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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학번 선배의 농활이야기>
마치 어린 시절 시골에 내려가는 설레임으로 아침에 잠을 깼다. 겨울 농활이라는 미명(?) 아래 오늘은 충주에 계신 형님들께 가보기로 한 날이다.
‘형님’, 형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나이가 드신 형님들. 1학년 때 처음 농활을 가서 처음 형님들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보기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던 그 형님들을 만나서 마땅한 호칭을 못 찾고 그냥 “아저씨.....” 하고 불렀다가 몹시 혼났던 기억이 난다.
“야 이놈아, 아저씨가 다 뭐냐? 결혼도 안 한 사람들한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 가뜩이나 어려운 혼사 길 막으려고 작정했구나.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그렇게 털털하게 말씀하시면서 어쩌다 여학생들이 오빠라고 불러 주면 그렇게 좋아하시던 형님. 그렇게 농촌을 지키시던 형님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 학교로 갔다. 같이 가기로 한 후배 한 녀석이 늑장이다. 어제 저녁에 전화로 “형님,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갈게요!”하고 호언장담했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배는 계속늑장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형님이 기다리실 것 같아서 출발하기 전에 다시 전화를 드렸다. 형님은 웃으시면서 “이 녀석들은 언제 한번 약속대로 내려오는 법이 없어, 이놈들아 빨리 내려와!”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꾸짖는다.
호남선 터미널로 갔다. 익숙하게 충주 내려가는 표를 사서 경기고속에 몸을 싣는다. 같이 탔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한다. 차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쯤 해서 한 명 두 명씩 잠을 청한다. 창가에 앉아서 얘기하는 한 후배 녀석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조용해져서 둘러봤더니 뒤척거리며 잠을 청하고 있다. 요 며칠 사이 학기 마치고 종강파티다 뭐다 해서 피곤들 했나 보다.
이렇게 충주로 내려가다 보면 1학년 때 대학에 들어와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던 나의 모습과, 멋모르고 선배들을 따라나섰던 나의 첫 농활이 떠오르곤 한다.
너의 발자국을 찍어 보아라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때가 90년 봄이었다.
나의 대학 입학은 지극히 평범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마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나의 경우도 ‘왜 대학을 가느냐’는 전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느냐만이 나의 관심사였다.
또한 적어도 고등학교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문의 답은 “그것은 지금 네가 생각할 때가 아니다. 대학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더 열심히 해라!”가 정답이었다. 그렇기에 대학은 나에게 많은 기대와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도 적어도 대학이라는 곳이 ‘사랑이 꽃피는 나무’식(?)-내가 고등학교 다닐 당시 가장 히트했던 대학생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들어온 대학!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내가 내린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의 삶은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이란 고등학교 때 문과, 이과를 선택한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랐다. 하다못해 점심식사 한 번 하는 것만 해도 선택을 해야 했다. 어디서 먹을까, 무엇을 먹을까. 그저 어머니가 싸주시던 도시락을 먹던 고등학교 시절하고는 전혀 달랐다.
그 속에서 세운 원칙이 있었다.
“모든 일을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직접 발자국을 찍어 보아라. 자신이 찍은 발자국은 자신이 직접 확인할 수 있고, 그로 인해 타인의 발자국도 자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입학식날 어떤 선배한테 들었던 이야기다. 참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머리 속에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보자. 그것이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나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그렇게 다가온 농활
그렇게 시작했던 대학생활에 나는 정신이 없었다. 내가 살아온 기간에 사귄 사람들 보다 입학 후 한 달간 사귄 사람들 수가 더 많았으리라. 신입생 환영회다, 동문회다, 동아리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입학 후 한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나를 정신 없게 했다. 이러한 통과의식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이제 나는 그 속에서 나의 삶을 위한 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오월의 햇살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나에게는 너무도 뜨거웠다.
그때 찾아온 것이 농활이었다.
