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121 09/11/25(병술) /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의정부에서 논의하다② 》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은 의논드리기를,“젊은 나이에 배운 것이 없다 보니 무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대사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니 헌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병조 참판 이덕형(李德泂), 참의 정립(鄭쬬) 등은 의논드리기를, “이번에 제기된 막대한 논의에 대하여 어찌 감히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대신들이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이호신(李好信)은 의논드리기를, “근래에 올라온 여러 유생들의 상소는 다 종묘 사직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진실로 국가의 막중한 일입니다. 저는 본래 아는 것이 없으므로 감히 제 마음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묘당이 알맞게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여우길(呂祐吉)은 의논드리기를, “비상한 변고가 성상의 시대에 발생하였습니다. 중대한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조정의 의견을 널리 수합하여 적절하게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직강 정대해(鄭大海)는 의논드리기를,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려는 계책은 다른 사람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다른 의논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승문원 권지 이명운(李溟運)은 의논드리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정성은 미관 말직이라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중대한 일에 대해서 감히 헌의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묘당이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사섬시 봉사 민선철(閔宣哲)은 의논드리기를, “성상의 효도와 신하들의 충성으로 은혜와 의리를 각각 서로 극진히 할 뿐입니다.” 하고, 우치적(禹致績)은 의논드리기를, “망측한 변고가 성상의 시대에 발생했습니다. 중대한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조정의 의견을 널리 수합하여 적절하게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판결사 박경신(朴慶新)은 의논드리기를,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듣고 싶지도 않다.’는 하교를 내리신 것이 두세 번 뿐만이 아니었으니 감격의 눈물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논의가 이미 제기되고 있으니 전하께서도 자유롭게 대처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하고, 안륵(安폠)은 의논드리기를, “비상한 변고가 성상의 시대에 발생하여 유생들의 상소가 계속 줄을 잇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조정의 논의를 널리 수합하여 적절하게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송석경(宋錫慶), 이이경(李?慶), 임연(任?), 송강(宋康) 등은 의논드리기를, “재야의 선비들이 논의한 내용은 종묘 사직에 관계됩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일 이외에는 다시 더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박정현(朴鼎賢)은 의논드리기를, “예로부터 국가에 비상한 거조가 있을 때 묘당의 대신들이 공론을 널리 수합해서 의논하여 결정해 왔던 것은, 지극히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사람마다 참여하여 논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여러 유생들의 상소문에 제기된 내용은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한산직에 있는 자로서 경솔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경외(京外)의 여러 대신들과 서로 의논해서 잘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여인길(呂썐吉)은 의논드리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비상한 변고를 만났을 때에는 비상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대한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중론을 널리 채집하여 변란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고, 행 사직 이정험(李廷?)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이 막중 막대한 일에 대해서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묘당의 대신들이 잘 처리해서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장자호(張自好)는 의논드리기를,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문제인데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참의 유희발(柳希發)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이 유생들의 상소는 국가의 대계를 위한 것인데 저에게 무슨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첨지 한총(韓叢)은 의논드리기를, “실로 공론(公論)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능원군 이보(綾原君李?)는 의논드리기를,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응당 조정의 처리가 있을 것입니다. 종척(宗戚)인 신하에게 무슨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창계 부수 세온(昌溪副守世溫), 창평 부수 세례(昌平副守世禮) 등은 의논드리기를, “식견이 없는 어리석은 신은 그저 임금을 충성과 의리로 섬길 줄만 알 뿐이고 국가의 논의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국론에 대해서는 원컨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문성군 이건(文城君李健)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이 막대한 논의에 대하여 무식한 종친이 비록 함부로 논의하지는 못합니다만 그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뿐입니다. 공론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행 사직 박재(朴梓)는 의논드리기를,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는 더없이 중대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위로 하늘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 사람의 마음을 살펴 옳게 처리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행 사용 이제(李?)는 의논드리기를,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인만큼 그 책임이 묘당에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신은 임금을 사랑하는 일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고, 조명욱(曺明勖)은 의논드리기를,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결정은 묘당에서 하여야 합니다. 말직에 있는 소신이 어찌 감히 의견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송석조(宋碩祚)는 의논드리기를, “지금 헌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재야의 공론이 이와 같으니 미관 말직에 있는 저의 식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고, 예조 참의 이명남(李命男)은 의논드리기를,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상원 부수 세령(祥原副守世寧)은 의논드리기를, “서적을 상고하고 사람들의 실정을 굽어 살펴 타당하게 처리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검상 남궁경(南宮儆)은 의논드리기를, “재야의 상소로 인하여 대대적인 논의가 한창 제기되고 있으니 낮은 관리의 소견으로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와 의리의 경중에 대해서는 절충하는 방도가 있기 마련이니 그저 묘당에서 신속하게 잘 처리하기를 소망합니다.” 하고, 학유(學諭) 조희진(趙希進)은 의논드리기를,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므로 오직 묘당에서 잘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전 정랑 이정(李涎)은 의논드리기를, “이 일은 묘당에서 처리할 문제이므로 성상을 번거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승문원 박사 이둔(李遯)은 의논드리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반드시 대신(大臣)에 의하여 결정되어 왔으므로 대신들의 의논이 한번 결정되면 소관(小官)들의 의견은 자연히 결정된 대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이 문제는 상께서 알 바가 아니므로 그에 대한 처리는 더더욱 대신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이 정사를 담당하는 여러 재상들과 함께 묘당에 모여서 가부를 토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한다면, 기강은 엄격해지고 일의 체모는 높아져서 사람의 마음은 저절로 진정되고 나라의 형편도 안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소란스럽게 매번 수의(收議)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마치 남에게 떠넘기고 핑계대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대신이 일을 당하여 처결한다는 본의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명은 대신에게 달렸다.’라고 하였으니, 아무쪼록 이 뜻을 염두에 두고 많이 묻는 것만을 고집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사복시 정 황익중(黃益中), 첨정 유일(柳썒), 판관 유희안(柳希安), 주부 박수의(朴守誼) 등은 의논드리기를, “재야와 여항에서 잇달아 소장이 올라오고 여론도 모두 그와 일치하니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전 군수 안종길(安宗吉)·이안민(李安民), 전 판관 홍응귀(洪應龜), 전 현령 이숭원(李崇元)·이경황(李慶滉)·권순(權淳), 전 현감 이운근(李雲根)·정혜연(鄭蕙衍)·노망해(盧望海)·이양휴(李揚休)·이덕순(李德淳), 전 영(令) 권광환(權光煥), 전 좌랑 성이민(成以敏) 등은 의논드리기를, “대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더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좌승지 유대건(兪大建)은 의논드리기를, “대론이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묘당이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의논드리기를, “대론이 현재 제기되었고 조정의 논의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오직 잘 재량함으로써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은 의논드리기를, “신하에게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대의(大義)가 있고 전하에게는 끝까지 보전하려는 사정(私情)이 있으니, 여러 유생들의 상소를 절충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 달렸습니다.” 하고, 행 좌참찬 민몽룡(閔夢龍)은 의논드리기를, “여러 유생들의 상소가 실로 공공한 논의에서 나온 것인데 무슨 논의할 것이 또 있겠습니까.” 하고, 행 사직 허균(許筠)은 의논드리기를, “우리 임금을 해치려 한 자는 우리의 ?遍痔都求?. 그런 원수에게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통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끝까지 은혜를 온전히 하려는 것은 전하의 심정이고 대의를 내세워 폄삭을 가하려 하는 것은 신하들의 책임입니다. 재야에서 올린 여러 상소는 그 견해가 매우 정당하니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고, 좌윤 김개(金죒)는 의논드리기를,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임금의 원수는 아비의 원수와 같이 본다.’고 하였으니 임금과 아비의 원수는 실지로 경중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 가운데는 아비의 원수라는 것 때문에 죽을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상을 해치려 한 자는 바로 우리 임금의 원수입니다. 대의(大義) 앞에서 어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재야에서 올린 정성어린 상소가 명백하고 통쾌하니 여기에 의하여 거행하게 되면 과연 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고, 한천군(漢川君) 조정(趙挺),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한산군(漢山君) 조진행(趙振行), 좌참찬 이충(李沖), 행 호군 남근(南瑾), 형조 참판 조국필(趙國弼), 동지 유간(柳澗), 행 사직 조유도(趙有道) 등은 의논드리기를, “서궁의 변고는 한집안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참으로 천고에 없던 일입니다. 지금 이 유생들의 상소는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인데 저희들이 어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에서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고, 대사헌 이병(李?), 대사간 윤인(尹휖), 집의 임건(林健), 사간 남이준(南以俊), 장령 한영(韓詠)·강수(姜쉝), 지평 정양윤(鄭良胤)·김호(金?), 헌납 조정립(曺挺立), 정언 이강(李죇)·박종주(朴宗胄) 등은 의논드리기를, “신들의 의견은 합사하여 아뢸 때 다 말씀드렸으니 다시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 오직 묘당에서 신속하게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행 도승지 한찬남(韓纘男), 우승지 이창후(李昌後), 좌부승지 김질간(金質幹) 등은 의논드리기를, “변란에 대처하는 도리는 경사(經史)에 나타나 있고 유생들의 상소에 다 진달하였으며 사람들의 의견도 같은 내용이니, 절충하여 처리하는 문제는 오직 의정부에 달렸습니다.” 하고, 우부승지 박정길(朴鼎吉), 동부승지 백대형(白大珩) 등은 의논드리기를, “대의는 지극히 엄한 것이고 공론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므로 신하의 도리는 오직 대의를 밝히고 공론을 제창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이밖에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고, <부제학 이대엽(李大燁),> 직제학 이익엽(李益燁), 교리 이잠(李?)·이상항(李尙恒), 부교리 정준(鄭遵), 수찬 신광업(辛光業)·남명우(南溟羽), 부수찬 윤성임(尹聖任)·서국정(徐國楨), 박사 조유선(趙裕善) 등은 의논드리기를, “한결같이 국론에 따라 인정과 예법을 절충한다면 은혜와 의리의 경중 문제는 자연히 처리할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봉교 조정생(曺挺生)·오익환(吳益煥), 검열 박종윤(朴宗胤) 등은 의논드리기를,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어 신하와 백성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으니, 처리하는 방도는 오직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대교 김주하(金奏夏)는 의논드리기를, “대의를 밝히고 공론를 제창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이밖에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검열 이필달(李必達), 이점(李?) 등은 의논드리기를, “서궁의 죄악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귀신과 사람이 다 분개합니다. 공정한 논의가 다행히 제기되고 많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합니다. 신들이 사국(史局)에 몸담고 있는 이상 감히 직필(直筆)을 사용하여 헌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공정한 논의를 흔쾌히 따름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대교 이경익(李慶益)은 의논드리기를,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검열 안응로(安應魯)는 의논드리기를, “정론이 이미 제기되었으니 단정코 다른 견해가 없습니다.” 하고, 유경종(柳慶宗)은 의논드리기를, “근래 전후하여 올린 여러 유생들의 상소는 다 화근을 제거하고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의(大義)가 강조되는 곳에는 사은(私恩)을 고려할 수 없는 것이며, 일이 중대한만큼 반드시 사유를 갖추어서 주문(奏聞)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위경(李偉卿)은 의논드리기를, “전에 벼슬하지 않았을 때 태학(太學)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이미 짧은 상소문을 올렸었는데, 윤인과 정조의 논의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열성은 설사 목을 베자는 홍무적(洪茂績) 등의 요청이 있었어도 오히려 가슴속에 서려 있습니다. 지금 널리 의논하는 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다시 헌의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참지 정조(鄭造)는 의논드리기를, “일찍이 계축년에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전에 없던 변고를 만나 각각 따로 거처해야 한다는 논의를 망령되게 진달하였으며, ‘모후(母后)가 안으로는 무당을 시켜 저주를 하게 하고 밖으로는 역적 음모에 호응함으로써 종묘 사직에 죄를 짓고 어미된 도리를 스스로 끊었는데 오늘날 신하들이 그를 국모(國母)로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대개 서궁이 자기가 낳은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꾀하여 아주 은밀히 모해한 흉악하고 참혹스런 사실이 뭇사람의 공초에서 일치되어 갖은 정상이 다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큰 변고인 동시에 실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의 원수인 것입니다. 오늘날 유생들의 상소는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관계로 말을 자제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을 위하고 종묘 사직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예로부터 변고에 대처하는 데는 그 방도가 있었습니다. 권경(權經)을 고려하고 은의(恩義)를 참작해서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데로 인도하여 후세에 영원히 할 말이 있게 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자기 도리를 다하도록 하는 것은 오직 묘당에서 잘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앞서 이른바 ‘모자간의 관계는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고 종사의 계책은 책임이 대신에게 달렸습니다.’고 한 것도 이 뜻입니다. 지금 널리 의논하는 때를 당하여 전날의 소견을 또 진달합니다.” 하고, 형조 참의 정규(鄭逵)는 의논드리기를, “서궁의 변고는 한가족 중에서 나왔으니 진실로 천고에 없던 일입니다. 이번 여러 유생들의 상소는 실로 공공한 논의입니다. 어찌 감히 더 논의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전 사간 정도(鄭道)는 의논드리기를, “사은(私恩)과 대의(大義)는 원래 경중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 오직 묘당에서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장악원 정 이홍엽(李弘燁)은 의논드리기를, “일찍이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도 대의(大義)를 감히 내세웠었습니다만 오늘날 변고에 대처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 하고, 이원엽(李元燁)·이대엽(李大燁) 등은 의논드리기를, “대의가 있는 데에는 정론(正論)도 같은 법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이야 어찌 유생들만 못하겠습니까.” 하고, 전 사예 박홍도(朴弘道)는 의논드리기를, “서궁의 변고는 지금까지 없었던 일인만큼 신하와 백성에게는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의리가 있으니 그 누가 통분한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까. 지난 계축년에 대간(臺諫)에 있을 때 몸바쳐 역적을 토벌하였으며 저주한 여러 역적들도 대부분 토죄하였습니다. 지금 이 논의에 있어서 어찌 전후의 논의를 서로 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묘당에서 대의를 밝혀 종묘 사직을 안정되게 하소서.” 하고, 사과 원종(元悰)·양홍(梁泓) 등은 의논드리기를, “노(魯)나라는 문강(文姜)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강(哀姜)의 변이 잇달아 일어났고, 당(唐)나라는 무후(武后)를 주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씨(韋氏)의 난이 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춘추(春秋)》에 써서 단죄하였으며, 호씨(胡氏)는 장간지(張柬之)가 무후에게 죄를 주었어야 했다고 논했던 것입니다. 김을 매면서 뿌리를 완전히 뽑지 않으면 결국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원컨대 속히 대의를 들어서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고, 이조 좌랑 한옥(韓玉)·황덕부(黃德符) 등은 의논드리기를, “사사로운 은혜를 온전히 간직하는 것은 성상에게 달렸고, 대의를 가지고 변란에 대처하는 것은 신하들에게 달렸으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절충해서 끝까지 잘 처리하여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것은 묘당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판윤 윤선(尹銑)은 의논드리기를,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신하와 백성의 심한 노여움을 사고 있으므로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는데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대신들과 훈척(勳戚)인 여러 재상들이 잘 마무리하는 계책을 함께 의논하여 적합하게 처리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분병조 참판 이성길(李成吉)은 의논드리기를, “전후로 올린 유생들의 항의하는 상소는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재야 선비들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온 나라의 공정한 논의를 따라 속히 묘당의 대신들, 그리고 훈척인 재상들과 함께 자세히 토론해서 서둘러 대의(大義)를 결정하소서.” 하고, 분병조 참의 박사제(朴思齊)는 의논드리기를, “여러 유생들이 항소(抗疏)를 올림으로 해서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는데 온 나라의 백성들이 어찌 견해를 달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의 대신들과 훈척인 재상들이 속히 종묘 사직을 위한 계책을 정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엄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우윤 이원(李瑗)은 의논드리기를,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신하와 백성들의 심한 분노를 사고 있으므로 유생들의 항의하는 상소가 잇달아 올라와 정론이 한창 격렬하니, 이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맞겠습니다.” 하고, 행 사정 황치성(黃致誠)은 의논드리기를, “유생들의 상소는 진정을 피력하였고 공론은 지극히 엄격하니 오직 의를 내세울 뿐 달리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고, 행 사과 윤개(尹凱)는 의논드리기를, “나랏일 중에는 상에게 진달하기 어렵고 대신이 직접 담당하여 처리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랏일의 위태로움이 과연 유생들의 상소와 같고 그 위급한 화가 눈앞에 닥쳤다면 대신은 응당 적절하게 처리해야 하고, 만약 위태로운 정도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대신은 응당 그것을 진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국가의 안위가 대신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어찌 분분하게 의견을 수합하기를 마치 길가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한단 말입니까.” 하고, 이선복(李善復)은 의논드리기를, “인륜상의 큰 변고가 성상의 시대에 발생하여 유생들의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대대적인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늘날의 거조(擧措)는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같이 느끼는 것은 변고에 대처하는 문제를 타당성 있게 처리하는 것 뿐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예조 좌랑 유약(柳?), 승문원 권지 유집(柳潗) 등은 의논드리기를, “신하에게는 역적과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의리가 있고 전하에게는 사사로운 은혜를 고려해야 하는 정분이 있으니 오직 묘당에서 잘 처리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설서 이모(李慕)는 의논드리기를, “임금을 해치려 했던 원수를 신하의 도리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대의가 존재하는 이상 어찌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고, 형조 좌랑 이원여(李元輿)는 의논드리기를, “대의에 관계되므로 조정과 재야가 다같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변란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 하고, 보덕 배대유(裵大維), 필선 곽천호(郭天豪) 등은 의논드리기를, “현재 대대적인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데 어찌 이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전 지평 홍요검(洪堯儉)은 의논드리기를, “유생들이 상소하여 항의하고 있고 공정한 논의가 확대되고 있으니 사사로운 은정이 비록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대의를 막기는 어렵습니다. 속히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예빈시 정 금개(琴愷)는 의논드리기를, “삼사가 잇달아 아뢰고 있고 유생들이 항의하는 소장을 올리고 있으니 오직 묘당이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승문원 권지 심지청(沈之淸)은 의논드리기를, “계축년 이후로 이미 모후(母后)로 대우할 수 없다는 의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국론이 이미 제기되었으니 전하의 신하가 된 자들이 어찌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고, 예조 좌랑 한정국(韓定國)은 의논드리기를, “서궁은 임금의 원수인만큼 어린아이일지라도 다 그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다는 의리를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이론을 제기하여 임금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예조 정랑 채겸길(蔡謙吉)은 의논드리기를, “국가의 운수가 불행하여 화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결과 사람의 도리는 어두워지고 이론(異論)들만 판을 쳐 《춘추(春秋)》의 대의가 문란해져 장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재야의 선비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충성스런 말로 전하에게 호소한 지 여러 날이 지났으나 아직도 결정짓지 않고 있습니다. 임금이 주는 밥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도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서궁의 죄악을 들어 태묘에 고한 다음 먼저 그의 존호(尊號)를 강등시키고 다음으로 분사(分司)·공헌(貢獻)·조알(朝謁) 등의 일을 철폐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옳은 의견을 따라 처리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게 하소서.” 하고, 예조 정랑 최호(崔濩)는 의논드리기를, “당초에 서궁이 안으로는 무당을 불러들여 저주를 행하고 밖으로는 반역 음모에 동조하였다는 사실이 여러 사람의 일치된 공초를 통하여 진상이 다 드러났으므로, 일찍이 벼슬하기 전에도 주제넘게 항의하는 소장을 올려 대의를 밝혔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유생들이 다함께 분개해 하고 조정과 재야가 같은 말을 하는데,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하여 종묘 사직을 등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봉상시 주부 강문익(康文翼)은 의논드리기를, “한 하늘 아래에서 어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주벌을 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고, 승문원 부정자 정심(鄭沁)은 의논드리기를,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평소에 원하던 바입니다. 하찮은 소신이 다시 무슨 의논을 드리겠습니까.” 하고, 행 사과 이담(李憺)은 의논드리기를, “정성을 다하여 역적 토죄할 것을 청하는 것이 신하의 가장 큰 의리입니다. 속히 공론을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문학 한희(韓?), 전적 한급(韓?) 등은 의논드리기를, “희(?)·오(晤)·급(?) 형제 세 명이 일찍이 벼슬하기 전인 계축년에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소장을 올렸다가, 흉악한 엄성(嚴惺) 등의 모함으로 ‘국모(國母)를 동요시켜 윤리상의 죄를 범했다.’는 것으로 지목받아 모두 정거(停擧)되고 말았으며, 또 그들이 번갈아가며 글을 올려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여 마지않았는데 하늘이 일월(日月)처럼 굽어살펴 흉악한 무리를 척결하심을 힘입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으니, 이 모두가 다 성상의 은혜입니다. 임금을 위하고 종묘 사직을 위하는 구구한 마음은 일편 단심 다른 뜻이 없습니다. 다만 원하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유생의 글을 절충하고 공론을 더욱 확장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군기시 정 강린(姜?)은 의논드리기를, “종묘 사직은 소중한 것이어서 사사로운 은정으로 막기는 어렵습니다. 속히 중대한 논의를 따라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고, 전 정 이람(李覽)은 의논드리기를, “국시가 이미 정해졌으니 오직 묘당의 대신들과 훈척인 중신들이 잘 처리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직강 유광(柳洸)은 의논드리기를, “전후에 걸쳐 올려진 유생들의 상소는 실로 종묘 사직을 위한 내용이었으니, 오직 묘당이 절충하여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행 사용 정호신(鄭虎臣)은 의논드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망극한 변란을 겪게 되었습니다만 임금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습니다. 무슨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 봉산군(蓬山君) 정상철(鄭象哲)은 의논드리기를, “재야의 공론(公論)이 무리를 지어 일어나고 조정의 정의(正義)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오직 묘당이 적당하게 헤아려서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행 사정 최철견(崔鐵堅)은 의논드리기를, “여론이 다 분개함에 따라 정당한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니 국가를 위하여 화근을 제거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고, 전 판관 김여순(金汝純)은 의논드리기를, “한 하늘 아래에서 참고 살아온 지가 10년이 되어가니 공정한 논의가 제기된 것이 지금도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대의가 있는 곳에 어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교서관 교리 정흡(鄭洽)은 의논드리기를, “신하의 의리로는 역적을 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조정이란 중대한 논의가 있는 곳이니, 잘 처리할 수 있는 방도가 나오기를 신은 날마다 바라고 있습니다.” 하고, 주부 박항길(朴恒吉)은 의논드리기를, “신하된 자로서는 다만 의리로 떨치고 일어나 역적을 토벌해야 할 뿐입니다.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사예 박수서(朴守緖)는 의논드리기를, “공의(公議)는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국시(國是)는 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공의를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전 감찰 김설(金渫)은 의논드리기를,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인만큼 은혜는 가볍고 의리는 중합니다. 화근을 제거하기에 힘쓸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하고, 전 정랑 정감(鄭鑑)은 의논드리기를, “유생들은 항의의 상소를 올리고 있으며 관리와 백성들은 잇달아 소장을 올리고 있으니, 이것은 온 나라가 다같이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정에 있는 높고 낮은 신하들로서는 더욱더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묘당이 모든 관리를 다 거느리고 가서 정성껏 호소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림으로 해서, 한편으로는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 한편으로는 인심을 진정시키게 하소서.” 하고, 전 현령 정흠(鄭欽)은 의논드리기를, “선비들과 일반 사람들은 계속 글을 올리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높고 낮은 관리들은 의리로 보아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없으니, 묘당에서는 속히 큰 계책을 정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고, 전 정 허경(許儆)은 의논드리기를, “중대한 논의가 한창 벌어지고 있으며 조정의 계책도 이미 결정되었는데 거의 죽어가는 병든 몸이 어찌 거기에다 다른 의견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익위(翊衛) 이평형(李平亨)은 의논드리기를, “여러 유생의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중대한 논의가 한창 펼쳐지고 있으니, 오직 묘당이 은혜와 의리의 경중을 살펴서 처리를 적절하게 잘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동몽 훈도 이적(李績)은 의논드리기를, “서궁의 변고는 한가족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신하와 백성의 입장에서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묘당은 속히 공론을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동몽교관 김휘(金텭)는 의논드리기를, “서궁의 죄는 실로 종묘 사직에 관계되므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번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의리상 정성을 다하여 토죄할 것을 청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원컨대 옛 선비들이 이미 정하였던 논의에 의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고, 사섬시 부정 유철(柳澈), 평시서 영(平市署令) 이문현(李文顯), 서제(書題) 정몽필(鄭夢弼) 등은 의논드리기를, “중대한 논의가 한창 제기되고 있어 막을 수 없으니 속히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고, 도사 정결(鄭潔)은 의논드리기를, “밖으로는 반역 음모에 동조하고 안으로는 저주한 자취가 명백히 드러나서 의심할 것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신하로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사로운 은혜를 보존하려 하더라도, 공정한 논의가 이미 격렬하게 일어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옳다고 한다면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 큰 의리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묘당이 적절하게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성균관 박사 황상겸(黃尙謙)은 의논드리기를, “공론은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고 국시도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 공론에 따라 국시를 정하는 것이 어찌 오늘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성균관 박사 왕보신(王輔臣)은 의논드리기를, “유생들의 상소가 한번 제기되자 여론이 일치되었습니다. 국가의 대계를 정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는 문제는 대신이 할 일입니다. 어찌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 하고, 종묘서 영 우정침(禹廷琛)은 의논드리기를, “사론(士論)이 일제히 일어나 여론이 한창 일고 있으니 오직 묘당이 공론을 따라 잘 처리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전적 채승선(蔡承先), 학정 이유일(李惟一) 등은 의논드리기를, “유생들의 상소가 이미 들어오자 공론이 더욱 준엄합니다. 속히 대의를 내세우는 문제는 오직 묘당에 달렸습니다.” 하고, 전적 이창정(李昌庭)은 의논드리기를, “여러 유생들이 올린 상소의 내용과 다른 의견이 없으니, 속히 국가의 대계를 결정하여 종묘 사직을 부지하소서.” 하고, 전적 신칙(申?)은 의논드리기를, “유생들의 상소가 이미 들어오자 여론이 정해졌습니다. 속히 국가의 대계를 세워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원전】 32 집 648 면
《 인조 001 01/04/24(계미) / 도원수 장만을 전송하다 》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도원수 장만을 전송하였다. 상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장전(帳殿)에 나아가니, 종재(宗宰) 인성군 이공(仁城君李珙), 의창군 이광(義昌君李珖), 흥안군 이제(興安君李컾), 경평군 이늑(慶平君李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영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 좌의정 정창연(鄭昌衍), 진원 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능원군 이보(綾原君李?), 이조 판서 신흠(申欽), 구천군 이수(龜川君李첧), 형조 판서 서성(徐픸), 대사헌 오윤겸(吳允謙), 병조 판서 김류(金?), 이조 참판 이귀(李貴),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시립(侍立)하였다. 표신(標信)으로 원수 장만을 부르니, 투구와 값옷 차림으로 들어와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였다. 중군(中軍) 현즙(玄楫), 별장(別將) 남이흥(南以與) 및 군관 74인도 계하(階下)에서 차례로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였다. 상이 중군 이하에서 선온(宣춠)할 것을 명하고, 이어 시사(試射)하도록 하였는데, 1등을 차지한 자에게 백금(白金) 20냥(兩)과 구마(廐馬) 1필을 주었으며 그 아래에도 각각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상이 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이르기를, “경은 직접 한 잔을 들고 다 마시라.” 하니, 장만이 사양하였다. 이어 주달하기를, “서로(西路)의 파발(擺撥)을 일찍이 말을 가진 방군(防軍)으로 세웠기 때문에 변보(邊報)가 지체되는 근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각 고을로 하여금 파발을 세우게 하기 때문에 아무리 긴급한 보고도 매우 늦게 전달됩니다. 예전의 규정대로 말을 가진 군사에게 방수(防戍)하는 임무를 면제해 주고 파발로 세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상이 어탑(御榻)에서 내려 와 친히 상방검(尙方劍)을 잡고 장만에게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대장(大將) 이하로 명을 듣지 않는 자는 이 검으로 처치하라.” 하였다. 원수 및 중군, 별장, 군관이 모두 두 번 읍하는 예를 행하고 나갔다.
【원전】 33 집 527 면
《 인조 002 01/07/15(계묘) / 주강에 《논어》를 강하고, 도성 호위 등을 논의하다 》
상이 주강에 문정전에서 《논어》를 강하였다. 지사 이귀가 아뢰기를, “이 불안한 때를 당하여 도성의 호위를 허술하게 할 수 없습니다. 명 태조(明太祖)는 성 가운데에 큰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병부 상서 우겸(于謙)이 또 12개 집단의 군영을 설치하고 변방에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습니다. 현재 성 가운데에는 훈련 도감 군사와 모집에 자원한 군관 5백 여 명만 있습니다. 양식만 있으면 먼 지방 사람 중에 필시 풍문을 듣고 와서 모이는 자가 있을 터이니 수천 명의 군사를 얻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또 경기의 속오군(束伍軍)은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을 경우 수령이 직접 거느리고 현장에 달려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은 서변(西邊)에 뽑아 보내지 말고 수령에게 정장(精壯)한 사람을 다시 뽑아 따로 대오를 편성하게 한 뒤 항상 조련시키게 함으로써 경성의 호위용으로 대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때 군사를 뽑으면 소요스런 폐단이 있을 듯하다. 단지 수령에게 늙은이와 장정을 가리고 그대로 단속을 잘하여 위급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이번에 모집에 자원한 군사를 혁파하라고 명하면서 실신했다는 것으로 하교까지 하였습니다. 적어도 2천 명은 편성해야 겨우 군대의 모양을 이룰 것이니, 지금 사람들의 말이 있다고 하여 변경해서 고칠 수는 없습니다. 혁파하여 보내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무리는 애당초 공과 상을 바란 데에 지나지 않은 자들인데 갑자기 군대로 편입시킨다면 실신하는 일에 해당된다. 나의 뜻은 당초 모집에 자원한 군사는 다 파해버리고 다시 모집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흥안군 이제(興安君李컾)에게는 해괴한 일이 많습니다. 상이 항상 편전(便殿)에서 자주 인견하시어 엄하게 경계를 내리시면 악한 일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도에 어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민간의 반노(叛奴)와 적신(賊臣)의 집의 종들이 능원군(綾原君)의 집에 많이 투입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이는 여러 왕자의 경우와는 다르니 더욱 엄히 단속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나오기를 내가 날마다 기다리는데도 오히려 인피하고 들어가니, 이는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으로서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승지는 내일 다시 가서 간곡히 권하여 기필코 출사하게 하라.” 하였다.
【원전】 33 집 541 면
인조002 01/08/19(정축)/주강에《논어》를 강하고,대간의 의논을 따를 것 등에 대해 논의하다 》
상이 주강에 문정전에서 《논어》를 강하였다. 사경 임숙영이 아뢰기를, “근래 물이 흐르듯 즉시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상당히 없어졌으므로 안팎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따를 만한 일은 즉시 윤허하여 따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래야 하는 것은 알지만 나의 소견은 대관과 다르다. 폐조 때에 죄지은 사람을 죽이고 귀양보낸다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한번 죄를 의논한 뒤에는 잇달아 추론(追論)하여 일과처럼 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숙영이 아뢰기를, “대관은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듣고 보는 것에 앞뒤가 있는데, 다만 일의 옳고 그름만 살필 따름입니다. 그리고 폐조 때에는 왕자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몸을 움츠리고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성상께서 우애하시자 도리어 방종하는 조짐이 있으니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특진관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거의(擧義)했던 무사 한 사람이 능원군(綾原君)의 종에게 모욕을 당하자 그 종을 결박하여 능원군에게 가서 하소연하니, 능원군이 그 종을 매우 쳤다고 합니다. 이는 상이 엄하게 단속하여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그 무사의 아내가 도리어 법관(法官)에게 구속을 당했다 한다. 그 종은 성질이 사나워서 반드시 결박한 다음에야 억제할 수 있었다는데, 이것 때문에 죄를 받는다면 궁노(宮奴)들이 필시 더욱 방자해질 것이다.” 하였다. 이귀·정경세·임숙영이 모두 일어나서 절하고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고, 숙영이 이어 아뢰기를, “왕의 말이 이에 미쳤으니 국가의 복입니다. 궁가(宮家)의 소인지(小印紙)로 인한 폐단은 필시 이보다 심할 것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 주저없이 대간의 의논을 따르소서.” 하였다.
【원전】 33 집 547 면
《 인조 004 02/02/08(임진) / 우상 신흠·서평 부원군 한준겸 등에게 자전과 중전의 호종을 명하다 》
우상 신흠(申欽),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 지사 서성(徐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참판 신감(申鑑), 참의 정온(鄭蘊), 능원군(綾原君) 이보(李?), 구천군(龜川君) 이수(李첧) 등에게 자전과 중전을 호종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33 집 577 면
《 인조 005 02/04/03(병술) / 능원군 이보에게 속공전 20결을 하사하다 》 능원군(綾原君) 이보(李?)에게 속공전(屬公田) 20결(結)을 하사하게 하였다. 【원전】 33 집 607 면
《 인조 006 02/06/01(계미) / 능원군 이보에게 노비 10구를 주고 정신 옹주에게 집 2채를 하사하다 》
적몰(籍沒)한 노비 10구(口)를 능원군(綾原君) 이보(李?)에게 내리고, 적몰한 집 2구(區)를 정신 옹주(貞愼翁主)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역적 이괄의 변란 때 관향사 남이웅(南以雄)이 군향(軍餉)이 모자라서 옹주의 봉산(鳳山) 농장의 곡식 2백여 석을 가져다 썼는데 이때에 이르러 옹주가 정문(呈文)하자, 호조가 역적의 집으로 그 곡식 값을 갚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한 것이다. 정신 옹주의 부마(駙馬)는 달성 위(達城尉) 서경주(徐景켻)인데, 나라의 일이 급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군수로 징발되어 쓰인 것을 갚기를 요구하며 마치 장사꾼이 값을 따지는 것같이 하였으므로, 시의(時議)가 비루하게 여겼다. 【원전】 33 집 623 면
《 인조 006 02/07/12(갑자) / 언로(言路)를 넓히고 간언을 받아들이기를 청하는 장령 최연의 상소 》
장령 최연(崔?)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간언을 물리치는 것이 전일보다 심해지셨으니, 과단성이 없는 신으로서 간언을 물리치는 때에 한 마디 말씀을 올려 천청(天聽)을 움직이려고 생각하니, 어찌 어렵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 해가 못되어 정령(政令)에 잘못이 많아서 인덕(仁德)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하고 무위(武威)는 간사한 자를 누르지 못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품어 보호하려는 은택은 바라기 어렵게 되고 아래를 거느리는 데에 탄압하는 위엄이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역신(逆臣)이 기회를 틈탔다가 곧 멸망한 것은 그야말로 천행인 것으로, 어찌 전하의 예산(睿算)으로 말미암아 중흥의 업적을 세우신 것이라 하겠습니까. 환궁한 뒤에 자기를 죄책하는 말씀이 대궐에서 내려지기도 전에 궁중의 잗단 영이 신하들에게 자주 들렸는데, 근심하시는 것은 능원군(綾原君)의 전토(田土)가 모자라는 것이었고 걱정하시는 것은 공주가 살 집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접때는 궁노(宮奴)를 효시(梟示)하는 것을 예단(睿斷)하여 망설이지 않으셨는데 요즈음은 내노(內奴)를 액정(掖庭)에서 부리는 것에 대해 대간이 청하여도 따르지 않으시고, 접때는 많은 부세(賦稅)를 면제하여 팔방에 반교(頒敎)하셨는데 이번에는 보리쌀의 양을 초과해서 정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독촉하여 받고 계십니다. 그 밖의 갖가지 사항을 죄다 아뢸 수 없으나, 신이 괴이하고 의아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전하께서 거의하여 난국을 진정시키실 때에는 무략(武쪭)을 겨룰 자가 없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관인(寬仁)만을 숭상하신다는 점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죄받지 않아 간사한 자가 징계되지 않고, 결단되야 할 것이 결단되지 않아 고질적인 폐단이 고쳐지지 않고, 쇠퇴해진 것이 떨쳐지지 않아 기강이 아주 없어졌습니다. 전후가 같지 않아 마치 두 조정이 있는 듯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것입니까. 근일 세 번의 비망기(備忘記)에 다 폐단을 바로잡는 좋은 계책과 잘 다스리기를 급선무로 알아 도모하려는 뜻이 보이긴 하나,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잘 다스리기를 도모한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로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정성은 없으십니다. 바라건대 정성으로 다스리기를 도모하고 실지로 다스리기를 도모하소서. 언로(言路)를 넓게 열고 기강을 떨쳐 일으키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주며, 먼 지방의 선비가 정성을 다하여 상소한 것은 ‘소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고만 하지 말고 쓸 만한 것을 채택하고, 신하들이 방책을 세우고 계략을 아뢴 것은 해조로 하여금 회계(回啓)하게 하지만 말고 시행할 만한 것을 살피며, 정령이 백성을 괴롭히면 반드시 제거하되 망설이지 말고, 말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 미치면 반드시 따라서 어기지 말아서, 구차하고 고식적인 정치를 하지 마소서. 그러면 반석(盤石)처럼 부딪치면 부숴지고 염화(炎火)처럼 범하면 타는 공효를 오늘날 보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위(衛)나라 임금이 달아났다가 나라에 돌아왔을 때에 변경에서 맞이한 자에게는 손을 잡고 함께 말하였으나 교외에서 맞이한 자에게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이 쉽게 일어나는 것을 말한 것인데, 뒷날에 오늘만 못할까 염려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백성이 근심하는 것에 끝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근심이 없다 하지 말고 깊이 위나라의 임금을 거울삼아 금강(錦江)의 일을 잊지 마소서. 그러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인덕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하고 무위는 간사한 자를 누르지 못한다는 그대의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능원군의 전토가 모자라는 것을 근심한다고 한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임금으로서 이런 위급한 때에 나라의 일을 염려하지 않고 아우의 전토만을 근심한다면 경중을 모르는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형제 사이에는 지극한 정이 있는 것이니, 가난을 근심하더라도 본디 교화에 해로울 것은 없을 것이다. 소의 사연은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원전】 33 집 629 면
《 인조 006 02/08/04(병술) / 시강관 이식이 한준겸과 동양 위 등의 군관을 폐지할 것을 건의하다 》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논어》를 강하였다. 시강관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최근 이서(李曙)의 말을 들으니, 공신·대장 등의 군관(軍官)으로 지금 경중(京中)에 있는 자가 거의 1천여 인이나 되는데 다 명중(命中)의 재주가 있다 합니다. 번(番)을 두세 개로 나누어 궐문 밖에 따로 두 영(營)을 설치한 뒤 대장(大將) 김류·이귀(李貴)로 하여금 거느리고 호위하게 하면 일이 매우 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아문(衙門)이 매우 많아져서 산만하여 질서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한준겸(韓浚謙)·동양 위(東陽尉)·능원군(綾原君)과 삼공(三公)이 다 군관을 거느리고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상한(常漢)이라도 한 번 군관이 되기만 하면 위세를 빌어 중외에서 폐단을 일으키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목을 따로 만들면 요포(料布)의 비용이 매우 많이 들 것이고, 번을 쉬게 하면 반드시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우선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살펴보고 위급한 일이 없으면 바로 폐지해도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군관이 있는 아문이 모두 열 네 곳이었는데 사태가 위의(危疑)스러웠으므로 아직 혁파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장(主將) 가운데에는 사사로이 사환(使喚)하는 자도 있었는데, 경외를 횡행하며 폐단이 날로 불어났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다. 그런데도 호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관계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식이 이에 강력히 아뢴 것이다.
