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금정산 약수터에서 아침 산보를 하면서 생수를 받아왔다.
사실 난 심심산골인 경남거창에서 태어나 산을 바라보면서 성장했지만
산의 매력은 커녕 산은 고생하는 곳으로 생각해왔다.
왜내하면 우리 어릴때는 취사와 난방은 전부 산에서 조달하였다.
비농기인 겨울철엔 동네사람들과 함께 아홉산에 나무하는데 따라다니면서
죽을 고생을(도시락 쭈그러진사건)을 하였으며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은행시험에 고배를 마시고 집에서
아무런 희망도 할 일도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니 자연 부모님으로부터
눈총을 받아 우선 현실에서 탈피하고싶어 동네사람들과 나무하려 산에 가게 되었다.
아홉산.가막산. 권기봉. 살목뒷산.은티. 주상오륵골.기대산을
전진하면서 나무는 힘에 부쳐 못하고 솔방울을 따러 다녔다.
산에 다니면서 울기도 많이하면서 얼마나 좌절했는지......
이런한 생활로서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젼을 가질수 없어 은행시험에
다시 도전 하겠다는 각오로 부산에 내려와 윤주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시골에서 우등생으로 공부하였지만 시골에서 공부한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두번의 은행시험에 실패를 하고 김수종 아저씨의 도움으로 진주시에서 임시공무원 생활을 했다.
임시직의 서러움을 맛보며서 다시각오를 했다 .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무원시험준비를 하여 공무원공개채용시험에(50:1)에
합격하여 진주시청에서 9급공무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배경도 능력도 없지만 오직 성실과 열심히 하여 진주농고와 진주고등학교
출신들의 아성을 물리치고 6급까지 선두 주자가 되었다.(그당시 진급은 엄청 어려웠음)
요직이라는 병사계7년 부과계.인사계 주임을 두러거첬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먹고싶었던 음식을 많이 먹을 기회가 있어 자연 과식을 하였다
나는 고등학교졸업당시 176cm 신장에 체중이 50Kg 이었다.나의 별명이 전붓대이다
살찌는 것이 소원이라 과식을 하니 80kg 까지 체중이 늘어난다
그때부터 비만으로 성인병(고혈압.당뇨병)에 비상이 걸렀다.
처음에는 체중관리를 위하여 금정산을 오르니 고향의 산에서 고생한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산은 삶에 찌들었던 나의 가슴을 툭 튀게 하고 마음이 상쾌한 것이
등산이야로 나의 건강을 지키줄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일주일에 하루일망정 이 풍진 세상의 온갖 분노.증오.갈등의 앙금을
산에 오르는 고된일로 흐르는 땀과 한때나마 털어버리고 나면 가슴이 후련했다.
나에게 산행은 이미 취미의 단계를넘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산의 무한한 침묵과 어늑함을 느끼보며 스스로 자연의 한부분으로
동화되고자 하는 꿈을 실현키 위하여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한라산5번.울릉도성인봉2번.지리산종주5번.설악산도 코스별로 등산을 했다
백두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치악산.속리산.주흘산. 조령산등 전국의 유명산은 수없이 올랐다.
1987년도에는 일년에 55번 산행을했다.
마산병일이 결혼식에도 고모부란 사람이 참석하지않고
무등산 등산을 간것은 정말 죄스럽다.
1985년5월27일 -29일(2박3일)우리나라에서 제일험준한 설악산 용아장성코스를 타고
바로 그다음주 공룡능선을 등정하기위하여 다시 혼자서 산행을 하다가 죽을 고생을 했다
다음날 출근하려 속초에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는등 완전히 산에 미친놈이 되었다.
어쩌다가 꼭 참석해야할 중요한 결혼식이 있어 등산을 못하고 집에있는 일요일에는
애들이 "아버지 왜 오늘은 산에안가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당연히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아버지가 산에 가는것으로 되어 있었다.
가족들에게 엄청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당시 내 계획은 몇년안에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산은 전부 등산을 할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88년도 아버지께서 폐암으로 1년동안 고생하시는동안 병간호로
산행은 못가므로 자연히 열이 식고 1987.07.02 별세 하실때까지 제데로 산행을 못했다.
