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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사랑 글짱들 원문보기 글쓴이: 디디울나루
관음(觀音)을 지향하는 소망의 시학
--장덕천 시인의 시 세계
리헌석(문학평론가)
1.
장덕천 시인과는 전생에서부터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 것 같다. 시인이 운영하던 ‘음악감상실’ 에서 여러 차례 시낭송회를 개최하였고, 고교 교사일 때는 시인의 딸을 담임하였으며, 둘째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고, ‘목요문학포럼’에서 만나 10여 년간 합평회를 가졌다.
이런 인연으로, 그가 첫 시집(1997)을 발간할 때는 해설을 맡았다. 서두에서 필자는 <장덕천 시인은 시의 진실성에 집착하고 있는데, 병적이리만큼 치열하다. 그가 견지하고 있는 시적 원형질은 체험을 바탕으로 형상화되어, 어떠한 미사여구보다 감동의 진폭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읽으면서 쉽게 이해되고, 시의 행간에서 눈을 반짝이는 은유적 실상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행복했던 시기에 대한 향수를 간간이 펼치기도 하였지만, 교통사고에 의한 신체적 불편,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서정적으로 노래하여 애상적 정서를 환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를 만난 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훌륭한 시를 창작하여,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한 중견 시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정 문학잡지와 한국문예진흥원에서는 1년 동안 발표된 작품 중에서 우수작품을 선정하고 문집으로 발간하는데, 그의 작품이 자주 선정되었다. 이와 함께 문학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뒤늦게 출발한 그의 시력은 단연 돋보였다.
신체적 불편함을 의지로 극복한 그는 세상을 긍정한다. 아픔과 괴로움이 때로는 시의 제재로 등장하고, 깨달음과 보람도 밝은 시심으로 드러난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정신적으로 넉넉한 그는 스스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자 한다.
무명(無明)을 밝히는
등 하나 달고 싶네.
세상의 귀를 씻는 염불소리
내 마음에 거울로 다가와
가슴 뜨겁게 껴안는 불빛이네.
시간이 온통 귀로 열리는 날
내 마음 하루라도 씻어줄
등 하나 달고 싶네.
―「법당에서」 전문
장덕천 시인은 불교적 관점에서 시심을 가꾼다. 그의 삶은 유교적 전통에 바탕을 두었지만, 특별한 인연으로 불교와 닿아 있다. 더구나, 그가 시 창작에 집중할 무렵에 만난 분이 야석 박희선 법사, 운장 김대현 법사였고, 문학의 길에 정진하면서 만난 분이 도공 신태수 법사, 무공 김동민 법사였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그의 작품은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앞의 작품에서 보면, 시인은 법당에서 염불소리를 듣고 있다. 그 염불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정화됨을 깨닫는다. 염불소리는 시인의 마음에 거울로 전환되어, 진실을 투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시인은 염불소리와 동격으로서의 ‘등’을 달고자 한다. ‘등’을 달고 싶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밝히려는 보살행의 발원이다.
「바람으로 오는 나의 노래」에서 시인은 <생각을 둥글게 하였더니/ 자유도 고독이 되던 삶이 갑자기 눈물겹게 고마웠다.>고 고백한다. 미워하거나 슬퍼하는 마음을 접고 원융의 경지에 드는 것은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지에 다름 아니다. 특히 ‘자유’도 ‘고독’으로 생각하던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감사할 줄 아는 긍정적 시각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나온 발자국 아름다웠다고/ 보석보다 보석 같은 발자국이었다고>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긍정한다. 이와 함께 <휴식의 빈 곳을 찾아/ 그립게 가만가만 길을 파묻는 발자국이었다고/ 누구에게나 소리쳐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제 장덕천 시인이 <그립게 가만가만 파묻은 발자국>을 찾아갈 때이다. 그 발자국을 찾아 그의 시심 언저리를 돌아볼 요량이다.
2.
