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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성 여 행 사
TEL : (051)441 – 3804 FAX : (051)468 – 3774
여 행 준 비 물
* 우산, 운동화, 카메라, 멀미 약, 상비약, 필름, 치약, 칫솔, 선글라스, 모자, 면도기 등
1. 세면도구
치약, 칫솔, 1회용 면도기, 개인용 속옷은 호텔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2. 카메라, 필름, 건전지, 카메라 밧데리
유럽에서 사시는 필름과 건전지는 우리 나라에 비해 가격이 비싸므로 여유있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카메라 밧데리는 사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용하려고 하면 밧데리가 방전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지에서 구입하시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사전 전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름, 건전지는 인천 공항에서 구입하시는 것이 가장 저렴합니다.
3. 필기도구와 미니노트
여행 중에 중요 지역이나 유명한 고적들을 간단히 기록하시면 다녀오셔서 기억 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비상약품
비상 약품(소화제, 감기약, 진통제, 일회용밴드, 멀미약 등) 과 평소 복용하시는 약은 필히 준비하셔야 합니다. 유럽에서도 처방전이 없이는 약을 사실 수가 없습니다.
5. 복장
복장은 여행하시기 편안한 캐쥬얼 의상이 적당하며 간단하게 세탁할 수 있는 옷이 좋고, 신발은 운동화와 같이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 신발이 좋습니다. 고산지대로 가시면 추우니, 긴 팔 상의나 점퍼 같은 따뜻한 옷을 꼭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6. 작은 우산
유럽의 날씨는 변덕스러우니 양산과 겸용되는 것으로 준비하세요.
7. 단단한 트렁크 종류의 여행용 가방
화물 칸에 짐을 실을 때 가방을 던져서 싣는 경우가 있으니 열쇠가 부착된 큰 가방으로 단단한 트렁크 종류의 가방이 가장 좋으며, 기타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가방(작은 배낭이나 색)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1. 담배
유럽 현지는 담배 가격이 비쌉니다. 인천 공항에서 미리 준비해 가지고 가십시오. 참고로 1인 당 1보루 이상은 면세 범위가 넘으니 1보루 이상은 안됩니다.
여행 시 유의 사항
[기내에서]
1. 기내에서는 BOARDING PASS(탑승권)에 명기된 자신의 좌석에 앉아야 하며 기타의 사정으로 바꾸고자 할 경우에는 기내가 다 정리된 후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여 바꾸시면 됩니다.
2. 기내에서 나누어 드리는 여행 목적지의 출, 입국 카드는 여권을 보시고 정확히 기재하시면 됩니다.
3. 항공기 이착륙 시에는 기내 안내방송과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서 안전벨트 착용하시고, 착륙 후 항공기가 완전히 탑승구까지 이동하여 멈춘 후 내릴 준비를 하셔야 여행을 안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안전사고 예방]
1. 단체 여행이므로 공동 생활의 질서와 시간을 지켜 주세요.
특히 시간을 지키지 않는 분이 계실 때에는 단체 분위기가 흐트러지기도 합니다. 한 분이 5분 늦어지면 출발이 10분 늦어지고 다음 도착지에 늦게 도착하게 되므로 그만큼 다음 여정에 지장을 주어 충분히 관광을 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서로에게 조금씩 만 양보하신다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2. 가급적 단체에서 이탈하지 마시고, 부득이 한 경우 이탈할 시에는 반드시 실무자에게 얘기해 주세요.
3. 관광지는 혼잡하므로 개인행동은 절대 삼가십시오. TOUR LEADER 또는 가이드 안내에 따르셔야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4. 여행 중에는 모든 분이 해외 여행자 보험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실 경우 병원 치료 후 영수증을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5. 개인적인 분실에 대해서는 본사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물건을 분실했을 경우에는 현지 가이드에게 도움을 청하셔서 경찰서에서 분실 신고를 하셔야 귀국 후 보험처리가 가능합니다. 단, 현금은 보험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6. 어느 나라건 여행자가 많은 곳은 도난 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므로 여권 및 개인 소지품은 각자가 철저히 관리하셔야 합니다.
