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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 조계종 감로암 사찰연혁 및 현황
일제하의 암흑기에서 한국불교는 끝없이 저력을 발휘했고 어용종단인 원종에 맞서 임제종이 결성되었다가
1941년 비로서 조계종이 성립되지만, 이시기에 전통불교와는 다른 신흥불교가 등장해 주목되고 있다.
신흥불교란 새로이 일어난 불교단체를 말하며 기성불교에 대칭되는 표현이다.
신흥불교란 용어는 기실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을 필두로 발생한 신흥종교 14계통 중 불교계통에 속하는 단체를 일컫는다. 그 효시가 1872년에 등장한 묘련사(일명 신흥불교)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와 조선 도교사에 의하면 묘련사는 최성환. 정극경. 유성종 등 일단의 거사들이 서울 삼각산 법련사에 근거를 두고 결사 조직한 염불단체로서 주로 관음정진을 하였다.
그런데 이 관음신앙은 종래의 관음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진 중에 일어난 관세음보살의 감음으로 쓰여진 제중감로를 중심한다. `제중감로'는 관세음보살의 기운이 손끝에 내려 찬술된 강필로서 전1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4년 동안 일곱 곳에서 11회에 걸쳐 만들어졌다. 법화. 화엄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그 위에 관음신앙이 신비롭게 전개된 제중감로를 경서로 해 묘련사는 결사운동을 폈고, 당시 승려가 도성출입이 금지된 상태에서 서울포교를 했다는 것은 비록 거사불교이지만 놀라운 일이다.
묘련사 조직은 약 1백50명이 참여했으며 주로 민간 층을 포교대상으로 하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묘련사가 순수 불교단체라기 보다는 문창제군과 부우제군과 관성제군까지 모신 혼합신앙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이다. 금강경탑을 모방한 지장본원경탑과 문수반야경탑까지 조성한 묘련사는 한일합방 전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묘련사 이후 신흥불교는 일제하에서 10여개가 나왔다. 1937년 일본인 촌산지순이 작성한 조선의 유사종교란 보고서에 보면 불교극락회. 불교선양보경회. 감로법회. 원각현원교. 영각교. 대각교. 불법연구회. 오방불교. 광화교. 원융도 등이 기록된다.
불교극락회는 1925년 박운교가 만든 것으로 경기도 고양군에 본부를 두었으며 명심견성과 불타의 자비를 강조하고 있다. 영각교는 연화사의 승 이호필이 영적인 체험을 얻어 1919년에 창교했으며 본부는 서울 종로6가에 둔 단체이다.
원각현원교는 임제종의 신도 김영호가 1929년 서울 사직동에서 결성했고 몇 차례의 불법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감로법회는 서울 이화동에서 김기선이 조직한 단체이며, 원융도는 경기도 포천에서 홍우창이 만든 단체이다. 그런데 촌산지순은 백용성스님의 대각교까지 신흥불교에 포함시켰다.
제중감로[ 濟衆甘露 ]
조선 말기 보월거사(普月居士) 정관(正觀)이 설법한 것을 편찬한 책.
4권 2책. 관세음보살의 감응을 입어 설법하여 ‘관세음보살묘응시현제중감로(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라고도 한다.
책머리에 당대(唐代)의 신선인 순양자(純陽子)의 서문과 인가거사(印伽居士)의 이 책에 관한 연기(緣起)가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1872년(고종 9)에서 1875년까지 감로법주(甘露法主)인 보월거사가 관세음보살의 감응을 얻어 널리 설한 것을 보광거사(寶光居士) 보원(普圓)과 인담거사(印潭居士) 성월(性月)이 1권과 2권을, 해월거사(海月居士)와 현허거사(玄虛居士)가 3권과 4권을 기록하여 편집한 것이다.
1872년 겨울 묘련사(妙蓮寺)와 삼각산 감로암(甘露庵)에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며 감응을 기원하였을 때, 보살이 감로법주인 보월거사에게 강령(降靈)하여 고해자우품(苦海慈雨品)을 설하였다.
다음 해 봄 감로암에 다시 모여 기도할 때 보살의 강령으로 십종원신품(十種圓信品)을 설하였으며, 그 해 가을 인장자(海印長者) 집에서 보광연화품(普光蓮華品)을 설하였다.
