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리 섬진강 중에서도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동은 참으로 복받은 땅이다. 하동은 국내에서 제법 큰 ‘배고을’이다. 물론 전라남도 나주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배밭이 72만평이나 된다. 해마다 4,900t, 76억원어치의 배가 출하된다. 물이 잘 빠지는 사토질인 데다 햇살이 많이 들어 배가 실하고, 크고, 달다. 일제 때부터 심은 배나무는 배의 과즙이 많고 큼지막한 신고배가 주종이다. 하동의 배밭은 섬진강변 국도 19호선 길가에 흩어져 있다. 하동읍을 지나 만지들판 일대가 대표적인 과수단지. 벚나무가 꽃송이를 떨어뜨리고 새순을 내는 요즘 배꽃이 앞다퉈 피기 시작했다. 어디 몸을 두지 못할 정도로 인파를 불러들였던 벚꽃철이 끝나자마자 배꽃이 수줍게 피어나는 것이다.
배꽃이 피면 봄은 바야흐로 절정이다. 배꽃은 곱고 화사하다. 가지를 덮을 정도로 수북하게 달라붙은 꽃송이. 매화와 달리 배꽃은 연초록 새순과 함께 꽃을 피운다. 이제 막 피어난 꽃과 순이 어우러진 모습이 참하고 탐스럽다. 배꽃과 함께 자운영도 흐드러지게 핀다. 자운영은 깨알처럼 작은 꽃이다. 보랏빛이라고 해야 할까, 검붉다고 해야 할까. 점점이 작은 꽃잎들이 배꽃과 대조를 이룬다. 제 몸집보다 작은 꽃잎을 열고 꿀을 따내려는 벌의 몸짓이 우스꽝스럽다. 자운영은 옛날부터 농부들에겐 친근한 풀꽃이었다. 풀베기 어려운 겨울철에 쇠꼴을 먹이려고 논밭에 심었던 한해살이 풀. 영농이 기계화되고 농약 사용량이 많아지면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는가 싶더니 2~3년새에 다시 퍼지고 있다. 자운영은 잡초처럼 퍼져서 배나무에 지장을 주지 않고 꽃을 피우고 난 뒤 물먹은 솜처럼 금세 시들어버린다. 시든 꽃밭을 갈아엎으면 자연스럽게 퇴비가 된다. 최근들어 자운영 농법이 비료를 쓰지 않고 지력을 키우는 친환경 농사법으로 알려지면서 구례와 하동 등 섬진강 일대의 농부들도 일부러 자운영을 심는다고 한다. 악양 들판의 4월은 푸르름이 가득하다.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넓은 들판. 수십만평의 들판 사이 사이에 청보리밭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 일찍 수확을 하는 맥주보리. 쌀보리는 농협에서 수확하는 수매량이 해마다 줄고 있기 때문에 주류회사에 납품하는 맥주보리를 심는다. 지리산을 넘어온 산바람이나, 하동포구에서 달려드는 강바람이라도 불면 보리들판은 호수에 파문이 일듯이 출렁거린다. 들녘만이 봄인가. 봄은 강물 위로도 흐른다. 섬진강의 봄은 4월 중순 재첩잡이로 무르익는다. 하동읍 신기리, 목도리, 비파리, 고전면 신월리, 광양 진월면 일대는 말 그대로 ‘재첩 밭’이다. 아직 시린 기운이 남아있지만 아낙들은 그리 깊지 않은 모래톱을 찾아 반쯤 몸을 담그고 재첩을 걷기 시작한다. 조금 깊은 강 한복판에서 모랫속의 재첩을 건져올리는 재첩배도 보인다. 재첩을 잡는 집은 750여가구. 옛날엔 벼농사가 으뜸이었고 부쳐먹을 농토가 없는 사람들은 재첩을 잡아 아이들을 고등학교, 대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재첩잡이가 벼농사보다 낫다. 재첩 생산량은 지난해 700t 정도. 보통 800~900t 정도 잡히는데 비가 많고 기온변화가 심해 수확량이 줄었다. “일본 사람들도 섬진강 재첩을 으뜸으로 쳤어요. 맑은 물의 모래밭에서 자라 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수입산 재첩으로 끓인 재첩국은 식으면 비린내가 나는데 섬진강 재첩국은 냄새가 전혀 안나거든요.” 조병옥 하동군청 농수산계장(52)의 말이다.
봄날 섬진강 여행에서 햇차를 빼놓을 수는 없다. 화개골은 신라 때부터 차를 심었다는 차마을. 현재 등록된 제다업체만 30곳이 넘고, 소량으로 차를 덖는 찻집도 많다. 요즘은 벼농사를 포기하고 논에까지 차를 심어 구석구석 차밭이 들어섰다. 하동군의 연간 차 판매량은 1백80억원 정도. 첫물차가 나오는 4월10일쯤부터 6월초까지 차를 덖는다. 집집마다 제다법이 다르고 차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고집쟁이들이 내놓은 은은한 햇차 한잔. 찻잔 안에 지리산이 담겨있고 섬진강이 흐른다. 배꽃과 청보리밭, 재첩과 햇차가 이어지는 4월의 섬진강. 그대는 이렇게 긴 봄을 제대로 누려본 적이 있으신가. ▲여행길잡이
▶교통 호남고속도로∼전주IC∼국도 17호선∼전주·남원 산업화 국도. 남원 춘향터널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고가도로를 타고 구례 방향을 접어든다. 섬진강변길 국도 19호선을 따라 달리면 경남 하동. 악양들판과 하동읍, 배밭이 차례로 나타난다. 전주·남원간 산업도로는 교통사고가 많은 곳이라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진주까지 간 뒤 남해고속도로로 하동으로 갈 수도 있다. 국도 19호선∼하동읍∼ 평사리 악양 들판을 거치게 된다. ▶볼거리 첫물차를 마무리할 즈음인 5월20~23일까지 하동야생차축제가 열린다. 햇차시음회, 관광사진전, 다례시연, 명차선정, 민박체험, 막사발 빚기체험, 차잎따기 등의 행사가 이어진다. 하동군청(880-23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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