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체험기 – 沈陽을 다녀와서
작성자: 예찬건 (현음회 10기 / 풍류회 47기/ 월하전통문화원회원 )
여행기간: 2000.4.28(금) – 2000.5.1(월)
여행 하기 전에
중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가깝게는 우리 할아버지도 일제시대 때 잠시 중국 만주에 피난 가서 계신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마침 2000년 2월말에 평소 알고 지내던 가온누리 전통찻집의 주인이자 유니 텔 풍류마을 회원이며, 강원대등에 강의를 나가시고 계신 우실하님이 심양시 요녕대학의 한국학과에 1년간 초빙교수로 가시게 되면서부터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차에 4월 중순에 한번 가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난김에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준비기간은 약 2주일이 소요되었다. 먼저 비행기표는 투어아트라는 곳에서 보통 판매가 33만원인데 31만5천원에 할인 표가 있어서 구입을 했고, 여권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고 비자는 2만7천원을 주고 여행사에 신청하여 4일만에 받았다.
4월 28일 (첫째 날)
월차를 내었기에 아침에 일어나 그 동안 챙겨둔 짐을 이리저리 꾸려넣었다. 우실하님에게 가져갈 짐이 여행용 가방의 3분의 2가 되었다. 빈공간에 내짐으로 옷들을 챙겨넣었다. 악기는 단소 2개로 한정을 했고 악보는 정가 보에 단소 보 일부만 가져갔다.
비행장에서 투어아트 직원으로부터 현금을 주고 비행기표를 받았다. 공항사용료 티켓(19000원)을 사고서 바로 면세점으로 가서 우실하님에게 선물할 THIS Plus를 두 팩(약 2만원)을 구입했다. 시장하여 우동을 한 그릇(4200원) 먹고 비행기(북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한국인 스튜어디스가 두 명에 중국이 약 3명인 것 같았다. 물과 북방항공에서 주는 기념품과 식사가 곧 이어 나오고 또 연이어 선물판매가 이어졌다.
약 1시간 30분 비행중에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잘 진행한 것 같았다.
기내식은 밥에 닭고기 스튜에 수박 몇 조각에 방과 버터 및 상추샐러드 등이었는데 맛은 기대 이하 였다.
중국 땅에 건너가서 비행기 창으로 내려보이는 중국의 땅은 밭이 대부분에 집이 뛰엄뛰엄 군락을 이룬 모습이 캐나다의 시골모습과 흡사했으나 푸른빛이 전혀 돌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한국에서 봄날의 황사의 한 근원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심양공항은 현재 신 청사 공사가 한창으로 지붕이 겨우 올라간 정도 였다. 그 옆으로 이것이 국제 공항일까 하는 정도의 낡은 건물이 공항의 청사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곳에 청소부가 여기저기 걸쳐 않아 있었고 입구에는 한명의 공안(경찰관)이 부동자세로 중앙에 서 있고 그 양 옆으로 입국심사를 하는 줄이 약 4줄 정도 있었다. 중국인에 대한 심사에 시간이 좀 더 걸리는 모습 이였고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별 탈없이 통과가 되었다. 삼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처음 실감할 수 있었다. 경비중인 공안들의 군복의 재질로 미루어 보아 70년대의 한국의 교복의 재질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푸른색의 군복이 아주 촌스럽게 느껴졌고, 이 느낌에 이곳이 중국이라는 곳이구나라는 실감이 들었다.
입국심사는 별탈 없이 통과하여 내 가방을 찾아서 물건 표를 맞추어 확인한 뒤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가서 이 근선 지사장님(길안내를 약속해 주신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지사장님과 심양시행 버스에 올랐다. 차비로 중국 인민페 10원(원화로 약 1350원)을 차비로 내었다. 한참을 기다려 중앙통로에 간이의자를 모두 펼쳐서 모든 자리를 채운 뒤에 출발을 했다. 고속도로를 지나 약 45분을 달려 심양시에 들어왔다. 서탑거리에서 하차하여 택시로 요령대학으로 갔다. 택시는 기본요금이 3Km에 7원(약 950원)이었다. 운전석과 앞자리 와 뒷자리 사이에는 택시강도를 방지하기 위해서 설치한 철재 막과 아크릴판이 있었다. 일부는 낡아서 떨어졌지만, 옛날에는 확실히 택시강도가 많았던 모양이다.
약 10여분을 가서 요녕대 서문에 도착했다. 가는 중에 이 근선 지사장님이 핸드폰으로 우실하 교수님에게 연락을 하여 서문에 마중을 나와 계셨다.
마침 그날 임창렬 경기지사가 요녕대에 강연을 하러 와서 강연에 학생들을 동원하느라 바쁘게 지냈다고 하신다. 중국의 심양에와서 임창렬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1997년 기아 자동차의 부도로 IMF가 도래하게 되고 내가 또 아시아 자동차에서 현재의 한국이엠에스로 옮기게 된 계기의 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임창렬 경기 지사였으니 말이다.
우 교수님의 기숙사에 짐을 풀고 간단히 차를 한잔한 뒤 심양시내의 중가(中街)로 생황을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 택시로 약 15분을 가니 중심가가 나왔다. 서울의 명동을 연상시키는 거리였다. 처음에 들린 가계에서는 중국 제 생황을 두개를 보여주었다. 모양은 비슷하고 대나무 관에 양철로 된 관을 부착하여 소리를 증폭시킨 점이 내가 한국에서 구입한 생황과의 차이점이었다. 악기의 음정은 황(黃)= D로 조율이 되어 있었다. 300원인데 280원까지 해주겠다고 했으나 일단 내일 온다고 하고 나와서 두 번째 가게를 갔다.