【원전】 33 집 634 면
《 인조 011 04/01/25(기사) / 부제학 최명길의 이귀의 차자에 대한 반박과 별묘 건립에 대한 김장생의 회답 》
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옥당에 답한 전교를 보건대 ‘본관(本館)의 차자 가운데 모멸하고 중도에 어긋난 말들이 없지 않으니 이귀가 그런 말을 한 것이 당연하다.’ 하였습니다. 신은 놀랍고 후회스러운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성명께 대략 소견을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우매한 생각에는 성인이 예를 제정한 데에는 각각 정해진 분의가 있는 것으로서 거기에 지나쳐도 예가 아니고 미치지 못하는 것도 예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예기(禮記)》에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天子)나 제후(諸侯)이면 천자나 제후의 예로써 제사 지내고 시복(尸服)은 사복(士服)으로 한다.’ 하였고, 또 ‘상사(喪事)는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하고 제사는 산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한다.’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예는 장사는 돌아가신 분의 본품(本品)에 따라서 해야 하고 제사는 제후의 예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장사를 본품에 따라서 하지 않으면 이는 지나친 것으로 예가 아니고 제사를 제후의 예에 따라서 하지 않으면 이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또한 예가 아닌 것입니다. 신의 소견이 본래 이러하므로 지난번 6일에 성복(成服)하고 명정(銘旌)을 금전(金篆)으로 쓰라는 명이 내렸을 적에 동료들과 상의하여 차자를 올려 논하였는데 그때의 문자는 모두 신이 지어낸 것이었습니다. 차종간에 구점(口占)한 것이어서 어의(語意)가 통창하지 못한 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차자가 이미 유중(留中)되어 진달한 내용이 채납되지 않았으므로 물러가 생각하니 황공스럽고 두려운 마음만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연평 부원권(延平府院君) 이귀가 서신을 보내어 신을 나무랐는데 그 내용이 신의 본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귀의 말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가지고 천청에 주달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지금 조정 신하들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하여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고 있으니 성상께서 평소에 정직한 기풍을 배양하신 효험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귀가 인용한 예경의 말은 성인의 본의를 참으로 체득하고서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공은 광무(光武)와 같은데 척분은 원족(遠族)이 아니고 계승한 것은 효선(孝宣)의 경우와 같은데 가깝기로는 장손(長孫)이니, 상하 수천 년 사이에 전혀 견줄만한 데가 없습니다. 예제(禮制)에 대해 의논할 적에는 진실로 쉽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조부에게서 나라를 받았다는 것과 천자의 서자(庶子)가 적통(嫡統)을 이었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인 것으로 남의 후사가 된 예에 비하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때문에 기년으로 강복하기를 청하는 것은 신의 본의가 아니었고 부장기(不杖期)로 하기를 청하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견(愚見)을 대략 진술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경외스러운 조정을 두고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할 수가 없어 뜻을 품고 말을 만들어 발론하려다가 다시 그만두곤 하면서 두문 불출한 채 삼가 물의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비방이 한몸에 집중되어 뼈가 녹을 지경이니 신이 자처(自處)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은 진실로 지금이 번독스럽게 아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마음이 위축되고 사세에 핍박되어 위를 우러러 한번 울부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황공스럽고 안타까운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명길이 또 김장생(金長生)에게 서한을 보내어 별묘(別廟)를 세우는 것이 옳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장생이 다시 글을 보내기를, “앞서 보내준 서한에서 예에 대해 언급한 대의(大意)는 ‘이미 고(考)라고 칭하였으면 남의 후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미 남의 후사가 되지 않았다면 아들로서 부모의 복을 강등하는 것이 어느 예경(禮經)에 있는가?’ 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본인은 반복하여 연구해 보아도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유(盛諭)를 받은 터이니 그대로 침묵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당초 성징(聖徵)【이정구(李廷龜)의 자(字).】과 경임(景任)【정경세(鄭經世)의 자.】 양공(兩公)이 사묘(私廟)의 칭호에 대해 나에게 문의하여 왔을 때 나는 즉시 비견(鄙見)을 말하였지만 양공이 남의 말을 유념하여 듣지 않았고 또 예경(禮經)과 정주(程朱)의 정론(定論)을 상세히 상고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의견대로 고(考)라 칭하고 자(子)라 칭하는 것으로 축식(祝式)을 결정하였습니다. 내가 그때 마침 언지에 있었으므로 상소를 올려 변석(辨析)하면서 예경의 본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극론하였는데 어찌 양공이 결정한 것을 옳다고 했겠습니까. 내가 전에도 ‘고(考)라 칭하고 자(子)라 칭했다면 반드시 박소(朴疏)【박지계(朴知誡)의 상소임.】대로 삼년상을 하고 백관은 기복(期服)을 해야 하며 또 예묘(?廟)를 세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미 부자(父子)가 된 것으로 정해졌다면 어찌 부모님의 상에 삼년과 기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이미 사친(私親)이라고 칭했다면 또한 대통을 입승한 임금이 사친을 위하여 삼년상을 입을 수가 있겠는가.’ 했었습니다. 지금 공의 의견은 단지 월사(月沙)【이정구의 호.】와 우복(愚伏)【정경세의 호.】의 잘못 정해진 의논을 추연(推演)하여 나의 논설을 공파(攻破)하고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하는데 어쩌면 견해가 그토록 투철하지 못합니까. 내가 일찍이 월사와 우복을 만나 농담하기를 ‘비유하건대 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양공(兩公)은 대문(大文)을 해석하고 박지계(朴知誡)로 하여금 주각(註脚)을 달게 한 것과 같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공의 허다한 사설을 보건대 주석의 주석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공은 고(考)라 칭하고 자(子)라 칭한 것이 잘못인 줄은 몰랐지만 강등의 복제를 결정하는데 이르러서는 감히 삼년복을 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처음에는 잘못되었으나 나중에 올바른 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공은 기필코 양공의 의논에다 한술 더 떠서 삼년상을 행할 것을 결정하려고 하니, 자신의 주장만을 믿는 것이 너무 지나쳐 고금의 공의(公議)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대저 성상께서는 방지손(傍支孫)으로 대통을 입승하여 종묘와 사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옛말에 자신이 복중(服中)에 있으면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만약 삼년상을 한다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조종(祖宗)의 지위를 대원군 부인에게 비교해 본다면 등위(等威)의 현격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사친(私親)에게 지극한 정리를 풀기 위해 조종의 상사(喪祀)를 폐하는 것이 과연 예에 합당한 것이며 성심(聖心)에도 편안하겠습니까. 그리고 공의 차자에 ‘지난해 정경세(鄭經世)가 옥당에 있으면서 고(考)라고 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남의 후사가 되어 본친(本親)을 고(考)라고 칭한다는 것이 어느 예경에 나와 있으며 또 고(考)라고 칭하면서 삼년복을 강등한 것 또한 어느 예경에 나왔는가? 전일 고라고 칭한 것이 옳다면 오늘날 강복하신 것이 잘못이고 오늘날 강복하는 것이 옳다면 전일 고라고 칭한 것이 잘못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반드시 한 가지의 잘못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진실로 옳은 말입니다. 공이 이것으로 월사(月沙)와 우복(愚伏)을 책하는 것은 옳습니다만 그것으로 또 나를 공격하려는 것은 어찌 깊이 생각지 못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옛날 진 간문제(晉簡文帝)는 조부의 항렬로 손자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이제 고명(高明)의 의견으로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원제(原帝)를 고(考)라 칭해야 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승한 임금이 효조부(孝祖父)라고 자칭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고 또 선군(先君)을 황종손(皇從孫)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부당한 것입니다. 당 선종(唐宣宗)이 무종(武宗)에 대해서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조부라고 하고 숙부라고 하는 것은 존항(尊行)의 호칭이니 그러한 존칭을 자신에게 스스로 쓸 수 없는 것이요 손(孫)과 질(姪)은 비칭(卑稱)이니 비칭을 선제(先帝)에게 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령 공이 이에 대한 호칭을 정한다면 어떻게 하여야 예문에 합당하게 되겠습니까. 다시 생각하여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의견은 따로 칭호를 만들되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따라 자칭(自稱)은 ‘사황제(嗣皇帝) 신모(臣某)’라고 하고 또 선황제(先皇帝)에 대해서도 따로 칭호가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 선유(先儒)들의 정론(定論)이 없으니 어떻게 감히 억설(臆說)을 창출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월사의 주대(奏對)에 ‘부자(父子)의 의리는 있지만 부자의 명칭은 없다.’고 한 말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조상우(趙相禹)의 소견에 있어서는 호 문정공(胡文定公)의 말을 근본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또한 온당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부와 숙부의 존항(尊行)으로 손과 질의 비항(卑行)에 대해 부자(父子)라고 칭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통전(通典)》의 제전문(祭奠文)에 모두 애사(哀嗣)라고 칭하는 것은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이는 나의 사견이 아니라 실은 《춘추(春秋)》 사전(四傳)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대저 제왕가(帝王家)는 종통(宗統)을 잇는 것을 중히 여기는 것이니 그 명호(名號)가 반드시 세차(世次)를 따른 뒤에야 순리이고 정당한 것이 됩니다. 나 자신도 감히 옳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바로 의논의 핵심이 되는 곳이기 ?㏏?에 여기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면 통하지 않는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부록춘추(附錄春秋)》를 상고하건대 고씨(高氏)의【이름은 항(?)임.】 말에 ‘부자가 서로 계승하는 것은 상례(常禮)이지만 형제에게 전하는 데 이르러서는 또한 부득이한 조처인 것이다. 이미 나라를 전수받았으면 전수받은 사람이 아들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같은 것이고 또 전해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아버지와 같은 것이다. 한(漢)나라의 혜제(惠帝)와 문제(文帝)도 형제 간에 서로 계승했는데 당시의 의논하는 자들이 문제를 추론하여 위로 고조(高祖)를 계승한 것으로 하였으므로 고조에게서 직접 천하를 전수받은 혜제는 도리어 소목(昭穆)의 정위(正位)에 참여되지 못하였다. 한 광무(漢光武)에 이르러서는 당연히 평제(平帝)를 계승해야 하는데 스스로 세차(世次)를 원제(元帝)의 뒤에다 해당되게 하였으니, 모두가 예경(禮經)에 위배되는 것으로 전할 수 없는 사례인 것이다. 대저 임금으로서 형제를 후사로 삼은 경우는 반드시 아들을 두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끌어다 후사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신자(臣子)이기는 마찬가지인데 후사가 된 사람이 도리어 형제라는 이유로 나라를 받은 사람의 뒤를 잇지 않고 선군(先君)의 뒤를 잇는 것으로 한다면 이는 전수해 준 사람은 끝내 후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생존해 있을 적에는 신자(臣子)로서 섬기다가 사망해서는 형제라는 것으로 조처한다면 이는 생존했을 때의 의리를 잊은 것이고 사망한 뒤에는 배반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실제로 후군(後君)에게 전수받았는데 이제 스스로 선군(先君)을 계승한 것으로 한다면 이는 후군이 자신을 명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 선군(先君)이 전수한 명을 폐하는 것이 된다.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을 자기에게 주었는데도 부자(父子)의 예(禮)를 행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이런 사례는 모두가 불가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전수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뜻이겠는가.’ 하였습니다. 내가 고씨(高氏)의 이 말을 상세히 살펴보고 진실로 소목(昭穆)은 문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송(宋)나라 조정의 협제도(?祭圖)를 본 적이 있는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소목(昭穆)을 달리한 것에 대해 항상 의심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호 문정공(胡文定公)의 제왕(帝王)은 종통을 잇는 것으로 부자(父子)를 삼는다는 논설과 고씨(高氏)의 말을 보고서, 이것이 모두 주자(朱子)의 뜻과 서로 합치된다는 것을 안 다음에야 선유(先儒)의 의견은 선후 일치되는 것으로 상세히 참고하고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명(明)나라의 각로(閣老)인 양정화(楊廷和)는 가정(嘉靖)에 세종(世宗)이 정덕(正德)의 무종(武宗)과 형제의 항렬이라는 이유로 무종을 버리고 위로 숙부인 효종(孝宗)의 뒤를 계승한 것으로 했습니다. 세종이 무종에 대해 비록 형제라고는 하지만 이미 종통을 계승하였으면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는 것인데 끊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또한 이에 대해 일찍이 의심하였었는데 지금 고씨의 말로 살펴보건대 한 문제(漢文帝)가 혜제(惠帝)를 버리고 위로 고조(高祖)를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양공(楊公)이 예가(禮家)의 말을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공의 차자에 또 ‘신이 말하는 것은 절절이 모두 고증할 수 있고 조정 신하들의 논의는 한 마디 한 글자도 준거할 만한 것이 없다.’ 하면서 누누이 천언 만어(天言萬語)로 논하였는데 모두 예관이 칭호를 잘못 정한 것으로 미루어 증거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삼년상을 하려고 하는데 있어서는 사친(私親)에게 강복하는 것을 단상(短喪)에 견주었습니다. 무릇 옛날의 사례를 인증(引證)함에 있어 등(?)나라의 부형(父兄)과 백관이 모두 바라지 않았다는 것과 진(晉)나라의 두예(杜預)·배수(裵秀)의 단상론(短喪論)을 비교하여 동일하게 논하였으니, 이는 자신의 의견을 너무 옳다고 한 나머지 비유가 어긋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성상께서 선조(宣祖)에게 비록 직손(直孫)이라고는 하나 제왕의 종통을 계승하는 것은 사대부의 가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미 방지손(傍支孫)으로 입계(入繼)하였으면 계승한 임금과는 곧 부자(父子)의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요 본부모는 곧 사친(私親)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의리가 환히 드러나는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의례(儀禮)》에 ‘국군(國君)의 적손(嫡孫)이 조부의 후사가 되면 본생의 조(祖)와 부(父)를 위하는 참최(斬衰) 삼년복을 입는다.’ 하였고 그 나머지 중손(衆孫)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삼년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공(諸公)들이 중자(衆子)는 삼년상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상께서는 적손(嫡孫)으로 즉위하였으니 차서에 따라 계승하여 즉위한 임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견이 좁아 오로지 이것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언론을 제기할 적마다 사리에 어긋나게 되고 또 경전을 널리 인용하였으나 끝내 본의는 깨닫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경(禮經)에 기재된 곳이 이상과 같으니 절로 명증(明證)이 되는 첫 번째입니다. 좌씨(左氏)·공양(公羊)·곡량(穀梁) 3인은 모두 공문(孔門)의 지의(旨義)를 전수(傳授)하였으니 그들의 입언(立言)이 반드시 공자의 뜻을 인습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계통을 잇는 것으로 부자(父子)를 삼았으니 이제 어떻게 그 말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명증의 두번째 입니다. 호 문정공(胡文定公)의 논의에 의하면 애공(哀公)의 세차(世次)는 정공(定公)을 고(考)로 삼고 소공(昭公)을 왕고(王考)로 삼고 양공(襄公)을 황고(皇考)로 삼고 있는데 이제 제법(祭法)을 고증해 보면 1세(世)를 고(考)라 하고 2세를 왕고라 하고 3세를 황고라고 합니다. 정공은 바로 애공의 아버지였으나 소공은 정공의 형이고 양공은 정공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계승한 임금에 의거하여 부자(父子)의 위서(位序)를 정한 것이 이와 같이 근엄하니, 문정공(文定公)이 어찌 근거한 바가 없이 망령되이 말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명증의 세 번째입니다. 고씨(高氏)의 인품과 학식의 깊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주자(朱子)가 ‘고씨는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고도 정밀하다.’ 하였으니, 역시 지금 세상의 사람들보다는 식견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극론(極論)이 이러하니 이것이 명증의 네 번째입니다. 더구나 정주(程朱)의 정론(定論)도 사친을 고(考)라고 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고 범씨(范氏)·호씨(胡氏)의 말도 조리가 분명하여 모두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강목(綱目)》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여 보인 것이 귀에다 말해주고 면대해서 알려준 정도가 아니니 이것이 명증의 다섯 번째입니다. 이제 《춘추(春秋)》의 사전(四傳)과 정주(程朱)를 비롯한 제선생들의 말로 피차를 참고하여 보면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으로서 적손(嫡孫)과 지손(支孫)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대통을 입계한 것을 중히 여겼고 사친을 숭봉(崇奉)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선유의 정론을 버리고 따로 엉뚱한 의견을 내어 부회하려 하니 말도 안 될 뿐더러 어떻게 절절이 고증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 신하들의 말이 너무 지나치기도 하고 못 미치기도 하는가 하면 예문(禮文)에 벗어나기도 하고 사정(私情)에 끌리기도 한 상황이어서 사친의 칭호에 대해서는 잘못했지만 삼년상을 입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과 상께서 상주(喪主)가 될 수 없다고 한 말은 옳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마디 한 글자도 준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견이 이미 다르면 말이 서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서 공이 나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것이 내가 공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번 박지계(朴知誡)와 옥여(玉汝)의【이귀(李貴)의 자(字).】 말을 보건대, 모두가 나의 의견과 어긋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변론을 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고명(高明)께서 하신 말을 듣고 이제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상당히 일리가 있어 채택할 만하였습니다만 인용한 경전(經傳)이 착실하지 못하여 용잡되고 절실하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 어떻게 여러 사람들의 말을 절복(折服)하여 귀일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친제할 때 축사(祝詞)를 만들기 어렵다고 한 것은 진실로 나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이미 능원군을 효자(孝子)라고 칭하고서 또 전하를 자(子)로 칭한다면 이는 명분이 이미 문란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의 차자에 ‘고(考)라고 칭하지 않으면 오늘날의 예가 일마다 모두 순조롭게 될 것인데 이미 고(考)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절절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오늘날 조정의 난처한 병통을 바로 적중시킨 말입니다. 당초 예관의 말에 ‘고(考)라고 칭하고 황(皇)을 칭해서는 안 되고 자(子)라고 칭하고 효(孝)를 칭해서는 안 된다. 만일 고라고 칭하고 황(皇) 자를 쓴다면 명위(名位)가 너무 높기 때문에 정자(程子)가 실례(失禮)라고 했는데 이는 고(考) 자를 그르다고 한 것은 아니다.’ 하였는데 이는 예관들이 정자가 입언(立言)한 본의는 살피지 않고서 그에 대한 해설을 찾다가 얻을 수 없게 되자 따라서 변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나의 상소에 ‘대저 황(皇)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대(大)자와 현(顯) 자의 뜻으로 곧 허자(虛字)인 것이다. 정자의 뜻은 단지 방친(傍親)에게는 고(考) 자를 더할 수 없기 때문에 입언(立言)이 이와 같았다. 송(宋)나라 때에 제유(諸儒)들이 복왕(?王)의 의논에 대해서 감히 고(考) 자를 쓰지 못한 채 구양수(歐陽修) 등과 쟁변(爭辨)하여 마지 않았다. 그뒤 정자가 복왕에 대해 고(考) 자를 버리고 황(皇) 자를 쓸 것을 허락하여 환하게 천만세의 정론이 되었으니 어떻게 이를 속이고 어길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자와 주자가 이른바 윤서(倫序)를 문란시킨다고 한 것은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치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찌 직손(直孫)과 지손(支孫)이 입계(入繼)하거나 출계(出繼)한 것의 구별을 가지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이제 성상께서는 직손으로 대통을 입계하였으니 이는 종손(從孫)이 출계하여 후사(後嗣)가 된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면 이는 매우 옳지 못한 것입니다. 사친(私親)이 되기는 마찬가지라면 고(考)라고 칭하는 것의 잘못은 피차의 구분이 없는 것이고 종통(宗統)을 높이기는 마찬가지라면 후사가 되는 의리에 무슨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선유들이 어찌하여 명백하게 입언(立言)하지 않고 바로 소종을 대종에 합치시키는 것을 지척(指斥)하여 윤서(倫序)를 문란시키는 것이라 했겠습니까. 이미 입계하였다고 한다면 사친에 대해서 강복(降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미 사친이라고 칭하였다면 상복을 강등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기 쉽고 환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지계의 상소에 ‘임해군(臨海君)은 아들이 없고 광해(光海)는 종사(宗社)에 죄를 얻었는데 대원군(大院君)이 제삼자(第三者)였다면 성상께서 당연히 적통(嫡統)인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군(君) 가운데 의안(義安)·신성(信城)은 일찍 졸(卒)하였고 대원군은 항렬이 다섯 번째입니다. 그런데 의안(義安)의 경우 능원(綾原)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른바 적통이라는 것은 너무도 구차스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혼란을 평정하여 하늘이 명하였고 사람이 귀의하였으므로 지손으로서 선조(宣祖)의 종통을 입승(入承)하였으니, 명분도 바르고 말도 순리에 맞았습니다. 따라서 이는 옛날에도 있지 않았던 성거(盛擧)인 것인데 어떻게 이런 구차스런 말을 견강 부회하여 천하 후세를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또 박지계의 상소에 ‘대원군이 반정(反正)한 처음에 생존해 계셨다면 성상께서는 반드시 양위(讓位)하였을 것이니 이제 유명(幽明)이 다르다는 것으로 차이를 둘 수는 없다.’ 하였는데, 이는 너무도 옳지 않은 말입니다.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은 천명인 것입니다. 후세에서 아무리 극도로 존경하더라도 요순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없는 것은 분수가 이미 정하여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공(周公)은 대성(大聖)의 덕을 지니고 섭정(攝政)의 지위에 있었는데도 후세의 논자들이 노(魯)나라에서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쓰는 것은 참람하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오직 명위(名位)는 가차(假借)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생(朴生)의 문인에 이의길(李義吉)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상소에 ‘대원군이 생존해 계시면 당연히 양왕(讓王)이 되었을 것이다. 국군(國君)의 아버지가 되어 일국의 봉양을 받았을 것이니 살아서 봉양하고 죽어서 제사하는 데 있어 달리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묘에 제향하는 것에 대해 무슨 의심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것은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인 것입니다. 대저 사친을 추숭하는 일은 역대에 시행한 경우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공사(公私)와 득실(得失)에 대해 많은 변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명의 세대에 다시 장총(張?)과 계악(桂?)의 옛 지혜를 답습하여 우리 임금을 잘못에 빠뜨림으로써 사심(私心)을 이루려는 자가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한 이러한 말을 싫어하고 조금이나마 공의(公議)를 꺼리는 사람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훈계를 두려워하여 감히 겉으로는 찬양하면서 속으로는 억제하는 의논을 제기합니다. 그리하여 예묘(?廟)를 세워야 한다고도 하고 별묘(別廟)를 세워야 한다고도 하고 직접 제전(祭奠)을 주관해야 한다고도 하면서 각각 명목(名目)을 세워 분분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당초 고(考)라 칭하고 자(子)라 칭한 말이 그르치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가령 일체 공의의 말을 따른다면 성상께서는 사친을 위하여 삼년상을 입어야 하고 군신(群臣)들은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됩니다. 또 박소(朴疏)의 주장과 같이 대원군은 당연히 양왕(讓王)이 되어 살아서 봉양하고 죽어서 제사지냄에 있어 달리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지금 영공(令公)과 박공(朴公)의 제류(컺類)가 모두 대원군을 군부(君父)로 대우하고 신자(臣子)로 자칭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여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이들을 공격하기만 힘쓸 뿐인 것으로 말에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그 원인을 마음에서 찾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고금의 문자를 읽음에 있어서는 반드시 정미롭고 자세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 공이 위에서 삼년상을 정하고 또 직접 상주(喪主)가 되어 아침 저녁의 궤전(饋奠)을 주관하게 하려는 한 조항에 대해서 위군(衛君)이 계씨(季氏)에게 조문 오자 노군(魯君)이 상주가 된 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을 보았습니다. 대저 예경의 본의는 노나라와 위나라의 임금은 서로 대등한 사이인데 위군이 계씨에게 조문할 때를 당하여 노군이 스스로 상주가 된 것은 빈객을 존경하여 접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군이 아무리 피폐한 지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계씨를 위하여 아침 저녁의 궤전을 하려 했겠습니까. 지금 이웃 나라 가운데 유구국(琉球國)의 국왕이 능원(綾原)을 조문하기 위하여 온다면 성상께서 빈객을 접대하기 위하여 상주가 되어야 합니다. 영공께서 고례(古禮)를 인용한 것으로서 절실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이 많습니다. 혹 다른 데에서 인증(引證)한 것도 이런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닙니까. 지금 나의 말은 이와는 다릅니다. 사친을 고(考)라고 칭한 것이 잘못이라는 데 대해서는 실로 정주(程朱)와 선유들의 의논에 근거한 것이고 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데 대해서는 《강목(綱目)》에 한 광무(漢光武)가 사친(四親)의 묘우(廟宇)를 용릉(췍陵)으로 옮긴 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나 백승(伯升)의 아들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으니, 그것이 지금의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삼년상에 이르러서는 《의례(儀禮)》에 기재된 것을 뚜렷이 고거(考據)할 수가 있는데 이제 어떻게 곡진하게 한다는 것으로 강쇄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하면 옛 사람이 예법을 제정한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품과 언론이 경미하여 세상에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버려두고 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노병(老病)이 더욱 극심하여 전후 잊어버리기가 일쑤이므로 이러한 의논에 대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이는 추구(퀉狗)처럼 진부한 이야기여서 번거롭기만 할 뿐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의하였기 때문에 다시 많은 말을 이렇게 늘어놓게 되었으니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쓸데없는 말이라는 꾸짖음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평탄한 마음으로 살펴주기만을 바랄뿐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남의 이목에 접하게 함으로써 한바탕 분요를 야기시키는 일이 없게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명길(鳴吉)은 이를 보고 옳게 여기지 않았다.
【원전】 34 집 64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상-유학(儒學)
《 인조 011 04/01/26(경오) / 이현영·이민구·이준 등이 상사의 부당함에 책임을 지고 파직을 청하다 》
대사헌 이현영(李顯英)· 대사간 이민구(李敏求)·사간 이준(李埈)·장령 정세구(鄭世矩)·지평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지난번 대신들에게 답한 전교에 ‘종통에 압존(壓尊)되어 상주(喪主)가 되기 어렵다면 이보(李?)로 하여금 섭행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한때의 유고(有故)로 인하여 우연히 대행(代行)하는 경우에 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진실로 성의(聖意)에 석연히 여기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만, 종통의 소중함과 상주가 되기 어려움에 대해 전하께서 이미 분명히 아시고서 외정(外廷)에 포고(布告)하였으니, 대의(大義)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이어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도 따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신들은 모두 다시 밝아진 일월(日月)을 우러렀고 그 일이 올바르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물의(物議)가 ‘섭행(攝行)하라고 한 비답은 쾌히 허락한 말이 아니니 시종 극력 간쟁하여 미진한 점이 없게 해야 하는데 갑자기 논계를 중지하였으니, 일은 논하는 체통을 잃은 것이다.’ 하였고, 동석(同席)한 사람중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은 능원군 이보(綾原君李?)의 출계(出繼)를 파하고 귀종(歸宗)시켜 복(服)을 고치고 상주가 되게 하는 등의 절목은 의당 품지(?旨)하여 거행하여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즉시 인구(引咎)하여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관(禮官)의 계청에 대해 ‘앞서의 전교에 따라서 섭행하게 하라.’는 비난이 있었으니, 성명께서 고집하시는 것이 있어 처음부터 쾌히 따르지 않았던 것이 과연 의자(議者)들이 예측한 것과 같았습니다. 신들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민첩하지 못하여 처음에는 힘써 간쟁하지 못하였고 뒤에는 물의를 듣고도 즉시 인피(引避)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결코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으니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김반(金槃), 정언 이경(李坰)·오단(吳端)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옥당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시키도록 청하였다.
【원전】 34 집 6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1 04/01/27(신미) / 능원군 섭행의 부당함에 대한 합계와 최명길을 체차시킬 것을 건의하다 》
합계(合啓)하기를, “종통에 압존되어 상주가 되기가 어렵다는 성비(聖批)가 한번 내려지자 군정(群情)이 모두 흡족해 합니다. 그러나 상사(喪事)에는 하루도 상주가 없을 수 없으니 응당 제사를 주관해야 할 사람이 어찌 그 상사를 주관하지 못하겠습니까. 섭행(攝行)이란 무엇입니까. 한때의 유고(有故)로 인하여 대행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자(支子)를 세워 제사를 주관하게 하자는 것은 이미 신중히 강정(講定)할 때에 있었던 일이었으니 초상(初喪) 때 상주로 세웠다면 장사지내고 나서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일은 순서에 따라 응당 행해야 할 절목인 것입니다. 그런데 섭행이라고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대의(大義)가 있고 천리(天理)에도 당연하다는 것을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정리를 이미 제어하지 못하고 군의(群議) 또한 막을 수가 없는 처지라서 우선 이처럼 불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여망(輿望)에 대해 막음하려 하신 것이지만 이것이 어찌 전하께 기대하던 것이겠습니까. 속이 능원군 이보의 출계(出繼)를 파하고 귀종(歸宗)시켜 상사(喪事)를 주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주에 대한 일은 이미 정지한 뒤에 이제 와서 다시 논집(論執)하니 이 또한 지나친 일이다 이미 기대에 부응하려 힘쓰고 있으니 다시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진달한 차자 내용을 살펴보건대 많은 말을 하였지만 그 개요(槪要)는 세 가지였습니다. 그의 말에 ‘제사를 제후(諸侯)의 예(禮)로 지내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비례(非禮)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압존되는 것으로 말한다면 이 말이 진실로 옳은 것이니 문왕(文王)이 서백(西伯)이 되어 고공(古公)을 제후의 예로 제사지냈고 무왕(武王)이 천자가 되어 문왕을 천자의 예로 제사지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는 이 경우와는 다른 것인데 전거를 억지로 찾아서 부회(傅會)하려 하니 무슨 의견이란 말입니까. 그는 또 ‘공(功)은 한 광무(漢光武)와 같으나 척속으로는 원족(遠族)이 아니고 입계(入繼)한 것은 한 선제(漢宣帝)와 같으나 친하기로는 장손(長孫)이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지손(支孫)으로 대통을 입승하였으니 앞서 이른바 대종(大宗)에 압존된다는 것은 그 의리가 아직 그대로인데 어떻게 척속의 친소(親疎)를 가지고 달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는 또 ‘임금의 서자(庶子)가 적통(嫡統)을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왕(文王)이 백읍고(伯邑考)를 세우지 않고 무왕(武王)을 세운 경우가 이것인데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의 일이 과연 이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같지 않은데도 억지로 같게 하기 위하여 예경(禮經)의 융쇄(隆殺)의 분의에 대해서 모두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며 일필(一筆)로 단정을 하고서 새로운 의견을 창출하였습니다. 위의 세 가지 조항을 뽑아내어 여러 사람들의 시비(是非)에 대한 안목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성덕이 고명하고 헤아림이 지극히 공평하니 어떻게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말을 가지고 감히 현혹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소생 부모를 위해 극진히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은(私恩)이고 조종(祖宗)을 존경하는 것은 대의(大義)인 것입니다. 대의가 있는 곳에 사은은 굽히게 되는 것으로 이는 사친(私親)에게 박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의 상경(常經)은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고 성인(聖人)의 예법은 찬연하고도 명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논설을 삭제하고 따로 친손(親孫)이 조부(祖父)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본복(本服)을 강쇄한다는 말을 찾아내어 오늘날의 단안(斷案)으로 삼기 위해 그에 대한 해설을 찾다가 되지 않자 억지로 제후(諸侯)의 예(禮)로 제사한다는 말을 가져다가 오늘날의 일에 합치시켜려 하였습니다. 인정을 거스를 수 있고 천리를 어길 수 있고 백세의 공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이 말은 신들의 의견이 아니라 바로 일국의 공론인 것입니다. 최명길은 자신이 경악(經幄)의 장관이 되어 임금을 섬김에 있어 선한 일은 진달하고 사특한 일은 막아야 한다는 본연의 자세는 생각하지 않고 이런 이론을 창도하여 한때의 시비를 혼란시켰습니다. 사견(私見)과 정론(正論)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는 예학(禮學)에 대한 식견이 없어서 피차의 의견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명길의 차자를 보건대 그의 말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의 소견은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언로의 폐색(蔽塞)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논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최명길이 일찍이 옥당의 반열에 있을 적에 큰소리로 외치기를 ‘추숭(追崇)한 나라는 망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무시한 나라는 반드시 망했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무리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므로 같은 좌석에서 이말을 들은 사람은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차자를 올려 임금을 현혹시켰으니 비록 ‘나는 영합(迎合)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가 믿겠는가.】
【원전】 34 집 6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 인조 011 04/02/02(을해) / 윤방·신흠이 상사를 공론에 따라 시행할 것을 건의하다 》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신들은 삼가 듣건대 옛사람의 말에 ‘군자는 물러가는 데 있어서는 함께 하지만 나아가는데 있어서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시종 함께 일을 하였는데 원익이 이미 자신의 말이 시행되지 않는 것으로 물러갔으니 신들은 의리에 있어 홀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감히 번독스러움을 피하지 않고 애통 중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사직을 요청하였는데 갑자기 온화한 윤음(綸音)을 내리셨고 잇따라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신들은 명을 받들고 황공하여 부득이 다시 나왔으니 신들의 자취는 진실로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 있어 그의 몸만을 쓰고 그의 말을 써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례(僕隸)를 부리는 것과 같은 것이며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성지(聖旨)만을 따름으로써 구차스럽게 용납되기만을 바랄 뿐이라면 그것은 부시(婦寺)의 충성인 것인데 성명(聖明)께서 무엇을 취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쟁론하는 것은 추측해서 허공에 뜬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예경(禮經)을 인증(引證)한 것으로 전하를 중정(中正)한 데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주를 섭행(攝行)하게 한다는 분부는 성명께서 따르는 것도 어기는 것도 아닌 모호한 처사이므로 군하(群下)가 승봉(承奉)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상제(喪制)는 당연히 부장기(不杖期)를 행하여야 하는데도 이미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상주는 대절(大節)인데도 준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성명께서 이른바 종통(宗統)에 압존(壓尊)된다는 것을 장차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상하(上下)의 관계는 반드시 실심(實心)으로 하여 서로 미덥게 된 연후에야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섭행에 대한 의의는 불분명하기 짝이 없고 종통에 대한 예법도 모호하기 그지없으니, 삼가 성명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조정의 의논은 반드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것이 비례(非禮)인 줄 알면서 참고 침묵할 수 있으며 성명께서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진언하여 쟁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경(禮經)은 다른 서책과는 달라서 반드시 전문적인 학문이 있은 연후에야 변례(變禮)를 당하여 조처할 방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증자(曾子)는 아성(亞聖)인데도 증자문(曾子問)을 저술하여 《예기(禮記)》에 편입하였으니, 변례에 대해 강론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한(漢)·당(唐) 이후 시대마다 그에 따른 예제(禮制)가 있었고 또 당시에 예를 강론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문장이 해박하고 전고(典故)에 숙달한 선비들이었으니, 어찌 지금 사람들만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의논들이 거의 의리에 입각하여 주장을 내세운 것이어서 예경에 합치되는 것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한당 시대의 예법에 대해 논한 것은 후세의 전식(典式)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 급작스런 의견을 가지고 숙유 노사(宿儒老師)보다 훌륭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송나라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예설(禮說)이 성인(聖人)의 본지(本旨)를 얻었기 때문에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면 모두 정도(正道)가 아닌 것입니다. 종통법에 대해서도 정자·주자의 설이 매우 준엄하여 이것이 서책에 기재되어 있는데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여기에서 법칙을 취하지 않습니까. 전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들이 고증하고 바로잡아 천청(天聽)에 상달한 것이 이미 많은데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이에 대해 채납하여 시행하지 않습니까. 천자는 천자의 종통을 계승하고 제후는 제후의 종통을 계승하는 것으로서 결단코 이를 문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원익과 신들이 번민하는 것은 이 한 가지 일뿐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쾌히 능원군(綾原君)을 상주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소서. 그런다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힘써 따르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전】 34 집 68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1 04/02/03(병자) / 동지중추부사 정경세가 상례를 공론에 따라 행할 것을 건의하다 》
동지중추부사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기를, “신은 진실로 오활한 선비로 조금도 취할 만한 점이 없는데 오랫동안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시위 소찬(尸位素餐)의 죄만 짓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국가에 큰 변례(變禮)가 발생하여 군부(君父)에게 큰 잘못된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일에 따라 광구(匡救)하지 못한 채 낭패하여 체직되었습니다. 이는 위로는 성은(聖恩)을 저버리고 아래로는 초심(初心)에 어긋난 일이었으므로 한밤에 누워 생각하면 슬프고도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미더움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드디어 체념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숙사(肅謝)하는 날 다시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미천한 신의 질병이 한결같이 침증해져서 순월(旬月) 사이에 반열에 나아갈 길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말하고자 했던 것을 또 지연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차자를 올려 성청(聖聽)을 번독스럽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전일 쟁론한 것이 직절(直截)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창황한 때이므로 논변이 상세하지 못하여 성충(聖衷)을 깨우쳐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명께서도 애통 중에 계셨으므로 언자(言者)들의 의견을 깊이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쪽은 더욱 심해지고 듣는 쪽은 더욱 막연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상하 사이의 도리가 모두 미진한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경의(經義)를 인용하고 사람들의 말을 분석함과 동시에 비루한 우견(愚見)을 아뢰겠습니다. 그러나 혼동해서 말한다면 지의(指意)가 명백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삼가 선현(先賢)들이 주소(奏疏)를 올릴 때 1자를 그어서 했던 규례를 본받아 아래에 개열(開列)함으로써 성람(省覽)에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단락에 따라 깊이 궁구하여 그 언의(言意)의 소재를 찾아보시고 혹 개납(開納)하여 주신다면 이는 신의 사행(私幸)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여기에 대해 깊이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근년 이래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좋은 의견을 따르는 성덕(聖德)이 점차 처음만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사(喪事)를 당한 이후에는 또 지극한 정리에 가려서 말을 들을 즈음에 의견을 같이하면 기뻐하고 달리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견과 달리할 경우에는 원로 대신(元老大臣)의 혈성(血誠)이 담긴 간절한 말도 겉으로는 우장(優캌)하지만 실상은 버려 쓰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같이할 경우에는 비록 황잡하여 논리에 맞지 않는 망령된 말이라도 논한 것을 옳게 여겨 당론(?論)이라고 허여하고 있습니다. 최명길(崔鳴吉)의 경우 사람은 하나이고 그가 진언한 두 구절은 바로 예경(禮經)의 전문(全文)이었으니, 옳으면 모두 옳고 그르면 모두 그른 것인데 어떻게 자신의 의견과 다른 한 구절은 싫어하여 살피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의견과 같은 한 구절에 대해서는 좋아하여 미처 쓰지 못할 듯이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견을 같이 하는 것은 기뻐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뜻대로 하고자 하는 것을 아래에서 아무도 감히 거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자신의 사심(私心)에 따르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올바른 선비는 날로 멀어지고 아첨하는 말만 날로 이르게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이 진달한 내용이 거의 수천 마디에 달하는데 한 구절도 전하의 의견과 같은 것이 없었으니 진실로 기뻐하시기는 커녕 전하의 마음만 괴롭게 해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지하지 않고 누누이 진달하는 것은 실로 사특한 것을 막고 잘못된 일은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성명께서 마음에 거슬린다고 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아주셨으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1. 예경(禮經)의 부장기조(不杖期條)에 ‘나의 후사(後嗣)가 된 사람이 소생 부모를 위하여 보답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자하(子夏)의 전(傳)에 ‘어찌하여 기복(期服)이라 하는 것인가? 참최(斬衰)는 두 번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대종(大宗)을 받드는 사람은 소종(小宗)을 강쇄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예법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근거로 삼는데 너무도 분명하고 사리에 맞는 것입니다. 의자(議者) 중에 혹자는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는 것은 족인(族人)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 지금 주상께서는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하였으니 남의 후사가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마도 전일 성교(聖敎)에 「이른바 출계(出繼)하여 강쇄하는 경우와 다르다.」고 한 것은 반드시 이 때문에 하신 말일 것이다.’ 하는데, 이 말이 근사한 것 같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글의 상문(上文)에 있는 참최 삼년조(斬衰三年條)에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란….’ 하였는데 소(疏)에 ‘이 글구 아래에 당연히 「후사로 들어간 아버지를 위하여(爲所後之父)」라는 다섯 글자가 있어야 하는데 빼버린 것은 이제 후사로 들어가는 것이 부(父)일 수도 있고 조(祖)일 수도 있어 그 대상인 사람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대상인 사람이 확정되지 않았다면 글을 쓰는 데 있어 남의 후사가 되었다고 쓰지 않고 어떻게 달리 쓸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족인(族人)을 가르킨 것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이 글의 하문(下文)에 있는 시마 삼월조(쳠麻三月條)에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경우 어머니를 위하여.’라고 하였고, 또 천자와 제후의 정통 방기복도(正統傍期服圖)에도 ‘할아버지의 후사가 되고 증조부(曾祖父)의 후사가 되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 몇 가지 조항에 의거하여 본다면 무릇 후사가 된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족인(族人)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묘(宣廟)에 있어서 애초에 즉위할 수 있는 장손(長孫)이 아니었고, 다만 만백성의 큰 호응을 얻어 삼가 천벌(天罰)을 시행한 연후에 안으로 자전(慈殿)의 유지(有旨)를 받고 위로 천자의 조명(詔命)을 받들어 대통을 이음으로써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큰 변혁이요 큰 비상한 일로 순서에 따라 계승한 임금과는 본시 같지 않은 것이니 과연 입승(入承)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입승했으면 출계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출계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저리로 가는 것으로 적우(適偶)가 된다는 말이고 입승이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온다는 것으로 존경(尊敬)한다는 말입니다. 글은 같지 않지만 뜻조차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의 전일 계사(啓辭)에 이른바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일로 말한다면 출계이고 제왕가(帝王家)의 일로 말한다면 입승이라고 한다.’ 한 것이 이미 십분 명백한 것으로서 다만 성명께서는 지극한 정리에 가려서 다른 점이 있다고 여기셨던지 아니면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굳이 말씀하셨던 것일 뿐입니다. 1. 예경(禮經)의 장기조(杖期條)에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적에 어머니를 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자하(子夏)의 전(傳)에 ‘어찌하여 기복(期服)으로 하는가? 지존(至尊)이 계시기 때문에 감히 사존(私尊)을 위하여 정리를 다할 수 없어서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존은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고 사존은 어머니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의자(議者) 중에 혹자는 ‘주상께서 이미 종통을 입승하였으니 압존(壓尊)하는 의의가 없을 수 없다. 그리고 종통의 중함은 아버지가 계시는 그 정도만이 아니니, 우선 권도로 이 예경의 글에 의거하여 강쇄하여 장기(杖期)의 복제(服制)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또한 옳은 것 같습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가령 오늘날의 상사(喪事)에 근거할 만한 예경이 없다면 여기에 끌어다 붙이는 것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대종(大宗)을 승중(承重)하신 것이 이미 더없이 명백하니 소종(小宗)은 강쇄해야 하는 것은 본시 명문(明文)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정제(定制)를 버리고 근사하지도 않은 글을 끌어다 붙여 의리에 입각하여 주장을 내세우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전하의 효성이 무궁하여 반드시 상주(喪主)가 되려고 하시기 때문에 억지로 이 조항을 인용하여 장(杖)을 짚고 위차(位次)에 나아가기에 편리한 것을 취한 것으로 종통의 소중함을 또한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료(臣僚)들이 평소 성명께 기대하던 것이겠습니까. 당초 전하께서 난세를 다스려 정상으로 회복시키신 것은 보위(寶位)를 즐기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종사(宗社)를 중히 여겨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방의 백성들이 춤추며 기꺼이 추대하여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것도 성명의 이런 마음에 감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친친(親親)의 은애(恩愛)가 도리어 중하여지고 조종(祖宗)을 높이는 의리는 그에 가려졌으니, 사방 백성들의 기대에 서운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종조(宗?)를 주관하고 또 사상(私喪)을 주관하는 것은 고금 천하에 결단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지금 이미 잘못되었더라도 다시 고쳐야 됩니다. 주자(朱子)가 복(服)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중간에 고치기 미안하다고 한 것은 문인(門人)이 처상(妻喪)의 복제(服制)를 이미 속제(俗制)를 따랐다가 다시 고제(古制)에 따라 고치려 했던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경중이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 오늘날의 일과 같은 것은 그야말로 하루도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이미 이루어졌다고 핑계대면서 중간에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장(杖)을 짚지 않는 한 조목은 복제를 고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미안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혹 미안하다고 하더라도 법제에 지나쳐 실례하는 미안함보다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을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지금 차례로 정계(停啓)하였다고 하니 미천한 신의 편언(片言)이 진실로 일에 유익함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여 받아들여지는 것의 여부는 지극한 정성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성을 쌓아온 지 실로 하루 이틀이 아니니 만에 하나 하늘의 계도(啓導)로 성충이 생각을 바꾸어 다시 고친다면 침랑(寢郞)의 한마디 말이 임금을 깨우치게 한 공을 이룰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1. 예경(禮經)의 부장기조에 ‘임금의 부모(父母)·처(妻)·장자(長子)·조부모(祖父母)를 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자하(子夏)의 전(傳)에 ‘어찌하여 기복(期服)을 하는가? 종복(從服)인 것이다. 부모와 장자에 대해서는 임금이 참최(斬衰)를 입는다.’ 하였고, 정주(鄭注)에는 ‘이는 임금이 되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喪)을 당한 경우인데 처음 봉해진 임금을 두고 한 말이다. 만일 정체(正體)를 계승하였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폐질(廢疾)이 있어 즉위하지 못했으면 지금의 임금이 증조(曾祖)에게 나라를 받은 것이 된다.’ 하였고 소(疏)에는 ‘처음 봉해진 임금으로서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경우에는 임금이 참최(斬衰)를 입고 신하들도 종복으로 기복(期服)을 입는다. 만약 정체를 계승하였다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당연히 즉위해야 하는데 폐질이 있어 즉위하지 못하고 자기가 즉위한 것이니 이는 증조에게 나라를 이어 받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살피건대 이 한 조항은 곧 지난번 박지계(朴知誡)의 상소에서 전거로 삼아 증명한 것이고, 지난번 최명길(崔鳴吉)의 차자에서 이른바 할아버지에게 나라를 이어받았다고 한 것도 이 조항에 의거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실로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 조항에 이른바 군(君) 자의 뜻은 바로 정통(正統)으로 서로 전하여 온 임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모두 즉위할 수 있고 자신도 즉위할 수 있는데 증조(曾祖)에게 나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위로 압존(壓尊)되는 데가 없었으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하여 본복(本服)인 삼년복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께서는 지손(支孫)으로 대통을 입승(入承)하여 위로 압존되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당초 군신(群臣)들이 모두 강복(降服)할 것을 청한 것인데 이는 천리(天理)에 있어 당연한 것이고 예제(禮制)에 있어 엄절(嚴截)한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군신으로서 그 누가 성상의 성효(誠孝)를 모르고서 고의로 이러한 말을 하여 소생(所生) 부모에게 박하게 하기를 청하겠습니까. 성상께서도 그러한 것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초종(初終)의 망극한 상황에서도 힘써 지극한 정리를 억제하고 강쇄하여 기복(期服)을 따랐던 것이니 이는 성덕(盛德)의 일인 것입니다. 이 조항에 대한 쟁론은 이제 버려두고 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만 간절한 우충(愚衷)에 그래도 성명께서 박지계의 말이 잘못 인용된 것임을 살펴 아시기 바라서입니다. 그리고 최명길이 논한 친하기로는 장손(長孫)이라고 한 것은 더욱 사실 무근한 것으로 이귀(李貴)의 무리한 말과 크게 서로 차이가 나지 않아 뒷날의 걱정을 끝내 석연히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경(禮經)의 말을 여기에 부기(附記)하여 오늘날의 일과 같지 않다는 것을 제시한 것입니다. 1. 《예기(禮記)》에 모든 상사(喪事)에 있어서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가 상주가 된다.’ 하였고, 또 ‘친속이 같을 경우에는 장자(長者)가 주관하고 같지 않을 경우에는 친자(親者)가 주관한다.’ 하였는데 이런 유례(類例)가 한둘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주관한다는 것은 단지 상사(喪事)와 빈객(賓客)을 위한 예(禮)를 주관한다는 것이지 장자(長子)와 장손(長孫)으로서 삼년상을 집상(執喪)하면서 궤전(饋奠)을 받드는 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주를 세운다.’는 조항 아래의 주기(注記)를 상고하여 보면 지목한 뜻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별궁(別宮)의 상사가 마치 대내(大內)에서 있었으니 전하께서 상사를 주관하는데 있어서 《예기(禮記)》에 이른바 장자(長者)자 주관한다는 것과 같이 하신다면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몸소 상주가 되어 집상하면서 궤전을 봉행한다는 것은 불가한 것입니다.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몇몇 사람은 예문(禮文)에 지목하는 것이 각기 같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서 반드시 주상께서 상주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능원군은 상주가 될 수 없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신은 감히 이런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과 의견이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상주는 곧 뒷날 신주(神主)를 모시고 봉사(奉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신은 이런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신주를 쓸 때를 당하여 어떻게 조처할 것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상주가 되시고 뒷날 능원군이 봉사한다면 이는 상사에 고자(孤子)가 둘인 것이니 어찌 이러한 예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일 섭행(攝行)하게 한다는 분부는 본디 따른다는 뜻이 아니었는데 대신(大臣)들이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을 보고는 갑자기 정쟁(廷爭)을 중지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불찰을 범한 것이고 또한 성의가 지극하지 못했던 것으로서 항간의 논의가 애석해 하고 의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전하께서 신료(臣僚)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 성심(誠心)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더욱 크게 미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료들이 쟁론하는 것이 과연 옳지 않다면 드러내어 지척(指斥)하거나 엄한 견책을 내려도 괜찮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쾌히 공론을 따라 전의 잘못을 통렬히 사죄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성인(聖人)의 처사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 일에 대해 우물쭈물하며 따를듯 말듯 하여 밖으로는 성실치 못한 말을 함으로써 정청(廷請)하는 일을 해산시키고 안으로는 따르는 실상이 없어 군하(群下)가 크게 기대하는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은 단지 이 한가지 일에 대해서만 발론한 것이 아니라 실로 성명께서 일상 생활에 있어 모두 실심(實心)으로 행하시기를 바라서인데 이 한가지 일이야말로 더욱 실심으로 힘써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속히 능원군을 상주로 삼으라는 명을 내리시고 섭(攝)이란 한 글자를 그대로 둠으로써 뒷날 간언(諫言)을 막는 장본(長本)이 되게 하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1. 《예기(禮記)》에 ‘천자는 7개월 만에 장사지내고 제후는 5개월 만에 장사지내고 대부는 3개월 만에 장사지내고 사(士)는 1개월을 넘겨 장사지낸다.’ 하였는데 이는 강쇄와 기일의 지속을 정한 예인 것으로 그 절차를 문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初喪)에 5일에 성빈(成殯)하고 6일에 성복(成服)한 것과 기타 예제에 벗어난 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소급해서 고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바로 군하(群下)의 죄이며 성상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앞으로 장기(葬期)의 일절(一節)만 남아 있는데 염빈(殮殯)에 비교해 보면 더욱 대단한 절목인 것으로서 예경(禮經)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고금에 통행(通行)하여 온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상하가 화합하여 기어이 예제에 맞게 함으로써 전의 잘못을 속죄해야 할 때입니다. 만일 이 일에 또 다시 잘못한다면 천하 후세에 변명할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英靈)들께서도 아래를 굽어 살피시고 옳지 않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이점에 대해 어찌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 문공(宋文公)이 졸(卒)하자 처음으로 후하게 장사지냈는데 거마(車馬)를 늘이고 기물(器物)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7개월 만에 장사지냈습니다. 이에 대해 ‘군자(君子)가 화원(華元)과 악거(樂擧)는 신하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였고 성인(聖人)이 앞에는 8월에 송공(宋公) 포(鮑)가 졸하였다고 쓰고 뒤에는 2월에 송 문공을 장사지냈다고 써서 그 연월(年月)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그것이 참람한 일이였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호씨(胡氏)는 또 ‘임금을 악에 빠뜨리고 사치를 가중시켰다는 뜻이다.’ 하였으니, 성현(聖賢)이 경계를 남긴 뜻이 엄하다 하겠습니다. 이번 장례에 5개월의 예(禮)를 적용한다면 조정에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 화원과 악거의 죄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리로 미루어 본다면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후하게 장사지내는 것은 실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춘추(春秋)의 의리에 밝은 사람은 반드시 효도라고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거듭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1. 옛사람들이 ‘예를 논의하는 것은 마치 취송(聚訟)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것이 예나 이제나 공통된 걱정거리인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일은 또한 조처하기 어려운 변례(變禮)이니 이의(異議)가 제기되는 것은 그리 괴이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송사를 청리하는 사람이 겸허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펴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주장하는 일이 없다면 곡직(曲直)에 대한 판결은 본디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은 많은 말을 할 것도 없고 단지 오늘날의 일에 압존되는 데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만 묻고 싶습니다. 만일 압존되는 데가 있다고 한다면 조정의 의론이 옳은 것이고 압존되는 데가 없다고 한다면 이론(異論)이 옳은 것으로서 이 두 마디의 말이면 오늘날의 송사는 판결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신다 하더라도 이미 압존되는 데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으니 곡직의 형태와 승부의 소재를 단연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자(議者)들이 이른바 제후의 예로 제사지내야 한다느니 속계(屬係)가 원족(遠族)이 아니라느니 하는 등 허다한 입론(立論)은 모두 공척하지 않아도 절로 격파될 말인 것입니다. 신이 강변(强辯)하는 것이 꼭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이 일은 다른 한가로운 쟁론에 비할 수 없는 것으로서 군부(君父)가 예에 맞게 하는가 못하는가 잘못이 있게 되는가 없게 되는가의 여부가 모두 여기에서 판가름이 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유(韓愈)는 ‘이단(異端)을 이겨내지 못하면 사도(斯道)가 유지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부득이한 점이 있어서인 것입니다. 이상 1자를 그어서 논한 여섯 가지 조항을 정하게 써서 올리려 하는 즈음에 상주(喪主)에 관한 일절(一節)은 이미 대신의 계청을 윤허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마치 구름을 헤치고 태양을 보는 것과 같은 흔쾌함을 맛보았으며, 성상께서 정리를 억제하고 예법을 따른 성의(盛意)가 백왕(百王)보다 뛰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신이 진언(陳言)하는 것은 바로 우견(愚見)으로 성인(聖人)의 뜻을 엿보는 망발인 것으로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찬술하여 써놓은 것이기에 버릴 수 없어 감히 올립니다. 삼가 성자(聖慈)께서는 저의 심정을 살피고 죄를 용서하여 주셨으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 내용을 살펴보고 경의 간절한 정성을 알았다. 조목별로 진술한 일은 예문(禮文)과 경서(經書)를 전거로 인용하여 반복해서 논란하였으니 평소 예학(禮學)을 전문으로 연구하였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다만 그 가운데 의혹스러운 데가 없지 않았으나 내가 지난날 자포 자기하기를 좋아하여 예학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지금 예에 대한 논란이 있게 되자 마치 담벽을 마주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또한 돌이킬 수 없다. 장기(杖期)에 대한 일절(一節)은 내가 종통(宗統)에 이미 압존되는 데가 있고 대통(大統)의 중함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그 정도만이 아니기 때문에 애써 강쇄하자는 청을 따른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한 예로써 논하였다면 장(杖)을 짚고 위차(位次)에 나아가는 것이 실례될 것이 뭐 있겠는가. 이제 복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중간에 고치기는 곤란하다. 이밖에 논한 일들은 마땅히 체념(體念)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전】 34 집 69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상-유학(儒學)
《 인조 011 04/02/07(경진) / 간원에서 계운궁의 상사를 인경궁으로 반혼하라는 분부에 반대하다 》
간원이 아뢰기를, “당초 계운궁(啓運宮)의 상사가 마침 궐내(闕內)에 있었으므로 그대로 성빈(成殯)하고 옮기지 못했는데 이것은 실로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반혼(返魂)하는 날에는 당연히 본궁(本宮)에 봉안(奉安)해야 하는데 어제 예장 도감(禮葬都監)의 계사에 대해 ‘계운궁은 협착하여 적합한 곳이 없으니 인경궁(仁慶宮)에 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였으니,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인경궁은 왕자(王者)의 궁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으라고 명하셨으니 능원군이 어떻게 감히 대궐에서 상사를 주관하고 궤전을 받들 수가 있겠습니까. 정리로 헤아려 보건대 만분 미안한 일이니 도감으로 하여금 다시 품정(?定)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를 살펴보건대 그대들은 궐내에 성빈하고 이를 옮길 수 없었던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모만(侮慢)과 멸시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통분스럽다.” 하였다.
