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 34년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은 동기들
그날의 고향의 봄날은 전군 도로의 벗꽃길에서부터...
고향의 봄 날
"쾌적"
집 문을 나서면서 나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큰 길 옆에 이르러 쉽게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을지로 사갑니다."
곧바로 눈을 감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사실 내가 오늘 이 순간을 맞기까지 약 1개월 동안 신자로서의 마음의 부담을 갖고
주님께 사죄의 은총을 기도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내 신 집사가 현관문 앞에서 배웅하며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요."
어쩌면 나의 속마음을 그대로 읽어주며 재확인이라도 시켜주 듯
전에 없던 뒷부분의 토를 달아주며 하던 인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어제 신화사에 찾아온 어느 교우와 대화하면서
"인간은, 아니 하나님의 자녀로 자처하는 신자라 할지라도
모르고 짓는 죄도 허다하지만 미리 죄 지을 것을 알고 고의적인 죄를 짓는 경우도 많아요."
말하던 기억을 되살려보기도 했다.
신화사에 들려 기념 타올을 꺼내들고 청계천 세운상가 앞까지 갔지만
아무도 나와 있는 사람이 없더니 수길이 먼저 내리면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십 년하고도 삼 년이 더 지난 오늘에서야 처음 상면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전쟁으로 빚어진 이산가족은 아니었으나
삶의 터전을 따라 고향을 등진 채 청춘을 날려버린 그 옛날의 벗님네들이
이제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며 소개를 받고서야 손을 꼬옥 붙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변해버린 얼굴들을 구석구석 훑으면서
30여 년 저편 쪽에 묻어둔 그리운 모습들을 되찾아내어 확인하며 기뻐하는 모습은
여의도가 아닌 세운상가 광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뜻 있는 모임을 위해서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하였고
몇 사람의 교회 출석하는 일을 제외하고라도
오늘로 이삿날을 받아놓고 보름 이상을 연기해야하는 재민과
순번제에 따라 의무적으로 열어야되는 약국 문을 닫고 와야되는 영동은
더욱 부담이 더 컸으리라 생각되었다.
특히 여자들 쪽에서는 남편의 이해를 구하면서 허락을 받아야 했고
선자만 해도 오늘이 남편의 생일인데도
홀로 빠져나오는 죄송함을 마음에 담고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시 5분 전 쯤 되어서 민속관광 버스가 도착했다.
출발 시간이 8시로 정해져 통보되었음에도 나타나지 않은 몇 사람의 동우(童友)를 더 기다렸다.
차안에 미리 자라잡고 있던 여우(女友)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야! 곽 근옥이다. 야, 근옥아! 너 여기 앉아, 네 자리는 여기 내 옆이야."
영자의 호들갑을 떠는 소리는 과히 싫지 않게 차안의 분위기를 웃음으로 만들었다.
금옥이가 늑장 중에 승차한 후에도 맨 마지막에 혜순이가 왔다.
"출발!"
8시 35분 세운상가를 출발한 버스가 한남동에서 간식을 사서 싣고
한남대교를 거쳐 중부고속도로 진입로를 향해 강변로로 달렸다.
모처럼 잡은 날짜가 13대 총선을 이틀 앞 둔 일요일이어서 더욱 차량이 많은 듯 했다.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서화자가 싸온 김밥이 나눠지고
100Km 이상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로 대화를 하거나 맥주를 따서 마시기도 했다.
나도 맨 앞자리에 귀여운 딸(채정의 딸)과 함께 앉아 김밥과 안주로 준비된 간식을 들면서
오늘의 안전을 위해 주님께 빌었다.
오고싶은 마음은 있어도 참석치 못한 친구들이 생각났다.
어제 오전까지도 기회를 얻기 위해 기다려보자던 김 구웅,
엊저녁 갑자기 형님의 수술 소식을 듣고 부산에 내려간 조 복영,
선거이틀을 앞두고 비상근무 상태의 한 상천과 박 준의,
그리고 여자 쪽에서도 개척교회 담임 목사 위치에서 라 화자,
감기몸살로 엄살(?) 피던 백 온자가 불참하고 말았다.
"기사님, 마이크 좀 주시죠."
