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강변은 한강의 본류와 중랑천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두모포(豆毛浦)다.
원래는 ‘두멧개’,‘두물개’,‘두뭇개’라고 불리었다. 그 두뭇개가 한자음화하여 두모포(豆毛浦)가 된 것이다.
일찍이 동호(東湖)라고도 불리었다. 서해의 밀물이 미치지 않아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해서 동호라고 했다.
두모포 부근의 지형은 뒤에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한강물이 호수처럼 흐르는 일찍부터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조선 초기에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유하정(流霞亭), 연산군(燕山君)이 황화정(皇華亭), 김안로(金安老)가 보락당(保樂堂)을
이 곳에 짓고서 절경(絶景)을 즐겼다.
중종 때에는 이 곳에 동호독서당을 지어 젊은 선비들로 하여금 연구에 힘쓰게 했다.
중종 12년(1517)에 응봉 남쪽 기슭 옥수동 244번지 일대에 있던 두모포 정자를 고쳐 독서당을 설치한 것이다.

두모포나루는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던 한양도성에서 동남쪽으로 5리쯤에 있었던 작은 나루이다.
한강진의 보조나루로 일명 두뭇개나루라고 했다.
선박이 이 동호강변에 접안하는 데 용이하여 일찍부터 사사로이 나룻배가 운행되어 강 건너 강남구 압구정동 방면으로
행인을 건네 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을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한 나루터로 이용하고 있다.
경상도 · 강원도 지방에서 남한강을 경유하여 오는 세곡선(稅穀船)을 두모포에 집결시키고 있다.
곧 용산포로 이설되었다.두모포는 그 후 이 곳에 빙고(氷庫)가 설치되면서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집결되기도 하였다.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韓明澮)는 두모포 강 건너 돌출 부분에 압구정을 지어 놓고 강가에서 갈매기와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였다는데 여기에서 오늘의 압구정동의 명칭이 유래한다.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했다.
오늘에는 이 나루에 나루의 옛 이름을 딴 동호대교가 가설되어 전동차와 승용차가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