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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위한 준비>
◎ 졸업은 했는데
○ 교대를 졸업하다.
1970년, 딴에는 이 나라 초등교육에 헌신하고자 하는 참으로 원대한 꿈을 안고서 진주교육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말인즉 그렇게 시작을 했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가정형편상 4년제 대학은 아예 나와의 인연이 없는 것으로 여겼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5,6학년을 담임했던 선생님의 늠름했던 외모와 정말 인격적인 면들이 오히려 내게 준 큰 영향이었다.
스스로 미니대학이라 이름 붙였던 2년간의 대학생활. 내게는 그래도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1학년 때 학보사 기자 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여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고, 2학년 적에는 편집국장의 직함을 갖고 어느 부서로부터도 구속받지 않는 학생 간부로서의 역할도 하면서 대학생활을 더욱 보람있게 보내기도 하였다.
1972년은 내 생애 사회로의 정식 첫 발을 내디디는 해였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의 열기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대단한 열풍으로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들이 그득하던 시대 상황이었다.
내가 살던 경남 사천군 곤양면 묵곡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3월 달에 기다리던 발령이 나지 않아서 노심초사하며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부모님께 지은 죄가 너무 커서 하고 싶기 그지없는 여행이란 꿈도 꾸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 아쉬운 인생경험 포기
그러던 중 종형의 권유로 진해 군항제의 써커스단 기도 일을 볼 기회가 생겼다. 당시 종형은 진해 군항제에서 써커스를 운영할 업자에게 자본을 투자하게 되었고, 그걸 계기로 한 측근을 심어 둠으로써 그들의 수입을 체크할 수 있으리란 계산에서 나를 천거하셨던 것이다.
썩 내키는 일은 물론 아니었지만 집을 떠나서 잠간 동안이나마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진해로 향했다. 종형의 설명대로 현장을 찾아가 보니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와 손님을 끌기 위한 목쉰 외침들은 나를 대번에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 시간 남짓 주위를 서성이던 나는 그들을 한 번 만나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그들의 틈에 끼어서 떠들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그 자리에 함께 끼어서 야바위에 가까운 활동을 잠시나마 했다면 지극히 내성적인 내 성격에도 작으나마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든다.
진해까지 간 김에 군항제 구경은 실컷 했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언제가 되든 조용히 발령의 날을 기다리며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 참으로 소중한 집안 일
집에서는 그저 조용히 쉴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농촌의 봄은 그야말로 씨 뿌리는 시기였다. '一年之計 在於春'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연일 계속되는 농사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농사일은 그 전에도 해 왔던 일이어서 내게 그리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거쳐 교육대학에 다니는 동안 쉬었던 일이고, 앞으로의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정말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일이 손에, 몸에 착착 달라붙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의 열풍은 초가 지붕을 걷어내고 스레트로 바꾸는 일, 토담이나 돌담을 허물고 블록 담을 설치하는 일, 그리고, 마을길을 넓게(고작 인력거나 다닐 길이지만) 고치는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실제로 나도 하루 400장씩의 블록을 찍고, 담을 새로 쌓는 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지금은 남의 집이 되고 말았지만 1년에 한 두 번 명절 때 그 집 담을 볼라치면 내가 해 내었다는 믿음은 가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고작 두 달 동안의 발령 대기(待期)는 내게 여러 가지 시험도 주었다. 어지럽고 참담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스스로 추스리는 법과, 주어진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법, 그리고, 발령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다진 것 등 어쩌면,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나에게 짧은 그 기간은 나를 위해 운명적으로 필요했던 기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발령을 기다리다가, 교직에 계시던 형님이 당시 도 교육위원회에 문의하여 5월 발령이 확실하며, 앞으로 남은 인원이 내 앞에 세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기다리게 되었다. 앞에 전개될 일을 알고 기다리는 것과 맹목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차이를 갖는 것인지는 이래서 체험으로 터득할 수 있었던 셈이다.
○ 여행을 통하여
담쌓는 일이 끝나고 나서 5월 1일이 되었으나 내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시의 그 초조한 기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날짜는 계속 흘러 3일이 되어도 소식이 없어서 5월은 틀렸구나 하고 기다리던 중에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교육대학 재학 시 친하게 지냈던 부산에 사는 친구(교대 동기 권 채)가 똑 나만큼이나 무료했던지 함께 여행을 하자고 했다.
친구의 사연 중에 '어쩌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자유로운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구절이 인상적이기도 했는데, 이는 발령을 받고 나면 퇴직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여행의 기회는 만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졸업식에서 공로상(재학 시 대학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받은 넥타이핀을 팔아서 눈물겨운 여행비를 마련하여 집을 나섰다. 부모님도 갑갑해 하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얼마간의 돈을 주시면서 다녀오라고 하셨다.
당시는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시대여서 진주에 도착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시내 모처에서 만난 둘은 진주의 친구(교대 동기 이희구) 집에서 1박을 하고, 함양으로 가서 함양 읍내의 또 다른 친구 (교대 동기 박기태)집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모두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인지라 의기 투합도 잘 이루어졌고 함께 보내게 되는 시간들이 그저 즐겁기만 하였다.
그 후 부산으로 가서는 부산 친구네 집에서 며칠을 묵고 집으로 돌아오니 혹시나 하던 반가운 소식은 오지 않았다. 피곤하여 하룻밤을 푹 잤으나 더욱 답답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날로 남해 선배가 근무하는 학교로 무작정 찾아갔다. 내게는 남해 여행이 처음이었다. 계절적으로 신록이 우거져 가는 가운데 섬으로 들어서는 일이 참으로 기분 좋은 순간이기도 했다. 하동 노량에서 차를 내려 도선에 옮겨 탔고, 남해 노량에 닿아서는 다시 버스를 탔다. 차와 사람이 함께 건너는 참으로 희한한 경험을 직접 할 수 있었다. 그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다.
◎ 정말로 기다리던 발령
그런데 정말 반가운 소식은 거기에서 받았다. 남해 교육청 관내에 4명의 신규 발령자가 왔다는 소식이었다. 임용관계 서류를 작성할 때 남해로 희망을 했던 사실을 상기하며 선배를 통하고 교육청을 통해 알아본 결과 나도 남해에 발령이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아 선배네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전해 주시는 엽서에는 '남해군 교육청 관내 국민학교 근무를 명함'이라는 고무인의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참으로 공중에 뜬 듯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내게 다시 전해진 전보 한 통, 그것은 남해 교육청에서 보낸 것이었다. 13일 오전에 교육청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몇 날 여유 만만한 기분으로 집안 일을 도우면서 날을 보냈다. 한 편으로는 5월 1일자 발령인데 어째서 13일에 부임을 하라는 것인지 하는 의아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72년 5월 13일 토요일. 남해 교육청에 갔을 때는 함께 발령이 난 다른 친구(동기 김성우)도 와 있었다. 인사 담당 장학사를 통하여 학무과장실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나니 과장님께서 직접 사령장을 건네 주셨다. '도마 국민학교 근무를 명함'이라고 적힌 사령장을 읽고서야 내게는 행운이 겹쳐서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령 전에 두 차례의 남해 여행을 하는 동안 읍에 들어서기 4Km쯤 전에 도로변에 위치한 학교, 이름이 도마라서 더욱 인상에 남던 학교, 마음속으로 이런 학교에 발령이 나면 교통도 무척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했던 바로 그 학교였다.
내게는 참으로 역사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 교직에의 발령은 남다를 것 없는 약간의 부산함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1. 첫 학교 : 남해 도마 국민학교(1972.5.1∼1977.9.30)
◎ 처음 몇 날의 일들
○ 초임지 도착
5월 13일 토요일 11시경에 첫 발령지인 남해 도마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지만) 정문을 들어섰다. 13학급의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골 학교,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내 교직생활의 첫 발을 디딜 곳이 바로 거기였던, 참으로 역사적인 시작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별로 깊은 생각을 할 여유 없는 가운데……
쉬는 시간이었는지 제법 많은 수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공차기, 고무줄 놀이 등을 하다가 낯선 사람의 출현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들 있었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선생님들이 앉아 계셨는데, 아이들과는 달리 나의 신원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선뜻 새로 오시는 선생님이냐고 물으시며 교감선생님 앞으로 안내를 해 주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의 교감선생님은 윤채두 교감선생님이었다.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지금은 기억도 아련한 몇 가지를 질문하시고는,
"김 선생님은 4학년 2반을 맡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담임할 학년을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이란 호칭도 그렇고, 부모님 연세와 비슷한 교감선생님의 깎듯한 공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가운데 이게 사회 생활의 첫발을 딛는 것이고, 나는 아직 적응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감선생님은 나를 교장실로 안내 하셨다.