【원전】 34 집 71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1 04/02/07(경진) / 예장 도감에서 인경궁으로 반혼하라는 분부에 반대하는 복계를 하다 》
예장 도감이 인경궁으로 반혼하라는 분부에 대해서 복계(覆啓)하기를, “인경궁은 헐어버려야 할 궁이지만 명칭은 대궐입니다. 능원군이 상주로서 3년 동안 조석의 궤전을 주관하면서 여기에서 거처하는 것은 바단 사체에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궐내로 반혼한다면 사묘(私廟)라고 할 수 없으니, 근일 조정에서 쟁론하는 일과 매우 어긋나는 조처입니다. 계운궁이 협착하다면 편의에 따라 더 축조하여 혼궁(魂宮)으로 삼는 것이 예법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대신들의 의견도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인경궁은 명색이 궁궐이기는 하지만 조종(祖宗)의 법궁(法宮)이 아니다. 계해년 이후로는 각사(各司)의 전복(典僕)들도 간혹 거처하였으니 하나의 버려진 빈 곳이 되어버렸다. 이곳에다가 임시로 혼궁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리고 능원군은 바깥 행랑(行廊)에 들어가 거처하는 것 또한 방해될 것이 없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서 거처하는 것을 미안하다고 하니 능원군이 도리어 각사의 전복들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도감이 참작하여 조처하고 다시 품계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71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1 04/02/08(신사) / 이윤우·심지원·여이징이 상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체직을 청하다 》
사간 이윤우(李潤雨), 정언 심지원(沈之源)·여이징(呂爾徵)이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언지(言地)에 대죄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일에 따라 광구(匡救)함으로써 우리 임금을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도(道)로 인도하기만을 생각할 뿐 어찌 일호인들 다른 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예법에는 압존되는 것이 있고 정리는 굽히는 데가 있는 것으로서 선왕(先王)의 예제(禮制)는 감히 지나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운궁의 성빈(成殯)이 대내(大內)에 있었던 것은 진실로 정례(正禮)가 아니고 실은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애통하고 황급한 가운데 지극한 정리에 가리워져 초종(初終)의 절목을 거개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한 일이 많았습니다. 대저 이미 장(杖)을 짚고 위차에 나아갔고 금전(金篆)으로 명정(銘旌)을 썼고 6일 만에 성복(成服)하였고 빈소(殯所)에 찬궁(콮宮)을 차렸으며, 기타 예법을 어긴 일이 한둘이 아니므로 궐내에 성빈한 것 정도는 논할 것조차 없는 것입니다. 지난일의 잘못은 이제 와서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예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전일의 잘못을 알고 드러나게 뉘우치는 뜻이 있었고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으라고 명하셨는가 하면 예장(禮葬)의 법제에 조금이라도 혐의되는 점이 있으면 일체 도감의 계사를 따름으로써 강쇄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리에서 발하였으나 예의(禮義)에 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식과 월식이 회복되듯이 과오를 고치시는 데 있어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성상께서 예를 어기는 일을 목견하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성의가 천박하고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했던 탓으로 엄한 비답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오만과 멸시는 동료 이하의 사람에게도 감히 할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전하의 신하로서 어떻게 감히 전하께서 스스로 도리를 다하시는 데에 모만과 멸시를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미 준엄한 비답을 받들었으므로 뻔뻔스레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출사(出仕)하게 하라고 처치하니, 답하기를, “어제의 계사에 조어(措語)가 사리에 어긋났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이에 집의 강석기(姜碩期), 장령 권확(權?)·오준(吳竣), 지평 이경헌(李景憲)·이경의(李景義) 등이 상이 간원을 특별히 체차했다는 것으로 모두 인혐(引嫌)하였다. 옥당이 출사하게 하라고 처치하니,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예기(禮記)》에 ‘반곡(反哭)할 때, 주인(主人)은 마루로 올라가는 것은 망인(亡人)이 생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고 주부(主婦)는 침실로 들어가는 것은 망인이 생전에 어른을 봉양하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였고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그러한 의사(意思)를 알게 되면 이른바 그 자리에 올라서는 그 예(禮)를 행한다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하여진다.’ 하였다. 이 뜻을 미룬다면 인경궁(仁慶宮)도 하나의 궁궐이니 능원군은 감히 여기에서 궤전을 봉행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일하던 곳으로 돌아오고 봉양하던 곳으로 돌아오는 의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대간의 말이 매우 예문(禮文)의 뜻을 체득한 것인데 엄한 말로 꺾어버렸는가 하면 마침내는 특별히 체차시키기까지 하였으니 군정(群情)이 실망하게 되었다.】
【원전】 34 집 7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인조 011 04/02/10(계미) / 예조에서 능원군 이보를 상주로 정하는 일에 대하여 건의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능원군 이보(綾原君李?)를 상주(喪主)로 정하는 일에 대해서 승전을 받든 뒤에 출계(出繼)를 파하고 귀종(歸宗)시키는 공사(公事)를 본조(本曹)에서 거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조의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보니 의안군(義安君)에게 입후(立後)한 일에 대해 계하(啓下)한 공사가 없었습니다. 이는 필시 의안군이 가례(嘉禮)가 있기 전에 졸서(卒逝)하였으므로 모위(母位)가 없어서 부모가 함께 입후를 명하는 법규에 따라 일가(一家)가 전계(傳繼)로 정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애당초 출계한 것이 아니니 계하를 기다려 파기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미 상주가 되었으니 절로 본종(本宗)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73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가족-가족(家族)
《 인조 012 04/03/21(갑자) / 대제학 김류가 쓴 계운궁의 묘지문 》
상이 계운궁(啓運宮)의 행장(行狀)을 내려 대제학 김류(金?)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써 올리도록 하였다. 그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대통(大統)을 이은 지 4년째 되는 병인년 1월 14일 무오에 계운궁의 병세가 악화되어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하직하시니, 그때 춘추가 49세였다. 초빈하고 난 다음달 성상께서 세계(世系)와 언행에 관한 일체 사항을 써 주시면서 신 유(?)에게 그것을 토대로 묘지명을 쓰도록 명하시었다. 신 유는 상소하여 감히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일단 그 행장을 읽고나서 삼가 생각건대 옛날 주공(周公)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대명(大明)과 생민(生民)의 시를 지어 노래하였는데, 그 내용은 모두 선조(先祖)와 선비(先妃)의 덕을 추모한 것들이었다. 예로부터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른 이들치고 그 조상 적부터 장차 경운(景運)이 크게 열릴 수 있도록 덕을 심고 경사의 터전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대명을 맞아들일 소지를 마련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계운궁이라고 이름한 것이 그 얼마나 걸맞는 칭호인가. 아, 훌륭하다 하겠다. 이에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계운궁은 성이 구씨(具氏)이고 파계는 능성(綾城)이다. 먼 조상인 휘(諱) 존유(存裕)가 고려조에 벼슬하여 이름이 있었고 국조(國祖)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벼슬이 끊기지 않아 마침내 크게 현달했다. 증조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휘는 희증(希曾)이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사헌부 감찰로 휘가 순(諄)인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휘 사맹(思孟)은 문학으로 문과에 우등으로 뽑히고 세상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명종(明宗) 이래로 임금을 계속 섬겨 오직과 현직을 역임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으로 마감하였는데, 아들 구성(具宬)과 구굉(具宏)이 호성 공신(扈聖功臣)과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훈됨을 인하여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순충병의보조(純忠秉義補祚)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의정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신씨는 고려조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서 영의정과 평주 부원군(平洲府院君)에 추증된 화국(華國)의 따님이었다. 이 사이에서 바로 계운궁이 출생하였으니 때는 무인년 4월 17일 무술이었다. 계운궁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겨우 4세에 이미 예(禮)로 몸가짐을 할 줄 알았고 5세가 되자 어린 티가 없이 의연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하루는 부모를 모시고 음식을 먹다가 몇 수저 뜨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이상히 여긴 부모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부르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밥상을 물릴 때 보니 그 음식에 오물이 섞여 있었다. 이때부터 부모는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부모는 그의 행동을 보려고 일부러 장난감을 다른 아이들에게만 주고 계운궁에게는 주지 않았는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에 부모가 그를 사랑하여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내 딸은 진짜 딸이다. 다음에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 하였다. 선조 대왕은 평소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을 기국이 있다고 여겨 사랑하였는데 경인년에 가례(嘉禮)를 치르려고 대등한 짝을 고르기 위해 사대부 집 딸들을 모두 대궐로 모이게 하고 친히 간선(簡選)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를 하고도 맞는 짝을 찾지 못하다가 계운궁을 한 번 보고는 금방 마음에 들어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빈어(嬪御)들도 모두 하례하였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그 해 10월 3일에 예를 갖추어 맞아들이게 하였다. 대원군은 인빈(仁嬪)의 소생이었는데, 덕이 있고 식견이 높은 인빈도 늘 훌륭한 우리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 선조 대왕이 여사(女史)에게 명하여 《소학(小學)》 등 여러 서적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그는 다 읽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음의(音義)를 통하였다. 또 따스하고 인자한 가운데 말이 적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높은 이는 높은 이대로 낮은 이는 낮은 이대로 맞게 행동하였으므로 궁중에서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대원군을 섬기면서도 순하고도 올바르게 받들어 활기차고 고운 얼굴로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감히 아내의 위치에 있다고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측출(側出)에게도 사랑으로 대하고 동사(쪌使)에게도 너그럽게 대하여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위아래 할 것이 없이 모두 법식이 있었으므로 대원군도 그를 매우 높이고 소중히 여기었다. 급기야 하늘이 돌보시어 성자(聖子)를 낳게 되었는데 때는 만력(萬曆) 을미년이었다. 이른바 덕을 심고 경사의 터전을 닦아 경운(景運)이 크게 열리게 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무신년에 선조께서 승하하시자 법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였고 인빈의 초상 때에도 그러하였다. 을묘년에 막내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참혹한 화를 당하자 대원군이 비통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이때 계운궁은 병석을 떠나지 않고 여러 해 병시중을 들면서 약을 다리거나 더럽혀진 의복을 세탁하는 일 등을 남에게 시키지 않고 모두 손수하였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는 물 한 모금 입에 넣지않고 울부짖다가 졸도까지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으로만 연명하였다. 그리고 동기간의 대접과 잉첩(칑妾)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대원군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후하게 대하였다. 겨레붙이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남의 급한 일을 보살피는데 있어서도 가난하고 천한 이부터 우선 하였으며, 처음 능창군의 참화가 있었을 때 친속 중에서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발걸음을 끊은 자도 있었지만 그들을 대할 때도 말이나 얼굴에 기색을 나타내는 일 없이 처음과 똑같이 대하였다. 한 평생 부귀의 티 없이 화사한 비단옷을 몸에 걸친 일이 없었고, 언제가 깊이 간직해두었던 진귀한 보배를 잃어버렸을 때 숨겨놓은 곳을 알면서도 그것을 불문에 부치고 말하기를 ‘남의 나쁜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대의(大義)에 밝아 경중과 완급을 알았는데 반정 때에는 금백(金帛)을 모두 꺼내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기도 하였으며, 거의(擧義)하던 날에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좋아하는 빛이 없었다. 위기와 변란을 당하면서도 그때그때 알맞게 처리하여 대업을 달성하는데 한 몫을 하였고 그리하여 큰 터전을 다질 수 있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덕택이었던가. 갑자년 봄 역적 이괄(李适)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육박하여 왔을 때 대가가 남쪽으로 옮겨 수원(水原)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따르는 자들이 모두 두려움에 싸여 뿔뿔히 흩어질 기미를 보이자 주머니를 털어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고, 대비(大妃)를 극진한 효성과 공경으로 받들고 곡진하게 순종하면서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경황없는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해이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병이 들어도 푸닥거리 같은 것을 일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비는 것이 헛된 일이라면 애당초 말아야 할 것이고, 응험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미망인(未亡人)인데 빌어 무엇을 할 것인가.’ 할 정도로 사리에 밝아 현혹됨이 없었다. 무신년 이후 언젠가 꿈에 선왕(先王)이 계운궁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집에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를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옥새를 내어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특별히 그에게 주고 나의 가르친 말을 전하라.’ 하자 계운궁이 절하고 사례한 후 묻기를 ‘신정(新政)에 최선을 다하면 이 나라를 진압하고 창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였는데, 그 역시 신묘한 일이었다. 아, 빛나신 열조(列祖)의 영령이 우리 성상을 격려하여 큰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뒤를 이어 복을 받아 이 나라에 억만년토록 끝없이 빛나는 길을 열게 하였으니, 그 꿈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었다. 계운궁은 계해년에 병이 들어 갑자년에 점점 심해지다가 병인년에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예빈(禮殯)을 하고 예장 도감(禮葬都監)을 설치하도록 하였으니 종백(宗伯)이 상례를 맡고 탁지(度支)가 일을 주관하였으며 빈궁(殯宮)은 장작(匠作)이 맡아 다스려 위아래가 총동원되어 일을 마쳤다. 반정 초기에 조정 대신의 논의에 따라 정원군(定遠君)에게 대원군(大院君)의 칭호를 붙였고 궁(宮)의 호를 계운으로 하였다. 누차에 걸쳐 임금이 근성(覲省)하려고 사제(私弟)에 납시다가 그것으로 부족하여 직접 대내(大內)에 옮겨 모시고 별공(別供)과 시선(時膳)을 빠짐없이 갖추어 끝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새 택조(宅兆)를 김포현(金浦縣) 뒷산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으로 정하였는데, 그해 4월 25일 장례를 모시고 그 바른편 자좌 오향(子坐午向) 자리는 대원군을 옮겨 모시기 위하여 비워두었다. 계운궁은 아들이 세 분인데, 맏이가 바로 당저(當?)로서 청주 한씨(淸州韓氏)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謙)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보위에 올라 대통을 계승하였다. 하늘로부터 복을 받아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조(쿭)로 왕세자에 책봉되고 다음은 아무【금상(今上)으로 휘는 호(淏).】이고 다음은 요(홏)이고 다음은 곤(滾)인데 모두 어려 아직 봉호가 없으며 딸은 맨 끝이다. 그리고 계운궁의 둘째 아들은 능원군 이보(綾運君李?)인데 현재 슬하에 자녀가 없이 정원 대원군의 제사를 맡고 있고, 셋째는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으로 호협하고 재주가 영특하였으나 지난 혼조(昏朝) 때 간사한 무리들의 날조된 모함에 빠져 섬으로 귀양갔다가 17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죽었는데 아직 가정을 갖기 전의 일이었다. 명(銘)하기를, 어느 산 이보다 더 높으며 어느 시내 이보다 더 깊을까 근원이 깊어 멀리 흐르듯 쌓임이 많으면 동나지 않는다네 구씨라면 대단한 문벌로서 선덕이 쌓여 복조가 열렸다 그 문호를 의정공이 더 넓혀 전대에 비하여 더욱 빛이 나네 훌륭한 따님이 탄생한 것은 그 덕과 그 유래가 있어서라네 맑은 자질과 어른다운 법도 어린 시절부터 양성되었네 배우지 않고도 그리 되었던 것 어짜 타고나서만 그랬겠는가 올바른 일만 하는 가문의 전통에 귀에 젖고 눈에 젖어 그런 것이겠지 혼기를 맞은 대원군을 위하여 걸맞은 어진 짝을 찾고 있을 때 왕께서 한 번 보고 아름답게 여겼으니 그보다 앞설 자 그 누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를 왕자비로 맞고서는 법도와 예절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모든 영령들이 그를 돌보아 성자를 탄생시켜 양육케 하였네 아, 빛나신 성조께옵서도 오르내린 넋이 하늘에 계시면서 어느날 밤 갑자기 꿈에 나타나 옥새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네 선왕을 이어 갈 신손께서 탈없이 이 나라 장래를 걸머졌다네 대의를 밝혀 떨쳐 일어나자 하늘과 땅이 제대로 운행되었네 떳떳한 윤리가 바로 잡히고 흐렸던 해와 달도 빛을 다시 찾았네 어머니 공로가 크기도 하였으나 인력으로 된 것만은 아니었다네 예를 갖춘 융숭한 대접으로 오래오래 사시리라 여겼더니 무정한 병마가 점점 심하여 흐려진 정신이 육신을 떠났네 예부터 일궈 온 김포 고을 한강 서쪽에 자리잡은 곳에 무덤 자리 마련하여 일을 마치니 새로운 묘역이 이에 열렸네 야무지고 단단한 돌을 골라서 갈고 다듬어 거기에 새기려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지어 현궁 속에 함께 묻으려 하네 라 한다.”
【원전】 34 집 85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조 012 04/04/03(을해) / 능원군 이보에게 경제적 도움을 명하다 》
상이 하교하기를, “능원군 이보(綾原君李?)가 지금 녹봉(祿俸)이 없어 군색함을 면키 어려우니, 내가 매우 가엾은 생각이 든다. 보가 해직되었다고 하나 조관(朝官)들과는 다르니 그대로 품록(品祿)을 주는 것이 어떠할지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논의한 후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상(喪)을 지키기 위하여 해직된 모든 관원은 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조종조의 금석(金石)의 법입니다. 능원군 보에게 그대로 품록을 주는 것이 아무리 일시의 은명(恩命)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후일 그릇된 전례가 될 염려가 있습니다. 만약 수시로 별도의 미두(米豆)를 하사하여 급한 처지를 구해 준다면 그것은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90 면 【분류】 *재정-국용(國用) /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 인조 012 04/05/18(기미) / 강석기·이경석·김광현 등이 상이 대신들의 의견을 따를 것을 건의하다 》
홍문관 응교 강석기(姜碩期), 부교리 이경석(李景奭), 수찬 김광현(金光炫), 부수찬 박황(朴潢) 등이 상차하기를, “삼년상은 통상(通喪)인데 힘써 공의(公議)를 따라 기복(朞服)으로 내렸으니, 종통(宗統)에 압존(壓尊)되는 그 뜻이 매우 엄합니다. 이미 종통에 압존되어 기복으로 낮추었으니, 상(喪)에는 저절로 주장하는 자가 있어 전하께서 우제를 주관하지 못하는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하여 많은 변설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는 반드시 자기 주장을 세우고자 하여 우제의 예(禮)를 인하여 다시 당초의 복제(服制)를 이끌어 비난하는데, 그의 허다한 사설은 우선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대개 이치로 미루어 보아도 능원군 이보(綾原君李?)가 이미 상주가 되고 전하께서는 기복으로 낮추었으니, 예에서 이른바 주인이라 하는 것은 이제 과연 누가 되겠습니까. 예관(禮官)이 우제의 의례를 품정한 것이 이미 자세하였고, 이번 대신의 헌의 역시 매우 명백하였으니, 전하께서도 그것이 당연함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지극한 정에 가리워 근거없는 설에 미혹되셨는지 우제의 의례를 고치도록 하시니, 신들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출계(出繼)하신 일은 없으나 이미 압존, 강등하는 원칙에 따라 복을 강등하셨고 상에는 주인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우제에 전하께서도 도리어 주인이 되시면, 당초 압존하여 강등한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상주를 세워 전궤(奠饋)를 주관시키는 뜻에도 매우 어긋납니다. 전도되고 문란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는 대신의 의논을 살펴 받아들여 이미 정한 예를 준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귀의 차자는 소견이 없지 않으며, 예제(禮制)를 강정하는 것은 해당 관원이 하기 마련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98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조 012 04/05/18(기미) / 여러 대신들이 별제의 시행을 그대로 할 것을 건의하다 》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집의 윤형언(尹衡彦), 사간 이준(李埈), 장령 정세구(鄭世矩)·민응형(閔應亨), 지평 민응회(閔應恢)·홍명구(洪命耉), 헌납 김육(金堉), 정언 이경증(李景曾)·김지수(金地粹)가 합계(合啓)하기를, “《예기(禮記)》에 ‘예(禮)란 것은 이치상 바꿀 수 없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종묘의 주인이 되셨으므로 사친(私親)의 상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치가 매우 명백하며 그 의리도 엄정합니다. 이미 한 나라의 공의(公議)를 인하여 기왕 능원군 이보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귀의 근거없는 설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대신의 계사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우제를 스스로 주관하겠다고 전교하시니, 경(經)에 어긋나고 이치에 벗어나며 지난번에는 따르셨다가 지금은 어기시는 것입니다. 신들의 염려는 이 한 가지 예를 다투는 데 있는 것만 아닙니다. 보가 마땅히 이 제사를 주장하여야 함은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인데 또 스스로 주관하겠다는 명이 계시니, 신들은 이점에 대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명께서 친히 제사하시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라면 별제(別祭)의 설행이 내일 있습니다. 하루 사이에 성명(成命)을 고치고자 하시니, 천리와 인정으로 헤아려도 큰 잘못입니다. 대신의 계사대로 이미 정한 예를 그대로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헌례(獻禮)를 친행한다 하여 별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예에 있어 그다지 어긋나는 일이 없는 듯한데 이처럼 논집(論執)하니 너무 지나치다.” 하였고, 세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고, 네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이는 크게 방해되는 일이 아닌데 그대들이 이처럼 굳게 고집하여 막중한 제향(祭享)을 때맞춰 지낼 수 없게 하니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원전】 34 집 98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조 012 04/05/18(기미) / 양사가 합사하여 대신의 계사대로 사례를 행할 것을 건의하다 》
양사가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주상(主喪)이란 무엇이냐 하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능원군(綾原君)에게 주상의 이름이 있는데 그 제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고, 전하께서는 종묘 제향의 주인이신데 주관해서는 안 될 제사를 주관하려 하시니, 둘 다 근거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귀가 편벽되고 그릇된 견해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제사가 이미 임박했는데 갑자기 차자를 올렸으니, 조정의 존엄성을 매우 무시한 처사입니다. 예에 밝고 경에 통달하신 전하께서 시비(是非)의 소재를 모르시지 않을텐데 지극한 정에 끌려 이미 정한 예를 경솔히 고치면서 외정(外廷)의 의논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후세의 비난을 상관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실로 성명께서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사는 큰 일이고 예는 상경(常經)인데 어찌 한 사람의 빗나간 의논 때문에 분분하게 변경시켜가면서 꺼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초우(初虞)는 제사의 시작입니다. 시작이 이미 잘못되면 그뒤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아닌 것으로 제사를 지내면 참으로 미안한데 때맞춰 지내지 못하는 것을 어찌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밤늦도록 연달아 다투어 명을 받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대신의 계사대로 이미 정한 예를 그대로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지나치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99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2 04/05/18(기미) / 우의정 신흠이 우제의 초헌 절차를 해당 관아의 의논에 따라 할 것을 건의하다 》
우의정 신흠(申欽)이 상차하기를, “신이 오는 길에, 우제의 초헌(初獻)을 해당 조로 하여금 고쳐 마련하도록 전교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은 예관(禮官)이 이미 품정(?定)하였고, 초우의 예가 현재 있는데 갑자기 이런 전교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평소 예학(禮學)에 어두워 터득한 바가 없으나, 생각하건대 해당 관아의 의논은 예에 의거해 정한 것이지 결코 날조한 설이 아닙니다. 예에 있어선 정(情)을 굽히는 수가 있으므로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았으면 어찌 우사(虞祀)의 주인을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능원군이 초헌을 하고 성명께서 초헌을 하시지 않는 것이 모두 본디 그런 것인데, 이미 정한 예를 이처럼 분분하게 고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이귀(李貴)의 말은 상정(常情)을 주장하는 것이며, 예관의 의논은 예문(禮文)에 분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정례(情禮)의 사이를 살피시어 정으로써 의리를 해치지 마소서. 신은 윤방(尹昉)이 헌의할 때에 원소(園所)에 있어서 번거롭게 아뢸 필요가 없었으나 이런 대례(大禮)를 당하여 어찌 감히 품은 생각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이처럼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관이 의논하여 정한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출계(出繼)한 예(禮)가 없으니 초헌을 행하더라도 의리를 해치는 일이 없을 듯하다. 정례로 헤아려 보아도 여기에 지나지 않으니 이러한 뜻을 양해하여 분분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9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조 012 04/05/19(경신) / 이귀가 사직 상소를 올리다 》
연평 부원군 이귀가 상차하기를, “신이 양사가 합계한 말을 보건대, 바로 신의 윤기(倫紀)를 밝히고자 하는 말을 도리어 예경(禮經)에 위배된다고 하였으니 대간이 다투는 바가 무슨 일이며, 신이 다투는 것 역시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은 대원군(大院君)을 사친(私親)이라 하나, 신은 전하께서 출계하지 않았으니 대원군은 마땅히 전하의 아버지가 된다고 여깁니다. 대간은 예경에서 말하는 ‘임금의 어머니가 왕비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계운궁(啓運宮)에 적용하나, 신은 이른바 ‘왕비가 아니면’이라는 말은 바로 왕자(王子)로서 정통을 이은 자는 그 본생(本生)이 정후(正后)에게 압존되기 때문에 시마복(쳠麻服)을 입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당초에 시마복으로써 이 상(喪)의 복제로 삼고자 한 것은 또한 틀리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바로 왕손입니다. 출계하여 남의 후사가 된 적이 없으니, 대원군은 바로 전하의 아버지여서 결코 사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사친이란 것은 마치 선조(宣祖)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사이가 그런 것입니다 이미 사친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임금의 부모이니, 예경에 ‘임금의 부모상에는 임금은 삼년상이고 여러 신하들은 기복(朞服)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대원군의 귀천과 적서를 논하여 예경의 ‘제후는 탈종(奪宗)한다.’는 법으로 헤아려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결코 아들이 제후가 되었는데 아버지가 왕자로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땅히 별도로 예묘(?廟)를 세워 조예(祖?)의 통(統)을 이어야 한다는 곡절은 이미 전번 차자에서 다 썼습니다. 대간은 종통(宗統)에 압존된다는 것으로 주장하지만 신은 달리 생각합니다. 《예기》에 ‘조(祖)는 손(孫)을 압존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조(宣祖)께서 비록 살아 계시더라도 계운궁의 삼년상을 강등할 수가 없는데, 어찌 전하께서 조통(祖統)을 이어받은 까닭으로 ‘왕비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끝내 계운궁에게 적용하며, 또 능원군으로 하여금 이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심지어 이 상에는 변복만 하고 삼년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간은, 전하께서는 자전(慈殿)에게 나라를 받았으니, 남의 후사가 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강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신은 달리 생각합니다. 《의례(儀禮)》에 이른바 ‘증조(曾祖)에게서 나라를 받은 임금은 강복하지 않으며, 질병이 있어 즉위하지 못한 조(祖)와 부(父)에는 삼년상을 강등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증조와 조에 후사가 된 것에 차별을 주어 말하겠습니까. 이는 더욱 무리한 말입니다. 이것은 당초 예관(禮官)이 예경의 본뜻을 모르고 잘못 마련한 소치입니다. 이 잘못은 예관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 후세에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는 기왕의 잘못이어서 신이 다시 번거롭게 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임금은 한 나라의 주인이니, 한 나라의 무슨 일인들 스스로 주관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군모(君母)의 제사에만 이미 대원군을 고(考)라 칭한 마당에 스스로 초헌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전하께서 이 제사에 임하지 않으시면 그만이지만 만일 이 제사에 임하셨는데 삼헌(三獻)을 주관하지 못하고 곡위(哭位)에 물러서 계시면 정례에 과연 합당하겠습니까. 예관과 대신이 이러한 곡절은 모르고 잘못된 견해만 억지로 고집하여 끝내는 막대한 중례(重禮)를 저절로 무륜(無倫)의 행사로 빠지게 하니, 신은 실로 가슴이 아픕니다. 이른바 예라는 것은 인정(人情)을 따르고 천리(天理)를 조절한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전후에 예를 의논한 것은 경문(經文)의 본뜻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억견(臆見)으로 황(皇) 자와 효(孝) 자를 삭제하여 예의 바름을 얻은 것이라 여기니, 이 예 역시 어떤 성현(聖賢)이 지은 글에 의거하여 한 것입니까. 또 옛사람의 글에는 허(虛)와 실(實)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황고(皇考)·효자(孝子) 네 글자 가운데 ‘황’과 ‘효’ 두 글자는 허자(虛字)이며 ‘고’와 ‘자’ 두 글자는 실자(實字)라고 여깁니다. 황·효 두 글자를 감하고 이미 고·자 두 글자를 칭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이는 참된 고(考)가 아니며 참된 자(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지난번 조정 신하들이 합계(合啓)하면서 ‘고(考)라 칭하는 것은 방편상 부득이해서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고’라고 칭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데 이에 방편상 부득이해서 그렇게 일컬으면서 감히 고(考)의 제사를 주관하지 못해야 합니까. 아, 사람의 소견이 짧음이 이지경이니 또한 괴이하지 않습니까. 지금 대간이 신의 말을 예경(禮經)에 위배된다고 하는데, 대간이 논한 바는 예경에 위배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전번 차자에서 전하를 아버지를 아버지로 하지 못하게 인도한다고 한 것은 신도 다시 생각해보니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대간이 논한 바를 보면 신의 말이 이제 과연 징험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하지 않는 것과 모후(母后)를 폐한 것은 예경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으로 지금의 대간은 광해군 때의 대간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광해군 때의 대간은 이익을 위해서였고, 지금의 대간은 알지 못하면서 한갓 명분을 위한 것으로, 단지 명리(名利) 사이에서 다투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한심하지 않습니까. 신이 당초 의(義)를 내세운 것은 윤기(倫紀)를 밝히기 위해서인데, 지금의 대간은 전하를 아버지를 아버지로 하지 못하게 인도하니,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만약 신의 말이 예경에 어긋난다고 여기시어 성현의 예경 본뜻을 따르지 않으시고 마침내 능원군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스스로 헌례(獻禮)를 주관하지 않으시면, 신은 결코 지금의 대간과 함께 조정에 서서 차마 윤기가 끊어지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한 번 옳게 여기거나 그르게 여기는 데 따라 윤기의 명암이 판가름납니다. 한 번 잘못된 것도 이미 심한데 어찌 다시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감히 공자의 ‘스스로 돌이켜 보아 곧으면 천만 명의 적에게라도 나는 가 대적하겠다.’라는 교훈으로써 거취를 결정하고자 하여 다시 천청(天聽)을 번거롭히니, 만 번 죽어도 감수하겠습니다. 성명께서는 먼저 신의 직을 삭탈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조정 의논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신을 조용한 바닷가에서 노닐다가 여생을 마치게 해주시면 그지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원전】 34 집 99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조 012 04/05/01(임인) / 예장 도감에서 상례를 전례에 따라 행할 것을 건의하다 》
예장 도감이 아뢰기를, “혼궁에 초우제(初虞祭)를 지낸 이후에는 마땅히 《가례》에 의하여 주인이 초헌을 행하고, 아헌과 종헌은 친속 가운데 항렬이 높은 자가 하여야 하는데, 혼궁 전면의 지형이 매우 좁습니다. 전하 및 왕세자의 배위는 마땅히 왼쪽 보계(補階) 위에 설치하고 주인 및 아헌관·종헌관의 배위는 오른쪽 처마 계단 아래에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초헌례는 위에서 친히 하도록 하고 배위는 사묘(私廟)에 친히 제사할 때의 예에 의하여 계단 아래에 설치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예경(禮經)을 참작하여 상제를 단정하셨고 또 대신과 백관들의 소청에 따라 능원 대군(綾原大君)을 상주로 삼아 주사(主祀)로 정하셨으니, 전례(典禮)가 크게 정해짐에 따라 여러 사람이 탄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제(虞祭)·졸곡제(卒哭祭) 초헌에는 주사(主祀)했던 사람을 놓아두고 전하께서 친히 행하려 하는데, 우제와 졸곡제는 바로 상기(喪紀)의 대절이므로 축문의 머리말도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문과는 크게 어긋나서 종전 전하께서 강정(講定)한 뜻이 모조리 허탕으로 귀착될 것이니, 어찌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반곡(返哭)하고 당(堂)에 오를 때 살아계시는 듯 속이 텅 빈 듯한 것은 자식으로서 갖는 지극한 정 때문입니다. 성상의 마음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곡위(哭位)에만 참여하고 헌례(獻禮)를 행하지 않으면 성상의 마음이 서운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經)에 이르기를 ‘예란 전할 만한 것이며 이를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곡용(哭踊)에도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번 우제와 졸곡제에는 한결같이 전례(典禮)에 의해 행하고, 반곡한 후에 별도로 친히 제사를 행하여 상께서 초헌례를 행하고, 세자가 아헌례를 행하고, 친속이 종헌례를 하되 축문과 머리말은 계해년 초에 본조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한 ‘자(子)’라고만 일컫고 ‘효(孝)’자를 일컫지 않았던 것처럼 한다면 정에 있어서나 예에 있어서 마땅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상(左相) 윤방(尹昉), 우상(右相) 신흠(申欽)이 모두 ‘예조의 말에 따라야 한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계단 아래에 배위를 설치하는 일 역시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다시 계단 위로 고쳐 정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친의 제사에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상의 지혜로 자신이 주관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모르지 않을텐데 기어이 친헌(親獻)하려 하니 지극한 정에 가려져서 그런 것인가? 대신과 예관(禮官)은 극진히 강구하여 국시(國是)를 정해놓고서 갑자기 다시 고쳤으니, 어찌 매우 부당하지 않은가.】
【원전】 34 집 94 면
《 인조 014 04/10/07(병오) / 능원군에게 물품을 지급하도록 하교하다 》
상이 하교하였다. “능원군(綾原君)이 녹을 잃은 지 오래여서 집안이 곤궁하다고 하니, 매우 측은한 생각이 든다. 해조로 하여금 쌀과 콩을 적당히 지급해서 어려운 형편을 구제해 주도록 하라.”
【원전】 34 집 144 면 【분류】 *재정-국용(國用) / *왕실-종친(宗親)
《 인조 014 04/10/20(기미) / 예조가 연제 때의 복제를 마련토록 아뢰다 》
예조가 아뢰기를, “연제(練祭) 때의 절차를 이제 마련해야 하는데 《오례의(五禮儀)》의 연복(練服)에 대한 주에는 연포(練布)로 관(冠)을 만들고, 부판(負版)과 벽령최(?領衰)를 떼며, 부인(婦人)은 긴 치마를 잘라서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한다.’라고만 되어있고, 《예기(禮記)》의 연관 전연(練冠?緣)에 관한 주에는 ‘연포로 관(冠)을 바꾼다.’ 하였고, 또 ‘연포로 중의(中衣)를 만든다.’ 하고, 또 ‘정복(正服)은 바꾸지 못한다. 연의(練衣)는 중의로 최복을 대신한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남자는 수질(首?)을 제거하고 부인은 요대(腰帶)를 제거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오례의》에 있는 연제에 대한 제도에는 중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또 부인의 변복하는 것과 제거하는 절차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 궐문(闕文)인 듯합니다. 《가례(家禮)》의 연복은 양씨(楊氏)도 소략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경(禮經)》을 바른 것으로 삼아서 참작해 마련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능원군(綾原君)은 상일(祥日)에 연복을 입어야 하지만, 왕세자는 기년(期年)의 정복이므로 원래 연제와 담제(쩘祭)의 절차가 없고 상일에 복을 벗어야 하는 것이니, 이번 연제 때에는 제사에만 참여하고 변복이나 제거하는 절차는 없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신도 그렇게 여기니, 따랐다.
