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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노래]
강철 새잎 - 박노해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지만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흑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그래서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봄이다. 긴 겨울을 견디고 나온 여린 새잎은 결코 여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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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경이의 세상보기]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책을내셨다.
"낮게 사는 즐거움" 이다.
조화순목사님은 아직도 처녀이다.
도시산업선교회 최초 여성 총무직을 역임하셨고 동일방직노조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계셨다.
80년대 후반 이곳 안산에 내려오셔서 10여년간 월곶의 조그마한 교회 담임 목회자로 계시면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을 지원하고 지도하시다 97년에 안산을 떠나셨다.
그리고 10여 년 만에 책으로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강원도 외진 곳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환경운동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계시다.
낮게 더 낮은 곳에서도 즐겁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금 노동운동이 위기라 한다.
그러니까 첫아이가 태어나기 한해전 35살 늦은 나이에 노조에 입문해 지금껏 달려왔다.
현욱이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치열하게 산다고 자부했는데 왜 이런말을 들어야 할까?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다.
나부터 반성을 해야한다.
대중운동은 어느 조직이나 지역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움직인다.
그 속에는 생각의 차이나 혹은 이념과 사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복무하고 세상을 좀더 진보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투쟁해 왔다.
허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수는 소수를 배려하지 않고 횡포를 부리고 소수는 점점더 경직되어 가고 있다.
우리 내에서도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운을 둗우어 주시던 목사님이 그립다.
안산노동인권센터가 개소한지도 3년째 돼가고 있다.
회원들의 성금으로 운영되면서도 만나보지 못한 분들이 너무나 많다.
모두가 건강하시리라 믿는다.
센터가 운동권 내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작은 촛불이 될 것을 우리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5년 3월 30일 안산노동인권센터 대표 송 일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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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영화? 살 같은 영화!] 먼지, 사북을 묻다.
2002년 / 다큐멘터리 / 80분 / 한국 / 이미영
기획의도
광주항쟁 한 달 전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의 외딴 탄광촌 사북의 광부들은 어용노조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 항거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을 전개했다.
곡괭이와 몽둥이로 무장한 광부들은 무기고와 화약고를 장악하고 3일동안 사북읍을 검거했다. 그 몇일 낮과 밤이 사북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후 20년,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의 세월을 찾아간다.
노조 지부장 아내 린치, 술 취한 광부들의 난동, 사북 사태로 알려진 이 사건 뒤에는 무차별적인 연행과 고문 20년간 남모르는 이들의 고통이 있었다.
이 영화는 사북 사건을 경험한 사람과 우리를 야만의 시대로 데려간 사람, 이 시대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씌어지지 않은 역사가 어떻게 기억되고 굴절되고 묻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북사건 관련자들이 제작팀의 인터뷰에 응하기 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20여 년간 그들의 기억에 깊숙이 숨어들은 치욕을 털어내고 외롭고 긴 침묵으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줄거리
광주항쟁 한 달 전 1980년 4월21일부터 4월 24일까지 4일에 걸쳐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 영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상승에 항의해 광부와 그 가족 6000 여명이 들고 일어났다.
80년 동원탄좌는 10년 만에 자본금 5억원을 120억원으로 불리며 탄광의 이익을 독점 하였다. 광부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 달에 쌀 3가마가 고작 이었다.
어용노조 지부장 이재기는 최초로 복수 후보가 입후보 했던 1979년 4월 6대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무자격 대의원을 포섭하고 광부들에게서 걷은 노조비로 대의원들에게 기생 관광을 시켜주는 등 부정행각은 계속 되었다. 이를 고발한 사람은 이원갑 후보였다.
그리고 이듬해 봄 3월 이원갑 후보는 본격적으로 이재기 퇴진 농성을 시작했다.
4월21일 광부들이 사북을 점거하고 이덕수 순경사망 공수부대 투입설이 나돌고 관련자 색출을 명분으로 연행과 고문이 자행이 된다. 기자회견은 그동안 침묵을 지켜온 관련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고 그들은 그곳에서 80년 사북에서의 연행, 고문 등을 이야기 했다.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들은 많았지만 보도는 되지 않았다.
