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 본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 1967. 10.9
1. 탄생과 진실을 향한 여행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 Che Guevara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중류층 가정의 미숙아로 출생했다.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고,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모두 노동자와는 거리가 먼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고, 무신론자였으며,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웠다. 모두 5남매의 자식을 두었으며, 게바라가 맏아들이었다. 에르네스토는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 천식은 그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이 천식의 고통이 후에 그를 의사로 만들었고, 병에 걸려 신음하는 민중을 치료하다가, 이들이 걸린 병마보다, 가진 자들의 억압과 착취가 더 큰 문제임을 인식하여 마침내, 민중해방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불사른 위대한 게릴라 전사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식에 고통받는 그를 위해 가족들이 모두 코르도바 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간다. 그러나 그는 천식 증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을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으로 배운다. 비록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그는 활동적이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돈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 옷차림도 자유롭고 활달했다. 그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았으며, 광적으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후에 그의 이 문학적 역량은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의 편지와 일기, 연설문 및 저서에서 보여지는 것 외에도 회견장에서 자작시를 낭독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에르네스토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反 페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벌써 이 시기에 그는 파시즘적 군사 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부르조아들의 "부(富)의 독점", 그 중에서도 특히 힘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청년 에르네스토는 특히 여행을 통해서 많은 지식과 견문, 그리고 후에 혁명을 위한 경험들을 얻게 되는데, 열일곱살 때, 자전거로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을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답사하게 된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은 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의 행동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당시만 해도 그는 행동하는 이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려 한 것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두 살때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서 였지만,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의 부모님들은 불화끝에 1950년에 이혼하고, 그는 어머니와 생활하게 된다. 그는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을 돕고 학비를 벌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한 건설회사에서 한때 사무원으로 일하며 공부했다. 1951년 그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데,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병들고 가난한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눈다. 같은 해 의사시험에 합격하자,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칠레에서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고, 페루의 나환자촌에서는 한동안 봉사활동에 열중했다.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는 폭동이 일어나,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헤프닝을 겪기도 했다. 여행은 그에게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소중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그곳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알 수 있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이러한 소중한 여행으로 인해서 훗날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땅에서도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힘없는 민중은 이미 그의 가족이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 중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된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다시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평소에 관심 가지고 있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알레르기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결국 그는 두달만에 흰가운을 벗어 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는 혁명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2. 일어서는 체 게바라 We are fighting against misery - Che Guevara
볼리비아 라 파스에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리카르도 로호와 만나게 되는데, 조국에서 추방된 이 반페론주의자와의 만남에서 그는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고, 남미 일부국가에서 이미 현실화 되어가는 사회개혁 운동과 부딪히면서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로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1953년 볼리비아 혁명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그의 의견에 따라 베네수엘라로 가지 않고, 과테말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관심을 두어 오래도록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좋은 조건으로 제의해온 의료담당관 자리도 거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자 가디아(Hilda Gadea)와 기거하며,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훗날 쿠바혁명의 둘도없는 동지인 피델 카스트로의 조직원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1954년 과테말라 중미의 이 작은 나라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면서, 혁신적인 정책을 폈는데, 당시 막강했던 유나이티드 프루츠사(미국 곡물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인디언과 소농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는 중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지독한 빈곤상태에 충격을 받고, 아르벤즈의 이 없는 자를 위한 정책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또한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그는 일생동안 간직한다. 이러한 경외심을 품고, 그는 드디어 혁명의 실천을 위해 패덴드 순켈에 의사로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과테말라의 우익 망명인사인 호세 카스틸료 아르마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고 군대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아르벤즈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CIA의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헐벗고 굶주린 민중을 철저히 파괴하는 반혁명 대리공작을 낱낱이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과테말라 좌익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막스-레닌에 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범죄에 정면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로 마음 먹는다. 마침내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이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의 청년은 후세 휴머니스트이며, 리얼리스트인 진정 위대한 게릴라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다시 태어났다. "체(Che)"는 스페인어로 "오!", "어이 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친숙과 존경을 표현하는 호칭이다. 하지만 "게바라"에 "체"가 붙으면 그 의미는 엄청난 것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 바로 격동의 60년대를 온몸으로 뜨겁게 살다간 가장 완성된 사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실천하는 이성이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인터뷰가 있어 소개한다. 이 인터뷰는 현재는 행방불명이 된 아르헨티나의 신문기자 호르헤 리카르도 마세티와의 대화이다.
"나는 아르벤즈 정부의 요직에 앉을 생각은 전혀 없소. 명백한 정치경제적인 침략을 자행한 미국과 미국자본의 횡포에 덩달아 날뛰는 반민족적인 매판자본가들에게 맞서기 위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군대를 조직하려 했을 뿐이요. 과테말라는 지금이야말로 투쟁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소."
미국 CIA는 처음부터 심각하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간섭했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선교사를 앞세운 미국식 민주주의란 것을 통해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갔다. 과테말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과테말라의 여러 지역이 CIA의 조정을 받고 있는 군대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아르벤즈는 피신할 틈도 없었다. 과테말라 쿠테타는 시작되자마자 어이없이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게바라는 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투쟁을 촉구하기도 하고 무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미 CIA의 사주를 받은 과테말라정부의 재판부가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정, 공고하였기 때문에, 게바라는 과테말라인 친구 엘 파토호와 함께 멕시코 시티로 도피한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게바라와 파토호는 어미잃은 새처럼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 역경을 혁명이론과 마르크스주의,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전술을 두루 연구하는 기회로 삼는다.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독서를 통해 게바라는 철저한 급진주의자로 변해갔다.
3. 혁명의 시작 Hasta La Victoria Siempre 자유라는 깃발 아래 분연히 일어설 줄 아는 인간이 되자!- Che Guevara
게바라는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피델은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했다.
“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 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라 전투에 다년간 경험이 있는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 맡았다. 베이요는 멕시코에서는 살바로르 태생의 지주로 통하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멕시코주 찰코 지방 부근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된 훈련과 사격연습에 들어갔다.