이태리 로마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주의를 요하며, 여권이나 현금은 반드시 밖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여 주세요. 여권용 작은 백을 가지신 분들은 옷 속에 꼭 넣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7. 호텔에서 귀중품과 현금, 여권은 본인이 반드시 소지 하시고 자주 확인해 주시고 여의치 않은 경우 호텔 의 안전금고에 맡기시는 것도 좋습니다.
8. 관광지에 도착 하셨을 경우에도 버스 안에 귀중품을 놓으시게 되면 분실의 위험이 높고 분실 물에 대해 기사나 가이드 혹은 T/C가 책임 질 수가 없습니다.
[호텔에서]
8.1.1.1. 호텔 투숙 시 객실 번호를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시고, 외출 시에는 호텔 프론트에 비치된 호텔 안내 팜플렛을 소지하면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8.1.1.2. 대부분의 호텔방은 자동으로 잠기므로 호텔방에서 잠깐 외출 시더라도 반드시 방 열쇠를 소지해야 합니다.
8.1.1.3. 개인적으로 호텔을 나갈 때에는 반드시 행선지를 밝혀 주시고, 호텔 투숙 카드와 지도를 휴대하시기 바랍니다. 호텔 투숙 카드가 아닌 열쇠인 경우에는 프론트에 열쇠를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8.1.1.4. 호텔에서는 1박에 미화 1달러 정도의 팁을 침대 위에 놓는 것이 국제적 관례로 되어있습니다. 또한, 호텔에서 포터, 하우스 메이드, 벨보이 등에게 서비스를 받으셨을 경우에는 약1달러 정도의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8.1.1.5. 호텔은 세계 각국의 여행객이 함께 사용하므로 방을 나올 때에는 옷차림에 주의하여 주시고 고성방가는 절대 삼가야 합니다.
8.1.1.6. 호텔 퇴실 중 전화, 미니바(냉장고)를 사용하였을 경우 요금을 꼭 지불하셔야합니다.
8.1.1.7. 호텔에서 샤워를 하실 때에는 커텐을 반드시 욕조 안에 넣어서 물이 목욕탕 바닥으로 튀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유럽 호텔의 욕실 바닥에는 우리 나라와는 달리 카펫트가 깔려 있기 때문 물이 튀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하며 카펫트에 물이 묻게 되면 호텔 측에 배상을 해야 합니다.
8.1.1.8. 화장실에 변기가 두 개있는 경우 하나는 여성전용 세척기(비데)오니 사용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관광지에서]
1. 여행 중 문화 및 관습의 차이에서 오는 제반 실수 및 마찰을 피하도록 사전에 기본상식을 익혀 두도록 하십시오.
2.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속담이 있듯이 여행 중에는 상대국의 문화 및 예절을 존중해 주셔야 어처구니 없는 마찰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3. 여행은 견문을 넓히는 것이 그 목적인 만큼 언제나 애정을 가지고 현지인을 만나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4. 관광지에서 외국인과 마주칠 때에는 가볍게 웃어주는 것이 예의 입니다.
5. 버스 내의 맨 앞 양쪽 두 자리는 여행자 분들을 안내하는 안내원과 인솔자가 계획된 여행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일을 보는 임시의 자리가 되므로 양보하며 안내원의 인솔에 적극 협조하고 버스 내에서는 금연입니다.
[식당에서]
1. 식당에서 드시는 주류 및 음료수는 개인이 지불하셔야 합니다.
2. 아침 식사가 호텔 뷔페식 일 경우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하며 또한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큰 결례가 됩니다.
3. 식당에서 음식을 제촉하시거나 큰소리로 떠들지 않는 것이 예의 입니다.
4. 여행 중에는 물을 사 드셔야 합니다.
[그 외 유용한 정보]
1. 환 전 : 유로화(EURO)로 환전하시면 됩니다. 현지에서 쓰실 소액은 현지에서 조금씩 환전해서 쓰시는 것이 재 환전 시 환차를 좀 더 적게 보실 수 있는 방법이며 각 나라별 동전은 환전이 되지 않으니 유의하십시오. 신용카드를 준비해 가시면 쇼핑 등 현지 경비를 편리하십니다.
2. 시 차 : 모든 지역 – 8시간 ( SUMMER TIME – 7시간)
3. 전화하는 방법 : 호텔 외선 번호는 가이드가 알려드립니다.
