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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투쟁. 그것은 멎진 것이다. 끝없는 투쟁본능만이 너희의 참모습. 전사라면 그것을 두려워 말라. 죽음에 대한 공포, 패자의 패배감.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라.
지친 몸은 더 이상 검을 들고 있기가 버겁고, 입을 벌려 폐에 공기를 채우고 빼는 것조차 힘이 든다고 해도, 무거운 눈 커플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몸을 추슬러 새로운 적의 등장에 환호하라. 그것만이 신께서 허락하신 너의 참모습일지어다.
-신 퀼리크의 전사의 노래中 발췌.
218-???
- 112년.
정적의 섬.
남부 에시움 열도에 위치한 정적의 섬. 수면에서 10미터는 족히 솟아오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 섬은 그 절벽을 때리는 파도와 거친 해수의 흐름만으로도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섬 주변을 도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까지 더해보자면 이 섬의 이름은 정적의 섬은커녕, 소음의 섬이라고 지어져야 옳을 것이다.
정적의 섬. 그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유례에는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현제 학회에서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바로 현제 동면중이라고 추측되는 해룡 람다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록을 보자면 해룡 람다의 연령은 대략 2500세 그레이트 웜급에 접어는 성룡(成龍)인 것이다. 람다가 활동했을 당시에 그 누구도 에시움열도의 해협에 배를 대거나 하는 이가 없었으니, 저 멀리로 보이는 홀로 우뚝 선 절벽의 섬이 정적으로 가득해 보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람다가 동면기에 접어든 지도 어느새 120여년이 다되어가는 지금에는 그 섬의 이름이 바뀔 법도 하건만, 절벽으로 이루어진 섬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기에 그 누구도 살지 않는 섬. 정적의 섬은 계속 정적으로 감싸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 전까지는……
-카카캉!
강렬한 쇠의 마찰음이 정적의 섬을 가득 매운 고요를 단숨에 깨트렸다. 아니, 며칠 전부터 계속 들리던 소리이니 만큼 이제는 낯설지만도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당황하던 새들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 진 듯, 절벽의 틈틈이 존재하는 자신들의 둥지에 앉아 깃을 고르기에 열중했다.
소리의 근원은 정적의 섬 위에 있는 두 사내였다. 한 사내는 녹색머리의 장신이었다. 이 근처 해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초를 막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윤기 나는 녹색머리칼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감정을 조금도 띄우지 않는 사내의 표정과 숨소리 하나에도 절제감이 있는 행동거지는 그 아름다움을 조금 퇴색시키며 동시에 강한 위엄을 부여해주었다. 그의 손에 들린 6.5피트나 되는 대도는 그의 손에 일부인 것 마냥, 움직임을 정지하고 적의 심장에 박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 마리 사자와도 같은 사내였다. 그에 비해 사내의 앞에 있는 사내는…… 아니, 사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엔 아직 조금 이른 소년이었다. 소년은 사내의 무표정함과는 반대로 웃고 있었다. 자신의 검이 사내의 검과 마주칠 때마다 격렬한 희열에 몸부림 질 쳤다. 그럴 때의 소년의 표정은 차라리 요염했다. 아니, 소년의 얼굴은 성별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여인의 얼굴과도 흡사했다. 새하얀 백발은 조금 음산해보일수도 있지만 그 반투명한 색채는 소년의 이미지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하하하! 지난번과는 많이 다르지? 그렇지?”
드디어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음성의 주인은 소년이었다.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조금 허스키한 소년의 음성은 그가 남성임을 확실시해주었다. 변성기를 겪고 있는 듯 했다. 소년은 잠시 사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내는 손에 들린 길 다란 도를 치켜들며 자세를 다잡을 뿐,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소년도 별다른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던 듯, 마찬가지로 양손에 든 검을 교차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전히 그놈의 주둥아리는 장식품이로구나!”