| 7.26운동의 지도자들은 수개월 동안 카리브해를 건너 전사들을 무사히 쿠바까지 실어다 줄 튼튼한 배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피델이 베라쿠르즈주의 리오타투스판이라는 작은 항구에 묶여 있던 고물이 다 된 보트 그란마호를 찾아냈다. 이 배의 주인은 미국인인 로버트 에릭슨이었는데, 피델 일행은 멕시코인 안토니오의 중개로 5만페소를 주고, 이 낡은 배를 별 수 없이 사들였다. 이 배는 1939년에 건조된 것인데 전체 길이는 19미터, 폭 4.5미터로서 정원은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약 20명 정도였다. 250마력짜리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수리해야 할 만큼 고물이었다. 그란마호는 1956년 11월 25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닻을 올렸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82년이나 승선했다. 게다가 연료, 무기, 전투복, 식량을 적재했으니 최대 시속 9노트에 48톤의 고물 보트는 출발하자마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쿠바의 동부 오리엔테주 해안까지 가는 가장 길고 비효율적인 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FBI나 멕시코 경찰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보트는 언제 격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승무원들은 모두 배멀미를 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게바라는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고 휩쓸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항로를 잃고 말았다. 상륙예상지점인 코로라다스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배는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해안에 배를 갖다대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쳐서 간신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망그로브 숲은 상륙지로는 최악이었다. 붉은 망그로브 숲은 바다 쪽에서는 두터운 장벽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나무들의 밑둥에는 라카로운 빛을 띤 굴조개 따위가 칼끝처럼 빛을 발하며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물 위로 드러난 망그로브의 뿌리에는 바늘깥은 가시가 돋혀있어서밟으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발밑은 뻘밭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기 쉬웠고 마치 뜨뜻미지근한 고기국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마저 불쾌했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커다란 게들이 우글거리며 기어올라와 전사들을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모기나 파리떼가 몰려오면 망그로브숲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세 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빠져나와 일행은 아침 9시에야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원정대원들이 늪지대를 막 벗어나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이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11시에는 폭격기 세대가 다시 나타나 피델과 그의 동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농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정대원들은 다시 쫓겨 나가야 했다.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쿠바에서의 악몽과 같은 첫 날에 대해 기록하였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 예정지인 코로다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부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수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멀미로 탈진해 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무모한 계획과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실수들이 후에 성공할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 지만... 장비 중에서 우리 손에 남은 것이라곤 총, 탄약대, 눅눅해진 탄환뿐이었다. 대부분의 구급낭과 배낭은 늪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잃어버렸다. 밤새도록 제당공장 소유의 사탕수수 밭을 헤치고 걸어나갔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대원들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행군 도중에 버렸기 때문에 나중엔 식량이 모자라서 사탕수수만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버린 음식 찌꺼기가 후에 화를 자초했다. 수색대가 이를 발견해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좋은 단서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길을 안내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에게 우리의 행로를 밀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쿠바진격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해야 했다.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 했다.“
12월 5일 바티스타군은 그들이 숨어 있던 알레그리아 델 피오라는 사탕수수 재배지역을 습격했다. 사탕수수밭에서 140명에 달하는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세 사람이 전사하고, 게바라를 포함하여 다수가 부상당했다. 대다수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버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과 바티스타가 두목인 1만 2천여 용병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전 속에서 단련된 장교들과 네이팜탄을 비롯하여 무엇 이든 탑재할 수 있는 최신형 전투기, 게다가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바티스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제국주의..... 이 모든 것들과 소수 게릴라들은 맞서 싸워야 했다.
4. 최초의 승리와 산타클라라 대첩 We will not allow another Cuba - Che Guevara
1956년 1월 16일 살아 남은 대원들은 본격적으로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1957년 라 플라타 병영 습격을 성공함으로써 게바라는 첫번째 승리를 이루었다. 이 역사적 승리를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전쟁의 회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57년 초, 우리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의 산악 지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의 병영(라플라타 병영)을 습격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험준한 산간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려져 쿠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습격은 게릴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투쟁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였고, 부대 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가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릴라군은 이 라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승리의 전과는 약 36명의 바티스타 군을 22명의 게릴라 부대가 습격, 라플라타 병영에 붙잡혀 있던 포로들을 이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쿠바 국내에서는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이 국민들에게 더 이상 게릴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뉴욕타임즈의 허버트 매튜즈라는 기자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 속의 게릴라 기지에 들어가 카스트로와 회견을 했다(1957년 2월 17일). 사진까지 곁들인 이 회견기사는 정부측 주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4월에도 미국의 방송국 기자인 봅 티버를 초청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이 회견 장면이 미국 전역에 TV로 방영되었다. 산속의 게릴라군과 도시의 레지스탕스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산속과 도시에서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이러한 통일전선은 게릴라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조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체 게바라는 이렇게 회고했다.
"열악한 조건이었다. 의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산속의 환자는 모두 비슷한 증세로 앓고 있었다. 이빨이 몽땅 빠져버린 노인, 기생충이나 구루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 여러가지의 비타민 결핍증, 이 모두가 시에라마에스트라 농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었다. 나는 단순한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조건 자체를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57년 6월에는 치과의사로도 개업했다.
“내가 진료한 첫 환자는 이스라엘 프라도였다. 그는 완전히 나아서 돌아갔다. 두번째 환자는 호엘 이글레시아스였는데, 그의 충치를 뽑기 위해서는 이빨에 맞춘 치료용 화약이 필요했다. 그건 일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이빨은 그대로 남아 잇몸에 달려 있었다. 그것을 뽑아내려고 온갖 짓을 대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치과의사역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고, 진통제 한 알도 없었다. 그래서 심한 충치로 고통받는 환자에게는 심리적 마취를 십분 활용했다. 즉 고통스런 치료가 성공하도록 주문을 외우게 하는 방법이었다.“
게바라는 의사로서 활동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산속에서의 전투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라플라타 병영 습격에서부터 엘우베로 전투, 엘옴브리트 전투, 그리고 알토스데콘라도, 브웨이시토, 피노델아구아, 마르베르데 등의 전투에까지... 이 공적이 인정되어 7월에는 소령으로 진급되었다. 게바라는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고, 조직가로서의 능력도 탁월하였다. 그의 생애 중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의 25개월간은 그를 조직이론가, 사상가, 전략전문가, 그리고 영웅으로 만들었다. 게릴라군은 산속의 근거지를 확고히 구축했다. 게바라는 병영본부를 건설하고 야채밭, 목장, 진료소, 빵 공장, 간이 방송국, 담배와 신발, 무기제작창 등을 세웠다. 물론 사소한 일이라도 신중하게 추진했다. 이 모든 것은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게바라는 등사판 신문 <자유 쿠바인>을 발간하여 병사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58년, 게릴라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역량을 강화해 갔다. 이해 2월, 게릴라군은 드디어 산을 내려가 혁명전쟁을 개시할 것을 결의했다. 시가전이 조직되었고, 독재자에 대항하는 투쟁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개되었다. 날이 갈수록 전선은 확대되었다.