【원전】 34 집 146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7 05/12/16(기유) / 능원군 이보에게 미두를 보내다 》
상이 작년의 예에 따라 능원군 이보(綾原君?)의 집에 쌀과 콩을 하사하라고 해조에 명하였다.
【원전】 34 집 243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 인조 018 06/01/01(계해) / 능원군이 제사지낼 때 입을 복색을 두고 의논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혼궁에서 대상(大祥)을 끝낸 뒤에 위에서 직접 제사지낼 때 능원군(綾原君)은 무슨 복색으로 입고 배제(陪祭)해야 되겠느냐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혼궁에서 대상을 지낼 때 능원군은 이미 연복(練服)을 벗었으니 당연히 흰옷·흰띠·흰갓 차림으로 제사지내야 합니다. 따라서 대상이 끝난 뒤 위에서 직접 제사지낼 적에도 그 복색 차림으로 입참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246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8 06/01/12(갑술) / 인조 어머니의 대상제 때 의례 문제를 두고 논의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대상제(大祥祭)의 축문에는 능원군(綾原君)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복을 길복으로 바꾸어 입는 절차가 있어서 상께서 직접 거행하게 되면 곤란한 점이 절절이 있기 때문에 감히 대상을 지낸 뒤에 상께서 직접 별제(別祭)를 거행하실 것으로 계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교를 받들고 반복하여 상량하여 보니 축문과 초헌(初獻)은 능원군이 하도록 하고 제사를 지낼 임시에 상께서 곡을 하는 자리에 나아가 곡하되 단지 곡하는 예법만 행하는 것이 인정과 예문을 헤아려 보더라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우부승지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대상을 지낼 때 상께서 곡하는 자리에 나아가 곡하는 예법을 행하신다면 이는 진실로 인정과 예문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전에 계하하신 대로 또 별제를 지낸다는 것은 같은 시각에 재차 제사를 지내는 것이 됩니다. 예법이 번거로우면 욕이 되는 것이어서 이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문(禮文)에 의거 헤아려 보니 매우 미안스러운 것 같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별제는 물려서 지내겠다.” 하였다.
【원전】 34 집 25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8 06/01/12(갑술) / 인조 어머니의 대상제를 지내는 절차와 인조의 참여 자격을 두고 논의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재기(再期)가 되는 날 능원군은 상복을 벗는 절차가 있기 때문에 축문(祝文)과 의주(儀註)를 모두 《가례(家禮)》의 삼년상인 대상의 법규에 의거 마련했습니다. 상께서 대상과 담제에 같이 참여하여 제사지내게 되면 예모에 미편한 점이 있기 때문에 별제를 지낼 것으로 마련하여 아뢴 것입니다. 별제를 물려서 지낸다면 반드시 다시 길일을 가려서 정해야 되는데 이는 대상일에 상께서는 곡하는 예법만 행할 뿐 제사지내는 일은 없는 것이 됩니다. 인정과 예문에 의거 헤아려 보건대 역시 흠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의 의견에는 별제를 물려서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정례(正禮)가 아닌 변례(變禮)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으니,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였다. 삼공이 아뢰기를, “하루 두번 제사지내는 것이 번독스러운 것 같기는 하지만 해조의 의견은 단지 곡하는 예법만 행하고 이어 별제를 설행하자는 것이니 그래도 근거할 데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날로 물려서 지낸다면 이는 대상도 담제도 아니어서 근거할 절문(節文)이 없게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복계(覆啓)가 있는 것입니다. 해조의 계사에 따라서 시행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25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8 06/03/08(기사) / 좌승지 이성구가 인조 아버지의 제사를 친행하지 말고 능원군에게 주관케 하라고 청했으나 따르지 않다 》
좌승지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부묘(쯊廟)할 때의 의주(儀註)를 보니, 모두 친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초상(初喪)·우제(虞祭)·상제(祥祭)·담제(쩘祭) 때부터 이미 능원군(綾原君)이 모두 주관하였는데 어찌하여 유독 부묘할 때에만 친행한단 말입니까. 예경으로 헤아려 보아도 전후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상제·담제의 예에 의하여 능원군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상께서 입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당 조로 하여금 다시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전】 34 집 264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궁관(宮官)
《 인조 018 06/03/08(기사) / 이귀가 인조 아버지(원종) 묘(廟)의 지위를 높이자고 건의하다 》
이귀(李貴)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대제(大祭)가 이미 박두하였는데 예문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감히 면대를 청하였습니다. 만약 능원군으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서 사묘(私廟)에 부묘한다면, 이는 하원군(河原君)의 묘와 차이가 없게 되고 전하께서 다른 사람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미 능원군에게 봉사하게 하였는데 상께서 제사를 주관하시고자 한다면, 이는 예에 있어서도 역시 근거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반드시 별도로 예묘(?廟)를 세워야만 전하의 정을 다할 수 있고 예에 있어서도 구애되는 바가 없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라건대, 부묘하는 날짜를 조금 늦추고 다시 대신과 유신(儒臣) 및 예관(禮官)을 불러서 상의하여 개정하게 하소서. 신이 전에 올린 차자를 지금까지도 내리지 않으시니, 이는 반드시 신이 노망하였다고 여겨서 치지 도외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우선 기다리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4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8 06/03/08(기사) / 인조 아버지(원종)를 대우하는 문제에 대한 최명길의 차자 》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일찍이 병인년 봄에 외람되이 차자를 올렸는데, 원호(園號)를 가하고 제후의 예로 제사를 지내고 기년이 지난 후에 소복을 입은 것은 모두 신이 차자에서 진술한 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묘(廟)를 세우는 한 조항에 대해서만은 시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성명하신 전하께서 어찌 깨우치지 못할 리가 있어서 거듭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어겨가면서 지연시키겠는가. 반드시 3년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소리 않고 지금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담제 날짜가 이미 지났는데 육경원(毓慶園)의 신주를 사묘(私廟)에 합부(合쯊)하고자 절목을 이미 내렸고 날짜를 이미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 신은 실로 놀라워서 할 말을 잊고 크게 탄식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자는 7묘(七廟)로 고조·증조·조·부의 위로 삼대(三代)를 제사 지내며, 제후는 5묘로 고조·증조·조·부와 태조(太祖)를 제사지내며, 대부는 3대를 제사지내고, 서인은 부(父)만 제사지낸다고 합니다. 비록 존비(尊卑)가 같지 않고 강쇄(降殺)에 차이가 있으나 친한 곳으로부터 소원한 데로 미쳐가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로 미쳐가는 것은 귀천이 없이 마찬가지 입니다. 오직 지자(支子)만은 천하여서 감히 묘(廟)를 세우지 못하고 종자(宗子)의 집에서 제사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기》에 말하기를 ‘서자(庶子)가 아비를 제사하지 못하는 것은 종(宗)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하였는바, 이는 대개 예묘(?廟)를 높이고 종법(宗法)을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하여서 감히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는 있으나 자식이 귀하게 되었다 해서 아버지를 지자에게 맡기는 경우를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아 고조·증조에 미쳐가는 것은 참으로 정상적인 이치인 것으로, 할아버지를 제사지내면서 아버지를 제사지내지 못하는 경우를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예를 논하는 자들은 모두 ‘조(祖)를 높이는 의리가 중하기 때문에 이치상 아버지는 낮추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신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삼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위신강·부위자강·부위처강으로, 신하가 임금을 낮추는 예는 없는 것이고 자식이 아비를 낮추는 예는 없는 것이며, 부인이 남편을 낮추는 예는 없는 것입니다. 예란 것은 성인이 삼강을 부식시키고자 하여 만든 것입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은 한갓 임금을 높일 줄만 알고 삼강을 높일 줄은 알지 못하며, 한갓 할아버지를 높일 줄만 알고 아버지를 높이는 예는 알지 못하여, 부모의 상에 있어서 반드시 낮추려고 하여 기년으로 하고 아버지를 제사지내는 예를 반드시 낮추려고 하여 지자에 붙이니, 통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전하로 하여금 복(服)과 제사를 강쇄하도록 한다면, 어찌하여 아버지라 칭할 수 있는 자리를 별도로 강구하고 흥경원(興慶園)에 대하여 백부나 숙부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참으로 아버지라 칭할 지위가 마련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할 것인 바, 어찌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부모의 칭호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방손이 잇는 것과 종손이 잇는 의리가 각각 다르고 부자와 조손의 명분을 바꿀 수 없어서입니다. 이미 그 명분이 있다면 이는 그 실재가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로 섬기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는 것은 인간의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낮춘다는 한 마디 말을 다른 후손이 없는 부모에게 가한단 말입니까. 한 문제(漢文帝)가 상기(喪期)를 단축한 다음부터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역월제(易月制)를 따랐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연히 일어나 고제(古制)를 따른 임금이 몇 명 있었으나 혹 몇 달이 지나서 최복을 벗고 혹 기년이 되어서 곧바로 길복을 입어서 후세 사람들이 애석해 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덕은 고금을 통하여, 제왕의 높은 자리에 거처하면서 몸소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비록 할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를 낮춘다는 잘못된 논의에 동요되었으나 뒤에는 여러 사람의 말을 물리치고 더욱 굳게 예를 지켜 상복을 벗은 후에는 별전(別殿)에 나아가고 조회에 임해서는 현포(玄袍)를 입고 삭망에는 반드시 친히 제사하셨습니다. 이름은 비록 복을 강쇄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삼년상을 행하셨으니, 참으로 백왕의 법이 될 만합니다. 그런데 유독 한스러운 것은 예묘(?廟)를 오랫동안 궐하여 사전(祀典)을 바루지 못한 것이니, 신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효자가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애모의 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줄어드나 제사를 지내 보답함은 시종 한결같은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처음에는 신궐(新闕)에 봉안하여 혼궁(魂宮)이라고 칭하였다가 끝내는 낮추어 옛집에다 모시고는 사묘(私廟)라 칭하니, 이것이 어찌 정리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원호(園號)를 가할 수 없고 참봉을 둘 수 없으며, 제후의 예로 제사지내는 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살아서는 부(父)라 하고 죽어서는 고(考)라 하며 묘를 예(?)라 하는바, 이름은 비록 다르나 섬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있으면 아버지가 있고 사당이 있으면 아버지의 사당이 있는 법입니다. 부인데도 낮추어서 부가 되지 못하고 묘인데도 예라 하지 않아 묘가 되지 못하니, 경적(經籍)이 있는 이래로 낮출 수 있는 부와 아버지의 사당이 없는 묘를 본 적이 있습니까. 당초에 예를 의논하는 여러 신하들이 다만 전하께서 계통을 뛰어넘어 조(祖)를 이은 것이 대략 한 선제(漢宣帝)와 같은 것만 보고 직손과 종손(從孫)이 사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정자(程子)의 설을 잘못 인용하여 오늘날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자들이 자세히 그 사정을 강구할 겨를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호응하여 모두들 속론에 휩쓸려 들어감을 면치 못하여 한때의 공론처럼 되고 말았으니, 전하께서 그대로 따름을 면치 못한 것이 마땅합니다. 아, 방손이나 지손이 계통을 이은 것을 인후(人後)가 되었다고 하고, 한결같이 곧게 이은 것을 조후(祖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후가 되었으면 아버지가 백부나 숙부가 되는 것이고, 조후가 되었으면 아버지가 비록 죽었더라도 명분이 바뀌지 않는 것이 고금의 상례입니다. 전하의 오늘날의 일은 실로 태손(太孫)이 사위(嗣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종손이 계통을 이은 예를 끌어대어 맞추려 하니,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외간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대부분 추숭하여 입묘(入廟)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으나 신의 견해는 홀로 그와는 다릅니다. 대개 왕으로 추봉하는 예는 주공(周公)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순임금이 고수(줥첳)에 대해서나 우 임금이 곤(툵)에 대해서나 탕 임금이 계(癸)에 대해서 모두 왕호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임에 있어서는 순임금·우임금·탕임금과 같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 사치스럽게 꾸미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합부(合쯊)하는 날에 능원군이란 방제(旁題)를 제거하고 별도로 한 묘를 세워 예제(?祭)를 받들고 원호(園號)의 예를 모방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가하며, 주악(奏樂)은 별도의 악장(樂章)을 만들고 관헌(쥭獻)은 조정 신하를 명하여 하며, 사시의 천향(薦享)을 종묘와 같은 날에 하지 말아 차별을 두는 뜻을 표하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를 높이고 어버이를 높이는 도에 있어서 양쪽 다 마땅함을 얻을 것이어서 소목(昭穆)의 법을 어그러뜨리지 않고 이륜이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백세 뒤에 성인이 나와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예조에 내렸다.
【원전】 34 집 264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궁관(宮官) / *사상-유학(儒學)
《 인조 018 06/03/09(경오) / 원종 대우를 둘러 싼 이귀와 최명길의 차자를 이유로 김상헌이 사직을 청하다 》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리기를, “찬성 이귀(李貴)의 차자를 보건대, 그 차자에 ‘전하께서 계운궁(啓運宮)에 대하여서는 마땅히 삼년상을 행해야 되는데, 그 당시 그릇된 유자(儒者)들이 잘못 「임금의 어머니는 부인이 아니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였고, 심지어는 거취 문제를 가지고 다투기까지 하여 끝내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다.’고 하였으며, 또 ‘능원군이 봉사(奉祀)한다고 방제한 것은 크게 예경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며, 또 ‘정신들 중에 의리에 어두운 자가 매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면서 대원군(大院君)을 가리켜 사친(私親)이라 하여 끝내 임금의 아버지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초상 때에는 백관들에게 기년복을 입지 않게 하였고 또 나아가 곡하는 일까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비록 한두 그릇된 유자가 예경의 본의를 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나, 그 예경에 어긋난 것을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바로 그 당시에 상례(喪禮)를 강정한 예관인바, 그릇된 유자라는 기롱과 일을 그르쳤다는 지척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본디 학식이 없어서 갑작스런 변례(變禮)를 만나서 감히 마음대로 단정짓지 못하고 모든 것을 대신과 학문과 덕망있는 유자에게 묻고 강구한 다음 실정과 예문을 절충하여 마땅함을 얻고자 하였으나, 끝내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가 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귀와 최명길 등이 올린 차자에 대해서 본조에서 조사하여 아뢰어야 하는데, 신은 이미 일을 그르쳤다는 지척을 당하였으니, 지금 어찌 감히 알지 못하는 예를 억지로 하여 다시 그 사이에서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속히 신을 체직하고 예를 잘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 제수하여 국가의 막중한 예를 속히 강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원전】 34 집 26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궁관(宮官) / *사상-유학(儒學)
《 인조 018 06/03/10(신미) / 원종 대우와 관련된 예조 및 해창군 윤방 등의 의견 》
예조가 아뢰기를, “이귀와 최명길 등이 차자를 올려 묘를 세우는 일에 대해 진달하였습니다만, 이는 상례(常禮)가 아니어서 본조에서 의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및 삼공이 모두 아뢰기를, “예에 있어서 종통(宗統)이 중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곧바로 선조 대왕의 계통을 이어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대원군의 제사를 주관하면 대종(大宗)에 혐의스러운 점이 없겠습니까. 이제 별묘(別廟)를 건립하면 전하의 대에 있어서는 예묘(?廟)가 되고 전하의 뒷대에는 조묘(祖廟)가 되며, 그 후에는 증조묘가 됩니다. 나라에 이미 종묘가 있는데 또 조묘가 있으면 이것은 종묘가 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함에는 반드시 끝에 가서 어떻게 될까를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대원군의 사우(祠宇)를 별묘의 제도와 같이 크고 높게 한 다음 관에서 제향에 쓰는 물품을 지급하고, 제사는 능원군이 주관하되 전하께서 때때로 친제를 행하여 효경(孝敬)의 뜻을 펼 경우, 종통이 중하게 되고 대원군도 백세토록 불천하는 종(宗)이 될 것이라 여깁니다. 신들은 본디 예학에 어두워서 억설을 가지고 헌의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이 헌의는 인정이나 예문에 맞지 않으니, 실로 이것은 근거가 없는 억설이다.” 하였다. 헌부와 간원도 이런 내용으로 아뢰고 또 예관이 일찍이 품신하지 않은 잘못을 논하였으며, 옥당 역시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원전】 34 집 265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궁관(宮官) / *사상-유학(儒學)
《 인조 018 06/03/12(계유) / 대사간 이민구 등이 계운궁의 이안을 고하는 제사를 친히 행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다 》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사간 권도(權濤), 헌납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계운궁(啓運宮)의 상을 처음부터 능원군이 주관하였고, 우제(虞祭)·졸곡제(卒哭祭)·상제(祥祭)·담제(쩘祭)를 모두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니 부묘하는 것은 제사의 마지막인바, 변동시켜 둘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당 조에서 이미 친행하는 전지를 받들고는 다시 품신하지 않고 허겁지겁 친행하는 것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신들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서 어제서야 비로소 의주를 가져다 보았으니, 직무를 태만히 한 죄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계사를 지은 후에 오가며 고치느라 날이 저물어서야 입계하여 겨우 비답을 받들자 이미 삼엄(三嚴)을 알렸으며, 거둥하신 후에는 반열에서 논의하고서 거듭 아뢰고 물러나왔습니다. 신들은 밤을 지새며 힘껏 간쟁하지 않아 이안을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게 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최혜길(崔惠吉) 역시 이런 뜻으로 피혐하였는데,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26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19 06/10/25(임자) / 양사가 능원군 이보를 파직할 것을 합계하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예로부터 흉역한 자로 유효립(柳孝立) 같은 자가 없습니다. 시집간 딸은 법에 있어서 연좌하지 않으나, 능원군 이보(綾原君李?)가 왕실의 지친으로서 그녀와 부부이니 대단히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보의 아내는 바로 사묘(私廟)의 주부가 되니, 어찌 역적 괴수의 딸을 사묘의 주부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능원군 이보를 파직시키고 해조로 하여금 속히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법례에 없는 바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날 고집하여 간쟁하니, 이에 그 일을 예조에 내리고, 보는 끝내 파직하지 않았다.
【원전】 34 집 303 면 【분류】 *가족-가족(家族)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인조 019 06/11/08(을축) / 옥당이 역적 유효립과 이를 용납한 능원군 이보에 대해 상차하다 》
옥당이 상차하기를, “천하에 역모를 꾀하는 것보다 악한 짓이 없는데, 유효립(柳孝立)이 은밀하게 꾀했던 흉악한 짓은 고금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에 온 나라의 신민들은 다투어 그의 가죽을 벗겨 자리를 깔고 고기를 씹어먹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런데 능원군 이보(綾原君李?)는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태연하게 미워할 줄을 모른 채 역적의 종자를 용납하여 함께 거처했으니, 이는 부부의 정(情)에 빠져 군신간의 의(義)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의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고 국법을 업신여긴 죄가 참으로 크다 하겠습니다. 가령 보가 후일 자식을 두게 될 경우, 역괴(逆魁)의 피붙이가 사묘(私廟)의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너무나 무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비록 내쫓는 일곱 가지 법이 없기는 하지만 참으로 패란(悖亂)한 행동이 있을 경우, 이혼을 주청한 자에게 허락을 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삼가 바란건대, 이러한 사리를 깊이 헤아리고 대의(大義)로 결단하시어 합계한 것을 속히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가 이 일에 대해 연일 논집하는데 즉시 윤허하지 않는 것은 예법상 내쫓을 만한 의리가 없고, 정리상 불쌍하고 용서할 만하기 때문이다. 경들은 이러한 뜻을 깊히 이해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4 집 305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 *왕실-종친(宗親) / *가족-가족(家族)
《 인조 019 06/11/19(병자) / 상이 자정전에 나아가 상참례를 받은 뒤에 주요 죄수를 복심하다 》
상이 자정전에 나아가 상참례를 받은 뒤에 인하여 주요 죄수를 복심(覆審)하였다. 승지 2인이 앞으로 나아가 옥수(獄囚)에 대해 아뢰니, 상이 대신에게 묻고, 또 좌우에게 물었다. 어떤 대신은 “아무개의 죄는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무슨 옥사는 속히 결단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이르기를,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후일을 기다리라.” 하였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는 상의 물음에 매번 “상께서 말씀하신 대로일 뿐입니다.”고 하면서, 별로 건의하는 것이 없었다. 대사간 정백창(鄭百昌)과 장령 이성신(李省身) 등이 탑전에서 합계(合啓)하여 능원군 보를 파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그가 처치하고자 하였으나 내가 차마 할 수 없어 중지시켰던 것이다. 보는 별로 잘못이 없으니 파직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대사간 정백창이 또 아뢰기를, “구공신의 적장자에게 가자(加資)하는 것을 속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 때에는 가자하지 않았지만 근세에는 본래 그에 대한 규례가 있고, 대신도 그르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시행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또 봉군(封君)의 품록(品祿)을 번갈아가면서 지급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아직(遞兒職)을 번갈아 가면서 준 것은 비록 중묘조(中廟朝) 때의 고사이기는 하지만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필시 훈신을 대우하는 도가 야박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니 이제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장령 이성신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을 이미 하유하였다.”【정백창에게 답한 것을 말한다.】 하였다. 파하려고 할 적에 백창이 아뢰기를, “옛날 조종조에는 옥의 죄수를 자주 복심하였는데, 이는 살려야 할 자는 살리고 죽여야 할 자는 죽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후로는 정원으로 하여금 즉시즉시 아뢰어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306 면 【분류】 *재정-국용(國用)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인조 019 06/11/20(정축) / 예조가 능원군 이보와 유효립의 일을 아뢰다 》
예조가 아뢰기를, “능원군 이보(綾原君李?)가 대원군(大院君)의 제사를 받드니 역적 가문의 딸이 주부가 되어 그대로 그 제사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리(情理)로 따져보아도 부당한 듯하니, 대간의 논의는 역시 사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예문에 ‘역가(逆家)의 딸과 난가(亂家)의 딸은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미혼시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부인에게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는데 역가의 딸은 그 중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에 ‘역적 가문의 출가한 딸은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니, 예문과 율에 상고하여도 모두 근거할 만한 분명한 글이 없습니다. 부부는 오륜(五倫)의 하나에 해당되는 것으로 서로 이별하는 것은 바로 인도(人道)의 변고입니다. 해조에서 감히 가벼이 결단할 일이 아니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 윤방과 좌의정 김류와 우의정 이정구가 아뢰기를, “이별한다는 말이 예법에 없다 하더라도 ‘역적 가문의 딸은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쳐야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근년에 역적 가문의 딸을 취한 자가 정장(呈狀)하여 해조에서 이별하도록 허락한 예가 자주 있었습니다. 더구나 역적 괴수의 딸에게 그대로 사묘(私廟)의 제사를 담당하도록 할 수는 결단코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데 이제 내치는 것은 불쌍하다. 강등시켜 첩으로 삼게 하여 인정과 의리가 아울러 행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보(?)는 불학 무식하여 대의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유효립(柳孝立)이 형벌을 당한 뒤에는 그의 처와 마주보고 울면서 상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간원에서 완강히 논쟁하였으므로 비로소 이 명을 내린 것인데, 이는 그의 뜻을 상할까 염려해서이다. 그런데 보는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이 종전과 같이 함께 생활하였다.
【원전】 34 집 306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왕실-종친(宗親) / *가족-가족(家族)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인조 023 08/09/27(계묘) / 주강에 《서전》을 강한 후 이귀가 ‘대원군의 추숭례’로서 다시 아뢰다 》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이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원군에 대해 이미 고(考)라고 칭하였으니, 능원군(綾原君)에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한 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조처이겠습니까. 김장생(金長生)은 예위(?位)를 숙부라고 칭하였고 조익(趙翼)은 조부(祖父)의 뒤를 이었으니 출계(出繼)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매우 무례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처음 창업(創業)한 임금은 추숭할 수 있지만 대를 이은 임금은 안 된다.’고 합니다만,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건대 이렇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충(聖衷)으로 결단하시어 속히 대례(大禮)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만이 이렇게 개탄하고 있지만 조정의 의논은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원전】 34 집 400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23 08/12/20(갑자) / 진사 이원서가 추숭할 것을 상소하다 》
진사 이원서(李元瑞)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원군(大院君)을 추숭하는 일은 예법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계운궁(啓運宮)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예를 의논한 것이 어긋나, 조금 예를 안다고 하는 자도 오히려 숙부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이어 유생이라 하는 자들이 종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모든 사람들이 이에 부화 뇌동하여 한입에서 나온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이에 비록 한두 명의 훈신이 예경에 근거하여 의논을 폈으나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았고, 전하께서도 ‘나는 조부가 있음을 알 뿐 아버지가 있는 줄은 모른다.’고 하시고, 또 ‘앞으로 이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비록 전하의 효성이 미덥지 못하다 해도 가합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이 함부로 그릇된 예를 주장하여 전하께서 삼년상을 지내지 못하게 하니, 이는 잘못된 견해와 옳지 못한 주장으로 전하를 오도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빗나간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나 바른 주장을 사설이라고 배척하여 성대한 조정을 하나의 아비 없는 나라로 만들 것이니, 신은 통탄합니다. 삼가 이귀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살펴보건대, 종이에 가득한 온화한 말씀은 모두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원에서는 도리어 ‘임금을 지극히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고자 한 것이니, 비답을 거두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총명을 어찌 이다지도 심하게 가리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른바 지극히 올바르다는 말은 공자가 순 임금에 대하여만 쓰신 말인데, 순임금은 그의 아비인 고수(줥첳)를 천하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원에서는 아비를 아비로 대접하지 못하게 하면서 지극히 올바르다고 하니, 어찌 당대만의 죄인이겠습니까. 당 현종과 같은 임금으로도 그의 친부인 상왕(相王)을 받들어 천자가 되게 하였고, 가정 천자(嘉靖天子) 역시 그의 친부를 천자로 추존하였습니다. 이는 곧 부모를 높이는 도리를 제대로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게 한 경우가 있습니다. 성종께서 덕종을 추존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직 전하만이 친부를 추존할 수 없단 말입니까. 또 제사를 주관하는 점에서 보면 대원군 신주에는 고(考)라 쓰고 방제(傍題)를 쓰지 않았으니, 이는 주관자가 바로 전하인 셈이며, 계운궁의 신주에는 비(쯼)라 쓰고 능원군(綾原君)으로 방제를 썼으니, 이는 능원군이 주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한 부모에 대해서 임금과 신하, 형제와 아우가 나누어서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임금이 고비(考쯼)라고 칭한 신주를 오래도록 여염집에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먼저 뜻을 가로막은 신하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속히 대례를 결정하여 인륜을 밝히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원전】 34 집 409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인조 024 09/05/08(신사) / 부제학 최명길이 추숭을 반대하며 파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부제학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이번 추숭하는 일이 성상의 어버이를 높이는 지극한 정에서 나왔으나, 예에 분명한 글이 없고 일이 의리를 일으키는 데 관련되어 조정의 의논이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청하라는 명이 먼저 내리니 일의 체모로 볼 때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의 마음에도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논집하는 본의는, 전하로 하여금 남의 후사(後嗣)가 된 것으로 자처하게 하여 대원군의 신주에는 아버지로 칭하되, 능원군(綾原君)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의 후사가 되었으면 생부를 아비라고 칭할 수 없고, 아비라고 칭하였으면 남의 후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비라고 칭하면서 아우로 하여금 그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예에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 때 의리를 일으켜서 정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후한 쪽을 따라 의리를 일으켰더라도 오히려 의심이 갈 것인데, 의리를 일으키면서 박한 쪽을 따랐으니, 어찌 미안한 점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첫번째 신이 의심되는 점입니다. 대원군의 신주에는 고(考) 자만을 쓰고 방제(傍題)는 쓰지 않았으며, 계운궁(啓運宮)에는 현비(顯쯼)라 쓰고 능원군으로 방제를 썼습니다. 방제를 쓰는 것이 옳다면 대원군에게는 어째서 쓰지 않았으며, 방제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계운궁에게만 쓴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은 배운 것이 적어 예문(禮文)을 잘 알지 못하지만, 고비(考쯼)의 신주를 쓰는 데 다르게 쓸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다만 한 때의 승리만 취하려 하여 천고에 웃음거리를 끼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예에 제후는 5묘라 했으니 곧 태조와 고조 이하 사친(四親)이 이것이며, 세실(世室) 이외에는 친진(親盡)이 되면 순번대로 조천(?遷)하는 법입니다. 지금 대원군을 이미 아버지라 일컬었기 때문에 종묘에 있어서는 선조가 할아버지가 되고 명종이 증조가 되고, 인종은 방친이기 때문에 백증조(伯曾祖)라고 일컬으나 댓수를 세는 데는 들어가지 않고, 중종이 고조가 되고 성종이 5세조가 됩니다. 그러나 종묘의 예는 일의 체모가 매우 중대하여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계해정난(癸亥靖亂)의 처음에 열성의 속호(屬號)를 이렇게 고쳤는데, 성종은 여전히 그대로 두어 고치지 않고 고조로 칭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사당 속에 두 고조가 있는 것으로, 불가하지 않습니까? 흑자는 ‘고조는 원조(遠祖)의 통칭이다.’라고 합니다. 신도 전기(傳記) 중에서 보았는데, 이는 심존중(沈存中)의 말입니다. 심존중의 이 말은 상복(喪服)의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말한 것으로서, 5세조가 친진(親盡)이 되었지만 혹 살아서 섬겼을 경우에는 그 복(服)을 고조의 복에 의거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니, 주장하는 뜻이 조금 다릅니다. 또 원조(遠祖)는 동일한데 세조(世祖) 이상은 모두 속호(屬號)가 없고 성종에게만 고조라고 일컬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신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법도를 어기고 전례(典禮)를 해치는 것으로 후세에 본보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조정에서는 먼저 처치할 방법은 강구하지 않고, 전하로 하여금 선조(先祖)를 받들고 선세(先世)를 추모하는 데 있어서 결례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전례가 이미 정하여져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니, 여론이 마구 일어나고 전하의 뜻을 돌리기 어렵게 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들으니, 《춘추》의 법에 ‘아버지는 지자나 서자의 집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애당초 사황손(史皇孫)을 도고(悼考)라고만 칭하고 원(園)을 설치하여 입후(立後)를 하지 않은 채 관(官)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을 때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황(皇)자를 첨가시키고 침묘(寢廟)를 세워 소목의 차례를 올린 뒤에 비로소 비난하는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또 광무제의 초년에 사친(四親)의 사당을 낙양에 세워 위로 조통(祖統)을 계승하니 나라 사람들이 비난하였고 장릉(章陵)으로 옮겨 그곳 군현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도록 하니 선유(先儒)들이 예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제와 광무제의 일은 변례(變禮)인 듯하나, 실제로 방계(傍系)로 이었으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더구나 전하는 한 선제나 광무제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그런데 고(考)로 칭한 신주를 여염집에 강등하여 두고 지자를 시켜서 봉사(奉祀)하게 하여, 숙부(叔父)로 칭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과 조금도 차별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 뜻이 비록 잘못된 일을 미리 막고 예에 있어서 검소하게 하고자 한 것이지만, 어찌하여 조금도 참작하지 않고 선제의 초년과 광무제의 말년의 일을 본떠 행하신단 말입니까? 예를 의논한 지 9년이 지나 노사 숙유(老師宿儒)들이 이리저리 찾고 광범위하게 인증하기를 지극하게 하였지만 모두 오늘날의 경우에 적절한 증거가 아니고, 다만 《예기》의 ‘사(士)의 예로 장사지내고 제후의 예로 제사지낸다.[葬以士祭以諸侯]’는 한 문장만이 가장 밀접합니다. 신이 종전에 주장한 바도 다만 이 구절의 내용입니다. 근자에 빈청의 계사에서도 이 말을 들어 증거를 삼았는데 거의 근사한 듯합니다. 다만 이 문장 중에서 ‘사의 예로 장사지낸다.’는 한 조목만을 끄집어내어 논쟁하고 주장하는 바탕으로 삼고 ‘제후의 예로 제사지낸다.’는 조목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인의 교훈을 반은 얻고 반은 잃은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노릇입니다. 지난해 경연에서 이 예에 대하여 논의가 미치자 대신들이 2묘가 된다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이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별묘(別廟)의 제도는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주(周)나라의 강원묘(姜源廟)와 한나라의 여(戾)·도(悼) 두 원(圓)과 동한의 장릉(章陵) 사사(四祠)가 모두 이것입니다. 그리고 당나라 때에는 후비(后妃) 한 사람만을 종묘에 배향하고 나머지 계후(繼后)는 별묘에서 제사지냈고, 무소왕(武昭王)은 당나라 시조이기 때문에 별도로 흥성묘(興聖廟)를 세웠지만 후세에 두 개의 사당이라는 것으로 비방하는 자가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조에도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사당이 있습니다. 국군(國君)의 사자(嗣子)도 사실(私室)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는데, 더구나 임금의 부모이면서 예법으로도 마땅히 복을 입을 분에 대하여 지자의 집에서 강등하여 제사를 지내어 춘추의 의리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2묘가 된다고 의심하는 논의를 하는 사람이 첫째는 ‘위로 조종(祖宗)을 누른다.’ 하고, 둘째는 ‘종통(宗統)을 방해한다.’ 합니다. 신이 그 말의 엄격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군신 부자의 사이에 하나라도 그 도리에 미진함이 있어서 신리(神理)에 유감이 있게 하고 후세에 비웃을 소지를 남긴다면, 이것은 자기를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것이요 또 하늘을 속이는 것이니, 인인 군자(仁人君子)가 차마 할 바가 아닙니다. 송 광종(宋光宗) 때 조여우(趙汝愚)가 세력을 잡고는 희조(僖祖)를 조천(?遷)하여 태조의 위(位)를 바로잡아 동향(東向)시키고자 하였는데, 일시의 사대부들이 모두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자만은 반대하여 말하기를 ‘태조를 높이어 동향하게 하는 것은 의(義)요, 희조(僖祖)를 받들어 동향하게 하는 것은 은(恩)이다. 의는 천하 신자(臣子)들이 오늘날 원하는 바요, 은은 태조황제가 당시에 먹었던 마음이다. 의를 높이고 은을 낮추어 천하 신자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의를 낮추고 은을 높여서 태조황제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예가 희조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을 보답하는 데 은과 의를 서로 참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주자가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꼭 강쇄(降殺)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군부(君父)의 친친(親親)하려는 지극한 정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별묘(別廟)를 두는 것이 창시하는 일은 아닙니다. 조선(祖先)과 종통(宗統)에 무슨 혐의와 해가 있다고 시행하지 않습니까? 근래에 일종의 새로운 주장이 있으니, 《의례》의 공자(公子)를 태조(太祖)로 하지 않는다는 말과 주자의 종묘협향도(宗廟?享圖)를 인용하여 대원군을 묘향(廟享)할 수 없다는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의례》의 말은 처음 임금에 봉해진 경우의 일이요, 주자의 종묘협향도는 형제 소목의 차례에 관련된 것으로, 지금의 예와는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진실로 호승지심을 버리고 전문(全文)을 살펴 주된 뜻을 파악한다면, 신의 말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성종은 우리 나라의 성군으로 태평성대를 이루어 깊은 은택을 끼쳤으니, 죽더라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차례가 되어 세실에 올려 부제(쯊祭)할 경우라 하더라도 함부로 조천(?遷)을 거론할 수 없으며, 오늘의 일은 또 상례(常例)와는 다릅니다. 성상의 입장으로 볼 때는 5세조이나 종묘의 입장으로 볼 때는 4대입니다. 친진(親盡)하면 조천하는 것이 예의 상도(常道)이고 변례(變禮)에 후한 것을 따르는 것이 사체의 권도(權道)입니다만, 고조가 아닌데 고조로 칭하면 조선(祖先)을 속이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다시 처리하게 하여 속호(屬號)를 고쳐서 친소(親疏)의 순서를 구별하고, 이어서 소목을 배열하여 4묘(廟)의 수를 갖추면서 별도로 축사(祝辭)를 지어 그 이유를 밝게 고해야 됩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처치가 분명하고 사체가 구차스럽지 않아 오르내리는 혼령이 비로소 편안히 흠향할 것입니다. 만일 혹자의 말과 같이 통털어 고조라고 칭할 경우에는, 세실(世室)의 각위(各位)도 모두 이 예에 의거하여 호칭해서, 존조(尊祖)의 예가 차이가 없게 해야 될 것입니다. 추존의 예는 중고(中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라나 상나라 이전에는 본래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주나라가 삼대(三代)를 추존하는 것은 왕적(王迹)이 시작된 바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감(祖紺) 이상의 제사에는 별면(쯁冕)을 쓰는 것이 선왕의 유제(遺制)로, 존조의 도가 실제로 이 추존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의논하는 바는 천고의 변례(變禮)로서 고금의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한 왕조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니, 독서를 하고 이치를 궁구해서 상황에 따라 잘 변통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 문제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는 것은 후세의 잘못된 예문(禮文)에서 나온 것이요, 조정 신하들이 논쟁하는 것은 실로 삼대의 옛 제도입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차라리 후하게 하고 말겠다.’는 것에 불과하고 조정 신하들이 바라는 것은 전하를 우(禹)임금이나 탕(湯)임금으로 만들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이 혹 지나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뜻은 모두가 공평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거조는 화평을 잃어 훈구 대신을 일반 관원처럼 함부로 체직하거나 면직시키고, 경악 유신에게 노하시는 위엄을 보여 나가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며, 예관(禮官)에게 분부를 내리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게 하셨습니다. 어째서 전하의 차분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노여움을 조금 거두어 심기를 편안히 하고서 대신들을 불러들여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하여, 이번 일이 지당한 곳으로 귀결되도록 하여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은 여러 번 두터운 격려를 받아 감히 사직하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쌓인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니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예를 안다고 하지만 평생 동안 글을 읽어 선비로 자처하는 자가 부모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른다. 친구가 상을 당하면 친소를 막론하고 모두 가서 조문하면서 계운궁(啓運宮)의 상에는 백관이 모두 모여 곡하지도 않았으며, 임금이 궐내에서 성복(成服)을 하였는데도 밖에서는 길복을 입었다. 온 조정이 존중하는 대신들이 김장생(金長生)의 ‘대원군은 숙부로 칭함이 마땅하다.’는 말을 가지고 지금껏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라고 이르니, 이대로 간다면 신하는 신하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않은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이와 같이 사리에 어둡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끝내 깨달아 고칠 리가 없기 때문에 중국에 주문하여 시비를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과인을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른다고 보아서 경위에 틀리는 말과 근거 없는 말을 날마다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두둔하는 자가 있다.’ 하고, 또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다.’고 하니, 매우 한심스럽다. 유생 이지항(李之恒)·이행우(李行遇) 등이 어떤 괴물인지는 모르겠다만, 따르지 않는 제유(諸儒)들을 노복 다루듯이 마구 몰아쳐 강제로 모아 놓고 무뢰한 말로 상소하면서 온 나라의 공론이라고 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경의 차자 가운데 ‘이미 고(考)라고 칭하였으면 남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칭하면서 아우로 하여금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예에 근거가 없다. 이것은 한 때 의리를 일으켜서 결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의리를 일으켰을 경우 후한 쪽을 따르더라도 오히려 의심이 갈 것인데, 의리를 일으키면서 박한 쪽으로 따랐으니, 어찌 미안한 점이 없겠는가.’라고 한 말과 ‘한 사당 가운데 두 고조는 불가하다.’고 한 말 등은 모두 소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이기기를 좋아하고 잘못된 일을 우기는 무리들은 이것을 보고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기》 중의 ‘사(士)의 예로 장사지낸다.’는 조목을 항상 끄집어 내어 고집하는 단서로 삼으면서 제사지내는 조목은 전연 이해하지 못하니, 차자 중의 ‘그 반은 얻고 반은 잃었다.’는 말이 과연 옳다. 내가 불학무식하여 신료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참으로 탄식스럽다. 경이 굳이 사직하려는 것은 지나치니 속히 나와 행공하라.” 하였다.
【원전】 34 집 426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조 024 09/05/26(기해) / 헌부가 능원군 이보가 금리의 친족을 매질한 것으로 파직을 청하니, 추고하라고 하다 》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여러 궁가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작폐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제 본부에서 음사(淫祀)하는 무당을 잡아왔는데, 능원군 이보(綾原君李?)가 궁노들을 풀어 금리(禁吏)의 어미와 처 및 장모까지 잡아다가 함부로 매질을 하였습니다. 이런데도 징계하지 않으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수족을 놀릴 수가 없게 되고 국가의 법령도 이로부터 무너질 것이니, 능원군 이보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431 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인조 024 09/05/28(신축) / 헌부가 능원군 이보는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서리의 어미와 처를 풀어주지 않은 것으로 파직을 청하다 》
헌부가 아뢰기를, “능원군 이보는, 전번에 대간들의 논의가 발한 뒤에 상께서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마땅히 문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서 두렵게 여겨 뉘우쳐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더욱 성을 내어 서리(書吏)의 어미와 처를 고문하면서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보가 신분이 귀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신하일 뿐인데, 나라의 기강이 달린 문제를 어찌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심상히 추고하고 말 것이 아니니 파직하소서. 그리고 궁노가 방자하게 작폐한 것은 정상이 더욱 가증스러우니, 일을 맡은 숙노(?奴)도 유사로 하여금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보는 파직할 필요 없다.” 하였다.