장덕천 시인은 테니스로 몸을 다져 헌칠하고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개인 사업에 열중하여 성공한 그는 미술감상실(화랑)을 낼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고, ‘인켈오디오월드’라는 음악감상실을 열어 동호인들의 예술 발표 공간으로 제공할 만큼 특별한 예술 매니아였다. 또한 국제라이온스협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여러 직책을 거친 다음, 회장이 되어서는 열정적으로 이웃에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40대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입어 근육무기력 증세가 악화되어 타인의 도움을 받는다. 근래에는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샘골’의 주택에서 생활하며, 4륜 전동 스쿠터를 이용하여 공간 이동을 한다. 스스로 ‘휠체어’라고 하는 전동 스쿠터를 타고 그는 친지를 찾거나 자연을 감상한다.
바쁘게 살 때는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그의 눈에 뜨이기 시작한다. 관심도 없던 그들의 삶이 눈물겹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그 사물들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같이 웃고 같이 아파하며 동화된다.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그 사물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기에 이른다.
그는 「찔레꽃, 눈부시다」에서 <오늘 따라 찔레꽃이 눈부시다/ 굴참나무며 엉겅퀴며 억새풀과 어울려/ 온몸으로 웃고 있다.>고 노래한다. 실상은 그날의 찔레꽃은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겠지만, 시인의 마음이 눈부실 정도로 밝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노래하였을 것이다.
특히 <휠체어로 걸으며/ 아침저녁으로 찔레꽃을 보면서/ 혼자, 그늘져, 아파 보여서/ 동무삼은 찔레꽃이/ 오늘은 오히려 내 어깨를 툭 친다.>에서 동류의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마지막 연의 <‘눈부시게 웃으시게’>라는 찔레꽃의 당부는 기실 자신이 찔레꽃에 주는 메시지로 보인다. 이처럼 시인은 범상하게 지나칠 수 있는 수많은 사물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자신의 내면을 담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봄비가 내린다.
간절한 기다림의 울림
흙의 함성소리
모든 것을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새잎들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린다.
연초록 물결이 흐른다.
영혼이 고독하거든
생각을 푸르게 흔들어 보자.
봄비가 내린다.
온몸이 젖인 봄비
삶을 파랗게 키운다.
사는 게 섭섭하거든
나는 누구에게
봄비가 되어 주었나 생각해 보자.
―「봄비」 전문
시인은 대청호 물결이 넘실대는 호반의 주택 정원에서 봄비를 맞는다. 봄비를 맞고 푸른 싹이 돋아나는 정경을 유추하며, 시인은 세상을 푸르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의 뛰어난 감수성과 내면을 드러낸 곳은 2연과 3연의 끝 부분이다.
봄비에서 <새잎들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듣는 것, <연초록 물결>을 찾아내는 것은 시인만의 특별한 감수성에 기인한다. 이와 함께 <영혼이 고독하거든/ 생각을 푸르게 흔들어 보자.>는 권유는 이 시를 생동감 있게 만든다. 마음(영혼)이 고독할 때, 봄비가 풀과 나무를 흔들듯이 생각을 푸르게> 흔든다면, 얼마나 싱그러운 세상이 되겠는가. 봄비가 세상을 푸르고 아름답게 만들듯이, 우리의 푸른 마음들이 세상을 푸르고 행복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는 다시 확산되어 <사는 게 섭섭하거든/ 나는 누구에게/ 봄비가 되어 주었나 생각해 보자.>는 경지에 이른다. 내가 언제 봄비처럼 남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는가, 반성하게 되면, 섭섭하던 대상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 수 있다.
이처럼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되면, 모든 사물들이 정겹게 다가선다. 생활 속의 가식을 씻어내고 바라보면, 그 사물들에서 순수하고 싱그러운 삶의 모습을 찾는다. 시 「오월의 나무」를 통해, 시인은 ‘오월의 숲’에서 ‘살 내음’ ‘아기들의 숨소리’ ‘처녀애들의 숨소리’를 찾는다. 그 숨소리마다 향내가 번진다고 노래한다. <숲 속에 번지는 연초록 살내음이/ 내 안 가득한/ 가식의 언어, 가식의 몸짓을 씻어낸다>고 노래한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바라본 대상으로서의 숲인데, 이에 머물지 않고 시인은 스스로 숲의 구성요소가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의 순수를 선물하고자 한다. <나는 그만 아기처럼 혹은 처녀애들처럼/ 오월의 향기 속에서/ 가지마다 이파리마다/ 연초록 숨결,/ 연초록 살내음을 풍기며/ 그리운 이름을 불러보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만나게 된다. 세속의 인연을 멀리하고, 샘골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반향으로 보인다. 때로는 전동 스쿠터에 몸을 의탁하고 다니면서 바라보는 작은 사물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넉넉한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3.