근옥이가 나와서 차내 방송 사회자로서의 가다듬은 음성으로
오늘의 여행 코스를 설명하고 나서부터 곧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꽤 시끄러울 줄 알았던 권 인천이가 때 이른 시작 무렵부터 실례를 하고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떠들어댔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나도 오늘 이 시간이 있기까지의 경위 보고와
돌아올 저녁시간까지의 계획을 설명하였다.
다시 노래가 시작되고 카스테레오를 통해 맞춰지는 반주는 더욱 흥을 돋구었다.
나름대로 타향살이 30여 년 간 길러지면서도 숨겨졌던 멋진 가락들을 흥겹게 뽑아내었으며
청바지 차림에 색안경을 쓴 서 화자는 과히 수준 급의 실력을 과시하며
동우들의 노래를 유도해 내었고
말로라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할 것 같은 최 원일 등이 자원 봉사자로 나서서
진행하여 감으로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도왔다.
재민이가 옆자리에 앉더니 전방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색깔 좀 봐! 저렇게도 곱고 아름다울 수가..."
과연 창 밖의 도로 양옆으로 이어진 언덕빼기와 야산은
노란 개나리와 붉은 색에 청색을 배합하여 조화를 이룬 진달래가 원색의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꽃이요 향토의 꽃임을 자랑하며 끝없이 펼쳐지면서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서 화자가 다가왔다.
술을 못하는 나에게 권주가는 아니고 권청가(?)를 부르며 노래를 청했다.
원일이는 오늘의 모임에서 노래부르기 위하여
노래 가사를 적은 쪽지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연습하는 성의를 보인다는데
원래 유행가를 못 부르는 나는 동심의 노래를 부르기로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 때 그 시절(초교6)에 나는 최 원일이를 따라 경창리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허허 벌판에 벼를 빼 놓고는 별 특산품이 없는 들녘에서
원일이가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 것이 갈대밭에서 난다는 열매인지 꽃인지 알 수 없는 부들이라는 것이었고
그 모양이 지경 삼화당 빵 집에서 팔던 아이스케익 모양의 것으로 향기가 매우 좋았다.
그 것이 갖고 싶은 마음에 끌려 그 동네까지 갔었고
만경강 강변 근처의 물 속에서
손님 대접도 하고 용감성도 발휘해볼 겸해서 맨 발로 갯벌 같은 물 속에 뛰어들어
몇 송이를 꺾어주기에 좋아하며 가져오던 때를 기억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냐 강변 살자."
나름대로 그 때를 생각하며 감정을 살려보려고 했다.
갑자기 근옥이가 앞으로 오더니
길옆 적당한 곳에 차를 정지해 달라고 기사님께 부탁하여 세웠다.
맥주 마신 효과인지라 몇 몇 남우들이 내려가 볼일을 보고 올라왔다.
차는 다시 움직이고 노래는 이어졌다.
평소 촌색시처럼 말없이 점잖을 빼던 충현이도 보통을 넘는 노래 솜씨를 보이고
오늘 처음 온 이 기운이도 신나는 가락을 뽑아댔다.
그런데, 이 번에는 여우들 쪽에서 차 좀 세워달라는 신호가 왔다.
기사 아저씨는 중부휴게소까지는 아직30분이 남았는데 좀 참을 수 없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한 5분 쯤 지나서 양 윤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신호를 말과 표정으로 전해왔다.
이젠 본인보다도 내가 더 불안해졌다.
언젠가 교회 유년부 어린이들을 인솔하고 여름 수양회를 다녀오던 중에
차안에서 그만 크게 실례를 해서 매우 난처한 일이 있었던 때를 기억하면서 매우 불안했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속사정이 오죽하면 휴게소 20분전인줄 알면서 어려운 부탁을 재차 할까 해서
나는 기사분께 부탁하여 어디 적당한 곳을 찾다가 어느 간이 역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이 번엔 시침떼고 있던 남우들이 발빠를 걸음으로 먼저 내려가서
벌판을 향해 맥주와 음료수로 인해 쌓인 짐들을 풀었다.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르다더니
올 때쯤 된 원일이는 느긋했고 갈 때 마음인 윤녀는 다급한지라
인내와 원망스러움도 잠깐뿐, 윤녀가 아직도 머뭇거리는 원일이의 등을 툭툭치며
"뭐해! 다른 사람은 다 갔구먼,"하는 바람에
원일이는 그때서야 깜짝 놀라서 옷 마무리를 하고
차에 돌아와서 생각해보아도 보통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친구들은 무엇을 말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이쁘게만 보이니
코흘리개 적 친구가 참 친구들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차는 다시 중부휴게소에 멎었고 우리 모두는 내려가 잠깐 쉬면서 사진 촬영을 하였다.