그 후 테니스에서 베드민트으로 전환하여 정말 열심히했다.
너무 무리하게 하여 퇴행성관절염으로 부득히 테니스와 베드민트는 그만두고
데니스와 배드민트 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탁구로 다시 전환하였다
탁구도 너무 무리하여 어깨와 허리에 엘버가 와 병원과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래도 꾸준히 열심히 운동을 했다.(포기 하려고 했다)
그래서 실버세계에서는 잘 한다는 부류에 속하여
전국어르신체육대회에서 부산복지회관대표로 서울 장충단공원과 인천등지에서 출전했다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한 거의 매일 집에서 7시30분에 탁구장에 나가
땀이 흠뻑 날 정도로 운동을 하고있다
젊어 등산광은 늙어 신경통이라는데 실없는 말이 아닌 것같다.
그래서 요지음은 근교산을 찾아 가벼운 산행을 하고있다.
그동안 산행을 하다가 자연히 여행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되었다.
제주도의 우도.마라도.울릉도.독도.흑산도.홍도.소륙도.안면도.선유도 등를 비롯하여
전국의 명소는 거의 탐방하였다.
등산과 운동을 하면서 나는 많은 땀을 흘리다보니 자연 목욕을 자주하게되어
전국의 이름난 온천을 찾아 온천욕도 함께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해외배낭여행 (중국10박11일.일본5박6일)을 하였다
미국.카나다.호주.뉴질랜드.유럽등 30여 국가를 여행도 했다.
난 기질이 한번 집착하면 완전히 푹빠지는 성격이다.
학창시절에 공부도.낚시.등산. 여행. 운동.사진촬영(비디오).컴퓨터 단전기체조 등
후회없이 혼신의 힘을 기울려 열심히 살아왔다.
" IMF"로 공직사회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정년이 3년이 단축되여 공직생활를 마감하고
이제 야인으로 돌아오면서 그동안 산행을 통하여 실제 보고 들은 자료를 토대로
"산행일지"란 책을 출판하였다.
늦게 사진에 몰입하여 영광겔러리에서 전시회도 가져보았다
목숨의 거둠이 하늘의 뜻이라면 열심히 사는건 인간의 권리요 자유이다.
남은 여생동안 성실히 살고 그리고 틈이 나면 등산과 카메라를 메고 여행을 할 것이다
아림(娥林)
첫댓글 아림의 일대 성장기와 청년기 공직사회......
그리고 테니스 베트민트 요가는 물론 산이라는 산은 다 다녔고, 외국 여행도 우리 한국 사람의 평균 수치를 너무나 초월했네요...
경상도와 전라도의 명승지는 모두 탐방했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이러한 멋진 남자는 없을것 같아요....
그래도 티 내지 않고 겸손하면서 노후를 마음껏 즐기는 "아림"을 존경 않할수가 없네요...!!!!
나는 약100분의 1도 못 따라가는 신세가 되었구려....아쉽고 후회스러워요....이제사 늦게 시작한 도둑이 날 새는줄 모르고 설치다가 잡히는 줄도 모르고 허둥되니 한심하구나.......
그러나 여러가지를 전공하여 모두 이수 하였으나 나는 그러지 못하고 단 하나 사진이라도 한번 잘 찍어 볼까 하오....많이 도와주구려!!!!
나는 오늘에사 아림의 일대기를 읽어볼 기회를 가졌지!!!!!
정주영이가 그냥 현대를 일르켜 세운것이 아니듯이 아림도 역시 성공한 "아림"이였구려.....
아직도 창창한 미래를 30년이나 지탱할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축하하오.....
백송형! 과찬에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저는 평생 화투장을 안잡아보았고.바둑.장기.당구 춤등 기박과 놀이 에는 전연 취미가 없어
자연히 산과 더불어 여행을 하면서 기록보전을 위하여 사진과 컴퓨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모든것이 부족하여 제데로 한것이 없습니다. 다만 나름데로는 열심히 살아왔다오
이제 남은 인생 백송형과 함께 사진에 매진 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