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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산 (方虎山) : 일명 이천부(李天富) 1913년 함경도 출생. 사진출처 : |
1950년 한강선에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와 전투를 벌인 조선인민군 제 6보병사단은 중국과 함께 대일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의용군에서부터 출발한 북한 최정예 사단이다. 6보병사단의 모체인 조선의용군
제 1지대는 조선의 독립 후에 중공군의 일부로 중국본토에 남아, 요령군구 동북민주연군 제 4사로 개칭되어
국공내전에 참가하였으며 중국인민해방군 남만지역 주력사단의 하나였다.
1947년 초, 부대는 휘남현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948년에는 국민당군 제 60군단에 대한 장춘,
심양 공격에서 국민당군 제 53사단을 항복시켰다. 이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 육군 제 166사로
개칭되어 심양시 위수부대로 심양에 주둔하다가 북한의 요청으로 1949. 7월 중공군으로부터 북한에
인도되어 북한 신의주 일대에서 조선인민군 제 6보병사단으로 창설되었다.
1949. 10월 부대는 황해도로 이동하여 소련군의 교범대로 재훈련되고 재편성되었고,
1950. 6월초 북한의 선제타격계획에 따라 38선으로 이동하여 전쟁을 맞게 되었다.
전쟁 개시일 6사단 각 연대의 38선 공격은 쉽게 성공하여 당일 개성을 점령하였고, 15연대는 강화도를
점령 김포반도로 진출하여, 서울점령 사단의 한강도하작전에 합류하게 된다. 13연대는 국군 1사단의 방어
진지를 중심으로 진격을 감행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도하하여 인천을 점령하였다.
인민군 제 4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노량진의 상륙거점을 확보하자, 북한 6사단의 공격부대는 영등포
방향으로 진격하여 안산을 점령하고 지금의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충남 서부지구를 거쳐
전라도 호남평야를 점령한 뒤 남해안을 우회하여 하동, 진주방면으로 진출한다.
6사단의 진격속도가 얼마나 빨랐는가하면 4사단이 대전을 점령하고 추풍령으로 진격할 때, 6 사단은
이미 목포, 광주, 순천을 점령하고 남해안을 우회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하동에서 국군의 저항을
쉽게 물리치고 진주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이는 물론 아군의 방어가 적의 주공에 집중되었기 때문이기
도 하다. 4사단과 6사단은 조공으로 우회기동하였다.)
그러나, 6사단은 진주-마산선에서 미 육군 제 25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1950. 7월 하순에
서 8월 한달 동안 절망적인 전투를 경험하였으며, 8월 하순 무적을 자랑하던 6사단은 자체 공격능력을
상실하고 처음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나중에 전선의 붕괴로 사단은 철수를 하게 되지만, 자강도까지 이어지는 철수기간에 부대는 다른 북한
군 부대처럼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부대의 인원을 흡수하여 철수시점보다 병력이 확대되는데, 이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시절의 전통인 사상심리전과 정신교육을 강화시켜 부대의 단결과 규율을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엔군이 북진에만 급급하여 철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나중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여유가 생긴 김일성은 6사단에 특사를 보내어
김일성의 특별명령을 6사단 전 장병에게 하달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장 모범적으로 후퇴작전을 수행한 6사단을 축하한다.
2. 6사단 전체 군인에 대한 일계급 특진. (대위 이하)
3. 6사단 전체 군인 월급 50%인상.
4. 방호산 사단장을 중장으로 진급, 방호산 장군에 2중영웅 칭호 수여.
5. 6사단을 기간으로 5군단 창설, 5군단장에 방호산 중장임명.
사실 연안파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조선의용군 출신 부대를 가급적 작전에서 배제시키거나 보조적인
역할만을 부여하거나, 부대를 분산 운용하는 등 암암리에 견제해왔던 김일성의 이런 조치는 북한 6사단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후로 부대는 또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생략한다.
참고자료 : 김중생 저,《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명지출판사, 2000.
참고자료 : 장준익 저,《북한인민군대사》, 서문당, 1991.