우리가 함께 다니던 그 시절에는
흑백 사진 한 장 반반하게 찍어 남길 수도 없었을 뿐더러
남녀 함께는 더구나 생각도 못했건만 이젠 흰 머리카락이 생기고
얼굴엔 주름살이 생기는 것을 느끼면서 늦게나마 한 때
인생의 동반자들이었음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 서로의 모습을 한 장에 담았다.
차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들어설 때
언제부터였는지 근옥이와 선자가 선약이 되어 있었다면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소차에 살던 영동이와 혜순이는
십여 리 먼 학교 길을 6년 동안 함께 오가면서도 말 한 마디 못 건네 보고
수줍어하면서 사춘기를 먼 꿈 날로 보내버린 그 날을
늦으막에나마 숨겨졌던 회포를 풀어보는 듯 했다.
나와 한 동네에 살던 화자는 교회도 함께 다니면서 대화도하며 지냈지만
바로 앞집에 살던 선자만 해도 집 앞 골목길 20여 미터 전방에서 나를 보면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보고 지나치던 선자가
지금은 말 담 좋은 전혀 다른 아줌마로 이야기에 바쁘다.
세월 따라 생활 따라 서울 생활에서 다시 만나 오늘은 그 곳을 향해 함께 동행한다.
버스가 전주 진입로 입구를 돌아 군산 방면을 향해 달릴 때
도로 양옆에 한없이 늘어선 벚꽃은 진정 우리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혜순이가 카메라를 들고 옆에와 앉았다.
외국에 나가있는 친구에게 오늘 모임을 자랑삼아 소식을 전했더니
고국의 자연을 사진으로 보내달라기에 잘 찍어서 보내주기로 약속이 되어있다고 했다.
차안에서 전방의 벚꽃 길을 향해 셨터를 눌렀다.
인천이의 말대로 우리들의 고향은
특색 없는 곳으로 논바닥만 보이는 별 볼 것 없는 고장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소개되는 TV에서 가볼 만한
아름다운 고장으로 소개되는 화면을 볼 때마다 자랑스런 마음까지 가지게 된다.
차가 목천포 다리를 건널 때 만경강 상류 강변에 마련된 벚꽃 잔치 마당을 흥겹게 바라보면서
군산 방면을 향해 목천 삼거리를 돌면서 차를 세웠다.
갈색 머리에 봄 코트를 입은 여인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차에 올라섰다.
익산에 살면서 오늘의 여행 소식을 듣고 전화로 동행을 약속한 신 계자였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차는 다시 출발하여 우리들의 고향 대야를 향한 벚꽃 길을 달려갔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고속화 도로변엔 벚꽃 관광차들이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무리 지어 다니는 젊은 청년들도 많이 보였다.
왼쪽 도로 옆으로 나란히 흐르는 저수로는
호남평야 중에서도 농지 정리가 잘 된 이 곳 대야 남쪽으로 흐르면서 논에 물을 대주고
여름철에 어린 우리들의 유일한 수영장이 되어주었고
민물 고기잡이 터가 되어주기도 했었는데
지금도 말 없이 우리와 같은 방향 따라 흐르는 물은 그 옛날 발가숭이 적을 생각나게도 했다.
탑천을 조금 지나 신복 근처에서 차를 세웠다.
매년 한 두 차례 노력 동원을 통하여 의무적으로 자갈을 깔아 국토 보존에 협력했고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뿌연 먼지를 온 몸으로 맞으며 우리들의 발길이 잦던 도로가
이젠 잘 포장된 고속화 도로가 되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대야 쪽을 바라보며 사진 촬영을 하였다.
천주교회 앞과 검문소를 지나 터미널 옆 새로 난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여기가 어디야?"
너무 오랜만이라서 고향 동네 위치도 잘 모르는 듯 했다.
이 곳이 옛날 방죽 옆 오솔길로 학교 다니던 우덕실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안보일까?