적당히 뚱뚱하신 교장선생님은 이용수 교장선생님이셨다. 나의 신상에 관한 교감선생님의 설명을 들으시고는 자리를 권하신 후
"교직이란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적은 직업일세"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교직의 수행에 대한 몇 가지 조언을 주셨는데, 기억에 지금도 생생하고, 나름대로 지켜 가고 있는 말씀은 '윗사람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교사가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어서 나의 환영을 겸한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10명이 넘는 교직 선배들이 고맙고 황송하게도 모두들 관심을 보이며 말들을 걸어 왔다.
식사가 끝나고 토요일 오후의 봄날, 모두들 나름대로의 일과를 위해 헤어진 후 교감선생님과 함께 학구내의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하숙집을 구하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구한 하숙집에서 쉬면서 들뜨기만 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시간을 보내다가 좀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가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녁때가 되어서 딴엔 기상천외한 생각으로 챙겨간 출석부를 외웠다. 월요일 아침에는 4학년 2반 교실이 온통 난리가 날 것이다. 선생님이 아닌 귀신이 부임했다고……
다음날은 5월 14일 일요일, 할 일 없이 학교에 나갔다가 일직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 하루해가 저물게 되었다.
<첫 출근의 감회>
5월 15일, 학교에 출근하니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들 부산하게 바쁜데 나만 할 일이 없어서 앉아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아직 내게는 사무 분장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함께 발령을 받고 오늘 아침에야 부임한 교대 동기 이복자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식으로 담임을 배정 받은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출석을 불러 애들을 놀래 주려고 했던 나의 계획이 깨끗하게 뒤틀려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3일에 교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4학년 2반이 아니고 5학년 1반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왜 바뀌었는지는 후에 안 일이지만 밝히기가 곤란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드디어 전교 조례 시간이 되었다. 5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의 앞에서 부임인사를 해야 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인사, 참으로 난감한 가운데 인사를 하고는 담임으로 배당된 5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65명, 본교에서는 가장 많은 학급 인원이었다.
공부시간에는 실습활동을 통해서 익히기는 했어도 아직은 체계가 서지 않은 교수-학습활동을, 처음 하는 사람의 주무기라 할 수 있는 열성만으로 엮어 나갔다. 아이들의 반응은 참으로 좋았다. 아마 처음 보는 젊디젊은 사람의 설명과 이야기들이 그들에게는 신선함과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뭐 저리 어설픈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하는 조소로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훗날 아동들의 심리를 경험으로 터득한 후에 당시의 어린이들의 마음을 '기대'쪽으로 결론 지었다.
<출근 첫날이 스승의 날>
솔직히 시간의 흐름이 정신없는 가운데 오전이 지나갔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교무실로부터의 안내 방송이 들려 왔다. 아동들을 모두 하교시키고 교무실 옆 6학년 1반 교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역사적일 수밖에 없는 내게 지나치는 일들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의아하게 만들기만 하였다. 동 학년 선생님께 의논했으면 그토록 궁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될 일을 어리석게도 혼자 궁금해하면서 지정된 교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다른 선생님들은 반이 넘게 와 계셨고, 한 눈에 학부모로 보이는 젊은(그래도 나보다는 다 많겠지만) 아주머니들이 음식들을 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그제야 동 학년 김영빈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오늘이 바로 스승의 날입니다."
라고 하셨다. 고작 4시간의 어설픈 수업을 하고 스승의 날을 맞이한 나는 몹시 황송한 가운데 어쩌면 행운아일 수도 있었다.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내 반에 있는 어린이들의 어머니는 애 이름을 들먹이며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들을 했다.
사실 나는 그 때 이름만으로 그 아이를 떠올린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그러면서도 천연스럽게 대꾸를 했던 자신이 지금 와 생각하면 크게 느끼한 가운데에서도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친구 어머니를 만나다>
술잔이 오가고 하는 동안에 나의 짧은 술 실력은 이내 바닥이 났다. 얼굴은 흡사 무안 당한 사람의 그 것 마냥 붉어져 있는데 연세 지긋이 드신 어느 어머니께서 내게 오셔서 옆자리에 앉으셨다. 아이는 6학년이고 그 아이가 막내라고 설명을 하신 뒤에 큰아들이 금년에 진주 교대를 졸업했다고 말씀을 하셨다. 말씀을 듣고 보니 내 동기의 어머니이신 셈이었다. 김봉옥이라고 지금은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근무하는 친구지만 도마초등학교가 바로 그 친구의 모교였고 그의 막내 동생이 6학년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회식은 파하게 되었다.
자녀들을 위하여 고맙게도 선생님들을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대접하시는 학부모들의 마음씀이 교직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내게 정말 또렷한 인상으로 각인이 되어져 가고 있는 셈이었다.
촌지니, 치맛바람이니 하는 말들이 우리 교사를 힘들게 하는 세태를 나는 그 때 진정 몰랐었다.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한 모습으로만 받아들여졌다.
회식이 끝나고도 친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고, 내가 학교의 선생님이란 이유로 말씀을 낮추지 못하셨다. '친구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 아들의 친구는 아들'이라는 논리로 어머니를 설득하여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시기로 했고, 집에 자주 놀러 오라는 말씀도 하시게 되었다. 집에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셔야 겠다는 어머니를 교문 밖까지 바래다 드렸다.
<출근 첫 날에 받은 봉급>
다시 회식 장소에 갔더니, 당시 경리를 맡은 장기찬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오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교무실에 가니 봉급을 받아가라고 하셨다. 정말로 내게는 역사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고작 4시간의 학습 지도 댓가로 스승의 대접을 받았는데, 이제는 봉급을 받으라니 참으로 준비되지 않은 내 머리로는 설명조차 어려운 것이 그 당시의 거짓 없는 심정이었다.
2만 9천 8백 7십 원, 내 첫 월급 액수였다. 그 당시 내 한 달 하숙비가 4천 원이었고, 늘 피우는 은하수 담배가 5십 원 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우스운 얘기였지만 2만 9천 8백 7십 원이라는 내 첫 월급 액수는 교장선생님보다도 많은 액수였다. 3월부터 교내에서 선생님들이 10만 원 짜리 계를 조직하여 그 곗돈을 제하고 나니 교장선생님의 월급 액수도 계에 들지 않았던 나보다는 적었던 것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하숙집에 와서 자리에 누워서 하루 동안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역사적인 일들이 내게 다가 왔었다는 생각만 날 뿐 완전히 붕 뜬 기분으로 잠을 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직원의 봉급날이 매월 17일인데 당시는 왜 15일이었는가 하면, 1971년 12월부터 매월 15일을 민방공 훈련의 날로 지정하고 꼭 정부 주도로 전국적인 민방공 훈련을 실시하는 바람에 사실상 봉급일과 겹쳐짐으로써 업무의 처리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몇 달 뒤부터는 봉급날이 민방공 훈련에 밀려난 셈이었다. 그래서 17일이 봉급날이 되게 되었고, 그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 코피를 쏟아 보고
혼자 객지에 나와서 완전 미지(未知)일 수밖에 없는 교직생활을 어떻게 영위해야 할까 하는 불안감과 스스로 이제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에 참으로 묘한 감정이 이는 가운데 날은 밝았고, 다음날의 일과는 어김없이 시작이 되었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랐고 학업을 위해 진주에서 하숙생활을 한 것을 빼고는 언제나 생활의 무대가 농촌이었기에 당시의 환경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 반 아이들과는 쉽사리 친숙할 수 있었고 그만큼 나도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다섯 시간의 학습지도를 정말로 전력투구했다. 익숙하거나 요령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오직 열성 하나만으로 하루해를 완전히 보낸 것이다. 그것은 노련한 교사가 볼 때 흡사 불도저가 험한 산을 깎듯이 어쩌면 무모하기만 한 그런 일종의 돌진이었다고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업시간은 그렇게 보냈고, 사무분장이란 걸 받았다. 내게 맡겨진 사무는 도서, 생활, 환경, 문예였다. 지금 생각하면 초임교사에게 너무 많은 일거리를 대책 없이 맡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는 천지 분간조차 못하는 내게 당연한 일거리들로만 다가왔었다. 도대체 다른 선생님들은 어떤 업무 분장으로 어느 만큼의 어떤 종류의 일들을 하시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더욱 내게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내게 맡겨진 그 일들은, 그 일들을 맡고 있던 중견 선생님이 전근을 가시고 고스란히 내게 맡겨졌기 때문에 내게는 벅찼다는 얘긴데, 다행히 전임 선생님이 업무를 정말로 알뜰히 기획하고 추진을 해 오셨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게 일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오후에 업무들을 챙겨 보면서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퇴근 시간이 되었다. 하숙집에 가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는 만감(萬感)과 싸우며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고, 닭 우는소리에 잠을 깨어 현실로 돌아와서는 교재 연구를 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면 사전에 교재를 한 번 챙겨 보아야겠다는 자각에 의한 움직임이었는데 이게 바로 교재연구라는 일이었던 것이다.