장덕천 시인은 새천년이 되면서, 정원에 수련(垂蓮)을 가꾸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돔형 화분에 가꾸더니, 작은 연못에도 이식하였다. 도공 신태수 법사와 함께 전국으로 찾아다니면서 구한 다양한 종류의 수련을 가꾸면서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수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강의하기도 하고, 시로 담아내기도 하였다.
몇백 평이나 되는 너른 대지였지만, 수련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같이 가꾸던 도공 신태수 법사가 ‘글사랑놋다리집’ 옆에 천여 평의 ‘연꽃마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여름이면 많은 시민들이 연꽃을 감상하고, 수련을 분양받기 위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오래 전에 주택을 ‘글사랑놋다리집’이라는 쉼터로 개방하였던 장덕천 시인은 ‘연꽃마을’과 연계하여 여름마다 <시와 연꽃의 만남>을 주선한다. 시화를 전시하고 시를 낭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문화예술 1번지로 가꾼다. 대전과 충청권 문인은 물론, 서울과 경기지역, 부산과 광주 문인들도 참여하여 시심을 나눈다.
이렇게 연(蓮)을 가꾸고 시심을 나누다 보면, 저절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꽃도 깨우침을 얻는가./ 이 아침 보리 수련에서 보살님 얼굴을 본다>(「보리(菩提) 수련」)고 깨닫는다. 사물의 속성을 관통한 시인은 그 사물을 통하여 해탈의 경지를 찾아내고, 이러한 경지를 시로 빚어 특별한 감동을 생성한다. <사흘 동안에/ 천년 깨달음을/ 씨앗으로 여며놓고/ 조용히 물로 사라지는/ 보리 수련>과 같은 삶의 지향을 찾는다.
대청호반에 팔월 여치로 산다.
개구리며 풀벌레들 소리도 詩로 들린다.
물방울 통통 소리 날 적마다
뜬구름들이 종종거리며 호반을 들락거린다.
물 속에 어려 비치는
아침이슬 같은 초록 숲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면
수련이 꽃대를 솟아 올리고
새들도 초목의 이파리인 양 흔들거린다.
빈 뜰에 도장밥을 찍듯 시를 쓰는 달빛
풍요로워서 쓸쓸해지는 풍경들
마음 푸르게 가꾸며 여치로 사는 세상
생각하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
―「풀벌레에게 밤을 내주며」 전문
대청호 풍광을 묘사 중심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문학 작품에서 생명력 있는 묘사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장덕천 시인은 초기 시의 간결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점차 묘사의 멋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시인 스스로 ‘8월 여치’가 되어 대청호 주변을 묘사하는데, 뛰어난 묘사로 감동의 진폭을 확장한다.
<물방울 통통 소리 날 적마다/ 뜬구름들이 종종거리며 호반을 들락거린다.> <아침이슬 같은 초록 숲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면/ 수련이 꽃대를 솟아 올리고/ 새들도 초목의 이파리인 양 흔들거린다.> <빈 뜰에 도장밥을 찍듯 시를 쓰는 달빛> 등은 섬세한 관찰과 언어의 연금술이 융합되어 이루어진다.
특히 이 작품은 호수의 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얻은 살아있는 묘사에 해당한다. 묘사를 통하여 시인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낸다. 자연 속의 그는 <풍요로워서 쓸쓸해지는 풍경들>이라는 역설적 진실을 찾아내며, <마음 푸르게> 가꾸는 <여치>가 되어 자연과 동화되어 산다. 자연 속에 있을 때 자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장덕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생각하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잠언적 진실에 도달한다.
그는 「황모란 수련」을 가꾸며 <사랑의 갈증으로/ 달맞이꽃 하나 둘씩 등불 켤 때/ 어머니 젖꼭지 같은 꽃망울로/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 <사랑에 목이 말라/ 여름밤이 달무리로 피어날 때/ 어머니 웃음 같은 꽃 입술로/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 마음을 빼앗긴다. 즉 들리지 않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시심을 가꾼다.
