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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4월9일-12일까지 장거리 산행일지
序 言 : 4월 장거리산행을 마친 뒤 그 즉시 일지를 올려야 했었는데 중간고사와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차피일 미루어진 것이 5월9일 해남 <달마산>장거리 산행일자를 정한 뒤에 바쁘게 글을 올린다. 항상 여행은 즐겁고, 산행일기를 쓰면서 포만감마저 갖게 되는 기쁨과 두 배의 즐거움으로 기억을 되살리면서 기록해 본다. 사실 4월 말경에 약20페이지의 산행일기와 사진까지 정리를 했었는데 컴퓨터가 악성 바이러스에 의해 날아가 버려 허탈감을 느껴 미룬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다들 공부한다는 심정으로 현장 속에 내재된 깊은 사연과 허무개그까지 더불어 즐겨 보시기 바란다.
18대 총선일 4월 9일 8시 약속
늘 그러했듯이 산행이라면 먼저 나서는 근성이라서 그런지 며칠 전 친구(송무광=본명=요셉=호=월봉)의 전통으로 2박3일 코스로 광주무등산을 통한 산행스케쥴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 처음 간다는 기분에서 약간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간 몇 차례 무등산산행이 순연되어 왔던 관계로 이번에는 틀림없이 가는구나 하고 준비에 나섰다. 그런데 4월7일 다시 걸려 온 전통은 광주 무등산 스케쥴은 취소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쉬움을 지닌 채 사유를 물었던 결과 <칠싸리군단>이 하루전인 4월8일날 광주에서 행사가 있어서 행동을 같이 못하게 되었다면서 우리 셋이 가자고 하였다.
우리 셋은 월봉, 박교수(박민용:본명:시몬<한양공대 교수>)과 <나=박순웅>셋이었다. 항상 선두에서 모든 스케쥴과 업무를 챙겼던 임대장(임근호)은 하고 물었으나 “어쩜 이번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말로 대신하면서 9일날 스케쥴 정리에 들어갔다.
<시 몬 > <나>와 <요셉>
8시30분까지 분당선 <수내>역까지 오란다. 난 생 처음 들어 본 전철역이라 전화를 끊은 뒤 전철역을 세어봤더니 자그마치 28개역에 3번이나 바꿔 타야하는 고난의 여행이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곧 이어 <월봉>이가 다시 전화하여 9일 아침 8시까지 건대입구역 4번출구로 나와서 건너편에 있으면 픽업하겠다고 수정하여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9일은 제18대 총선일 :반드시 투표는 해야 한다
8일 밤 자정뉴스까지 들으면서 스릴찬 총선에 관심을 보이다가 거의 2시쯤 잠이 들었으나 9일 아침6시에 일어나 배낭을 다시 정리한 다음 6시가 막 지났을 때 자전거를 타고 투표장으로 나갔다. 참관인으로 앉아 있던 몇몇 안면 있는 사람들의 목례를 받으면서 투표를 마친 뒤 귀가하여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도착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7호선을 탔던 관계로 약속장소에 15분 일찍 도착하여 주위를 살핀 결과 건대병원 맞은편에 개장을 앞둔 롯데백화점 바로 앞이었다.
약5분 전 “<월봉> 어디쯤인가?”라고 전화했더니 청담대교를 막 건너는 중이라 하더니 금새 나타났다. 3박4일간 수고해 줄 <시몬>교수가 산타모 승합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뒷 칸에 배낭을 넣으려다가 마치 세탁소처럼 나란히 다양한 의상이 진열된 것을 보았더니 전천후 의상이 걸려 있어 언제든지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의상실을 연상케 했다.
중부고속도로의 하남 톨게이트를 하이패스로 쉽게 통과한 뒤 굿-드라이브답게 시속120km를 준수하면서 잘 달렸다. <시몬>과 <월봉>은 호형호제하는 관계였으며 <나>역시 이미 청계산에서 면을 익힌 사이여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도 어색함 없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약간의 과속이나 안전조치를 위해 연발하는<월 봉>의 <도 도>소리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9시40분 중부고속도로 <오 창>휴게소에서
출발한 뒤 약1시간40분 후에 <오창>휴게소에 들렸다. 아침식사 겸 화장실문제까지 해결하자는 쉼이었는데 항상 장거리 산행 때 여러 가지 음식물을 준비해 왔던 <월봉>이 이번에는 아침 식사용 김밥까지 준비해 왔던 것이다.