이 가게도 2개의 생황을 보여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마음에 들었으나 300원을 꼭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유인즉 제작자가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관악기가 눈에 띄여 불어보고 또 내가 가지고 간 단소를 연주해 주어 우리악기의 우수성도 설명을 해 주었다.
일단 마지막으로 백화점내의 악기 점을 가기 위해 나와서 들렀으나 문을 이미 닫은 뒤였고 둘러보아도 생황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가게를 가보았으나 이미 문을 닫고 퇴근을 하는 직원만을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첫째 날 생황구입은 실패하고, 중가를 걸으며 잠시 구경한 뒤 한국 교포들이 많이 모여있고 상권이 형성된 서탑거리에 있는 포항꼬지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주인은 우리말을 할줄 아느분이나 종업원은 중국인들 이었다. 테이블 위에 숯불 판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연기는 밑으로 빨려 들어가게 고안이 되어 있었다. 심양산 맥주로 저렴한 설화맥주를 시키고 안주로는 양고기, 쇠고기, 쇠고기 심줄, 마늘 등을 시켰다. 쇠꼬쟁이에 꿔 여진 고기는 잘 익었다. 조금지나서 국제협력 단 소속으로 군복무를 대신하여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26세의 한국교수와 미국인 교수인 2명이 동석을 했다.
우 교수님의 신청으로 단소로 “청성 곡”을 연주했다. 옆에 있던 중국인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모두들 신기한 듯 했다. 술이 오를 무렵 우 교수님의 중학교 동창으로 심 양에서 인터넷 사업을 준비 중이며 중국에 오신지 약 3년이 된다는 장의 영 사장님이 기타와 하모니카를 메고 오셨다.
대학교시절 강산애씨등과 같이 새벽까지 통기타로 풍류를 같이 즐기곤 했다고 하며, 어느날 보니, 그때 같이 술과 음악을 하던 사람들 중에 가수가 된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는 폼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옆의 중국인들을 위해서 중국노래도 몇 곡 연주를 해서 동참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설화맥주를 3병씩 수 차례 시켜 얼큰해진 뒤 나와서 근처의 필리핀 가수들이 나와서 라 이브 무대를 하는 곳에 들렀다. 이 근선지사장님은 회사 일이 남아있어서 먼저 가시고 총 6명이 동석을 했다.
필리핀 가수의 노래를 몇곡들은뒤 장사장님의 소개로 나의 단소가 무대에 올랐다. 나는 그때 상당히 취한 상태로 계속 딸꾹질이 나오고 있었으나 한결같은 성화에 거절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청성 곡을 연주했다. 호흡이 가빠져 힘겨운 연주였으나 잘 마칠 수 있었다. 예상외로 반응이 너무 좋았다. 연이어 아리랑과 한 오백년을 연주해 주었더니 몇몇 사람들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장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여기의 중국인들, 러시아인들, 조선족에게는 이런 단소연주가 아주 색다른 것이며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우리 한국인만의 전통음악 이므로 큰 영향과 감흥을 일으킨다고 한다.
시킨 맥주를 비운 뒤 3차로 향했다. 일단 여자 영어교사는 먼저 기숙사로 택시를 태워 보냈다. 택시에 5명이 끼여 타고 간 곳은 근처의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인기 있는 락까페 같은 곳이었다.
여기에서는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과 세련된 중국 여자들을 볼 수 있었다.
장사장님의 주선으로 중국여자 3명이 동석을 했다. 이들은 그 까페에서 일하는 여자들이라고 한다. 같이 춤도 추고 하면서 교제도 이루어 진다고 설명을 들었다. 나는 그 중에 25세라는 아가씨의 옆 자리에 앉아 가져온 중국어 회화책을 펼쳐놓고 의사를 겨우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인 여자 가수 두 명이 남자가수를 중간에 두고 율동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고 그 뒤에는 밴드가 음악을 연주했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모든 공연이 끝났다. 술은 작은 맥주를 각각 1병씩 시켰는데 약 200원(27,000원)을 사용했다.
영어선생과 한국어 교수는 기숙사로 먼저 택시로 가고. 나와 우 교수님, 장사장님은 서 탑에 있는 사우나로 갔다. 먼저 사위를 하고 가운을 입고 2층으로 올라가서 중국식 안마를 받았다. 인체의 곳곳을 경 혈을 따라 하는 안 마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들 안 마를 해주는 아가씨들은 전문적으로 안 마하는 기술을 익힌 듯 했다. 1시간 안 마에 인민페 30원을 지불하고 목욕 비로 20원을 또 지불한다 총 50원을 한사람당 지불하며 거기에서 잠을 자는 것은 무료였다. 간이 침대가 놓여진 방에서 투숙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장사장님에게 중국의 어느 지역의 특색이 바로 이 안마이며 이것이 중국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진원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안마를 해준 아가씨들은 양가 집 딸들로 오빠의 대학등록금을 위해서 많은 수입이 있는 안마사로 일하며 어떠한 저속한 일로도 여기지지 않고 뜻 뜻한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을 받으며 표정이나 행동에도 아무런 거리김이 없었다.
중국에서는 몸을 파는 일을 제외하고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큰 차이점을 발견했다.
피곤도 하고 술기운이 올라 모두 거기에서 밤을 보냈다.
둘째 날(4월 29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안산에 있는 千山을 방문하기 위해서 서둘렀다. 사우나를 나와서 한국 식당들이 있는 거리에서 순대국밥 집을 들어갔다. 한 그릇에 10원이었다. 맛은 한국에서 먹는 것과 대동소이 했다.
마침 그 식당 앞에는 심 양의 유명한 인력시장이 있었다.
중국 군복을 입은 노인이 줄을 쳐 놓고 지키고 있으며 중국 돈 1원을 내고 그 줄 안에서 사람을 구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빽빽했다. 즉 입장료가 1원(135원)인 샘이다. 아침 10시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괜히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쫓겨 나갔다. 사람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곳이 중국인 듯하다.