며칠 전 답사까지 하며 약속된 장소와 시간인데 한 친구도 보이지 않았다.
12시 30분에 대야 농협 앞에 있는 '백마장'이란 곳으로 갔다.
안내 된 방으로 들어가 자리 잡으려할 때에서야 김현수, 양대철, 임원모 등이 나타났다.
친구들은 너무 일찍부터 기다리다가
차는 안보이고 잠깐 임원 모임을 갖게된 것이 그만 늦어버렸다고 미안해했다.
군산에 살고 있다는 노완순이도 와서 반갑게 인사했다.
반장에 대의원 활동까지 같이 했던 그의 이름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지만
얼굴만은 기억되지 않아서(변해서겠지) 소개를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효식과 종채 상문이도 왔다.
서천에 들려왔다는 복룡이와 근호도 도착했다.
매운탕으로 준비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잠깐 틈을 내어 영동이와 기운이는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다녀왔다.
대야의 친구들은 동부인하여 우리들을 맞았고
서울 팀의 임 영자의 언니도 우리와 함께 했다.
나도 잠깐 빠져나와서 어릴 때에 자주 오르던 뒷동산에 올라가서
사진 촬영이라도 하려 했으나 군산행 약속을 3시로 하였기에 도무지 틈을 낼 수 없었다.
백마장 뒤뜰 노랗게 핀 유채 꽃을 배경으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식사가 끝나자 군산에서 온 후배의 가라오케 풍악이 울리면서
자연스럽게 2부 순서로 넘어갔다.
서화자가 나오고 근옥이도 나왔다.
34년 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엇에 얽매여 서로 같은 자리를 할 수 없었던가?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건넨 술잔에 모두의 얼굴들이 붉게 물들고
이대로는 참을 수 없는 마음들이 자원하여 토해내는 노래 속에 담아
지나온 과거들을 한꺼번에 고백해내는 듯 했다.
이리에서 탄 신계자의 탁월한 노래 솜씨는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고
특히 우리 민요나 전래 음악은
그냥 앉아서 들을 수 없도록 흥을 돋구어 한바탕 춤 마당을 이루게 하였다.
이에 질세라 이미 서울에서 인정받은바 있는 임영자의 가요 열창 솜씨나
서화자의 귀청을 찢는 듯한 노래와 비틀어 꼬는 노련한 춤에 놀라움을 더했다.
그런 중에 춤은 추는데 스탭이 말이 아닌 친구가 앞뒤로 휘젓고 다녔다.
샌님처럼 점잖만 부리던 철재가 친구들이 권한 술맛에 도가 넘은 듯 했다.
대야의 교통 요지에서 연락 본부장 노릇을 하는 효식이가
'노들강변 봄 버들...' 노래를 흥겹게 부를 때에는 나도 함께 따라 부르며 춤도 추었다.
권인천이가 대야초등학교 교가를(30여 년 전 바뀜) 선창하고 모두 함께 합창하면서
고향 떠난 34년 동안 흘려보낸 청춘을 아쉬워하면서 서로의 마음들을 열어 보이는 듯 하였다.
3시로 정한 군산행 약속 시간을 1시간 늦췄는데도 우리들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 던 때가 그립습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하며 고향의 봄을 노래했다.
변해버린 것은 육체 뿐이요 마음과 자연은 그 시절 그 봄날이었다.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도
그칠 줄 모르는 동요와 함께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으려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들을 더 이상 머물지 않도록 재촉하면서 군산 행을 서둘도록 했다.
철재는 물론 정이도 복룡이도 인천이도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끌려 나온 후
백마장 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효식과 방인순의 차가 선도하고
우리가 탄 버스는 통사 발산 개정을 잇는 벚꽃 길 위로 달려갔다.
군산 입구 사정리에는 역시 벚꽃놀이 잔치에 구경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차내 안내자로 나선 근옥이의 군산지역 설명을 들으며 은파 유원지로 갔다.
어느새 태양이 고도를 낮추며 먼 길로 돌아갈 시간임을 일깨워주는 듯하기에
서둘러 돌아보고 월명 공원 옆을 지나 부두에 내리니
예나 다름없이 흐르는 금강 하구의 물 건너로 장항 제련소 굴뚝이 여전했고
장항으로부터 건너온 작은 여객선에서 사람들이 내려오고
부둣가의 노점상이나 횟집 등도 옛날과 비슷했다.