1. 피델 카스트로 : 시에라마에스트라의 산 속에 남아 전부대 지휘. 2. 3월 라울 카스트로 : 시에라크리스탈 지역에 동부의 제2전선을 구축. 3. 후안 알메이다 : 산티아고데쿠바를 포위하기 위해 하산. 4. 카밀로 시엔후에고스 : 별도의 공격부대 지휘를 맡기 위해 섬의 서쪽으로 출발. 5. 8월 31일, 체 게바라 : 제 8공격부대와 함께 출발. 6. 에스캄브레이 산속에서는 또 다른 저항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다. 핵심적인 그룹은 '대학생동맹'과 '인민사회당(공산당)'이었다. 게바라가 이끄는 부대는 농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 옷은 너덜너덜하게 해어지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배를 채웠지만,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 들판에서는 하늘에 노출되어 있어 자주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해관계 때문이거나 혁명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참가했던 병사들은 자주 도망을 쳐서 밀고해 버리곤 했다. 이런 와중에도 게바라 부대는 20개 이상의 강을 건너며 섬 중앙부를 횡단하여 마침내, 에스캄브레이 산속의 게릴라들과 합류했다. 게바라는 그곳에서 가축을 훔치는 등,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던 산적과 다름없는 "자칭 혁명가"들의 규율을 바로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도적떼 같은 가짜 혁명가들에게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독재의 날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게바라 부대의 산타클라라 공격은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 되었다. 산타클라라 전투의 상황을 게바라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산타클라라는 쿠바 섬의 중앙평원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 15만의 이 지역 중심 도시였다.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온갖 소문이나 정보가 가장 빠른 시간에 모여들고 퍼져나갔다. 우리는 공격 당시 소총부대를 상당히 증강시겼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역량도 갖추었다. 비록 폭탄은 부족했지만 중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바티스타군의 전차대를 공격할 바츄카포도 입수했다. 우리들은 까마후아니가의 도로 입구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경비에 임하고 있는 바티스타군 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12월 29일, 해방조국을 향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까피로 언덕의 수비는 상당히 완강했다. 30일, 이곳에서 하룻동안 전투를 계속하는 동시에 시의 다른 지역을 점차 장악해 들어갔다. 정부군은 본부와 장갑부대 사이의 통신이 두절되자 까피로 언덕이 포위되어버린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당황하여 철도를 이용해 도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철로를 파괴해 퇴로를 끊어 놓았기 때문에 기관차와 객차 여러 대가 탈선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집중 폭격을 퍼부어 대자 장갑열차는 성냥곽처럼 부숴졌다. 고사포와 기관총, 그리고 엄청난 양의 총탄을 고스란히 내놓고, 적들은 22대의 차량과 함께 항복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바라 부대는 12월 31일 경에 산타클라라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날 밤..... 1959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새벽, 바티스타의 탈출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현금과 보석자루가 비행기에 실리고, 공포에 질린 바티스타 부부와 그들의 절친한 몇몇 외국인 친구들이 함께 탑승했다. (※ 영화 "대부"에 이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비행기는 산토도밍고를 향해 소리없이 이륙했다. 새벽 2시 10분에 너무나도 황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경호원 이나 수행원들은 거의 따라가지 못했고, 측근들은 작별인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바티스타의 부인 루시아는 귀금속이 달린 블라우스 와 현란한 장미빛 판타롱을 차려입고 한껏 멋을 부렸지만 불안 해하고 초초해하는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티스타는 측근들에게 자신이 출발한 직후 일어나는 일들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두 명의 장군에게 집무를 대행하도록 명령하고, "체 게바라"라고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의사 따위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는 정권이 절대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5. 쿠바해방! 또다른 시작 The people liberate themselves - Che Guevara
1959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부대가 드디어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쿠바는 해방된 것이다. 1월 5일, 사법관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고,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의 요새인 라 카바냐 지역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가 이끈 용감한 애국청년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다. 그것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쿠바가 또다시 양키의 식민지(차라리 양키의 사창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변혁시켜야만 했다. 피델과 까밀로 시엔후에고스는 아바나의 군정관이 되어 바티스타군의 잔당을 일소하는 일을 맡아했다. 군부와 경찰은 수년에 걸친 내전 기간 동안 2만명 이상의 쿠바 민중을 학살했다. 살인, 강간, 고문, 폭력, 강도질에다가 마지막엔 농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온갖 만행을 밥 먹듯이 저질러 왔다. 이런 야만적인 폭정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왔던 것이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처형하는 쪽이 옳겠는가? 게바라는 이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임무(재판권)를 맡았다. 살려두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재차 반혁명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살하고, 나머지는 징역을 살도록 했으며, 모함을 당한 것으로 밝혀진 극소수만 무죄로 석방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릴라들은 멕시코나 과테말라 혁명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전면 개편했다. 직업군인제를 폐지하고 미국이나 부르주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피델과 체 게바라 그리고, 그의 동지들은 수염을 깎는 일도 미루고 제반문제를 검토했다. 1959년 1월, 게바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혁명의 강령을 쿠바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몬카타병영 습격에 참가 했던 한 병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쿠데타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 놈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으려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티스타가 100의 이권을 미국에 바쳤다면 우리들은 101의 이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은 확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보다 중요한 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체 게바라의 이 말속에 숨은 뜻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잡는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이 생긴 후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또, 어떻게 해줘야 그들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내야 할 진정한 혁명이다."
오리엔테의 산과 평지에서, 카므게이의 저지에서, 라스비야스의 산과 평지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의 2년 동안에 걸친 처절한 투쟁 후에 아바나에 개선한 우리 게릴라들은 초창기 와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토지를 소유 하지 못한 농민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이론도 정립해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수행되었던 "토지개혁"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 우리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모든 무산자들에게 토지가 돌아가야 하며, 불법 소유자들에게서는 토지를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노력과 치르고 있는 희생이 농민의 해방을 위한 것일 때에는 아낌없이 치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농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급진적 토지개혁은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 들과 그들에 빌붙어먹는 자들 즉, 대토지 소유자, 설탕공장 경영자, 대규모 농장소유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부르주아들은 이러한 충돌을 두려워하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불리하게 제정된 법률을 지지하고 있다. 혁명군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민중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토지를 쟁취하는 투쟁에 그들을 불러 일으켜서 참여시켜야 했고, 그 일을 위해 오리엔테주의 구석구석까지 바로 그곳 출신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고, 민중의 단련된 민주 주의 의식이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지개혁 구상을 구체화하여, 실현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적인 법률이 요청되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토지의 재분배와 늘어난 농산 물의 수급을 처리할 대형 유통기구의 마련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는 혁명정부가 어떻게 해서 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일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국내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대 산업장려정책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막 생겨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이 기업에서 생산해낸 상품을 소비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대책도 필요하다. 이 시장의 규모는, 구매력은 크지 않더라도 물품을 필요로 하는 농민들의 수요에 맞출 정도 면 된다. 사탕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상선도 필요하다. 또한 이전에 우리들의 소유였던 토지, 광산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 전력을 확실하게 쿠바민중의 것으로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금은 비싸고 아직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없는 전화회사를 국유화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게바라는 피델과 몇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조직가로서의 뛰어난 수완이 있었다. 1959년 2월 9일에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시민권을 얻었다. 이즈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확실히 라울(피델의 아우)과 나는 자주 충돌한다. 그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1,2등을 다투를 잔소리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모델 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는 석유를 국유화한 후에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도 멕시코처럼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들의 정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우리들이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고,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는 것들을 국유화하는 것과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것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착실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이익보다 민중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의 일하는 태도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도르티코스 대통령은 피델의 천거를 받아 게바라를 공업장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 32세였다.
6. 제 3의 길을 향하여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필요없다! - Che Guevara
피델 카스트로의 추천과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게바라는 국립농업개혁국의 공업부장 이라는 경제 부문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59년 6월,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유고 등을 돌아보는 여행길에 오른다. 표면적으로는 그 나라들의 경제부문에 대한 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게바라 개인으로는 일찍부터 자신이 꿈꾸어 왔던, 자본주의적 방법도 아니고 공산주의적 방법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초대총재가 된 게바라는 셔츠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낡아빠진 군복풍의 셔츠를 걸치고, 빗질도 하지 않은 부시시한 머리로 총재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급료를 5천페소에서 1천2백페소로 줄인 일이었다. 이에 놀란 쿠바의 부르조아들은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모두 마이애미로 줄행랑 쳤다. 이즈음,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폐가 남아 돌아갈 정도로 남발 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쿠바 경제가 붕괴될 수도 있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쿠바의 경제공황을 노렸다. 이를 간파한 체 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지폐를 인쇄하려 했다. 그러나, 아직 쿠바의 인쇄기술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게바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미국에서 쿠바의 지폐를 마음대로 찍을 수 없도록 지폐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인쇄하도록 하고, 위조할 수 없도록 자신의 사인을 새겨 넣었다. 지폐 난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쿠바 혁명정부의 전복을 노리던, 미국의 계략은 게바라로 인해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게바라가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중앙은행의 임원이었던 호세 산티에스테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행업무 중에서 그가 가장 고심한 것은 외화의 축적이 었습니다. 그는 매일 외환수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외환보유고를 보면서 모든 문제를 분석하곤 했습니다. 그는 새벽 서너시까지 피로도 잊은 채 일을 하고 늘 재정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상의했었지요. 간부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그가 결정을 했습니다. 부하들이 과실을 범할 때는 엄격하게 질책했었지요. 하지만 항상 인간적이었어요. 심약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죠.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이 정직하고 혁명적인가 어떤가 살펴보고, 일단 눈에 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금융정책을 오로지 혁명사상을 현실화시키는 무기로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게바라는 어떤 방법론을 채택할 경우, 그 채택의 근거를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 적인 측면에서 찾았지요. 중앙은행은 단 하나의 참된 가치 즉 '혁명수행에 있어서의 동지애'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원칙과 일상적인 삶 그 모두에 있어서 가장 인간적이며 혁명 적인 사람이었지요."