장사장님에게 “어느 사람이 인력시장에 사람을 구하러 들어 갔다가 오히려 누가 얼마에 팔리려고 왔느냐는 질문을 받은 친구의 이야기” 을 에피소드로 들었다.
일정을 논의한 끝에 먼저 서 탑에서 환전을 하고 중가에 가서 생황을 구입하여 기숙사에 들러 옷도 갈아 입고 바로 안산의 천산으로 떠나기로 했다.
조금 걸어가니 작은 가게들이 일렬로 들어선 각종 조선족의 가계들을 볼 수 있었다. 이중에 “영주가게”를 들렀다. 우 교수님이 평소 자주 찾던 곳이라고 한다. 이 분의 첫째 딸이 마침 한국의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학과”를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소개 시켜 달라고 한다.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중가로 택시를 타고 갔다.
어제 구경한 첫번째 집을 들러 두개 중 더 깔끔한 하나를 골랐다. 가격을 흥정하여 중국인민폐 260원(35,000원)에 생황을 구입하고 중국식 소금, 대금도 E. D Key로 된 것을 각각 같이 구입을 했다.
서둘러 요령대학교의 우 교수님 숙소로 와서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시외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심양시의 남쪽에 위치한곳으로 기차역과 버스정류장이 같이 있었다. 장사장님이 일단 기차표를 구입해 보자고 해서 시도 했어나 입석 밖에 구입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한시간 정도 남아있어서 근처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뉴스면 3그릇과 만두를 시켰다. 뉴스면은 우리나라의 울면과 비슷했으나 덜 걸 죽하고 그 위에 양 고기와 향신료를 올려 준 것이었다. 양 고기의 비린내가 비우가 약한 사람들은 먹기 어려울 것 같았고 향신료도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는 잘 안 맞다고 들었으나 나는 용기를 내어 먹었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만두는 속에 들어간 내용물이 다를 뿐 한국에서 먹는 만두와 비슷했다.
중국에는 밑반찬이 없다. 느끼한 뉴스면을 먹는 동안 김치 생각이 간절했다. 대신에 고추가루와 간장을 첨가해서 먹고 마늘을 얻어서 같이 먹으니 약간 느끼함이 덜 했다.
기차시간이 되어 개찰구를 나갔다. 생각외로 입구를 찾아가는 길이 복잡했다. 혼자서는 여행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개찰구를 나가자 마자 승무원이 앉아있고 중국인들이 몰려 돈을 주고 좌석 표를 바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표를 파는 곳에서는 좌석이 없다고 했으나 웃돈 을 주고 여기에서 좌석 표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의 부패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 양에서 안산까지 입석표에 7원을 받는데, 여기에서 9원을 더 주면 좌석 표를 구입할 수 있다. 물론 좌석 표를 구입하면 7원+9원=16원 보다는 적은 돈으로 표를 구입 가능한데 철도 승무원들은 이런 식으로 해서 모자라는 월급을 채운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곳곳에 만연하여 뇌물이 통하는 곳이 중국이며 일명”중국인민 부패공화국”이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는 곳이 중국이라고 한다.
기차를 타고 서서 갈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왔는냐 고 묻는 할머니를 만났다. 부모님의 고향이 경주로 13살 때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 왔다고 하며, 두 따님과 함께 잔치에 갔다 오는 길이라고 한다.
다음 역에서 내리면서 그 자리를 내어주어 우리는 입석임에도 불구하고 앉아서 갈수 있었다. 앞 자리에 앉은 중국 여대생을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우 교수님이 계신 요녕대에서 멀지 않은 전기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5.1절 노동절 연휴를 이용해 집에 여름옷을 가지러 간다고 한다. 우 교수님 , 장의 영 사장님 인터넷 홈페이지를 알려 주었다. 나도 명함을 주며 이 메일을 보내면 연락이 가능하다고 했다.
앞 자리에 또 다른 중국아가씨 2명과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들 처럼 천산을 여행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기차는 가는 시간이 3분의 2, 정차해서 다른 기차를 피해주는 시간이 3분의 1이었다. 버스로 1시간 반을 가는 거리를 약 4시간이 걸려서 안산에 도착했다.
마침 앞 자리에 같이 앉아온 중국아기씨 2명을 만나 내일 아침에 같이 천산에 오르자고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화장실을 찾아 이러 저리 헤맨 끝에 돌아오니, 근처의 여행사 직원들이 저렴하게 모든 관광을 마칠 수 있다는 제의를 받아 모두 5명이 근처의 그 여행사가 있는 빈 관으로 갔다. 일단 방에 투숙하여 중국TV로 탁구를 구경하고, 나는 잠시 눈을 부쳤다.
한참이 지난 후에 총지배인과 여행사 아가씨 중 영어가 조금 가능한 아가씨가 와서 내일 천산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했는데, 원래 45원에 모든 여행을 단체 여행객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총 450원의 돈이 든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한국인을 봉으로 알고 수작을 부림이 드러나고 우리는 약속을 어기는 중국인들의 모습에 기분을 상해 그들이 잠시 나간 사이에 짐을 챙겨 나왔다.
역 앞의 시내버스를 타는 곳에 이르자 갑자기 돌풍이 불어서 모래바람이 일었다. 잠바의 지퍼를 올리고 모자를 쓰는 등 응급조치를 취했다. 1원5전(약 200원)의 버스요금을 주고 천산 행 시내버스에 올랐다. 중국은 금연지역이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피우는 담배연기를 신나게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안산의 길거리는 새로운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 허문자국이 계속 이어졌다.
큰 도로 옆에는 전차가 나란히 가고 있었다. 천산의 광광 지로 특화 시키기 위한 거리 정비 작업과 재계발 움직임의 흔적을 계속 볼 수 있었다. 한 25분을 달리고 나니 안산시내를 벗어나 천산으로 가는 진입로가 나왔다.