【원전】 34 집 431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인조 026 10/02/26(갑오) / 상이 추숭 절차를 독촉하자 예조에서 그 절차를 아뢰다 》
상이 하교하기를, “추숭한 후에는 응당 주청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해조에서 아직 계품하지 않으니 매우 태만하다. 예조 당상을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추숭하는 일을 의논해 정한 후 조정에 세 종류의 의논이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전번 성교(聖敎) 가운데 단지 존호만 올리라는 명이 있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호를 올리기만 하면 될 뿐 주청할 필요가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중국에 품(稟)하지 않고 사사로이 존호를 더하면 참람한 데 관계되니, 주청사를 빨리 차출해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성묘조(成廟朝)의 예에 의하여 먼저 왕호(王號)를 올리고 뒤따라 주청해야 한다.’ 하여, 신들이 그 취사할 것을 결정하지 못해 《실록(實錄)》을 상고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처치하고자 하였는데, 삼가 엄교를 받고 보니 몹시 황공합니다. 주청사는 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게 하고, 문서는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미리 찬정(撰定)하게 한 다음 한편으로는 존호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주청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제 대례(大禮)가 곧 이루어지려 하므로 도감을 설치할까 합니다. 존호를 올린 후 신주(神主)를 만들고 묘(廟)를 세우는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해야 합당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람의 도리로는 친(親)을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미 그것이 불가함을 알았다면 하루도 마음이 편안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책보(冊寶)와 의장(儀仗)을 작성하는 데 반드시 몇 달이 걸릴 것이니 그전에 별도의 처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상고(上古) 때 사제(士祭)를 제후(諸侯)의 예로 한 것에 의해 대원군(大院君)의 신주에 황(皇) 자를 가하고, 계운궁(啓運宮)의 신주는 현(顯) 자를 고쳐 능원군(綾原君)이 제사를 받든다는 칭호를 삭제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되 먼저 그 사유를 고하며, 공해(公?) 가운데서 넓은 곳을 가려 임시로 봉안할 장소를 삼고 내달부터 시향(時享)과 절전(節奠)에 모두 왕자(王子)의 예를 써 도감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욕례(縟禮)를 하면 마땅하게 될 듯합니다.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474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종사(宗社) / *외교-명(明)
《 인조 026 10/03/07(갑진) / 추숭 때의 신주를 쓰는 형식을 논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제주(題主)를 고칠 때 이미 황(皇) 자를 써서 전하께서 그 제사를 주관하면 사체가 스스로 사가(私家)의 제주 예와 뚜렷하게 다릅니다. 종묘 열성(列聖)의 신위(神位)처럼 방제(傍題)를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금 인빈(仁嬪)에게 제사를 일시에 지내라는 명이 계신데, 국가의 사전(祀典)에는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있고 예제(禮制)가 매우 엄해 정(情)에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 제후(諸侯)의 예를 복(服)이 없는 사친(私親)에게 아울러 행하겠습니까. 다만 신주가 같은 실(室)에 있어 고축(告祝)하는 일을 아주 폐해도 미안하니, 우선은 예를 마치기를 기다린 후 능원군(綾原君)으로 하여금 스스로 축사(祝辭)를 하도록 하고 인하여 고제(告祭)를 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의 전교에 의해 병행하라.” 하였다. 헌부가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제주를 고칠 때 축문의 두사(頭辭)를 전례에 의해 그대로 써서는 타당치 못합니다. ‘효자(孝子) 국왕(國王) 신 휘(臣諱)’라고 칭해야 의당하며 호칭에 속하는 것에도 아울러 황(皇) 자를 더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475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조 026 10/04/21(무자) / 예조에서 추숭한 대왕의 영정을 봉안하는 일을 상의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영정을 봉안할 곳을 정하는 일에 대해 대신과 상의하였고, 성묘(成廟) 때의 일을 상고하였습니다. 신숙주(申叔舟)의 《추모록(追慕錄)》에 ‘계사년 가을에 사당이 완공되었다. 우의정 강봉조(姜奉祖)에게 옛 사당에 가서 어진(御眞)을 모셔다가 새 사당의 후전(後殿)에 옮겨 봉안하라 하고, 신(臣) 신숙주에게 신주(神主)를 모셔다가 새 사당의 정전(正殿)에 봉안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의묘(懿廟) 때의 일입니다. 또 《실록》을 상고해 보건대, 을미년 10월 12일 회간 대왕(懷簡大王)을 부묘(쯊廟)하고 의묘를 봉안한 절목에 ‘위판(位版)을 의묘에 봉안하고 영정과 시고책(諡誥冊)을 의묘 영전(影殿)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덕종의 신주는 이미 부묘하였으나 연은전(延恩殿)은 이때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묘에 위판을 봉안하게 하여 문소전(文昭殿)과 같게 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덕종의 영정은 시종 별전에 봉안되었고 제사를 지낸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문소전의 일을 들으니, 여러 왕들의 어진을 모두 상자에 넣어서 각실의 위판 곁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과거 제관(祭官)이었던 영의정 윤방(尹昉)의 기억으로는 대개 이러하나 역시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또 봉상시의 늙은 수복(守僕)에게서 들으니, 문소전 뒤에 선원전(璿源殿)이 있어서 선원록(璿源錄)과 어진을 모두 여기에 봉안하였다고 하나, 그말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영숭전(永崇殿) 등의 어진을 모두 벽에 걸어놓고 삭망(朔望)마다 분향하며 육명일(六名日)에 제사를 지내나, 문소전과 의묘의 영정을 상자에 넣어 두는 것은 한 전각 안에서 두 번 제사지내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의 영정을 능원군(綾原君)의 사저에 계속해서 모셔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숭은전(崇恩殿)에 옮겨 봉안해야 하나 전내에 봉안할 곳이 없으니, 별도로 상자 하나를 만들어 영정을 넣어두고 신주를 옮기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대신(大臣) 한 사람을 보내서 책보(冊寶)를 둔 곳에 봉안하도록 하고, 본전(本殿)의 참봉으로 하여금 삭망마다 살피고 장마 때에 햇빛을 쬐게 하면 보관하는 데 손상될 염려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혹 전각의 곁에 별도로 온돌을 놓고 때때로 불을 땐 후에야 장마 걱정이 없다고도 합니다. 선왕을 모시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대신도 그 가부를 결정할 수 없어서 감히 이와 같이 아룁니다.” 하니, 전각 뒤에 별도로 온돌 방을 만들어 봉안소로 삼으라고 답하였다.
【원전】 34 집 481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조 026 10/05/03(경자) / 국릉이 있는 고을의 승격에 대해 예조와 이조가 논란하다 》
예조가 아뢰기를, “국릉(國陵)이 있는 곳과 왕후의 본관은 당연히 읍(邑)으로 승격시켜야 하며, 능원군(綾原君)은 주상의 친동생이므로 당연히 대군(大君)으로 올려야 하니, 하비(下批)를 고쳐야 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조사하여 처리케 하소서.” 하고, 이조가 아뢰기를, “국릉이 있는 곳은 당연히 승격시켜야 하겠으나, 고양(高陽)과 풍덕(豊德)은 본래 모두 군수(郡守)가 있던 곳으로 국릉이 있기 때문에 승격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주(驪州)는 영릉(英陵) 때문에 승격시켰으나, 이는 본주 목사를 헌관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과 상의하소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윤방 등이 아뢰기를, “고양과 풍덕을 승격시킨 일이 없다면, 오직 해조가 옛 전례를 살펴서 처리하는데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4 집 483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인조 026 10/05/04(신축) / 능원군과 능창군을 각각 대군으로 올리다 》
능원군 이보(綾原君李?)를 능원 대군으로, 고(故)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을 증직하여 능창 대군으로 삼았다. 이전은 장릉(章陵)의 셋째 아들로서 거동과 용모가 준수하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무고를 당해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갖은 곤욕을 받았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니, 온나라 사람들이 원통해 하였다. 【원전】 34 집 484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인물(人物)
《 인조 026 10/05/04(신축) / 능원군과 능창군을 각각 대군으로 올리다 》
능원군 이보(綾原君李?)를 능원 대군으로, 고(故)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을 증직하여 능창 대군으로 삼았다. 이전은 장릉(章陵)의 셋째 아들로서 거동과 용모가 준수하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무고를 당해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갖은 곤욕을 받았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니, 온나라 사람들이 원통해 하였다.
【원전】 34 집 484 면
《 인조 027 10/11/11(을사) / 상이 능원 대군에게 노비를 내리다 》
상이 봉림 대군(鳳林大君)의 예에 따라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에게 노비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원전】 34 집 505 면
《 인조 028 11/04/01(임술) / 능원 대군이 봉례의 인접을 거두기를 청하다 》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가 차자를 올려 봉례(奉禮)가 인접(引接)한다는 명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유래한 구례이니 경솔히 폐할 수 없다. 경은 사양하지 말라.”
【원전】 34 집 519 면
《 인조 037 16/07/25(병술) / 비국이 능원 대군을 탄일의 상사에 충원할 것을 청하다 》
비국이 능원 대군(綾原大君)으로 탄일(誕日)의 상사(上使)에 충원하여 보낼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대군은 병이 있어 멀리 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원전】 35 집 29 면
《 인조 039 17/10/16(기해) / 파루 후에 임금이 문병을 받다 》
파루(罷漏) 후에 정원이 인평 대군(麟坪大君)·능원 대군(綾原大君)·좌상·우상 및 도승지 이기조(李基祚)가 모두 궐문 밖에 와 있다는 뜻을 아뢰니, 문을 열고 모두 불러 들이라고 하교하였다.
【원전】 35 집 73 면
《 인조 045 22/03/03(신묘) / 능원 대군 이보에게 손님 접대할 집을 지어주라고 하교하다 》
상이 하교하였다.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의 집에 손님을 접대할 곳이 없다고 하니 인경궁(仁慶宮)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여 옮겨다가 지어 주도록 하라.”
【원전】 35 집 174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주생활-가옥(家屋)
《 인조 045 22/03/16(갑진) / 인질 자제로 인해 외방에 재물을 요구하는 것 등에 관한 응교 정태제의 상소문 》
응교 정태제(鄭泰齊)가 상소하기를, “공경의 집들이 그 자제를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인해 외방에 재물을 요구하여 실려오는 뇌물이 답지하고, 묘당의 위에는 하는 일 없이 몰려다니고, 대신을 대우함에 있어서 예모와 존경이 부족하고, 동산에서 유람하시기 위하여 누각을 계속 세우고, 궁중이 엄중하지 못해 방납(防納)이 뒤섞여 혼란하고,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객청(客廳)을 너무 사치스럽게 짓고, 토목의 역사가 해마다 계속되어 원성이 자자하니, 마땅히 몸을 닦고 반성하여 모범이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살펴보고서 근심하고 아끼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진달한 일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여 살펴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고,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국사가 위급하고 민생이 장차 다 죽게 되었으니 나라를 다스리고 민생을 구제할 계책을 세울 마음이 그 누군들 없겠습니까마는 정태제가 홀로 강개한 마음으로 상소하였는데,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습니다. 공경의 자제를 저쪽에 인질로 들여보내는 일로 외방에 재물을 요구하여 이 때문에 백성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했는데, 신들은 모두가 인질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이 글을 볼 때 자신도 모르게 두렵고 부끄러운데 어찌 능히 스스로 변명하겠습니까. 청컨대 법부(法府)로 하여금 적발하여 추고, 치죄하게 하소서. 동산을 꾸미고 궁액(宮掖)이 방납하는 일은 모두 말세에 혼란이 일어날 바탕인데 어찌 성명이 위에 계시는 상황에서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사실이 없으면 더 노력하시고 있으면 단호히 금단하셔야 하니, 이는 다 성상께서 마음을 한번 고치시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능원 대군 집의 건축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성명의 혈족을 우애하시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이러한 때에 공사를 일으켜 목재와 석재가 길가에 널려 있다는 것은 매우 천재를 삼가고 백성의 고충을 돌보시는 뜻이 아니니, 양사가 아뢰고 근시(近侍)가 말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으며, 능원 대군 또한 어찌 스스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 말단에 논한 것은 더욱 긴요한 말이니 어찌 정사에 보탬이 작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는 채납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 이어 하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인질 자제의 노자거리를 충분히 주게 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5 집 174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왕실-종친(宗親) /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인조 045 22/04/18(을해) / 정언 조복양이 능원 대군의 객청 지어주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다 》
정언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저번에 삼가 능원 대군(綾原大君) 집의 객청(客廳)을 지어 주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신은 잘못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성상의 우애를 표하시는 지극한 뜻을 이해하고 감히 논열(論列)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따로 석재를 캐는 장소를 개설하여 날마다 수레로 실어 날라 그 행렬이 도로에 줄을 잇고 있다 하니, 이처럼 백성은 궁하고 재물은 고갈된 날을 당하여 천재와 전염병까지 겹치어 온 나라가 시름과 원망에 쌓여 있고 군신 상하가 크게 놀라며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 어찌 대군의 가옥을 잘 짓기 위하여 사람을 부리고 역사를 일으킬 때입니까. 빨리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전】 35 집 180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인조 045 22/05/05(임진) / 윤순지·이행우·조석윤 등이 정사를 걱정하여 연명하여 아뢰다 》
도승지 윤순지(尹順之), 좌승지 윤강(尹絳), 우승지 유철(兪?), 좌부승지 이행우(李行遇), 동부승지 조석윤(趙錫胤) 등이 연명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여서, 위와 아래가 서로 간격이 없는 것이니, 재앙과 상서와 길하고 흉함의 조짐이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재앙을 소멸하여 복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는 다만 임금의 은미한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옛 성왕들이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여 몸을 움츠려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였고, 감히 성실치 못한 겉치레만으로 재변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재앙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문(天文)이 경계를 보이고, 지도(地道)가 재이를 알리며, 요사스런 사람과 괴이한 물건 등의 이상한 것들이 비록 거듭거듭 나타나도, 이것은 옛사람이 이른바 임금의 몸에 즉시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피부에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으레 거기에 익숙해져 보통으로 여기고 경계하며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질(疫疾)이 해마다 온 나라에 두루 퍼짐으로써 백성들이 많이 사망하여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지금 또 기근이 거듭되던 끝에 큰 가뭄이 들어서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되고 씨앗도 뿌리지 못합니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우환이 눈앞에 닥쳐왔으니, 백성도 없고 나라도 없게 될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입니다. 절박한 재해가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편안히 세월이나 보내면서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마는, 성상께서 무슨 허물이 있기에 하늘의 마음이 불편하여 이처럼 극심하게 재해를 거듭 내린단 말입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를 보호해 주는 하늘에 대해서는 어찌할 방도가 있지만, 나를 버린 하늘에 대해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하늘이 우리 전하께 경고한 것은 잘 타일러 명령하는 따위가 아니니, 또한 전하를 매우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전하께서 허물을 들어 자신을 책망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돌려 기쁨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하늘의 노여움에 응하는 방도가 오히려 겉치레와 사소한 절차에만 구구하게 힘쓰고 자신을 반성하여 책망하는 데는 미진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제사를 두루 거행하여도 정성이 신명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죄인 장부를 깨끗이 정리해도 조화의 기운이 감응되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매서운 바람과 뜨거운 햇볕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한여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기후가 매우 처참하나, 하늘의 마음은 멀기만 해서 감동하여 마음을 돌릴 날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공적인지 사적인지, 경건한지 게으른지 자신을 반성하여 살펴서, 만일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일이라도 하늘을 어겨 재앙을 부른 것이 있다면, 통렬하게 책하고 개과 천선하기를 어찌 또한 마음으로 맹세하여 마치 탕(湯)임금이 여섯 가지 일로 자신을 책망해서 당장에 하늘의 감응을 불러왔던 것과 같이 하지 않으십니까. 혹 전하께서 깊은 밤 한가한 시간에 시험삼아 한 번이라도 마음을 맑게 하고 반성하신다면, 반드시 두려운 마음으로 뉘우쳐 깨닫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임금을 바르게 하고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말을 어찌 입다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이와 같이 운수가 매우 좋지 않은 때를 만나 대단히 경계하고 격동하고 진작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쇠퇴한 정사를 일으키고 고난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기가 날로 꺾이고 행동거지가 날로 쇠퇴해지며, 안일한 습관은 점차 고질화되고 사사로이 총애하는 문이 크게 열립니다. 전하가 계신 궁전은 막히고 멀어서 전하께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이 두절되며, 재물은 사치의 풍조에 의해 고갈되고 백성은 가렴주구에 의해 곤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위아래가 모두 눈앞의 안일만을 도모하여 서로 다투어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형세가 어찌할 수 없는 이런 때를 당해서 할 수 있는 일조차 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어찌 하늘이 돌보아서 이변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시험삼아 요즘에 있었던 한두 가지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집을 짓는 일은 대단히 남의 이목을 경악케 하고 인심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왕실의 가까운 친척은 왕실과 더불어 기쁨과 걱정을 같이하는 것인데, 그 굉장하고 사치스러운 집을 하필 이 시기에 지으면서, 더구나 관(官)을 임명하여 감독을 시키고 국력을 수고롭혀 소비하여, 재변이 이토록 참혹한 때에 별로 긴급하지도 않은 일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전하가 우애하시는 방도로도 의당 이런 일을 우선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지만, 대군의 겸손한 마음에 있어서도 어떻게 마음 편히 받아들여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여론이 매우 불평스럽고 답답하게 여기고 헌부의 논계도 날로 격해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논계를 하고 한편에서는 그대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목재와 돌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이엉차’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치 공론과 다투는 듯하고 하늘의 재변과 겨루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됩니다. 전하께서 우애하시는 일이 다만 위아래 사람의 허물만 더해지고 천심과 인심을 잃게 될까 염려되어 삼가 매우 애석히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선뜻 깨달으시어 당장 그 일을 중지시켜서 아래로 뭇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위로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지 않으십니까. 황익(黃瀷)이 고변한 공은 그 경사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니, 그에게 부귀로 보답함을 진실로 아낄 것이 아니지만, 조정의 소중한 관직은 절대로 가벼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臺臣)들이 논계하여 고집하는 것은 곧 공정한 국론인데도, 전하께서 끝까지 굳게 거절하시어 조정이 혼잡하게 하시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탄식합니다. 왜 전하께서는 이처럼 사사로운 생각에 얽매여 남의 말을 들은 체하지도 않으신단 말입니까. 오늘날 백성들의 곤궁하고 파리함에 대해 말을 하자면 기가 막힐 지경이며, 앞으로의 일은 더욱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윗사람에게서 덜어내어 아랫사람에게 보태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곧 백성의 살을 베어다 자기 배를 채워서 자신만 배부르게 편히 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요,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받들지 않는다.’ 하였으니, 자신을 검약하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해주는 성스러운 임금의 마음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운 때에 어찌 감손시키고 절약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제향(祭享)에 진공되는 물품에 대해서는 진실로 신하된 자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토산품이 아니어서 물자와 인력을 많이 소비하게 되는 물품이나, 진공하는 데는 그리 합당치 못하면서 백성들에게 피해만 끼치게 되는 물품에 대해서는 어찌 줄여서 변통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전하가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 옛날 고생하시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깊은 연못 가에 서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욱 가지시어, 검소함을 몸소 실천하시고 절약하는 것을 힘써 따라서, 일상생활에 절실히 필요하지 않는 모든 사치스런 음식·의복·거마 같은 것으로서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은 하나하나 제감하고, 아래로 낭비에 관한 각사(各司)의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절약하고 감축하여 곤궁한 백성에게 실지 혜택을 베푸신다면 어찌 인심을 수습하고 천심을 감동시키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에서 산이나 바다를 떼어받는 폐단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마는, 요즘 둔전(屯田)의 해가 더욱 심하고, 그 가운데서도 훈련 도감과 수어청(守禦廳)이 다른 아문보다 심합니다. 원래의 결수(結數)가 날로 축소되어 세금 징수는 줄어들고, 도망친 자가 떼를 이루어 군인들의 수효는 부족해지며, 백성이 토지를 빼앗겨 이웃 마을까지 소요가 일게 되며, 이익은 개인 집으로 들어가고 원망은 조정으로 돌아가니, 이런 일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원망을 풀고 나라의 계책을 완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에 헌부에서 논한 것이 실로 병통을 적중시킨 말이었으나, 끝내 쓰이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이 일을 개혁하는 데에 인색하신 것은 도대체 무슨 뜻에서입니까? 엄격하게 조사하고 밝혀내어 모조리 혁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은 팔도가 다 같으나, 몹시 급급하고 허둥지둥하는 상황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지역이 더욱 심합니다. 국가에서는 그들을 마치 다른 나라 사람이 살찌거나 파리한 것처럼 보고 있습니다.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 눈썹에 불이 타오르는 듯한 황급한 상황을 구해 주지 않고 있으니, 어느날 갑자기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버린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전일 재신의 상소에서도 이 일을 진술하였으나, 그것은 본도에서 계획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본도에서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 하더라도 결국은 본도 백성들의 힘에서 나올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구제하는 본의이겠습니까. 신들의 망령된 생각은 이러합니다. 상께서 특별히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내수사(內需司)에 바치는 공물을 면제해 주시고, 여러 아문에서 베를 거두어 상납하는 것도 적당히 헤아려 제급(題給)해서 1∼2년 동안의 경비에 보충하도록 하신다면, 백성들의 힘이 조금 펴지고 인심이 감격하여 기뻐?纛막館?, 모두 흩어질 걱정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 사신 지공의 지나친 제도와 볼모들의 분수에 넘치는 물품 청구도 쇠잔한 백성들을 침해하여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요인입니다. 진실로 엄격하게 법령을 세워 여러 고을에 거듭 밝혀서 일분의 폐단이나마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관(武官)의 수령들은 품관(品官)이 잡다한데다, 공사간에 당연히 징수해야 할 물품 이외에 또 자신을 살찌우는 일이 많습니다. 백성들이 거듭 곤궁하게 된 것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문관을 따로 가려 그 사이에 섞어서 임명하여 그들을 누르고 무마시키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무명베[木]의 품질을 강등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사헌부에서 논한 지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 외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조정의 명령을 믿지 않아서 일정한 규식을 제대로 따르지 못합니다. 그 정상 또한 슬프다 하겠으며, 국가에서 전부터 신용을 잃어온 것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 넓고 촘촘하게 짜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명베의 넓고 좁음은 승수(升數)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찌 그 승수를 감하고서 특별히 그 너비만 넓게 하는 도리가 있겠습니까. 세폐(歲幣)에 쓰이는 베는 비록 우리 스스로 더하거나 줄이기가 어렵겠지만, 우리 나라에서 쓰고 있는 베에 대해서는, 조정과 외방에 단단히 타일러 경계시켜서 획일적인 규식을 확고히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벌의 억울함과 그것의 남용은 가장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화기를 손상시키므로, 신중을 기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요즘 포도청에서는 도둑을 금지하는 본의를 생각하지 않고 법률 밖의 일을 많이 행하여, 도둑질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도 형벌을 남용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만 원한을 품어도 충분히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니, 일을 맡은 신하에게 특별히 엄격하게 경계시키어 십분 신중을 기해 보호해서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처벌을 받게 되는 한탄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게 해야 합니다. 아, 오늘날의 시사(時事)는 참으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인심이 이미 떠났고 나라의 형세가 이미 위태해져서, 헤아릴 수 없는 변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났고, 위험한 종기가 이미 터져서 고름은 짜내 버렸지만 원기는 저절로 손상되었으며, 천재와 시변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조정과 외방이 모두 걱정하며 당황하여 아침 저녁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때에 만일 마음속으로 대단히 경계하여 그 정사를 고쳐 바로잡지 않으신다면, 아마도 재앙과 난리가 일어나지 않는 때가 없을 것이요, 우리를 사랑하던 하늘도 반드시 우리를 잊어버리는 데에 이를 듯하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위엄을 삼가고 두려워하시며 성덕을 날로 새롭게 하시어, 마음을 보존하고 정령을 발할 적에 반드시 천리의 바름에 부합하기를 구하고,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사욕에 얽매이면 맹렬하게 이를 막아서 맑게 다스려,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져버리듯이 겉과 속이 환히 통하게 하고, 엄하고 공손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힘써 심신을 맑게 닦으며,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여, 법을 세워서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전하께 진언할 수 있는 길을 크게 열어 백성의 고통을 힘써 구제하여, 조정의 정사가 청명해지고 인심이 기꺼이 복종하게 하십시오. 그렇다면 오직 덕 있는 이만을 친애하는 하늘이 어찌 저 은미한 속에서 감응하지 않겠습니까. 천명이 거듭 새로워지고 국운이 다시 창성해지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힘써 경계하소서. 신들은 모두 못난 사람들로 전하를 가까이 모시는 자리에 있으면서, 천재가 매우 극심하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감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근심스럽고 두렵고 애통하고 절박한 회포를 감당할 수 없기에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의 아뢴 말을 보고, 매우 가상히 여긴다. 경들이 아뢴 일에 대해서는 의당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채택하여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명하여 이 아뢴 일을 비국에 내리자, 비국이 관례에 따라 회계하였으나, 끝내 한 가지 일도 채택하여 시행한 것이 없었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이 아뢴 말은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것이다.
【원전】 35 집 182 면
《 인조 046 23/11/25(계유) / 장악원 주부 허서의 일을 논계하다 》
장악원 주부 허서(許舒)의 아내는 고 능창 대군(綾昌大君)의 천첩 딸이다. 이 때문에 벼슬을 주었는데, 당시 이조 판서 이식(李植)의 아내는 상의 외친이었고 참판 한흥일(韓興一)은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종형이었다.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와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홏)가 다 같이 허서에게 수령을 주도록 이식과 흥일에게 청탁하였는데, 이식이 면전에서 허락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난처해 하였다. 부여(扶餘)에 빈 자리가 났을 때 이식은 정고(呈告) 중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흥일에게 이 고을을 청탁하는 것을 흥일이 대뜸 대군의 부탁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 뒤 혼자서 정사하면서 과연 허서를 수망(首望)으로 주의하여 낙점을 받자 물의가 들끓었다. 이에 조복양(趙復陽)이 논계하기를, “왕실의 친척은 외조(外朝)의 신하들과 서로 통할 수 없는 법으로, 그 한계가 지극히 엄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정관(政官)이 제배(除拜)하는 즈음에 청탁을 들어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허서가 부여 현감에 제배될 적에 이조 참의 한흥일은 대군의 청탁이 있었다고 핑계하더니 혼자서 정사하던 날에 가서는 수망으로 주의하기까지 하였으니,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킴이 너무도 심합니다. 한흥일을 파직하소서. 그리고 허서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경망하여 수령으로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간원의 계사 중에 이른바 대군이란 어느 대군을 말한 것인가?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복양에게 물어서 아뢰기를, “흥일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는 두 대군이 다 같이 청탁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흥일을 불러다 묻기를, “이 계사가 옳은가? 경은 어떻게 능원 대군을 알아서 청탁을 들어주기까지 하였는가?” 하니, 흥일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판서 이식과 수령에 합당한 사람을 논한바, 허서 역시 그 대상에 들었습니다. 은진 현감(恩津縣監)을 의망할 적에 이식이 말하기를 ‘공은 허서를 본 적이 있는가?’ 하기에, 신이 ‘아직 보지는 못했다.’ 하였더니, 이식이 ‘이 자리에 의망하고 싶기는 하나 이곳은 도로를 낀 일 많은 곳이니 한적한 고을에다 시험해 보는 것만 못하다. 부여 수령 자리가 머지 않아 필시 빌 것이니 이곳에 의망하는 것이 괜찮겠다.’ 하였습니다. 두 대군이 청탁하였다는 말에 있어서는, 일찍이 들은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남에게 말하였겠습니까. 그리고 능원 대군은 본시 뵈온 적이 없으니, 피차간에 통정한다는 것은 형세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흥일이 먼저 발설하고서 도리어 이식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상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일이 너무도 해괴하다. 이른바 상대하여 말을 들은 사람들을 잡아다 추문하여 남을 공격하고 모함한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복양이 이에 아뢰기를, “근래 궁가의 청탁이 양전(兩銓)에 많이 개입되고 있다는 말이 항간에 떠들썩한데, 신은 어느 사람, 어느 관직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 허서가 대군의 청탁으로 은진 현감 자리를 구하였다가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부여 현감이 될 것이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파다하였는데, 정목(政目)이 나온 것을 보니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았고, 흥일 역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여서 소문이 파다하고 물의가 들끓습니다. 궁가와 외신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는데, 정관(政官)이 궁가의 청탁으로 관리를 임명한다면 요행의 길이 열리고 국가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흥일이 아뢰면서 대군의 청탁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은 못내 놀랍고 괴이쩍습니다. 허서의 일은 실로 수많은 입으로 전파되어 듣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흥일은 재상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임금의 앞에서는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도, 그 말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뭇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는 말은 어디에서 나왔단 말입니까. 임금이 대간에게 이목의 역할을 맡김에 있어서 풍문을 듣고 일을 논하도록 허락하여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길은 터 주었을지언정, 위엄으로 압박하며 심지어 언근(言根)을 적발하기까지 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언근을 적발함에 있어서는 달리 적발할 방도는 없고 필시 신으로 하여금 고발하도록 할 것인데, 이 일은 전파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입 있는 자는 다 말하고 귀 있는 자는 다 들었으니 비록 적발하려 한들 또한 그 사람이 누구라고 어떻게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못나기는 하였으나 직임이 대관(臺官)인데 어찌 차마 언근을 끌어대어서 조정을 욕보이고 대각의 그지없는 화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신은 혼자서 망언에 대한 죄를 쓰고 죽음의 길을 택할 뿐, 결코 그렇게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아, 간관으로 있으면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고, 이미 언책의 자리에 앉혀 놓고서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신에게 죄를 내리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신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은 한갓 구구한 충심에서 사사로이 입은 은총에 감격한 나머지 아는 대로 다 말하여 조금이나마 보탬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오직 전하만을 믿고서 몸을 사릴 줄도 모르고 차마 말 없이 있지 못하고 감히 부질없는 말을 하였다가 이처럼 성상의 과중한 조처가 내려지게 하였습니다.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더욱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신의 관작을 삭탈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때 도승지 김세렴(金世濂), 좌승지 이래(李퍵)가 겁에 질려서 대답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상이 다그치자 이에 아뢰기를, “대간이 지금 이 일로 해서 인피하고 있어 본원에서 적발하기도 어려운데, 또 대간의 계사로 인해서 이처럼 준엄한 유지를 내리시니, 널리 포용하는 대성인의 도리에 손상이 갈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그리고 조복양이 자신의 당파를 비호하고 상대를 칠 적에는 반드시 대군을 침해하니, 오늘날의 어리석은 자의 사술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獄事) 때 상이 기원의 첩을 내옥에서 국문하면서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은 사람을 물은바, 박황(朴潢)·심동귀(沈東龜)라고 하였다. 이에 곧장 그 추안을 국청으로 내려보내고 이어 박황과 심동귀를 귀양보내었는데, 복양이 당시에 정언으로 있으면서 내옥의 잘못을 극력 논박하였다. 그리고 또 마침 그때 능원 대군의 객실을 짓도록 명하여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복양이 함께 말하였다. 때문에 상이 노하여 이때 와서 또 이러한 하교를 내린 것이다.
【원전】 35 집 251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인조 046 23/12/18(병신) / 능원 대군 이보에게 섭정왕의 예단에서 비단과 금을 주라고 명하였다 》
상이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에게 청나라 섭정왕(攝政王)의 예단(禮單)에서 비단 20여 필과 백금 2백 냥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원전】 35 집 254 면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왕실-사급(賜給)
《 인조 048 25/02/02(계유) / 대군의 가노 등 7인을 전가사변시키라 명하다 》
대군의 가노(家奴) 김철(金鐵) 등 7인을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라 명하였다. 병자년에 우역(牛疫)이 전국에 널리 퍼져 소가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도살을 엄금하여 살인한 것과 같은 죄를 적용하도록 하니 축산이 차차 번성하게 되었는데, 소를 도살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궁가에 투속하여 제멋대로들 도살하였다. 형조·한성부·사헌부의 금리(禁吏)들이 체포하여 고발하면 궁가에서는 그때마다 그 금리의 처자들을 구타하므로 금리들은 금패(禁牌)를 수령하지 않고 서로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민성휘(閔聖徽)가 형조 판서가 되어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소 도살자의 숫자를 한성부에 물으니,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 소속이 42인, 능원 대군(綾原大君) 집 소속이 38인이었다. 성휘가 이에 두 궁의 18인씩을 뽑아서 아뢰고 한성부로 하여금 조사해서 전가 사변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부득이하여 따랐다.
【원전】 35 집 293 면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농업-축산(畜産) / *왕실-종친(宗親) / *신분-천인(賤人)
《 인조 050 27/02/13(임인) /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산림 독점의 폐단·생업을 잃은 시민·변경 수비 등을 논하다 》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산림(山林)과 천택(天澤)을 백성과 공유하는 것이 제왕의 정사입니다. 그런데 동대문 밖부터 평구역(平丘驛)의 산야까지 모두 차지한 자가 있어서 나무꾼이 가지 못하고, 강과 바다까지도 모두 임자가 있어서 고기잡이하는 자들이 생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경각사(京各司)에서는 하인들이 점점 달아나는데,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형세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이 참으로 어떠한 때인데 토목일이 전보다 더합니까. 삼강(三江)의 백성은 한성부와 공조에서만 부릴 수 있는데, 궁가(宮家)와 세력 있는 집에서도 혹 복태(卜큓)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자가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영선(營繕)하는 일은 대내(大內)를 막론하고 햇수를 한정하여 정지하고, 산림과 강해(江海)를 그대로 차지한 자는 가까운 곳은 헌부에 책임지우고 먼 곳은 혹 어사를 내보내어 귀근(貴近)과 호세(豪勢)까지도 낱낱이 징계하여 다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북사(北使)가 발매(發賣)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어서 시민이 생업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창고에 저축된 것을 한번 내어서 시장에 미리 주어 물건을 바꾸어 이익을 불리면서 잡물을 장만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시민이 생업을 잃을 걱정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미처 답하기 전에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미리 주어 장만하게 하는 일은 대신이 전에 신에게 말하였으나, 해조의 저축은 전세(田稅)와 삼수량(三手粮)뿐인데, 한번 저축을 죄다 내어 주어도 시민이 사재(私財)처럼 불리고 아끼지 않으면, 한번 칙사의 행차를 겪은 뒤에는 이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어가기 어려운 형세일 뿐만 아니라, 청인(淸人)이 관가에서 값을 주어 장만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발매하는 수가 또한 훨씬 많아질 것이다.” 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으니, 수시로 비국의 한두 신하를 인견하시기도 하고 옥당의 신하를 소대(召對)하시기도 하여 위아래의 뜻이 통하게 하소서. 또 봄에 순안사(巡按使)를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봄철이 깊어졌으므로 농사에 방해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를 보내면 출척이 많아질 것이니, 농사철에 영송하는 폐단이 있을 듯하다.” 하였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 시장(柴場)의 폐단에 대해 대신도 지적하여 말하지 않고 범연히 궁가라 말하였는데, 동대문 밖은 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흥군(仁興君)과 경평군(慶平君)은 전하께서 난처하신 바가 있겠으나, 능원 대군(綾原大君)과 인평 대군도 금단하실 수 없겠습니까. 또 인평 대군 집에 머무르는 한인(漢人)은 무슨 일로 데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길에서 한림(翰林)을 때렸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신이 법부(法府)에서 죄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으나 대군이 숨기고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하였다. 김남중이 아뢰기를, “한림 이후(李텋)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자, 이후가 대답하기를, “신이 공무로 길에 나갔다가 술에 취한 한인을 만났는데, 그가 갑자기 끌어내렸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형추할 수 없으니, 형조에서 결장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서로(西路)에는 믿을 만한 곳이 있는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대답하기를, “자모 산성(慈母山城)이 첫째입니다.” 하고, 김자점은 아뢰기를, “신은 강도(江都)가 첫째라고 생각합니다. 육지를 죄다 잃더라도 배로 호령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구(海寇)는 강도에서 막지 못할 듯하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해구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국가의 호령이 행해져야 일을 성취할 수 있는데, 자모 산성은 형세가 좋기는 하나 한 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좋은 방책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의견도 좋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청국의 자문(咨文) 가운데에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거조인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여기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제는 숙(叔)자를 제거하고 조하(朝賀)하는 일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칙서 가운데에는 그 말이 없으나 이미 태상(太上)이 된 듯합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옛말에 ‘어진이를 찾기에 힘쓴다.’ 하였습니다. 접때 부른 사람들이 다 오지 않으니, 해조를 시켜 탁용(擢用)하여 반드시 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지포(紙砲)는 이기(利器)이니 주사(舟師)도 쓸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사가 쓰기에는 자포(子砲)가 가장 좋고 지포는 불편한 듯하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지금 남북의 근심 중에서 어느 곳이 급한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청국이 염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왜가 염려되나 군사를 움직이려면 먼저 한 가닥 말썽부터 일으킬 것이고, 몽고(蒙古)가 혹 마음을 먹더라도 북경(北京)을 버려두고 우리에게 먼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청국이 버티지 못하고 의주(義州) 근처에 와서 우리가 접제(接濟)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장차 어찌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근심하는 것도 그것이다. 치밀한 대비책을 미리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논사(論思)의 장(長)은 오래 비워두지 말아야 할 것인데, 접때 부제학을 다음 정사(政事) 때에 차출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차출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빨리 차출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문(文)·무(武)의 도(道)는 한 편도 치우치게 폐기해서는 안 되는데, 근래 무사(武士)는 자주 재주를 시험하나 문교(文敎)만은 매우 쇠퇴하였으니, 옥당의 유신을 더 권장해야 하겠습니다. 혹 어병(御屛)을 내어 시를 짓게 하기도 하고 소대(召對)하시어 경사(經史)를 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규(舊規)에 전경 문신(專經文臣)이 있으니 이러한 일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천도(天道)도 오래되면 변하고 성왕(聖王)의 변통도 그러합니다. 이경여(李敬輿) 등이 죄받은 지 지금 4년이 되었는데, 요즈음 들으니 이경여와 홍무적(洪茂績)이 다 병이 있다 합니다. 만약 그들이 먼 변방에서 죽는다면 성도(聖度)에 흠이 될 듯합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당초 신이 이경여와는 죄가 같은데 벌이 달랐으므로 전후에 아뢴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또 그의 심적(心迹)에 혹 다른 마음이 있었다면 신이 어찌 감히 좋아서 당악(黨惡)이 될 짓을 하겠습니까. 홍무적은 간관(諫官)으로서 말을 다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스스로 대죄(大罪)에 빠지는 것을 몰랐고, 심로와 이응시도 한때 망령스레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저 역적에게 붙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영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원전】 35 집 344 면
《 인조 050 27/03/21(경진) / 정조에 각도에서 바치는 말을 능원 대군 이보가 중간에서 구매하여 이득을 취하다 》
정조(正朝)에 각도에서 바치는 말은 혹 본도에서 장만하여 바치기도 하고 서울에 와서 사서 바치기도 하는데, 비싼 값이 아니면 좋은 말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 값이 본디 비쌌다. 능원대군 이보(綾原大君李?)가 그 이익을 챙기려고 번번히 세밑이 되면 궁노(宮奴)를 보내어 중도에서 몰래 해리(該吏)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값을 압류하고 제 집의 말을 대신 바치고는 원가(元價) 외에 훨씬 더 많이 거두었다. 이에 대관이 논계하니 본도에 내려 사문하게 하였는데, 본도의 장계가 오자 예조가 더 거둔 값을 거두어 본도에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부승지 신익전(申翊全)이 아뢰기를, “방납(防納)하고 지나치게 거두는 것은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당초에 대간이 사문하기를 청한 것은 부득이해서 한 것인데, 본도에서 명백히 사문한 뒤에 도리어 버려둔다면 대성인(大聖人)이 차별없이 사랑하는 도리에 흠이 될 듯합니다. 더구나 법령의 시행을 방해하는 것이 번번이 귀근(貴近)이 지키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으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신은 해방(該房)을 맡고 있으므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각도에서 바치는 것 가운데에는 혹 재상 집에서 바치는 것도 없지 않은데 궁가만이 침책을 받는 것은 고르지 않다.” 하였다. 능원 대군이 상차하여 스스로 변명하고 이어서 대죄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원전】 35 집 348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재정-공물(貢物) / *왕실-종친(宗親)
《 인조 050 부록 / 인조 대왕 행장(行狀)① 》
행장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며,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니, 원종 공량왕(元宗恭良王)의 큰아들이며 선조 소경왕(宣祖昭敬王)의 손자이시다. 어머니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는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왕을 낳으셨다. 이때 왜구가 침략했기 때문에 모든 궁가(宮家)가 다 해주에 따라갔던 것이다. 탄생하시기 전에 일자(日者)가 점치기를 ‘모일에 탄생할 것인데 귀하기가 말할 수 없다.’ 하였는데, 그날 탄생할 때에 문득 붉은 빛이 비치고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이날 저녁에 인헌왕후의 어머니 평산 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가 옆에서 졸다가 붉은 용(龍)이 왕후 곁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두 줄로 여덟 자를 쓰는 것을 꿈꾸었는데, 두 자는 흐릿하여 기억하지 못하나 귀자 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이라 하였다. 부부인이 기뻐서 깨니 이미 탄생하셨다.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선조(宣祖)께서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셨다. 겨우 2, 3세가 지나자 곧 궁중에서 길러졌는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으셨다.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왕자들도 비교되지 못하였고 의인 대비(懿仁大妃)께서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셨다. 그 휘와 소자(小字)는 다 선조께서 지어 주신 것인데, 소자를 모(某)라 한 것을 광해(光海)가 듣고 언짢아서 말하기를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5, 6세 때부터 선조께서 친히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으셨는데 문의(文義)가 날로 트이니 선조께서 더욱 기특하게 여기셨다.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는 가운데에 간단(間斷)이 있을까봐 염려하여 외가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에게 배우게 하셨는데,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으셨다. 정미년에 능양 도정(綾陽都正)으로 진계(進階)하고 이윽고 군(君)으로 봉해졌는데, 다 재능과 공로 때문이고 의친(懿親) 때문이 아니었다. 비(妃)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따님인데, 선조께서 일찍이 왕자 부인(王子夫人)으로 뽑으셨다가 그대로 다시 왕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셨으니, 대개 또한 특별히 총애하셨기 때문이다. 광해 때에 원종(元宗)께서 덕업(德業)과 위망(位望) 때문에 매우 시기와 의심을 받으셨고, 왕의 두 아우 중 막내인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이 뜻밖에 화를 당하여 죽어 화가 또한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원종께서 늘 두려워 조심하다가 얼마 후에 몸져 누우셨다. 왕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바쳤으나 지극한 정성도 보람이 없이 비통한 일을 당하시니, 밖으로는 두려움에 몰리고 안으로는 안정하지 못하여 곡벽(哭쮰)이 예절에 지나치고 언 땅바닥 위에 거처하며 음식물을 드시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으며 외제(外除)하게 되어서는 유모(孺慕)가 더욱 간절하셨다. 광해의 혼란이 더욱 심해져서 정사(政事)가 뇌물로 이루어지고 끊임없이 거두어들이며 토목 일이 해마다 잇따르고 그치지 않아 도감이라 칭하는 것이 열둘이고 민가를 헌 것이 수천 채였다. 모후(母后)를 유폐하고 골육을 도살하며 큰 옥사를 꾸미니 억울하게 죽는 자가 날로 쌓였다. 음란하고 포악한 행위가 이루 셀 수 없으며 척리(戚里)가 권세를 구하고 간흉(奸兇)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므로 모든 백성이 물이나 불 속에 있듯이 근심하였다. 왕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때를 기다리고 한가히 있으면서 깊이 근심하였다. 윤기(倫紀)가 무너진 것을 아파하고 종사(宗社)가 엎어지려는 것을 괴로워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기셨다. 마침 친근한 친족 중에 호걸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텋)가 함께 보필하고, 영의정 김류,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영의정 최명길(崔鳴吉),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장유(張維) 등이 꾀하지 않고도 말을 같이하여 힘을 다하여 협찬하니, 충분(忠憤)이 함께 격렬하여 내외에서 급히 응하여 몰려오고 문무의 선비들이 의리를 떨쳐 일어나고 풍문을 들은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드디어 함께 왕을 추대하여 창의문(彰義門)으로부터 들어가니 삼군(三軍)이 경모(景慕)하여 따르고 오묘(五廟)가 거듭 빛나니, 곧 천계(天啓) 계해년 3월 12일이었다. 왕이 인정전(仁政殿) 앞에서 걸어 나가 서궁(西宮)으로 가려는데 뭇 신하가 연(輦)을 타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을 타고 가서 궁문(宮門)에 이르러 걸어 들어가셨다. 이때 대비(大妃) 김씨(金氏)를 서궁에 유폐하고 그 문을 막은 지 11년이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열었다. 왕이 침전(寢殿)을 바라보고 두 번 절하고 곡하니 뭇 신하도 다 곡하였다. 대비께서 명하여 들어오게 하고 선조(宣祖)의 허위(虛位)를 설치하니, 왕이 또 두 번 절하고 곡하였으며 시신(侍臣)도 곡하였다. 왕이 대비를 뵙고 또 곡하니, 대비께서 말리며 이르기를 ‘이처럼 큰 경사에 어찌하여 곡하는가.’ 하셨다. 대비께서 명하여 왕에게 국보(國寶)를 전해 주게 하였는데 왕이 재덕(才德)이 없다고 사양하니, 대비께서 이르기를 ‘왕실의 지친(至親)이고 신민이 사랑하여 추대하였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군(嗣君)은 이제부터 성주(聖主)가 될 것이니 종사의 복이다.’ 하셨다. 대비께서 이미 별당(別堂)을 청소하게 하였는데, 선조께서 정사를 돌보시던 곳이다. 왕이 절하고 나가 별당에서 즉위하고 팔도에 대사(大赦)를 내리셨다. 대비께서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왕은 총명하고 인효(仁孝)하며 비상한 모습이 있으므로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다. 이름지으신 뜻에 미지(微旨)가 있었고 빙궤(憑?)하실 즈음에 손을 잡고 탄식하셨으니 촉망이 손자들 중에서 특이하셨다…….’ 하였다. 그리하여 폐희(嬖姬) 김상궁(金尙宮)을 죽이고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한찬남(韓纘男)·정조(鄭造)·윤인(尹휖)·이위경(李偉卿)과 총환(寵宦) 조귀수(趙龜壽) 등을 저자에서 환형(턤刑)하고, 학정(虐政)을 도운 박엽(朴燁)은 감사로 평양(平壤)에 있고 지당(支黨) 정준(鄭遵)은 부윤(府尹)으로 의주(義州)에 있었으므로 모두 그 곳에서 효시하고, 무신년 이후 억지로 꾸민 옥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탕척하고, 모든 영건(營建)·조도(調度)에서 남보다 혹독하게 한 무리의 거짓 훈록과 척완(戚횁)·권귀(權貴)의 전장(田庄)에 대한 감세(減稅), 복호(復戶)하는 따위 일을 모두 곧 혁파하고, 내수사(內需司)·대군가(大君家)에 빼앗긴 전민(田民)을 죄다 돌려주고, 폐단을 지은 내노(內奴) 두 사람을 참형하여 돌려 보이고, 가난한 백성의 해묵은 포흠(逋欠)을 모두 면제하게 하였다. 왕이 친정하여 맨 먼저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아서 황야(荒野)로부터 들어오게 하고, 정온(鄭蘊)을 사간으로 삼아서 제주(濟州)의 적소(謫所)로부터 소환하고, 윤방·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귀(李廷龜) 같은 선조(宣祖) 때의 기구(耆舊)인 신하와 그밖에 말 때문에 죄받은 자를 차례로 등용하니, 현능(賢能)과 홍석(鴻碩)이 조정에 벌여 있게 되었다. 이때 도성(都城)의 사녀(士女)와 시전(市廛)의 부로(父老)가 마치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서 용동(聳動)하고 팔도의 백성이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성주가 나셨으니 우리들은 살았다.’ 하였다. 배신(陪臣) 이경전(李慶全)을 보내어 대비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봉전(封典)을 청하였는데, 을축년에 황제가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조칙을 가져와서 왕과 왕비의 고명(誥命)·면복(冕服)을 내리니, 왕이 곧 배신 박정현(朴鼎賢)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진사(陳謝)하였다. 왕은 대비와 모비를 섬기는 데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용모를 유순하게 하고 낯빛을 유쾌하게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신 적이 없었다. 갑자년에 대비를 높여 명열 대왕 대비(明烈大王大妃)라 하고 경덕궁(慶德宮)에서 진하(陳賀)하고 풍정(豊呈)을 올리고 아울러 모비를 받들어 상수(上壽)하였다. 병인년 봄 모비께서 앓아 누우셨을 때에 왕이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치고 금중(禁中)에서 목욕하고 친히 기도하셨다.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행하려 하셨는데 예관·대간이 대통(大統)의 의리로 힘껏 다투었으므로 장기(杖朞)를 행하였으나 실은 심상(心喪)의 제도를 지키셨다. 일곱 달 뒤에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엄친을 일찍 잃고 편모만을 의지하였는데 영양(榮養)한 지 오래지 않아 자당이 문득 비었으니 내 심사를 생각하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한 나라의 모든 것으로 봉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부모가 다 계시지 않으니 동쪽을 바라보고 서쪽을 돌아보며 통곡할 뿐이다. 초상 때부터 예제(禮制)를 따르고 지극한 정을 억누른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宗社)를 위하고 자전(慈殿)을 위하고 신민(臣民)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원(園)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내 몸에 병이 없는데 어찌 권제를 따를 수 있겠는가. 요즈음 이 일 때문에 비통이 매우 심하다. 이 일은 해로운 것은 있고 이로운 것은 없다 하겠으니, 경들이 내 몸을 보전하고 싶으면 이런 계청을 빨리 멈추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셨다. 기년(期年)이 ?퓽? 백관이 전정(殿庭)에 모여 다시 계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상일(祥日)이 겨우 지났는데 경들이 또 이 말을 내니 내가 매우 놀랍다. 내가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결코 그럴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셨는데, 잇따라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담제(쩘祭)를 지낸 뒤에 입으실 복색은 대신의 의논에 따라서 행하소서.’ 하니, 왕이 심상의 예는 본디 명문(明文)이 있다고 분부하셨다. 담제를 지낸 뒤 망제(望祭) 때에 혼궁(魂宮)에 가서 애림(哀臨)하려 하시므로, 정원이 아뢰기를 ‘무릇 상을 당하여 담제를 지내면 곡이 없습니다.’ 하고 모두 세 번 아뢰었으나, 왕이 이르기를 ‘이는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 담제를 지낸 것과 다르다.’ 하고 마침내 곡례(哭禮)를 거행하셨다. 신미년 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하자 왕이 산천에 기도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셨는데, 회복된 뒤에 대비가 대신과 재신들에게 분부하기를 ‘주상이 밤낮으로 잘 구완해주신 덕분에 중병이 나을 수 있었다.’ 하였다. 임신년 여름에 대비의 병이 다시 위독하자 왕께서 병구완하시느라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고 정성을 다하여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셨고 묘사와 산천에 두루 기도하셨다. 승하하시게 되어 인경궁(仁慶宮)으로부터 경덕궁(慶德宮)으로 받들어 옮길 때에 대신과 예관(禮官)이 소여(小輿)를 타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그대로 걸어서 따라가셨다. 27일이 지나기 전에는 대간을 임명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명령과 교계(敎戒)를 하지 않으셨으며,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재신과 삼사가 상선(常膳)을 회복하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여전히 거절하며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사리를 아는 어진 사람으로서 예에 어긋난 이런 말을 하니 경들의 이 말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평소의 효성이 경들에게 믿음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한다.’ 하셨다. 대비의 성품이 엄급(嚴急)하셨으나 왕이 뜻을 굽히고 안색을 살펴 받들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으셨다. 대비께서 계축년의 화를 당하고는 죽을 들고 상중(喪中)의 음식을 드셨는데 이미 복위(復位)한 뒤에도 소선(素膳)을 드시다가 왕과 중궁(中宮)이 울며 간하는 것이 매우 간절한 뒤에야 고기를 드셨다. 왕의 정성이 귀신을 감동시킬 만하였으므로 대비전의 궁인 가운데에 말을 교묘하게 하는 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감히 이간하지 못하였다. 대비께서 승하하신 뒤에 공주(公主)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은 총애를 입은 것이 오히려 두터웠다. 왕이 모비를 잃은 뒤에, 부왕(父王)의 의관(衣冠)을 장사지낸 것이 폐조 때이므로 장지를 잘 선택하지 못한 것을 뒤미처 생각하여 분부하기를 ‘높은 산으로 형세가 급하고 단절된 산기슭으로 싸안은 것이 없으니 다시 영장(營葬)해야 한다.’ 하시어, 양주(楊州)로부터 김포(金浦)의 오향(午向)인 언덕으로 옮겨 모시고 모비를 부장(쯊葬)하니, 곧 장릉(章陵)이다. 승정(崇禎) 임신년 여름에 부왕을 추존하여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라 하고 모비를 인헌 왕후(仁獻王后)라 하였다. 배신(陪臣) 홍보(洪?)·이안눌(李安訥) 등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추봉을 청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고명(誥命)을 하사하고 공량(恭良)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그 칙서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그대는 대대로 동번(東蕃)을 지켜 왔거니와 그대의 아버지 휘(諱)는 습작(襲爵)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는데 이제 추봉을 주청하니 효사(孝思)를 알 만하다. 특별히 해부의 의논을 윤허하여 그대의 아버지 휘를 추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고 어머니 구씨(具氏)를 조선 국왕비로 삼아 고명을 내리고 시호를 주니, 그대는 이 영총(榮寵)을 입어 번복(蕃服)을 빛내고 오히려 성절(誠節)을 더욱 굳혀 전의 아름다움을 변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일찍이 《서전》을 읽다가 ‘조상을 받들되 효도를 생각하소서.’ 한 데와 ‘먼 것을 보되 밝게 할 것을 생각하고 덕 있는 것을 듣되 밝게 할 것을 생각하소서.’ 한 데에 이르러 반복하여 문난(問難)하셨는데, 강관(講官)이 ‘보고 듣는 것이 밝기는 가장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밝게 보고 밝게 듣기는 어렵더라도,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효도를 잘할 수 있어야 온갖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총명한 임금이 없지는 않았으나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스리는 것도 융성하지 못하였다.’ 하셨다. 대개 왕의 효성은 타고나신 것이었고 그 학문을 강구하고 사리를 밝히는 깊이도 이러하셨다. 광해가 폐위되고 나서도 그 대우는 끝내 바꾸지 않았다. 이에 앞서 대비의 아버지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혼조에서 거짓으로 꾸민 옥사에 죽고 모부인(母夫人)이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어린 왕자 영창 대군 이의(永昌大君李썃)를 품안에서 빼앗아 죽여서 동기 세 사람이 다 혹독한 화를 입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비께서 광해는 종사의 죄인이고 국가의 원수라 하여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혀 처형해야 한다고 엄한 분부를 여러 번 내리셨으나, 매우 무도하기는 하나 군림(君臨)하였던 사람을 처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왕이 부드러운 말로 간절히 간하고 반복 비유하여 밝히시니, 대비의 뜻이 조금 풀렸다. 광해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별당 하나를 가려서 있게 하고 지공이 정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옹원을 시켜 특별히 지공하되 때에 따라 계속 바치게 하고, 또 승지에게 경계하기를 ‘오늘날의 조정은 다 그를 섬기던 사람이니 마음을 다하도록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그가 나가서 안치되었을 때에는 왕이 폐비(廢妃)와 행희(幸姬)를 따라가게 하였으나 대비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왕이 마음에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또 힘껏 청하여 같이 갈 수 있게 하였으며, 주선(廚膳)·일용(日用)을 특별히 명하여 넉넉히 갖추게 하고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옷을 계절에 따라 계속 보내고 중사(中使)를 자주 보내어 빠진 것을 물러 계속 보내주었다. 광해와 폐비가 마침내 천수를 다하니 모두 예장을 해주었고 폐동궁(廢東宮)과 폐빈(廢嬪)을 대우할 때도 모두 은례(恩禮)가 있었다. 광해와 폐동궁에게 다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늠료(쬎料)를 주어 기르고 자라서는 출가시켰는데 그 자장(資裝)을 갖추어 주고 노비와 전지를 많이 주었다. 인성군 이공(仁城君李珙)은 혼조에서 수의(收議)할 때에 말한 것이 매우 도리에 어긋났고, 이괄(李适)이 반역하였을 때에 역적들이 끌어댄 말이 매우 흉악하였으므로 대간의 논핵이 준열하게 일어났으나, 왕이 폐조 때의 일에 깊이 징계되어 매우 자책하여 물리쳤다. 삼사와 2품 이상이 합사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한 해가 지나도 그치지 않았는데, 을축년에야 비로소 윤허하시어 간성(杆城)에 내보내어 안치하였다. 왕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으므로 그 아들 이길(李佶)을 불러 공론에 몰린 사정을 갖추 말하고 눈물을 흘리시니, 궁인들이 모두 느껴 울었다. 또 수찰(手札)로 정원에 분부하여 강원 감사에게 일러 공해(公?)에 거처하게 하고 잘 대우하게 하도록 하셨다. 얼마 후에 서울로 돌아오라고 명하셨는데, 무진년 유효립(柳孝立) 등의 역옥(逆獄) 때에 역적들이 또 공을 우두머리로 끌어대어 공이 광해와 교통했고 자전의 분부라 사칭하여 흉악한 자들을 꾀었다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니, 모든 관원과 모든 종실이 다 나아가 죽이기를 청하였다. 대비께서 분부를 사칭하였다는 말을 듣고 또 매우 진노하여 엄한 분부를 잇따라 내려 반드시 처형하려 하시니, 왕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자살하게 하였으나 슬피 생각하여 마지않고 얼마 후에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여러 아들에게도 아울러 벼슬을 주어 특별히 돌보셨다. 인흥군 이영(人興君李瑛)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 왕이 국가가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는 외신(外臣)과 같게 할 수 없다 하여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리셨고, 임오년 봄에 기근이 심하였는데 임해군(林海君)·순화군(順和君)·인성군(仁城君) 세 왕자부인에게 모두 급료를 주라고 명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정축년 난리를 겪은 뒤에 잡혀갔던 부마와 종실의 자녀를 모두 공가(公價)로 속(贖)하셨다. 친척의 부고를 들으면 편찮으신 중이라도 반드시 여러 날 동안 행소(行素)하셨다. 인헌 대비의 아우인 종모(從母)가 있었는데 왕이 정성으로 섬기셨다. 능창 대군(綾昌大君)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여 지사(地師)를 시켜 묘지를 잡게 하여 이장하고 문사에 능한 조신(朝臣)에게 명하여 만장(輓章)을 짓게 하여 애도하셨다. 아우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가 난리를 겪고 집이 없었는데 이현궁(梨峴宮)을 내려서 살게 하셨다. 그 돈독하고 화목하며 우애하시는 것은 천성에서 그러하셨다.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행동이 법도에 맞으셨다. 제사 때에는 매우 깨끗하도록 힘쓰고 한밤에 일어나 새벽까지 근엄하게 서 계셨다. 한가한 동안에도 고요이 앉아 조용히 생각하셨고 가법이 매우 엄하므로 자손이 가까이 모셔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였다.
