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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암본당사 ★ ★
1. 지역사회 소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러한 10년이 두 번도 더 지나가고 이제 30년을 내다보며 혈기 왕성한 청년기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우리 조암 성당 25년을 기념하는 사료를 정리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환경을 더듬어 보고 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살펴보기로 한다.
1.역사적 측면에서의 지역명
조암성당은 삼괴반도 중앙에 자리하고 이 반도에 소재하고 있는 양개면을
관할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지명은 고래로 부터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1) 선사시대
삼괴반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뚜렸하다.
그 증거로는 조암리 산 84번지 일대에서 발견되었던 마제 석기인 돌칼,돌도끼,돌화살촉,토기 조각 등의 발견이 역사 이전부터 사람이 군집하여 살았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 삼한,삼국시대
청동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문명이 발달하고 국가가 성립을 하게되는데 후한서 동이전 기록에 의하면 마한,진한,변한의 삼국이 있었는데 모두 78국으로 이루어 졌었다. 또 동국예지승람에 의하면 마한 54개의 부족국가중 상의국이 삼괴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가 왕성해 지면서 상의국도 백제에 예속하게 된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세력다툼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백제 개로왕(A.D 475)이 피살 되는 바람에 수세기 동안 백제의 지배를 받아왔던 이 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편제에 따라 매홀군(수원) 당성군(남양)이 되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 후 A.D 551년 백제 성왕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무찌르고 한강유역을 탈환하게 되자 76년 만에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된다. 그리고 그 2년 뒤인 553년에 신라가 백제 유역을 빼앗는 바람에 이곳 삼괴지역은 다시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신라는 이곳에 당항성(서신면)을 개축하여 당나라와의 교통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 후 신라는 많은 신라인을 이곳으로 이주 시키고 정착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화성군 지역 일대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수 많은 신라토기 파편의 발견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고 이 일대가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입지조건이 갖추어져 있음을 재삼 느낄 수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A.D 757)에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통페합 하면서 이곳은 수주(水州)로 속하게 된다. 매홀군(수원)은 수성군으로 개칭되고 당성군(남양)은 당은 군으로 개칭되었으나 흥덕왕 4년(A.D 829)에 당은군은 다시 당성진으로 고쳐져 신라수군의 중요한 요충지가 된다. 당시 이 지역 내에도 불교가 널리 보급되고 이화리 보금산에 있는 보덕사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3) 고려시대
고려조에 들어와서 고려태조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수성군에 속했던 이곳을 다시 주로 승격시켜 수주가 되고 그 후 고려 원종12년(A.D 1271)에는 도호부로 되었다가 목(牧)으로 되면서 수주목이 된다. 그리고 고려 충선왕 2년(A.D 1310)에 모든 목을 없앰에 따라 수원부로 명칭이 바뀌면서 지역이 강등되었고 성당이 있는 이 삼괴 지역 역시 수원부에 속하게 되면서 고려조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한다.
(4) 조선시대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광도에 속해있던 수원부와 남양부를 경기도에 편입시키면서 이곳도 따라서 경기도가 된다.
(5) 왜정시대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부러 일본은 통감부 지방관제로 행정구역을 명시하고 부사나 군수, 현감이 독재하던 것을 면과 리로 나누어 면에는 면장 리에는 리장 동에는 동장을 두어 행정토록 하였는데 당시의 면사무소는 우정면 화산 4리와 장안면 어은리에 있었으며 경찰관 주재소는 현 화수초등학교 독립기념비 근처에 있었다.
이상과 같이 성당이 속해있는 주변의 변화와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하여 지역의 내력을 살펴 보았다.
오늘 날 성당이 속해있는 이 삼괴반도는 우정면과 장안면의 두 개의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모든 생활은 우정의 조암 장터를 중심으로하여 단일 생활권으로 묶여져 있으며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행정의 분리와는 관계없이 모두가 가까운 이웃이 되어 삼괴라는 일체감 속에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2. 지리적 특성과 환경변화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삼괴반도는 한반도 중서부에 속하는 경기도의 서남 해안쪽이며 남쪽은 남양만을 경계로 하여 평택군의 포승면과 연하고 서쪽 역시 남양만으로 황해 바다에 접하고 있다.북,동쪽은 팔탄면과 향남면에 이어져 있으며 향남면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오산시와 연결이 되고 북동쪽으로 30여 Km를 가면 수원시와 맞닿는다.