가는 길에 평야뿐이던 곳에서 작은 산들이 나오기 시각하더니 천산 이윽고 도착을 했다. 주차장에서 천산입구 까지는 아주 아스팔트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다. 최근에 정비를 대규모로 한 모양이 역력했다. 이미 해가 저물었고 주위의 빈 관에서 나온 호객 군들이 뒤를 따르며 가격을 제시를 했다. 기념물에서 사진을 몇 장 찍으며 천산의 정문에 도착하니 입장료를 파는 곳이 나왔다. 일인당 30원(약 4,050원)이 입장료이며 1원을 보험료로 징수를 했다. 산악사고에 대비한 보험으로 강제적으로 가입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일단 들어가서 숙소를 잡기로 하고 입장을 했다. 쭉 아스팔트길이 이어졌다. 조금 올라간 곳에서 빈 관에 들러 방값을 흥정을 했는데 처음에는 비싼 방을 보여주어 싼 방을 보여달라고 해서 싼 방을 찾았으나 침대가 네 개이므로 빈 침대 값도 같이 내라고 요구하여 그냥 나왔다. 그랬더니 다시 우리를 불러 원하는 가격에 방을 주었다. 일인당 20원(2,700원)에 투숙이 가능했다. 장의영사장님은 중국 거류민 증이 있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여 잘 흥정을 한 결과였다.
식당을 찾아 안내 해준 곳으로 가니 사방이 막힌 곳에 아마도 술도 한잔하면서 천산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 나와서 천산공원 밖으로 갈려다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곳 역시 관광지라서 그런지 약 20%정도 물가가 비싼 편이었다. 안주를 몇 가지 시키고 밥을 시켜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주문하여 반주를 곁들였다.
몇 잔한 뒤 장사장님이 먼저 기타와 하모니카로 반주를 해가면서 천산에 온 느낌을 새록새록 노래에 담아 뽑아 내었다. 나도 단소를 불어 그 분위기를 뛰었다. 이 식당의 식구들은 한 10여명 되었는데 우리들이 노래와 음악을 하는 것이 신기한 듯 구경을 했고 답례로 땅콩 튀긴 것과 싱싱한 야채와 고추장을 안주로 그냥 주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이 중국식당의 식구들의 손이 바쁘기 시작했다. 의자를 한쪽으로 옮기더니 우리의 탁자를 안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천막으로 된 지붕에서 이곳 저곳 비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천산에는 등나무로 된 지팡이가 유명하다. 이 집에도 지팡이를 벽에 많이 걸어 두었다. 그 중에 용 모양으로 이리저리 꼬인 것은 가격이 80원에서 100원(약 13,500원) 정도를 했다. 손잡이부분에는 용의 입을 거리고 색칠을 해서 용이 똬리를 틀고 않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의 연주 덕택에 우리는 3원(약 400원)에 각각 한 개씩 지팡이를 살수 있었다. 그 지팡이는 내내 천산을 등반할 동안 짚고 다니고 한국에도 가져와 내 집 마루에 걸어 두었다. 가볍고 참 실용적인 지팡이 였다.
나에게 영제시조 (嶺制時調)를 사사해주신 古 一寬 李基綾(일관 이기릉) 선생님의 취미 중 하나는 지팡이를 모으시고 또 실제 걸으실 때 멋있게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는데, 이 천산의 지팡이를 보니 선생님이 생각이 났다.
우리가 노래를 하는 동안 이 식당의 식구들은 비디오를 보았다. 화질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다른 오락거리가 없는지 모두 화면 앞에서 뚫어져라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를 보니 옛날 우리가 어릴 때 유행한 “원더우먼”의 중국판인 듯 했다.
마신 맥주에 화장실을 물어보니 안내해준 것이 바로 뒤쪽의 숲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식당에는 별도로 화장실이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놀며, 마지막에는 우리나라의 가곡을 들려 주었다. “벽사 창이 어룬 어룬커늘” 로 시작하는 언락과 “이태백의 주량은 그 어떠하여” 로 시작하는 언롱을 불러 주었다.
특히 언 롱의 가사 내용의 설명을 잘 안되지만 중국어로 해 주었다. 마침 이태백이나 두목의 글씨가 한자로 되어 이 식당 주인이 읽을 수 있었다.
우리 나라식 풍류에 대한 인상을 이 조그마한 중국식당 가족들에게 깊이 싶어 준 밤이었다.
세 명이 식사와 맥주를 신나게 마시고 지팡이까지 하나씩 사고도 103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3원은 디스카운트하여 100원(13,500원)을 지불하고 숙소로 왔다.
비가 내린 뒤의 천산의 기온은 뚝 떨어져 나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빈관 에는 아무런 온방시설이 없었다. 물론 온수를 흘려 난방을 하는 시설이 있지만 이런 봄 계절과 날씨에는 전혀 난방이 없다고 한다.
찬물로 양치질과 고양이 세수만 하고 말았다. 화장실은 별도의 장소에 공동으로 사용토록 한 층에 남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봄 날씨에는 서울에서는 거의 팬티바람으로 잠을 자던데 익숙한 나는 갑자기 닥친 추위에 가져간 옷을 다 입고서 양말까지 신은 체 여분의 침대의 이불까지 덮은 체 잠을 청했다. 색다른 체험이었다.
차를 만들어 먹기 위한 더운물을 크다란 보온병에다 가득 담아다 주었다. 하지만 차는 없고 더운물만 가져 다 주었기에 더운 찻물에 몸을 녹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심 양을 거쳐 안산의 천산에서의 중국여행 둘째 날이 저물었다.