소년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릎과 장딴지에서 기인한 강력한 추진력이 소년을 순식간에 사내의 앞으로 이동시켜 주었고 그 엄청난 속도가 가져다준 착시로 소년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검의 파괴력은 속도와 검을 잡고 있는 악력에 기인한다. 그 외에도 근력과 무게 차에 따른 물리적인 힘의 격차가 있을 진 몰라도 다리를 땅에서 땔 때 마다 땅이 움푹, 파이는 것으로 보아, 소년의 힘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상리를 달리함이 분명했다. 그러나 소년의 이러한 맹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사내는 매우 능숙하게 소년의 공격로를 읽어내고 선수를 치듯 방어했다. 반격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사정거리인 3미터내의 공간을 완전히 장악했다. 소년의 신체능력은 과연 대단한 것이었지만 이대로라면 승산은 없었다. 게다가 벌써 5일 동안이나 소년은 계속 뛰어다닌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체력이 아니었다. 주변 곳곳에 벗겨진 풀과 곡괭이로 갈아엎은 듯한 땅의 상처들이 소년이 얼마만큼 날뛰었는가를 대변해주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복수도 좋지만, 이젠 지쳤어. 세라미스가 보고 싶어. 파리스도 날 기다릴 거야.”
“……”
소년은 힐끔 곁눈질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사내는 소년의 말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을 땅에 꽂았다. 두 자루의 검은 서로 다른 모양이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것은 사내의 검처럼 먼 동쪽의 우타이열도에서 만들어진 그것의 특산품으로 카타나라는 외날의 완도였다. 손잡이 쪽 검신에는 愛別離苦라는 문자가 음각되어져 있었다. 그것은 사내의 장도도 마찬가지였는데 사내의 것 역시 우타이열도의 다이카타나로써 그 검신에는 怨憎會苦라는 문자가 음각되어져있었다. 길이를 제외한 모양이 똑같은 것이 아마 이 두 자루는 같은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소년의 왼손에 들려있던 검은 시미터의 일종으로써 손잡이 끝 부근에 커다란 오팔이 박혀있는 매우 고급스러운 검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두 자루의 검을 땅에 꽂아 두고는 기지개를 켜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어. 어째서 네부카드네자르를 죽였지? 너에겐 그를 죽일 만한 이유가 없어. 개인적 원한? 설마 바빌론에 멸망당한 국가의 후예인가? 설마. 너에게선 그 어떤 복수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남부최강국인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목을 노리는 이들이야 많지. 하지만 너는 아냐. 게다가 너 만한 사내가 누군가의 명령이나 의뢰로 움직일 리도 없고……”
“……”
반응을 기대한건 아니다. 사내의 성격은 요 며칠사이 대충 파악되었다. 복수자로써, 그 대상에게 무언가 변명 따위를 들을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납득할 만한 이유는 필요했다. 자신의 친구이자 위대한 국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렇게 간단히 죽거나, 이유 없이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소년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남부정벌을 막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왕위를 노리는 썩어빠진 왕족찌꺼기들에게 고용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뭐지? 대체 뭘까? 게다가…… 게다가 네놈은 나를 알고 있었다.”
“계속해봐라.”
처음으로 피라미드보다도 무겁다고 생각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사내는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소년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빙고! 소년은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가졌다.
“이실테의 검호(劍豪) 아가멘느, 칼로모덴바움의 조르후, 검왕가(劍王家)의 옌키와도 겨루어보았다. 그들을 쓰러뜨렸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냐. 너를 상대하고 있노라면 마치, 나의 스승이자 위대한 검성(劍聖) 칼릭아스테 카신페라스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듯한 검술. 너는 그랬다.”
“그래서?”
사내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찰나였지만 소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놈이 노린 것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냐. 네가 노린 것은 나다. 시리우스의 검을 지닌, 남부사막의 수호자인 나에게 용건이 있었어. 네부카드네자르를 죽인 것은 나를 이리로 유인하기 위함이었겠지.”
“점점 그럴듯해 지는군.”
사내는 아예 턱까지 괴며 계속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소년은 땅에 꽂은 두 자루의 검을 양손에 쥐었다.
“며칠간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저 녀석들은 뭐냐! 대체 네부카드네자르를 죽이면서 까지 내게 원하는 것이 대체 뭐냐!”
소년은 그렇게 소리쳤고 그러자 사내 뒤편의 공간이 잠시 일렁이며 두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저희의 존재를?”
나타난 두 사내 중, 동방의 비단옷을 걸친 사내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다. 멍청한 녀석아!”
“……이번 한번은 참아드리겠습니다.”
용과 호랑이가 그려진 붉은 비단옷을 입은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소계가 늦었습니다만, 제 이름은 제노 유리히. 보시다시피 동방 13국 중,유일한 제국인 시젠 출신의 학자나부랭이입니다. 그리고 이쪽 음침한 분의 이름은 갈락세인 리무아르.”
“갈렉세인?!”