식사 할 식당은 따로 구해 두었던 나는 시간에 맞추어서 세수를 하는데 머리가 띵한 느낌과 함께 콧등 부분이 이상하여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보니 불그레한 액체가 손에 묻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코피였다. 물과 섞여 희석이 됨으로써 분홍빛이었지 실은 진홍의, 아이들이 보았다면 당연히 울음을 터뜨릴 그런 피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싸움을 하여 코피를 쏟아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좀 자라서부터는 코피라는 것은 모르고 살아 왔었는데 다시 콧구멍 입구를 만져본 손에는 선명한 붉은 색깔의 피가 묻어 났다. 솔직히 별로 두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이상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천직으로 삼은 교직의 수행이 그렇게 만만하게 볼일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는 참으로 내겐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 그런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날 이후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는 겪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 선배 선생님들과 나눈 이야기 도중에 그날의 코피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가운데 더러 있었다. 교직 생활을 처음 시작하여 코피를 쏟은 사람, 즉, 나와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열성을 쏟은 사람이고, 나머지는 처음에 상당히 요령을 알고 시작을 했거나, 건성으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참으로 내게만 유리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 본교가 모교인 친구들 이야기
발령을 받은 지 일주일쯤 뒤였던가 새벽같이 학교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마침 첫 숙직을 하고 막 일어나려던 시간이었기에 쉽사리 방문객을 맞을 수 있었는데 만나보니 교대 동기임을 알 수 있었고, 이미 스승의 날에 어머님을 만나 뵐 수 있었기에 그리 낯설지는 않았었다.
김봉옥(74년부터 본교로 전입을 해 와서 함께 근무하였던)이란 그 친구는 학구내의 이어리라는 마을이 고향이고, 자기 막내 여동생이 6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미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이기는 해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그의 모교이고, 자신의 근무지는 면내의 갈화 초등학교라고 했다.
운동장을 거닐면서 많은 애기를 나누었다. 처음인 친구의 방문은 그런대로 내게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서로의 일과가 기다리고 있기에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친구를 보내고 나서는 혼자서 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객지 생활의 어려움을 가끔은 덜 수 있겠다는 생각과 나의 움직임들을 깊은 관심으로 예의 주시할 사람이(그의 모교이기 때문에) 있다는 사실은 내게 일종의 채찍이 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교대 동기 중에 도마 초등학교 출신으로 고재균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집이 학구내의 도산 부락이라고 하였다. 꼭 한 번 그 친구의 집이 있는 도산 부락에 갔을 때 만날 수가 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거제군 어느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껏 소식이 없는 친구 중의 한 사람이다.
-훨씬 뒤에 들은 얘기지만 그 친구가 유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정말로 눈시울이 붉어졌던 경험이 있다.-
◎ 톰박제(祭)에 얽힌 이야기
교직에 첫 발을 내디디고 상당한 시일이 흘렀는데도 아직은 병아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일들은 자꾸자꾸 일어났다. 그 중의 한 사건이 바로 '톰박제'라는 것이었다. 톰박이라는 단어조차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그 말의 뿌리부터 찾아보면, '톰박'이라는 것은 흔히 '목침'이라고 하여 시골 사랑방에서 베고 자는 나무토막 베개를 이르는 말인데 그것이 남해 토박이말로 '톰박'이라는 것이고, '제'라는 말은 제사를 지낸다는 이야기로 목침을 신성시하여 모셔 놓고 제를 올린다는 어찌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안이지만 그건 어렵게 이야기했을 때의 일이고, 쉽게 얘기하면 전입해 온 교사가 일종의 전입 신고로 전입 턱을 낸다는 통과의례를 말하는 것이었다.
학교 숙직실에 베개로 쓰고 있는(물론 정식 베개도 있고) '톰박'을 모셔 놓고, 엄숙한 제관의 지시대로 제를 올리고, 전입교사의 신상이나 소지한 특기, 교직관, 인생관 등등을 차례대로 털어놓게 함으로써 쉽사리 어울려 하나가 되게 한다는 참으로 좋은 도마만의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정작 부임한 초임교사가 우둔한 탓으로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학년이나 학기초가 아닌 어정쩡한 5월 중순이었고, 교직경력이 전혀 없는 신임교사 둘의 힘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선배 선생님들의 배려 때문에 하루 이틀이 지나는 동안에 실시를 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두 파의 갈등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막상 시일이 지나고 보니, 그런 사실을 누가 이야기를 해 줄 것인가 하는 것조차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비롯하여 나와 함께 발령을 받은 여 선생님이 고깝게 받아들이면 어쩌겠느냐는 생각에 그걸 일종의 총대라고 여겼는지 서로들 안 메려고 발뺌들을 하는 가운데 상당한 시일이 지났던 것이다.
결국 그 총대는 동 학년 선생님이 메게 되었고, 우리(신임교사 둘)는 의논을 한 결과 읍내의 사천집이란 음식점에서 걸게 한 턱을 내기에 이르렀다. 시일이 지나버렸다는 이유와 약간은 번거로운 절차라는 발전적인 인식에 의하여 '톰박제' 본래의 모든 절차들을 생략하고, 교장선생님의 때늦은 환영사와 나의 신고사에 이어 회식을 하고 '톰박제'를 끝내게 되었다.
마치고 나서는 이구동성으로 절차의 생략이 잘 되었다는 의견들을 말했고, 다음해부터는 처음부터 모든 번거로운 절차들을 생략한 '톰박제'를 지내게 되었다. 말하자면 신고식 문화의 일대 변혁을 일으킨 장본인이 된 셈이다.
◎ 남해 삼 수 이야기
당시 남해에는 존함의 끝에 '수'자가 붙는 세 분의 교장선생님이 계셨다. 모두 고인이 되신 이 마당에 그분들의 인격에 흠이 생기지 않으리란 계산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사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유자, 치자, 비자를 일컬어 남해 삼자라고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세분의 교장선생님들, 그것도 당시 생존은 물론 현직에 계시는 분들의 이야기라 더욱 그랬었다.
남해 삼 수란 태생이 남해이신 세 분의 교장 선생님들인데 당시 도마초등의 이○수 교장선생님, 해양초등의 박○수 교장선생님, 그리고 한 분은 사천으로 나가셔서 동명초등학교에 계시는 최○수 교장선생님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 첫 부임 당시의 교장이 이○수 교장 선생님, 두 번째가 박○수 교장선생님이니까 나는 졸지에 유명하신 남해 삼 수 중의 두 분을 초임부터 계속하여 모시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겹쳐진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는 남해 삼 수라는 분들의 실태가 곧 남해 교육의 실태를 대변한다고들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남해 교육의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엮어져 가고 있는 남해 교육의 적어도 한 단면은 알 수 있는 화제였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당시 남해에 근무하는 교원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한껏 자아내게 하는 내용이었다.