또, 그 해 겨울에 담연단(湛然壇)에서 일체원통품(一切圓通品)을, 보련정실(寶蓮淨室)에서 여시게찬품(如是偈讚品)을, 1874년 봄에 다시 감로암에 모여서 묘현수기품(妙現授記品)을 설하였다.
여름에 여시관(如是觀)에서 반본환원품(返本還源品)을 설하였으며,
가을에 삼각산 삼성암(三聖庵)에서 무진방편품(無盡方便品)을 설하였다.
1875년 봄에는 진국사(鎭國寺)에서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을, 다시 담연단에서 전불가설품(轉不可說品)을 설하였고, 그해 여름 여시관에 모여 품의 이름을 정할 때에도 관음의 감응에 의하여 정하였다.
4년 동안 7처(處) 11회(會)에 걸쳐서 1부의 경을 이룩하고, 3년 뒤인 1877년 교정하여 간행하려 할 때 부우제군(孚佑帝君)이 무상단(無相壇)에서 서문을 썼다고 한다. 부우제군은 신선이 된 순양자로 다분히 전설적인 성격을 띤 인물이므로, 이 문헌이 도교와도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 글은 매우 유창하고 걸림 없는 변재로 연설되었다. 이 책은 대승경전 중 ≪화엄경≫과 비슷한 체재를 갖춘 특이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찬술된 불교문헌 중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관음신앙과 자비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대승경전에 나타난 불·보살의 원력(願力)을 배워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보현보살의 10종 대원(大願), 지장보살의 다함없는 원해(願海), 아미타불의 48대원, 약사여래(藥師如來)의 12대원 등을 열거하고 닦을 것을 권하였는데, 그 이상을 모두 극락왕생(極樂往生)에 귀착시켰다. 또한 묘현수기품은 그 모임의 법려(法侶)인 보원· 성월· 성담(性湛)· 정신(正信)· 법계심(法界心)· 도신(道信)· 성공(性空)· 보운(普雲)· 정념(正念) 등 144명에게 관세음보살의 감응에 의한 게송을 하나씩 내려 준 것인데, 이는 선종에서 제자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써 준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책에 선사상이 혼합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출현한 불경체(佛經體)의 문헌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관세음보살묘응시현제중감로 [ 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
감로법주(甘露法主)인 보월거사(普月居士) 정관이 1872년(고종 9) 겨울부터 1875년 여름에 걸치는 4년 동안 7처(處) 11회(會)의 묘련사(妙蓮社) 법회에서 강설한 법문이다.
보광거사(普光居士) 보원(普圓)과 인담거사(印潭居士) 성월(性月), 그리고 해월거사(海月居士) 성담(性湛)과 현허거사(玄虛居士) 자운(慈雲)이 함께 10품(品) 4권 2책으로 엮어, 1877년에 간행하였다.
권1에 1-4품, 권2에 5-7품, 권3에 8-9상품, 권4에 9-10하품이 실려 있다. 책의 첫머리에 순양자(純陽子)가 쓴 서문과, 인가거사(印伽居士)가 쓴 연기(緣起)가 실려 있다.
묘련결사는 조선 고종 때 삼각산 감로암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거사들이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의거하여 관세음보살의 신묘력(神妙力)을 믿고 명호를 염송하며 수행하던 결사(結社)이다.
각 품의 명칭은 고해자우품 제2(苦海慈雨品第二), 십종원신품 제2(十種圓信品第二), 보광연화품 제3(普光蓮花品第三), 일체원통품 제4(一切圓通品第四), 여시게찬품 제5(如是偈讚品第五), 묘현수기품 제6(妙現授記品第六), 반본환원품 제7(返本還源品第七), 무진방편품 제8(無盡方便品第八), 불가사의품 제9(不可思議品第九), 불가사의품 제10(不可思議品第十)이다.