관계자료 : 금성천(金城川) reporter@defence.co.kr, "北이 자랑했던 전술가 방호산", 디펜스코리아 한국전쟁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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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이 자랑했던 전술가 방호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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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야전 지휘관 중에서 단순히 싸움의 상수(上手)를 들라하면 우선 꼽히는 사람이 방호산(方虎山, 方鎬山)이다. 일명 이천부(李天富)라고도 하며 1913년생 또는 1916년생으로 함경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사변 후 흑룡강성 백산지역에서 공산당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였고 1936년 공산당 만주성위의 추천으로 소련에 유학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교육 받고 1940년 신강을 경유 연안에 도착하여 동북간부훈련반과 중공중앙해외사업위에서 교육받았고 일제 패망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동북만주연군 독립4사, 166사의 정치위원으로 국공내전에 참가하는 등 10년 이상 八路軍의 중견지휘관으로 활약하여 戰歷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런 존재였으므로 당연히 김일성 일파로부터 항상 감시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나 북한군의 증강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중 그의 작전지도력과 조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한국전쟁 개전시 방호산은 북한군 6사단장이었다. 그 6사단의 전신은 동북의용군 제 166사였다. 1949년 7월 166사를 인솔하여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진주했는데 팔로군 출신들로 상하관계가 양호했던 것이 패주기에도 비교적 선전한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방호산의 6사단은 38선을 준비사격 없이 침투 돌파를 기도하였다. 소련군의 전술 독트린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연안파 숙장(宿將)으로서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개성 공방전 때도 예상 主攻방면의 수비대를 묶어놓고 폐선(廢線)된 철도를 개통하여 개성 시내로 병력을 수송한 기습을 감행했다. 최초로 한강을 도강한 것도 6사단이었다. 대전을 함락시킨 북한군은 최종목표인 부산 공략을 서두르기 위해 일부 병력을 분할하여 전라도에서 진주, 마산 방면으로 우회 측면 공격을 기도했다. 이 임무를 맡은 것이 4사단과 6사단이었다. 여기서도 방호산은 진주 전면의 하동에서 교묘한 매복작전을 성공시켜 1개 대대 규모의 한국군을 궤멸시켰다. 다만 이 때의 전략목표의 최단거리 김천-대구-부산으로 나가는 주공축에 북한군 최정예 4,6사단을 투입하지 않은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군 재편성의 여유를 주고 말았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것은 방호산의 책임 범위 밖의 것이었다. 한편 일본 아쿠다가와(芥川)賞 후보로 일본 패전 후 북한으로 돌아간 한국인 작가 김사량(金史良)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남하하여 우수한 르뽀따쥬 "바다가 보인다"를 남겼다. 6사단의 마산 침공에도 동행했고 그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 오늘날 일본어로도 읽히고 있다. 김사량은 북한군 패주시 심장 질환으로 원주 부근에서 낙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으로부터 방호산의 통솔이 격찬의 평가를 받은 것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으로 패주하던 후퇴전에서였다. 빨치산파 지휘관이 "유격대식"이라 하면 듣기는 좋으나 완전히 지리멸렬하여 탈출하는 방법을 택한 까닭에 탈주, 투항자가 속출하여 문자 그대로 운산무소(雲散霧消) 되어버린 것에 비하여 연안파 지휘관은 부대를 유지하면서 후퇴했는데 그 중에서도 방호산의 6사단은 반도 남쪽 점령정책으로 각지에 파견되었던 북한 관리 8000명을 수용하여 지리산에 일시 머물렀다가 10월 말에서 11월에 이르는 동안 산맥을 타고 북으로 돌아왔다. 김일성은 방호산을 격찬하며 일약 군단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軍功이 탁월한 장군에게 특별히 수여되는 최고훈장 "이중영웅"을 수여했다.(한국전쟁 중 영웅훈장을 받은 자는 553인이나 이중영웅은 5인에 불과하다) 물론 그 서훈에는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김일성 정권으로서는 붕괴 직전의 체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적당한 정신적 통일의 지주가 되는 존재 문자 그대로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쓸 김무정(金武停) 같은 희생양도 필요했던 것이다. 휴전이 되어 전후 부흥이 이루어져 김일성 독재체제가 확립되면서 다음 숙청의 칼끝은 방호산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방호산은 그런 위기의식 없이 김일성 계열 지휘관의 무능을 비판하며 군부 요직에 연안파를 배치하였고 연안파 거두인 박일우와 자주 접촉하며 反김일성 사상이 점차 스며들었다. 연안파 출신 군인의 우월성을 적극 찬양하며 장평산(張平山) 같은 연안파 장군들과 자주 접촉하며 자파세력의 확대강화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어린이들의 그림책과 교과서에도 올랐던 방호산은 김일성 일파로부터 종파주의자, 개인영웅주의자, 반당분자로 몰리어 하루 아침에 이중영웅의 칭호도 당적도 군직도 박탈 당한채 1954년 제대되어 함경남도 단천 근덕 광산 부지배인으로 좌천된 후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중공으로 망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위의 글은 일본 學硏사의 <역사群像시리즈 조선전쟁 下>와 2000년 출간된 명지출판사<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을 참고로 정리한 것입니다. 몇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아시는 분께서는 가르쳐 주세요. 1. 戰上手가 우리 말로 뭡니까? 국어사전, 한자사전, 일본어한자사전에도 없어서 싸움의 上手 또는 전술가로 슬쩍 넘어갔는데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2. 팔로군 시절 사단 정치위원이라면 어떤 정도의 뭘 하는 직책입니까? 3. 오래 전 어느 책에선가 "중공군에는 계급제도가 없다. 장교와 사병도 군복 호주머니의 갯수 정도로 구분한다"고 되어 있어서 공산주의 군대답기는 하지만 계급사회인 군대로서는 참 불편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신재호님의 군사연구를 보니 1988년에 중국군에 계급제도가 부활하였다는 내용이 있던데 그렇다면 중공군 계급제는 언제 폐지되었던 것인가요? 그리고 얼마 전 김동신 국방장관이 중국의 군관학교를 방문했다는 기사에서 그 학교 교장이 政委로서 우리나라 소장에 해당된다고 했는데 소장, 중장 같은 계급이 있는 현재 중국군에서 政委가 어떤 계급(직책)입니까? 김사량의 "바다가 보인다"는 그가 종군작가로서 쓴 여러 편의 글들과 함께 엮어져 1992년 <종군기>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것이 있습니다. 상당한 기대를 하며 읽어 보았는데 실망이 컸습니다. 아무래도 체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인민군은 영용무쌍하고 남조선의 군경은 하나같이 나쁜 놈, 죽일 놈, 머저리로 묘사하는 등 다른 선전물들과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
http://cafe35.daum.net/_c21_/bbs_list?grpid=87Tn&fldid=5f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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