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화 특강
창조신화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각 문화권의 고유한 답이다.
세상은 왜 이런 모양일까? 인간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태초부터 인간은 의식 세계의 끝인, 미지라는 신비를 맞닦뜨리면
신화적 상징을 투사하고 거기서부터 창조신화가 탄생한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는 북미 인다안 창조신화를 통하여 1) 인간의식의
진화과정을 살펴보고 2) 트릭스터라는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독특하고 사랑스런 원형을
탐구하려 한다.
오전: 에스키모 창조신화
오후: 트릭스터 신화
참조:
트릭스터
인류 초창기 스토리텔링 예술이 시작된 시기부터 듣는이들을 가장 즐겁게 해주는 단골 메뉴가 트릭스터 이야기들이다. 절대 마르지 않는 트릭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과 헌신을 다하는 장난끼는 듣는 이들에게 배꼽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빼낸다.
원형으로의 트릭스터란 단어는 보편화되어 간다. 이 표현이 원래는 미국 인디안 신화에서 등장하는데, 북미 인디안들의 창조신화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 형상은 다양한데, 가장 빈번하게 카요리 (Coyote)가 북미 트릭스터를 대표하고 종종 Raven, Blue Jay, 여우, 밍크, 토끼 등 다양한 동물들로도 나타난다. 반드시 동물의 형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코코펠리, 머드헤드 등 반 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옛이야기중엔 흔히 어리석지만 음흉한 호랑이로, 잔꾀 많은 토끼로, 변덕쟁이의 대명사인 여우로, 응큼한 늑대로도 그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중 한국의 대표 트릭스터라면 단연 도깨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도깨비 같다’라는 일상의 표현을 만들어 낸 이 인물은 그 교활함과 영리함이 탄복할 지경이고 동시에 어리석음과 바보같음이 두드러진다. 식욕 색욕 파괴력 또한 가공할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깨비들인 트릭스터들의 터전이라면 단연 서커스, 카니발, 가장 무도회같은 난장과 안방의 코미디 극장일 것이다.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와 바보같은 몸짓들, 때론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모든 권위에 도전하고 모든 규칙과 법률과 금기를 깨뜨린다. 이들은 반란군이고 레지스탕스이지만 절대 체포되는 일은 없다.
이들의 교활-어리석음-기민함은 법과 법 사이, 규칙과 규칙 사이, 말끔하게정리된 ‘완전한’세상을 혼돈에 빠뜨린다. 이런 혼란을 초대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웃고 우는 이유는 이들이 젊잖고 예의 바르고 신중하고 용의주도한 우리들의 마음속으로 가장 원하는 바를 대신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는 자기가 도깨비임을 인정하는 것이 존재의 확인이라고 했다. 우리 안의 도깨비를 들여다 보기 위해 도깨비 특성을 살펴보면,
“도깨비는 씨름을 즐긴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는 시비를 거는게 아니라 씨름싸움을 건다. 그렇다고 그가 천하의 장사인 것은 아니다. 씨름꾼으로도 그는 시원찮다. 외발다리에 별로 힘센 것도 아닌 묘한 씨름꾼, 그가 도깨비다. 아니 도깨비가 지닌 여러 속성의 하나다. 구름 모양을 한 꼴로 다 잡아 그릴 수 없듯이 도끼비를 외가닥으로 몰아쳐서는 안된다.” (김열규)
어떤 형상으로도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애매함이 도깨비의 특성이다.
현대판 서양 도깨비 챨리 채프린의 표현에서 그 특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baggy pants, the coat tight, the hat small, the shoes large. I wanted everything to be contradiction. 노인인지 젊은이 일지 결정을 못했는데 수염을 붙이자 노인이 탄생했다.
“I had no idea of the character. But the moment I was dressed, the cloths and the makeup made me feel the person he was. I began to know him, and by the time I walked on the stage he was fully born.” (자서전)
채플린의 천재적인 영감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처럼, 또 이 어릿-노인광대는 생명의 순수한 자발성 (sheerly spontaneous in life)이 넘쳐 흘러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창조적 본성을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순수한 창조의 불씨를 불을지펴,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타오르게 하지는 않는지? 우리들의 트릭스터에 대한 식지않는 애정의 근원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서커스 난장에 광대가 등장하면 그 장소는 삽시간에 웃음바다로 변한다. 그러나 철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광대의 웃음 뒤에 배여있는 슬픔을 읽어간다. 우리가 의식하던 못하던 배터지게 웃다가보면 언제나 눈물이 짜여 나온다.
Sious medicine man, Lame Deer;
“coyote, Iktome, and all clowns are sacred. They are a necessary part of us. A people who have so much to cry about as Indians do also need their laughter to survive.”
가공할 만한 창조력과 파괴력, 눈물과 웃음, 교활함과 어리석음, 거짓말장이와 정말 진실을 말하는 자, 이 어느 하나로는 규정할 수 없는 이 애매하고 사랑스런 존재에 대한 이해는 곧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리끼리한 도깨비의 진실은 드러내어 훤히 밝힐 수는 없지만 최소한 도깨비와 씨름은 해 봄직 하지 않을까?
첫댓글 일시 : 4월 19일 토용일 오전10시~오후4시 장소 : 곰네들 누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