고려중기 보조지눌의 수선사와 원묘요세의 백련사 결사를 들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만 해도 涵虛己和에 의해 미타불호를 칭념하는 念佛香社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묘련사 결사의 경우는 승려가 아닌 거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그 신앙(설법)내용이나 조직적인 활동기간 그리고 참여인원 면에서도 상당히 성황세를 이루었던 것 같다.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정조~고종대(1766~1907)의 기간 중에만 해도, 추사 김정희․ 이건창․ 월창거사 김대현등 대표적인 거사들의 활동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불교활동 및 찬술불서의 영향 등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조선후기 거사불교의 존재는 높게 평가할 만하다. 묘련사 결사의 所依經이라고도 할 수 있는 《濟衆甘露》의 緣起, 그리고 그 서문이 씌어진 배경들을 일 해보면 그들 결사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즉, 고종15년(1878) 印伽居士가 쓴 상기 제중감로의 緣起에 의하면, 이 결사는 고종9년(1872) 한성의 妙蓮寺 法侶 諸人이 三角山 甘露庵에 精進會를 設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관음정근에 전념하면서 보살의 瑞應를 기대했는데 드디어 관세음보살의 감응이 示現하여 정진회의 法主(普月居士 正觀)으로 하여금 법을 의설토록 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고종 19년)겨울부터 고종 12년(1875) 여름까지 4년 동안에 걸쳐, 감로암 ․ 海印長子家․ 심연단․ 寶蓮淨室․如是觀․ 三聖庵․ 鎭國寺 등 칠처에서 개단하여 11회의 法筵 을 갖고 관음보살이 시현하는 법을 承宣하는 한편 筆降에 의해 이를 한 經(제중감로)으로 완성한 것이라 한다.
妙蓮寺에서 이룩된 《제중감로》는 조선시대의 본격적인 관음관계 찬술불서로서 거의 유일한 문헌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제중감로가 이룩되는 배경에 관해 약간의 문제성을 느끼게 됨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제중감로의 본래 제명은 《관세음보살妙應示現제중감로》이다. 이 책은 묘련사 결사의 법주인 보월거사 정관이 관세음보살의 감응을 입고 그 시현한바 법을 承宣․기록(筆降으로)한 것이라 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전 10품 4권으로 되어 있는데, 법주 정관이 宣說한 것은 1,2권은 보광거사와 玄虛 거사가, 3,4권은 해월거사와 허거사가 각각 奉彙 한 것이다.
보살의 노력으로 정진 해에 든 감로법주가 대중의 근기에 따라 기별의 偈를 설한 내용이다. 별게를 받고 있는 인원은 모두 143인으로, 그 이름으로 미루어 보면 대략 남자가 53명 여자가 90명으로 나타난다. 이를 모두가 한사람 한사람씩 각기 다른 별偈를 받고 있다. 정토․ 밀교․ 禪이 서로 밀접한 교섭관계를 맺고 행해져 온 조선시대의 신앙추세와도 관련이 클 것이며, 여기에다 결사주도자들의 성향을 반영하듯 道家적 색체까지 가미되어 나타나고 있다.
감로법회[ 甘露法會 ]
유형 단체
시대 조선
성격 신종교
설립일시 1925년
설립자 김기선(金基瑄)
정의1925년 김기선(金基瑄)이 창시한 종교.
내용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포교사이면서 서울 이화동(현제의 충신동은 한일합방 이후 신작로를 개설 하면서 지명의 변화가 있었음을 추정)중앙포교소에 재임중이던 김기선은 관세음보살의 제일(祭日)에 모이는 부인들로 하여금 부녀회를 조직하게 하고 감로법회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관세음보살이 신자들에게 감로를 준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주로 부녀자로 구성된 회원들은 매월 정광여래(淨光如來)·약사여래(藥師如來)·미타여래(彌陀如來)·지장보살(地藏菩薩)·관세음보살의 제일에 각각 모임을 가지고 본존을 향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리고 자녀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재(齋)를 올렸다.
신심이 깊은 신도들에게는 수계(授戒)도 하여 불명(佛名)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신자들의 독송경(讀誦經)은 한글로 된 『천수경(千手經)』의 대비주(大悲呪), 『아미타경』의 사십팔원(四十八願)· 아미타불칠대주(阿彌陀佛七大呪) 등이었다. 1930년 이후 교세가 쇠퇴하여 현재는 거의 없어진 상태이다.
감로암(甘露庵)은 서울 종로구 충신동 15번지 한양의 좌청룡 낙산 자락에
묘(卯)좌 유(酉)향 서향으로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3교구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이다.