밖에 설치된 둥근 테이블에 앉아 김밥을 즐기면서 분당의 맛있는 김밥 집 애찬론까지 펼쳤으나 조금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맛이 있었다.
날씨는 잔뜩 구름으로 태양을 가려 버렸고 일기예보는 남부지방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으며 오후에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니 어쩜 산행이 어려울 것 같았다. 아침 식사와 준비해 온 커피까지 마셨으니 서둘러 대전통영고속도로(舊=대진고속도로)로 달렸다.
대전을 지났을 무렵부터 심술궂은 비가 서서히 차창을 적시기 시작했고- 카 스트레오에서는 자주 들을 수 없는 꾸져진듯한 <최백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난날 <김자옥>과 더불어 살 때 마치 가수를 포기한 듯이 라디오 생방송이 끝날 때까지 초조하게 스튜디어 밖에서 행여 누군가가 낚아채 갈까봐서 기다리던 <최백호>모습이 선하게 나타났다. <월봉>의 MP3에는 무수한 노래가 저장되어 있어 음율 속에서 여행을 즐겁게 흥을 돋구었고, 고속도로변 야산에는 봄철의 하이라이트라는 진달래꽃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 주었으며, 빗속에서 서울 간 오빠를 찾는 뜸북새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하였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인삼 맛나는 호두과자를
대전통영고속도로로 진입하기 무섭게 좌우에 검은 천으로 덮힌 인삼밭을 많이 보고 왔으나 <인삼랜드>근처에는 유별나게 인삼밭이 많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피로감마저 잊은 듯 <시몬>의 제안으로 인삼 맛 나는 호두과자를 먹어보자는 제의에 따라 한 봉지 구입하여 맛을 본 결과 정말 인삼 맛이 듬뚝 담겨있어 인삼랜드의 진수를 맛 본 듯 하였다.
10시 40분, 본격적으로 궂은비가 내리는 남부지방으로 진입했는지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차창을 사정없이 때렸고, 차창의 와이퍼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11시 <덕유산휴게소>를 지날 때 <월봉>은 비가 오니까 산행은 어려울 것 같아 오늘은 <송광사>를 찾아 가자라고 예정지를 수정 제시하였다.
부대장 <월봉>은 임대장과 통화하면서 일정을 주고받으면서 메센져 역할까지 했다
11시30분, <함양 분기점>을 통과한 뒤<남원>방향의 <88올림픽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잠시 방향을 정할 때 이미주행거리는 350km였다. 계속 남원방향으로 달려 <남원>에서 <곡성>-<안록>을 지나 <보성강>줄기를 따라 달리면서 길가에 만개의 절정을 이루는 벚꽃 퍼레이드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주암>근교에 늘어진 벚꽃은 눈꽃송이로 착각토록 했으며 <보성강>줄기 가로수 길에 나란히 펼쳐진 벚꽃을 즐기는 사이에 점심시간을 챙기게 되었다. 이미<월봉>과<시몬>은 이미 다녀간 경험자들이었던 관계로 지방에 왔으니 식도락답게 맛난 음식을 찾아 먹자고 제의한 뒤 벚꽃 길을 달려 <태안사>근처까지 왔으나 마땅한 음식점을 찾지 못해 약10km 지나온 뒤 다시 방향을 되돌려 보성강줄기에 위치한 <통나무 꽃게집>으로 달렸다. 어쩜 무너질듯한 연약한 교량이었으나 여러 차량이 즐비하게 정차된 것을 보고는 마음 고 건너가서 마치 우리 셋 일행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듯한 작은 통나무집에 들어가 <민물 꽃게탕>을 주문한 뒤 반찬을 안주 삼아 <내>가 갖고 간 제조주로 입가심을 하였다.