대체로 이런 이야기는 세 분의 교장 선생님들이 평범한 분들이라면 애당초 성립이 되지 않을 이야기이다. 뭔가 남다르고,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분들이기에 그런 화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당시 내가 모시고 있었던 이○수 교장선생님은 학벌 제일주의 이셨다. 따라서 당시는 초등교사로서 2년제 교육대학을 나오면 최고로 대접을 해 주셨다. 그리고, 새로 부임하는 교사들에게는 꼭 영어 시험을 치루게 하셨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비료 포대에 적혀 있는 영어를 읽어보라고 시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대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이 시험을 치루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도 이 시험은 면제였다.
아시다시피 비료포대에 쓰여지는 영어라는 것은 대개 대문자로만 나열이 되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유창하게(?) 읽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더듬거리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 중의 한 분이 어느 수산 전문학교 출신이었는데, 더듬거리자 이○수 교장선생님의 말씀인즉,
"수전(水專)에는 영어를 안 하는가?"
무안하기도 하고 화도 났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개는 참고 마는데 그 분은 좀 성질(?) 있는 분이었던지 곧바로 발끈하여 고성이 오가는 사건이 있고, 그 후 좀 주춤 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박○수 교장선생님의 이야기.
박교장 선생님은 이○수 교장선생님의 후임으로 도마 초등에 부임하신 분이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 교관으로서 상당히 악명이 높았던 분이다. 공교롭게도 그분의 그 악명에 의해 숱하게 두들겨 맞은 장본인들이 도마 초등학교의 학부형들이었다. 따라서 박교장 선생님의 부임 소식을 듣고서 이들을 갈았다. 심지어 어떤 부형은 기회를 봐서 앙갚음을 단단히 하겠노라고 벼르는 이도 상당수 있었다.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교사들은 상당히 걱정이 되는 일이었다. 행여 학교와 학부모간의 그 좋던 분위기가 깨어져서 교육의 수행에 추호라도 차질을 빚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임을 하고 보니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듯 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했던가 옛 스승을 면전에 대하고 전에 맺어진 사제지정을 무너뜨리고, 막가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행동일 것이다. 또, 학부모로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약점(?)도 크게 작용을 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학부모들의 움직임은 오히려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학교를 지원해 주고 학교의, 교육의 발전을 위하는 일에는 더 앞 다투어들 나서 주었다.
그렇다면 박교장 선생님의 무엇이 그를 남해 삼 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말인가?
박○수 교장 선생님은 고집이 대단한 분이셨다. 무엇이나 자신의 생각이 배제된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당시 대부분의 교장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계셨던 소위 권위의식이 좀 지나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 차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보다 발전적이거나 앞이 분명하지 않은 교육이란 있을 수 없었고, 20대에 교장이 된 그 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다보니 젊은 교사들의 이해가 따르지 못했고 결국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남해 삼 수의 한 인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나머지 한 분의 '수'는 당시 남해를 떠나셔서 인근 공교롭게도 필자의 고향인 S군 교육청 관내에 봉직하고 계셨다. 그래서 모셔 보지 못했기에 그 분의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지만 그 해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에 어느 후배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오랜 연륜에 의한 고집스러움과 권위의식 때문에 자주 교사들과의 알력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 후배가 강사로 부임한 환영회 자리에서 지극히 사소한 일로 어느 교사가 그 교장 선생님과 다투다가 그만 앞에 있던 재떨이를 던져서 교장 선생님의 눈가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생겼고, 급기야는 양호실에서 대충 치료를 하고 회식도 하지 못하고 퇴근을 해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학교에서 있어서는 안될 불상사였던 셈이다.
재떨이를 던진 장본인의 말씀 또한 쇼킹한 일면이 있었다. 던져 놓고 한다는 말인즉,
"망할 영감이 안 그런다고 해 놓고, 새 선생님 오시는 자리에서 불상사를 저지르다니…"
이렇게 되면 필자도 그만 판단이 쉽게 서지 않는다. 누가 불상사를 저질렀다고 해야 옳을지 분간이 쉽지 않은 상황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다음부터 남해 삼 수 이야기는 내게 애향심(?)에 불타는 한 이야깃거리를 안겨준 셈이었다. 남해 사람들이 남해 삼 수 이야기를 거론하는 자리마다 나는 빠지지 않고 마지막 '수'의 일화를 소개하고 나서,
"남해 삼 수는 그야말로 남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남해만 벗어나면 재떨이에 맞고, 기를 못 펴는 '수'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는가?"
라고 하면 십 중 팔구 웃고 마는 것이었다.
◎ 무서움이란 스스로의 생각일 뿐
사람들은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거나, 인적 드문 깊은 숲 속 길을 혼자 걸을 때면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사실 나도 무서움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소개하는 한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는 무서움이란 스스로의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무서움의 강도가 훨씬 줄어들었다.
어느 해 가을날, 함께 근무하는 친구 김봉옥 선생 집에 놀러 갔다. 친구네가 있는 이어리라는 마을은 학교와 2km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 도로 양쪽에는 코스모스가 한창 만개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길이었다. 친구네와 학교의 거의 가운데쯤의 지점에 다다랐을 무렵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출소(당시의 지서) 차석(次席)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승용차와 정면 충돌하여 현장에서 즉사했던 교통사고의 현장이었다. 거적으로 덮어둔 시신과 도로 가운데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린 핏자국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죽은 그 차석은 한 자리에서 술도 나누었던 좀은 가까운 사이였었다.
현장 검증을 하는 그 자리를 벗어나서 친구네 집에 닿았고, 낮에는 가을걷이도 거들고 저녁밥을 먹고도 한참을 놀았다.
낮에 보았던 일은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벌써 어른들은 모두 주무실 시간이어서 인사도 하지 않고 나오려는데 친구는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라고 권했다. 뿌리치고 일어섰다. 친구는 야속한 생각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기어이 일어서는 내게 마지막으로 내어 뱉은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꼭 가고싶으면 가라. 가다가 차석이랑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라."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뜩이나 무서움 많은 나로서는 벌써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말에 거기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사나이로서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쓸 데 없는 객기를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오냐. 차석이 혹 너를 찾으면 데릴러 올께."
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의 배웅을 마다하고 길을 나섰다.
달은 환히 밝아서 길이 어둡지는 않았다. 무서움을 이기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랫소리는 자꾸만 작아져 갔다. 천부적인 무서움 증세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낮에 본 사건 현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거적에 덮어둔 인체 형상의 볼륨과, 흥건히 흘렀던 피의 자국이 자꾸만 살아났고, 조금 전 친구가 했던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라던 얘기들이 더욱 무서움을 부채질했다. 현장을 외면하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과는 최대한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났고, 도로의 가장자리를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낮에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졌던 코스모스는 그 순간 아무런 아름다움으로 내게 다가서지 못했다.
달은 환한데 무서움의 증세가 극에 달했다고 느낄 즈음 누군가가 나의 발목을 꽉 잡는 것이 아닌가!
그만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발을 움직여 보려고 하니 더 세게 움켜잡는 느낌일 뿐 나는 그만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비명 소리는 꽤 컸던 모양으로 양쪽 동네의 견공(犬公)들이 그들의 확고한 의리를 입증이라도 하듯 일제히 짓기 시작했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겨우 기절을 면한 상황에서 정신을 수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격언을 떠올리면서 정신을 차리고 도대체 누가 내 발목을 잡는가를 살펴보았다.
참으로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을 발견하고 말았다. 나의 발목을 꽉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코스모스 대였다. 아주 실한 코스모스 대 하나가 쓰러져 있었고, 무서움에 가장자리를 찾아 걷던 나는 오른발로 그 끝을 밟고 왼발은 조급 굽어 공간이 생겼던 그 밑에 걸렸던 것이다.