오늘날은 수도권의 일부로 국도변을 따라 많은 공장이 유입되고 있으며 특히
기아자동차 공장이 세워짐과 같이 인구 유입이 늘고 자동차 관련 부품 공장들이 점점 증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원예 농업과 낙농업이 성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특별한 어려움 없이 생활을 해왔으나 정부의 시화지구 개발 등으로하여 더욱 성장을 내다볼 수 있고 잠재력이 무한한 곳으로 전망된다.
(1) 우정, 장안(삼괴반도)의 크기와 인구
삼괴반도의 면적은 대략 129.26 평방킬로 이며 인구는 거의 3만명에 달하고 행정리수는 87개리에 자연부락이 156마을이나된다. 앞으로 화성군이 도시가 되고 기아자동차 공장이 본 궤도에 올라조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재 조암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생활권이 더욱 확대되고 성당을 찾는 신자수도 더욱 증가할 소지가 충분히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지세
화성군의 지세는 크게 강원도 북부에서 남서로 달리는 광주산맥과 그 남쪽 차령산맥 사이의 서쪽 말단부 위에 위치한다.동북쪽으로 비교적 높은 산세가 깊은 산지를 형성하고 중앙은 저산성 구릉지대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저평한 평야지대를 이루면서 서해로 빠져들고 있는데 삼괴반도는 바로 이 평야지대에 속하여 땅이 비옥하고 예로부터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천혜적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근래에는 활발한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해안선이 일직선화하는 경향이며 우정면 호곡리,주곡리를 연결하는 군자만 쪽의 해안은 시화지구개발 계획으로 모두 육지화하고 있다.따라서 오래전에 간척이 되어 지금은 상당량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는 장안면과 우정면의 남양 간척지와 더불어 새로운 농경지 조성은 물론 공업관련 산업도 활발하게 형성되리라 보여진다.
3) 천주교 전래와 조암성당
화성군에 천주교가 전파된 때는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1839년 천주교 대박해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관헌의 눈을 피해 현재의 봉담면 왕림리 갓등이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신부,샤스땅 신부 등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위해 주막으로 위장한 공소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이로써 막연하나마 1338년 이전에도 신자들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후 1866년에 있었던 병인 박해 때 이곳 출신 조화서(베드로), 장낙소(요셉), 조윤호(요셉) 3인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순교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이 때에 남양도호부에서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는 이 지역의 유명한 성지인 수리산, 담배골, 둔트리 손골,골배마실, 미리내 등과 걸어서 하루만에 다닐 수 있는 곳에 있어 교우간에 왕래가 잦았고? 또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 3품의 도호부사가 있어서 남양도호부 내와 근교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했기 때문이었다.
조암성당의 설립
1886년 조, 불 수호조약이 맺어지면서 정부의 강력한 박해에서 조금이나마 풀려나 약간의 신앙생활에 자유를 얻게 된 이듬해인 1887년 7월 봉담면 갓등이에 갓등이 성당(현 왕림성당)이 세워졌다. 이 성당은 수원교구내의 두 번 째 성당으로, 양평성당(1886년) 다음으로 설립되었다.이 성당이 설립됨으로하여 화성군내 천주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 성당을 모체로하여 군내 여러 지역으로 천주교세가 확산되고 새로은 성당과 공소를 설립하게 된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이 지역 주변에는 성당은 커녕 공소도 설립되지 못했던 관계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루종일 걸어서 또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왕림성당까지 가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다 1957년 발안성당이 설립됨으로하여 이지역 신자들은 다시 발안성당의 신자로서 거리적으로는 다소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원거리를 다녀야하는 불편함은 해소되지 않았으나 발안성당의 조암공소로서 인근 신자들이 모여 구심점을 이루고 점차 성당 건립에 대한 의지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조암성당의 역사
(조암성당 설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책자 발간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당시 기록들과 사목의원으로 일하시던 회장님들을 비롯하여 신자분들을 방문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 할 수 았었으며, 왕림성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에서 자료를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조암성당은 1973년 1월 5일(금요일) 발안 성당에서 분당되었다. 그 당시 발안 성당은 향남면, 팔탄면, 양감면, 장안면, 우정면이 사목 대상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장안면과 우정면이 조암 성당의 사목 구역으로 활당되었다. 하지만 조암 성당 관할 구역내 신자들은 이미 왕림 성당에서 신앙 생활을 해 왔었고,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알레스 신부가 교구장에게 보낸 보고 서신에서