섬진강 민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곳에서 포획한 <꽃게탕>의 진미?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일정을 여유있게 만들어 준 덕택에 우중의 대화와 함초롬히 비에 젖은 풍경화를 찡하게 담는 시간까지 가지게 되었다. 섬진강 민물과 바닷물 합부부분에서 포획했다는 <꽃게>의 생김새는 영락없이 수입품이 아닌가할 정도로 익숙치 않았으며 다리에 촘촘히 박힌 털과 거의 속빈 다리살의 빈약함이 확실했으나 중간 냄비 1개에 35,000원이었다. 가격이 비싼 듯 했으나 특식이라 했고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듯이 사이좋게 일배 일배하면서 열심히 빨아 먹었다.
섬진강변 <통나무집> 방가로
식사를 마친 뒤 비를 맞으면서 주위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뒤 목적지 <송광사>를 향하여 다렸다. 우측에는 <주암호>가 여행객을 반겨 주었고, 길가에 늘어진 벚꽃은 이따금씩 <도 도>로 차를 세운 뒤 카메라에 담곤 하였다.
잠시도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겨를도 없이 그림 같은 벚꽃행렬과 이따금씩 나타나는<메타 스쿼이어>가로수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송광사>
오후 3시30분, <전남 순천시 송광면>에 위치한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송광사>입구에 도착하였다. 좌우에 늘어 선 벚꽃행렬을 분명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으며 비에 젖은 다소곳한 모습은 송광사를 찾아 온 방문객들에게 환상적인 장관을 선사해 주는 듯 하였다.
<송광사> 대웅전
입장료는 유공자증으로 대신하여 무난히 차를 경내 주차장까지 올라간 뒤에 주차시켜놓고 보존처리중인 <사천왕상>을 통과하여 대웅전 앞마당에 올랐다. 송광사 사천왕상 사찰에 들어서게 되면 일주문 다음으로 통과해야 하는 사천왕문이 있다.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사천왕상이 안치된 사천왕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사찰의 내부로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천왕의 다른 이름으로는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상은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을 섬기며, 불법뿐만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란다.
동쪽의 지국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을 사천왕이라 한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란다.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佛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솔개가 내려앉은 대 즉 <치락대>라 불렀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이 자생하여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그로인해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송광사의 또 다른 특이한 볼거리는 바로 땀 흘리는 부처님. 이 불상은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라치면 두세 달 전부터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린다고 전해진다.
주지스님 말씀에 따르면 1986년 불상에 다시 금색을 입힌 뒤 다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도 하는데 과학적인 설명은 할 수 없는 상태다. 다만 큰 일이 일어나니 미리 준비하라는 부처의 계시쯤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실내 삼존불로서도 으뜸이다.
송광사에 딸린 천자암 뒤뜰에는 수령이 7백년이나 된 <쌍향수>가 있는데는 지눌과 당나라 담당왕자가 꽂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가지가 생기고 잎이나고 꽃이 피어 그대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대사께서 절을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단다.
승보사찰이란 ?
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를 삼보(三寶)라고 한단다. 그 세 가지는 부처님(佛)과 가르침(法)그리고 승가(僧)로써 불교인의 신앙은 이세가지 보배를 가지고 귀한 것으로 알고 그에 귀의해 가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진리에 눈뜬 사람으로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깨친 다음 우리를 위해 설파하셨던 내용으로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단다.
끝으로 승가는 스님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를 가리킨다. 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가를 통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은 진리의 길을 먼저 걸어 깨치셨던 분으로 그 길을 우리들에게 친절히 가리켜 주시는 길잡이(導師)요, 가르침은 그 길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나 이정표와 같고, 승가는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보배인 삼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내면화되어 바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참마음을 가리킨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있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 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다.
부처님(佛), 가르침(法), 승가(僧)를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리들 존재의 원천인 본래의 나, 참 나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값이 없는 보배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바로 그 보배를 향해 가는 것이란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 합니다 하는 이른바 삼귀의(三歸依)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보배롭고 소중한 세 가지 보배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다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 삼귀의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하는 말은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고백하는 서원이요 다짐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 가지 요소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곧 1).경남 양산의 통도사, 2).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3).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단다.
송광사의 3대 보물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
송광사는 오래된 역사와 큰 규모에 걸맞게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3대 명물이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 첫째는 <비사리구시>. 270여년 전인 1724년, 전북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조선 영조 이후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일종의 밥통이다. 천왕문 입구에 세워진 이 비사리구시는 약 쌀7가마의 분량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하여 승보종찰로서의 송광사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탱화전시관 바로 밑에는 비사리구시와 관련하여 당시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케하는 거대한 쌀 뒤주들이 차곡차곡 여러개 쌓여져 있다.