1960년에 게바라는 자신의 발로 사회주의 국가의 땅을 밟아보는 꿈을 실현했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방문하고 RDA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강경하고 빈틈없는 체 게바라의 쿠바내 미국재산의 국유화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확대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국유화한 토지, 은행, 제당공장, 상사 등은 대부분 양키 자본가들의 소유였었기 때문이다. 참지 못한 미국은 마침내, 쿠바에 대한 공격을 결심했다.
1961년 1월 8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에 걸쳐 미국은 피그만 해안을 침공했다. 게바라는 이 전투에 참전하여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그의 게릴라 전술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미국의 침공으로 쿠바의 육, 해, 공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혁명군은 결국 미국의 공격을 물리쳐내었다. 체 게바라가 버티고 있는 쿠바군은 이제 더 이상 미국 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드디어,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세계를 향해 공언했다. 쿠바는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 재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바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게바라는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산업발전 4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갖가지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했다. 그의 경제 정책의 골격은 아래와 같았다. 급진적 농지개혁, 사탕수수 경작지의 축소, 급속한 산업화, 1차 상품의 수입제한,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외화축척, 임금제도의 개선... 그러나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즉, 노동자의 투쟁이 한결같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경제투쟁으로 나아간다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체 게바라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여유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이제야 게릴라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지나친 임금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을 하지않는 매우 고급스런 직업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기아임금에 허덕이는 심각한 상태였다. 게바라가 생각하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성한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 이었다.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자국보다는 '의식의 개혁' 이 훨씬 더 효과적 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금전욕이나 명예욕 혹은 체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지도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상태에 이를 때, 더 이상 노동이 괴로울 필요가 없어지고 즐거운 의무가 될 것이다. 물질적 유혹이란 새로운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것은 완전히 척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그런 부조리한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주의 정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쿠바 사람들처럼 놀기 좋아하고 소란스러우며, 행실이 분방한 국민을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쿠바에는 기술자도 전문직 노동자도 없었고, 경제 계획도, 예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태만함, 결근, 여럿이 모여서 복잡거림 등의 생산성 하락요인을 없애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습득, 유능한 관리자의 육성, 양키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공장운영... 이런 사항이 게바라에게 부과된 중대한 과제였다. 게바라는 노동 그 자체보다는 자유의지로 하는 잉여노동을 더 많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하나의 요인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대중교육의 원천이다. 모든 사회적 과제 배후에 있는 목적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게바라는 붉은 자발노동대를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 돌아가 사탕수수를 거두고 노동자 주택의 건설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 교육의 일환이었다. 물론 게바라 역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었다. 이순간 그는 중앙은행 총재도, 쿠바의 2인자도 아닌, 한사람의 노동자였다. 그는 민중을 사랑했고, 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사람 답게 사는 것을 보고자 했다. 아래는 그 당시 체 게바라와 함께 일했던 한 노인의 증언이다.
"체 게바라는 좋은 옷이라든가 새구두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한번도 우리 노동자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도 없었구요. 우리와 같은 노동자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지급받은 것을 먹고 입었어요. 그는 특권을 갖는 것도 매우 싫어했지요. 자신의 부하에게조차 어떠한 특권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항상 자신을 경계했어요.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이 게릴라 병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요. 이만하면 대단한 인물아닙니까?"
증언을 마친 노인의 눈에선 어느새,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는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였고 퇴근할 때는 맨 마지막이 었거든요. 게다가 대개의 경우 가능한 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너무 늦어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작업장에서 그냥 노숙했지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어요. 침대에서 자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요."
"그는 노동자에게 공손하고 싹싹했지요. 함께 자발적 잉여노동을 할 때나 공장으로 갈 때, 처음에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도 게바라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자유 롭게 이야기를 한다든가,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 리면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그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체 게바라 사령관이 아니었어요. 그저 한사람의 노동자 친구였어요."
"산타 코로마 농장에 있었을 때, 새벽녘 무렵이었는데, 게바라가 갑작스런 천식 발작으로 시달리고 있었어요. 내가 '왜 잠시도 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약을 꺼내오면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렇게 닥달하지 말아요.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요.'"
"그는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였고, 그가 세운 계획들도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습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는 OEA(미주기구=미국의 지배기구의 하나)의 '경제사회심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라이프지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어떤 때는 화려하고 잘난 척하는 또 어떤 때는 온화하고 호감을 주는, 구레나룻을 기른 이 쿠바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참석자는 게바라가 능숙하게 외교적인 제스처를 쓴다고 하여 <체체>라고 이름 붙였다. 게바라의 이상한 언동은 그를 적대시하는 그룹에게 있어서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 망명자들 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좌익의 보호를 받지도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진보를 위한 동맹'의 스폰서인 미국을 공격하면서, 쿠바가 동맹의 자금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 을 했다. 각국의 대표들은 게바라야말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소련의 침입과 지배를 불러들일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서 NO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푼타 델 에스테 헌장에 서명한 각국 대표들은 만족해하며 해산했다.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게바라는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소련권으로부터의 원조는 만족할 만큼의 효과가 없고 쿠바에는 적당하지도 않다고 주장 했다."
게바라는 적대국인 미국과 예전처럼 식민지적 상업거래가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의 거래가 성립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게바라의 예언 If you tremble indignation at every injustice then you are a comrade of mine - Che Guevara
체 게바라는 연애에 대해서는 매우 쑥맥이었다. 그러나 뭇여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게릴라 전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전사들이 개선할 때까지 일다(게바라의 부인)는 딸 일디타와 멕시코시티에서 살고 있었다. 1959년 1월 21일 두 모녀는 아바나에 도착 했다. 게바라를 만나기 위해 쿠바로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아바나로 온 것은 1959년 1월 21일이었습니다."
이때 에르네스토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녀와는 엘 페드레로 전투에서 서로 알게 되었답니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그는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 외에 별 다른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1959년 5월 22일에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했고 그는 6월 2일에 재혼했습니다." - 일다 가데아 <체게바라, 투쟁의 나날>(1972)
다른 여자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22세의 쿠바인 교사,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이다. 7.26운동연합의 일원이고, 게바라와는 엘 페드레로 농장의 전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게바라부대에 합류하여 승리의 날까지 그의 곁 에서 모든 투쟁을 함께 수행했다. 게바라는 재혼한 알레이다와의 사이에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부정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다. 지금도 쿠바의 아이들은 체 게바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말이 재미있다.
"체 게바라 사령관은 우리 같은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대요. 그래서 우리도 체 게바라 사령관을 사랑해요."
