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데모 대장 아닙니까. 이번에 데모 대장 역할 한번 똑똑히 해야겠습니다. 이 놈의 정부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지난 23일 오후 전남 화순군 남면 한천리 마을회관 앞.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할머니 30여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용감한 아짐(아주머니)들이 먼저 한마디 해보소”라는 화순군 농민회 청년회장의 말에 한 할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올해는 태풍에 비까지 많이 와서 나락(벼)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수매를 안해주면 우리는 어쩌란 겁니까.” 잇달아 “정부가 농민을 너무 무시한다”는 등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선후보가 24일 전남 나주 노안읍의 한 미나리밭에서 수확을 돕다가 막걸리를 나눠마시며 아주머니에게 안주를 먹여주고 있다. /민주노동당 제공
권후보가 “들판과 공장에서 세상을 바꿀 힘을 모으겠다”며 ‘만인보’ 행보에 나선 지 엿새째. 남도의 들녘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약간 여위어 있었다. 코디네이터가 “살이 빠져서 준비한 옷의 어깨 품이 안 맞는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고 생기가 있었다. 그는 “농민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매일 감동 받으며 힘을 얻고 있다”고 했다.
앞서 권후보는 아침 7시쯤 방송용 앰프가 달리고 ‘한·미 FTA 국회 비준 저지’라는 글자가 새긴 미니버스를 앞세워 화순 우시장을 찾았다. “전라도를 6일째 다니는데 쌀값, 소값 이야기를 많이 하시네요. 350만원 하던 송아지값이 한두달 만에 150만원 수준이 됐다면서요”라고 말을 건네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수입 소가 들어온다는데…사료값은 자꾸 오르고.”
권후보는 곡성군의 한 마을에 들러 “올해는 10년 안에 없던 흉작이다. 농민들의 불만은 폭발할 처지이고 나는 100만 민중대회 조직위원장이 돼서 거기에 불을 붙일 생각”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현재 300만석인 쌀 수매량을 600만석으로 올리고 추가로 400만석을 사들여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오전 11시쯤에는 화순의 금호타이어 공장을 찾았다. 식당 앞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30분 이상 걸렸다. 권후보는 “민주노총은 권영길의 혼이다. 이곳에서 내 영혼을 가슴에 담고 간다”고 말했다.
다음 일정은 5·18 민주항쟁의 상징인 광주의 옛 전남도청 앞.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문경식 전농 의장, 정광훈 진보연대 의장과 함께 ‘진보진영 4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이명박, 정동영 후보에 대한 국민적 심판을 호소하고 노동자, 농민과 서민의 대표인 권영길 후보의 승리를 위해 힘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일정이 이어졌다. 다시 화순으로 차를 돌린 그는 화순실업고에서 파리 특파원 시절 이야기를 하며 대학 평준화 공약을 설명했다.
그에게 “위기 아니냐”고 물었다. “굳이 아니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돌파하고 있다. ‘만인보’ 이틀째부터, 경선을 끝내고 바로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당내 활동이나 당원들의 적극성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며 섭섭한 마음도 드러냈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이라크 파병 연장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파병 이슈’의 주도권을 뺏기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게 민주노동당의 설움이고 눈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내 “철군을 머뭇거리고 연장시킨 한복판에 정동영 후보가 있다.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두고 정치적으로 장난쳐서는 안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권후보는 늦은 밤까지 마을 네 곳을 더 돌며 간담회를 했다. 24일에는 나주의 장터와 시골 마을을 돌며 농민들을 만났다. 조만간 전북을 거쳐 경남·울산의 공장지대도 찾을 계획이다.
그는 23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늦은 밤 함께 수행하던 동지들이 화순의 풍광을 이야기해줬다. 말을 듣다 보니 오늘 하루 하늘 한 번 쳐다볼 여유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측근은 “권후보는 지금 자신의 몸을 굴려 당의 활력을 만들어내려 하는 것”이라고 ‘만인보’ 민생투어의 의미를 설명했다. 2002년 전국 10만㎞ 대장정을 통해 힘을 모아 대선을 치렀다는 얘기도 했다. 대선을 위한 동력을, 제도화된 정치 메커니즘이 아니라 ‘운동’으로 돌아가 찾으려는 권후보의 시도가 다시 성공을 거둘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