1. 독 일 : 호텔 외선 번호 + 0800-186-0679(교환원연결)
2. 오스트리아 : 호텔 외선 번호 + 0800-200-208(교환원연결)
3. 헝 가 리 : 호텔 외선 번호 + 00-800-08212(교환원연결)
4. 슬로바키아 : 호텔 외선 번호 + 0082 + 0을 뺀 지역 번호 + 전화번호
5. 폴 란 드 : 호텔 외선 번호 + 00-800-08212(교환원연결)
6. 체 코 : 호텔 외선 번호 + 0042-00-8201(교환원연결)
4. 식 사 : 조식은 호텔 뷔페식 입니다. 중식 및 석식은 한식, 현지식, 중국식으로 현지 도시 상황에 따라 결정되며 일정표를 참고하십시오.
5. 세금의 환불 : 물건을 구입시 정해진 금액만큼 물건을 구입하시면 세금을 제외하거니 다시 돌려 드립니다. 각 나라별로 정해 진 금액이 틀리며 현지 가이드께서 안내 해 드릴 것입니다. 반드시 영수증을 챙기시고 세금 환불 서류와 영수증 물건들을 최종 서울로 출발하시는 마지막 공항에서 확인하시면 되고 본인을 신용카드 번호를 알려 주시면 3개월 이내에 손님을 카드로 세금이 환불 됩니다. 단, 주의하실 사항은 스위스에서 물건 사신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스위스에서 밀라노 이동 시 세금 환불에 대한 서류를 TC의 도움으로 마무리 하셔야 하며 각 지역별로 현지 가이드에게 안내 받으시기 바랍니다.
6. 현지 대사관 연락처
1. 주 독 일 대사관 : 39 (0)30 260-650
2.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 : 43 (0)1-478-1991 / 5
3. 주 헝 가 리 대사관 : 36 (0)1-351-1179 / 1180
4. 주 슬로바키아 대사관 : 43 (0)1-478-1991 / 5(오스트리아 대사관 겸임)
5. 주 폴 란 드 대사관 : 48 (0)22 848-3337 / 3409 / 4075 / 8267
6. 주 체 코 대사관 : 42 (0)2-54-2671/4
독 일(GERMANY)
독일의 정식 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Germany)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냉전의 산물로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동·서 양국으로 나뉘었으나 1990년, 통일을 향한 독일 국민들의 여망에 따라 마침내 통일되었다. 독일은 지리적으로 동쪽은 폴란드와 체코, 서쪽은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 남쪽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과 서로 접해 있는데 남에서 북으로 향한 알프스 산지로 인해 라인강 등 주요 하천들이 북으로 흐른다. 전체적으로 남쪽은 알프스 고원지대와 아름다운 호수로 이루어져 있고, 중부는 해발 1000m 내외의 산악지대, 북부는 완만한 평야지대로 되어 있다. 375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486년 프랑크 왕국이 성립되었다. 800년에는 카를 대제가 황제의 직위를 수여 받았으나 카를 대제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세나라(동프랑크; 독일, 서프랑크; 프랑스, 이탈리아)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동 프랑크의 오토 1세는 962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새롭게 황제의 관을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다. 당시 프랑스는 독립해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하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었다.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한 30년 전쟁이 1618년부터 30년간 있었다. 1806년에는 프랑스 나폴레옹군에게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했으나 신흥 왕국 프로이센의 철형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마침내 1871년 독일 제국이 결성되고 빌헬름 1세가 즉위했다. 제 1차 대전의 패배로 황제는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나치 히틀러의 등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패전으로 인한 분단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통일을 향한 독일인의 염원이 현재의 통일 독일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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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FRANKFURT)
독일의 항공 및 육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세계 항공로의 중심지이다. 6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마인강 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식 도시명은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이다. 중세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한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약 70%가 파괴되었으나 오늘날 새 모습으로 재건되어 국제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괴테의 고향이자 프랑크 소세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주요 관광지라기보다는 유럽의 교통요충지로 많은 박람회가 열리는 박람회의 도시이기도 하다.
*뢰머광장과 시청사( ROMERPLATZ & ROMER )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사진을 찍는 장소로 주변 건물들이 고풍스럽고 중세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청사를 비롯하여 맞은편 건물들은 15세기 독일 건축양식을 뛰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광장 중앙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의 상이 있으며, 예전엔 신성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의 대관식과 연회가 행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시청사 안에는 52명의 역대 신성 로마제국 황제들의 초상화가 있다.