2002년 카지노의 완공과 함께 사북의 남은 탄광은 모두 문을 닫는다. 이제 이 도시에서 80년의 격렬했던 기억을 되찾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21년 만에 비로소 사북사건의 관련자들이 세상 앞에 섰다. 나의 얘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이들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자료출처 : "먼지 사북을 묻다" 홈페이지>
* 인권센터 사무실에 비디오 있습니다. 돌려주실 것을 약속하시면 무료로 빌려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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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1] "'제1회 전국장애인 대회에 부쳐'"
최옥란 열사가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외치면서 출범한지도 2년이 지나갔지만 이 사회는 여전히 사회의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로 절망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사회의 5대 차별철폐(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학력, 이주노동자)을 외치며 마치 인권 정부인냥 표방하지만, 인권은 한낱 정권을 치장하는 화장품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차별은 신자유쥬의 깃발아래 더욱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내며 삶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제 우리는 최옥란 열사가 돌아가신 3년의 시점에서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 장애인차별철폐투쟁선포! 제1회 전국장애인대회를 준비합니다.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면 최옥란 열사의 치열했던 삶에 비하여 참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또한 여전히 우리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전국장애인대회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투쟁은 그러하지 않았기에, 이제 우리는 그녀의 모범을 따라 장애인의 사회적 격리와 차별에 대한 철폐가 이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투쟁임을 확신하면서 이 시대의 아픔에 실천으로 더욱 다가서려 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투쟁으로 전국노동자대회라는 투쟁의 장을 만들어 왔듯이, 최옥란 열사와 장애해방열사들의 투쟁으로 전국장애인대회를 열어가려합니다. 이제 장애운동에서 최옥란 열사의 기일인 3월 26일은 노동운동에서 전태일열사의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최옥란 열사는 뇌성마비1급 장애여성이었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키울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가 된 그녀는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시작했습니다. 살기 위해, 또 아이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행되는 노점 단속을 꿋꿋이 견뎌내며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장애는 더욱 심해져 건강이 악화되자, 결국 노점상을 포기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대상자가 되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지급되는 급여는 그녀의 생활비와 장애로 인한 부담하는 병원비 등 추가비용을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녀는 더욱더 가난해져 갔습니다. 그러한 야만적인 현실을 폭로하고 기만적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개혁하기 위해 그녀는 추운 겨울 명동성당에서 노숙투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난과 장애, 여성과 이혼 그리고 아들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것은 그녀에게 질곡이었고, 그녀의 존재였습니다.
최옥란 열사는 장애여성으로써의 이중의 차별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평등세상의 꿈을 꾸며 투쟁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녀의 투쟁은 이제 장애인들을 투사로 만들어 갑니다. 장애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은 누군가 동정으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최옥란 열사는 투사였습니다. 언제나 투쟁의 현장에서 선봉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당당했고, 현장에서 옹골차게 심신으로 투쟁했습니다. 투쟁의 거리는 언제나 그녀를 기억하게 합니다. 종로에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혜화로타리 도로에서, 또 지하철 선로위에서 그녀는 사다리와 전동스쿠터를 쇠사슬로 묶고 드러누웠습니다. 그렇게 장애인의 이동권과 생존권을 외쳤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투쟁에 대하여 불법이든 합법이든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었기에 두려움 또한 없었습니다. 그녀의 투쟁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차별 받는 자들의 고통을 그대로 폭로해내는 투쟁이었습니다. 절실했고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죽음마저도 공권력으로 묻어버렸고, 노제도 지내지 못한 채 경찰들에 의해 화장터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투쟁도, 죽음의 의미도 점점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단지 어느 불쌍한 장애여성의 안타까운 죽음에 바치는 하나의 눈물이외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야만적인 차별의 칼을 보검처럼 휘두르며, 신자유주의의 절대가치를 신봉하며 자본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세상에서 장애인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었고 그 결과 야만적인 차별의 굴레 속에 개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의 투쟁과 죽음은 한낱 먼 기억처럼 이야기 합니다.
3월 26일. 그녀가 그 절망을 뒤로하고 간 지 3년째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제1회 전국장애인대회는 어쩌면 더 외롭고 힘든 싸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장애인의 목소리로, 장애인의 물리력으로, 연대의 힘으로 장애해방의 깃발을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꽂을 것입니다. 자본의 세상을 변혁할, 시대모순을 극복하는 ‘차별철폐’투쟁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장애인의 투쟁이 불쌍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차별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힐 것입니다.
이날 우리는 '05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을 조직하고 4월 20일 ‘장애인의 날’까지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선포하며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이 국가와 사회는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장애인을 체육관으로 모아 장기자랑대회를 열어주면서 장애인을 위로해 줍니다. 일년 365일 시퍼런 차별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그날 하루 위안잔치로 진실을 왜곡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월 20일을 장애인을 기만하는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 투쟁하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제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거나, 치료 받아야할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당당한 주체임을 확인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은 단순히 동정의 대상 또는 복지의 수혜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나갈 것입니다.
