습용으로 아내의 시체를 판 죄책감을 떨쳐 버리고 싶은 마음.
2. ㉡과 ㉣은 ‘안’의 심리를 보여 주고 있다. 외판원 사내 또는 그 아내의 죽음과 관련 지어 ‘안’의 태도를 50자(띄어쓰기 포함) 내외로 밝혀 쓰라.
<모범답> 죄의식과 불안에 떨고 있는 외판원 사내의 불행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냉담한 태도.
3.
“밤 늦게 죄송합니다.” 사내가 대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시죠?” ㉠대문은 잠에 취한 여자의 음성을 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은…….”
“누구시죠? 술 취하신 것 같은데…….”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하고, 사내는 비명 같은 높은 소리로 외쳤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이번엔 사내는 문기둥에 두 손을 짚고 앞으로 뻗은 자기 팔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월부 책값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월부 책값…….”사내는 계속해서 흐느꼈다.
“내일 낮에 오세요.”
대문이 탕 닫혔다. 사내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사내는 가끔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가 우리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왔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서 거리로 나왔다. 적막한 거리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몹시 춥군요.”라고 사내는 우리를 염려한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추운데요. 빨리 여관으로 갑시다.” 안이 말했다.
“방을 한 사람씩 따로 잡을까요?” 여관에 들어갔을 때 안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게 좋겠지요?”
“모두 한방에 드는 게 좋겠어요.”라고 나는 아저씨를 생각해서 말했다.
아저씨는 그저 우리 처분만 바란다는 듯한 태도로, 또는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여관에 들어서자 우리는 ㉡모든 프로가 끝나 버린 극장에서 나오는 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북스럽기만 했다. 여관에 비한다면 거리가 우리에게 더 좋았던 셈이었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
“모두 같은 방에 들기고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내가 다시 말했다.
“난 아주 피곤합니다..” 안이 말했다.
“방은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자기로 하지요.”
“혼자 있기가 싫습니다.”라고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혼자 주무시는 게 편하실 거예요.” 안이 말했다.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 사환이 지적해 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말했지만,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
하고 안은 말하고 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나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숙박계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나서 사환이 가져다 놓은 자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역시 …….” 나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