한번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목가적 전원 풍경이 아닌 어떤 뜨거운 삶이 분명히 농촌에는 있을 것 같았다. 또한 나와는 별개인 삶들을 체험해 보고 싶었다. 또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육체적으로 고생을 하면서 한번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월의 맑은 날씨 속에서 떠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렵게 들어간 우리 마을
분명히 차 속에서 노래부르고 휴게실에서 김밥을 먹을 때는 그저 모꼬지 가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을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웃고 떠드는 것을 선배들이 자제시켰다. 그리고 담배 하나도 조심해서 피우라고 신신당부했다. 학교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선배들의 엄한 태도에 기가 죽어서 그저 아무 말 없이 주위에 펼쳐지는 풍경들만 쳐다보며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작은 산 하나를 넘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을 우리가 먹을 3일치 식료품과 취사도구, 침구 따위를 이고 지고 들어갔다. 해가 뉘엿거리는 들판은 여전히 나에게 낭만적인 농촌이었다. 물론 그러한 풍경 뒤에 숨겨진 고된 농민들의 삶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하였으나 마을에 들어가는 일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농활 가면 형님들이 우리 올 때쯤 해서 일찌감치 일 마치고 막걸리 한 말쯤 받아 오셔서 “그동안 잘 지냈느냐?”, “형님들 농사는 잘 됩니까?” 하는 정겨운 술자리도 벌어지고, 몇 안 되는 동네 꼬마들은 서울에서 학생들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학생들 목에 매달려 재롱을 떨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마을에 들어가는 일부터가 수월하지 않았던 때이다.
이장님이 나오셔서 마을에 할 일도 없을뿐더러 학생들이 잘 만한 공간도 없으니 돌아가 달라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짐들을 내려놓고 어쩔 수 없이 밤이 늦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 몇 명이 이장님 댁에 가서 두어 시간 오지를 않았다. 그저 우리들은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마을에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숙소는 마을 경로당으로 정해졌다. 간신히 들어간 마을 경로당, 어둡고 좁은 그 곳에서 라면 몇 개를 대충 삶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평생 그렇게 낯설고 힘든 잠자리는 아마 처음이었으리라. 밤새 뒤척이면서 잠을 설쳤다. 그나마 우리는 후배라고 경로당 방안에서 잤으나 선배들은 경로당 밖 마루에서 잠을 청했다.
왜 그렇게 시골의 공기는 차기만 한지 서울에서 느끼던 오월의 따사로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진부한 어구로 내 자신을 달래기엔 그 밤은 너무도 추웠다.
참된 노동이란 무엇일까
다음날 아침, 아니 말이 아침이지 서울 생활에 젖어 있던 나에게는 거의 새벽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채 6시가 못 되어 선배들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며 아침을 준비하자고 했다. 그렇게 준비한 아침을 먹고, 구보하고, 대강 세면한 후 우리는 작업을 나갔다. 여자 선배랑 여자 동기 한 명이랑 나랑 세 명이 한 조가 돼서 나갔다.
내가 처음 농활 가서 했던 일은 깨밭에 씨 뿌리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을 둥 말 둥 일을 했다.
별로 넓지 않았던 밭이었다. 그 집 할아버지께서는 여자 선배랑 동기는 줄을 잡게 하고, 그래도 나는 남자라고 나에게 막대기를 하나 주시면서 그 줄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밭에 줄을 파 나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줄을 따라 소를 모시면서 땅을 파셨다. 처음에는 정말 싱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말 처음에는 일한다는 기분이 아니라 논다는 기분으로 즐겁게 시작하였다. 그러나 계속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은 팔, 다리, 허리 온몸을 쑤시게 했다. 또한 부실하게 아침을 먹어서인지 배도 고파 오기 시작했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한 12시정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더욱 고파 왔다. 옆의 동기한테 몇 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때가 9시! 고작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9시라니......
아무 생각 없이 정신없이 일하는 데만 몰두하기로 했다. 그저 삽으로 흙을 돋우고, 비닐을 씌우고, 구멍을 뚫어 물을 주고 씨를 심고...... 계속되는 일들은 힘들었다. 지금에야 ‘그게 그렇게 힘들었었나?’ 하고 반문하지만 그 당시는 그것들이 얼마나 참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자꾸 “아이구, 학생들 힘든 일은 처음일 텐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시며 미안해 하셨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 갔을 때는 그저 돌 투성이던 흙밭이 이제 가지런히 비닐을 입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때의 뿌듯함이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질질 발을 끌고 돌아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매일매일 먹는 음식이며, 철 따라 갈아입는 옷이며, 학용품이며, 기타 등등의 수많은 것들을 소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것 중에 내가 생산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과연 노동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오늘 내가 한 일이 난생 처음 한 노동이 아닐까?’