우리는 군산 횟집 3층에 자리잡고 쉬면서 저녁 식사와 함께 이별주를 나누었다.
명년에는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여 생존해 계신 옛 은사를 모시고 모교도 방문하자고 다짐도 해보았다.
대야의 친구들은 손님격인 우리를 그냥 보내기는 너무 아쉽다면서
군산 관광호텔 coffee shop이라도 가서 이야기라도 더 나누고 가자고 하였다.
나는 서울로 가는 길에 우리 대야에 들려
그 곳에 있는 작은 다방이라도 들려서 쉬어가자고 했다.
차가 군산을 빠져나올 때 노완순이가 작별의 손을 흔들며 내렸다.
뒤따라 내린 신계자와 이별의 포옹을 하는 모습을 모두가 바라보면서
비록 두 사람만의 이별이 아닌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은 아쉬운 인사임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우덕실 방죽 터 위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2층 다방에 들어갔다.
차 한잔씩 나누는 짧은 시간에 미쳐 못 다한 이야기들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네 몇 분이
두 세분씩 앉아 이야기 나누는 테이블을 찾아다니며 인천이가 인사하기에 바빴다.
"저는요. 오봉부락 살던 대야초등학교 30회 졸업생 권인천이라고 합니다.
제 아버님은 권 석기씨라고..."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우리 일행을 대신하여 소개하면서
수 십 년 만에 만난 이웃집 아저씨와 반가운 인사 나누는 듯했다.
제한된 시간은 우리가 더 이상 그 곳에 머물도록 허용치 않았다.
"안녕,' 또 만납시다."
"잘 들 가!"
헤어지는 이 순간만은 모두가 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섭섭함이 모두 같았으리라.
7시 50분,
어두워지는 대야를 뒤로 뒤로 멀리하며 전군 도로를 따라 이리를 통과할 때 신계자가 내렸다.
차안은 조용했고 피곤함과 술기운에 떨어져 자는 친구도 있었다.
혜순이가 수줍은 소녀의 모습처럼 살며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저, 오늘 이처럼 수고하시는 유 선생님을 위해서
어제 밤늦도록 제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한 것을 드리오니, 여기에서 뜯지 마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잠자리에 드시기 전에 꼭 혼자서 보아주세요."
하며 흰 봉투를 쥐어 주었다.
청소년 시절에 Christmas card를 건네주며
부끄러워하던 소녀로부터 받아본 감정을 다시 느껴보는 마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뭔지는 모르지만 준비해준 성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갈 때는 이 영자와 같이 앉아서 갔지만 올 때에는 한 금옥이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왔다.
원일 전자에서 선물로 주는 상품을 나누어주면서 노래를 시키고 다를 벌칙도 주었다.
복룡이는 지정된 짝과 얼굴을 맞대보는 장면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으며
영동이는 옛 친구의 체취라도 감지하려는 듯 겉옷까지 바꿔 입은 채로 올라왔다.
차가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을 향해 올라올 때
나는 선자에게 조용한 노래를 주문했고 선자는 하루를 마감하는 노래로 대신했다.
"친구 여러분!
기대하며 기다렸던 오늘 하루의 일정도
조금 후 이 버스가 서울 종착지에 도착하면서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대야초등학교에서 배우며 성장해가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고
우리들 유년시절의 꿈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 한데
우리는 어느덧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다시 만나 고향 방문을 통하여
잠시나마 그 때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는 시간은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반가웠고 시간마다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향까지 왔으면서도 우리의 모교 교정에도 못 돌아보고
선생님들을 모시지도 못했습니다.
고향 친구들과 일년 후의 약속만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이여!
잊고 살던 과거 34년을 다시 되 돌이킬 수는 없겠고
앞으로의 주어진 시간도 역시 너무나 짧은 것일 수밖에 없는데
남은 시간만이라도 우리 서로를 빼앗기지 말고 살아봅시다.
내일,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 속에 기쁘고 즐거운 만남이 기록 될 것을 바랍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정한 동대문에 밤 11시 20분에 도착하였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친구들과 헤어져 집 앞 골목에 이를 때까지
오늘 하루의 일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