<비사리구시>송광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이에 눈에 익은 <비사리구시>를 발견하였다. 1724년 남원에 살던 세진공이 싸리나무로 만든 <구시>로 쌀7가마 분량을 저장할 수 있는 나무 저장고로 하나의 나무로 그것도 싸리나무로 만든 것이라니 더욱 의아심이 솟구쳐 올랐다.
두 번째는 능견난사(能見難思)이다. 풀어보면 `능히 보기는 해도 그 이치를 생각하기는 어렵다`라는 뜻이다. 보조국사가 중국 금나라 황제 장종을 위해 갈 때 부처님 전에 올리던 그릇으로 본래 명칭은 옹기이다. 재료는 놋쇠로서 구경 21.5 cm, 높이 3.3cm, 두께 0.1cm 이며 이름에 따른 유래로는 조선 숙종이 이 그릇이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포개지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겨 장인에게 만들게 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이와 똑같이 만들지 못해 이에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어필제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약 500여개였다고 하나 현재는 30여개가 남아 송광사 탱화전시관에 전시되어져 있다.
세 번째는 쌍향수. 천연기념물 88호인 이 곱향나무는 높이가 12.5m, 가슴둘레 3.98m 로서 수령이 약 800년 정도 된다.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인 중국 금나라 천자(天子)인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짚고 온 지팡이를 꽂은 곳에서 자라났다는 설화가 내려져 온다.
<비서리구시> 아래에는 크다란 돌 구시가 맑은 물을 계속 흘러 보내고 있었다. 역시 15년 전에 기억을 되살리면서 약수한 모금 마실 생각으로 <돌구시> 옆으로 닥아 갔다. 그 속에는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방문객들이 보시한 동전을 거두어 북한 난민에게 구제품을 전달했을 뿐더러 노숙자와 불우이웃 등에게 사랑의 손길을 전달했다는 실적 보고서가 물 속에서 전달하고 있었다.
<쌍향수>
고개를 들어 <월봉>과<시몬>을 살펴보았더니 둘은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로 비온 뒤의 고즈넉한 산사의 맑은 공기와 함께 송광사의 역사를 새롭게 쓰려는 듯 연방 셧트를 누르고 있었다. 인물화보다는 송광사의 얼이 깃든 모습을 주로 담으면서 <월봉>은 연방 비온 뒤 개인날씨에 감탄하면서 가장 멋진 날이라며 <송광사>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약1시간가량 경내를 돌며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은 뒤 뒤쪽에 위치한 산림욕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빽빽하게 늘어 선 낙엽송과 <메타 스쿼이어>에서 뿜어 나오는 <치톤피터>는 약450km를 달려 온 우리 일행의 피로를 씻어 주는 듯 하였다.
송광사의 메타 스쿼이어 숲
얼마나 다이어트를 심하게 했는지 날렵한 체격으로 거듭난 시몬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촌노가 바지춤을 당겨 입어 똥꼬가 탄로나 듯 옷이 커져서 내려가지 않게 하려고 바지허리를 몇 차례 휘감았으니 바지 끝은 당겨 올라갔고 그 모습은 토픽감이 될 듯도 싶었다.
어느덧 조계산 계곡에도 땅거미가 스며들기 시작하였고 <선암사>에서 6.8km의 산길을 걸어서 넘어 오는 산행자들의 발걸음도 빨라졌으며 방문객들과 더불어 출구로 방향 나오던 중 연못 위에 설치된 <4월초파일> 때 밝힐 연등이 나란히 달려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 모습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지 않듯이 <월봉>과<시몬>이 촬영에 여념이 없었을 때 중년을 지난 부산아지매와 정을 쌓고 있었다.
중년의 40대-50대의 5명 부산아지매가 직접차를 몰고 송광사를 찾아 왔다면서 아무런 제재사항 없이 터놓고 대화하면서 몇 컷트의 사진까지 촬영해 준 뒤 메일주소까지 받은 뒤 안녕을 고 했다.