게바라의 결혼생활이 정상적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혁명가는 결혼생활에 실패한다. 남편의 인생이 혁명과 함께 진행되므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게바라는 우루과이에서 후에 '게바라의 예언'으로 이름 붙여진 두 가지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 중에서 케네디의 '진보를 위한 동맹'의 속셈을 폭로하고 양키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체 게바라와 케네디는 둘 다 쿠바산 시가를 무척 애용했다고 한다. 차이가 있었다면,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고, 게바라는 쿠바산 시가보다, 쿠바의 가난한 민중을 더 사랑했다는 점이다.) 아래는 게바라의 예언 중 일부분이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삶의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비밀리에 아르헨티나로 가서 후론 디시대통령과 회견하고, 다시 브라질로 가서 쟈니오구아 드로스 대통령으로부터 공식적인 훈장을 수여받았다.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해군을 파견하여 쿠바를 봉쇄했다. 후루시초프가 소련 미사일의 철수를 결정할 때까지 봉쇄는 계속되었다. 1962~1964년 이 3년 동안은 게바라에게 있어서나 모든 쿠바인에게 있어서나 매우 격심한 노동의 나날이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당과 대중조직을 견고하게 꾸미고, 향후 경제계획을 세우는 등 많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1963년 7월, 게바라는 경제계획 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방문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관리들과 경제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과연 늙은 공산주의자들이 게바라의 노선을 받아들였을까? 고참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게바라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고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을 노골적 으로 경멸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던 공장자주 관리방식이나 국가계획 경제가 골간이 되는 소련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도, 정신적 자격(刺激)을 중시하고 통일적인 예산 융자제도를 취하는 중국형 사회주의 방식을 더 선호했다. 게바라와 소련의 동지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논쟁이나 서로 상대방을 비꼬는 좋지못한 평이 오고가고 했지만 그다지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바라가 소련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 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당내 논쟁에 있어서도 게바라의 동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쿠바경제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했다. 다양한 체험이나 생각들을 받아들여 가면서..... 한편에서는 혁명의 원동력이자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시킬 당이 만들어졌다. 게바라에게 있어서는 두번 다시 맡기는 힘든 어려운 일만 계속 되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엔 혁명적 과업의 완수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도사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주위에서 염려했던 대로(왜냐하면 그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큰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다. 레닌도, 카스트로도, 아니면 예수일지라도 그런 경우라면 그와 같이 실천했을 것이다... 여하튼, 쿠바경제는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러쿵 저러쿵 헐뜯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 게바라의 노선에 따라서...... 1965년 그러나 게바라는 경제학자로서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쿠바경제는 그가 바라는 대로 나아가 주지만은 않았다. 1965년 1월, 그는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콩고, 기니아, 가나, 다오메이, 알제리, 탄자니아. 그리고 카이로를 방문했다. 알제리에서는 '제2회 아프리카 아시아 연대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이 연설에는 그의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처음의 순수한 열정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민중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힘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실망한 체 게바라는 가슴속에 분노를 가득 안고, 3월 14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돌아와서 피델 카스트로와 모종의 장소에 틀어박혀 밀담을 나누었다. 그후 직장으로 돌아온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마치 먼 곳으로 떠날 사람처럼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쿠바혁명때 사용했던 권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1965년 4월 중순, 홀연히 게바라가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청사에도 사탕수수밭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요하는 쿠바 민중들에게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바라는 늘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아무 이상 없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의 실종에 대해서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피델과 싸우다가 죽었다, 도미니카에서 객사했다, 발작을 해서 멕시코시티의 병원에 감금 되어 있다, 소련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보냈다, 수도승이 되어 스페인으로 갔다, 반카스트로주의자 그룹이 미국으로 납치해 갔다.......등등
8. 불가능한 꿈을 위해 다시 전장 속으로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 Che Guevara
1965년 7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콩고에서 돌았다. 게바라가 어떤 쿠바인과 더불어 촘베의 용병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였다. 그중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살펴보면,
"사랑하는 일디타, 알레이디타, 카밀로, 셀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 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 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공부하여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며,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아빠가"
민중해방을 위한 게릴라군의 한 전사로써 게바라는 영원한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단념하고, 다시 전장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체 게바라가 한 명언중에 이런 말이 있다.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 누구의 억압도, 속박도, 부조리도 없는 모든 민중이 평등한 세상, 기존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또다른 제 3의 길, 그가 가슴속에 가지자던 꿈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였기에, 이 꿈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후에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그는 이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믿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대신할 새로운 게릴라들이 그 꿈을 이루어 줄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민중 해방에 바치기로 한 체 게바라는 투쟁에 뛰어들기 위해 옛 벨기에령 콩고를 훈련장으로 택했다. 그후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나서 최종 목적지로 볼리비아를 택했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게바라는 면밀한 변장작전으로 대응했다. 구렛나루와 콧수염을 깍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헤어스타일도 커다란 수건을 이용해서 변화시켰다. 그는 우루과이의 상인 아돌포 메나로 변장을 한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증명서도 준비했는데, 증명서에 쓰인 이름은 라몬 베니테스 훼르난데스였다. 볼리비아에 입국할 때는 메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메나는 볼리비아의 오지에 별장 하나를 갖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내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의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미 볼리비아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서 새로운 투쟁이 싹트고 있다. 혁명가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위험하면 위험해 질수록 혁명의 싹은 무럭무럭 커나갈 것이다. 즉 한 나라의 해방 후에도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 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완수하도록 끝까지 투쟁해야만 한다."
- 제3세계(A.A.LA)의 연대를 위해 발간된 기관지 트리 콘티넨탈지에 체가 쓴 메시지(1967.4.16) 중에서...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현대의 오랜 정치투쟁에서 잊혀진 대륙 이었다. 그러나 쿠바혁명이라는 인민대중의 함성이 제 3세계 단합기구를 통해 전세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으며, 이제야말로 혁명에 대해 명확한 임무를 가진 대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임무란 범세계적으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서 발악적으로 등장한 세계 체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 세계적인 연합전선을 통해서 이를 타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점잖은 신사인 미국인들은 전쟁도덕에 있어선 매우 악랄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항하는 투쟁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투쟁만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 적들은 우리로 하여금 투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투쟁을 준비하고 투쟁을 시작할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런 전쟁이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두지배 계급은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해오고 온갖 폭력과 악선전을 이용할 것이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남에서 실천된 것처럼 무장선전이라는 게릴라의 영원한 규범이 실행될 것이다. 즉, 총에 의한 선전, 적과 대치하여 승부를 거는 전투, 그 자체에 의한 선전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게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위대한 교훈이 착취받고 있는 민중들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민족정신이 고양되고, 보다 어려운 임무에 대한 준비와 폭력적인 탄압에 대해 저항할 준비가 가능해진다. 적이 있는 모든 지점까지 투쟁의 장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적의 집, 적의 휴식처까지도 전쟁은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적에게 일초의 평온, 잠시의 휴식도 주어서는 안된다. 그 어떤 미국 병사도 자신의 막사에서나 극장, 혹은 거리에서 안심하고 다닐 수 없도록, 자신을 독안에 든 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점점 더 그가 야수와 같이 행동하게 되면 될수록, 그의 발광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다......"
- 1967년 4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3대륙 단합기구" 회의에서 대독된 게바라의 보고서
1966년 8월 :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 도착,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한 쿠바인 10명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같이 싸웠던 강인한 전사들)도 도착 완료. 1966년 10월 : 산타크루스 근처에 있는 집을 입수. 약 15명의 볼리비아인과 조직을 형성.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릴라전에 동조하지 않음. 1966년 11월 : 체 게바라, 농촌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의 준비 개시. ----------같은 날, 즉 11월 7일부터 저 유명한 <게바라 일기>를 쓰기 시작함.