또한, <진흙탕에서 피었지만/ 살다보면 상처 없는/ 삶 어디 없으랴.>(「가시 수련의 말」)라는 반문에 의해 삶의 달관적 경지를 표현하고, <고운 세상 고운 마음 열고/ 바람의 마음으로/ 살다 가라> <물의 마음으로/ 살다 가라>고 자신과 세상을 향하여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주문한다. 즉 자연에서 삶의 이치를 궁구(窮究)하여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4.
장덕천 시인은 사람 만나기를 즐긴다. 그러나 봉황새가 오동나무를 찾아 깃을 내리듯이 좋은 사람을 찾아 만나는 것 같다. 인격적으로 흠모하는 분, 문학적 진실이 통하는 분, 자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는 분,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기를 즐긴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들이하기를 즐긴다. 태평동의 아파트와 샘골의 주택 사이를 오가는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를 부축할 사람이 있으면, 먼 곳까지 찾아가서 풍물을 익히고 정을 나눈다. 이른 봄에 지리산 자락으로 고로쇠 물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여름철에 선운사를 찾아 고창 복분자 술 한 잔에 장어구이를 맛보기도 한다. 홍성 남당리에서 대하를 굽기도 하고, 삼천포를 찾아 회 한 접시에 인생을 논하기도 한다. 산을 오를 수 없는 신체적 제한 때문에 주로 강이나 바다를 찾아 맛 기행을 자주 한다.
혼자 있을 때는 스쿠터를 타고 샘골 가까이 사는 친지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자연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시인이 바라보는 자연은 시시 때때로 다른 모습을 보여서 언제나 새로운 제재로 등장한다.
가을에는 결실의 미덕과 비움의 철학을 아름답게 펼친다. 그는 「바람의 노래」에서 <가을 햇살이 불러낸다./ 전동 스쿠터를 타고 가을 햇살 속으로 달려 나간다.>고 노래한다. 달려 나가서 아름다운 가을 풍광을 만나면, 새로운 힘이 솟음을 느낀다. <가을 햇살 속을 달려가다 보면/ 어느새 내게도 날개가 솟아나는 것 같다/ 하늘로 날개를 치는 것 같다>며 삶의 활력을 노래한다. <바람 속에서 훈훈하게 느껴지는/ 벼 익은 냄새/ 황금의 이삭들이 반짝이는/ 바람의 음표/ 바람의 음표와 한마음 되어/ 산이 되고 물이 되는 길>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바로 허정(虛靜)의 경지로 전이된다. 즉 <산이 되고 물이 되는 길>은 세속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자세를 요구하는데, 이는 욕심을 비우고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까닭은
단풍잎 속에 가을의 끝이 보이기 때문이야
불타오르는 기쁨, 빛깔이 낡아가는 슬픔,
단풍잎 속에는 기쁨이 슬픔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보내는 말이 있기 때문이야
삶의 속내가 잎맥을 따라 번져가면서
저리도 고운 빛깔을 만들려면
마음 가벼이, 마음 가벼이
세상을 버렸음이야
아무렴, 그리 버렸음이야
단풍이 아름다운 까닭은
단풍잎 속에 삶의 끝이 무늬지어 있기 때문이야.
―「가을의 행간(行間)」 전문
<단풍이 아름다운 까닭>을 시인은 가을의 끝이 보이기 때문이며, 삶의 끝이 무늬지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가을의 끝’과 ‘삶의 끝’은 동질적 의미로 작용한다. 이는 시인의 서정적 현재 심리가 바로 ‘삶의 끝’이라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가을의 끝’과 연계시킨 듯하다.