민박집을 찾아서
막 <송광사>경내를 빠져 나오기 무섭게 입구에 늘어선 민박집을 찾아 몇 집을 노크해 보았으나 인적이 없어 다른 곳으로 가려던 중에 노파 한 분을 만나 2만원에 투숙하게 되었다. 좌측으로는 송광사가 우측으로는 새하얀 벚꽃이 만발한 조계산 입구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까 잠이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 듯 하였다.
특식 저녁 메뉴는 <샤브 샤브>였다.
여러 차례 <샤브샤브>를 먹어 보았으나 다소곳이 셋이 둘러 앉아 끓는 냄비 속에서 하나둘씩 건져 먹는 기분은 어느 때보다 더욱 정감이 어렸고, 맛 또한 산의 진미까지 더하여 배부른 줄도 모른 채 연방 입 속으로 입 속으로.....
TV에서는 계속하여 투표인수가 유사 이래 최저 수준이라면서 리포터들의 현장방송이 열을 올렸고 투표마감시간과 함께 발표한 출구조사로 한나라당의 절대 우세를 점칠 수 있었다. 빠른 곳은 6시30분부터 개표가 시작되어 시소게임 현상이 여러 군데에서 발생되어 흥미를 느끼게 하여 식사하다가 술이 부족하여 <나>는 술 심부름에 나섰다.
9시 뉴스시간쯤 되었을 때 한나라당이 출구조사보다 약30석이 빠지는 듯하자 리포트들과 앵커들의 짧은 촌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투표결과를 보고 열이 나서 그런지 방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서 사랑채의 보일러실에 들어가 온도를 낮추려는 순간 윗 채에서 불을 끄고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보일러실에 불이 커지는 것을 보고 마루에 나와 “거기 누구요?“라고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방이 너무 뜨거워 온도를 좀 내릴려 한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큰소리로 야단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큰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보일러 기술잡니다“라고 항변한 뒤 방으로 돌아왔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개표방송은 거의 결정단계였다.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절대안정의원을 달라고 했건만 겨우 과반이 넘은 153명이었고 친박연대의 선전과 은평을구의 이재오 낙선, 사천의 이방호 낙선, 대구 중구에서 홍사덕 당선 등 이색적인 선거문화의 결과에 의아심을 가진 채 다음날 스케쥴을 위하여 취침 속으로 들었다.
아침 메뉴는 <누룽지>에 샤브 국물이다
오늘 스케쥴은 태고종의 대본산인 <선암사>로부터 시작이다. 민박집 문전에 나란히 세워진 참나무에는 채취하다 남겨 둔 표고버섯이 제법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주인 몰래 한움큼 따다가 아침 국꺼리에 넣어 맛있게 먹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시간은 7시20분, <송광사>옆 민박집에서 <선암사>를 향하여 차를 몰면서 다시 주암호 옆에서 차를 세워 몇 컷의 사진을 촬영한 다음 8시10분 조계산의 <선암사>에 도착했다.
<조계산의 선운사 입구>
<조계산>은 해발 884m 높이로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하며 산 동쪽에는 선암사, 서쪽으로는 송광사가 있다. 송광, 선암계곡에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고 만수봉과 모후산이 송광사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특히 선암사 가을단풍은 일품으로 등반객들이 탄성을 자아내기도 하는 곳이란다..
조계산 일대의 자연경관을 우선 일별하여 보면 해발 884m의 조계산을 중심으로 약수를 비롯, 비룡폭포, 울창한 숲, 단풍, 설경 등 사계절의 훌륭한 경관을 나타내며 동쪽의 선암사와 서쪽의 송광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코스는 호남, 남해, 88올림픽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지리산, 내장산, 백암산, 한려수도의 국립공원과 관광루트가 형성되어 천혜의 자원이 되어 가고 있다고 자랑한다.
특히 산속의 곳곳에는 깊은 계곡과 크고 작은 8개의 사찰이 있으며 계곡에 맑고 시원한 물이 항시 흐르고 있으며 울창한 노송들이 들어선 <송광사>엔 천여년 동안이나 수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부처님의 자비와 감로법수를 맛보기 위하여 찾아든 발자취가 어린 대자연의 풍요로운 경관을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기 무섭게 적막감에 포위되어 우측의 지름길이라는 약간의 오르막길로 접어들자 우측에는 사찰 후원에는 8000여평의 토종 야생차밭이 있어, 햇살 받은 짙푸른 초록이 어우러져 가람의 운치를 더한다.