【원전】 35 집 363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인조 050 부록 / 인조 대왕 묘지문[誌文]② 》
3월에 금인(金人)이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고쳐 청(淸)이라 한 다음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였다. 이에 앞서 금이 폐물(幣物)을 늘리고 군사를 조발하라고 우리를 협박하였으나, 왕이 대의(大義)로 물리치고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으셨다. 이번에 사신이 나오자 백성이 다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을 분하게 여겨 금의 사신을 베어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사신이 탐지하여 알고서 달아났다. 국중(國中)이 비로소 의구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의리를 지키고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12월에 금인이 성을 내어 갑자기 침범하니, 대가(大駕)가 광주(廣州)의 남한 산성으로 피하였다. 적병이 날로 불어 우리를 두어 겹으로 에워쌌는데 때마침 날씨가 춥고 눈이 내려 장사(將士)가 혈색이 없었다. 왕이 한데에 서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빌기를 ‘하찮은 제가 힘을 헤아리지 않고 천하에 큰 의리를 알리려다가 이 큰 적을 만났으므로 스스로 구제되기는 바라지 않으나, 이 백관·만민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죄다 얼어 죽은 귀신이 되겠습니까. 하늘에 바라건대 한위(寒威)를 조금 풀어 적의 침학을 돕지 마소서.’ 하고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닦으시어 어의가 다 젖으니, 삼군(三軍)이 모두 감격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 하였다. 왕이 또 입던 갖옷과 취피(퀡被)를 벗어 조각조각 갈라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졸에게 나누어 주셨다. 고립된 성이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원병은 밖에서 패배하고 양식은 안에서 떨어졌으나 끝내 뜻을 돌리지 않았다. 적이 여러 번 화해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그 정예를 다하여 사닥다리를 많이 세우고 줄줄이 올라와 한 군데를 뚫으려 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잇따라 쳐서 물리치고 더욱 명을 받들었다. 뜻밖에 강도(江都)의 패보(敗報)가 갑자기 이르러 사람들이 다 낙담하고 일이 어쩔 수 없게 되었으므로, 영의정 김류,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예전에 한 고조(漢高祖)는 홍문(鴻門)에서 몸을 굽히고 당 대종(唐代宗)은 마수(馬首)에서 회흘(回紇)에게 친히 절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으로서는 국가의 만세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부가 제 몸 밖에는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고, 세자도 눈물을 흘리며 청하기를 ‘임금의 재앙을 풀 수 있다면 죽는 것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나가서 인질이 되는 정도야 말할 것이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종사와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르셨다. 정축년 정월에 대가가 환도하니, 묘모(廟貌)와 궁궐이 예전과 같고 늙고 어려서 잡혀가지 않은 서울 백성이 날마다 점점 더 모여 왔다. 3월에 강도에서 패망한 세 장수를 잡아와 모두 처형하고, 전사한 군졸의 한데에 드러난 해골을 묻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만들어 제사하게 하고, 호조 참판 신계영(辛啓榮)을 보내어 호조의 금 3천 냥을 가지고 심양(瀋陽)에 들어가 잡혀간 남녀를 속(贖)하여 돌아오게 하시니, 인심이 기뻐서 죽고 싶어하던 생각을 잊었다. 무인년 12월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갑신년 3월에 흉적(凶賊)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서 모반하여 먼저 심복 장사(壯士)를 호위(扈衛) 가운데에 두고 난을 일으키려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 심기원을 잡아 신문하니 반역한 정상이 상세히 드러났으므로 기시(棄市)하고 고발한 자를 상주었다. 왕이 심기원의 정사공(靖社功)을 생각하여 연좌된 자를 다 가벼운 법에 따라 처벌하셨다. 을유년 봄에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는데, 장자는 어리고 또 병이 많았다. 왕이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과 경대부에게 물어 방책을 정하고 봉림 대군(鳳林大君) 휘(諱) 모(某)를 왕세자로 세우시니, 연경·심양에서 들은 외인까지도 다 조선은 어진 세자를 얻었다 하였다. 명이 내렸을 때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두 번 글을 올려 굳이 사양하였으나, 왕이 두 번 수비(手批)를 내려 답하셨는데, 처음에는 ‘너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므로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예(禮)를 쓰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의 도리를 닦아 형의 아들을 네 소생처럼 여기라.’ 하고 두 번째에는 ‘내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계책을 물어도 다 같이 말하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도심(道心)을 공경히 지키라.’ 하셨다. 병술년에 폐빈(廢嬪) 강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처음 강이 심양에 있을 때에 참람한 짓을 하였고 돌아와서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말을 고치지 않고 또 고독(蠱毒)·저주(咀呪)를 행하다가 일이 드러났으므로 폐출하고 사사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윤리를 밝히고 근심을 막는 데에 뜻이 있다. 그가 만약에 마음 먹은 것이 작고 일이 의심스럽다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행하여 아이들이 날마다 울며 의지할 데가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어지럽히게 된다 하였으니, 내가 참으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은례(恩例)가 전혀 없을 수 없으니, 유사(有司)를 시켜 예장(禮葬)하고 3년 동안의 제수(祭需)도 관가에서 주게 하라.’ 하셨다. 정해년 봄에 크게 가물고 가을에 홍수가 있었는데, 호부(戶部)의 쌀 5만 석을 내어 백성의 공부(貢賦)를 갈음하고 진휼청을 설치하여 죽을 만들어 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시고,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옮겨서 굶주린 빛이 역력한 내외의 백성들로 하여금 고루 혜택을 입게 하셨다. 기축년 정월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諱) 모(某)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이때 나이 9세였는데, 기질(氣質)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모(禮貌)가 온화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5월 8일 병인에 왕이 병으로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뭇 신하를 버리고 세상을 뜨시니, 수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다. 왕이 임신년부터 상중에 계시면서 사모하여 지치고 야윈 것이 빌미가 되고 한습(寒濕)의 병을 더 얻어 계속되고 낫지 않은 지 17년인데, 무자년 겨울 이후에는 6∼7개월 동안 병이 상당히 좋아져서 조정의 신하를 자주 만나 천재(天災)를 근심하고 시사(時事)를 염려하여 위엄 있는 얼굴 표정에 나타내시고, 남방과 서방의 근심거리에 대해서도 방책을 강구하시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국의 당상인 신하로서 성지(城池)와 병사(兵事)에 대하여 진언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있지 않고 장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천어(天語)가 간략하고도 절실하므로 신하들이 기뻐서 ‘우리 임금께서 거의 병이 나으시겠다.’ 하였는데, 한 달을 넘지 못하여 왕이 편찮으시더니 겨우 열흘 만에 드디어 위독하셨다. 그러나 대신이 문병하면 몸이 피로하다 하여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는 일이 없으셨고, 약방(藥房)이 사약청을 설치하기를 청하면 폐단이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으셨다. 옥성(玉聲)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아, 애통하다. 9월에 뭇 신하가 시호를 올려 헌문 열무 명숙 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인조라 하였다. 이달 20일 병자에 장릉(長陵)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파주(坡州) 소재지로부터 북쪽 20리에 있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장사 때에 왕이 명하여 곡장(曲墻)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자각(丁字閣)도 중앙에 짓고 모든 상설(象設)의 제도도 다 효릉(孝陵)을 본떠 백성을 거듭 번거롭게 하지 말게 하셨다.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뒷걱정을 하신 것이 지극하셨으니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큹陵)을 검소하게 모두 와기(瓦器)로 치장하였지만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왕은 체모가 침착하고 엄숙하며 도량이 깊고 넓어서 동정 하나하나가 모두 법도에 맞고 가인(家人)·자제를 대하여도 게으른 모습이 없이 숙연하셨으니, 참으로 이른바 위의(威儀) 있는 임금이셨다. 학문을 좋아하시는 것은 천성이었다. 잠저(潛邸) 때부터 하루도 글을 버려두고 보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즉위하셔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닦아 일으키되 삼대(三代)와 같게 하려고 생각하여 현준(賢俊)을 맞아들여 등용하고 미천한 자 중에서도 채용하셨으며, 세월이 모자랄 듯이 경연에 부지런하여 하루에 세 번 인접하셨다. 선기 옥형(璇璣玉衡)의 세밀하여 알기 어려운 것과 주고 은반(周誥殷盤)의 아득하고 엄숙한 것에 대하여 모두 요령을 종합해 내고 풍아비흥(風雅比興)의 시(詩)와 전주(箋註)가 잡다한 곳에 대하여 모두 꿰뚫어 환히 아시니, 스스로 노숙한 사유(師儒)라 하여도 어렵고 의심스러운 물음을 받으면 입이 벌어지고 혀가 움츠려지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성효(聖孝)를 다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원종 대왕(元宗大王)과 인헌 왕후(仁獻王后)께서 위독하실 때에 다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바치고 3년 동안 어린아이처럼 부모를 사모하여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인목 왕후(仁穆王后)께서 성품이 엄하셨으나, 또한 왕이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성한 데에 감동되어 10여 년 동안 편안하고 참소가 감히 이간하지 못하였다. 신미년 정월 인목 대비의 병이 위급할 때에 왕이 근시(近侍)를 보내어 산천에 기도하고 원옥을 심리하게 하셨는데, 얼마 후에 대비께서 병이 나아 이르기를 ‘왕의 효성이 아니면 내 병이 위태로웠다.’ 하셨다. 임신년에 이르러 대비의 병이 다시 심해졌을 때에 왕이 약시중을 들되 늘 옷을 벗지 않으셨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을 본 후에 드렸으며 종사와 산천에 기도하는 것이 전보다 더하셨다. 대비께서 승하하시어 인경궁(仁慶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의장을 옮길 때에 왕이 소여(小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따라가신 것도 ?? 임금이 행한 적이 없는 일이다. 구족(九族)을 친목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와 우애가 깊으셨는데 그에게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이현(梨峴)의 별궁(別宮)을 내리셨다. 부마(駙馬)와 종실(宗室) 집 남녀 중에 정축년 난리 때에 잡혀간 자가 있었는데 많은 값을 내어 속(贖)하셨다. 친척 중에 부고가 있으면 행소(行素)하되 편찮다 하여 그만두시지 않았다. 인흥군 이영(仁興君李瑛)이 어머니의 복을 입었을 때에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려 국가에서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를 구별하시고, 인성군 이공(仁城君李珙)의 자손도 거두어 돌보셨다. 광해(光海)와 폐동궁(廢東宮)에게 다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어릴 때에는 늠료(쬎料)를 주어 기르게 하고 자라서는 출가시키되 전토와 노비를 많이 주어 편안하고 부유함을 누리게 하셨다. 대신을 공경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 늙고 병들어 잘 걷지 못하니 궤장(?杖)을 내리고 명하여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에 나오게 하고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셨다. 그가 치사해서는 현관(顯官)에게 명하여 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이불과 베요를 내려 그의 뜻에 맞게 하셨다. 직신(直臣)을 용납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온(鄭蘊)이 곧기는 곧으나, 전하를 접때에 견주었으니, 신하의 의리에 어그러집니다.’ 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경우 걸주로 임금을 견준 자가 있었는데, 정온의 말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이명준(李命俊)이 곧바로 궁인(宮人)을 지적하여 상소한 말이 매우 강경하였는데, 왕이 특별히 칭찬하셨다. 유백증(兪伯曾)·강학년(姜鶴年) 등이 바르게 말하기는 하였으나 지적한 것이 맞지 않았는데, 왕이 용납하고 또한 죄주지 않았다.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정묘년 난리 때에 남이흥(南以興)·김준(金浚)이 안주(安州)에서 죽고 최몽량(崔夢亮)이 의주(義州)에서 죽었는데, 포증을 더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셨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 상신 김상용(金尙容), 도정(都正) 심현(沈턀), 장령 이시직(李時稷) 등이 잇따라 충렬(忠烈)을 행하였는데, 왕이 명하여 그 문려(門閭)에 정표하고 묘액(廟額)을 내려 충렬이라 하셨다. 김응하(金應河)의 충성을 생각하여 그 집에 은 수백 냥을 내리셨다. 판서 김상헌(金尙憲), 참판 정온(鄭蘊)이 국난에 임하여 의분이 북받쳐 칼로 찔러 죽으려 하였는데, 왕이 낯빛이 변하여 의관(醫官)을 보내어 약을 가져가서 구완하게 하셨다.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가 죽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듯이 하였는데, 왕이 가엾게 여겨 마지않고 그 집을 특별히 돌보셨다. 형옥(刑獄)을 삼가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번번이 역옥이 일어나면 왕이 이르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그 우두머리만을 주벌하고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고, 사죄에 들어갔더라도 정상이 애매하면 이미 승복한 자도 많이 평번(平反)하셨다. 이 때문에 반역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나라 안에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천위(天威)를 두려워하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신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는데, 재이를 당하면 반드시 내 허물이다 하시고 반드시 조정의 신하를 시켜 과실을 죄다 아뢰게 하고 원옥을 심리하게 하셨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거친 베옷을 입고 앉아 뭇 신하를 불러 각각 말을 다하게 하고 자책도 매우 진실하게 하셨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비가 크게 쏟아졌다. 왕이 일찍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라 하여 내 몸이 다친 듯이 돌보고 때맞추어 부리셨는데,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勅使)의 수요일지라도 오로지 민간에 요구하지 말게 하고 각사(各司)의 저축을 비워서 쓰고 때로는 내부(內府)의 저장으로 돕게 하셨다. 검덕(儉德)을 숭상하고 교화를 도타이 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모도독(毛都督)이 앵무새를 보내왔는데, 왕이 해도(海島)에 놓아보내게 하셨다. 일찍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조정의 신하가 다 청검(淸儉)하여 욕심이 없다면 치평(治平)이 어찌 멀겠는가.’ 하셨다. 몸소 검덕을 행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시어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쓰지 않고 여름에는 삼베를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싫어하시고, 염습(斂襲)할 때에 이르러서 태서(太胥)가 옷을 살펴보니 명주로 만든 것이 많았다. 계해년 처음에 명하여 《오륜가(五倫歌)》를 번역하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인쇄하여 모두 중외에 반포하게 하시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소학》을 인쇄하여 뭇 신하에게 나누어 내리셨다. 또 예조를 시켜 동몽을 가르치는 데 오로지 《소학》을 숭상하게 하며 이르기를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셨다. 삼경(三經)과 《언해심경(諺解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양계(兩界)에 보내어 초학자들을 권면하셨다. 근년에 서북의 문풍이 융성해진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사대(事大)하는 정성으로 말하면 한결같이 선조(宣祖)를 모범 삼아 귀복(歸服)하는 일념은 잠시 위급한 때라도 바꾸지 않았다. 포위된 성 안에서도 망궐례를 행하고 환도한 뒤에도 대궐 안에서 홀로 행하여 외인이 모르게 하셨다. 경연에서 《시경(詩經)》의 소아(小雅)를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진수(鎭守)한다.’ 한 데에 이르러 왕이 크게 탄식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니, 좌우가 다 흐느끼며 감히 우러러 보지를 못했다. 아, 신하로서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가까이 모신 지 20여 년 동안에 뛰어난 문덕(文德)을 입고 일월(日月)의 빛을 가까이한 것이 또한 많거니와, 삼가 천지를 헤아리고 고금에서 살펴보면 대행 대왕의 공덕과 규모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때보다 나을 만하니, 뭇 행사가 성대한 것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불행히 병자년·정축년의 험난을 당하셨으나, 비유하면 문왕(文王)의 명이(明夷) 및 공성(孔聖)의 화산(火山)과 같은데, 저 두 성인도 면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대행 대왕에게 무슨 흠이겠는가. 말년에 더욱이 뒤를 잇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 전하를 얻어 2백 년의 종통을 맡겼는데, 그 귀에 대고 말하고 면전에서 명하여 간절히 가르친 방도는 인심(人心)·도심(道心)에 관한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으로써 먼저 하고 은감(慇鑑)이 멀지 않고 혼조(昏朝)에 있다는 것으로 거듭하고 도이(島夷)는 죽이기를 좋아하여 전세가 짧다는 것으로 끝냈으니, 그 간절히 반복하여 경계한 말씀은 성인이 서로 전수하는 사이에 세 가지 뜻을 전한 것이다. 대저 어찌 험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성인의 대지(大知)를 볼 수 있었겠는가. 한 소열제(漢昭烈帝)가 선이 작다 하여 하지 않거나 악이 작다 하여 하지 말라 한 것은 어지럽게 셈할 것도 못 된다. 일국의 신민이 누구나 다 반드시 오래 사시리라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성인보다 모자라고 설용(泄庸)과 종려(鍾쪾)같은 보좌가 지금에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하늘에 허물을 돌리는 것은 본디 당연하겠으나, 임어(臨御)하신 27년 동안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뼈에 스며들어 향기를 빚어낼 것이며 깜깜해진 세상에 강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해와 달처럼 늘 밝을 것이니, 어찌 나라를 오래 다스려 왕자(王者)가 되고 패자(覇者)가 되려 꾀한 뭇 임금이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아, 아름다우시다. 왕의 원비(元妃) 한씨(韓氏)는 세 아들을 낳으셨다. 맏이는 소현 세자 이왕(昭顯世子李?)인데 일찍 졸하였고, 다음은 금상전하(今上殿下)이시고, 다음은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李홏)이다. 귀인(貴人) 조씨(趙氏)는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아들 중 맏이는 숭선군 이징(崇善君李?)인데 승지 신익전(申翼全)의 딸을 취(娶)하였고, 다음은 낙선군 이숙(樂善君李潚)이며 딸은 효명 옹주(孝明翁主)인데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소현 세자에게 세 아들과 세 딸이 있다. 아들 둘은 죽었고 하나는 어리며 세 딸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 우리 중전(中殿) 장씨(張氏)는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따님이신데, 세 아들과 다섯 딸을 낳으셨다. 아들 왕세자 휘(諱) 모(某)는 처음에 세손에 봉해졌다가 이제 저위(儲位)에 올랐으며 딸 중 맏이는 숙안 공주(淑安公主)인데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숙명 공주(淑明公主)이고 그 다음 세 공주는 다 어리며 아들 둘은 일찍 졸하였다. 인평 대군은 증 영의정 오단(吳端)의 딸을 취하여 다섯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이욱(李栯)이고, 다음은 이정(李楨)인데 의창군(義昌君)에게 출계(出繼)하였고, 그 아래 세 아들은 다 어리다.”
【원전】 35 집 363 면 【분류】 *역사(歷史)
《 효종 007 02/10/12(병진) / 권우·이해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특별히 이형을 사옹원 부제조로 삼다 》
권우(權췖)를 사간으로, 정유(鄭攸)를 승지로, 이해창(李海昌)을 부응교로 삼고, 특별히 영신정 이형(靈愼正李瀅)을 사옹원 부제조로 삼았다. 이조가 자급이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숙부의 나이가 많은데 내가 기쁘게 위로해줄 길이 없으니, 특별히 가자하고 이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형(瀅)은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의 서자이다. 대군은 바로 인조 대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상에 예에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상의 숙부인 의창군(義昌君)을 섬김에 있어서 몹시 근실하였다. 겸손하고 공손하며 말이 없었다. 인조가 몹시 사랑하여 자주 물품을 하사하였으며, 제도(諸道)에서 진헌하는 것이 있으면 반을 그에게 주었다. 간혹 외간의 일에 대해 왕이 물으면 문득 머뭇거리면서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가끔가다 입시(入侍)할 때 상이 집안 사람의 예로써 대하였으나 일찍이 머리를 쳐들고 편하게 앉지 않았다.
【원전】 35 집 51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효종 009 03/12/15(계축) / 종부시에서 사조 대왕의 자손들을 6대에 한해 면역하길 청했으나 불허하다 》
종부시 도제조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가 아뢰기를, “일찍이 중종 때에 사조 대왕(四祖大王)의 후예는 내외손을 막론하고 12대까지 천역에 정하지 말라는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선조 때에 익조 대왕(翼祖大王)의 외손의 후예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함에 따라 하교하기를 ‘이름이 《선원보(璿源譜)》에 적혀 있는데 그 자신이 고역을 하고 있는 것은 사체가 온당하지 않으니 바라는 대로 시행하라.’ 하셨습니다. 이 이후로 사조 대왕의 후예는 그 소원(訴願)에 따라 즉시 모두 신역을 감면하였습니다마는, 열성(列聖)의 후예에 대해서는 적자(嫡子)는 세대를 한정하지 않고 으레 충의위(忠義衛)에 붙이는 규례가 있으나 서파(庶派)는 10대 안에서도 혹 군보(軍保)에 편입되니, 더구나 외손의 후예이겠습니까. 근래 열성의 서출이나 외손의 후예로서 군역에 충정된 자들이 많이 와서 사조 대왕 후예의 예에 따라 신역이 감면되기를 바라니, 변통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성의 후예 중 외손은 그 수가 적지 않으므로 6대 이내만 면천하여 면역함이 마땅하겠고, 서출은 또한 사조 대왕 후예의 예에 따라서 법을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열성의 내외 자손이 매우 많은데 어찌 사조 대왕 자손에 대해서만 분별하라는 하교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조종(祖宗) 때의 성명일지라도 지금은 간사하게 속이는 일이 갖가지로 나와 속여 기록하는 폐단이 끝이 없으니, 나는 그 법이 온당한 줄 모르겠다. 더구나 재차 그르쳐서 이 규례를 다시 만들어 우리 선원실록(璿源實錄)을 더욱 더럽히는 것이겠는가. 내 뜻은 이러하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치하라.” 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사왕의 후손으로 속여 기록한 자는 북도(北道)에 더욱 많으니, 성려(聖慮)가 여기에 미친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종실에는 본디 대수(代數)가 있고 적출은 충의위가 되나 서출·외손은 법전에 거론하지 않았으니, 어찌 적출·서출의 분별을 엄하게 하고 내손·외손의 계파를 밝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사가 법전대로 시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 우의정 이시백도 아뢰기를, “사조 왕의 후예에 대하여 내외손을 가리지 않고 혼동하여 12대 이내는 군역에 충정하지 말게 하는 것은 자못 치밀하지 못한데, 이미 중종 때의 성명이 있다면 이제 감히 다시 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또 이것을 끌어대어 규례로 삼는다면 난잡하게 속여 기록하는 폐단을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원전】 35 집 59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신분(身分)
《 효종 016 07/01/01(경진) / 능원 대군 이보의 졸기 》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가 별세하였다. 보는 인조(仁祖)의 아우인데, 집에서 거처할 때의 조심스러움과 점잖기는 여러 종실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원전】 36 집 39 면 【분류】 *인물(人物)
《 효종 016 07/01/02(신사) / 능원 대군의 상에 임하여, 그 집에 이르러서 곡읍하다 》
상이 능원 대군의 상(喪)에 임하여, 그 집에 이르러서 곡읍하였다.
【원전】 36 집 39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효종 016 07/01/03(임오) / 능원 대군의 녹봉을 삼 년간 그대로 지급하도록 하교하다 》
상이 하교하였다. “능원 대군의 녹봉을 삼 년간은 그대로 지급하라.”
【원전】 36 집 39 면 【분류】 *재정-국용(國用)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효종 016 07/01/04(계미) / 간원이 능원 대군의 상에서 행한 사배례의 잘못으로 예조의 당상·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
간원이 아뢰기를,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 조정의 예이고 어그러뜨릴 수 없는 것이 사배(四拜)의 예절입니다. 며칠전 상께서 몸소 능원 대군의 상(喪)에 임하였을 때 배종(陪從)한 신하가 곡을 한 뒤에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신은 놀랍고 의아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물러나와 《오례의(五禮儀)》를 열람해보니, 예문의 본뜻을 크게 잃었습니다. 예문 중에 과연 사배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나 나름대로 해당되는 차례와 절목이 있어, 사배가 죽은 자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닌 게 명백하였습니다. 비록 이 일이 급박한 중에 미처 살피지 못한 소치라고는 하더라도, 즉시 논박하여 바로잡지 아니하고 이목(耳目)을 호도하여 당연한 것으로 삼는다면, 혐의를 분별하고 분수를 엄격히 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6 집 39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효종 016 07/01/06(을유) / 수찬 이경휘가 상소하여 능원 대군의 상례의 결례를 이유로 예관의 파직을 청하다 》
수찬 이경휘(李慶徽)가 상소하기를, “나라에 있어 예(禮)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정에서 시행된 것이 사리에 어긋나고 두서가 없어 의문(儀文)이 전도되므로써 보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면 어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대군의 상에 몸소 임하여 곡읍함에 있어 예관(禮官)이 작정하여 조처한 일이라곤 전혀 없었는데, 비록 급박하였기 때문이라고는 하더라도 어찌 잘못이 없다 하겠습니까. 상께서 그 집에 이르러 중문(中門)에 걸어 들어가셨을 때에 의식을 담당하는 집사(執事)가 안에 있지 않았고 승지와 사관은 모두 밖으로 물러나와 안팎이 단절되었으므로, 성상께서 어떻게 예를 행하였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곧바로 상차(喪次)에 임하신 것이 비록 집안 사람의 지극한 정리를 잃지 않는 것이었으나, 무축(巫祝)을 설치하지 않고 도열(桃펞)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실로 선왕의 예가 아닙니다. 변례(變禮)에서 나온 일인데도 정원은 계품할 줄을 모르고 예관은 다시 의논할 줄을 몰랐습니다. 의주(儀註) 가운데 사배(四拜)의 문구는 정원이 잘못 보고 다시 상세히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저 절하는 것은 임금을 위하는 행위이고 곡하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하는 행위이니, 선후의 순서를 뒤바꿀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곡을 먼저 하고 절을 뒤에 한 것은 예를 제정한 본뜻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혐의를 분별한 옛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간원이 비록 이미 추고하라고 청하기는 하였지만, 예관의 잘못이 어찌 추고 정도로 그칠 일이겠습니까. 일에 임하여 잘못을 저지른 것은 실로 정원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만큼, 신의 뜻으로는 예관과 승지를 아울러 파직시켜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하고 예를 잘못한 죄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임금이 신하의 상에 임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에 대한 예가 있었으나 《오례의(五禮儀)》에 기록된 바가 소략함을 면치 못하니, 마땅히 예관으로 하여금 《의례(儀禮)》의 사상례(士喪禮)를 가지고 우리 나라의 제도로 참작하여 절충하고 가감하여 하나의 의주(儀註)를 만들게 한다면, 일을 당하여 실수함이 없고 지난날보다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모두 급박한 중에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한 소치이다. 어찌 심히 허물할 필요가 있겠는가. 조종(祖宗)이 제정한 예는 고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원전】 36 집 39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효종 019 08/08/16(병술) / 송시열이 상소문에 첨부한 책에서 인평 대군을 사신으로 보냄이 부당함을 아뢰다 》
신에게 마음에 품은 것이 있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간청을 드립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의 순수하고 융성하신 덕은 인륜의 표준으로서 골육지친의 사이에 처하시는 데 있어서 옛날 제왕들보다 훨씬 뛰어나서 단지 후세 제왕들이 따라가지 못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섬으로 유배된 사람이 풀려 돌아오지 못했으나 성상께서 또한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이지 묵은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시니 원근에 이 말이 전해질 때 그 누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이 아첨하려고 한 말이 아니고 실지로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일이 사람들 마음에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인평 대군(麟平大君)은 깊숙한 궁중에서 성장하였기에 말타기를 익힌 적이 없고 또 홍역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선왕께서 늘 이 점을 무척 염려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보호할 책임은 바로 전하에게 있는데 어찌하여 매번 사신의 임무를 맡겨 돌아오면 다시 가게 하여 쉴 겨를이 없게 하신단 말입니까. 머나먼 길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이미 만전의 도리가 아니며 승냥이와 호랑이의 소굴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끝까지 좋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의 일 또한 한심스럽습니다. 지난 선왕조에서는 능원 대군(綾原大君)에게 이러한 행차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잣거리에 떠도는 말들은 ‘전하께서 저들이 준 물품으로 그를 부유하게 해주려고 해서이다.’라고들 합니다. 천금(千金)을 가진 집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 몸밖의 물품들이 나에게 무슨 대수로운 것이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지역을 간단 말입니까. 더구나 뼈저린 수치도 씻지 못하고 있는데 비록 부득이 겉으로는 예의를 표한다 하더라도 저것들의 물품을 볼 때 어찌 차마 이익을 챙길 마음이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왜변이 난 뒤로 전조(銓曹)가 평씨(平氏) 성을 가진 사람을 벼슬에 의망하자 선조 대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어찌 다른 사람이 없어서 이 성씨를 가진 사람을 의망했단 말인가.’ 하시었답니다. 이것이 어찌 문왕(文王)이나 무왕(武王)이 노하신 노여움이 아니겠으며 후세 자손들이 마땅히 법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전(傳)에 이르기를 ‘그 부자와 형제 사이에 한 행동이 충분히 남의 모범이 되어야만 백성이 법받는다.’고 했습니다. 신민들이 지금 전하께서 더없이 인자한 마음으로 수신(修身)·제가(齊家)를 이루시리라 기대하고 있는 판인데 저잣거리의 소인배들이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전하의 골육지친을 의심하고 있으니 신은 통탄하고 있습니다. 신이 구구한 충성심과 사랑의 마음을 금하지 못해 감히 이런 말씀을 전달합니다.