뮌헨(MUNICH)
바이에른주 최대의 공업도시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 양조업을 비롯하여 광학정밀기기 ·전기 ·자동차 ·기계 ·화학 ·직물 ·제지 ·인쇄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발달하였고, 베를린과 함부르크 다음으로 독일 제3의 도시이다.
‘뮌헨’이란 이름은 본래 ‘작은 수도사(修道士)’라는 뜻으로 건설 당시 이곳에는 수도원이 있었다.
1506년 바이에른 공국(公國)의 수도가 되었으며 그 후 각종 수공업 및 지중해 지방과의 교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히틀러는 이곳에서 나치스 운동을 일으켰고, 훗날 뮌헨을 ‘나치스 운동의 수도’라고 하였다. 1938년 히틀러 ·무솔리니 ·체임벌린 ·달라디에의 4거두회담(뮌헨회담)이 개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곧 부흥하여 구시가는 본래대로 복구되었으며, 1972년 올림픽대회를 계기로 지하철이 건설되었다. 또 각종 경기장이 신설되고, 시가 재개발 및 주변의 신도시 건설 등 많은 발전을 보았다.
*슈바빙(SCHWABING)
뉴욕의 소호(SO HO), 파리의 몽마르트(MONTMARTRE)등과 나란히 비유되는 뮌헨의 예술의 중심지이다. 예전의 19세기 말에 꽃 피웠던 슈바빙의 예술 운동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클레, 칸딘스키, 릴케, 카로사, 그리고 토마스 만 등을 들 수 있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에는 화랑뿐만 아니라 학생 주점이나 재즈 카페, 극장, 디스코텍이 나란히 늘어서 있어서 젊은이들을 위한 큰 오락시설처럼 되어있다.
뷔르츠부르크(WURZBURG)
독일 유수의 상공업도시이며, 오랜 제국도시로서 옛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환상성벽(環狀城壁)과 역사적인 탑, 재건된 성이나 교회가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근대공업의 중심도시이며, 교외에는 금속 ·전기 ·기계 ·자동차 ·광학기계 ·완구 ·문방구 등의 공장이 많다. 또 마인강과의 사이에는 운하가 통하여, 그 연안을 따라 새로운 공장지대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완구박람회가 열리는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오스트리아(AUSTRIA)
오스트리아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 공화국 Republic Osterreich으로 총면적은 8만 3850Km2이며 인구는 약 770만 명이다. 지리적으로 독일, 스위스, 이탈이아. 헝가리 등 여러 국가들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다. 수도는 빈(비엔나). 오스트리아도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산림이 우거진 산악국가로 서쪽의 스위스 접경에서부터 동쪽의 빈까지 영토의 약 2/3가 알프스 지대다. 오스트리아는 BC4세기경 켈트족에 의해서 처음 나라가 만들어졌다. 그후 로마의 침략과 게르만족의 이동이 있었으며, 10세기말 바벤베르크 왕가가 집권하고 13세기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속령이 되면서 유럽사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하여 중부 유럽을 지배,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전유럽을 장악하였다. 1867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을 결성하여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구 소련의 일부 지역까지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1919년 베르사유 협약에 따라 현재의 경계선으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연합국의 지배를 받다가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숲의 나라 오스트리아는 나라 곳곳이 산림으로 우거진 아름다운 나라이다. 뿌연 유백색의 새벽 태양을 받으며 숲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랫소리는 숲과 어우러진 음악의 환상적인 하모니를 연출한다.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는 함스부르크 왕가의 활약을 통해 유럽 역사를 주도해 온 국가였지만 이러한 과거는 오늘날 대부분 잊혀져가고 다만 아직도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음악의 도시 빈을 비롯해 모차르트를 탄생시킨 잘츠부르크, 알프스의 멋진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인스브루크, 티롤 지방 등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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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SALZBURG)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일찌기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잘츠부르크(소금의 성)라는 이름대로 특산물인 바위소금의 거래 등으로 번영을 이룬 이 도시는 '북쪽의 로마'라고 불리며 이 지방 일대의 교통과 무열의 중심지가 되어온 곳이다.
