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바둑돌의 사색
홍 성 암
일반적으로 개임의 재미는 돈의 액수와 비례한다. 화투나 마작, 빠징고 같은 투전판은 물론이고 푸로 세계에 있어서 복싱이나 야구, 농구, 축구, 골프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이나 관계자의 흥미를 증폭시키는 것은 돈의 액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게임의 세계이지만 바둑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돈을 걸고 바둑을 두게 되면 그 긴장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돈이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게임이 느슨해지거나 긴장이 줄어드는게 아니다. 쉽게 저주는 일도 물론 없다. 그런 바둑의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둑판 앞에 앉은 두 대국자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 그것이 단순한 승패를 위한 게임이 아니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일단 한 점 바둑돌을 놓는 순간부터 대국자는 우주의 운행을 읽기 시작하고 세상의 판세를 논하며 자신의 인생관을 논증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한 판 바둑판의 승리는 대국자의 세상 읽기의 승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걸리지 않았어도 바둑의 재미는 특별하다.바둑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진리를 해독하는 발견의 기쁨이 겯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바둑두기를 좋아한다. 이렇다할 취미가 별로 없는 나로서는 바둑만이 나의 유일한 취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둑을 잘 두는 것은 아니다. 나의 바둑 실력은 십여년이 넘도록 4,5급의 수준에서 결코 더 낳아지지 않는다. 바둑을 좋아하되 기보를 연구하고 몰두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바둑 취미는 그저 즐기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승패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바둑두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또 흔히 말하는 싸움 바둑이다. 왕창 이기고 왕창 진다. 그리고 얼른 새판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아마츄어 수준이다.
그럼에도 바둑을 좋아하다 보니 누가 바둑을 두면 그냥 지내치지 못한다. 바둑두는 구경을 하기 마련이고 때로는 참견도 하게된다. 바둑판에서의 훈수는 엄격히 금하는 바이지만 가벼운 친선게임에서는 그런 선의의 훈수가 바둑의 재미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훈수 때문에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오게도 되고 그것이 게임의 불확실성을 더욱 부채질해서 재미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수들의 게임에서는 아예 훈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선 대국자의 진지한 태도에 기가 질리고, 설혹 훈수를 했다해도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참새가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봉황의 뜻을 어찌 알랴에 해당된다. 실제로 바둑이 두어지는 판세를 보면 마음속으로 예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서정수교수는 바둑의 고수에 속한다. 흔히 일급 바둑이라고 한다.(소문만인지도 모르지만) 일급이란 유단 승급 과정을 거치지 않은 모든 고수들에게 붙여지는 별호다. 그러니 아마튜어 5단이나 8단이나 유단 심사를 거치지 않은 일급이나 실력에 있어서는 그게그거란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정수교수님의 바둑 실력은 과히 알만하다.
한 번은 인문대 학장실로 들어가니(서정수교수님이 인문대학장 보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친구분과 열심히 대국중이었다. 나는 도장을 받아야 할 서류가 있었지만 대국 분위기에 눌려서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하고 대국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바둑은 끝판이긴 했지만 승패를 점칠 수 없는 미세한 국면이어서 긴장이 팽팽했다. 그런 중에 바둑판세가 조금 불리하다 싶었던지 서정수교수님이 대마 패를 걸었다. 상대편의 대마를 모조리 잡던지 아니면 자신의 대마가 모조리 죽던지의 큰 싸움이었다. 몇 수의 패싸움이 계속되던 중이었다. 친구분이 패감으로 두던 돌을 갑자기 다시 거두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서교수님은 일단 두었던 바둑돌은 다시 거둘 수 없다고 했고 친구분은 바둑돌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안된다. 된다의 싱갱이질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두 분 모두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화기애애하던 바둑판에 살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이것봐. 내가 바둑돌에서 손을 떼지 않은 상태란 말이야.”
“분명히 손을 떼었어.”
“어. 여기에 증인이 있는데도......?”