1912년 강남 봉은사 주지로 부임한 나청호 선사와 인연이 깊다.
산신탱과 독성탱이 나청호 스님의 화주(化主)로 화기(畵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근세의 명필 성당 김돈희의 보타전 편액과 청남 오재봉의 액자가 전해오고 있다.
『漢陽城內 東部 駱陀山 甘露會 法堂 上樑汶』에 의하면 창건연대는 정묘(丁卯)년으로서 일찍부터 관음영험도량으로 전승되었다. 여러 대덕 스님을 거처 중광스님 양모(養母) 혜련 비구니스님에 전승되어.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말사로 등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강산 건봉사의 고(故) 춘성스님의 설법이 유명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세상의 더러움을 걸래로 훔친다는 걸래 중광스님이 상주(常住)시는 동양의 피카소로 회자되어 일본NHK와 미국CNN의 생방송 되었던 전위예술의 산실이기도 했다.
법당 지하에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우물이 있다.
천상(天上)의 선인(仙人)들이 마시는 아무리타(AMURLTA) - 중생의 번뇌를 식혀주는 청량한 단 이슬 -
우물이 맑고 좋아 감로암(甘露庵)이란 사찰명이 유래되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원통전(圓通殿) 안에 좌로부터 신중탱화, 칠성탱화, 상단의 영산탱화, 지장 시왕탱화.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고풍(古風)스런 불화 그리고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나청호
○…1918년 동대문 밖 감로암에 머물던 스님은 변화무쌍한 인심을 한탄하는 시를 지었다.
무심한 세상사를 따끔하게 경책한 ‘감로암으로 옮겨서(移居甘露庵)’란 제목의 한시이다.
“세상사 공평치 않음이 너무나 싫구나 / 하루아침에 텅 빈 절간이 웬 말이냐
손님 맞으려 해도 접대할 게 없음이 부끄럽구나 / 하지만 저기 샘물 맑음 있음에야”
창건연대 미상. (조선왕조 23대 순조10년 1810년 경오년 건립연대설?)
1867년 정묘년? (1879년 감로암 신중도 畵記)
1927년 1월14일 서울 중앙포교당 화엄산림 회향. (1927년 4월 30일 서울 종로구 충신동 15번지 등기부 등제)
1928년 1월 김호산 주지 인사발령 (1929년 1월23일 매매 소유권이전 건봉사)
1928년 4월 8일 鄭義 師를 초청 3일 화엄법회 회향. 1929년 2월 15일 이대련 화상을 초청 열반절 기념행사 거행
1929년 12웡 8일 김보련을 화주로 성도절 기년행사. 1932년 8월 2일 수륙법회 600 여명 한강에서 거행
1937년 1월 1일 서울 중앙포교소 개소 10주년 기념식
1938년 7월 1일 서울 중앙포교소장 김호산. 포교사 이대련 취임
1941년 4월 8일 위령제 거행. 김호산 禪師의 法嗣를 慶山으로 정함
6.25 전쟁이후로 추정(주지 혜련 비구니 스님과 중광스님 거주 1993년 1월 혜련비구니 입적)
1988년 8월 19일 전통문화재 사찰 지정. 1997년 6월 9일 종교용지 지목변경
1993년, 이운정 주지
감로암 편액 보타전과 한양의 청용 낙산의 유래
보타락가는 “보타락 또는 보타”라고 음역되며, 小花樹. 小白華. 海島 또는 광명(光明)이란 뜻으로 번역된다. 『화엄경』에 바다 가에 산이 있어, 성현(聖賢)들이 계시는데, 지극히 청정하며, 꽃과 과실수가 가득하고 샘이 흘러, 모든 것이 구족하다고 기록되었다. 관세음보살께서 머무시는 거처로, 640년경 현장의 (大唐西域記)에 이 보타락가산의 위치 및 그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는데, 우리는 보타락가산이 인도의 남동부, 현재의 마두라이 지방 바닷가 어딘가에 위치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는바, 관음보살은 그곳에 거처를 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가 중국. 티벳. 한국. 일본 등을 거쳐 오는 가운데 각 민족들은 관음보살의 거처를 자기 나라 어딘가에 설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티벳인들은 입살하를 바다로 간주하고 그 강(江)유역에 위치한 입살의 <포탈라궁>이야말로 관음보살께서 주(住)하시는 곳이며, 그곳에 머무는 달라이 라마야 말로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절강성 영파의 주산열도에 보타락가산이 있다.