*모짜르트 생가
음악의 신동 모짜르트가 17세까지 살았던 황색 건물. 현재는 기념관으로 꾸며져 모짜르트가 처음으로 사용한 바이올린 등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대성당(DOM)
짤츠부르크 음악제가 처음 시작된 돔 광장에는 1771년에 제작된 마리아 상이 서 있고, 그 뒤로 웅장한 규모의 대성당이 있다. 744년에 창건된 성당은 1181 ~ 1200년에 걸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개축되었고, 1598년의 대화재 이후 재건되었다.
내부는 대리석과 회화로 장식되어 있고, 6000개의 파이프로 된 유럽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유명한다. 돔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성당의 보물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
1690년 에를라흐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많은 조각상들과 분수, 꽃들이 어우러져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정원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어린이들과 함께 ‘도레미송’을 불렀던 무대로 유명하며, 이 곳에서 바라보는 호헨 짤츠부르크 성은 황홀할 정도이다.
비엔나 (VIENNA)
한 때 전 유럽을 지배하였던 합스브르트 왕조의 근거지로서 과거 합스브르크 왕조의 영화와 함께 현재의 아름다운 도시가 형성되어 오페라 하우스나 왕가의 여름 별장지인 쉔브른 궁전 등이 볼거리다. 알프스 동쪽 기슭의 삼림지대와 도안우 강 오른쪽 기슭에 아름다운 고도 빈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예술제가 열리는 5월 하순경이다. 긴 회색의 겨울이 지나고 거리의 가로수들이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광장 곳곳에서 빈 소년합창단이안 소방대 악대가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7-8월이 되면 여름 휴가로 텅비게 되는 빈은 어딘지 맥빠진 느낌이 들지만 9월이 되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다가 해가 짧아짐에 따라 도시는 다시 겨울로 준비로 들어간다.
*성 슈테판 대사원(St. Stephansdom)
구 시가지의 한 가운데 있는 빈의 상징인 이 사원은 고딕 양식의 걸작품이다. 13C 후반에 착공하여 300여 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완공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때 부서진 것을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슈테플(Steffl)이라고 불리는 첨탑은 높이 137m로 343개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73m 높이의 테라스에 이르며 이곳에서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쉔브룬궁전(Schloss Schoenbrun)
1896년부터 1913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여름별궁으로 사용하던 궁전이다. 바로크 양식의 아름답고 웅장한 이 궁정은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1441개의 방, 수많은 분수와 연못이 있는 정원을 가진 이 궁전은 마리앙뜨와네뜨의 어머니의 궁전으로 규모는 베르사유궁전보다 작지만 화려함과 아름다운 정원은 베르사유를 능가한다고 한다.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 중 하나로 꼽히는 쉔브룬 궁전은 당시 이 왕가의 위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국립중앙묘지(Zentralfriedhof)
빈은 음악의 도시이다. 이런 영광스런 애칭을 얻게 해준 주역들(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이 이곳에 묻혀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1894년 한 곳에 모아 놓았다고 한다.
헝가리(HUNGARY)
헝가리인들은 896년 지금의 카르파티아 분지에 이주를 시작하여, 1001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대부분의 국민이 가톨릭 신자이다. 활발한 정복활동 후 중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 헝가리는 그 걸과 당연히 1241년 타타르인과 1526년 투르크 등 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투르크의 침략으로 이후 150년 정도 투르크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헝가리와 합스부르크가가 연합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전쟁에 패전한 헝가리는 지금의 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 세르비아에 이르는 그들의 거대한 영토를 연합국 측에 빼앗기고 축소되었다. 전쟁 이 후 공산화를 거쳐 러시아(옛 소련)의 영향을 받던 헝가리는 1989년 자유화의 물결 후에 선거를 통해 공화국으로 전환했다.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을 비롯하여, 티서 강이 주요 강이다. 내륙에 큰 호수가 있어 피서지로도 유명하다. 중 유럽에 있지만, 이웃 국가와는 다르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이루고 있는 헝가리에서는 문화와 역사의 여러 부분에서 동양적 요소를 볼 수 있어 한층 더 흥미를 끄는 국가이기도 하다. 또 서쪽의 오스트리아, 북쪽의 슬로바키아, 동쪽의 루마니아와 남쪽의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 등,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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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BUDAPEST)