좌측으로 꺾어 좁은 산보 길과 양쪽의 대나무 숲과 고목 숲에서 뿜어내는 고유한 냄새에 우리 셋은 대화마저 단절시키고 말았으며, 퇴색한 사찰의 이모저모에서는 태고종의 대본산 이전에 마치 유령이라도 나타날 듯한 낡음의 흔적이 뚜렷한 선암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선암사> 숲길
<선암사>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600살된 매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태고총림이자 천년고찰인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세 가지가 있다. 매화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각지에 심어오던 관상용 자원식물로서 이른 봄 피어나는 단아한 꽃과 깊은 꽃향기가 있어 시·서·화 등에는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온 사군자(梅-蘭-菊-竹)의 하나라고 한다.
<매 화>순천 선암사의 무우전매(無憂殿梅)」는 선암사의 무우전과 팔상전 인근에 자라는 매화나무로, 고려시대 대각국사가 중창한 선암사의 상량문에 의하면 와룡송(臥龍松)과 함께 심어져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해 온 매화나무라고 한다.
전남 순천시 승주군 승주읍 죽학리 조계산 802번지/ 종파: 한국불교 태고종 /창건시기 : 542년/ 창건자: 아도호상. 백제성왕 7년인(529)년에 선암사 비로암지에 아도화상께서 선암사를 창건하였고 사찰명을 해천사(海川寺)라하고 산명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였으며.
그 뒤 도선국사께서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금도 선암사에는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해진다.
이후 선암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또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는 호남의 중심사찰 이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극기(1171-1197)의 시에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로 적고 있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에 큰 피해를 입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한다. 열심히 셔트를 누르면서 사찰 이곳저곳을 두루 살펴본 뒤 마당으로 나왔을 때 승복차림으로 연등을 설치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찰 중간지점 도로에 세워진 이색적인 소방차량은 숭례문을 연상케 하였다. 전부가 목조건물 양식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진압하지 않으면 문화재가 사라지니까 소방차량을 대기시켜 놓았으나 글쎄 낡은 소방차량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런지 ????
1919년 본발사법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순천, 여수, 광주지역의 사찰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선암사 가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삼무(三無)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는 주련인데 다른 사찰의 대웅전에는 주련이 기둥에 붙어 있는데 선암사는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틀리다)라고 하여서 곧 깨달으면 말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서 주련을 달지 않았다.
셋째는 어간문이 없는데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이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고색창연한 조계산 선암사 입구를 통하여 비친 대웅전에 이르는 좌우에는 100일기도와 <부처님 오신 날>행사에 대비한 다양한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다른 사찰과 비교하면 낡은 건물을 단층공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 듯이 무척이나 퇴색되어 있었고, 고용함은 오전 이른 시간이라기보다는 조계산 기슭의 운치가 가득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선암사>분위기에 매료되어 버린 <요셉>과 <시몬>은 말문을 닫은 채 열심히 셔트만 누르고 있었으며 더불어 감탄사까지 연발하였다. 대웅전을 지나 돌담길로 접어들자 <겹사꾸라>가 시야를 가렸고, 늦은 봄인데도 겨우 눈을 뜨는 듯 매화나무에는 봉오리가 망울망울 피어오르고 있어 <사군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다.
천태종의 본산, 선암사는 여느 사찰과 달리 단청이 짙지 않다. 마치 여인이 화장을 한듯 안한 듯 엷은 빛깔의 담담한 맛이 고찰의 운치를 더한다. 특히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건물 옆 고삿길은 마치 전통마을을 찾는 느낌이다.