(수원 지방 성영회 보고서. 1898년) `독정의(현재 거먹골 공소) 전이시도르 집에서 키우는 한 어린이' 라는 보고 내용도 찾아 볼 수 있다.1919년 6월 22일 정리번호 1919-25 보고서에 수원군 장안면 장안리 회장 김선문 안드레아(45세), 안경덕 가별(36세) 김여춘 요셉(52세), 김광옥 베드로(26세), 최주팔 도마(45세), 이상의 다섯분은 일제 당시 주재소 방화사건으로 당시 순사 살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과 연관되어 당시에 새로 지은 공소 건물을 수리하고 있던 중 체포되어 사건과는 관계없이 무고하게 가혹하고 불의한 감옥살이를 산 것이 보고되었고, 당년 12월 19일에 보고한 정리번호 1919-79 에서도 장안 공소 설립에 관한 문서가 없다는 내용과 정리번호 1922-1931 갓등이 본당 지명 보고에,
수원군 장안면 화전리(꽃바대)
장안리(장안)
우정면 이화리(배꽃)
멱우리(은행정)
이상과 같이 문헌에 당시 왕림 성당 편재에 4개 공소가 편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왕림 성당에서 발안 성당이 분당되었고 현재 우정면, 장안면에 소속된 10개 공소(은행동, 발라곳, 배미, 이화, 화전, 거먹골, 조암, 버섯말, 장안, 노진)는 발안 성당에 구성되어 있었다.우정면과 장안면은 농어촌 지역이고, 당시 왕림 성당으로 미사 참례를 하려면 보통 10km에서 20km이상 떨어진 곳에서 도보로 가야 했으며 당시는 발안에서 조암까지 고작 몇차례 버스 운행과 마이크로 버스 (일명 합승)가 몇차례 운행되고 있던 시절 이었기에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당을 조암에 짓고, 신부님을 맞이하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공소 회장님들은 신자들의 마음을 받아들여 성전 건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부터 분당 계획에 대한 문제를 당시 발안 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임충승 신부님께분당에 대한 계획을 말씀드렸고 사목회에서는 이 문제를 제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암 구역 회장님들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재정적인 어려움도 크다
하겠으나 조암에 강당을 짓고 발안 본당 신부님께서 오셔서 출장 미사를 봉헌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발안 구역 사목회 회장님들의 강한 반발도 일조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1970년 1월 15일 마침내 분당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초대 회장으로 김진철(요한)씨를 선출하였다.
김진철 회장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여 성전 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막상 모금을 하려니 어려운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부유한 가정을 찾아가 보면 때로는 허전한 마음만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중 1972년 김진철 회장님이 소유하고 있던 현재 성당터(조암리 355-2, 342-2)
521평을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공소 회장님들은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회장님들은 당시 교구장님 이셨던 윤공희 주교님을 찾아 뵙고 사실을 말씀드렸으며,
주교님은 회장님들의 활동에 만족하셨다.
신자 모두는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신부님 모시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2년 초 기성회는 모금한 돈으로 1층 사제관과 2층 강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건축 도중 자금 부족으로 인하여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이르러 총회장님과 기성회장님, 공소회장님들은 서울에서 살고있는 이 지역 출신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익명을 요구한 분으로부터 시멘트
200포대를기증받았다.
회장님들의 눈에는 환희와 눈물이 엇갈렸다.
다행이 공사는 가까스로 지속되어 마침내
사제관 및 강당은 1972년 가을에 완공되었고 신부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교님을 수차례
찾아뵈었다.
마침내 신자 모두는 1972년 12월 28일 초대 신부님으로 김병렬 보니파시오 신부님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신자는 186세대 986명이었고 신자 모두는 신부님을 모시게 됨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한 가족과 같이 신자 공동체도 발전해 나아갔고, 이어 성전 건립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누구도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농촌 본당이고 보니 성전 건립을 하기 위한자금 마련에는 역부족이었다.