【원전】 36 집 10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효종 019 08/10/20(기축) / 사헌부가 영풍군 이식의 삭탈 관작을 청하니 윤허하다 》
헌부가【대사헌 홍중보(洪重普), 장령 조극선(趙克善), 지평 정석(鄭晳)·허목(許穆).】 아뢰기를,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폐부인(廢夫人) 유씨(柳氏)는 이미 이혼을 했지만, 영풍군 이식(靈豊君李湜)에게는 곧 적모(嫡母)의 분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받들어 모시는 도리를 극진히 해야 할 것인데, 공손치 못하다는 소문이 밖으로 많이 돌고 있습니다.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6 집 119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효종 019 08/10/29(무술) / 송준길이 연회 중지·김세룡 처의 석방·이유태의 사면 등을 청하다 》
찬선 송준길이 면대를 청하여 상이 그를 불러보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어젯밤 천둥의 변고는 지극히 우려할 만했습니다. 신이 어떤 일의 감응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요즘의 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상께서 정신을 가다듬으시고 정치를 도모하시어 조정이 문란하게 되지 않았는데, 변괴가 일어나는 것이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른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문자로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우러러 진달하려 했지만, 혹 미진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감히 면대를 청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리치는 천둥과 번쩍이는 번개가 밤새도록 번갈아 일어나 번쩍번쩍 우르르 쾅쾅거리는 것이 마치 한여름과 같았다. 내가 벌벌 떨며 두려워한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사기일(私忌日)인데 찬선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이에 나와 접견하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겨울철에는 우레가 그 소리를 거두어들이고 양기가 깊이 숨어버리는데, 이와 같이 발동하는 것은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하늘을 섬기고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그 이치가 한가지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노여워하면 자식이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것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병자년 겨울에도 일찍이 이런 변이 있었는데, 오늘날처럼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송나라 말 도성에 어느 날 물난리가 났는데, 이강(李綱)이 오랑캐의 화란이 있을 줄 알고 글을 올려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재이는 끝내 헛되이 감응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근래 변괴가 거듭 나타나는데도 범상하게 보고 마니, 혹 성명께서 소홀히 하시는 바가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찬선은 진실로 마음먹은 것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모두 다 진술하도록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이런 큰 변이를 만났으니 크게 경계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듯한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적막하게 아무 소문도 들리지 않습니까? 반드시 성상께서 먼저 정하신 것이 있으실 것이니, 탑전에서 듣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크게 경계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재앙을 늦추는 계책은 공구수성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비록 진부한 설이지만 이것을 버리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자신에게 허물을 돌이켜 덕을 닦아서 탕(湯)에게 제사 지낸 다음날 꿩이 날아와 우는 재앙을 돌렸고, 태무(太戊)는 덕을 닦아서 하루만에 자란 요사스런 뽕나무를 말라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덕을 닦음이 있다면 어찌 그런 감응이 없겠습니까. 안으로 덕을 닦고 밖으로 조처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있는 듯합니다. 선유들이 말하기를 ‘한 생각이 착하면 상서로운 큰 별이 나타나고 경사스런 구름이 피어 오르며, 한 생각이 악하면 사나운 바람이 불고 억수같은 비가 내린다.’ 하였으니, 이 점이 바로 성상께서 성찰하셔야 할 바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런 비상한 변고를 만나서는 반드시 비상하게 조처하는 일이 있어야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자전께 연회를 올리는 거조를 참으로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늘이 경계를 보인 지 열흘도 지나기 전에 갑자기 궁중에서 잔치를 베푼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제왕의 큰 효도는 이런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록 천만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이번 재변으로 인하여 그만둔다면 수성(修省)하는 도에 합치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마음에도 편치 못하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다. 찬선의 말이 이와 같으니, 대신에게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멀리 시골 구석에서 살아 비록 그 당시의 일을 자세히 모르지만, 이를테면 김세룡(金世龍)의 처의 요사스럽고 괴이한 행동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성상의 형제간에 우애를 두터이 하는 지극한 덕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딴 섬에 멀리 안치한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구휼해 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어찌 유독 선왕의 핏줄임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지금 만약 서울로 옮겨 별도로 집을 한 채 마련해서 거처하게 하고, 궁궐에 출입할 수 없도록 금지시킨다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도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징(李?)이나 이숙(李潚)을 일시에 방환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됨이 요사스럽고 괴이한 짓을 하는 데 못하는 짓이 없다. 만약 서울로 데려온다면 다시 남편의 무리와 통할 것이니, 목숨을 보전하게 하는 방법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미심쩍어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비록 서울로 옮기더라도 엄하게 금지시키면 근심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사람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오직 성상께서 헤아려 처치하시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날씨가 이처럼 추운데, 송시열은 잘 있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 또한 서찰을 받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매번 심리(審理)하는 것으로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거조를 삼는데, 이런 방법 말고 달리 어떤 계책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심리하는 거조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옛날 사람들이 비록 자주 사면하는 것을 경계하긴 하였지만, 실정이 아닌데 죄를 뒤집어 쓴 자가 석방되면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이 물러나 시골에 있어서 시무(時務)를 알지는 못하지만, 백성들이 원하는 바는 곧 영장(營將)을 파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들어보니, 조정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승지 서필원(徐必遠)도 반드시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서필원이 아뢰기를, “영장의 설치는 참으로 아름다운 법이나,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이 혹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련할 때에는 영장이 없어서는 안 되니, 신의 소견으로는 영장은 결코 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수어 종사(守禦從事) 이시술(李時術)의 말을 들으니, 강원도 군졸들이 빈한하여 보기에 딱한데 기예는 자못 정밀하다고 합니다. 이로써 본다면 비록 영장이 없더라도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장을 파하기는 쉽지만 다시 설치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 어찌 혁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한 선제(漢宣帝)가 재앙을 만나 내린 조서에 ‘짐이 대도에 막혀 하늘의 재앙을 불러오고 말았다. 널리 사방의 선비를 구하여 빠뜨리고 잘못한 것을 닦고자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보통 군주의 일이지만 또한 오늘날 법으로 취할 만합니다.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 등은 결코 다른 마음이 없는데, 죄를 받고 폐치된 지가 벌써 오래되었으니, 유독 천지의 대도에 유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심대부는 조종(祖宗)의 한 조항을 쟁론한 데 불과하고, 유계는 인(仁)자로 거듭 시호를 내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 데 불과합니다. 선왕의 성대한 덕과 큰 공렬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없었던 일인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헐뜯어 논의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심대부는 늙어 감당할 수 없겠지만 유계는 재주와 학문이 매우 애석합니다. 옛날 장량(張良)은 가장 미운 자를 제일 먼저 봉해주자고 청하였으니, 한 가지 재주나 한 가지 기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모두 거두어 함께 길러주어야 할 이 때에 어찌 거두어 서용하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유태(李惟泰)의 일은 신이 일찍이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혹 성명께서 모두 다 통촉하지 못하시는 점이 있을까 염려해 이에 감히 다시 진달합니다. 능원군(綾原君)의 부인 유씨(柳氏)는 곧 역신(逆臣) 유효립(柳孝立)의 딸이기 때문에 과거에 헌부가 이혼을 청했는데, 선왕께서 우애가 가장 두터우셔서 이혼을 못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혼시키지 않고, 강등해 첩으로 삼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반역한 집안의 자손은 법제상 마땅히 이혼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성제(呂聖齊)의 집에서 상소하여 이혼을 청했는데, 조경(趙絅)이 당시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허락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이유태와 송시열이 산방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마침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송시열은 진달한 소책자 속에서 조경의 잘못을 깊이 공격하였고, 이유태도 뒤이어 소를 올렸습니다. 그의 말이 비록 지나쳤지만 어찌 깊이 죄줄 수 있겠습니까. 상소에서 한 말은 바로 주자(朱子)가 진준경(陳俊卿)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있는 문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하늘의 태양이 밝게 비추는데, 신이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이는 작은 허물이니 탕척하여 자신을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감히 사적으로 벗을 비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의 여론입니다.” 하였다.
【원전】 36 집 121 면
《 효종 020 09/05/16(임자) / 인평 대군 상가에 쓸 미포를 별도로 수송하라고 하교하다 》
상이 하교하였다. “인평 대군 상가에 쓸 미포(米布)를 능원 대군(綾原大君) 초상 때의 예에 따라 별도로 수송하라.”
【원전】 36 집 146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 효종 020 09/05/29(을축) / 홍중보 등이 인평 대군 집에 친림하여 치제하는 것을 중지하기를 청하다 》
대사간 홍중보(洪重普)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인평 대군의 집에 친림하여 치제(致祭)하겠다는 분부가 내려졌다고 합니다. 신들도 성상의 천륜(天倫)의 아픔이 갈수록 더 사무쳐서 스스로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이러한 전교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제도에도 신하의 초상에 친제하는 위의가 본시 없거니와, 고례를 참고하여 보아도 역시 적용할 만한 예의가 없으니, 성상께서 일시의 슬픈 마음으로 열성(列聖)이 시행하지 않았던 예를 갑자기 행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난해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초상에도 이 예를 친행하지 못하였으니, 더더욱 앞뒤의 차이를 둘 수 없습니다. 대군 집에 친림하여 치제하겠다는 분부를 중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전(禮典)에 세 번 친림하는 예가 있으므로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번거로이 논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6 집 14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효종 021 부록 / 효종 대왕 행장(行狀)① 》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 행장 국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으로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둘째 아들이고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 이날 저녁 흰 운기(雲氣) 세 가닥이 침실(寢室)로 날아 들어와 서쪽 편 창 사이에 엉겨 있었는데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가 아니었다. 한참 있다가 흩어졌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태어난 지 4, 5세에 성품과 도량이 활달하여 우뚝하게 거인(巨人)의 뜻을 지녔다. 놀이를 할 때에도 범상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걸음걸이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다. 철따라 나는 과일을 처음 보면 먼저 반드시 양전(兩殿)께 바친 뒤에야 맛보았으므로 양전이 항상 “우리 집의 효자(孝子)이다.” 하였다. 매일 새벽이면 번번이 먼저 일어나 양전에 문안하고 이어 좌우에서 모셨다. 양전이 복용(服用)하는 모든 물품을 시어(侍御)하는 사람이 장배(藏排)함에 있어 정제(整齊)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면 왕이 반드시 직접 정제하였다. 아무리 미세한 일일지라도 바르지 않은 것을 싫어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양전과 인헌 왕후(仁獻王后)가 함께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돌보아 중하게 여기는 것이 특별히 융숭하였다. 5세가 되자 글을 배웠는데 권면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였으며, 다른 아이들이 글읽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권면하여 부지런히 배우게 하였다. 항상 전사(前史)를 읽다가 인륜상 잔인한 부분에 이르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8세 되던 병인년에 봉림 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고 신미년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는 고(故)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대족(大族)이요 법가(法家)였다. 을해년 12월에 인열 왕후가 승하하자 왕이 사제(私第)에 있으면서 중문(中門) 밖의 악실(堊室)에 거처하였으며, 상례(喪禮)를 법제대로 극진히 집행하여 과일을 먹지 않았고 시어하는 사람은 복례(僕隸) 두어 사람뿐이었다. 슬퍼하는 것이 절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것이 독실하였으므로 차탄하면서 열복(悅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년 상기(祥朞)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큰 난리를 만났다. 인조(仁祖)가 왕에게 명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먼저 강도(江都)로 가게 했는데, 가다가 중로(中路)에 이르러 사세가 더욱 위급해져 대가(大駕)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밤에 두서너 명의 노복과 함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그러나 중도에서 어찰(御札)을 받고 이어 강도로 들어갔다. 밤에 천상(天象)을 살펴보면서 시사(時事)를 점쳤으며 주야로 동쪽을 바라보고 연모(戀慕)했는데, 침식(寢食)할 때를 당할 적마다 행재소의 제반 사정이 서글픔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다. 행궁(行宮)의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금백(金帛)을 내어 무사(武士)를 모집하여 누차 파견했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 가운데 단지 2인만이 도달하였다. 그중 하나는 궁노(宮奴)였는데 어찰(御札)을 받들고 돌아왔으므로 모두들 지성(至誠)이 감응된 소치라고 하였다. 정축년 정월 강도가 함몰당하였고 2월에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인질(人質)로 심양(瀋陽)에 갔다. 북행(北行)을 떠나면서부터 대궐(大闕)을 연모하는 회포가 더욱 간절했는데 인조 대왕에게 편안하지 못한 체후(體候)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고 기거(起居)에 대한 의절(儀節)에 말이 미치면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으므로 곁의 사람들도 감동하였다. 소현 세자와 같은 관사(館舍)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형제 사이의 정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므로 간간이 난처한 일이 있었어도 정성을 다하여 주선하여 기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없었으며 화기 애애하여 사람들이 이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청(淸)나라 사람들이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소현 세자와 함께 동행하려고 하자 왕이 아문(衙門)에 극력 말하여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측은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동하여 중지하였다. 그 뒤에도 번번이 자신이 가기를 청하였는데 소현 세자와 함께 간 경우도 두 번이나 되었다. 갑신년 봄 청나라가 북경(北京)으로 들어갔고 을유년 봄에 소현 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있어 병을 앓다가 죽었다. 왕이 계속하여 본국으로 나오니, 인조가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는 것으로 이에 대신과 여러 경재(卿宰)들에게 순문(詢問)하여 드디어 책정(策定)하여 세자로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왕이 처음에 명을 듣고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장(疏章)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네가 총명하고 효우(孝友)스럽기 때문에 특별히 형이 사망하면 아우에게 미친다는 예법을 쓴 것이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연마하여 형의 자식을 너의 자식처럼 여기라.” 하였다. 다시 사양하니 또 답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결정되었고 순모(詢謀)가 모두 같았으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도심(道心)을 지켜라.” 하였다. 왕이 심양에 있을 적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왕을 보고서는 은밀히 서로 말하기를, “참으로 임금 노릇할 사람이다.” 했었다.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하루는 피곤하여 누워 있노라니 갑자기 오색(五色) 운기가 침실에 가득 서리면서 벽 사이로 거북 한 마리가 머리를 내어 놓고 있었는데 몸체가 매우 컸다. 왕은 꿈인가 의심하여 자세히 보니 꿈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 관상보는 사람의 말이 사실임이 증험된 것이고 거북 또한 앎이 있었던 것인 듯하다. 9월 27일이 연길(涓吉)이었으므로 유사가 궁의(宮儀)와 장위(仗衛)를 갖추어 잠저(潛邸)에서 맞이하여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책례(冊禮)를 거행하였으며 빈궁(嬪宮)은 내정(內庭)에서 책보(冊寶)를 받았다. 다음 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였는데,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박사(博士)의 자리로 나아가 《대학(大學)》을 강하면서 한참 동안 토론하니, 빙 둘러서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열복하였다. 이에 하령(下令)하여 심양에서 온 우양(牛羊)을 모두 관서(關西)에 주어 공용에 보태게 하였다. 왕은 본디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외부(外傅)에 나아가면서부터 학업이 더욱 증진되어 일찍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북행(北行)의 곤경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은 적이 없어 새벽녘까지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에서 글을 읽는 것을 폐하지 않았는데 그 책은 곧 《서전(書傳)》이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흠탄(欽歎)하여 마지않았다. 연경에 들어가기에 이르러서는 청나라가 자기들이 노획한 금옥(金玉)과 금수(錦繡)를 나누어 보내주었으나 왕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 대신 우리 나라의 포로를 돌려달라.”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따랐다. 오직 경적(經籍)과 고금의 서사(書史)에만 유념할 뿐 그 이외의 특이한 보배와 진기한 재화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올 때의 행리(行李)가 유독 깨끗하였다. 춘위(春?)에서 덕을 배양하면서는 날마다 빈료(賓僚)들을 가까이하여 삼조(三朝)의 여가에는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였다. 그리하여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서전》의 무일편(無逸篇), 《시전》의 칠월장(七月章), 옛 잠명(箴銘) 등의 글을 가져다가 병풍에 쓰게 하여 펼쳐 놓고 항상 보았다. 기축년 5월 초에 인조(仁祖)가 매우 위독하자 왕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서 올렸고 승하함에 이르러서는 맨땅에 거처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에 관한 예절을 아뢰니 왕은 차마 못하겠다는 것으로 거절하였다. 대신과 근신이 다시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가 잇따라 아뢰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행례(行禮)하는 날은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다가 예관이 다시 청한 뒤에야 나왔는데 눈물을 비처럼 쏟았다. 시신(侍臣)과 백관들도 모두 오열하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선정전(宣政殿)의 동쪽 협문(夾門)을 걸어서 나아갔는데, 통례(通禮)가 소여(小輿)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물리쳤다. 인정문(仁政門) 어좌(御座) 앞에 이르러서는 오래도록 서 있으면서 올라가지 않자 대신이 예조 판서에게 뒤따라 나아가 오르기를 청하게 한 연후에야 올라갔다. 예(禮)를 파하고 나서는 걸어서 인정전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간원이 계청(啓請)하기를, “졸곡(卒哭) 전에 시조(視朝)하는 것을 한결같이 옛 규례에 의거하여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례(情禮)에 있어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누차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저궁(儲宮)께서 졸곡 전에 서연(書筵)에서 입는 복색에 대해 의논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도(經道)는 만세의 상법(常法)이기 때문에 한때의 일 때문에 문득 권도(權道)를 쓸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효제(孝悌)의 도리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나는 말세(末世)에서 순전히 권도만 쓰는 것을 증오한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9월에 발인한 뒤 정원이 능에 행행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어제 교외(郊外)에서 영여(靈輿)를 바라보면서 안력(眼力)이 다할 때까지 그러고 있으니 조금쯤 시간이 가는 아픔이 풀렸었는데, 멀리 가버려 가리워지니 다시는 바라볼 데가 없었다. 돌아옴에 전우(殿宇)가 적요하여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 조금이나마 이런 회포를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시 산릉에 나아가 망극한 슬픔을 극진히 하는 것뿐이다. 이제 이 계사를 보건대 어찌 오늘날만 슬프기 때문일 뿐이겠는가. 실은 천지와 함께 끝없는 슬픔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대신들이 극력 청하여 정지시켰다. 반우일(反虞日)에는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여 곡(哭)하였는데 미천한 하인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영사전(永思殿)에서 삭망(朔望)과 절일(節日)에 행례(行禮)할 때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혹한기나 한더위에도 정지한 적이 없었다. 경인년 가을에 가서 장릉(長陵)을 살펴보고 나서 엎드려 슬픔이 다하도록 통곡하였는데 찬례(贊禮)가 중지하기를 청하여도 중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르내리는 즈음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신묘년 6월 부묘(쯊廟)한 뒤 진하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臺臣)과 뭇신하들이 옛 규례를 원용하여 매우 간절하게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태묘(太廟)를 개수하여 벽을 바르고 있었는데 유사가 잘 판비(辦備)하지 못한 탓으로 즉시 완공하지 못했으므로 열성(列聖)들의 신위(神位)를 이안소(移安所)에 오래도록 유치했었다. 왕은 영령을 편안히 모실 수 없는 것을 두렵게 여겨 감히 편안히 거처하지 못하고 전랑(殿廊)에 내려가 앉아 도로 봉안(奉安)할 때까지 기다리려 하였다. 정원이 도로 전상(殿上)으로 올라갈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태묘의 신령이 편안한 뒤에야 과궁(寡躬)도 편안할 수 있다. 지금 묘주(廟主)가 밖에 있는데 어떻게 감히 마음놓고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묘주를 봉환(奉還)한 연후에 전상으로 올라갔다. 임진년에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인주(人主)가 혹 병고(病苦)가 있으면 모르지만 병고가 없으면 마땅히 국전(國典)에 의거하여 직접 사시(四時)에 올리는 제사를 행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또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에게 이르기를, “과거 조종조에는 매년 조종의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했는데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건대 이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이에 봄 2, 3월과 가을 7, 8월에 돌려가면서 전알하는 것을 영원히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였다. 정유년에 《시전》의 육아편(蓼莪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시(詩)는 성정(性情)에 근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감발(感發)하여 징창(懲創)하게 하는 것인데, 《시전》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오열하게 되어 한 글귀를 읽을 적마다 목소리가 처연(悽然)하게 된다.” 하였다. 사의(辭意)가 정성스럽고도 측은하였으므로 좌우의 신료들이 모두 부복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선조(先朝)를 받들어 깊이 사모하는 정성이 이러하였다. 왕의 효도와 우애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전고에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실로 필사(匹士)로는 증자(曾子)·민자(閔子)와 같고 제왕(帝王)으로는 순(舜)임금·문왕(文王)과 같았다. 대비(大妃) 조씨(趙氏)에게 숙환이 있었는데 임금의 봉양이 극진하고 위호(衛護)가 고루 갖추어졌던 탓으로 평안할 수가 있었다. 또 외진 곳에 거처하는 것은 겨울이나 여름에 마땅하지 않다는 것으로 새로 전우(殿宇)를 지어 만수(萬壽)라는 액자(額字)를 내리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여 모셨으며 뜻과 음식을 겸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국전(國典)에 대비에게 상수(上壽)할 때 베푸는 연회를 풍정(豊呈)이라고 하는데, 왕이 한 번 거행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백성이 지친데다가 천변(天變)이 겹쳤으므로 거행하려다가 도로 중지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정유년 겨울 대략 연의(宴儀)를 갖추어 진연(進宴)이라 이름하고 만수전에서 대비에게 상수하였는데, 의식은 간략했지만 예법을 잘 갖추었고 화기 애애했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기뻐하였다. 이해 가을 왕이 효릉(孝陵)에 행행하여 전알하였는데 소현(昭顯)의 분묘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려 하다가 이윽고 하교하기를, “지난번 꿈에 소현의 안색이 매우 기뻐하는 것이 평소와 같았으나 우연일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또 꿈에 나타나서 몸소 전제(奠祭)를 지낼 수 없다고 말을 했더니 나의 손을 잡고 슬픈 안색을 지었다. 꿈을 깨고 나서도 황연(턫然)한 것이 평상시와 같아서 슬픈 감회를 형상하기 어려웠다. 해가 짧기는 하지만 나의 회포를 풀고 싶다.” 하고, 전알한 뒤 종관(從官)을 가려 데리고 가서 몸소 전제(奠祭)를 지냈다. 인평 대군 이요(麟坪大君李홏)와는 어릴 때부터 잘 적에 반드시 이불을 같이 덮었고 하루도 차마 떨어져 지내지 못하였다. 장성하여서도 잠시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그때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금중(禁中)을 출입하는 것도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수시로 하게 하였다. 매양 조가(朝家)에 사신(使臣)이 모자랐기 때문에 진사(陳謝)하는 중한 일을 부득이 대군(大君)에게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주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군이 떠날 때에는 안타깝게 손을 놓는 한스러움을 지녔고 돌아올 때에는 영접하는 사개(使介)를 멀리 압록강 밖에까지 보내어 법온(法춠)과 친찰(親札)로 위로하였다. 상봉(相逢)하면 배로 기뻐하여 희비(喜悲)가 겸하여 극진하였는데, 상체(常?)의 화락한 즐거움도 그 지극한 정을 견주기에는 부족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인평 대군이 마침 참판 오정일(吳挺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떤 조사(朝士) 하나가 술에 취하여 무망(誣妄)스런 말을 했는데, 군수 서변(徐쮷)이 전해진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고하기를 “인평 대군이 소를 잡아 놓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데 일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직접 국문했는데 서변은 장하(杖下)에서 죽었고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찬출(竄黜)시키니, 유언(流言)이 종식되었다. 인평이 무술년 봄부터 병을 앓아 점점 고질이 되었는데 왕이 주야로 사람을 시켜 문안하고 의약(醫藥)을 보내는 것이 길에 잇달았었다. 하루는 임금이 직접 임어하여 보았는데, 가인(家人)의 예(禮)로 접견하니, 인평이 감동하여 침중한 병에서 갑자기 소생되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조금 차도가 있는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5월 13일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급함을 알리니 왕이 소여(小輿)를 타고 창황하게 곧바로 나아갔고 근신(近臣)들은 걸어서 따라갔다. 왕이 임어하여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시신을 어루만지며 길게 호곡(號哭)하니 눈물이 샘물처럼 솟았다. 시위(侍衛)하는 신하들도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 무더위가 한창이었으나 곁에 앉아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죽도 먹지 않았으며, 비를 무릅쓰고 잇따라 임어하여 염습(斂襲)하는 자리에도 직접 임하였다. 성복(成服)과 입관(入棺)에서부터 빈소(殯所)·발인(發靷)은 물론 묘지에 장사지내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대내(大內)에서 마련하고 관(官)에서 준비하였다. 그 부인(夫人)이 잇따라 죽었는데 그때에도 처음 죽었을 때부터 하관(下棺)할 때까지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주었으며 대군(大君) 때와 마찬가지로 중관(中官)을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숭선군 이징(崇善君李?)과 낙선군 이숙(樂善君李潚)은 인조 대왕의 후궁(後宮) 조씨(趙氏)의 소생인데, 그 어미가 악역(惡逆)을 저지르고 징이 또 거듭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됨을 인하여 조정의 의논이 매우 준열했으므로 절도(絶島)에 폐치되어 있었다. 왕이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를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오랫 동안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장기(캗氣)에 손상당할까 염려하는 골육의 정을 생각하는 것을 끝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신년 여름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그들을 자주 대내(大內)에 출입하게 함으로써 친친(親親)의 은혜를 보였다. 숙(潚)은 관례(冠禮)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중(禁中)에서 관례를 행하였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훈계하여 가르쳐 글읽기를 권면하였으며 사여(賜與)하는 물품은 선조(先朝) 때에 견주어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라고 명하니, 삼사가 달이 넘도록 집요하게 간쟁하고 대신들도 불가하다고 했기 때문에 드디어 정지하였으나 왕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기해년 봄 정월에 대신들을 나오게 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인평 대군의 상(喪)을 당함으로부터 동기(同氣)가 끝내 적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입알(入謁)하는 사람은 모두 몸에 장복(章服)을 입었는데 징·숙만이 백의(白衣)로 나아와 알현하니, 마음이 매우 서글프다. 내가 그들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고 싶어서 경들과 의논하려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탄식하면서 눈물을 머금으니 뭇신하들도 서로 눈물을 닦으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봉작(封爵)할 것을 명하였다. 낙선군(樂善君)은 빙례(聘禮)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예조에 명하여 배필(配匹)을 간택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이 본가(本家)로 하여금 듣고 본 것을 종부시(宗簿寺)에 보고하여 알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거처하고 있는데 어디서 듣고 본 것이 있어 보고하여 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결국 예조로 하여금 택정(擇定)하게 하여 행례(行禮)하였다. 그의 누이 동생은 옹주(翁主)로서 그 어미를 도와 흉한 짓을 하였으므로 백관과 삼사가 율에 의거하여 조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차마 법을 가하지 못하고 사죄(死罪)를 용서하여 외방으로 옮겨 보냈는데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또한 석방하여 돌아오게 한 다음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으며 노비와 전토도 아울러 모두 도로 내주어 의식(衣食)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진괴(珍?)를 계속 내려서 은혜롭게 돌보는 것이 변함이 없었다. 역강(逆姜)은 소현 세자의 빈(嬪)으로 계속 악독한 짓을 자행하다가 스스로 하늘의 벌을 자초함으로써 선조(先朝)에 죄를 얻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해도(海島)에 옮겨 안치시켰었는데 왕이 딱하게 여겨 방환시켰다. 또 윤3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징·숙 등에게는 이미 관작을 회복시켜 관대(冠帶)를 하고 출입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소현 세자의 자녀들은 그 어미의 일 때문에 아직도 선적(璿籍)에 소속되지 못하고 있으나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내가 매우 슬프게 여긴다. 그들이 좌죄(坐罪)된 것도 본디 징·숙과 다를 것이 없는데, 더구나 선왕(先王)의 하교에 ‘형의 자식을 너의 자식처럼 여기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이겠는가. 내가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이제 징·숙과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고르지 않다는 탄식이 없게 함으로써 우리 선왕께서 내리신 분부를 저버리지 않고 싶은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지당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교하기를, “작호(爵號)를 써서 내리도록 하겠다. 오늘 첨의(僉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기쁘다. 내가 소현(昭顯)과 동시에 북행(北行)하여 험난한 이역 땅에서 어렵고 위험한 지경을 모두 겪었는데 늘 좌우에서 이끌어 주면서 주야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쪽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인사(人事)가 갑자기 덧없이 되어버리고 불량한 사람이 이어 변을 야기시켰다.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항상 아프게 여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영령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어찌 한스러움이 없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한참 동안 오열하였다. 그리하여 소현 세자의 자녀들이 모두 복작(復爵)되었다. 아들은 경안군(慶安君)에 봉하고 딸 둘은 군주(郡主)에 봉했는데, 때 맞추어 시집 장가 보냈고 제택(第宅)과 의복(衣服)을 갖추고 하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안군과 군주들을 대내(大內)로 불러들여 가까이 두고 다독거려 사랑했으며 거처와 음식을 공주(公主)와 차이가 없게 하였다. 부위(副尉)는 인접하는 이외에 혹 금원(禁苑)으로 불러들이기도 하는 등 시우(視遇)가 또한 부마(駙馬)와 구별이 없었다. 친족에게도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여 은뢰(恩賚)가 널리 흡족하였다.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는 인조 대왕의 아우인데, 존경하여 우대하는 것이 특이하였으며, 그의 서자(庶子)인 영신정 이형(靈愼正李瀅)을 특별히 사옹원 부제조에 제배하였다. 이조가 자급(資級)이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숙부(叔父)의 나이가 많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 달리 없다.” 하고, 이에 가자(加資)하여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능원군의 부음(訃音)이 들리자 소복(素服)을 입고 애림(哀臨)하였으며 인정과 예문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인흥군 이영(仁興君李瑛)·정신 옹주(貞愼翁主)·정휘 옹주(貞徽翁主)가 죽었을 적에도 모두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였다. 정인 옹주(貞仁翁主)는 그의 아들 안산(安山)의 수령인 홍언(洪슄)을 따라가 있다가 군아(郡衙)에서 죽었는데, 그 집이 도성(都城)에 있기 때문에 발인(發靷)하여 돌아오자 그 집에다 빈소(殯所)를 차리게 하여 특이한 은수(恩數)를 고르게 내렸다. 이들은 모두 선조(宣祖)의 자녀이다. 학문에 대해서는 이미 대요(大要)를 습득하였는데 도심(道心)을 지키라는 전교(傳敎)를 받드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근신(謹愼)을 가하여 잠시도 감히 잊은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 하루에 세 번 여는 경연을 부지런히 하여 추위나 더위를 이유로 폐한 적이 없었다. 기축년 10월에 처음 경연에 나아가 《중용(中庸)》 서문을 강하였는데 읽어 가다가 편말(篇末)에 이르러서는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면서 강관(講官)에게도 휘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周子)의 이름을 아울러 휘하였다. 경인년 이른 봄에 바야흐로 미령한 증후(症候)가 있어 연신(筵臣)이 우선 정강(停講)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열고 학문을 논란하는 데에서 들을 만한 것이 많다. 그리고 심한 통증이 없는데 어떻게 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바로 6월을 당하여서도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임어하니 연신(筵臣)이 과로로 건강이 손상될까 우려하여 또 하루에 한 번씩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본디 병을 많이 앓아서 겨울철 혹독한 추위에는 사세가 자주 경연을 열기가 어렵겠기에 이런 때에 자주 경연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11월에 우선 경연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혹한기가 닥치면 내가 사세를 살펴 조처하겠다. 우선은 자주 품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일찍이 《시전》을 강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전》을 정지하고 《서전》을 강하였으니, 택우(宅憂) 때문이었다. 아침과 낮에는 《서전》을 강하고 저녁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연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 대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군신이 서로 만남에 있어 어찌 정례(定例)가 있겠는가. 나는 대신(大臣)과 간신(諫臣)을 모두 경연에 입참하게 하고 싶다. 만나는 것이 드물면 정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하였다. 《대학연의》를 진강하면서 ‘이단(異端)을 공부하면’이라는 장(章)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때에는 석불(釋佛)의 해가 양주(楊朱)·묵적(墨翟)보다 심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도교(道敎)는 행하지 않았는데 당(唐)나라의 임금은 연단(鍊丹)하다가 죽은 경우도 있다. 송 진종(宋眞宗)은 이미 그것이 그른 것인 줄 알았으면서도 미혹됨을 면치 못했으니, 이 점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왕이 이단(異端)을 싫어하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삭서(朔書)를 써서 올린 내용에 불가(佛家)의 용어를 쓰는 것은 정원에 명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학문을 하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학문의 공효가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걱정은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인주(人主)의 일신은 공격받는 데가 많은 법이어서 더욱 유념해야 될 곳이다.”하였다. 【원전】 36 집 194 면 《 현종 011 07/01/03(갑신) / 대신과 비국 제신을 인견하여 수군과 진을 옮기는 일의 이해 등을 논의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대신에게 명하여 공조 판서 이완(李浣), 강화 유수(江華留守) 서필원(徐必遠)과 함께 주사(舟師)와 진(鎭)을 옮기는 일의 이해를 논하게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이 아울러 잘 수거(修擧)되면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단지 군병의 숫자가 적어서 수군·육군을 둘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수군은 파하고 오로지 육군으로만 하려는 것인데 이완이 진을 옮기는 것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는 성명께서 참작하여 헤아리시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만 또한 대신과 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일들도 모두 주사를 파기하느냐 않느냐는 데 관계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하문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이완이 이미 선조(先朝)께 품하여 강정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경솔히 개정하는 것이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상 허적은 아뢰기를, “신은 이미 가슴속에 아무런 요량이 없었으므로 필원의 말을 듣고 처음에 옳게 여겼었는데 이완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또한 편리하고 온당한 것 같았습니다. 국가에서 할 수 있는 형세가 있으면 둘 다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군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는가?”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중군에게 소속(所屬)을 모두 거느리게 하면 유수(留守)가 거느린 것은 4백, 5백 명에 불과하게 되고 유수가 다 거느리게 하면 중군의 설치는 무익한 데에 관계되는 것 같기 때문에 파기시키려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수의 친병(親兵)은 2초(哨)로 정하고 중군은 그대로 두게 하라.”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군향(軍餉)의 정수(定數)에 대해서 이완이 불가하다고 했습니다만, 군향은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것을 신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존한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쌀이 12만 석(石), 콩이 2만 석, 벼가 1만여 석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필원의 말은 민폐를 위한 것이고 이완의 말은 먼 훗날을 위한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경솔하게 숫자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필원은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水使)의 요미(料米)가 단지 1백 석이기 때문에 용도를 잇댈 수가 없습니다. 군관을 돌려보내는 사태까지 발생하니,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의당 1백 석을 더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진연을 물려서 정한 것은 재이의 발생 때문인데 신의 의견에는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이미 해가 바뀌었으니 날짜를 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의당 2월 그믐께로 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진연에 관한 제반 일을 지금 거행해야 됩니다. 외방의 기악(妓樂)도 올라오게 하고 예관(禮官)에게 먼저 날짜를 가리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양전(兩殿)에 각기 따로 진연해야 하니 이렇게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상이 송준길의 소장을 대신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소장의 한 조항은, 김좌명(金佐明)을 보양관(輔養官)으로 삼는 것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좌명이 이 직임에 합당하다 해도 체개(遞改)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고, 상이 따랐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능원 대군(綾原大君)이 집에서 행한 지극한 행실은 남이 따를 수 없는 것으로 종척(宗戚) 가운데 가장 훌륭합니다. 청검한 절의가 환히 알려져 있는데 시장(諡狀)이 없는 탓으로 아직껏 시호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흠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조(國朝)의 대신들에게 행장이 없이도 시호를 내린 규례가 있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유명(遺命)했기 때문에 본가에서 시장을 짓지 않았습니다만 신들이 진달하여 시호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능원 대군에게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대사간 정만화가 아뢰기를, “필원(必遠)의 말을 듣건대 본부의 중군(中軍)이 군병을 침학한 일이 있다고 하니, 본부로 하여금 사계(査啓)하게 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오두인(吳斗寅)이 선천 부사(宣川府使) 정호신(鄭好信)에게 청북(淸北) 중진(重鎭)의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탄핵하고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6 집 494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군사-군정(軍政)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현종 013 07/12/14(경신) / 김수항·김우석·정재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수항을 형조 판서로, 김우석(金禹錫)을 승지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삼았다.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에게 혜목(惠穆)이란 시호를 내리고,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에게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삼았다.
【원전】 36 집 53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 현종 013 08/03/16(경인) / 능원 대군 이보의 영시연에 술과 풍악을 내리다 》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의 집에 영시연(迎諡宴)을 베풀었는데, 상이 술과 풍악을 내리라고 명했다.