비로소 완전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무서움증에서 벗어나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서움이란 오직 스스로의 생각이 부르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하나 정말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 코스모스들이 꽃 길 조성한다고 바로 내가 내 반 어린이들과 함께 정성 들여 심었던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 인사 두 번 하는 이야기
전기한 친구 김봉옥 선생과 한 학교에, 그것도 그의 모교에 근무하게 되니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어쩌면 철딱서니도 없는 초임교사 시절이었으니 즐겁고 재미난 일은 더 많이 생기는 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사를 두 번 한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김봉옥 선생과 나를 만나서 한다는 얘긴데 우린 자주 서로가 형임을 강조했었다. 그건 같은 연배들끼리의 흔히, 정말로 흔히 있는 일이라 나도 그 흔한 얘기를 소개 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고 실감나게 하자면 여기서 어쩔 수 없이 내 출생에 관한 비밀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
나는 사실 1949년 생이다. 주민등록상으로는 1951년이 되어 있지만 실은 육십갑자로 기축생인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당시 백부님께서 마을 이장을 맡고 계셨다는데 아버님은 나의 출생신고를 백부님께 부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백부님께서 그만 바쁜 이장의 역할을 수행하시느라 2년이 지나도록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더 자세한 얘기는 접어두고, 이런 연유로 소띠인 내가 2년이나 늦은 토끼띠로 변신하게된 것이다.-
친구는 1950년 생이었다. 엄연히 나보다는 한 살이 아래인데 그가 늘 주장하는 얘기가 논리 정연하였다. 그의 논리인즉,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사회 지도층(?)에 있는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않으면 되겠는가? 모든 것은 법대로 하자.』
주민등록증에 적힌 생년월일대로 자기가 형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엄연히 먼저 태어난 내가 형이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고...... 우린 자주 똑 같은 자기 논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어쩌면 그 자체가 언제 해도 끝이 없으면서 재미는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즈음에 우리는 자주 둘만의 외출을 했다. 둘 다 아주 자유로운 총각인데다가 여름철이면 일과를 마치고도 학구내의 과수원으로 바닷가로 등산로로 참 많이도 다녔었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자주 동네 사람들(주로 학부모)을 만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우리 본의는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이 인사를 두 번 해야하는 번거로움을 안겨주게 되었다.
"어디 가십니까이더"
"오디 가는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앞의 것은 제 자녀가 다니는 학교 선생님인 내게 하는 인사고, 뒤의 것은 학교 선생님이기는 해도 그 이전에부터 이어져 온 인연의 동네 김 아무개 아들인 내 친구 김 선생에게 하는 인사였다. 그 학부모가 좀 멀리 지나가고 나면 나는 의기양양한 어투로 꼭 한 마디 염장 지를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봐라 임마 누가 형님인고?"
◎ 탁구지도 이야기
발령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장 선생님은 내게 탁구 지도를 명령하셨다. 그런데 나는 흔히 말하는 '탁구의 탁은 고사하고 ㅌ자'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 때 까지는 탁구 배트조차 잡아 보지 못한 참으로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께 어렵다는 말씀은 드렸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만 두라고 했다면 아마 그 분은 남해 삼 수의 대열에 끼지 못하셨을 것이다. 당시는 막내둥이 젊은 교사로서 운동 지도를 못하겠다는 말은 어쩌면 학교장에게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아주 오만 불손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던 일이었다.
결국은 선수 네 명을 선발하여 연습을 시작했다. 탁구 배트를 만져 보는 것은 아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랬지만 처음이었다. 지도자나 선수 모두 백지 상태로 출발을 했다. 나는 몹시 건방지게도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억지로 맡은 것이라는 생각에 서적을 통한 지도 방법을 연구를 한다든가, 유명한 지도자를 만나서 지도 방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갖지 못했다.
지도 현장에는 사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가끔씩 동료 선생님들이 들르기는 했지만 그저 한 게임 즐기려는 목적으로 왔다가는 퇴근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가버리는 야속한 분들만 있었다.
지도 훈련의 방법을 모르고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다. 아이 하나와 나는 마주 서서 그저 공을 주고받는 것이 지도의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도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누군가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력들이 늘기는 했다. 제일 많이, 제일 빠르게 느는 것은 당연히 지도자인 나였다. 아이들 넷을 상대하다 보니 탁구에 소비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탓이었다.
이렇게 석 달 정도의 연습을 하고 여름 방학 때 대회에 참가하였다. 탁구는 당시 시설 등을 이유로 많은 학교가 참가하지 않았었다. 모두 8개 팀이 참가를 했다. 이론상 세 번만 이기면 우승인 셈이다.
첫 경기는 지족 국민학교와의 시합이었는데 지도자는 교대 동기인 문 선생이었고, 우리와 백중세였다. 지도 과정 이야기를 들으니 나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지도자의 역량이 비슷하고 지도 과정이 비슷해서인지 실력 또한 비슷했다. 화려하거나 뛰어난 묘기는 양 팀 모두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쫓고 쫓기는 스릴만 계속되는 가운데 경기는 이어졌고 결국은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우리 팀이 이겼다. 실력적으로 너무 남부끄러운 경기였는지라 승리의 환희도 맛보지 못한 채 다음 경기를 살펴야 했다.
다음 경기는 준결승, 상덕 국민학교와의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 선수들은 정말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 세트도 이겨 보지 못하고 완패를 당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상덕은 여수지방까지 전지훈련을 다녀왔을 만큼 투자도 많았고, 훗날 군 대표팀으로 소년체전 도 대표를 꿈꾸는 그런 팀이었다.
젊은 패기와 의욕이 모두 쏟아 부어졌어도 소양 부족으로 졌을 경기였다는 결론 때문인지 분함도, 억울함도 내겐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심정이었다. 다만 아이들한테는 미안했다. 패하고 풀이 죽은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 무슨 얘기로도 위로가 되지 못함을 알기에 점심을 먹으면서 먼 훗날 나의 마음을 알 거라는 얘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먼 훗날 그들이 알기는 무엇을 알 거란 말인가? 운동 지도에는 애당초 뜻이 없는 선생이었다는 사실이나 알아주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겠지……….
체육대회가 끝이 난 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학교장 회의에 다녀오신 교장선생님께서 회의 전달을 하다 말고 특별히 나를 부르셨다. 하시는 말씀인즉,
"김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교육장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는 교육장쯤 되면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일선학교의 교장들을 불러 세우고 나무라고 그랬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우리 교장선생님은 단체전(탁구)4강에 진입한 학교라서 오히려 칭찬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다가 칭찬이 기쁜 것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지 않으신 점이 더 흡족하셨던 우리 교장선생님의 넉넉한 배포를 읽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명색이 남해 삼 수중의 한 사람인데…….
◎ 축구 실력이 대단했던 6학년
1973학년도에 맡았던 도마의 6학년은 참으로 착하고 재주 많은 아이들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내가 1반 담임이었고 교대 선배인 김수동 선생님이 2반 담임이었다.
두 반 합쳐서 100명 내외였던 그 6학년은 두 반이 적당히 경쟁을 하는 가운데 화합도 잘 되는 참으로 이상적인 아이들이기도 했었다. 많은 자랑거리나 얘깃거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들이 잘 했던 축구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당시 도마 국민학교는 교기가 축구였다. 운동부 육성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계셨던 당시의 박윤수 교장선생님은 그래서 운동장에 명물로 자리잡고 있었던 아름드리 나무들을 사정없이 베어내고 축구장을 만들었다. 축구장이래야 정식규격에 맞게 줄긋고 전에부터 있었던 골문 정비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내가 맡았던 애들보다는 한 해 아래인 5학년을 주축으로 축구팀이 조직되고 제법 그럴싸한 축구 코치를 영입하고 또 체육주임을 맡을 선생님(박성영 선생님)까지 모셔 오는 등 여건 조성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을 초임교사인 나도 리얼하게 느낄 수 있었다.
4월부터 시작한 축구부 훈련은 가끔 초임교사인 내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훈련 과정이 어떻게 짜여지고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며 어떤 보조보강 운동과 주 운동을 하면 되는 것인지를 관심 깊게 보았다면 아마 축구 지도로 내 교직생활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조금도 절실한 심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2년 전에 탁구 지도를 하면서도 그저 그런 식으로 넘겼던 나는 축구 역시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그저 그런 시각으로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나와 김 선배가 맡았던 당시의 6학년들은 자기들끼리 즐기는 축구 실력이 대단했었다. 포지션까지 이미 누가 적임자라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고 두 반은 자주 그들끼리의 시합을 갖곤 했다.