중증장애인이 이 사회의 당당한 주인이 되고, 또한 이들 스스로가 그러한 사회적 환경을 바꾸는 투쟁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혁명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위대한 혁명의 길을 제1회 전국장애인대회를 통해 선포하고 실천할 것입니다.
이제 노동자, 농민으로 대변되는 사회 변혁적 계층에서 장애인이 그 무엇보다 부끄럽지 않은 사회 변혁적 책임을 다하는 투쟁하는 민중임을 확인할 것입니다.
3월 26일부터 4월 20일까지 진행될 2005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투쟁의 전선에 동지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을 ‘차별에 저항’하는 연대의 전선으로 만들어야 가야 합니다. 차별 받는 자들의 권리를 향한 연대전선에서 그 시대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물리력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동지들, 투쟁입니다!
* 박경석(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공동집행위원장)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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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2] "'이땅은 우리 목숨, 끝까지 지킨다!'"
- 평택 팽성읍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
지난 3월 5일 미군기지확장이전반대 범국민대회가 쌀쌀한 날씨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물론 나도 그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실상 범국민대회의 내용도 잘 모르고 다른 일정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리 만큼 나와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미군”“자주”“통일”이라는 용어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타나는 문제들을 굳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시각으로 해석된 것만을 바라봐야 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모든 사람은 현상을 자기만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왜냐면 그게 편하니까....
우리가 보는 언론도 자기들의 언어로, 자기들만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운동가들은 우리들의 언어로 해석하는 대안언론의 창출에 대해 고민하고 인터넷을 반가워하지 않았는가.
나도 그래서 평택의 미군기지 싸움을 우리의 언어로 해석하고 싶다.
나타난 현상, 목적은 미군의 기지를 이전해 주기위해 우리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것이지만 사건의 본질은 국가 기구의 폭력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풍동이나 월곡동등의 철거민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닐까?
국가권력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힘없는 민중들의 주거권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닐까?
미군기지가 아니어도 국가는 언제가 그 땅이 필요하면 개발을 위해서든 공단을 만들기 위해서든 그곳에 사는 농민들과 빈민들은 내쫓고 그곳을 갖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군기지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싸움을 그들만의 자주통일을 외치는 세력만을 싸움으로 치부하려 든다. 물론 그들의 운동방식과 해석에는 동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때는 주최측에 따라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곤욕스러운 곳도 있다. 난감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싸움을 외면해서는 안될것이다. 평택의 싸움에 미군이라는 용어를 빼고 민중들의 생존권 싸움으로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아니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싸움에서 가장 큰 주제는 땅이다.
인도가 그렇고 아프리카도 그렇고 브라질의 토지없는 농민운동등도 그렇다
개발과 발전을 위해 가난한 이들의 땅을 빼앗아 그들을 강제로 어딘가로 이주시키거나 거리로 나서게 만든다.
팽성읍 대추리의 싸움도 이렇게 바라보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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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식 3] "'6th 안산이주노동자문화제'"
시간은 참 잘도 흐른다.
월말이 되면 웬지 모르게 맘이 조급하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다이어리를 붙잡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월말이 되기 전에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겠다는 다짐은 그때 잠깐 할 뿐...
긴 안목을 갖고 일처리를 하는 사람한테 과외라도 받아얄 듯 싶다.
무슨 일이든 어리버리 시작해서 흐리멍텅 마치니...
벌써 여섯번째 이주문화제를 마쳤다.
문화제라고 하기엔 참으로 빈약한, 그리고 그 동네 사람들에겐 너무나 낯선 풍경들이
여섯번이나 지났다. 1월과 2월은 너무 추워 실내에서 이뤄졌던 문화제가 간만에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공원에서 치뤄졌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안산엔 참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산다. 자신의 건강한 육신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왔으니, 당연히 노동자이다. 자본과 정권이 아무리 연수생이라 우겨도 이들은 노동자이고, 법적으로 노동 3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도 이들은 노동자이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노동자이다. 단속추방에 동물같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이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안전장치도 제대로 없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잘려나간 손가락은 부지기수다. 잘려나가고 깨어지고 부서진 것이 어디 손가락 뿐이랴...
한국 사람들에게 이들이 손가락을 잘려가면서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잘려나간 것들을 다시 붙일 수는 없겠지만, 낯선 땅에 와서 주눅들어 사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하는 그 길에 함께 하고 싶다. 왜? 인권이 존중받는 세상을 염원하니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갈구하니깐!