"오늘부터 새로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밤에 은신처에 도착했다. 여행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변장도 아주 훌륭히 되었고 무사히 코챠밤바를 통과했다. 파충고와 나는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면서 두 대의 지프로 이틀간 돌아다녔다. 은신처 부근에 도착하여 일단 차를 멈추고, 한 대만 몰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혹시 코카인을 제조한다는 소문이라도 나서 근처 주민들의 주의를 끌게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두우마이니라는 자가 우리 그룹의 화학기사로 일하게 된 것이 수상하다...." - 게바라의 일기 중에서
게바라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면 한 사람의 게릴라 전사가 겪는 인생의 희비극을 엿볼 수 있다. 동지의 배반, 낙심과 기쁨, 투쟁과 죽음 등... 체 게바라는 처음에 지형을 숙지하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게릴라들이 속속 도착했다. 1967년 3월까지 적과의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다. 이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브즈토스가 내방했었다. 경찰이 이 두 사람을 취조해서 중요 서류를 압수하고 그들로부터 게바라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드브레와 부즈토스는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 것이다. 4월1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 기지를 수색하면서 그 속에서 게바라의 사진을 찾아냈다. 이 정보를 넘겨받은 미국 CIA는 볼리비아에서 수색활동을 시작했다.
9. 볼리비아의 음모 Hasta La Victoria Siempre Is to fight, to die fighting - Che Guevara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는 그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고양이 목의 방울처럼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그 쿠바의 중심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있었다. 미 CIA는 그중에서도 피델과 체 게바라에게 상당히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일례로 피델 카스트로 한사람에 대해 무려 8번에 걸친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것과 체 게바라 한사람의 게릴라를 잡기 위해, 당시 최고의 정보기관 CIA가 총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자랑하는 특전대 그린베레의 게릴라전 특별 고문관들까지 파견한 것으로 보아 미국이 이 두사람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CIA의 보고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두사람의 듬직한 동지를 가지고 있다. 한사람은 혁명의 도끼 역할을 하는 라울이고, 또 한사람은 그의 머리 역할을 하는 체 게바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체 게바라는 하루 속히 제거 되어야 한다.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에 두뇌로 건재하고 있는 한, 미국은 언젠가 그로인해 재앙을 맞을 것이다."
미국이 체 게바라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 와중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은 게릴라 중 두 사람의 변절자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게릴라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사살하라......
두 사람의 변절자 바레라와 로카바드는 볼리비아 군대에서 게바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불어버렸다. 4월,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으로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그 주역들은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그리고, CIA의 앞잡이들이었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에 관한 논문 <게릴라전-하나의 방법>을 쓰면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이란
1. 아직 군대와 싸울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버렸다. 2. 볼리비아의 민중은 쿠바의 민중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바라의 큰 오산이었다. 3. 당시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던 게릴라 활동에 미국의 CIA와 그린베레가 개입하리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4. 볼리비아 공산당(비합법이어서 지하활동만 하고 있었음)의 지원이 없어, 도시와 연대가 이루어 지지 않아 통일전선 구축에 실패한 게릴라는 고립되어 있었다. 5. 당시의 볼리비아는 혁명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도 없었고, "7.26운동연합" 같은 조직이 결성돼 있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는 마지막 일기에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정부군이 게릴라를 추격하고 있음, 쿠바와 연결이 안됨, 라 파스와 연락이 두절됨, 볼리비아 농민의 협력이 없음, 게릴라 내에 환자 속출, 식량 부족, 천식재발에 대한 초조함, 윤리의식의 저하, 부대가 둘로 갈라져 전투에 임했으나 한쪽이 전멸 (나머지 절반도 호아킨이 지휘하는 부대와 연락이 두절됨).".
8월 3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들이 당일 오노라트 로하즈라는 농부의 집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로하즈는 엘 이에소의 얕은 곳으로 마시쿠리강을 건너 도록 게릴라를 안내할 예정이었다. 한 달 전, 게바라는 로하즈의 아이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결국 로하즈는 배신을 했다. 호아킨의 게릴라 부대가 얕은 내를 건너기 시작할 때,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열 명의 게릴라가 쓰러졌다. 그 중 오직 한 사람 파코만이 살아 남았다. 게바라의 일기와 볼리비아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볼리비아인 저널리스트 호세 알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게바라부대는 겨우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에는 실패하여 결국은 다시 포위되었다. 게릴라는 둘로 나뉘어 행동했다. 게바라의 부대와 호아킨의 부대로 게릴라를 나눈 게바라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2000명 이상의 병력과 20여명의 게릴라는 너무 큰 전력차가 있었다. 체 게바라가 아무리 게릴라전의 귀재라 할지라도 역부족이었다. 3월 3일 : 게릴라,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군측 7명 사망, 4명 부상, 10명 생포. 게릴라들은 야영지를 떠남. 4월10일 : 이리피티에서 군과 전투. 군병사 10명 사망, 6명 부상, 쿠바인 게릴라 루비오 전사. 4월20일 : 정부군을 속이기 위해 무유팜파로 내려감. 그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있던 드브레와 브즈토스 두 사람이 체포됨. 게릴라는 길을 바꿈. 4월25일 : 정부군과 전투. 쿠바인 롤란도와 군측 병사 2명 사망. 항공부대가 지역 전체에 폭탄 투하. 5월 8일 :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정부군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포로 10명(후에 즈봄만 석방). 게릴라 전원 병에 걸림. 5월30일 : 매복,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5월31일 : 다른 장소 매복, 수색대 병사 2명 사망. 6월26일 : 군과 전투, 수색대 병사 4명과 게릴라 도우미 사망. 게릴라 전체 인원은 24명이 됨. 7월20일 : 다른 그룹에 의한 매복. 군병사 4명과 게릴라 1명 사망. 7월27일 : 정부군과 전투. 4명 사망. 7월30일 : 군과 전투. 게릴라 라울 전사, 3명 부상, 군병사 6명 사망. 부상자가 속출하지만 약이 없었다. 8월26일 : 정부군과 전투. 사상자 없음. 8월31일 : 후위부대의 와나로 후퇴. 호아킨 외 8명의 게릴라 전사. 9월26일 : 게릴라(게바라가 이끄는 그룹)에 대한 정부군의 매복 공격. 게릴라 2명 전사. 캄바와 레온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10월6일 : 계곡에서 게릴라는 정부군 1천 8백명에게 포위됨. 도망갈 길이 없었다. 10월8일 : 운좋게 탈출한 세 명의 게릴라 중 한 사람이었던 베니그노는 게바라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잠에서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라고 말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 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 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 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 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 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 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 시가에서 6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 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체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10. "체 게바라"의 최후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 - Che Guevara
입회인으로서 체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 볼리비아인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함께 붙잡힌 사람은 볼리비아인 광부 윌리와 시몬 쿠바였다. 10월 8일 오후 세시 반 경이었다.
10월 9일 11시15분, CIA는 게바라를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비아군은 총살을 집행하기 위해 하사관 세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그 중 마리오 테란을 선택했다. 테란은 차분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체 게바라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테란은 분노에 불타는 체 게바라 의 눈빛에서 자신이 임무를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 때 체 게바라는 그가 일을 끝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쏴!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감히 체 게바라를 쏘지 못했던 심약한 볼리비아 병사는 오후 12시가 되고, 술까지 한잔 한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직후 다시 다른 볼리비아 군인 페레스 중위가 확인사살로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쏘았다. 후일 마리오 테란은 라파스의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 다니다가,1968년 4월 자신이 살던 집 4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체 게바라의 사살을 확인하기 위해 미 국방부와 CIA는 총력을 기울여 움직였다. 여기서, 그의 사형에 대한 미 국방부와 CIA의 보고서 내용을 일자별로 잠시 요약해 보겠다.