소년은 크게 놀랐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도제국의 붕괴이후 6개의 종파로 나뉜 마도종파 중, 백마법의 그랜드마스터. 백의 현자의 칭호를 획득한 마스터 중 한명이었다. 소년이 갈락세인의 정체를 아는 듯하자 제노라고 자신을 소계한 동양인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후드로 얼굴까지 가린 갈락세인을 한번 훑어보고는 예의 그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호, 당신 의외로 유명했군요. 뭐 그것은 아무래도 좋고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복수하려고 하시는 이 친구의 이름은 임무 베르카셀입니다.”
“인무 베르카셀……”
소년은 녹색머리 사내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는 그의 이름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소한 이름이었고 그 작명법도 남부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소년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소계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울배스 페인 카르마. 바빌……”
“바빌론왕국의 재상이자 황실경호대장. 이것이 당신의 직분이지요. 대외적으로는 남부 사막의 수호자에게 계승되어지는 시리우스의 검을 계승한 사막의 수호자. 바빌론의 국왕 네부카드네자르와는 둘도 없는 친구임과 동시에 혈통도, 기반도 불안정한 그를 도와 국왕으로 추대될 수 있도록 한 현왕실의 일등공신. 게다가 네부카드네자르의 약혼녀이자 전대 검성(劍聖) 칼릭아스테의 딸인 세라미스와는 의남매이며, 올해로 7살이 되는 파리스 사이크리드라는 제자가 한명 있음. 신체사이즈라도 더 읊을까요?”
“음……”
울배스는 신음했다. 자신의 소계를 부탁해도 저렇게 자세히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눈앞의 동양인은 신체사이즈는 농담이더라도 정말로 자신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추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울배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노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오드아이(odd eye)였다. 그의 오른쪽 눈동자는 여느 동방인과 마찬가지로 짙은 흑색이었지만, 그의 왼쪽 눈동자는 놀랍게도 짙은 보라색이었다. 순간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시 꿈틀했고 그것으로 그는 울배스의 사고를 읽어내었다.
“아하하하. 신체사이즈는 신상정보의 기본중의 기본이지요. 신장 162cm, 체중 59kg, 쓰리사이즈는……”
“……뭔가 진중하지 못한 남자로군. 너는.”
울배스는 조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제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노는 그 눈빛에 크게 당황하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섭혼이나 최면보다는 쓸모 있는 능력이로군. 닥치고 있었다면 좀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었을 텐데.”
“아하하하. 당신 따위를 협박하거나 속여 봤자 쓸데없이 번거로운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 이런 나 따위를 유인한건 네놈들 쪽이다. 그래서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냔 말이다! 그리고 나에 대해 언제 그런 조사를 했지? 자객 따위가 내 근처에 얼씬거리도록 방관한 기억은 없는데.”
울배스는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러나 정말로 감시당하거나 미행당한 기억은 없었다. 고된 수행 끝에 6개의 차크라 모두를 열고 각성을 끝마치고 숙시마 프라나를 제어하다 못해 스스로 창조해내기까지 한다. 이렇게 해서 범인과 차원이 다른 능력을 얻게 된 자신이다. 5일간 먹지도 쉬지도 않고 사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는 300ft내에서 라면 사람의 숨소리를 판별해낸다. 잠에 들어도 마찬가지다. 보통 잠을 잘 자지도 않지만 잠자고 있어도 고양이의 낮은 걸음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날 정도다. 자신의 이목을 피해 조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울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낸 제노는 울배스가 무색할 만큼 커다란 웃음소리로 그를 조롱했다.
“아하하하! 감시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더는 못 봐주겠군.”
제노들이 등장한 이래로 침묵만을 고수하던 인무가 침묵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울배스와 제노의 대사가 매우 못마땅했는지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다.
“차크라 따위를 개방한 것에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녀석을 상대하다니, 귀찮다. 말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네놈. 네 친구의 복수를 위해 이곳에 서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렇군. 네 녀석을 잊고 있었어. 너에겐 받아낼 빛이 남아있었지.”
울배스는 자세를 다잡았다. 복잡한 일 따위는 모두 잊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적을 없애고 복수를 이루겠다는 목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숙련된 전사의 마음가짐이었다.
“네놈에게 연민을 갖고 있는 블러드가 처량하구나.”
“그런 녀석은 모른다!”
울배스는 인무에게 달려들었다.
첫댓글 그랬쿠나... 울배스는 달려들었쿠나..
달려들었지
걸어가진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