세월이 상당히 흐른 시점에서 당시의 경기 결과는 거의 백중지세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그래서 더욱 열을 내어 시합을 했었던가보다. 나는 내 반이 졌을 경우 조금 서운한 마음은 들었었다. 대 놓고 표는 내지 않았지만 지고 풀 죽어 잔디밭에 고개 숙이고 앉은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면 겉으로 격려는 했지만 속으로는 영 아닌 기분이었었다. 기금 생각하면 그 것은 오로지 젊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젊다는 것은 철이 덜 들었다는 얘기와도 통하는 것이니까.
2학기 접어들면서 당시의 코치가 6학년과 축구부의 시합을 좀 하게 해 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축구부 아이들은 사실 연습경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김 선배와 나는 의논 끝에 허락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왜냐하면 한 살이 적은 후배들이기는 해도 그들은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축구부였다. 이기면 좋겠지만 졌을 때의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렇고,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먼 훗날 그들이 어른이 되어 동창회나 그 밖의 모임을 하는 자리에서 함께 술잔이라도 기울일 때 후배 녀석들이 철딱서니 없게 그 일을 들먹이면 열 받게 될 내 제자들을 생각하면 무책임하게, 단순한 생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렇게 허락된 축구시합의 열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늘상 두 반의 시합을 해 왔던 6학년들이 이제 소위 올스타팀을 구성해서 경기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선수 구성과 경기는 모두 아이들에게 맡겨 두었었다. 사실 김 선배는 나보다 나았지만 나는 아이들의 생각보다 나을게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합은 정말로 귀추가 주목이 되는 시합이었고 운동장은 여학생 응원단(요새로 치면 오빠부대)의 열띤 응원과 코치의 약간은 신경질적이고 볼멘 소리가 운동장을 둘러쌌고,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않은 우리 애들이 묘기 백출하여 박수를 받는 등 국가대표가 외국팀을 초청하여 갖는 경기는 저만치 물러나라였다.
나중에는 교장(박윤수), 교감(윤채두) 선생님의 관심까지 불러 일으켜 교무실 앞 현관에 의자를 내어놓으시고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관람하시기도 했으니까.
첫 경기 결과는 우리 아이들의 대승이었다. 이기고 즐거워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전술과 기능을 한 수 지도하는 우리 아이들이 대견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고 풀 죽은 축구부에겐 좋은 채찍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참으로 잘 한 경기였고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도 했었다.
김 선배와 내가 간단히 마련한 상은 과자 몇 봉지. 수음지에서 즐거워하며 다음 시합을 의논하는 그들이 나는 그렇게 믿음직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고 우리 아이들이 졸업을 할 때까지 여러 차례의 도전을 받았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그 때마다 조금은 경망스럽던 그 깡마른 코치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재미있기도 했었다.-
◎ 이런 일도 있었다
○ 도시락 점검
세월은 물처럼 흐른다고들 했던가. 세월의 흐름은 변화를 의식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외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삼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쓸 데 없는 짓을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점심시간마다 어린이들의 도시락을 점검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아동들이 어느 정도의 혼식 도시락을 마련했는가 하는 점검인데 당시 65명의 학급 인구를 감안하면 50% 미만의 혼식자(混食者)를 다 가려내려면 교사는 점심을 먹을 시간조차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있던 도마 초등학교는 아동들 전원이 90% 이상의 보리밥을 싸 오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사 이야기지만 도시락 점검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검열에 대비하는 장부의 정리에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 이상의 문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안보고 장부만으로 점검을 한다 해도 틀릴 일은 없지만 자연 일의 처리가 안일해지고 형편에 따라서는 일주일 분, 한 달 분 이상이 미뤄졌다가 나중에야 한꺼번에 기록을 한다고 법석을 떨었던 기억도 새롭다. 교육청 장학사님들이 장학지도를 나오면 그 도시락 점검부의 동그라미 수를 일일이 세며 통계수치의 맞고 틀림을 맞추어보니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그 통계만은 맞춰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하지 않고 배길 용빼는 재주가 없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그런 일을 왜 해야 했던가는 다소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70년대 초반 당시의 우리 나라 식량 사정은 전체적으로 모자라지는 않는데 쌀은 부족하여 해마다 외미(外米)를 도입해야 했다. 정부에서 내세우는 혼·분식(混粉食) 장려 정책에 온 국민이 따라만 준다면 외미 도입은 그 양을 훨씬 줄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전혀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희망적인 사항이기도 했다.
물론 도시락 점검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 심했다. 주로 도회지거나 가정형편이 다소 나은 아이들 일이기는 하지만 '어제 저녁에 제사를 지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하얀 쌀밥의 윗부분만 보리쌀 들고 덮어 교사를 기만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교사를 속이는 행위를 서슴없이 부모가 가르친 셈인데 그런 거짓을 배운 아이, 정의에 동참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위를 체득한 아이가 커서 스스로 정의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오늘날의 사고로는 이해가 안갈 일이기는 하지만 일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제자들의 도시락을 검사 명목으로 살펴야 하는 일이 필수적이어야 할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70년대가 다 가기 전에 어느 여자 장관에 의하여 실시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졌고, 지금은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 여 장관의 취임 인터뷰에서
"앞으로 도시락 점검과 같은 행정은 절대로 펴지 않겠다."
라는 말은 정녕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 시험점수가 학력의 전부
정확하지는 않지만 80년대까지 학교마다 학력 우수 기(優秀 旗)란 것이 있었다. 매월 말에 치루어지는 소위 월말고사 결과 평균점수가 가장 높은 학급에 주어지는 작고 앙증맞은 깃발이었는데 이것을 획득하기 위한 교사들의 노력은 실로 처절했다. 체력이 달려서 포기했다는 어느 노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으니 학력을 높이기 위한 교사들의 노력이 얼마만한 것이었는가 하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참으로 스스로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일만 같아서 얘기하기가 쑥스러운 거지만 아동들에게 컨닝하는 방법까지 가르친 선생님이 있었으니 과열경쟁의 부작용은 오늘날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까지 한 것이다.
1975,6년에는 정말로 부끄러운 경남 초등교육계의 사건이 있었는데, 교육 위정자들의 무지와 지나치게 짧은 소견이 빚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실로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학교끼리의 경쟁을 유발하기 위하여 일제히 치르는 시험 감독을 학교를 바꾸어서 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학교와 학교를 서로 맞바꾼 감독은 위에서 믿을 수 없는 바였던지 지그재그 식으로 남의 학교에 가서 시험 감독을 하게 되었고 학교를 지키는 교장 선생님들은 감독 선생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등 수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노력이 동원되었었다. 시험 전 날 자기반의 평균점수를 높이기 위해 우수아동과 못하는 아동을 짝이 되게 하여 합계점수가 낮은 조는 혼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참으로 부작용이 많았던, 그리고, 진정 부끄러운 일이었다.
학력의 개념이 바뀌기 전의 일이었기에 그때는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너무 너그러운 배려가 아닐까? 아무튼 90년대 후반의 열린 학습 시대에는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뭔가 찜찜함을 느끼게 하는 추억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 수영대회에서 있었던 일
○ 수신제(水神祭)에 얽힌 이야기
70년대 중반 남해 읍 변두리의 선소라는 바닷가 마을에서는 곧잘 수영대회가 열렸었다. 바다가 꼭 수영대회 장소로 적합하게 생겨서 자주 수영대회가 거기서 열리곤 했는데 어느 해 수영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바다인지라 대회 중에 혹시나 익사사고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 일이기 때문에 교육청에서는 익사사고를 막아 달라고 참가자 일동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음은 물론 일종의 수신제(水神祭)까지 지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대회를 주관하는 교육청 당국의 노심초사하는 마음 씀을 읽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교육장님의 절하는 순서에 이르렀을 때 어느 선생님이 그만 멍석을 힘껏 끌어 당겨 버리는 바람에 제물로 차렸던 음식들이 고르지 못한 바닥에 굴러가게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야말로 수신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는데 장본인인 선생님의 말씀인즉,
"소위 교육을 한다쿠넌 집단이 아아덜 보는 앞에서 미신을 교육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리 선생님의 정신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이 일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가 모호한 것이었다.
○ 재일 교포 수영선수에 관한 이야기
남해군 ㄱ 초등학교에 재일 교포 어린이가 전학을 왔다. 그 아이는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부모님을 따라 왔고,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일본으로 갔던 아이였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도 대표쯤 되는 수영선수였다고 한다.