미국방부 기밀 문서 1967년 4월 28일 미국 정부는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를 볼리비아에서 제거하기 위해 파나마에 있는 미 8사단의 특수부대 소속 그린베레 16명의 최정예 요원과 CIA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볼리비아 제2보병 대대를 훈련시키고 체 게바라를 제거하겠다는 내용.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5월 11일 메모 형식의 이 보고서는 미대통령에게 체 게바라의 행적을 CIA가 계속 추적하고 있으며, 대통령에게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인지 시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 9일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로 볼리비아부대가 체 게바라를 사살했다는 미확인 정보 내용.
백악관 문서 1967년 10월 10일 1967년 볼리비아 부대의 보고 내용으로 볼때, 10월 8일의 공세에서 체 게바라가 게릴라 희생자들 사이에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는 내용.
백악관 보고서 1967년 10월 11일 이 보고서에서 Walt Rostow는 존슨 대통령에게 99%의 확신을 가지고, 체 게바라가 지난 전투에서 사살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보고한다. 또한 미국에 16명의 그린베레 최정예 요원들에게 훈련받은 볼리비아 제 2보병대대가 그를 코너로 몰았고, 그리고 그를 사살 했음을 보고한다.
미 국무부 보고서 1967년 10월12일 체 게바라의 죽음이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소련에 미칠 중요한 의미를 중심으로 지역 전문가가 만든 보고서이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13일 백악관은 체 게바라가 제거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정보국 CIA 기밀문서 1967년 10월 17일 CIA가 1966년 9월부터 1967년 6월까지 수집한 쿠바와 소련사이에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활동에 대한 불화와 이견에 대해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이다.
볼리비아 주재 미 대사 핸더슨의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볼리비아주재 미 대사인 핸더슨이 본국에 보내는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로써 체 게바라는 확실히 사살되었으며, 그 증거로 CIA요원의 감시 아래 두 손목을 잘랐으며, 시신은 비밀리에 빌라그란데 근처의 활주로에 매장 되었음을 보고한다. 볼리비아 제2보병대대의 훈련경과와 활동, 체 게바라의 체포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상세히 기술한 보고서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체 게바라를 쏜 볼리비아 병사의 보고가 흥미롭다. 체 게바라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은 "Know this now, you are killing a man"이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후에, 이 병사는 방아쇠를 당길 때의 심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그의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고, 전 그의 눈에 매혹 당했죠. 나는 그 위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CIA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국민을 향한 연설을 번역.
1967년10월9일 12시 쿠바혁명의 주역 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39세를 일기로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 으로 막을 내렸다.
부르조아의 아들이었으나, 진정 민중을 사랑하여, 안락한 의사의 직업도, 국가 중앙은행 총재라는 명예도 쿠바의 2인자 라는 지위도 모두 포기한 채, 항상 민중과 함께 먹고, 함께 입으며, 억압에 대항하는 민중해방 전쟁의 최전선에서 투쟁했던 이 위대한 게릴라 전사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신화(神話)가 되어 쓰러졌다.
체 게바라의 죽음 이후, 최근까지 활발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란 말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체 게바라는 "산타클라라 전투의 영웅", "위대한 민중의 사령관", "전사 그리스도", "20세기 최후의 전사", "최후의 게릴라" 등등 온갖 미사어구가 난무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평가 받는 가운데, 또다른 쿠바혁명의 영웅 피델 카스트로는 이 재평가 작업 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견제와 미국과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소련의 압력은 피델이 조직했던, 체 게바라 구조특공대의 해체를 요구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굴복해 체 게바라에게 원조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체 게바라는 결국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볼리비아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과연 피델 카스트로는 위의 내용처럼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쿠바 혁명의 둘도 없는 동지인 체 게바라를 버렸을까?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는 이미 체 게바라와 쿠바의 혁명을 이야기 하던 그가 아니다. 권력에 눈이 먼 또다른 독재자일 뿐이다...
쿠바의 대다수 민중들은 그때 왜? 피델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죽은 후에 그가 과연 체 게바라 만큼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피델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사형당하기 직전 그가 한 유언 내용이 "피델에게 전해 주시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체포된 직후,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구스만이라는 사람이 게바라의 최후 순간을 공개했는데, 당시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구스만은 게바라 등 생존 게릴라들이 억류된 마을로 파견됐다. 그는 게바라가 처형되기 전 그와 장시간 마지막 대화를 나눈 증인으로, 대화는 볼리비아 군인 수명이 둘러싼 작은 방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데 구스만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피맺힌 목소리로 "피델이 날 배신했다"고 몇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게바라는 혁명의 실패 원인에 대해 "쿠바와 볼리비아 공산당으로부터의 지원이 줄고, 당과 볼리비아 노동자 세력의 분열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데 구스만은 게바라에게 담배를 주었고 부상당한 체 게바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장화 속에서 갈색 표지의 육필로 쓴 소책자를 꺼내 구스만에게 건냈다고 한다. 진정 피델 카스트로는 그를 배신했단 말인가? 이 역시 시간이 더 흐른 후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어쨌든, 체 게바라를 쿠바민중들의 품으로 꼭! 찾아오겠다는 피델 카스트로의 약속은 지켜 졌다. 비록 유해로 돌아왔지만.......
체 게바라를 살해한 볼리비아군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두 손목을 잘라 그를 사형 시킨 증거로 그의 친구 피델 카스트로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암매장했다. 그는 갔지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혹자들은 그에게 "최후의 게릴라"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틀린 말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체 위로 또다른 게릴라들이 민중을 위해 싸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Che Guevara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고, 그가 죽은 지 30년 만에 그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조국 쿠바로 돌아와 묻혔다.)
11.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상)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야만의 세기라는 20세기가 저물고 또 다른 세기가 밝아오던 지난 1997년 여름 볼리비아 비야그란데의 공동묘지에서 한 무덤이 열리고 한 게릴라가 신화로 되살아났다. 그는 바로 체 게바라였다. 그는 죽어서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되살아났다. 60년대 저항운동의 신화적 게릴라 체 게바라의 유해가 쿠바로 돌아오던 날. 쿠바의 모든 국민들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귀향을 열렬히 환영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쿠바의 모든 거리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라는 구호가 메아리쳤고, 체 게바라의 깃발이 넘쳐 흘렀다.