보타산은 ‘보타낙가산’ 의 줄임말로, 보타산과 낙가산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의 해변 굴속에 관음보살의 거처가, 일본인들은 일본의 나지산 靑岸渡寺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 각국의 관음(觀音) 주처(住處)는 인도의 보타락가산이 그러하듯 모두가 수도 중앙으로부터 남동(南東) 바닷가 산 위에 그 거처를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신앙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관찰하는 자로서, 모든 고뇌에 찬 중생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그에 응답하는 구제자로서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내 마음이 어두움에 빠져 있을 때 그 고뇌를 통찰하는 구제자 관세음보살.
『佛說大乘莊嚴寶王經』에 의하면, 관세음보살께서 최후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열반에 이르고자 수미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열반을 슬퍼하는 중생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되었다. 그 비탄의 소리를 듣게 된 관세음보살은 이내 크나큰 연민 속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지상에 오직 한 사람이라도 불행과 고뇌 속에 빠져 있는 한 나는 결코 열반의 문에 들지 않으리라” 이러한 큰 서원을 세우신 관음보살에게 의지하고 구원(救援)을 갈구하니. 조금이나마 더 많은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1,000개의 눈과 손을 수지하신다. 『삼국유사』에 관음보살은 자기의 눈 하나를 빼어 눈먼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다음과 같은 크나큰 자비(慈悲)를 보여 주고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742-765)대 에 경주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난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애를 안고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의 천수대비의 그림 앞에 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그 노래에 가로되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어 삶아두나이다. 즈믄(일천개)손 즈믄(일천개)눈을 가지셨사오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오니, 하나를랑 주시옵시라.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나에게 주시면 자비가 클 것 이로이다“
漢陽城內 東部 駱陀山 甘露會 法堂上樑汶
「述夫」기술하노라
「佛靈山會建築靑鳥善視乎爾時」===佛靈山會를 建築하려는 使者가 이때를 잘 보아
「法大藏經印成白馬馱來乎斯日」===法大藏經을 印成하러 白馬에 싣고 이 날에 왔네
「祇陀施金田之靜舍」===祇陀가 보시한 金田의 靜舍
「亞仙獻寶林之蓮坊」===亞仙이 獻納한 寶林의 蓮坊
「于玆是舍」===여기에 있는 이 佛靈山會일세
「地當駱陀甲坐之爲仁」===땅은 駱陀에 해당하니 甲坐에 위치함은 仁이되고
「洞名忠信庚向之稱義」===洞은 忠信이라 이름 하니 庚向은 義를 일커름이네
「三角高屹焉特立」===三角山 높은 봉우리 유난희 우뚝 솟고
「五江長流兮從前」===다섯江이 길게 흐름은 엣날과 같내
「山光凝碧謄空」===산 빛은 푸르름을 이루어 虛空에 오르고
「水聲轉淸入海」===물소리 맑게 바뀌어 바다로 들어 가네
「紺殿創建上禹斧之功」===검붉은 색의 절을 새로 지은 위에는 禹斧의 공이 있고
「禪寮住止傍公輸之力」===선방스님 머무는 집 옆이니 여러 사람이 힘을 쏟았내
「耀月휘飛憶昔蘆山之勝槪」=밝은 달빛아래 으리으리하게 화려한 전각은 아,
옛날 蘆山의 훌륭한 경개이고
「凌雲鳥革見今漢陽之壯觀」===구름을 뚫고 새가 날아갈듯 지은 집은 지금에 와보니
漢陽성안의 壯觀이로다.
