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의 재발견 ⑤
전라북도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골목에 숨어있는 작은 식당에서도 손맛과 장맛, 정성이 어우러진 음식을 음식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전북의 맛'은 전북의 역사이고 문화다. 전북의 맛을 아는 것은 단지 음식을 아는 것이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와 문화를 아는 것. <전북의 재발견> 그 첫 번째로 '전북의 맛'을 찾아나선다. |
|
봄철이면 고사리·고비·취나물을, 가을에는 호박·가지·무·버섯들을 말렸고, 끓는 물에 슬쩍 데쳤다가 말리는 고춧잎, 날것대로 썰어 말리는 고지나물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서해안 생굴을 소금탄 물에 깨끗이 서너 번 씻어 헹군 뒤 소금 뿌리고 끓는 물에 탄 고춧가루 넣어서 버무려 담근 어리굴젓. 논에 사는 게를 잡아 산 것 그대로 설설 기는 것을 오지동이에 담고 물을 부어서 흙물을 다 토해 내게 하고는 진간장을 부은 뒤 며칠은 그냥 두었다가, 그 장을 따라 달여서 붉은 고추 말린 것이랑 마늘을 같이 넣어 다시 동이에 붓고, 며칠마다 한 번씩 서너 차례 간장을 따라내 끓여 붓는다면, 노랗게 익은 게젓의 등딱지 속이라니. 새까만 간장의 달큰하고 쫀독한 맛에 따끈한 흰 밥을 비비고, 게젓 등딱지에 밥 한 숟가락 얹어 먹으면 진수성찬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게젓 아닌가. 또한 조기젓·멸치젓·창란젓·새우젓·아가미젓·명란젓·황석어젓·언감생심 쉽게는 넘볼 수 없는 민물새우 토하젓.
-최명희의 『혼불』제6권 중에서 |
|
|
백반이나 한정식은 오죽할까 전주음식명인 제1호인 <가족회관> 김연임씨가 만드는 비빔밥은 사골 국물로 지은 밥에 짧고 통통한 전주콩나물과 찹쌀고추장, 참기름, 육회, 시금치, 고사리, 송이버섯, 표고버섯, 당근, 애호박, 오이, 파, 취나물, 미나리, 깨소금, 숙주나물, 무, 부추, 김, 무우싹, 팽이버섯 등이 들어간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다른 음식점의 전주비빔밥 속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얌전하게 부친 황백 지단과 황포묵, 한우고기 육회, 오실과(밤·은행·대추·호두·잣) 등을 고명으로 얹고, 이른 봄에는 청포묵, 초여름에는 쑥갓, 늦가을에는 고춧잎·깻잎 등을 넣어 계절의 맛을 즐기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성한 제철나물을 비롯해 30여 가지 재료가 사용되는 전주비빔밥은 질 좋은 농산물과 요리솜씨, 정성이 조화를 이뤄 근사한 맛을 낸다. 그러나 김연임씨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찬이다. ‘비빔밥 한 그릇이면 됐지. 무슨 밑반찬이냐’하겠지만, 이 집 반찬에는 전주 8미와 전통 조리법이 곳곳에 숨어있다. 전주 8미의 대표 재료인 열무로 만든 열무김치와 전주 콩나물로 만든 콩나물 잡채, 봄내음 가득한 취나물과 더덕장아찌, 김장아찌까지 웬만한 한정식 반찬과 견주어도 손색없다. 비빔밥도 이러한데 백반이나 한정식은 오죽할까.
소박한 한정식, 전북의 ‘가정식 백반’ 전북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아왔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상차림이 백반(白飯)이다. 백반은 보통 시래깃국이나 된장국·김칫국에 밥 한 공기와 반찬 네댓 개가 고작이지만, 전북의 백반, 이른바 ‘가정식 백반’은 소박한 한정식이라고 말해도 거슬리지 않는다.
가정식 백반이란 집안 여인들이 전승해오는 음식의 상징적 문구. 집안에서 품격을 갖춘 백반 상차림이 가장 상징적인 전북의 음식문화다. 전라도 백반은 서해의 풍부한 해산물과 기름진 평야의 오곡, 각종 산나물을 재료로 한다. 반찬 가짓수만 적게는 20여 가지에서 많게는 80여 가지에 이르기도 한다. 국과 두 세 개의 찌개가 반드시 따라 나와야 전라도의 백반이다. 그 중 찌개는 대개 청국장을 기본으로 내놓는데, 맛은 단연 일품이다. 콩알과 두부가 언뜻 눈에 띌 정도로 적당히 섞인 청국장은 간까지 맞아 나물과 함께 비비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전주 <은행집>과 <중앙숯불갈비>, <태조갈비>등의 청국장은 냄새만 맡아도, 보고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깔끔한 남도식 반찬도 밥맛에 한 몫 한다. 보글보글 끓는 청국장과 김치찌개에 시원한 물김치와 미역무침, 젓갈, 고사리나물, 가지무침, 콩나물, 무채, 김, 시금치무침, 파지 등 20여 가지의 밑반찬이 따라 나온다. 계절에 따라 돗나물(돌나물), 콩잎, 호박잎이 상에 오른다. 백반을 먹을 때는 고추장을 곁들여도 좋다. 백반을 대하면 비빔밥이 따로 없다. 그렇다고 음식의 가짓수가 많아서 자랑하는 것만은 아니다. 음식에도 강약이 있고, 여운이 있는 것. 이제 가짓수가 많다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엔 사람들의 입맛이 많이 세련돼졌고 까다로워졌음을 식당 주인들도 잘 알고 있다. 값만 싸다고 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음식솜씨가 어우러졌을 때 ‘과연 밑지지 않을까?’ 갸우뚱거리면서 계속 찾는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전라도의 백반 한 상은 숟가락젓가락이 부산하게 움직여야 할 만큼 맛도 좋다. 귀한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면, 혼자서 가는 것보다 서너 명이 넘게 모여서 가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을 맞춰서 간다고 해도 꼭 음식을 반쯤 남기고 온다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남기니 나중에는 속이 더 쓰리다.
<전주 8미> 예로부터 전주에는 ‘전주 8미’라는 말이 있었다. 기린봉 열무, 신풍리 호박, 한내 무, 상관 게, 남천 모지(모래무지·모래에 사는 민물고기), 선왕골 파라시(8월에 나오는 김), 대흥리 서초(西草·담배), 오목대 황포묵, 오늘날 사라져 그 맛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음식의 재료를 다르게 지키려는 노력이 어느 지역보다도 앞섰고, 음식의 재로를 맛에 따라 골라 쓰려는 노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