당시의 지도교사는 필자의 교대 동기 ㅈ 선생이었는데 학교 옆 저수지에서 열심히 연습을 시켰다. 지도교사가 수영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그 어린이는 실제로 다른 아이들의 수영 코치 역할까지 하며 연습을 알차게 이끌었다고 ㅈ 교사는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 자랑이란 사실 객관성을 갖춘 자랑이기도 했다. 자유형, 배영, 접영 등 여러 영법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아동인데다가 특히 자유형과 접영은 지난해의 도 기록을 능가하는 그야말로 유망주였었다. 그쯤 되었으니 오직 실적 위주였던 당시의 체육 행정을 생각해 보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진정 행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자유형 출발에 앞서 몸에 물을 적시는 등 준비를 하면서 오만상을 다 찡그리더니 출발신호와 함께 맨 앞에 헤엄을 치던 그 어린이가 갑자기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ㅈ 선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급히 그 아동을 불러 주고받는 대화는 정녕 수준 높은 개그였다.
"잘 하더마넌 와 임마 되돌아 나오노?"
"물이 짭아서(짜서) 도저히 몬하겄심니더."
그리하여 예약해 놓았던 자유형 금메달을 놓지고 말았던 것이다. ㅈ 선생은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파안대소와 함께 꼭 끝에 가서는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참으로 훌륭한 교육장님의 이야기
○ 그 하나, 왜 훌륭하다고 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아질수록 점잖아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분에 차이가 좀 많이 나는 사람하고는 언제나 은근히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당시 남해 교육청 교육장님이셨던 K님은 적어도 남해 교육을 책임지신 이른바 남해교육의 총수였으니 높다면 정말로 엄청 높은 분이었다. 그런 분이 매주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남해 읍(교육청이 있는 곳)에서 고현면 도산부락(선대부터 살던 자택이 있는 곳)까지 10㎞ 가까운 길을 걸어서 퇴근하셨다.
출·퇴근에 이용할 수 있는 관용차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꼭 그러시는 데는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시는 것을 비롯하여 자연을 벗삼는 향토 사랑의 실천 등 그 이유가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토요일 오후 퇴근시간 이후에도 기사에게 자유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는 참으로 존경스런 생각이요 이야기였다.
천도교 남해 교구의 책임을 맡기도 했던 K교육장님이 사시던 마을 입구에 효자비 하나가 서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K교육장님의 선친이라고 했다. 그 사실만 해도 님의 고매하신 인품은 조상 대대로 뿌리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효자비 앞을 지나서 비스듬한 경사의 산길을 2㎞ 정도 더 가야 자택이 있었다. 그런데, 출·퇴근 시 이용하는 관용차가 절대로 효자비 앞을 지나지 못하게 하셨다. 불편한 길을 걷는 한이 있어도 선친을 모신 효자비 앞에 먼지를 내고 지나서는 옳은 행동이 아니라는 참으로 우리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신 일이기도 했다.
K교육장님은 남해 출신으로 중등교육에 종사하시면서 고매하신 인격과 열성으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렀는데 그 제자들의 열망으로 남해교육의 총수가 되셨다는 이야기가 당시 남해 교육계에는 자랑스런 화제로 거론되었었다.
출세를 위해 권모술수들이 난무하는 세태에 비추어 얼마나 인간적인 이야기이며 존경스런 인물이셨던가?
○ 그 두울, 그 교육장님의 봉변
그런 교육장님이 정녕 웃고 말아야 할 봉변을 당하셨다.
7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방학중에 당시 벽지학교인 남면 가천국민학교를 장소로 하여 관내 교감 연수회가 2박 3일간 열렸었다. 남해 섬의 끝자락 가천은 참으로 절경인 곳이다. 충분히 연수회 장소로 적합한 곳이었고, 밤에는 저절로 곳곳에서 자연스런 토론들이 이루어졌고, 그 것은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이어졌다. 자정쯤에 교감선생님들은 대부분 취침에 들어갔고, 이야기가 남은 분들만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었다.
교육장님은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각에 연수장소에 도착을 하셨다. 낮 동안 외지로 출장을 가셨다가 늦게야 도착하신 셈인데 여느 교육장님들이었다면 틀림없이 다음날에나 들르시지 밤중에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감들을 연수하게 해 놓고 관심을 크게 가지셨던 K교육장님은 그 시각에 연수장소에 꼭 나타나셔야 직성이 풀리셨던 것이다.
봉변은 새벽녘에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교감들이 모두 취침을 하는 바람에 못만나셔서 불편한 가운데 잠을 청하셨다가 일찍 잠을 깨신 교육장님은 교감들의 불편을 덜어준다는 생각으로 남 먼저 세수를 하셨다. 말이 연수장이지 당시의 시대상이나 벽지학교 여건으로 세면장이 변변할 리 없었다. 아동용 급수장에서 세면대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수도꼭지에 의존하여 어렵게 세수를 하고 계시던 교육장님을 갑자기 뒷통수를 갈기는 교감이 있었다.
"자석, 늙은 기 잠도 없고나."
갑자기 당한 일격에 아픈 것은 고사하고라도 얼마나 놀라셨겠는가? 그런데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하시는 말씀 또한 존경스럽기 짝이 없는 말씀이셨다고 한다.
"예, 좀 일찍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크게 놀란 것은 교육장님의 뒷통수를 친 교감이었다. 동료 교감으로 오인한 데서 온 명백한 실수였지만 참으로 얼마나 황당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둘만 있는 세면장에서 있었던 일이라 어쩌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말 이야기였는데 그걸 자랑삼아 얘기했는지 연수회가 끝나기도 전에 연수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연수회가 끝나고 나서는 거짓말 좀 보태면 남해 교육가족은 모두 알게 되었었다.-
◎ 시월유신 홍보활동
어떤 종류의 사건이든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하나의 역사로 자리잡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다 보면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허다한 법이다.
이제 당시에는 충분한 상황적 당위성으로 포장한 채 출발했던 시월유신도 다시 되새겨 보면 고소를 금하지 못하는 일에 속하고 만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참으로 온 국민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교사들까지 홍보활동에 내몰려도 아무런 항변이 있을 수 없었던 당시의 일들이 추억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한 과정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이해가 가는 설명이 되겠지만 그래 가지고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만큼 이해를 할 수 있을런지?
오직 장기집권을 노리는 대통령과 K당의 치밀한 각본에 녹을 먹고사는 공무원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무원들에게 지워진 멍에는 바로 홍보활동을 펴는 일이었다. 자료를 들고 주로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담당부락에 출장 아닌 출장을 나가 주민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홍본지 설득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일을 하고 다녀야 했다.
행정직 공무원은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해야 했고, 교사들까지도 담당부락이 배정되었고 배정된 부락에 손전등(필자도 그 때 상당히 고급스러운 손전등 하나를 스스로의 돈으로 장만해야 했다.)을 들고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밤길을 걸어서 가야 했고, 마치고 나면 밤 10시가 넘어서야 터벅터벅 걸어서 와야 했다. 그러면서도 우린 한마디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뭘 몰라서 그랬다면 좀 덜 억울하기나 했을 텐데…….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내가 맡은 부락은 고현면 도산 부락이었다. 저녁을 먹고 마을회관에 도착하면 마을 이장님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이장님이 학부모였는데 참으로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셨다. 매일 밤 몇 집을 다니면서 설득공작(?)을 확실하게 펼쳤는지 마을 이장의 확인 도장을 받아야 했는데 당시의 도산 이장님은,
"선생님, 종오(종이)부터 이리 주소. 도장 찍어 디리낑깨내 내용은 선생님이 알아서 하이소."
그리고는 날인부터 하고, 저녁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려고 마을회관에 나온 사람들에게 나를 대신하여 유인물을 읽어주고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와 일대일로 얘기를 하던 중에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이런 일로 우째서 선생님들이 해야 할낍니꺼? 이거넌 먼가 많이 잘못된 깁니더."
-매일 아침이면 어젯밤의 성과를 서무 담당 교사가 집계 내어 교육청으로 보고를 해야 했다. 당시 서무를 맡으셨던 조정의 선생님은 아침에 잉크를 가득 넣어 왔는데 보고서를 꾸미고 나면 잉크가 모자란다고 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 「식목일」인지「식모길」인지
1970년대도 후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당시에는 학교마다 비중 큰 연중행사의 하나로 학예발표회를 꼽았었다. 대개 글짓기, 음악, 미술 등의 분야로 나누되 글짓기만 해도 저학년, 고학년으로 다시 나누고, 거기서 다시 운문부와 산문부로 나누었다.