셋째 날(4월 30일 일요일)
마신 술 때문인지 천산의 맑은 공기 덕택인지 아니면 너무 추워서 인지 나는 새벽에 눈을 떴다. 경도가 높아서 인지 새벽 4시반 인데 벌써 날이 새고 있었다. 마침 인기척을 들은 빈관 의 남자주인이 정문 옆의 방에서 일어나서 문을 열어 준다.
밤에 와서 잘 보지 못했던 천산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중국에 오기를 잘 했다는 느낌이 왔다. 빈관 의 옆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앞에 사자상이 아주 크게 석고로 만들어져 있었다. 사자의 턱 아래부분은 많이 깎여 모양이 약간 추해 보였지만 사자상의 위용은 그대로 인 듯 했다.
이리저리 거닐다 다시 자리에 들어 동행한 우 교수님과 장사장님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6시에 천산등반 출발을 했다.
중국에서는 빈 관에 머물 때 보증금 비슷하게 숙박료 외에 일정액을 더 지불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찾아간다. 우리도 어제 저녁에 숙박료 60원에 보증금 50원을 더하여 110원을 주었다가 아침에 50원을 돌려 받았다.
얼아 안가서 마침 우리나라 콤비 정도의 차량이 와서 5원씩 주고 올라탔다. 오늘 일정이 빡빡하여 걸어올라 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였다. 10분 정도 남짓 올라가다가 차는 멈추어 방향을 바꾸었고 대부분의 승객이 내렸다. 차량은 거기까지 운행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다른 입구를 거쳐서 내려 가겠지만 우리가 올라가려는 오불(五佛)은 여기서 올라 가야 한다고 해서 내렸다.
또 입장료 20원(약 2,700원)씩을 내어야 했다. 최근에 주위를 말끔하게 포장을 하고 그 비용을 입장료로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바로 빈관 이 하나 있었는데 절묘하게 터를 잡고 있는 풍경이 묵음 직했다. 그래서 우 교수님이 그 집의 연락처를 적어 나중에 다시 올 때 묵겠노라고 했다.
넓은 터에 부처상이 있고 중국승려가 향을 팔고 있었다. 향을 사서 피운 뒤 절을 하며 공덕을 비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정성스레 쌓은 돌계단이 끊임없이 나왔다. 흡사 그 돌계단은 우리나라 강화도의 마니산 등산 때 접하는 돌계단이 연상이 되었다. 입구부터 선물을 파는 가계가 보였고 눈에 띄는 것이 금색으로 된 부처상이 그려진 명함 모양의 카드 였다.
또한 붉은색 천에 복을 구하는 말귀를 적은 천도 팔고 있었는데 이것을 나뭇가지에 묶어 둔 것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나로서는 저런 천 조각도 팔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얼마 올라가 정자모양의 건물 밑에 의자가 놓인 자리에서 각각 사진을 찍었고 장사장님은 산에 온 느낌을 노래로 표현을 했다. 이때 빵을 지고 올라가는 중국인 상인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니 아까 연락처를 주고받은 그 빈관 의 경치가 한결 좋아 보였다. 다음에는 꼭 저 빈 관에 머물러보아야 겠다고 우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불 이 아닌가!
멀리 서 보이는 형상이 오불 인듯 아닌 듯 했다. 저 건너 절벽의 바위 5개가 어 울어져 5개의 부처상을 이루어 오불 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낌없이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중간중간 고개정상에는 용하게도 터를 만들어 암자나 가계를 만들어 놓았다. 그 중에 특이한 것은 복(福)을 기리는 글자가 한면에 새겨진 자물쇠에 자기이름을 새겨 길의 난간의 쇠파이프에 열쇠를 채워 놓은 것이다. 어떤 곳에는 이들 자물쇠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참 중국인 다운 발상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정상에 이르러 보니 암자가 있는데 앞뒤 양쪽으로 문이 나있다. 앞의 문은 일반 절의 문처럼 스님이 손님을 맞아서 향을 팔고 있으며 암자 내에는 좌우로 사천왕이 그 엄한 모습으로 내려보고 있으나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빈 자리이다. 다만 뒤로 앞의 문만한 창문이 활짝 열려있고 저 건너 절벽이 대불(大佛)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분명히 올라올 때는 오불 이었는데 여기에 오니 대불이 아닌가! 세계에서 제일 큰 부처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향을 살 형편은 안되고 해서 태우려고 둔 향 다발에서 향을 하나씩 꺼내어서 불을 붙어 꽂아 두었다. 마치 유비,관 우,장비가 도원결의나 하듯 향을 나란히 3개 꽂으니 마음이 사뭇 달라졌다.
중국의 향은 아주 크기에서 한국의 향을 압도했다. 약 70cm가량의 길이로 향이 한 묶음을 이루어 팔려지고 있었다. 불을 붙이는 데에도 옆에 있는 촛 물을 가득 담아두고 나뭇가지 하나로 심지를 삼아 타고 있는 곳에 촛 물을 묻혀 한참을 불을 붙여야 불이 제대로 붙는 것이었다.
다시 가파른 등반이 시작되었는데 각도가 거의 70-80도에 이르렀다. 특이한 것은 계단의 넓이 였는데 거의 10cm가 채 안되는 곳도 있었다. 옆으로 걸어 올라가야 신발이 들어가곤 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천신 제를 지내던 터를 발견했다. 하늘을 향한 바위 끝에는 큰 웅덩이가 파여 져 있었는데 이것은 동남아의 천신제 터의 특징으로 옛날에 양을 비롯한 동물을 죽여 제사를 지내면 제물로 쓰인 동물의 피가 고여서 넘쳐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판 자리라고 한다.