부다페스트는 '다뉴브의 진주', 혹은 '다뉴브의 장미'라고 불리운다. 부다페스트의 역사는 부다페스트에 마자르인(헝가리인)이 등장한 10세기 경이며 13세기에는 부다 언덕에 왕궁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5세기 마챠시 왕 시대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중부 유럽 제1의 도시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터키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부다페스트의 전성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541 ~ 1686년 사이에는 완전히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터키군이 후퇴한 후에는 합스부르크 가(家)가 이 지역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부다페스트는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로 나뉘어 있었다. 1849년 서쪽의 부다와 동쪽의 페스트 사이에 다리가 놓이므로 1873년 부다, 오부다, 페스트 등의 도시를 합병하여 탄생한 도시이다. 인구 급증과 더불어 '중부 유럽의 파리'라고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거리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부다페스트의 최 전성기는 마챠시 1세가 지배를 하던 15세기와 부다페스트 시가 탄생하게 된 19세기 말이다. 합병 직전인 1870년에는 3개 도시를 합해 30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인구가 백 년 후인 1970년에는 6배에 해당하는 19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현재 부다페스트 인구는 2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어부의 요새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다뉴브 강을 굽어보는 오래된 요새를 토대로 하여 금세기 초엽에 마챠시 교회와 함께 슈레크의 설계로 완성되었다. 건물 전체가 긴 회랑으로 이어져 있으며 고깔 모양의 뾰족한 지붕은 마치 동화에나 나올 듯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다 왕궁
부다페스트의 상징인 왕궁의 역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의 습격을 받아 에스테르곰에서 도망쳐 나온 벨라 4세 왕이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부다에 고딕 양식의 성을 세운 것이 왕국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헝가리 왕국은 약 300여 년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터키와의 전투에서 패배를 함과 동시에 성도 붕괴되었다. 뒤를 이어 17세기에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 새로이 세워졌다.
그후 1849년 화재로 인하여 건물이 다시금 파괴되었지만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시작되어 이블과 하우스만이라는 두 명의 건축가에 의해 1904년 완성되었다. 이블은 부다 왕궁 이외에도 오페라 하우스와 경제대학을 설계한 헝가리 최고의 건축가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인해 왕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50년대에 들어서 완성된 것이다.
*겔레르트 언덕
겔레르트 언덕은 '왕궁 언덕'의 남쪽 다뉴브 강변에 펼쳐진 표고 235m의 바위산으로 부다페스트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장소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이 마녀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오랜 옛날 언덕에서는 와인이 제조되었는데 마녀는 밤이면 밤마다 민가를 습격하여 와인을 몽땅 빼앗아 가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언덕에서 포도밭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언덕의 북쪽은 당에 면한 일대와는 달리 녹음이 우거진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뛰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금세기 초엽까지는 매춘굴과 도박장이 들어서 있던 슬럼가였다.
*영웅 광장
안드라시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영웅 광장은오아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광 명소로 광장 한 모퉁이에는 관광 버스가 늘어서 있다. 건국 천 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광장은 국가적인 행사장으로도 자주 이용되고 있다.
*마챠시 교회
1255 ~ 1269년 벨라 4세의 지휘하에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부다페스트의 상징적인 교회이다. 마챠시라는 교회 이름은 1470년 마챠시 왕의 명령으로 높이 88m의 첨탑이 증축되면서 붙여졌다. 역대 왕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행해진 이유로 '대관 교회' 라고도 불리운다.