「況復」===더구나 다시
「阿彌陀如來主坐乎碧蓮慈上 以六八之願歸與衆生」===阿彌陀如來는 푸른연꽃 꽃술위에 主坐하여, 48願으로 중생의 귀의를 재촉하고
「淸淨衆菩薩侍立乎紅藕花中 以大慈大悲一切攝化」===淸淨한 여러菩薩은 紅藕花 가운데 侍立하여, 대자대비 사랑으로 일체중생 攝化하네
「龍鉢虎錫相承嘉會」===龍鉢 虎錫이 嘉會에 서로 이어지고
「天王金剛衛護道場」===天王의 金剛杵가 도량을 衛護하네
「然後」===그런 후에
「信男信女若雲集숙先」===신남신녀들이 앞 다투어 雲集하니
「白衣관음如春和遐 」===백의관음의 얼굴 모습은 봄날같이 화평하네
「心王心所便往安養之蓮胎」===心王心所는 문득 安養의 蓮胎로 가고
「我及我人同涅槃之覺安」===나와 내권속들 모두 涅槃의 覺岸에 오르네
「재唱雪曲」===雪曲의 고상한 노래를 唱하는데,
「奚庸巴歌」===천박한 巴歌인들 부르지 않으리오.
「阿郞偉抛樑東」===에야디야 들보를 東쪽으로 던지니
「我來聽待靑禽下」===내가 靑禽 아래에 와서 기다린다.
「扶桑紅日上峯紅」===扶桑의 붉은해는 上峯에 붉게 오르고
「花丙聲邊禮佛宮」===花丙소리 들리는 결에서 佛宮에 禮佛하네.
「阿郞偉抛樑南」===에야디야 들보를 南쪽으로 던지니
「木覓山高선古碧」===木覓山 높은 봉우리 古碧에 걸처있다.
「詢友有城五十三」===벗에게 물으니 城이 五十三 있다하고
「金獅自樂紫蓮龕」===金獅子는 紫色蓮龕에 스스로 즐겁다.
「阿郞偉抛樑西」===에야디야 들보를 西쪽으로 던지니
「同發願心信士女」===發願心을 같이하는 信仰깊은 士女들
「一是大都萬戶濟」===한꺼번에 大都 萬戶가 다모여서
「佛垂摩頂任閑居」===부처님 마정 드리운 데 마음대로 한거하네.
「阿郞偉抛樑北」===에야디야 들보를 北쪽으로 던지니
「宿雲流碧曉鐘聲」===宿雲 流碧 새벽 종소리에
「讀祝五君星北極」===北極星에 나의 郎君 기원 하니
「敎海禪林如意得」===敎海 禪林이 뜻대로 얻어 지내.
「阿郞偉抛樑上」===에야디야 들포를 위쪽으로 던지니
「頂禮無量願至心」===이마 대어 절하는 無量願과 지극한 마음
「兜史多天慈氏相」===兜率天의 慈氏相며
「度生初會回向」===衆生 濟度 처음부터 넓은 廻向 만남 일세.
「阿郞偉抛樑下」===에야디야 들보를 아랫 쪽에 던지니
「觀音自在大慈悲」===觀音菩薩 自在하신 大慈悲로
「世界人人除장禍」===온 世界 사람마다 장화를 除去하고
「必使有緣同一花」===좋은 인연 깆게 하여 성불 함께 꼭 이루리
「伏願上樑之後」===엎드려 원하노니 상량한 한 후에
「會之□間如天長地久」===이 모임 □□함이 天地같이 長久하여
「卍幟應現而自而他」===佛敎의 旗幟아레 나와 남이 應現하네.
「敎之□道若日昇月恒」===佛敎의 맑은 道理 日月처럼 永遠하여
「梵衆赴感於彼於此」===스님네들 모두 함께 여기저기 부감하네.
佛 世尊 紀元 二千九百五十四年 丁卯(1687년, 1747년, 1807년, 1867년, 1927년?) 三月 二十四日 寶雲 尖叟 謹識
서울시 종로구 충신동 15 대한불교 조계종 감로암. 전화 02-762-5861.
법회 : 매월 ①초하루 생축(生祝)기도. ②보름날 망축(亡祝)기도. ③스무나흘 인등기도
매주토요일 3시 어린이무료한문교실 ①부수214자 ②천자문
한국방송대학교 불교(佛敎) 동아리 수련장
교통정보 :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3호선 혜화역 (도보10-20분)
(버스-충신동 하차) 충신시장 건너편
간선버스 - 2013. 1018. 1019. 지선버스 - 102. 107. 108. 301. 7025.
광역버스 - 9410. 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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