우 교수님에게는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기록용 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세게 부는 가운데 장의영사장님은 하늘에 전하는 노래를 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마침 중국 남녀 학생 한 쌍이 와서 카메라에 문제가 있다고 도움을 청한다 . 문제는 카메라의 필름을 다 사용하고 난 뒤 되감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어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별다른 수가 없어서 뒤 뚜껑을 열고 강제로 조금씩 힘으로 당겨 빼 내었다. 약 5분이 소요되는 긴 작업이었다. 모두들 그 필름을 뺀다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사장님은 다음에 필름이 끼이면 사진관에 가서 암실에서 빼면 사용이 가능하다는 친절한 당부의 말씀도 빼지 않으셨다. 두 사람의 중국 젊은이에게 한국인의 인상이 매우 좋게 기억이 남았음을 인사하고 가는 두 사람의 눈에서 나는 느낄 수 있어서 흐뭇했다.
이윽고 우리는 정상에 도착했다. 아침 10시가 안된 시간이었다. 정상에는 몇 평 남짓한 공간이 있었고 여기 한 중간에 기념품을 파는 가계가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얘기들의 기념품으로 소뿔로 된 나각 모양의 피리를 10원(약 1350원)에 샀다. 진짜 소뿔로 만들었으나 앞에는 그냥 불면 소리가 나는 리더가 꽃 혀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사장님의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를 시작으로 나의 단소연주 및 민요 연곡으로 한 시간 가량 정상에 오르내리는 중국관광객 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하기를 한시간 가량 머문 후 마지막으로 정상을 내려가기 전에 “야호”라고 크게 외쳤다. 중국인들은 정상에서 야호 라던지 다른 어떤 소리도 지르기 않았다. 이것이 신기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우리가 야 호를 외치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한 무리의 중국아주머니 부대가 우리의 야호 소리를 흉내내어 크게 따라 소리를 질렀다.
이것을 필두로 산을 내려 올 때까지 우리의 소리 뒤에는 항상 중국등산객의 소리 대답이 이어졌다.
약간 내려온지점에는 12나한상이 보존된 동굴이 있었다. 현재는 진 입구의 가파른 절벽에 길을 내는 공사가 분주했다. 여기를 잠시 들렀다가 다시 내려오니 몸이 겨우 빠져 나갈 만한 바위틈의 공간이 있었다. 물론 우회하는 길도 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이길 을 통해 내려왔다. 내가 겨우 빠져 나갈만한 공간이었다.
중간쯤 내려오니 이 천산의 한 중심으로 생각되는 곳에 아주 평평한 단을 쌓아둔 곳이 있었다.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니 천산의 사방에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천산의 구조가 꼭 연꽃을 닮았고 이곳이 연꽃의 한 복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간 고생한 발을 쉬어 쉬엄쉬엄 내려왔다.
산을 내려 길 끝에 당도하니 철조망으로 길을 막아 놓았고, 중국공안도 소리를 치며 다른 길로 가라고 한다. 알고 보니 천산을 오르는 다른 길로 우리가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 입구보다는 아래의 지점인 것 같았다. 입장료를 받기 위해 일부러 막아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그 길을 피해서 좀더 아래로 가서 계곡물을 건너 큰길로 내려왔다. 다음에 천산의 대불을 보러 올라가려면 이쪽으로 내려온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될 것도 같았다. 천산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다시 대불입구에서 입장료를 내는 것이 중국식이라지만 나는 못 마땅하게 생각이 되었다.
조금 내려오다가 몰래 길가에서 장사를 하는 할아버지로부터 흙으로 빗어서 구운 새 모양의 피리를 샀다. 공안의 차량이 오자 황급히 좌판을 치우는 것이었다. 이 천산 내에서 장사를 하려면 공안에 신고를 하고 돈을 지급한 뒤 해야 하며 이처럼 무허가로 장사를 하면 불법이라고 한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이 흡사 한국에서 길거리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 새 피리를 부르면서 내려오다가 우리나라의 분식집 비슷한 곳에 들러서 아침을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만두와 중국식 자장면 그리고 김치를 주문했다. 만두는 거의 비슷한 맛이지만 중국 자장면은 짜기만 하고 아무런 맛을 느낄 수 가 없었다. 나는 만두 국물을 부어서 싱겁게 한 뒤에야 면을 먹을 수 있었다.
이곳에 한국식 자장면을 가져와 김치를 곁들여 장사를 한다면 아주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식 자장면은 분명히 내가 어린시절 최고의 외식할 때 선택되던 메뉴처럼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특히 김치가 곁들여서 접대가 된다면 중국인들이 한번 맛을 본 뒤에는 거부하기 힘든 한국의 음식이 될 것 같았다.
천산의 입구에 와서는 여행사 유니폼을 입은 중국아가씨 들 한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물으보니 천산을 안내하고서 일정액의 안내료를 받는다고 한다. 그 중 천산 정상까지 안내료를 물어보니 80원으로 가장 비싼 안내 코스였다. 그 중의 한 아가씨에게 양해를 하여 기념촬영을 천산입구를 배경으로 하고 나왔다.
안산시내를 거쳐 온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떠났다. 이번의 버스는 약 25인 승의 작은 버스로 저 번에 올 때 탓 던 버스보다는 좀 작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그래서 운임이 약간 더 비쌌다.
중간에 버스 안에서 일정을 생각해보니 온천 욕을 하고서는 심 양에서 선물 등을 구매할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안산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심 양행 버스를 탔다.
우리는 제일 뒷자리 5석 중 3석에 앉았다. 이윽고 모든 자리를 채우자 갑자기 창문 옆에서 보조의자를 꺼내더니 버스 복판의 통로에 일렬로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앞쪽까지 자리를 채운 뒤 빈공간이 없어지자 버스는 출발을 했다.