물론 정확하게는 아니었을지언정 어렴풋이나마 노동의 의미를 깨닫게 된 계기였다. 또한 쉽게만 생각했던 농민들의 삶 뒤에는 이런 힘겨운 노동들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집단주의적 삶을 느끼며
다음날 아침 작업을 분배하면서 작업반장 선배 형이 고추밭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일도 많고 힘들다며 몸이 좀 괜찮은 사람 다섯 명만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전날 혼이 덜 났던 모양이다. 아침에 생각하니 한 번 더 고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 없이 번쩍 손을 들고 따라 나섰다. 고추밭에 나갔다. 고추 모종을 파종하는 작업이었다.
작업할 고추밭은 산비탈을 깎아서 개간해 놓은 밭이었다. 왜 그렇게 넓어 보이던지 아마도 여의도 광장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손을 들었는지 후회도 됐다. 정말로 막막했다.
일을 시작했다. 비닐이 씌워진 고랑에 형님이 먼저 구멍을 뚫고 물을 뿌려 놓으면 우리들은 고추 모종을 그 구멍을 따라 심는 작업이었다. 해도 해도 진도가 안 나가는 것 같았다. 같이 나간 형님에게 “이거 몇 평 정도 되는 밭이에요? 한 천 평 정도는 돼 보이는데......” 하고 물어보니, 형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게 보여? 한 팔천 평밖에 안 돼”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천 평이니 이천 평이니 하는 개념이 없을 때라 한 천 평이면 굉장히 넓은 줄 알았던 것이다.
적적하게 작업을 한참하고 있는데 선배가 지루하니까 노래를 부르면서 하자고 하였다. 각자 돌아가며 노래 한 곡씩을 하면서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좀 지루함이 덜해졌다.
한 고랑씩 맡아서 하다가 다 못 하면 먼저 끝낸 동기들이 도와 주고, 내 고랑이 다 끝났을 때 못 한 고랑이 있으면 내가 가서 도와 주고...... 그렇게 서로 도와 가며 한 고랑씩 해나갔다. 서로 옆에 있는 동기들이랑 노래도 불러 가며 그렇게 작업을 계속했다.
그래도 하루 일했다고 조금 익숙해졌는지 어제처럼 죽을 것같이 힘들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어서 형수님이 준비해 오신 점심을 다 같이 빙 둘러앉아서 먹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 보는 점심은 처음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형님이 오랜만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농사일을 하니까 일할 맛이 난다고 하셨다. 농촌 일은 원래부터 집단적으로 모여서 하는 것이 훨씬 능률도 오르고 쉽다고 하시면서 형님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이 많을 때는 품앗이를 하면서 서로 도왔고, 그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훨씬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품앗이를 하려 해도 같이 할 사람이 없단다. 일손이 달릴 때는 품을 사서 일을 하는데, 품값이 비싼 것은 둘째 문제이고 아예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쁠 때는 동네 꼬맹이들 손조차도 아쉽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남에게 이렇게 큰 기쁨과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술이라도 한잔씩 하자고 했다. 기분 좋은 마음에 한잔 두잔 따라주시는 대로 벌컥벌컥 마셔 댔다. 서울에서는 막걸리가 왠지 거북하게 느껴져서 잘 마시지 않았는데 시골에서는 정말 술맛이 달랐다. 막상 일을 하려고 하니 그렇게 마셔 댄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비몽사몽간에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해가 뉘엿뉘엿 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일은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도 끈질기게 끝이 나지 않았다. 형님은 자꾸 가라고 하셨다. 내일 혼자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이 드넓은 밭에서 혼자 쓸쓸하게 일하실 형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차마 갈 수가 없었다. 혼자서 이 일을 다 하시려면 하루가 꼬박 걸릴 것이었다. 형님은 이 일을 다 마치려면 아마 9시는 될 거라고 겁을 주셨지만 막무가내로 일을 다 마치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계속 일을 해나갔다.
그때, 다른 곳으로 작업 나갔던 농활대원들이 일을 다 마치고 우리의 일을 도와 주러 오고 있었다. 정말로 살 것 같았다. 더 와준 농활대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같이 노래부르며 힘차게 나머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정말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듯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 일들을 혼자가 아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해낼 수 있었다.
함께 한다는 것! 나는 처음으로 그것을 경험해 보았던 것이다.