이번 문화제 때는 안산노동인권센터, 민주노동당상록위원회, 철폐연대, 민노총 안산지구협 의장, 경기본부 이상무 본부장 동지들이 함께 해주셨다. 이상무 본부장님은 힘찬 말씀과 민들레처럼도 불러주셨다. 게다가 후원금까지 주셨다. 방글라데시 까셈 동지가 '있을때 잘해'를 개사해서 멋드러지게 불렀다. 열심히 연습한 만큼 잘 불러주었다. 다음달엔 '어머나'가 예정되어 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 문화제를 꼭꼭 챙기는지민주 동지는 늘 든든한 선배다.
안산노동인권센터, 정면돌파, 안산외노센터, 안산노힘, 민주노동당 상록위원회 동지들과 이주운동에 힘을 주고자 멋도 모르고 시작한 문화제가 비로소 자리를 잡아간다. 각 단체들의 역할을 내부적으로 좀 더 고민한다면 더욱더 나은 우리들의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멀지 않았다.
자, 힘들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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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3월]'3.8 세계 여성의 날'
1908년 3월 8일. 공항에 의한 경기침체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미국 섬유여성노동자들 수 만 명이 뉴욕 룻저스 광장에서 빵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1909년 미국 전지역 2만여 여성노동자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여성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조차도 없는 완전한 무권리 상태였다. 때문에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으며,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착취와 억압을 저지할 길이 없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성별, 종교, 민족의 차별을 두지 않는 보통선거권을 주장하였다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여성의 인간다운 권리를 찾기 위해서 선차적인 과제였다.
저임금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과도한 작업량 및 위험한 작업환경 등 가혹한 노동착취를 중단할 것과 여성과 임신에 유해한 작업금지, 산전산후 8주간의 출산휴가 등 모성에 대한 보호조치들,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바로 이러한 힘이 세계여성의 날을 탄생시킨 것이다.
1910년 전세계적으로 성장한 여성노동자들은 미국섬유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된 3.8 시위를 매년 '세계여성의 날'로 기념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매년 3월 8일이 되면 세계 각국의 수천 수 만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집회와 기념식을 갖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거리를 행진하며 '여성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실천을 결의하는 날'로 기념하며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3ㆍ8 세계 여성의 날 기념대회는?
수 천 년의 복종과 체념을 거부하고 착취의 종말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벌여왔던 3.8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노동자의 손으로 쟁취되었던 만큼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이날은 세계 여성이 하나로 단결하고 연대하는 날이다. 3.8 세계 여성의 날은 나라와 민족은 달라도 똑같이 자본가에 의해 억압당하고, 법적으로 불평등하며, 사회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이 완전한 해방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연대하는 날이다.
자본가는 이윤이 있는 곳이라면 그 지배를 한 나라에 국한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한국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그 결과 각국의 여성들은 거의 비슷한 억압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자본가에 대항하는 투쟁은 이미 한 나라, 한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따라서 3월 8일은 각국의 여성노동자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여성의 생존권과 노동권,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해 단결하고, 연대할 것을 천명하고 세계 여성이 하나됨을 확인하는 날이다.
둘째, 여성이 권리의식과 정치의식으로 자각하고 조직적으로 단결하는 날이다.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많은 여성이 직장으로 나오게 되고, 더구나 경제위기가 오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그 동안 가정에 고립되어 인내와 순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개별화되어 살아왔던 여성들이 비로소 정치적 의식에 눈뜨고 사회와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야겠다는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수많은 경험과 함께 알게 되었다. 권리는 쟁취하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의 힘이 아니라 조직된 힘으로 단결하여 싸워야만 현실화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치아래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단결해 나갈 것을 결의하는 날이 바로 3월 8일이다.
셋째, 3월 8일은 완전한 남녀평등의 과제를 실현해 나가는 날이다.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이중 삼중의 굴레 속에서 고통 받아온 여성들이 그 어떤 이유로도 차별 받지 않는 것, 즉 사회적 노동에 평등한 참여와 모성보호 확보, 그리고 육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 등 여성이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주인으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고 책임지는 완전한 남녀평등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과제를 요구하고 쟁취해 나가는 날이다.
내용과 형식은 달라도 여성의 강고한 연대와 투쟁의 도도한 흐름은,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5월 1일이 전체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를 모아내는 날이라면 3월 8일은 여성과제를 제출하고 여성노동자들의 한해를 시작하는 결의의 날이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정당과 공공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ㆍ8 대회에서 역설한 한 여성노동운동가의 말대로 3ㆍ8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기억하고, 당신과 나의 투쟁을 더하는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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