선암사~굴목재~송광사= 조계산 최고의 트래킹 코스로 6.8km에 이르는 완만한 산길이 가족단위 산책 코스로도 그만이란다. 3시간이면 주파 가능. 조계산은 이른바 산의 상-중-하층부에 차례로 단풍이 세번 든다는 `3겹 단풍'의 명소이다. 따라서 10월말부터 12월 초까지 고운 단풍의 묘미 속에 산행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침묵으로 일관한 셋은 셔트 속에 <선암사>의 운치를 가득히 담으면서 대웅전을 지나 아래로 내려오던 중 화장실로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등록된 <해우소>를 발견했다. 궁금증을 두고는 못가는 성격인지라 입구에 세워진 동판의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선암사의 <해우소>
선암사 해우소는 그 규모나 건물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국내 최고로 손꼽힌다고 한다.
<해우소>는 근심 푸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찰의 화장실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용물은 똑같이 냄새나는 곳일 터이나 뒷간·화장실이라는 언어와 달리 대소변을 미련 없이 버리듯 번뇌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자는 뜻이 담겨 우리 스님 네들의 해학과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에는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사찰에서조차 해우소라는 표지판을 달 정도로 많이 알려졌다.
요즘은 <해우소=사찰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많이 확산됐지만 해우소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한국전쟁 후 충남<동학사>의 스님이 뒷간에 해우소라는 현판을 단 후부터란다.
해우소라는 용어는 원래 해의소(解衣所) 즉 옷을 벗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한다. 속곳·속바지·속치마까지 켜켜 입은 옛 사람들은 옷을 몇 개쯤 벗어놔야 시원하게 뒷일을 볼 수 있었던지라 뒷간 이름도 옷 벗는 장소로 표현했던 것이다.
등 굽은 소나무가 멋스럽게 드리운 선암사 <해우소>는 건축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깊이에 있어서도 무척 유명하다. 선암사 해우소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송광사 스님과 선암사 스님이 만나 서로 자기 절 자랑을 하는데, 송광사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절에는 솥이 얼마나 큰 지 밥을 푸려면 배를 띄워 노를 저으면서 퍼야 한다네”하니, 이에 지지 않고 선암사 스님이 “우리 절에는 뒷간이 얼마나 높은지 어제 눈 똥이 아직도 떨어지는 중이라 소리가 내일 아침녁에야 소리가 들린다네”라고 대꾸했다라는 말처럼 크기에는 의심할바가 없었다. 뒷간이 높으면 그 만큼 절식구수도 많고 사세도 크다는 의미를 부풀려 한 것이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해우소 안으로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다시한번 감탄하고 말았다. 해우를 하게 만들어진 구멍의 크기는 세로가 약60cm, 가로가 약25cm 정도였으며 아래의 높이는 약3m 칸막이는 있었으나 문짝은 없었다.
호기심에 잠깜 앉았다가 앞쪽 벽에 새겨진 재미난 글귀를 발견하였다. “파리야 극락가자”였다. 중생뿐만 아니라 파리까지 인도하겠다니 실소까지 짓게 되었다. 더욱 재미난 것은 사찰의 해우소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었다.
첫째, 머리 숙여 아래를 보지 말라-이는 깊이 높아 현기증이나니까다
둘째, 낙서나 침을 뱉지말고, 힘쓰는 소리를 내지 말라,
셋째, 외우고자 하는 계송이 있으면 외워라.
넷째, 용변 후에는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온다,
다섯째, 손을 씻기 전에는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등으로 해우소의 의미 전달은 신세대들에게도 수긍이 가리라 생각하였다.
오전9시10분, <선암사>에 도착한 뒤 꼭 한시간이 경과했을 때 <삼인당>연못을 마주했다
길이11m, 너비 7m인 <삼인당>연못은 862년(경문왕 2) 도선(道詵:827~898)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인데, 이 안에 또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안에 있는 섬은 ‘자이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를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연못의 명칭에서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精印)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사상을 나타내고 있단다..
장타원형으로 장변과 단변의 비율이 2.2대 1이다. 연못 안의 섬은 난형으로, 장변 11m, 단변 7m이며, 난저부 가까이 4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연못의 내부에 흙이 차고 석축이 좋지 않아 1996년 전통문화보존회에서 복원공사를 하였다.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연못 양식으로,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삼인당> 연못<나>의 사진기는 용량부족으로 이미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출발 전에 저장용량을 체크했어야 하는데 때늦은 후회를 거듭하면서 선녀들이 <승선교>다리 밑에서 목욕한 다음 <강선루>에 앉아서 조계산 계곡의 맑은 공기를 마신 곤 했다는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승 선 교>
선암사 입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조홍교. 길이14m, 높이7m, 나비3.5m. 기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를 쌓았는데, 돌을 연결한 솜씨가 정교하여 홍예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 계곡 기슭까지의 사이에는 둥글둥글한 냇돌을 써서 석벽을 쌓아 막았다. 다리 좌우의 측면석축도 난석 쌓기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으며 원형을 잘 지니고 있다. 기단부에는 아무런 가설도 없이 자연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안전하다.
