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베르트 엘리아스/김수정 옮김/문학동네
1.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이다.(p10)
나아가 죽음은 인간만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한 걸음 나아가면
죽음은 산 자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둘러싼 샤머니즘적인 의식이나 제의 등은 인간이 죽음 너머의 그 무엇에, 즉 사후의 생에 대한 열망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죽은 자를 위한 책이거나 죽어 가는 자를 위한 책도 아니다. 물론 저술은 무엇을 반드시 '위하여' 씌여질 필요는 없다. 더더군다나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얼만 간 떨어져 있지 않은가? 남들은 다 죽어도 나는 아니야. 하는 식으로.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각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항시 죽음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는 것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나의 죽음을 상기하는
것에 이렇게도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문명화의 과정'을
통한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규명하려는 것이 이 책의 주제가 아닌가 한다.
2. 옛날에는 죽어가는 것이 오늘날보다 상당한 정도로 공개되어 있었다.(p28)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죽어있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죄수에 대한
처형이 공개적인 공공의 광장에서 자행되었고 돌고 도는 유행병에
의한 타자(들)의 죽음은 당시의 개인을 통해 내면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죽어가는 자의 임종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 죽음의
절차에 참여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화는 성의 담론을 보다 유연하게 생산하는 반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삼가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치 죽음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음식처럼 죽음에 대한 담론의 주제는 죽음 그 자체를 문명의 전체로부터 배제시키고 죽음 그 자체를 개인 혼자만 짚어져야 하는 고립된 상황을 배태하게 되었다. 또한 죽음은 언젠가부터 과학, 의학의 발달에 따라 자연적, 생물학 적인 기제가 아니라 인위적인
장치에 의해 연장 가능한 시스템으로 녹아 들어갔다. 이는 죽음
자체가 문명의 현상유지나 권력의 기동과 특수한 상관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문명의 금기가 그들의 혀와 손을 묶어 놓았다.(p42)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다만 죽음 앞에 직면한 상황을 경험할 뿐이다. 이는 인간이 죽음 앞에 직면한 상황 역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즉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고나 재앙, 재해를 의미하는 포괄적
의미가 아니라 자연사 당하는 인간에 그 포인트를 맞추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문명인이 죽어가는 자를 대하는 방식은 어떠한가를 알 필요가 있다. 죽어가는 자의 입장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거에는 죽어가는 자에 대한 애정과 사후 세계로의 연결의 낙천적 해석을 부여함으로서 임종을 맞이하는 자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가 격리되고 산 자들로부터 배제되지 않았다는
일종의 표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문명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이들은 죽음이라는 관념 자체를 일종의 당연한 그러므로 에누리
없는 애정을 표시하거나 격려나 위안 등을 결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용은 권력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론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가?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가진 공포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주요한 권력원(權力源) 중의 하나가 되면서 이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지배가 정당화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P50)
이러한 문명의 권력은 대중으로 하여금 죽음을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의학과 보험에 의해 죽음을 연기시키는 시도'에 암묵적인 의지를 하게 함으로서, 나아가 천편일률적인 속도와 일상의 여가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서 '잊게 한다'. 즉 죽음을 공적인 영역으로 돌려버림으로서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사태로 간주하게 한다.
4. 문명화는 내적자아를 외부세계의 대척점으로 놓았는가의 문제.
나는 엘리아스가 강조하는 이러한 분리에 대해 각론에 있어서는
동의 하지만, 총론에 있어서는 반대한다. 나는 문명의 세례를 받은 세대이다. 그러나 이 외부세계가 대상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지만 문명의 외부세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적자아를 포섭하는 주도면밀한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외부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로의 진입을 항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내적자아가 내부세계에서 외적 객체를 물화 해버린다는 것이다. 즉 죽음을 성찰할 기회를 잃어버림으로서 타자의 죽음은 물론 나의 죽음으로부터도 이미 소외되어 있다. 엘리아스는 이것에 관한 대안을 피력하고 있지 않다. 다만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죽음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라고 강변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일견 타당한 논거는 과학과 의학의 발달이 죽어가는 자의
죽음 그 자체에 이 따른 사람 자체의 배려보다는 장기(기관)에 더
주목하여 전자가 뒷전으로 밀려버린다는 것이다. 즉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문명화가 될수록 심화된다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