나는 비 흡연자로서 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진한 중국담배연기와 싸워야 했다. 내 주위로만 5-6명이 동시에 흡연을 해서 솔직히 숨을 쉬기가 곤란할 정도 였다. 차량이 출발을 하고 창문으로 신선한 중국시골의 공기가 들어오자 나는 담배연기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시외버스는 중간에 자꾸만 정차를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내리더니 물건을 가지러 간 모양인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 다시 타자 출발을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동네의 뒷사람이 아직 오지를 않은 모양인데 그 사람들이 올 때 까지 기다려 억지로 빈 공간에 밀어넣어 태운 뒤에야 비로소 출발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비좁은 공간에서 40대의 여자 승무원이 갑자기 신발을 벗고 통로에 놓인 간이의자를 타고 순식간에 우리가 앉은 뒷자리까지 와서는 표를 걷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에 중국인들은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임했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어 하는 일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안산을 출발하여 심 양에 도착할 때 까지 꼼작 없이 내 자리에서 있어야 했다.
이런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29인 승 우등고속버스가 인기를 모 을쯤이면 중국은 이미 선진국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버스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달려 심양 시내로 진입했다.
심 양의 외곽도시에 이르지 자전거와 손수레를 붙여놓은 것이 눈에 많이 띠였다. 심양 시내에서는 짐만 싣고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아예 망사나 유리를 사방에 씌워 사람을 태워 다니는 인력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외곽을 지날 때 까지 이 진귀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대중교통이 부족한 것을 이런 것으로 대신하는 것 같았다.
심양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길거리에서 중국식 소금을 파는 것을 구경하고는 몇 개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서탑거리로 돌아와서 옥을 파는 가게에 들러 옥도 장을 아내와 두 아들의 것을 포함하여 4개를 주문하고 장모님에게 줄 옥 베게 보와 아내가 무척 가지고 싶어하던 진주목걸이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참기름을 한 통 구입하고는 죽엽주도 대나무통에 담긴 것으로 한 병 샀다. 이렇게 하여 모든 선물구입을 마치고 심 양에서 유명한 평양관이라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불고기, 가자미식혜, 김치 등과 중국산 고량주(38도)를 주문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아가씨들이 음식을 나르는 모습 등이 모두 신기한 체험이었다. 한국에서 “남북의 창”에서 보던 그 검은색 원피스 치마에 흰색의 브라우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왔다갔다하는 것만 보아도 신기했다.
얼굴만 보아서는 북한아가씨인지 구별이 안 갔지만 일단 북한 사투리로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순간 분명히 북한에서 왔음을 알 수가 있었다.
한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보니 이제 중국 심 양에 온지 4일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심 양에 왔다고 한다. 음식을 나르는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어보니 먼저 와서 경험이 많은 언니에게 물어 보더니 찍어도 된다고 해서 겨우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도중에 식당의 전후의 벽에 설치된 화면으로 노래 가사가 나오고 북한 선정용 화면이 나오면서 북한 아가씨들이 마이크를 잡고 중국 노래를 한다. 중국 노래는 한 두 곡 했어 나 나는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나, 중국인들은 신이나 앵 콜을 계속하여 한 아가씨는 연속 2-3곡을 불렀다.
이윽고 그 유명하다는 “반갑습니다” 와 “휘 바람”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두 곡은 북한에서 가장 유행하고 인기가 있는 곡이라고 한다.
그 중에 나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다. 체구는 작은 편이나 노래를 하는 목소리가 다른 아가씨들과 차이가 있었다. 아마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여창가곡을 한번 했으면 하는 그런 목을 가진 아가씨였다.
나는 그 아가씨의 노래가 끝나자 ”제일 노래를 잘한다” 고 크게 외치면서 가지고온 단소로 아리랑을 불어서 답례를 하고 노래를 청했다.
나중에 이름을 불어보니 “리 미희”였다. 명함을 건네고 통일이 되면 꼭 우리나라 전통 가곡을 배워보라고 했다. “ 저는 전망이 없시요”라고 연신 답을 한다. 마지막 남은 필름으로 이 아가씨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찍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마지막 중국에서의 저녁식사를 인상 깊게 하고는 장의 영 사장님과는 헤어지고 우 교수님이랑 요령대학에 돌아와서 돌아갈 짐을 챙겼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내일아침에 심양공항에 간다고 기사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요금을 물어보니 약 80원이면 된다고 하고, 내일 요령대학교 서문에서 자기동료가 지금 탄 택시를 몰고 대기토록 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으면 타겠다고 하고는 그 택시 번호를 적어 두었다.
저녁에는 서 탑에 가서 목욕과 안마를 받고 돌아와 일찍 잠에 들었다.
넷째 날 (5월 1일)
새벽에 전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장사장님이 아침 6시라며 일어나라는 모닝 콜이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반 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시계를 천산에서 잊어버리고는 창가가 훤하니 분명히 아침이라는 생각에 무조건 전화를 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 나는 잠을 다시 쉬 이룰 수가 없었다.
중국에 오기는 왔으나 돌아갈 일이 만만찮았다. 비행기는 9시에 출발하므로 서둘러야 했다. 나는 먼저 비행기표와 여권을 확인하고는 비행기 표를 Confirm하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북방항공에 전화를 했다.
중국어로 중국아가씨가 대답을 했다. 나는 영어로 오늘 타는 비행기의 자리를 reconfirm하기 위해서 전화를 했다고 설명을 하고는 내 이름과 편 명을 불러 주었다. 한참이 지난 후 이름은 있으나 오늘 비행기에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이름을 정확하게 다시 불러주고 재 확인을 요청하니 전화기 저편에서 중국어로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리더니 예약상황을 확인해 주고 자리가 있다고 말해주어 나는 무척이나 안도가 되었다. 특히 5월 1일 노동절이 끼어서 자리가 없을 수 있다는 예측을 미처 못하고 있었다가 혼이 났다.