【원전】 36 집 54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현종 021 14/09/04(경오) / 총호사 김수흥과 신릉 작업에 대해 의논하다 》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이 신릉(新陵)의 광중(壙中)을 뚫은 뒤에 들어오니 상이 불러 보았다. 수흥이 아뢰기를, “광중의 토질은 정세하고 견고하며 색 또한 윤기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토양이 활석(滑石)의 가루와 같다.” 하였다. 수흥이 또 아뢰기를, “화소(火巢)로 정해진 한계 안에 인가(人家)가 25채, 무덤이 60여 기, 민전(民田) 5, 6결이 있습니다. 인가는 이런 추운 절기를 당하여 철거해 옮기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들도 봄을 기다려 이사하기를 원하니 마땅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합니다. 무덤은 옛날 화소(火巢) 밖에 있으니 지금 파낼 필요는 없고, 전토(田土)는 모두 다른 땅으로 바꿔주기를 원하고 돈으로 받는 것은 원치 않으니 억지로 강요하기는 어렵습니다. 능원 대군(綾原大君) 집의 면세전(免稅田)은 화소 밖에 있으니, 공전(公田)으로 바꿔주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 국상 때 대왕 대비께서는 초기(初朞)까지는 백의(白衣)를 사용하였고, 재기(再朞)에 이르러서는 천담복(淺淡服)을 사용하였다. 이번 천릉(遷陵) 때에 비록 시복(쳠服)에 대한 절목(節目)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천담복으로 마련해야 한다. 이 뜻을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강론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7 집 45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의생활-예복(禮服)
《 현개 014 07/01/03(갑신) / 강화 유수 서필원 등과 함께 수군과 육군 및 진을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다 》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서필원도 입시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공조 판서 이완, 강화 유수 서필원과 함께 수군과 육군 및 진(鎭)을 옮기는 일의 이해를 논하게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수군과 육군이 아울러 잘 수거(修擧)되면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단지 군병의 숫자가 적어서 수군·육군을 둘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수군은 파하고 오로지 육군으로만 하려는 것인데 이완이 진을 옮기는 것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는 성명께서 참작하여 헤아리시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만 또한 대신과 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주사를 파기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두 신하가 쟁집하는 것은 단지 주사(舟師)에 관한 한 가지 조항입니다. 덕포(德浦) 등 3진에 소속된 수군은 원래 강화도에 거주한 자가 4백 명인데 본부로 이속하고 그 대신에 별도로 요리하여 충당하게 한다면 양쪽 다 편리할 듯합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조치를 해야 충당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3진의 전선은 창설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정돈되지 않았습니다. 사공과 곁꾼 등 각색(各色)은 모양을 갖추지 못하여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비록 정돈하고자 하더라도 단지 수사(水使)에게 책임을 지운다면 수사로서는 마련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3진에 소속된 4백 명을 본부로 이속하고 그 대신은 삼남 주사(三南舟師)의 분방한 예에 의하여 근처 육군에게 부쳐서 수대로 나누어 주도록 하고 사수(射手)인 경우에는 비록 청(廳)에 있는 군사라 하더라도 수를 정하여 보내도록 허락하고 사공과 곁꾼 등 각색 정돈할 일은 병조와 수사로 하여금 상의하여 요리해서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중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물으니, 필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중군(中軍)에게 소속군을 모두 거느리게 한다면 유수(留守)가 거느린 군사는 4백, 5백 명에 불과할 것이며, 만약 유수로 하여금 거느리게 한다면 중군을 설치한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중군은 항시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혁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군은 비록 당하관이라 하더라도 할 수가 있다. 당하 무변(堂下武弁) 중에 도감·파총·각 아문 군관을 물론하고 유수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되 유수의 친병(親兵)은 2초(哨)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군향(軍餉)의 정수(定數)에 대해서 이완이 유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만, 군향은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것을 신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존한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쌀이 12만 석(石), 콩이 2만 석, 벼가 1만여 석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필원의 말은 민폐를 위한 것이고 이완의 말은 먼 훗날을 위한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경솔하게 숫자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경기 수영(京畿水營)의 요미(料米)가 단지 1백 석이기 때문에 용도를 잇댈 수가 없습니다. 군관을 돌려보내는 사태까지 발생하니, 더 지급해 주어야만 모양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의당 선혜청에서 1백 석을 더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진연을 물려서 정하기는 하였으나 이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이미 해가 바뀌었으니 날짜를 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전(兩殿)에 각기 따로 진연해야 하니 이것으로 예관에게 분부(分付)하여 2월 20일 후로 택일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송준길의 소장을 영상과 우상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소장의 한 조항은, 김좌명(金佐明)을 보양관(輔養官)으로 삼는 것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좌명이 이 직임에 합당하다 해도 체개(遞改)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 탑전에서 김좌명을 천거하여 이 직임을 맡겼는데, 지금 물의가 이러하니 대단히 황공합니다.” 하자, 상이 개차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능원 대군(綾原大君)이 집에서 행한 행실은 남이 따를 수 없으며 청검한 절의는 종척 중에 가장 훌륭한데 시장(諡狀)이 없는 탓으로 아직껏 시호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흠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다른 조정의 재신들에게도 행장이 없는데 시호를 내린 규례가 있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유명(遺命)했기 때문에 본가에서 시장을 짓지 않았습니다만, 신들이 진달하여 시호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 규례에 의하여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원전】 37 집 478 면
《 현개 016 07/12/14(경신) / 김우석·정재숭·조형·박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우석(金禹錫)을 승지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조형(趙珩)을 좌참찬으로, 박정(朴?)을 참지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김수항(金壽恒)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에게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돈녕 조창원(趙昌遠)에게 혜목(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전】 37 집 53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현개 024 12/06/19(무술) / 정언 윤계가 언로가 통하고 막힘에 대해 상소하다 》
정언 윤계(尹?)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언로가 통하고 막힘은 흥망과 관계가 됩니다. 자고로 간언을 물리치고 뭇 사람과 어긋나면서 흥한 자가 있습니까. 또한 간언을 따르고 취하기를 좋아하면서 망한 자가 있습니까. 몇 년 이래로 조신이 진언할 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면 혹 채납되었으나, 조금이라도 날카롭고 곧은 감이 있으면 으레 뜻에 거슬려 가벼울 경우 수용되지 않고 무거우면 별수없이 죄를 얻게 됩니다. 이 때문에 뭇 신하들은 은미한 뜻을 엿보다 빙빙돌고 우회하면서 ‘이 일은 상이 듣기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이 일은 대신이 주장한 것이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말해도 이익이 없고 다만 거슬리게만 되니, 꿋꿋한 논이 성상의 귀에 이르지 않고 아첨하는 풍습이 날로 조정 구석에서 자라납니다. 올곧아 흔들리지 않으면 과격하다는 비난을 반드시 얻고, 기대고 아부하여 비위를 맞추면 오히려 순후한 복을 누립니다. 정사의 명령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되고, 뭇 공적들이 어떻게 이지러지지 않겠습니까. 인군이 간쟁하는 신하를 두고 이목의 책임을 맡겨서, 온 천하의 일을 내가 보고 듣는 중에서 비추어 관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눈을 밝히고 귀를 밝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어리석은 임금은 반드시 사사로운 사람을 두어 이목으로 삼습니다. 이른바 사사로운 사람이란 가까이 두는 심부름꾼과 총애하는 자가 아니면 귀척과 권력을 잡은 신하입니다. 저 사사로운 자들은 반드시 먼저 본뜻을 탐색하고 남의 시비를 살펴 그 임금의 애증과 호오를 알아 냅니다. 처음에는 아첨으로 임금에게 잘보여서 그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가 공손하다고 여겨 친하게 만들고, 중간에는 기욕(嗜慾)으로 임금을 겨냥하여 그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가 충순하다고 여겨 기뻐하게 만들고, 끝으로는 조정 신하를 위협하여 그 임금의 보고 들음을 엄폐하여 그 기세를 확장하고 못 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 임금된 자는 처음에 그를 가까이하고 신임하며, 중간에 국정을 위임하고 권병(權柄)을 빌려주며, 결국에는 파란 것을 가리켜 희다 하고 뿔을 갈기로 뒤바꾸게 됩니다. 그 몸을 망치고 그 사직을 집터로 만들어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니, 크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 원하건대, 이 점에 대하여 경계하시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말고 왕도의 의리를 따르소서. 말이 거슬리든 겸손하든 반드시 도에 비추어 옳은 것을 구하고, 친애하는 자라고 하여 편벽되게 하지 마소서. 신이 이전 역사 중에서 보건대, 한 성제(漢成帝)가 유흠(劉歆)에게 관직을 주려하자 좌우에서 대장군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상이 말하기를 ‘작은 일은 대장군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하니 좌우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쟁하였습니다. 상이 이에 대장군 왕봉(王鳳)에게 말하니 봉이 불가하다 하여 곧 그만두었습니다. 신이 이것을 읽을 적에 그 인약(仁弱)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통탄하곤 하였습니다. 다만 오늘날 조정에 전권을 휘두르는 신하가 없어 작위와 상을 내리고 형벌을 가하는 것이 인주의 큰 권한이며 나라의 흥망을 성상께서 판단하신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쓰거나 죄주는 것은 반드시 대신을 거칩니다. 이는 본디 위임하는 뜻에서 비롯되었지만, 총괄하는 권한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선악과 일의 시비가 본래 관작 지위의 고하와 상관없는데, 전하께서는 공과 사의 타당성 여부를 살피지 않으시고, 소원한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면 좋은 말이라도 홀대하고 높고 가까운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면 좋지 않아도 따릅니다. 혹 어떤 사람을 논하되 대각에서 비롯되었으면 거부하고 중신에게서 비롯되었으면 윤허하기도 하며, 혹 어떤 일을 간하되 삼사가 하였으면 내버려 두고 재상이 하였으면 행합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치우쳐 말을 들으면 간악한 자가 생기고 전권으로 임명하면 난세가 된다.’고 한 것과 가깝지 않습니까. 성스런 왕이 천하를 다스림은 인명(仁明)함으로써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 착실하게 일을 하려면 반드시 강의(剛毅)함이 필요합니다. 전하의 인명하신 자질은 부드러움으로 다스리는 도리[柔克]에 있어 지나치시니, 일에 임하였을 때 과감히 결단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한 원제(漢元帝)와 당 문종(唐文宗)의 인자하고 공검함은 현주(賢主)의 자질이지만 쇠란한 시절을 만나 시들시들 떨치지 못한 까닭은 ‘어물어물 결단하지 못한다.[優遊不斷]’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삼왕(三王)의 명철함을 품부받으시고도 두 임금의 나약함을 경계하지 못하시니, 신은 남몰래 통탄합니다. 아아, 지금의 나랏일은 마치 죽을 병을 지닌 사람 같습니다. 안으로 심복(心腹)에서부터 밖으로 사지(四肢)에 이르기까지 병에 걸리지 않은 곳이 없는 자는 반드시 가장 심하게 병이 걸린 곳을 먼저 치료하여 고질이 된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고질이 된 것은 양병(養兵)이 그것입니다.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신비로운 무예로 용처럼 일어나시어 오위(五衛)의 좋은 제도를 창설하였으니, 대개 주례(周禮)의 남긴 뜻을 따른 것입니다. 병조가 주관하고 오위 도총부가 거느리면서 한 차례 번을 드는 것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선묘조에는 진휼을 받으러 나온 자들 중에서 장정을 뽑아 서울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 당시는 적과 대치해 있었으므로 병사 모으기를 힘썼을 법한데도 3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대개 양식을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불어난 수가 배를 넘고 기타 어영(御營)의 정원이 늘어 2만에 이르며 금군(禁軍)의 수가 늘어 천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또 호위하는 수백 명의 군관, 훈국(訓局)·어국(御局)의 두 국과 수어(守禦)·총융(摠戎)·정초(精抄)의 여러 청의 표하 장령(票下將領), 국출신(局出身)·별군직(別軍職) 등의 호칭은 모두 예전에는 없던 것으로 후에 가설된 것입니다. 나라에 입을 벌려 먹고 사는 자들이 이처럼 많아졌습니다. 태평 시절에는 세입이 보통 30여만 석에 이르렀는데도 백관의 녹봉만을 나누어 주고 양병의 비용은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창고가 넘치고 퇴적가리가 뜨고 부패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년 세입이 10만에 불과한데 태반이 장교와 군졸의 급료로 들어갑니다. 비록 수재 한재가 아니더라도 지탱할 형편이 아닙니다. 더구나 근래 해마다 연이어 흉년이 들어 그 수입이 점점 줄고 그 비용은 점점 느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닌 지경에 어찌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올해 죽은 자와 이후 사망한 자는 모두 대역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또 늙어 쇠잔한 자에 대해서는 본토로 귀환함을 허락하고 3천 명을 한도로 삼아 조금씩 재손(裁損)하소서. 군졸이 없는 장관(將官)의 숫자도 또한 많아 급료만 헛되이 소비하니, 어찌 사리에 합당하겠습니까. 수어청을 설치한 것은 전적으로 남한산성 때문이고, 총융청에 부(府)를 둔 것은 본래 경기도를 관장하려 함입니다. 그런데 서울에 장관을 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각 아문의 둔전(屯田)에서 들어오는 것이 얼마이고 소용처가 어디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간악하고 참람된 무뢰배들이 둔전을 설치할 곳을 다투어 말하여 백성의 전답을 약탈합니다. 오직 뜻한 바 욕심대로 하고 한 치의 땅도 남기지 않으면서 자기 사사로움을 성사시킵니다. 공가(公家)에 들어오는 것은 터럭만큼도 안 되고 사문(私門)으로 빠져 나가는 것은 밑빠진 독이라더니,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둔전의 명색을 혁파하여 그 전답에 세금을 매기고 그 사람에게 부역을 시키지 않는다면 크나큰 폐해가 제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복시(太僕寺)의 물력은 호조에 다음갑니다. 목장과 둔전이 없는 곳이 없고 일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대개 몇 만 정도로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그 소비하는 것이 하인 약간의 급료에 불과할 뿐이니 대출미를 내고 들여 이식을 늘리는 것이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여러 궁가에 떼어준 염분(鹽盆), 어전(漁箭), 목장(牧場), 시장(柴場), 화전(火田)은 산을 둘러싸고 바다에 널려 있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남의 생업을 빼앗아 남의 목줄을 끊어 그 폐해가 각 아문의 둔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쾌히 혁파의 명을 내리시어 선조의 일을 따르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호조와 사복시(司僕寺) 각 아문은 으레 수결(手決)하는 일이 있습니다. 물건의 싸고 비쌉에 따라 시기적으로 이해를 따져서 물가가 적당히 내려갔을 때 가까운 사람에게 내어 주면, 서쪽으로 북경(北京)에 들어가고 남쪽으로 동래(東萊)에 달려가 공물이라 칭하고 그 이익을 차지하고자 도모합니다. 또 가까운 사람을 위해 사채를 협박하여 징수하고 그 재화를 빼앗아 그 사업을 파산시키니 가슴을 치고 눈물을 훔치며 하소연할 데도 없이 오열하는 자가 또한 적지 않습니다. 곡물을 주어 그 이익을 독점하였으니 가까운 사람을 봐준 것이 지극하다 할 것인데, 또 그 사채를 징수하여 남의 원한을 겹겹으로 취하니, 너무도 한심스러워집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지금부터 공가의 크고 작은 매매물은 모두 시인(市人)에게 주어 사사로이 주는 것을 금단하는 일로 영갑(令甲)을 삼아 수결의 폐해를 막으소서. 그러면 이익을 독점하는 헛점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엎드려 생각건대, 세자께서 이미 장성하시어 옥같은 자질이 일찍 이루어졌으니, 지금이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을 때입니다. 이는 기회가 있는 법이니 어찌 이보다 중한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매일 하는 서연(書筵)은 짧은 시간에 외우는 수업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세자로 하여금 밖에 항처(恒處)하여 항상 빈료들을 접하고 의리를 강론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과거 출신은 학문의 힘이 있는 경우가 드물고 산야의 유일(遺逸) 중에는 필시 이치?? 궁구한 선비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널리 수소문하고 춘방에서 근무하게 하여, 훈도하고 절차탁마하여 임금의 자질에 도움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폐습은 사치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나쁜 풍속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높은 상투와 비단 피륙이 궁중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에 감동하여 본을 뜨는 자들이 어찌 유래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근래에 가례(嘉禮) 때 주옥을 부수어 구슬가루를 만들고 은을 녹여 그릇을 주조하였다는 말이 외간에 퍼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같은 그릇들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퍼진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것은 나라를 잃기에 족한 물건입니다. 비록 이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 말이 외간에 전파된 것은 역시 전하의 검덕(儉德)이 미진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며 더욱 경계하시고 검약함으로 솔선하십시오. 환시들이 멋대로 구는 습관이 있다는 것과 귀척들이 친압한다는 말은 외간에 퍼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왕자와 왕손이 알현하는 데 때가 없고 출입에 일정함이 없다면, 이것이 전하가 친한 이를 친하게 여겨준다는 성한 덕이라 하더라도 군신의 예는 사사로이 친한 것과 다르고 궁궐의 은밀함은 여염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한번이라도 한계를 넘어서면 그 걱정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능원 대군(綾原大君)이 인조(仁祖)를 뵈올 때 감히 밖의 말을 진달하지 못했고 인조 대왕도 밖의 일을 묻지 않으시고 가까이 사랑하셨을 뿐이라 하여 진신(搢紳)들 사이에 지금까지 전파되어 칭송된다고 합니다. 어찌 전하께서 우러러 본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누누히 이어지는 경계와 가르침의 말을 내 가상히 여기노라. 마음에 두고 삼가 기억할 것이다. 상소 중에 변통할 만한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허적과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은 배척을 받아 직위가 거북하다고 하여 인혐하고 들어앉았다. 허적이 면직을 비는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듣기로는, 간관(諫官)이 봉사(封事)하였으되 대신의 권한이 중한 것을 배척하고 태복시의 재물 늘린 것을 죄주는 것이 전편의 주된 뜻이라 하니, 신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올곧은 논의가 미치지 못하고 아첨하는 풍습이 날로 자라나며, 살리고 죽이는 것이 성상의 판단에서 말미암지 않고, 사람에게 관작을 주거나 죄를 주는 것이 반드시 대신을 거친다는 말은 비록 어떠한 일을 가리켜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또한 반드시 신 자신만을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지난날 줄곧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자는 신 한 사람뿐이니, 죄책을 당할 즈음에 어찌 감히 나는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신은 실로 늙고 사리에 어두워, 어떠한 직신(直臣)이 올곧은 말을 올렸는데 대신(大臣)으로 인하여 성상의 귀에 미치지 못하였고, 어떠한 간신(奸臣)이 아첨의 말을 아뢰었는데 대신에 의지하여 성상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는지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사형수를 결정할 때는 여러 신하가 소견을 각자 진달하여 성상의 결단을 우러러 여쭙고, 재신(宰臣)을 뽑을 때면 묘당에서 조정의 의논을 가지고 감히 갖추어 의망합니다. 그래도 형벌과 포상의 권한은 임금이 쥐어야 하고 사람을 취하고 버릴 때에는 시기와 혐의가 쉽게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일일이 하문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경연 중에 여러 번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치우쳐 듣고 전임시켜 난세가 된다는 것을 걱정하기까지 하니, 대신된 자가 누군들 마음이 싸늘해지고 간담이 놀래지 않겠으며 누가 감히 계책을 내려고 하겠습니까. 간신(諫臣)이 들은 것이 과연 논한 바와 같다면 부지런히 잘못을 공격함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일이니, 어찌 이 때문에 물러나기를 빌겠습니까. 다만 신의 병세가 조석지간에 버티지 못하겠기에 위태롭고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감히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요즈음 말하는 자들은 ‘인군의 과실을 말하기는 쉬워도 대신의 잘못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기 어려운 것은 오로지 당론(黨論)을 일삼는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당론을 일삼는 이상 말한 것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겠는가. 경의 인혐은 너무 지나쳐 오히려 일의 모양을 해치는 것은 아닌가. 나랏일이 날로 급해지니 경은 인혐하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임하지 말아서 나의 희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정언 윤계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치란의 근본은 군덕(君德)과 연관되고 안위의 책임은 대신에게 달려 있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천시(天時)가 이와 같고 민사(民事)가 이와 같으며 국세(國勢)가 이와 같으니, 우리에 있어야 할 맹수가 우리를 벗어나고 귀중하게 간수해야 할 보석이 궤짝에서 훼손되는 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비록 성상 자신을 오로지 책하려 해도 크게 말할 만한 잘못이 없다면 장차 하늘을 책하겠습니까, 백성을 책하겠습니까. 신은 어리석어 알지 못합니다만, 우리 재상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것 때문에 대신이 불안해 하여 차차를 올리기까지 하였고, 비답 중에 또 ‘말하기 어려운 것은 오로지 당론을 일삼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신은 지극히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신이 차자로 진달한 일을 감히 조목 조목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근래 올곧은 논의가 조정에서 행해져 정령(政令)에 채용된 것이 몇 건이나 됩니까. 채용되지 않아 위축되는 것이 그 형세이고, 올곧은 소리가 위축되면 아첨하는 풍습이 자라는 것은 또한 그 형세입니다. 상신의 뜻으로는 근래에 올곧은 소리가 일어나고 아첨하는 풍습이 잠잠하다고 과연 생각하는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망녕되게 생각하기를, 꿋꿋하고 엄격하지 못한 것이 성덕(聖德)의 병근(病根)이라 여깁니다. 그러므로 권한과 기강을 총괄하라는 뜻을 상소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에게 위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어찌 감히 옳지 않다고 여기겠습니까. 다만 그 위임하는 방법이 어떠한지를 살펴 볼 뿐입니다. 대신의 도모를 신이 어찌 감히 불가하다 여기겠습니까. 다만 그 도모의 득실 여부를 살펴 볼 뿐입니다. 오늘날 성상께서 위임하신 것이 과연 모두 타당하고 대신의 도모가 과연 모두 흡족한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이 상소 중에서 진달한 말은 죄줄 만한 것이 아닐 듯합니다. 저 태복시의 일은 내외 곡물의 모곡(耗穀)이 다 없어지고 은화로 이자를 거두어들인 것의 반이 줄었다고 여항간에 분분하게 말이 퍼졌습니다. 이같은 좀벌레 같은 일을 어찌 대신이 모두 알겠으며, 또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사채를 징수하는 일이 만약 인삼 장수의 밀매와 관계된다면 나라에는 효시하는 법이 있으니, 마땅히 묘당에서 그 법령을 다시 엄하게 시행하면 될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태복시가 관장하는 일이어서 죄를 징계할 것을 가지고 채무를 징수합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 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성상의 하교 중에 이른바 붕당은 바로 조정 백년의 고질적인 습관입니다. 지금의 조정 신하들은 비록 색목(色目)을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편당의 죄에 스스로 빠지겠습니까. 지금 만약 사리의 옳고 그름은 살피지 않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지나치게 곧은 데만 힘쓴다면 자기와 같은 의견이 옳아도 감히 옳다 하지 못할 것이니 당동(黨同)이라 할까봐 두려워서이고, 자기와 다른 의견이 그릇되어도 감히 그르다 하지 못할 것이니 벌이(伐異)라 할까봐 두려워서입니다. 그렇게 되면 틈을 엿보는 자들이 그 교묘함을 멋대로 펼치고 임금 뜻에 영합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함을 추구할 것이니 심히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지난번 상소 중의 말은 단지 나라 사람들의 말을 모은 것이지 신의 말이 아닙니다. 망녕되이 한 봉사(封事)를 올려 임금과 상신의 실수를 보충하려 했는데 말이 조잡하고 성의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상신이 이미 불안하다고 차자를 올린 데다가 성명께서도 또 당론이라 의심하시니, 신의 죄가 큽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헌납 정화제(鄭華齊) 등이 처치하기를, “윤계의 소는 당면한 어려움을 개탄하여 들은 바를 모두 아뢴 것입니다. 성상께서 경계와 가르침이라고 치켜 세우신 데다가 상신 또한 과감히 말한 것을 장려하였습니다. 말을 올린 신하에게 혐의할 것이 별로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38 집 67 면
《 현개 027 14/09/04(경오) / 김수흥이 광중의 토질에 대해 아뢰다 》
상이 뜸을 떴다.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이 신릉(新陵)의 광중(壙中)을 판 뒤에 들어오니, 상이 인견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광중의 토질이 아주 미세하고 견고한데다 색깔도 윤택이 났으며, 광중을 팔 즈음에 마치 시루에서 나오는 기운처럼 훈훈하게 온기가 올라 왔는데, 반호의(潘好義) 등 여러 지관(地官)들이 모두 길(吉)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화소(火巢)로 정해진 제한 구역 내에 25호(戶)의 인가와 60여 기(基)의 총묘(塚墓)와 민전(民田) 5, 6결(結)이 있었습니다. 인가는 이런 한절기(寒節期)에 철수해 옮기도록 하기가 어려울 듯한데, 그들 역시 봄이 되기를 기다려 옮겼으면 하니, 그들의 소원대로 해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총묘는 예전 화소의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 파낼 필요는 없겠습니다. 전토(田土)는 모두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기를 원하고 그 값을 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데 이 역시 억지로 윽박지르기가 어렵습니다. 능원 대군(綾原大君) 집안의 면세전(免稅田)은 화소 밖에 있는데 공전(公田)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 국휼(國恤) 때에 대왕 대비께서 초기(初朞) 때까지는 흰 옷차림을 하셨고 재기(再朞)때까지는 천담복(淺淡服)을 입으셨었다. 이번에 능을 옮길 때에 시복(媤服)의 절목은 없다 하더라도 역시 천담복으로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 뜻을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의논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8 집 156 면
《 숙종 011 07/03/08(신유) / 도승지 홍만용의 청에 따라 능원군을 포장하다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도승지(都承旨) 홍만용(洪萬容)이 말하기를, “고(故)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는 충효(忠孝)와 행의(行誼)가 있어서, 병자년 이후부터 늘 한탄하며 날마다 술만 마시고 하는 일이 없이 지내면서도 북경(北京)의 화물(貨物)은 절대 몸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절행(節行)과 효행(孝行)을 존숭(尊崇)하며 포장(褒奬)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옛날 신릉군(信陵君)의 일을 본따서 묘지기[守塚]를 여러 사람 두고, 간혹 특별히 치제(致祭)하여 종반(宗班)의 표준(表準)으로 삼으소서.” 하자,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臣下)들에게 고문(顧問)하였는데, 모두 능원군은 평생 동안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으므로 진실로 포장(褒奬)하는 것이 합당하나,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대신(大臣)들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대신(大臣)들이 특별히 제사(祭祀)를 내려주고, 인해서 묘지기를 주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38 집 520 면
《 숙종 014 09/01/21(계해) / 조참을 행하다 》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아뢰기를, “원종(元宗)을 추숭(追崇)한 것이 능(陵)을 봉(封)한 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지(幽誌)중에 기재되지 못하였으니, 비(碑)를 세우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그의 적모(嫡母) 유씨(柳氏)의 봉작(封爵)을 회복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이식(李湜)은 곧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의 서자(庶子)이다. 그런데 이보(李?)의 아내는 역적(逆賊) 유효립(柳孝立)의 딸이므로, 인조(仁祖)가 그의 봉작(封爵)을 회수(回收)했기 때문이었다.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추숭(追崇)한 사적(事蹟)은 본래 나라의 역사가 있으니, 어찌 비(碑) 세우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유씨(柳氏) 봉작(封爵)의 일은 선조(先朝)에 있어서 유씨(柳氏)기 소장(訴狀)을 올려 인조(仁祖)께서 궁내로부터 특별히 봉첩(封帖)을 내린 것이라 일컬었습니다만, 선왕(先王)께서 <그러한 사실이> 없다는 교지가 있어 특명으로 이식(李湜)의 직위를 파면시켰으니, 이제 어찌 감히 다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식(李湜)의 직위를 파면하여 다시는 서용(敍用)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비(碑)를 세우는 일은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말이 민정중(閔鼎重)과 다름이 없으므로, 드디어 시행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대사성(大事成) 조지겸(趙持謙)이 말하기를, “시학(視學)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효종(孝宗)께서 3년에 한 번 임하여 선비들을 시취(試取)하도록 정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신유년에 알성과(謁聖科)를 보인 뒤에 지금 이미 3년이 되었으니, 지금이 그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이 뒤에 송시열(宋時烈)이 또 강경(講經)으로써 선비들을 시취(試取)할 것을 청하였고, 경연(經筵)의 신하들은 또 한(漢)나라 조정에서 늙은이를 위로하던 일에 의거하여 송시열(宋時烈)을 인도하여 당(堂)에 올라와서 여러 유생(儒生)들과 더불어 경(經)의 뜻을 강론하기를 청하였다. 여러 대신들 또한 경서(經書)를 펴서 들고 어려운 것을 물어서 그 <뜻을> 관통(貫通)한 자를 시취(試取)하는 것이 더욱 경학(經學)을 권장(勸奬)하는 데 유익(有益)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장차 제술과(製述科)와 강경과(講經科)의 두 가지 일을 겸하여 시행하여서 각기 한 사람씩 시취(試取)하고자 하였으나, 얼마 후에 강경과(講經科)는 그만두기를 명하였다. 또한 임금이 옥체가 건강하지 못하여 시학(視學)도 하지 않게 되었다. 【원전】 38 집 623 면
《 숙종 021 15/10/12(을해) / 능원 대군의 묘비에 관해 검토관 이일익이 말하다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이일익(李日翼)이 말하기를, “양주(楊州) 백성 2천 인이 능원 대군(綾原大君) 묘(墓)에 세울 비석(碑石)을 운반하지 못하였으니, 한 돌이 이와 같이 크다면, 그 제도에 넘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상께서 그 지나침을 경계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민종도(閔宗道)가 말하기를, “옥산 부원군(玉山府院君) 묘소에 1천 5백 인을 썼으니, 청컨대 이 예(例)에 따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대개 비갈(碑碣)의 사치함이 심하였는데, 민종도가 장형(張炯)의 묘를 끌어 말한 것은 또한 아첨하는 것이었다. 민종도가 또 납육(臘肉)을 흉년으로 인하여 임시로 감한 것을 도로 회복하기를 아뢰었는데, 이때 민종도 등이 걸핏하면 풍년이라고 말하며, 무릇 상공(上供)하는 물품으로 이미 진상(進上)을 정지하기를 허락한 것도 모두 품(?)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니, 아첨하여 사랑받기를 굳게 하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원전】 39 집 204 면
《 숙종 027 20/10/07(신축) / 교리 이건명이 국법 준수와 언로 등 국정에 관해 상소하다 》
교리 이건명(李健命)이 상소하기를, “재이(災異)가 누차 겹쳐 나타나고, 기강(紀綱)이 무너져 민생이 곤궁에 시달리며, 당화(黨禍)가 잇달아 사(邪)와 정(正)이 서로 배척하고 있습니다. 조정은, 위에는 공경(公卿)·대부(大夫)가 있고 아래에는 온갖 집사(執事)가 있어 등급이 매우 분명하고 체통이 문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쓰거나 버리기를 너무 졸급하고 형살(刑殺)이 뒤따르고 있으므로, 관부(官府)에 몸 담고 있는 것이 마치 전사(傳舍)에 있는 것과 같고, 귀중한 금자(金紫)를 도거(刀鋸)처럼 보니, 명위(名位)가 어찌 가벼워지지 않을 수 있고, 대중이 어찌 무시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신하에게 있어서 의심스러우면 임용(任用)하지 말아야 하고, 임용했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 반드시 심정과 뜻이 서로 유통(流通)하고 성의로 서로 믿는 다음에야 지혜스러운 사람은 생각을 다하고 용맹스러운 사람은 용력(勇力)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민중은 굳은 의지가 없고, 선비는 항심(恒心)이 없으며, 외방(外方)에 있는 사람은 깊이 숨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말없이 따라가기만을 상책으로 여기면서, 당시에 용납받고 뒷날 모면할 것을 도모하느라 자신의 일도 계획하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나라일을 담당하고 세상의 도의를 만회(挽回)하겠습니까? 곤위(坤位)가 다시 바로잡히고 대의(大義)가 밝아졌으니 사직(社稷)과 만백성이 마침내 반드시 힘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법(王法)이 엄중하지 못하고 국가의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한편으로는 죄를 용서하자는 논의가 앞질러 나오고 한편으로는 징계하고 토죄(討罪)하는 법이 행해지지 아니하여, 악역(惡逆)들을 버젓이 천지 사이에 숨쉬게 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뭇 소인들이 화심(禍心)을 품고서 진신(搢紳)들을 어육(魚肉)을 만들었는데, 이런 음모(陰謀)를 주장해 온 적괴(賊魁)인 자도 또한 천주(天誅)를 면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보절(甫節)이 당인(黨人)들을 마구 베인 것이나 주전충(朱全忠)이 청류(淸流)를 도륙(屠?)한 것도 또한 용서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자신이 ‘서문(西門) 밖에서’란 말을 지어내어, 감히 모해(謀害)할 수 없는 자리를 모해하려 했으니, 용서하자는 의논은 신(臣)이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의심하고 우려하여 사은(私恩)을 펴게 되었고, 관대(寬大)하게 용서하시기에만 힘써 왕법(王法)이 굽혀지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의리를 붙잡아 세우고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심이 처음보다 해이해진 것으로, 이리저리 돌아보며 아부하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반성하시고 두렵게 생각하시면서 국법이 시행될 수 있게 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엊그제의 간신의 상소는 의리가 명백한 것이었으니, 대신은 옳다고 하고 간관(諫官)은 그르다고 하며 서로 가부(可否)를 조정해야 할 것인데, 말하는 자를 경계하고 책망하는 것으로 대신을 위로하여 안정시키는 방도로 삼았으니, 신의 생각에는 대신의 뜻은 갈수록 더욱 불안해지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듯합니다. 국가의 사세가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사람과 같은데, 무엇보다도 탐심을 부리는 것이 대소(大小) 간의 풍습이 되어 안팎이 똑같습니다. 지난날 대신이 제도(諸道)를 안렴(按廉)하기를 청하고, 또한 체대(遞代)할 때의 문부(文簿)를 고사(考査)해야 한다는 의논도 있었으니, 연하(輦下)의 모든 군문(軍門)의 재화(財貨)의 간수를 반드시 먼저 실수를 점열(點閱)하도록 하여 근본을 맑게 하고, 말단을 다스리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경덕궁(慶德宮)의 영선(營繕)은 역사가 두 해를 넘겼고, 비빈(妃嬪)들의 제택(第宅)은 값이 수천 금을 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그만둘 수 있는 것이나 그만두지 않고 있습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말하기를, ‘짐(朕)의 아들들을 어찌 선제(先帝)의 아들들과 같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모두 그 절반으로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반드시 선조(先祖)의 대군(大君)의 제택을 비빈에게 돌리시는데,【이 때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옛 집을 사서 최 숙의(崔淑儀)의 제택으로 하였다.】 혹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주가(主家)에 사연(賜宴)하는 것은 성상께서 친족과 돈목(敦睦)하려는 뜻에서 하시는 일일 것입니다마는, 이처럼 천재(天災)를 만나 써야 할 데가 있는 때를 당하여 그만 풍형 예대(豊亨豫大)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이른바 경천(敬天)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듯합니다. 내려 준 물건들은 비록 되돌릴 수 없지만, 선온(宣춠)과 사악(賜樂)은 또한 마땅히 정지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을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당초에 짐작하여 내린 처결은 뜻을 둔 데가 있고, 대신이 아뢴 말은 말한 사람을 경계하고 책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해야 한다는 말이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다. 아아, 귀주(貴主)는 나이가 많아 성대한 자리를 다시 마련하기가 어려운 처지이다. 선온과 사악은 또한 은덕과 영광으로 사치스럽게 해 주기 위한 것인데 어찌 폐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원전】 39 집 352 면
《 숙종 033 25/09/06(신축) / 능원 대군의 손자인 금천군이 적조모 유씨의 원통함을 상언하니 구봉을 회복시키도록 명하다 》
이때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포(李?)의 손자인 금천군(錦川君) 지(콖)가 상언(上言)하여, 적조모(嫡祖母) 유씨(柳氏)의【유씨(柳氏)에 대한 일은 위에 보인다.】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면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일찍이 궁금(宮禁)에 출입하였으므로, 고사(故事)를 상세히 알고 있으니 하문하여 조처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정재륜이 상소하기를, “신(臣)이 듣건대,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인빈(仁嬪)의 신도비문(神道碑文)를 찬진(撰進)하기를, ‘능원군(綾原君) 포(?)가 유효립(柳孝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비의 죄에 연좌되어 봉호(封號)를 빼앗기고 첩이 되었다.’ 한 것을, 인조(仁祖)께서 어필(御筆)로 이를 지워버리고, ‘포(?)가 유씨(柳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고 고쳤다 합니다. 그리고 능원(綾原)이 졸(卒)하였을 적에 효묘(孝廟)께서 친림(親臨)하여 유씨(柳氏)를 숙모(叔母)라고 불렀는데, 여러 공자(公子)들과 의빈(儀賓)들이 직접 들었습니다. 인선 대비(仁宣大妃)께서 신(臣)의 아내인 공주(公主)에게 하교하시기를, ‘능원(綾原)의 부인(夫人)이 선왕(先王)의 존속(尊屬)이 되는 것은 실로 이 판사(李判事)의 내실(內室)과 같다.’ 하였는데, 이는 효묘(孝廟)의 표고(表姑)인 한씨(韓氏)가 명절 때 궁(宮)에 들어와서 예우(禮遇)를 받았기 때문에 이를 인용하여 계칙하신 것입니다. 능원군의 아들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말하기를, ‘당초에 강호(降號)한 것은 단지 흥경원(興慶園)의 봉사(奉祀)를 위해서였으나, 원묘(元廟)를 부묘(쯊廟)한 뒤이면 조정의 처분에 다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선신(先臣) 정치화(鄭致和)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추숭(追崇)한 뒤에는 일이 전과 달라야 하는 것이므로 식(湜)이 원통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감히 가정(家庭)에서 들은 것을 아울러 진달합니다.” 하였다. 항(杭)도 차자(箚子)를 올려 일찍이 보고 들은 것을 진달하였는데, 정재륜의 차자와 내용이 같았다. 임금이 아울러 대신(大臣)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고,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일기(日記)》를 고험(考驗)하게 하여 드디어 구봉(舊封)을 도로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원전】 39 집 539 면
《 숙종 042 31/09/05(병인) / 휘호를 추상하는 일을 예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다 》
전성군(全城君) 이식(李湜)이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쯊廟)하는 일 때문에 상소하여,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계해년 두후(痘候)가 회복되신 뒤에 김석주(金錫胄)·민유중(閔維重)이 자성(慈聖)께서 책공(冊功)할 뜻이 계셨다 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불행히 승하하시어 뜻이 계셨으나 수행하지 못하셨으니, 이제 녹훈(錄勳)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역명(易名)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고,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봉사손(奉祀孫) 금천군(錦川君) 이지(李콖)는 마땅히 정2품(正二品)이 되어야 하니, 한결같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승습(承襲)한 예(例)에 따라 시행하고, 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沈)은 나이가 일흔에 가깝고 그 아들 세 사람이 다 종재(宗宰) 줄에 있으니, 시종(侍從)·곤수(쥀帥)의 아비에게 추은(推恩)하는 예에 견주어 가자(加資)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휘호를 추상하기를 청한 것이 어찌 아들이 지극히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이일은 매우 중대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處)하게 하라. 녹훈하는 일은 그때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후하게 상을 주었으니, 이제 와서 다시 의논하는 것은 실로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니다. 소 끝의 세 건(件)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2품 이상과 삼사(三司)를 아울러 불러 회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세 건의 일은 해조에서 시호(諡號)는 으레 공(公)이라 칭하는데, 이는 양첩자(良妾子)는 1등을 낮춘다는 데에 막히는 것이 있어서 거론할 수 없고, 침은 일흔에 차지 못하였다 하여 모두 방계(防啓)하니, 윤허하였다. 【원전】 40 집 165 면
《 영조 040 11/04/04(갑진) / 좌의정 서명균이 화평 옹주궁의 토목 역사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하다 》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위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현궁(梨峴宮)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그 궁은 바로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옛집으로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오래도록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자,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이 집은 내 사친(私親)의 옛집인데, 근래 포수(砲手)의 무리들이 거주하는 바가 되었으니, 차라리 왕녀(王女)의 집으로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이 궁가(宮家)는 어의궁(於義宮)보다도 큽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그 뒤에 마침내 그 역사를 중지하였다. 서명균이 또 말하기를, “전 시직(侍直) 이정섭(李廷燮)과 전 세마(洗馬) 민우수(閔遇洙)는 재능과 식견이 있으니, 마땅히 6품의 관직을 제수해야 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또 아뢰기를, “조귀명(趙龜命)은 문학이 있고 전 현감 박필부(朴弼傅)는 경학이 있으며, 사인(士人) 신경(申暻)과 윤득운(尹得運)은 부호가(富豪家)의 자제로서 학문을 향하는 뜻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조용(調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정섭과 조귀명은 본래 문명(文名)이 있었고, 민우수는 바로 민진후(閔鎭厚)의 아들로서 학식이 있었다. 박필부는 바로 박세채(朴世采)의 아들이요, 신경은 신방(申昉)의 아우였으며, 윤득운은 윤유(尹游)의 아들이었는데 모두 경술에 어두웠으나, 혼동(混同)하여 조용(調用)하기를 청했으니, 사람들이 몰래 비웃는 자가 많았다. 【원전】 42 집 475 면
《 영조 086 31/12/20(기미) / 이천보의 건의로 채성귀·이목을 추증하고, 이경여 등을 치제케 하다 》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서(經書)를 강하였다. 입시(入侍)한 영사(領事)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고(故) 지평(持平) 채성귀(蔡聖龜)는 여러 번 상소하여 척화(斥和)하였고, 병자년 이후에는 이어 벼슬에 나오지 않고 폐인(廢人)으로 자처하였는데, 지은 시율(詩律)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존주 절의(尊周節義)는 실로 표장(表章)할 만하니, 통정(通政) 직(職)을 추증(追贈)하여 풍교(風敎)를 세움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또 아뢰기를, “고(故) 대사헌(大司憲) 이목(李?)이 병자년에 척화를 한 것은 윤황(尹煌) 등 여러 사람과 명성이 같으니, 마땅히 증시(贈諡)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척화인(斥和人)과 절사인(節死人)을 지난번에 뽑아서 아뢰었는데, 또다시 뽑아 내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척화인은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 고 참판 유계(兪棨), 고 부제학 김경여(金慶餘), 고 대사헌 이목(李?), 고 참판 조한영(曹漢英), 고 사부 홍우정(洪宇定), 고 지평 채성귀(蔡聖龜),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이고, 순절인은 고(故)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 고 주부 최효일(崔孝一), 고 부사 지해남(池海南), 이증(李贈) 찬성(贊成) 이돈오(李惇五), 증 참판 이돈서(李惇敍), 고 감찰 김수남(金秀南)이며, 전망인(戰亡人)은 고 병사 이의배(李義培)·민영(閔?)·허완(許完), 고 영장 최진립(崔震立), 고 찰방 이상재(李尙載), 고 현감 김홍익(金弘翼)·이경징(李慶徵)·이건(李楗), 고 부사 황박(黃珀), 고 감사 홍명구(洪命耉), 고 군수 구현준(具賢俊), 고 현령 허노(許輅)로서 합하여 26인이니, 아울러 일체로 치제(致祭)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고 참찬 유백증(兪伯曾)의 병자년 척화는 절의(節義)가 뛰어났고 수립(樹立)이 매우 높았는데, 지금 홀로 누락되어 들어가지 않았으니, 실로 흠전(欠典)이 되 는 일입니다.” 하였고, 이정보는 말하기를, “정뇌경(鄭雷卿)도 마땅히 들어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로 치제하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판서 김동필(金東弼)은 그 사람을 이미 익히 알고 있는데, 이름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올라 있고, 그 아들은 조태구(趙泰耉)의 외손(外孫)이 되었으니, 어찌 왕자(王者)가 흑백(黑白)을 가리는 도리이겠는가? 전 군수 김광진(金光進)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본종(本宗)에 돌아가게 하라.”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는 곧 대륜(大倫)이니, 본종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부당합니다.” 하였고, 지사(知事)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예관(禮官)은 반드시 어렵다고 여길 것이니, 위에서 특별히 파양(罷養)하게 하소서.” 하였다. 【원전】 43 집 605 면
《 정조 029 14/03/19(기해) / 한인 아병을 한려로 고치고 하교하다 》
단풍정(丹楓亭)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람들의 자손을 불러들여 접견하고 한인 아병(漢人牙兵)을 한려(漢旅)로 고쳤다. 하교하기를, “한인(漢人)으로서 우리 나라에 배귀(陪歸)한 사람들을 세자 시절의 효종께서 궁궐 부근에 살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고, 보위(寶位)에 오른 뒤에는 내수사(內需司)에 소속시켜 식구의 수를 따지어 양식을 주었다. 이어 또 훈국(訓局)의 아병색(牙兵色)에 편입시켜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한인 아병을 설치하게 된 전말이다. 당시에는 그들이 방랑하다 우거(寓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아갈 대책이 아득하였고, 게다가 세상이 격변한 초기라 쉬쉬하며 숨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만한 정도로도 만족스레 여겼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것도 감히 함부로 홀대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이르러서는 설시(設施)한 지 이미 오래되고 풍습 또한 예전같지 아니하여, 그들이 스스로 감수하는 바나 사람들이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그야말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심지어는 무술(武術)을 열시(閱視)하는 교장(敎場)에서 그들을 가왜초(假倭哨)로 삼기도 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관리들의 후예로서 이처럼 지극히 천하고 비루한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말을 들음에 너무도 유감스럽고 애석하다. 그들을 위하여 기어코 진자리에서 벗어나 마른자리로 옮겨가게 할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고 겸하여 곤경으로부터 구제하여 좀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는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는데, 일이 제도를 변개(變改)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머뭇거리며 주저해온 지가 오래되었다. 오늘은 바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는 날이다. 그런데 명(明)나라를 받들던 생각과 멸망해버린 나라에 대한 감회를 조금이라도 펼 길이 없다. 번거로움과 힘든 점을 꺼리지 않고서 밤늦도록 이 일을 갖고서 명나라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반복하여 물어보았다. 이 일을 바로잡는 일을 어찌 날을 넘기겠는가. 이미 ‘한인(漢人)’이라고 하고 또 ‘아병(牙兵)’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부터 즉시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아병’이라는 명칭을 없애도록 하라. 이와 관련하여 전부터 마음속에 늘 잊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껏 규정으로 정하지 못한 것이 있다. 황단의 의품(儀品)이 갈수록 차츰 완비되는 것은 도덕으로 보거나 사리로 보거나 어긋남이 없고 의혹스러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새로 창제하는 것이 많았고 수직(守直)하는 절목(節目)도 중관(中官)이 주관하였으며, 나중에는 수복(守僕)을 증가시켰고 다시 문을 지키는 부장(部將)을 증가시키어, 공사(公私) 문적(文蹟)에 모두 구애되는 바가 없었다. 유독 수직하는 관원(官員)에 대해서만 외정(外廷)이 몰라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흠사(欠事)라고 하겠다. 지금은 군병(軍兵)에 편입시키는 제도를 없앴으니 귀속(歸屬)시킬데 대한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황단의 수직은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 중에서 세 자리를 정하여 ‘수직관(守直官)’이라 일컫고 병조로 하여금 의망(擬望)하여 차출하게 하라. 아병(牙兵)들은 ‘한려(漢旅)’라고 부르고 정원수는 30명으로 정하여 훈국(訓局)에 소속시키되, 이들을 지휘하는 체계는 용호영(龍虎營)의 금려(禁旅)나 진무영(鎭撫營)의 의려(義旅)·장려(壯旅)의 제도를 적용하라. 또 번(番)을 서고 역(役)을 지는 것은, 훈국의 국출신(局出身)과 금위영(禁衛營)의 별기대(別騎隊)의 예를 적용하도록 하고, 제향(祭享) 때에 신탑(神榻)을 받들고 제찬(祭饌)을 마련하고 거두는 일 등은 충의위(忠義衛)를 대신하여 거행하게 하라. 이 자리에서 수직관으로 천전(遷轉)시키고 수직관의 임기가 차면 그 자리에 따라 한 자급씩을 올려주도록 하라. 별도로 수용(收用)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인품과 재주가 어떤가에 달린 것이지만, 이밖에 군교(軍校)의 축에 끼일 수 없고 곤궁하여 살 길이 어려운 자들은 훈국의 마병(馬兵)이나 보병(步兵) 가운데 약간 깨끗한 자리에 자원(自願)에 따라 소속시키도록 하라. 그러면 양편이 다 적합하게 될 것이다. 병조 판서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사목(事目)을 만들어내서 훈국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성스러운 사람을 녹용(錄用)하고 절의있는 사람을 장려하는 일을 반드시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은 곧 그들을 부추겨 세워주면서 장려하고자 하는 것이니, 도움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다. 더구나 황조(皇朝)에 대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들에 대해서는 추후 장려하고 수록(收錄)하는 일을 더욱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충신의 자손들을 황단의 제사 반열에 참가하도록 한 일에서, 선조(先朝)의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 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능원 대군(綾原大君), 충경공(忠景公) 김수익(金壽翼), 문충공(文忠公) 조한영(曺漢英),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김덕함(金德탂), 충렬공(忠烈公) 홍명구(洪命耉)·황일호(黃一皓)·오달제(吳達濟), 충장공(忠壯公) 허완(許完),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穆),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 의열공(義烈公) 홍명형(洪命亨), 충장공(忠壯公) 민영(閔?)·이의배(李義培), 충장공(忠章公) 이흘(李?),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 증 승지 조정익(趙廷翼), 증 참판 이돈서(李惇픊)와 같은 사람에게는 포장(褒奬)하고 녹용(錄用)하는 은전이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고, 충현공(忠顯公) 이돈오(李惇五)의 후손에 대해서는 이미 승전(承傳)이 있어 전조(銓曹)에 신칙을 하였는데, 유독 충민공(忠愍公) 송도남(宋圖南)의 손자, 상원군 이세령(祥原君李世寧)의 손자, 정희공(貞僖公) 임유후(任有後)의 손자, 증 승지 김홍익(金弘翼)의 손자 등 다섯 집의 사람들은 모두 관직이 없다. 이 어찌 흠사(欠事)가 아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차차 수용(收用)을 하게 하라. 그 가운데 늙어 머리가 허옇게 센 사람이 있는데 진작 수용을 하지 않은 것은, 조정의 본의가 막히고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니, 전조에 신칙을 하라. 증 대사헌 신만(申曼)과 민숙공(愍肅公) 김언(金슄)의 집안에는 아직 나이가 찬 적장손(嫡長孫)이 없고, 오늘 불러서 접견을 한 사람은 그의 서손(庶孫)이었다. 적서(嫡庶)를 따지지 말고, 전당(銓堂)으로 하여금 불러서 만나보고 수용할 방도에 대하여 사리를 따지어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현공(忠顯公) 집안에는 4대(代)에 정문(旌門)이 8개나 되니,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증 참판 민재(閔?) 집안에는 정문이 12개나 되니 더욱 우뚝한 바이다. 한 집안에서 한꺼번에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이 12명이나 되니, 이러한 절의에 대하여 어찌 그저 정문을 세우고 추증(追贈)을 하는 데 그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나타내주는 조치를 이러한 집안에 하지 아니하고 어디에 하겠는가. 지금에야 그것을 깨닫고 보니 나의 고루함이 매우 한스럽다. 증 참판 민재에게는 정경(正卿)을 가증(加贈)하고 시호를 줄 것이며 이어 자손을 수록(收錄)하는 특전(特典)을 베풀도록 하라. 또 정희공 임유후의 집은 가난해서 아직 시호(諡號)를 맞이하지 못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연수(宴需)를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46 집 108 면
《 순조 018 15/12/15(을축) / 은신군의 입후 문제에 대하여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하다 》 은신군(恩信君)의 입후(立後) 문제에 대하여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했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봉조하 이경일(李敬一)·좌의정 한용귀(韓用龜)·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이르기를, “은신군의 입후 문제는 이미 선조(先朝)의 성교(聖敎)로서, 지금에 수의(收議)하라는 명은 실로 추념(追念)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 바, 신들은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므로, 판돈녕 이언식(李彦植)과 선묘(宣廟) 왕자의 자손, 인묘(仁廟) 왕자의 자손 및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자손인 세 집 문장(門長)으로 하여금 가합한 자를 상의하여 후사(後嗣)를 삼는 기반을 삼게 했다. 【원전】 48 집 85 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