◀(귀환하는 체 게바라를 환영하는 쿠바 국민들)
의사출신의 엘리트, 쿠바의 제 2인자의 자리를 박차고 있는 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여 전쟁터를 누빈 이 검은 베레모에 멋진 콧수염를 기르고, 열정적인 눈빛을 지녔던, 영웅이 그가 해방시킨 쿠바의 품에서 편히 잠들기를 빌면서... 거리는 온통 게바라의 모습으로 도배되었고, 그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중앙 방송국에서는 매일 체 게바라의 기록영화를 방영했으며, 그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들이 잇따랐고, Hasta siempre와 같은 추모음악과 그가 생전에 남겼던 저작들의 출판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외형적인 것들이 아니다. 없는 자, 착취당하는 자, 억압 받는 자들을 위해 싸웠던 그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열기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의 영웅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는 나에게 성인이었어요. 이 세상에 체 게바라처럼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볼리비아에 체가 투쟁한 지역의 농민들이 집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와 함께 게바라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들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요. 그는 예수와 같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요"
59년 쿠바혁명 당시의 게바라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한 노인이 한 말이다. 왜? 그를 "전사 그리스도"라고까지 칭하는지 알게 하는 대목 이다. 체 게바라를 직접 대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으며, 함께 노동을 했던 체 게바라의 모습은 가식 없는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로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영향력도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해 버리는 듯했다. 그를 직접 접해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그는 게릴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가 제국주의의 간섭을 타파하기 위해 주창했던 게릴라전이 점점 세력을 잃어가고 있고, 그의 사상적 뿌리 마르크스주의도, 동유럽 사회주의도 붕괴되면서 빛이 바래져 버렸다. 그는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90년대 이 영웅이 없는 시대가 60년대의 영웅인 그를 부르고 있었다. 사망 30주기를 맞이해 그의 영향력은 쿠바와 남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목숨을 잃은 볼리비아에는 유럽과 미국, 남미등지에서 성지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체 게바라가 66년 8월 볼리비아에 도착해서 67년 10월 최후를 마칠 때까지의 '게바라 루트'를 그대로 답습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한사람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학 교정에서 게바라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평등과 정의를 의미한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던져 본다. 과연 체 게바라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을까?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체 게바라는 행동과 사상을 일치시킨 특별한 사람이었다.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찾기가 힘들다. 나약하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격동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체 게바라와 같은 영웅을 다시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체 게바라는 앞으로도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우는 위대한 전사의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지금의 체 게바라는 현실적 폭발력을 상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잠재된 폭발력은 여전하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민중들이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들의 안락한 일상에서 떨쳐 일어났던 것처럼, 체 게바라 역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력적이다. "부자에게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우리나라의 의적 홍길동이 주장 했던 것과 같은 체 게바라의 목표는 아직도 부익부 빈익빈이 편재한 인간사회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변함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사상운동, 노동운동 혹은 시민운동의 형태로든 이 목표를 추진하는 이들에게 체 게바라는 죽지 않았다. 언제나, 손을 잡아주는 믿음직한 동지로써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12.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하)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 Che Guevara
돌아온 영웅 체 게바라는 1990년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매장되었다. 지난 7월12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진 체 게바라의 뼈만 남은 유해는 이날 마침내 쿠바혁명 전적지에서 영원한 안식를 취한 것이다.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 대첩 후 39년,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이며, 쿠바 정부가 지정한 체 게바라 추모 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쿠바 정부는 위대한 영웅의 마지막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게바라의 유해를 수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11일부터 13일까지 안치하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그 뒤 14일에 아바나에서 3백km 동쪽, 산타클라라의 묘지로 옮겨졌는데, 아바나에서 산타 클라라에 이르는 행진 루트는 지난 58, 59년 그가 산타클라라에서 대승을 거두고, 쿠바 수도 아바나로 진격하던 길을 방향만 반대로 갈 뿐이었다. 10월17일 체 게바라 장례행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방영되었고, 쿠바의 민중들과 그를 사랑한 이들은 또 한번 진한 눈물로 그의 최후를 배웅했다. 이렇게 체 게바라가 32년 만에 자신의 조국에 안치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었다.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서쪽 240km 떨어진 비야그란데 공항 근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체 게바라 유해의 행방은 지난 30여년간 갖가지 추측만을 낳았다. 체 게바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조사와 연구는 아주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됐다. 우선 희생된 게릴라 대원들의 시체가 땅에 묻혔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군이 체 게바라의 주검을 헬리콥터로 아마존 밀림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들은 따라서 이미 게바라의 주검은 사나운 동물의 밥이 돼 버렸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이렇게, 체 게바라 유해 발굴이 어려웠던 것은 비난을 우려한 볼리비아 군대가 시체가 묻혔을 수도 있는 지역과 장소에 대한 정보를 조사팀에게 차단했던 탓도 컸다. 그러나, 쿠바와 아르헨티나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처형 당시 체 게바라의 시체를 비야그란데 근처로 옮겼다는 운전사의 증언을 확보하고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90년 6월말 드디어,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 있는 그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 당시 체 게바라는 두 손목이 없는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지난 67년 볼리비아군이 체 게바라의 죽음 을 쿠바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주검에서 손목을 잘라 쿠바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곧 관련자들의 증언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유골이 체 게바라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마침내 머나먼 혁명의 여정을 마치고, 혁명의 고향이자 전적지인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묻히게 된 것이다.
체 게바라의 추모곡 중에 Hasta Siempre를 "베네수엘라의 보석"이자 저항가요의 기수인 Soledad Bravo가 리메이크한 곡이 있는데, Soledad Bravo는 언제나 압제에 힘겨운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노래했었으며, 지금도 그들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는 진정한 영혼의 목 소리를 지닌 가수로, 체 게바라의 상징성과 Soledad Bravo의 민중가수적 이미지가 합쳐진 Hasta Siempre - Soledad Bravo version은 한 대의 기타가 전해 주는 애잔함과 Soledad Bravo의 애절한 절창이 어우러져, 체 게바라 추모곡 중에서도, 백미 중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수십 년 전의 인물이자 머나먼 라틴 아메리카의 한 혁명가를 현재의 젊은이들은 잘 알지 못한다. 불과 10여년 전의 우리 현실을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것 처럼 체 게바라 열풍이 잠시 동안에 찻잔속의 폭풍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체 게바라는 충분히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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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아름다운 사람.... 그 영혼의 정신이여~ 불멸하기를.... 다시 부활하길.... 자료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넘 존경하는 사람입니다...개인홈피로 담아가서 소중히 간직할께요^^
검은 베레모의 전사 그리스도...!!!
아일랜드 공화군 보비센즈와 더불어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준 사람 체 게바라 저항의 방법이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탈출구 없는 현실 탓인가는 간디처럼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한번은 자문해 봐야 한다.
영혼과 행동이 모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오랫만에 방문했답니다. 스크랩해갈께요. 감사합니다.
멋지군요..감사합니다..
역시 가입하길 잘했어요. 가톨릭신자이면서도 체 게바라를 좋아하고 진보개혁성향인데요. 좌파라는 소리도 듣곤하는데 여기가 제가 머물곳인듯*^^*
좋은 자료 올려 주심에 감사드려요~~~~~~
삶이 아름다운 사람 게바라/ 이 시대 우리에게 生氣를 주는 게바라 ~~~
게바라여 영원히 빛나기를 기원드리겠습니다.
대책 없이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는데 후회가 닥치네요.
엄청나게 지루했지만, 꾹꾹 눌러서 참고 또 참아 읽어보려고 애썼지만, 전체 분량으로 봐서 새 발의 피도 못 읽었습니다.
한참이나 쭉 읽고서 지금쯤은 다 끝나 가겠거니 하고서 오른쪽을 보니까 스크롤 바가 절반에도 못 미쳤더군요.
제가 읽었던 분량 쪽으로 옮겨 순번을 보니까 5번까지는 대충 그래도 착실히 읽었는데 6번 부위에서 그 지친 내색을 드러낸 거였거든요.
글 내용이 모두 같은 건 아니지만, 예전에 어디선가 그 비슷한 글 본 적이 있었답니다.
농업 쪽의 어떤 일로 쿠바에 다녀왔던 한 벗이 있었는데 그 벗이 여행기 형식으로 작성한 글에 그와 닮은 내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