이 작품은 <불타오르는 기쁨> <빛깔이 낡아가는 슬픔>이라는 상극이 동일 선상에 놓여 있다. 단풍잎 속에는 <기쁨이 슬픔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보내는 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삶의 양극을 한 지점에 모은 것 같다. 즉 동전에 양면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파악된다. 이러한 양극에서 시인은 특정한 요소를 선택하고 있는데, 바로 <마음 가벼이, 마음 가벼이/ 세상을 버렸음>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허정(虛靜)의 경지이며, 이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시를 창작하는 목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마음자리가 드러난 작품이 바로 「샘골의 가을」이다. 시인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다가/ 황혼에 붉게 물들며/ 제 상처를 다 보여주는 강물>에 자신을 의탁한다.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갈대를 만나는데, <갈대는 꽃보다 아름다운 슬픔>을 벗어 놓기 위해 춤을 추는 모습으로 내면화된다. 즉 가을에 생명을 다하고 죽어가는 갈대를 통해 <아름다운 슬픔>을 노래하는 것은 바로 ‘자신’과 ‘갈대’의 동질성에 기인한다.
5.
장덕천 시인은 하모니카 연주에 능하다. 남 앞에서 연주하기를 즐기지 않지만, 여러 번 강권하면 못 이긴 체 하모니카를 꺼낸다. 수줍은 모습을 짓지만, 자신의 연주를 청하는 마음들이 고마운지 상기되어 아름다운 선율을 짓는다. 대청호가 내려 보이는 주택에서, 친지들과 함께 하모니카를 불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삶이다. 최근 들어 관절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아서 하모니카 연주를 피하는 눈치이지만, 그럴수록 열심히 연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에는 나들이가 불편하기 때문에 집에 머물 때가 많다. 그때 하는 일들이 하모니카 연주, 독서, 바둑 등이다. 그는 약관에 바둑을 배우고, 많은 시간을 바둑판과 보냈으며, 가까운 사람들과 수담(手談)을 나누기도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바둑판을 앞에 두고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한다.
무료할 때는 구름과 바람과 물결에 마음을 싣기도 한다. 그러다가 뜰에서 말라버린 수련을 보며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도 한다. 「여래 수련」에 의탁하여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는데, <봄 여름 가을 멀리 걸어왔다/ 되돌아갈 길이 없다/ 세상이 쓸쓸해서 눈이 내리는 겨울/ 비켜갈 길도 없다.>고 막막한 심경을 토로한다. 그래서 그는 <서방정토의 꿈>으로 <끝을 모르고 끌고 온 길>을 열심히 가지만, <어둠이 빛을 허물며/ 삐걱대는 길의 관절>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절망은 희망을 잉태하는 모성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꽃의 희망은 빈 가지에서 더 빛난다.
가지의 옹이마다 묻어나는 세월의 생채기에서
피어오르는 저 녹색의 눈을 보아라.
한번쯤 모든 인연의 사슬에서 벗아 나 보자
꽃으로 피어났다가 낙화로 사라지고
다시 바람결인 양 꽃으로 태어나는 세상
바람은 서로의 상처에 아픔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으로 만나기 힘든 세상을 살면서
우리도
한번쯤 모든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보자.
바람 따라 바람이 되어 보자
세상이 얼마나 가벼운가,
빈 가지에 피어오르는 눈처럼
다음 세상에는 꽃으로 만나 보자.
―「나목 앞에서」 전문
<꽃의 희망은 빈 가지에서 더 빛난다.>는 서두에서 비범함을 얻는다. 시인은 또한 빈 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저 녹색의 눈>을 찾아내어 아름다운 소망을 가꾼다. 꽃이 피었다가 지고, 꽃이 진 가지에서 다시 꽃이 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이는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이며, 작품 속에 담고자 하는 시인의 지향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번쯤 모든 인연의 사슬에서 벗아 나 보자>고 반복하면서 윤회의 상처를 주지 않는 바람을 선망한다. 특히 <사람이 사람으로 만나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람 따라 바람이 되어 보자>고 권유한다. 즉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보다는 욕심 없는 꽃으로 환생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그는 겨울나무에 서정을 의탁한다. 「눈사람」 중심 제재는 겨울나무로 되어 있다. <겨울나무를 보시게/ 알몸으로 두 팔을 들고 서 있어도/ 하늘은/ 눈꽃옷을 입혀주고 꾸며 주지 않던가.>설의하면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를 찬미한다. 이는 사람의 삶으로 비유되어 나타난다. <삶을 옆걸음질하며/ 겨울마음으로/ 현재를 사는 시한부 삶이라도/ 보이는 길마다/ 환하게 쌓이는 눈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유한다.