같이 힘을 합하여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새내기 예비대학에서 들었던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말의 의미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나만 양심껏 잘살면 될 것 아니냐’ 식의 삶이 아닌, ‘각자가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잘살 수 있는 사회가 올 것 아니냐, 괜히 남의 일에 상관말고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일에만 충실해라’ 식의 삶이 아닌,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삶일 때 삭막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활의 공동체가 되어서 서로 마음 맞춰 일하고, 내게 여력이 있으면 남을 도와 주고, 음식을 준비하고, 같이 음식을 나누고, 그 속에서 보람을 찾는 모습들은 내가 앞으로 살아 나갈 삶의 방향에 많은 힌트를 주었다. 개인화되고 원자화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처음 마을에 들어올 보았던 목가적 전원 뒤에 숨겨진 천만 농민의 패인 주름살을 알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의도만한(?) 밭을 다 매고 돌아온 이튿날 저녁이었다. 지금도 그날 그 할아버지의 깊게 패인 주름살을 생각하면 그 속에서 보았던 농민들의 힘겨운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다.
저녁에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서로 도와 가며 저녁을 준비했다. 나는 수돗가에 나가서 쌀이랑 아침에 씻지 못한 그릇들이랑 저녁 반찬으로 쓸 야채들을 씻고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들이 쌀을 씻고 숙소를 정리하는 모습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면서 유심히 보고 계셨다. 작은 체구에 연세는 칠순이 넘으셨을까? 얼굴 가득 고통스러웠던 삶의 흔적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온몸에서 술냄새가 풍겼다. 그 할아버지께서 다가오시자 나는 “안녕하세요?” 한마디 하고 왠지 좀 무섭게 느껴져서 계속 쌀을 씻는 척했다.
계속 말없이 우리가 하는 링들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우리들에게 먼저 말씀을 하셨다.
“아이구 학생들, 고생해서 어째...... 서울에서는 고생 안 해봤을 텐데.” 그렇게 말문을 여시더니 우리들에게 일은 할 만하냐는 둥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마치 넋두리처럼 자신의 살아오신 이야기들을 해주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평생 그 마을에 사시면서 농사짓는 일이 천직인줄 알고 사셨단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부족함 없이 잘살 수 있는 농촌이 되리라고 믿고 평생을 흙과 함께 보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도시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이른 새벽에 아침 이슬을 맞으며 흙에 발을 내디디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잘살기 위해서 안 해본 농사가 없었다고 하셨다. 특수작물도 재배해 보고, 소도 키워 보고, 농촌지도소에서 주는 씨앗도 심어 보고, 그러나 소파동이니 고추파동이니, 가격폭락으로 1년 농사를 다 망치고...... 선거 대면 마치 농민을 위한 국회의원인 양, 농민을 위한 대통령인 양 농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면 뿌려지는 황금빛 공약에 이제는 잘살게 되나 보다 하고 희망을 갖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말씀이셨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도로도 포장되고 초가집도 없어졌다. 그리고 농촌에서도 가스레인지, 텔레비전, 냉장고 등등, 없는 것 없이 보이지만 그것도 다 할부로 사놓은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농촌이 지금의 농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친하던 친구들, 친지들이 하나 둘씩 농촌을 떠나던 밤이면 술로 밤을 지새우며 괴로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괴로움 때문에 하루도 술 없이 넘기시는 날이 없다고 하셨다. 가난하고 못 배웠다는 이유로 떠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시던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신신당부했다.
“학생들, 서울 올라가면 출세해서 우리 같은 농민들도 잘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게나.”
코끝이 찡했다.
중․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목가적 전원의 풍경은 아니었다. 농촌의 삶은 단순한 감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연한 삶의 현장이며, 치열한 싸움터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평가를 하면서
그런 심란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고 평가를 했다.
평가 속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한 동기가 그때 했던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농활 오기 전에는 농활이라는 것이 대학생들 농촌에 와서 일손을 돕는 척하면서 농촌 사람들을 의식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일하면서 농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도리어 듣는 것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농민들을 의식화시킨다기보다는 제가 여기 할아버지나 형님들에게 의식화 교육을 받았다는 표현이 차라리 옳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민들이 데모를 하는데, 농민들이 시골에서 조용히 농사는 안 짓고 왜 서울까지 올라와서 데모를 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렇게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 왜 서울까지 올라와서 데모를 했는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가요. 살아가기 위해서 농민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몸짓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선배들은 학교에서 듣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의 반성은 깊어 가고 있었다.
흙에 살리라
한참 두 번째 평가를 하고 있는데 농민회 형님 두 분이 찾아오셨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 주셨고, 마을 들어오는 문제로 이장님과 문제가 있었을 때에도 옆에서 많이 도와 주셨던 분들이다. 시골이라 대접할 것이 없다고 하시며 막걸리 두 초롱-보통 석유통만한 크기를 그 마을에서는 ‘초롱’이라고 불렀다-을 들고 오신 것이다.