홍예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 오고 있다. 이 다리는 임진왜란 뒤 선암사를 중건할 때 가설한 것으로, 호암대사(護巖大師)가 관음보살의 도움을 입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아름다운 승선교에 전해오는 전설 하나.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친견을 위해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효험이 없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는데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 유명세에 뒤따르는 재미난 전설은 발길을 즐겁게 해 준다.
선암사의 <강선루>
‘다리를 건너면 속세의 때를 벗고 신선이 된다’는 ‘승선교’(보물 400호)를 보고, 장마에 휩쓸려 간 뒤 다시 아치형으로 개축한 <승선교> 밑을 통하여 사찰을 바라보는 모습은 또 하나의 장관이었다.
선녀들이 노니던 계곡이었다니 행여 무언가 흔적이라도 있을까 싶어 <승선교>를 지나내려가는 길 왼쪽에 승려들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를 발견하였다. 사찰에서 부도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부도가 위치한 장소는 신성시 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곳 선암사에도 수많은 부도가 있다.
<선암사> 입구 쪽에 설치된 부도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곳이며 묘탑, 부두, 포도, 불도라고도 한다. 이곳 선암사에도 수많은 부도가 있다. 위치한 곳은 달라도 모두 큰 의미를 담고 서 있다. 그중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보여지는 부도군이 승선교 약30여 미터지점에 있는 총 19개의 부도군이다.
오전 9시35분 <선암사>를 떠나면서
조계산이란 산명은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그 조계(曹溪)와 한자 표기와 의미가 같다. 조계란 원래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의 호로서,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 산에서 문득 깨달은 후 점차 세속의 습을 제거해 나간다는 수행법을 따르는 수선사를 열면서 산 이름이 송광산에서 조계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계종은 16국사를 배출하면서 크게 흥성,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었으며, 그 중심적 역할을 한 사찰이 송광사였기에 송광사를 일러 <승보사찰>이라 하는 것이다.
조계산은 또한 한국 불교의 다른 한 맥인 천태종의 남방 중심사찰로 크게 일으켜진 선암사가 있다.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가 이곳에 대가람을 일으켜 선암사라 이름하고 호남의 3암사 중 수찰을 삼았다고 하며, 그 후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 이 조계산 선암사를 천태종의 남방 중심사찰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 불교의 양대 맥이 이 조계산을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할 것이다.
조계산은 양쪽 옆에 2개의 아름다운 인공호인 <상사호>와 <주암호>가 생겨나는 한편 최근에는 늘 이 산과 연계되었던 <낙안읍성>이 관광지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의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조계산을 떠나면서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의 승려들은 가정을 이룰 수 있는 태고종이라 부녀자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왠지 고정관념처럼 인지된 사고로 부녀자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 머쓱하게 느껴졌다. 약2시간에 걸쳐 선암사의 여러 면을 관람한 뒤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기 전에 트레킹코스 안내표지를 발견하였다.
송광사와 선암사간의 접근코스 및 소요시간으로 정해진 제4코스: 송광사→계곡→천자암→굴목재→선암사(4시간)간의 6.8km코스는 단풍시즌에 다시 찾아와야겠다는 다짐을 한 뒤 <낙안읍성민속마을>을 향하여 달렸다.
전 편 끝
*컴퓨터 악성 바이러스로 인하여 정리했던 산향일지가 전부 날라가 버려 다시 써느라고---
후편에서는 <낙안읍성 민속마을>, <전남의 유일한 군립공원 강천산 산행기>, <순창고추장마을>,
보리암으로 유명한<추월산>산행기 그리고 문경 최주영 농장까지 가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만리장성을 쌓은 얘기등으로 소개하고져 한다., 박 순 웅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