더더욱 어려웠던 것은 모 본당인 발안 성당에서 분당에 대한 지원이 전혀 없었던
점이다.
물론 재정 지원을 한푼도 못 받은 것은 독자적으로 분당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신부님은 사실도 모르는 채 부임하셨고 이러 차근차근 사태 수습에 주력하셨다.
김신부님은 사목 협의회를 구성하셨고, 초대 총회장으로 송영윤 마태오씨를 선임하였다.
새로 임명된 송영윤 총회장님과 김진철 기성회장님은
첫째 사업으로 성전 건립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자 가정을 방문하여 모금을
하였고, 김진철 기성회장님이 기증한 현 성당 부지에 성전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성전 짓는데 필요한 모든 자재는 김진철 회장님께서 제공하고 전문 기술자를 제외한
모든 인력은 신자들이 맡기로 하고 마침내 건축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부님은 손수 삽과 곡괭이를 잡고 흙을 파시고 벽돌을 등에 지고 나르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으며, 신자들은 이에 송구스런 마음과 더불어 땀 흐르는 줄 모르는 열심으로 성전 건립에 주력하여 성전은 어려움없이 마무리되어 갔으며, 마침내 1975년 5월 20일 김남수 안젤로 교구장님을 모시고, 지역 기관장과 여러 내빈을 모시고 낙성식 및 축성식을 거행, 조암 예수성심 성당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꿈에 그리던 성전을 건립하고, 김 신부님은 특유의 온유함과 친절로써 공소를 방문
하셨고, 신자 늘리기에 주력하셨다.
또한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데는 수녀님을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셨기에, 김짙철 기성회장님은 단독으로 성당 뒷편에 23평의 수녀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1976년 9월 1일 기공식을 가졌다.
당년 11월 30일 수녀원을 완공하고 이듬해 2월 29일미리내 성심 수도회에서
모 엘리사벳 수녀님과 최 프란치스카 수녀님, 두분을 모시게 되었다.
1977년 5월 6일, 김병렬 신부님 주례로 수녀원은 낙성되었다.
현재까지 김병렬 보니파시오 초대 신부님을 비롯해, 이종철 스테파노 신부님,
서종선 도마 신부님, 이종철 베난시오 신부님, 송병선 요셉 신부님, 허정현 세자 요한
신부님, 이후진 마티아 신부님(한국 외방 선교회), 류종구 미카엘(한국 외방 선교회)
신부님, 최병용 마티아 신부님이 다녀 가셨고 현재 김봉기 마태오 신부님이 10대 신부님으로 계신다.
수녀님은 모 엘리사벳, 최 프란치스카 초대 수녀님을 비롯, 10대 째 스물 여덟분의
수녀님이 다녀가셨거나 계신다.총회장님으로는 초대 송병윤 마태오 회장님을
비롯하여 김진철 요한 회장님(2대, 4대 역임), 3대 송권섭 바오로 회장님, 5대 홍천식
베드로 회장님, 6대 박재인 바오로 회장님, 7대 송헌섭 마르꼬 회장님에 이어 8대
홍천식 베드로 회장님, 9대 안희상 베드로, 10 윤영덕 미카엘 회장님에 이어 11대 김진근 토마스 회장님이 열심히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조암성당의 편성은 5개 지역에 27개 구역, 72개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자수는 장안면과 우정읍 총인구 29,689명 중 2,760명 총 975세대로 신자 비율 9.29%에 달하고 있다.
현재 유재현 스테파노 신부님은 부임일로부터 최 바오로 주교님께 성당 재 건축의 명을 받으신 후 조암성당의 건축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기도하시고 고민하시고 병행하시며 우선 모든 교우들과 봉사자들에게 미사와 전례의 중요성에 대하여 항상 말씀하시어 성전을 지어 봉헌하게 될 우리 마음의 기준이 하느님께 향함을 알게 하시고 성전을 짓는 이유는 미사와 전례, 기도와 선교에 목적을 두고 또 그렇게 교우들이 따르며 생활하도록 사목활동에 힘쓰시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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