그리하여 <눈사람>이 되어 <슬픔이 넘칠수록 야위어가는 몸>이라 해도, <눈꽃마다 가득 차 있는/ 생명의 햇빛무늬를 짜낼 때까지.>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는 조금씩 악화되어 가는 건강의 위기 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려는 내면의 비유적 투영이라 하겠다.
6.
장덕천 시인은 자신의 것을 이웃과 나누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자 한다. 이러한 마음은 그를 순수하게 하고, 순수한 마음은 동심과 맞닿아 있어 언제나 생동감을 유지한다. 생동감은 신체와 정신에 강한 힘을 부여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그는 영육(靈肉)이 평안하고 건실해 보인다.
10여 년 전에 작품을 나누어 볼 때도, 장덕천 시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서둘러 좋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위로 겸 소망으로 “앞으로 30년은 더 사시겠다.”고 대답하면서 차분하게 좋은 작품을 창작하도록 진언했다.
10년쯤 전에 첫 시집을 발간할 때도 시인은 같은 말을 하며, 첫 시집 해설을 부탁했다. 신뢰와 정으로 수락했다. 이제 다시 시집을 발간하기 위해 의논하면서, “얼마 못 살 것 같아요. 마지막 시집이라고 생각해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제 고희를 바라보시면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희수(77세)도 넘기고 미수(88세)도 넘길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좋은 작품 쓰세요. 아직 사실 날이 창창해요.”라는 대답으로 시집 발간을 축하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은행나무 한 그루, 하늘에 심고/ 그 가지에 한 알 황금 열매로 달려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빛으로 밝혀주고 싶었다.>(「황금 등불」)고 말한다. <누군가 그리울 때마다/ 슬픈 소리가 가슴에서 울려올 때마다/ 황금빛 너와집 한 채 꾸며놓고/ 나비며 벌이며 꽃이며 벌레들까지도/ 하늘의 정원에 불러 모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여살고 싶었다.>고 간절하게 소망한다.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 내면을 작품으로 빚는다.
양지에 앉아 한낮의
햇살을 즐기는 작은 잎을 본다.
잎의 영혼을 본다.
하늘의 푸른 숲이 되고
푸른 숲이 관음보살이 되는
소리 없는 소리를 본다.
―「꿈이 피어나는 봄밭에서」 전문
그의 가슴은 소망이 피어나는 봄밭이다. 따스한 양지에서 햇살을 받는 작은 잎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다. 그 잎이 푸른 숲이 되듯이 자신의 영혼도 울울한 숲이 되리라 믿는다. 그 푸른 숲이 관음보살이 되듯이 시인의 영혼도 관음보살이 된다. 관음보살은 현실에서 수많은 모습으로 변신하여 사람들을 돕는다.
시인은 아마도 곤궁한 이들에게 보시를 베푸는 관음보살을 열망하는 것 같다. 여러 작품에서 관음보살이 등장하고, 그 관음보살에 시인의 내면이 각인(刻印)되어 나타난다. 내세의 구원을 담당한 미륵보살의 발현도 기다리겠지만, 현실에서 힘이 되어 줄 관음보살의 보시행(報施行)은 무한의 가치로 인식된다.
관음보살을 닮으려는 마음을 간직하고,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가을에 피는 구절초에 의탁하여 노래하기도 한다. <가을이 오면 구절초는 늘/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기다리는 사람이 생긴 나도/ 이제는 알 것 같다.>면서 그는 기다림에 빠져 있다. <기다리던 사람 만나지 못해도/ 잎 지고 꽃 진자리에는 늘/ 붉은 기운>이 남아 있을 것을 믿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림’에 산다.
그가 기다리는 ‘그’가 ‘만족할 만큼 좋은 작품’이거나, 신체적 질환을 고쳐줄 ‘명의’이거나, 마음만으로 사랑하는 ‘임’이거나 간에 기다림이 존속하는 한, 기다림의 완성을 위해 그는 건강한 삶을 유지할 것 같다. 그래서 10년, 20년이 지나도록 더욱 멋진 작품을 창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