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돌아가자
지난 4월 7일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게재된 한스 큉 교수의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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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돌아가자
한스 큉 (한스 큉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자문역이었으며, 튀빙겐 대학교의 교회일치신학 종신교수이다. –저자 소개는 원문)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교황이었지만, 반면에 많은 잘못된 결정을 내린 교황이었다. 밖으로는 인권을 표방했지만, 안으로는. 주교들에게, 신학자들에게, 그리고 특히 여성들에게 인권을 거부하였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극도의 공경을 행하면서,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순결을 설교하고, 동시에 피임과 여성 사제서품을 금지 하였다. 그는 대규모 가난과 전세계적인 빈곤에 반대하는 설교를 펼쳤지만. 동시에 산아제한과 인구폭발에 관한 그의 생각으로 인해 이러한 빈곤의 공동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독신남성이라는 전통적인 사제의 모습을 설파함으로써, 그 결과로 사제의 엄청난 부족, 여러 나라에서 성소의 극적인 감소,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숨기기조차 어려워진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에 관한 일부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규모의 인플레이션적인 성인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순종적이지 않은 신학자, 사제, 수도자들에 대한 명백한 검열을 행하였다. 그는 교회 일치의 전도사임을 자처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동방정교회와의 관계개선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그는 다른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신교와 구교간의 예식을 공유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분명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했으면서도, 이 공의회의 결정 사항인 교황과 주교들의 협력적인 지도체제를 우롱하고 모든 경우에 교황권의 승리를 만끽했다. 그는 다른 대형 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했지만,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들은 불충만한 신앙의 형태로 소개했으며 곧 한수 아래로 간주하였다. 그는 사적, 공적인 도덕의 충직한 변호사를 자임했으나, 세상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경직성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도덕 당국으로써의 모든 신뢰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모순들로 인해, 이 교황은 교회를 심각하게 한쪽으로 기울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결국 요한 23세 재위 시절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시절에 이루었던 신뢰의 정점을 넘어 교회를 근본적인 위기로 접어들게 하였다. 가톨릭 위계의 상층부와 대중매체 영역의 그들 중개자들은 단순히 이 위기를 전적으로 세속화된 세계, 개인들의 도덕성 저하 및 가치 상실의 탓으로만 돌렸다. 이 위기에 대한 진짜 설명은 쉽다. 적잖은 문제들이 ‘교회 내에서 저질러졌으며’, 위기의 일차적 책임은 위계적인 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이전 교황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은 누적되어온 수많은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는 것이며 가톨릭교회 위기의 모든 출구를 차단하는 것이다. 신임 교황은. 요한 23세의 정신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적 자극의 연장선상에서, 정책 전환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하며, 교회에 개혁적인 단절의 용기를 불어 넣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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