형님들이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기도 하고, 우리들도 형님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노래를 부르자는 제의가 나왔다.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형님들 차례가 되었다. 형님들은 자꾸 사양하셨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우리들 성화에 못 이겨 노래를 부르셨다. ‘흙에 살리라’라는 노래였다. 구성진 목소리로 멋지게 불렀다.
그 노래를 부르신 형님이 노래를 마치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도 한때는 농촌이 싫어서 도시로 뛰쳐나가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 충주시내에서 케이블도 깔아 보고 운전도 해봤지만 답답한 도시에서는 살수가 없어서 다시 왔어. 농촌의 따뜻한 인심에 제일 그리웠지. 사람이 제일 그리웠어.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형제처럼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말이야. 그리고 땅은 정직하지. 내가 노력한 만큼 그대로 돌려주니까. 만약 가격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농업만큼 마음 편하고 즐거운 일도 없을 거야. 나는 농촌을 지킨다는 자부심 하나로 이날 이때까지 버텨 왔다. 모두가 농촌을 떠난다 해도 농촌을 지킬 거야.”
말씀하시는 형님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자긍심을 가지고 농촌을 지켜 가는 농민들이 있었기에, 농촌이 이렇게 피폐해져도 지금가지 버텨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농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서
많은 감동을 주었던 농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 생각하니 나의 첫 농활은 나로 하여금 삶의 방황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조용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노동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 와서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은 농활에서 배웠다’고 말하면 조금 거창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농활에서 생긴 가장 큰 의문은 농촌에 계신 그분들은 살기 위해서 그렇게도 노력하는데 무엇이 그들의 생활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단순히 운이 좋지 않아서 애써 지은 고추가 값이 폭락하고, 애써 키워 온 소들이 소값 파동을 만나는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것을 알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후배들을 따라나선 농활
그렇게 시작한 대학생활.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들이 변하였다. 내 신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군 입대를 했었고, 군 생활이 끝나고 다시 복학한 학교. 많은 것들이 변화한 학교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그것에 적응하려고 애썼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애쓰면서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옛 기억에 사로잡혀 다시 농활을 가고.
그렇게 다시 따라나선 농활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많이 변해 있었다. 먼저 많은 학생들이 농활에 참가했고, 단순히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는 분반활동도 하고,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서 하기도 했다.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들은 마치 친동생이라도 보듯이 우리를 반겨 주셨다. 나도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처럼 포근한 마음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농활 때,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시던 그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저씨라고 부르는 우리에게 형님이라 불러 달라고 말씀하시던 그 분은 결혼하셔서 예쁜 딸을 낳았다.
가장 눈에 띈 것은 빈집이었다. 내가 처음 농활 왔을 때도 빈집이 많이 있었지만, 다시 찾아온 마을은 더욱 더 빈집이 늘었다. 그리고 농민회 형님 한 분은 자녀들 교육 때문에 충주시내로 이사하셨다고 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불어닥친 쌀수입 개방
이제 쌀 및 기초 농산물의 개방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농촌을 지키려고 노력하던 농민들의 마지막 노력과 실가닥처럼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도 이제 곧 불어닥칠 개방의 칼날 아래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전국적인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굴복해 버린 정부는 또다시 신농정이니 농어촌 발전기금이니 하는 허울좋은 정책들을 선전한다.
씁쓸한 마음으로 과 학생회실에 앉아서 1학년들의 낙서장을 읽다가 발견한 93학번 어떤 여학우의 글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의 자식들이 ‘칼로스’를 먹으며
“엄마, 우리나라 쌀은 어떻게 생겼어?”
이렇게 묻는다면,
나도 격렬하게 나의 조상들을 비난했던 기억이 난다.
큰 나라 앞에서 힘없이 무너진 조상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미제에게 허리를 잘리우고
그로 인해 우리가 겪는 고통들,
우린 지금, 바로 지금
얼마나 떳떳한 조상들인가.
.......
“쌀은 생명이다. 생명을 달라 하는 미국을 반대한다!!”
그렇다! 더 이상 우리는 먼 훗날 후손들 앞에서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는 없다.
더 이상 찾아갈 농촌이 사라져 버린 그런 세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땅을 지켜가는 농민 형제들의 품으로 우리는 영원히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찾아간 그곳에서 우리는 지나온 삶의 질곡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