6시경 일어나 우 교수님이랑 요령대학교내 가계에 가서 삶은 달걀을 6개 샀다. 이것은 소금을 넣은 검은색 빛이 도는 중국찻물에서 삶은 것으로 계란에는 금이 가 있었다. 찻물이 잘 베여 들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나는 이 가계에서 어제 저녁에 평양 관에서 마신 고량주와 똑같은 술을 찾았으나 없어서 38도로 도수만 같은 것으로 한 병 구입을 했다. 이 술의 특징은 뒷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계란과 주스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요녕대 서문에 나오니 어제 약속한 택시가 정말로 기다리고 있다. 운전사만 바뀌고 차는 바로 어제 탓 던 그 번호가 분명하다. 미리 약속한 운임 80원(약 10,800원)을 지불하고 아침길을 달려 심양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나 혼자 중국에 남겨진 심정이 공항을 들어가면서 느끼는 심정이었다.
미국이나 영어가 통하는 국가라면 나는 정말 자신 있고 더 당당했겠지만,
다가오는 그 이국적인 두려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5월 1일은 노동절로서 중국인들은 3일간 연휴라고 한다 길게는 6일간을 쉰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중국의 다른 도시로 비행기로 여행하는 중국인들로 많이 붐볐다.
나는 출국하는 곳이 2층일 거라는 생각에 2층으로 일단 올라 갔다. 하지만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마침 처음 심 양에 오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 리에 탑승한 여학생을 만났다. 만자자 마자 자리가 없어서 못 가게 생겼다고 한다.
일층의 오른쪽에 공안들이 지키는 곳을 지나서 가니 북방항공의 Boarding을 하는 곳이 있었다. 짐을 맡기고 Boarding을 마치자 여행용 가방을 열어 보라는 것이다. 열어 보였더니 죽엽주는 가방에 넣으면 안 된다고 난리들이다. 중국인 2명이 번갈아 뭐라고 계속하는 가운데 20원(약 2,700원)을 내라고 한다.
나는 영어로 왜 주어야 하느냐고 대꾸해 보았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남은 100원을 주고 80원을 받았더니 비닐 팩으로 된 장 바구니를 하나 준다. 여기에 넣어서 손에 들고 탑승하라는 이야기인 듯 하다.
이렇게 하여 짐을 부치고 나니 공항 세 90원(약12,150원)을 낼 돈에서 10원이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낭패가 ! 공항 세를 나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만약을 위해 100원을 남겨 두었는데 항공사 직원들에게 20원을 뜯기고 나니 10원이 모자랄 것이 아닌가?
환전을 하려고 은행에 갔으나 창구는 문이 닫히고 노동절 공휴일이라 문을 안 연다고 한다. 그래서 옆 자리에 않았던 여학생을 배웅하러 온 남자친구 분에게 10원을 급히 환전하여 공항 세를 무사히 낼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엄청나게 줄을 길게 서서 출국심사를 받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묶음의 여권을 우리가 선 줄 앞의 심사원에게 전달되는가 싶더니 한참동안 진도가 안나 가는 것이었다. 앞의 한국분 이 설명해 주기를 저쪽 줄의 것을 먼저 처리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살벌하게 큰 소리를 치는 공안들의 작태는 외국인이 나에게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나가자 비행기 표에 Gate의 번호가 안 적혀 있다. 나 외에도 한 무리의 한국분들 이 1번 Gate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히 9시 비행기인데 8시 55분까지 안내방송도 하나 없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혹시 2번 게이트 쪽이 아닌가 하고 말하며 일어서자 내 주위의 한국분들 이 모두 일어나 헐레벌떡 모두들 2번 게이트로 가니 이제 막 탑승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1번 게이트로 탑승을 시키려고 했으나 손님이 다 타지 않아 지연이 되고 그 바람에 우리가 탈 서울행 비행기의 탑승구가 2번으로 갑자기 바뀐 듯 했다.
이렇게 비행기에 오르고서야 이제야 집에 가는 구나라고 실감이 나고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비행기의 맨 뒤쪽 화장실 바로 앞쪽의 창쪽 자리로 창문이 없이 막힌 공간이라서 많이 답답했다. 빈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노동절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려는 교포와 중국인들이 많은 것 같았다.
옆에 탑승한 한국 분에게 물어보니 그 분들도 웃돈 을 주고 중국에서 여행사를 통해서 표를 겨우 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출국심사 및 세관통관을 하려고 하니 중국에서 구입한 생황이 든 가방을 두고 세관원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한다.
나는 중국에서만 생산되는 악기로 구입한 것이며 열어서 보여드리겠다고 하니 그냥 통과하라고 한다. 잘 했으면 공항에서 생황의 그 웅장한 중국생황의 소리를 한번 내어 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큰 소리를 내냐고요?
모든 구멍을 막고 소리를 내면 큼 덤프트럭의 경음기 소리적도 되지요
단소 한 백 개 소리에 맞먹는 음량 이라 고나 할까요
이로서 나의 중국여행은 그 막을 내렸다.
여행경비 내역
왕복 비행기요금: 315,000원 (북방항공 / 투어아트예매 Tel.02-771-8885)
현금소지 액: 약 400,000원 그래서 총 715,000원을 들었다.
구입 품: 중국 제 생황 1개 , 중국식 소금 4-6개
용 무늬 옥 도장 4개, 베게 보 4개, 옥 반지: 5개,
진주 목걸이/팔지/반지 한 쌍
참기름: 2.5리 터 1병,
죽엽주: 대죽통에 담긴 것 2통
중국 고량주 1병 , 천산 기념품으로 지팡이 하나, 소뿔나각 1개
안내를 잘 해주신 장의영사장님과 우 실하 교수님의 덕택에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심 양 및 안산을 잘 구경했으며 다음에는 중국 향 배를 타고 여행을 계획중이다. 이때는 국악을 하는 동호인들과 함께 연주여행도 겸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