학년초의 바쁜 일들이 끝나고 나면 학예발표회에 관한 공문이 오게 되는데 학교마다 난리가 나는 건 그 때 부터이다. 분야별로 담당 지도교사가 배정이 되고 방과후에는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지도에 열을 올렸다. 내가 있던 도마초등학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교사 초년병인 나도 글짓기 지도를 하느라고 애를 썼었으니까……. 그뿐 아니라 규모가 작은 학교에서는 한 교사가 두 세 개씩의 분야를 맡아 지도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미술 디자인 분야의 지도를 맡은 박 선생님의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전근 와서 실태도 정확히 모르는 가운데 아이들의 추천을 받아서 고학년 디자인 출전 아동을 선정하여 지도를 하게 되었다. 시골 아이 답지 않게 싹싹하고 지도 내용을 잘 소화한다고 인정을 하고 어느 정도는 입상을 점치면서 지도에 열을 올렸다.
대회 당일이었다. 남해 국민학교에서 치루어지는 종합 학예발표회 남해군 예선대회에 우리 학교도 대군을 이끌고 출전을 했다. 당시 우리학교는 군내 1,2위는 아니라도 5,6위를 다투는 학예발표회 성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학교를 지킬 인원만 남고 전 교사가 아동 인솔 겸 견학 목적으로 대회 장소까지 무급 출장을 했다.
개회식에 이어 아동들을 해당 장소에 입실시키고 나면 교사들은 별로 할 일이 없게 마련이었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학교 구내에서 환담을 즐기기도 하고, 고 새를 못 참아서 시가지에 나가 간단히 한 잔 꺾고 들어오는 축들도 있었다.
아동들을 들여보낸 지 한 시간쯤 지났던가? 박 선생님과 나는 경연 장소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차례로 돌아보니 아동들은 나름대로 솜씨들을 뽐내며 열심히 작품을 만들거나 경연에 열을 올리고들 있었다.
디자인부 교실 옆을 지나면서 칠판을 보니 '푸른 산 가꾸기' 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과 나는 마침 창에서 좀 떨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는 우리학교 선수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정녕 눈앞이 캄캄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늘의 주인공 도마 국민학교 디자인 선수 정 군의 작품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는데, 「식목일」이라고 써야 할 부분에「식모길」이라는 글을 써놓고 있었던 것이다.
'식모가 지켜야 할 도리'라도 되면 모를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 정해지지 않았던 퇴근 시간
다섯 시 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요즈음의 분위기와 당시의 분위기는 서로가 서로의 상황 이해가 어려운 것이니 설명을 하자면 당시는 학교장이나 교감이 퇴근을 하지 않으면 교사는 아예 퇴근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을 한 교사가 있으면, 교장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허락을 해 놓고도 그 교사가 현관을 나서기가 무섭게 거리낌없이
"교장이 퇴근을 안 했는데 건방지게……."
라고 다른 직원들이 다 듣도록 얘기를 함으로써 간 작은 교사들이 감히 퇴근을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세태는 분위기 상 숱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겨울철에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 지경이었다.
나무를 때는 난로는 벌겋게 닳도록 연료를 넣어 교무실 안은 더위를 느낄 정도로 열기를 내뿜고, 주로 교장 선생님의 교직 무용담(?)을 들으면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그 무용담들도 처음 들을 때에는 재미가 있었다. '好歌도 唱唱 不樂'이라는 말처럼 귀에 못이라도 박힐 지경으로 자주 듣다 보면 지겹기만 한 시간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재방송되는 무용담은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져 있었다. '過去之事는 如明鏡'이라 했던 명심보감의 글귀를 생각하면 미래의 계획도 아닌 그야말로 과거지사가 수시 변동될 수 있는 참으로 희한한 세상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요지경과도 같았다.
어쩌다 교장선생님이 바쁘셔서 먼저 퇴근을 했던지, 아니면 출장이라도 가신 날은 교사들이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는 날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건 정녕 천만의 말씀이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이야기다. 당연히 다음은 교감선생님의 차례.
"우리 교장선생님은 다 좋은데 퇴근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이 흠이야. 지 때문에 ……."
교장선생님의 퇴근 시간이 늦은 것을 화제로 삼아 비난을 하면서 스스로 교사들의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의 개선은 참으로 암담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면 당시의 퇴근시간은 언제였는가? 말 할 것도 없이 교장, 교감 선생님이 퇴근하는 그 시각이 교사들의 퇴근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바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는 야근을 제외하면 다섯 시 정시 퇴근이 보편화된 현실은 당시 생각하면 꼭 꿈속의 나라요, 이상향이라고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닐 것이다.
◎ 체육시간에 있었던 일
1972년의 어느 체육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질서운동을 하는데 뒤로 도는 동작이 쉽게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되풀이 연습을 시키는데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고심을 하고 있는데 교무실에서 방송을 하였다.
"5학년 김형진 선생님, 교육청에서 전화 왔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수업시간 중에 방송까지 하는가 하는 투덜거림은 안으로만 삭이고 교무실로 전화를 받으러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우기 전에 반장을 불러서는,
"내가 올 때까지 뒤로 돌아 연습을 계속하고 있어!"
그리고는 교무실로 갔다. 교육청 장학사의 전화를 받고 몇 가지 응답을 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우 일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돌아와 보니 거의 전부가 비틀거리고들 있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계속해서 뒤로 돌기'를 하는 것은 '고추 먹고 맴 맴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시킨 선생도 잘못이었지만 선생님이 시킨다고 고집스럽게 계속하여 아이들을 어지럽게 만든 반장도 참 고지식한 일면이 있는 녀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새교실 시조 추천기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시간에 시조가 우리 민족 순수 문학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료되기 시작하였었다. 작고하신 원로 시조시인 아천 최재호 선생님이 학교장으로 부임하신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고3의 그 중요한 시기에도 밤을 새워 써 보기를 여러 번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서 그 해 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차상에 입상했었고, 교대 1,2학년 모두 개천예술제 대학 일반부에 참가하여 차하에 입상했던, 나름대로는 시조 공부를 비록 자습이기는 했지만 열심히 했었다.-
교직에 들어서서는 상당기간 손을 놓은 상태에서 어느 날 함께 근무하던 여 선생님이 신문사나 잡지사에 작품을 한 번 보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했다. 사실 나의 문학에의 길 진입은 그 때부터 이며 마음속으로 늘 권유해서 계기를 만들어 준 김순례 선생님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1975년 5월에 작품「산촌 노래」로 『새교실』지의 문을 두드렸다. 결과는 1회 추천이 되어 7월호 『새교실』에 발표가 되었다. 곧 이어 「심산 사찰」이라는 작품으로 응모하여 2회 째의 추천을 받았고(9월호에 게재), 「길」이라는 작품으로 추천을 완료하고 11월호에 작품과 함께 천료 소감을 실었다.
문덕수 시인과 김사림 시인의 추천사를 보면 '초등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시조를 하는 사람이 귀한데 초등학교 교사로 시조를 하다 보면 어린이들에게 많은 시조의 보급이 기대된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었다.
7월호가 나오고부터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성원을 담은 편지와 축하전보 등이 왔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힘이 되어 더욱 정진하는 데 크나큰 보탬이 되었음을 솔직히 밝혀 둔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72.05.01/이용수(교장선생님), 윤채두(교감선생님), 이태석, 장기찬, 조정의, 조경진, 김영빈, 이정주, 강창리, 정정옥, 강상례, 김연애, 이복자, 하영자(산대강사), 김상기(기능), 정철포(급사) 1973.03.01/박태윤, 정대행, 최유선, 김채봉(기능) 1974.03.01/박윤수(교장선생님), 박성영, 김수동, 이주엽, 김봉옥, 김대기(기능) 1975.03.01/이정식, 이은옥, 김순례, 박삼수 1976.03.01/김준우(교감선생님), 김창석, 정현철, 한차점 1977.03.01/박우환, 김익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