갑자기 공이 내께로 넘어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분쟁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그러니 이해 당사자인 두분이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야 했다.
“바둑을 그렇게 두는 법이 아니야!”
“원칙대로 하자는 건데 뭘?”
“어느게 원칙인데?”
이런 팽팽한 접전 양상에서 내께 조언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 판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바둑판을 새로 시작하면 어떨 것인가 였다. 나처럼 후딱후딱 바둑을 두는 입장이라면 그렇게 지리하게 다투는 동안이라면 한판을 너끈히 두고도 남을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분은 소위 아마튜어 고수로서 반나절이나 넘도록 공들여 둔 바둑을 없었던 한판으로 돌릴 수는 절대로 없었던 모양이었다. 좀더 다혈질인 친구분이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선언조로 말했다.
“너같은 놈하고는 앞으로 절대로 바둑을 두지 않겠다.”
“너같은 놈이라니.....?”
서교수님도 발끈하셨다. 그러나 그 친구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고 말았다. 주위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나는 그제서야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볼겸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선생님, 한수 물려주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바둑이 마무리 단계이긴 했지만 아직 수십 수를 더 두어야 할 판세였기 때문에 한 수의 역할이 그렇게까지 치명적일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랬을까?”
“한번 복기를 해 보시지요?”
나의 제안에 선생님도 동의를 하셨다. 그래서 내가 친구분 두시던 백돌을 잡고 나머지 수순을 두기 시작했다. 20여수의 바둑돌이 놓이면서 판세는 보다 분명해졌다. 잘못 놓인 한 수 때문에 바둑판 절반에 가까운 대마가 모두 죽게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흑돌 대마가 모두 죽는 판세였다.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한 점이었다. 나는 20여수 앞까지 볼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것을 내다 볼 수 있었던 두분 고수께서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던 이유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바둑판은 가로 19줄, 세로 19줄이다. 그리고 361개의 돌이 놓일 수 있는 점이 있다. 이것을 흑과 백이 나누어 가진다면 180수가 된다. 180수로 상대방의 대응 수순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하게 된다. 대개는 180수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수가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바둑이 생긴 이래로 수천,수만 번의 대국이 있어 왔지만 처음서 끝까지 똑같은 수순의 바둑판은 없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둑을 우주의 운세에다 비기고 세상의 이치와 인생의 전략에 연계시키는 것은 바둑이 지니는 이러한 오묘한 속성 때문일 것이다. 동쪽을 지키는 것 같이 하면서 서쪽을 친다든지,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차지한다든지, 싸움하지 않고 집을 차지하는 일이라든지는 바둑의 전략적 측면이라면 과욕이 실패를 자초한다든지, 한 점의 실수가 모든 것을 망친다든지는 바둑의 본질적 속성일 것이다. 남의 집에 먼저 뛰어들지 않는다든지는 예절의 측면이다.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바둑돌 한 점의 가치다. 고수들이 두는 한 점 한 점의 바둑돌들은 모두 태산과 같은 큰 역할을 한다. 적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고 적의 방어를 돌파할 수 있다. 얼결에 놓은 한 점의 실수는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흔히들 한 번 실수는 병가상사(兵家之常事)라 해서 너그러이 보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세속 인심이긴 하지만 실제로 인생에 있어서 한 번 실수는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교통사고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단 한 번의 운전실수로 생명을 잃거나 영원히 불구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푼의 뇌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는 일과도 비슷한지 모른다. 단 한 번 행동의 실수가 인생 전부를 망칠 수도 있다. 과욕이 모두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바둑판에서만의 일이겠는가? 바둑을 두면서 우주와 세계와 인생을 성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바둑은 단지 오락만이 아니다.
한점의 바둑돌을 양보할 수 없었던 서정수교수님과 그 친구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점 바둑돌은 양보할 수 없어도 평소 돈독하던 우정까지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쯤 어느 기원에서 또 양보할 수 없는 한 점의 바둑돌을 놓고 계실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