슬로바키아(SLOVAKIA)
유럽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신생 국가 주 하나인 슬로바키아는 1993년에 74년간 계속되어온 체코 슬로바키아와의 연합에서 갈라져 나왔다.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VLAVA) 이외의 곳을 방문하는 배낭 여행자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폴란드와의 국경을 따라 있는 험준한 타트라(TATRA) 산맥이나 좀더 차분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슬로바키아 중앙의 말라 파트라(MALA FATRA) 산맥과 같이 유럽에서 야외 활동으로 가장 훌륭한 자연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슬로바키아는 또한 건축물, 예술, 민속문화 등도 다양하다. 동 슬로바키아에는 색슨 독일인이 건설한 오염되지 않은 13세기 중세 마을들이 손꼽히는 고딕 양식의 예술적 작품들을 성 유적이 있으며 가장 크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은 레보차(LEVOCA) 동부, 스피스키 라드(SPISSKY HRA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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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트라(TATRA)
타트라(2663m)는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지대에 걸쳐있는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이다. 총 면적의 3/4이 슬로바키아에, 나머지 1/4이 폴란드령에 속한다. 양측 타트라는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지형과 지질, 암석의 종류에 의거, 타트라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부 타트라(TATRY ZACHODNIE), 하이 타트라(TATRY WYSOKIE), 비엘스키에 타트라(TATRY BIELSKIE)가 그것들인데 하이 타트라와 비엘스키에 타트라는 동부 타트라로 묶이기도 한다. 가장 높으면서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은 하이 타트라로, 최고봉은 해발 2655m에 달하는 GERLACH이다. 1949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타트라스 국립공원(TANAP)은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총면적 741㎦로, 서부와 하이 타트라의 슬로바키아 지역과 비엘스키에 타트라 전 지역을 포함한다. TANAP의 경계로는 북쪽으로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선, 동쪽으로 ZDIAR-TATRANSKA KOTLINA ROAD, 남쪽으로 산림구분선 그리고 서쪽으로 SUCHA DOLINA 계곡이다. 공원측의 삼엄한 보호로 인해 현재 이곳에는 수많은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때묻지 않은 자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여느 도시처럼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관광을 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을 감상하고, 그 자연을 찾는 사람들과 소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이 지역 주변에는 온천도 있다. 길을 잘 찾아간다면 곳곳의 산 구릉지에서 풀을 뜯는 많은 양떼나 소떼를 볼 수 있다.
폴 란 드(POLAND)
동유럽 국가 중에서는 최대의 크기이다. 접경국가로는 동쪽에 러시아, 리투아니아, 백러시아, 우크라이나가 있고 남쪽으로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독일이 있다. 이렇게 많은 나라와 접하고 있기 때문에 18세기말부터 외세의 침략에 많이 시달려 1795년부터 123년 동안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국토가 세 갈래로 나뉘어 독립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0세기말경 탄생한 폴란드는 중세기에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형성, 유럽 최대의 국가로 전성기를 누렸던 화려한 역사도 가지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찾은 폴란드는 나라가 채 정비되기도 전인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독일의 선전포고 없던 침략으로 다시 조국을 빼앗겼다. 제2차 대전 후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지만, 1980년부터 시작 된 바웬사가 이끌었던 그다니스크 레닌 조성소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1989년 정부와의 원탁회의 후 민주화에 성공했다. 지금은 중·동부 유럽에서 경제성장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고속성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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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카우 (KRAKOW)
Krakow라는 지명은 600년경 Wawer 구릉에 요새를 구축하고 Vistula 강 출입을 통제하던 한 슬라브 종족의 전설적 지배자였던 Krak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1039년 피아스트왕조는 수도를 Gniezno에서 Krakow로 천도. 그후 6백년간 지기스문트 바자왕이 바르샤바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였다. Krakow는 현재에도 폴란드의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바벨성
바벨성은 성내 건물과 성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16세기 이태리 건축가 Francisco와 Bartocomo Berrecci에의 건축하였다.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성경의 장면들을 묘사한 16세기의 아라스천 벽융단이 유명하다.
성내 위치한 성당은 14C초에 건축되었으며, 현재까지 이곳에서는 종교적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대관식 및 왕족 장례식이 거행된 장소이며 지하실에는 폴란드 왕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19C, 20C에는 낭만파 대시인, 정치인등 저명한 일반인사의 시신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교황 바오로 2세는 그가 크라코프교구 주교시절 10년간 이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하기도 했다.
*중앙 광장
크라코프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광장이다. 11C의 St. Adalbert 교회, 14C 고딕양식의 시청 탑과 14C의 Sukiennice라는 직물시장(수공예품 판매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직물시장은 수 백년간 안장, 신발, 창고용품 등의 상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선물용품을 주로 팔고 있다. 동건물 앞에는 폴란드 최대 시인 Adam Mickiewicz 동상이 서 있다.
아우슈비츠 (OSWIECIM)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라는 지명은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이 오쉬비엥침을 독일식으로 부르던 이름이다. 2차 대전 중 유태인을 포함하여 총 4백 여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이 수용소는 28개 동의 건물이 3줄로 나란히 질서 정연하게 남아있다. 먼저 수용소 관리건물에서는 수용소의 역사와 2차대전이 끝나면서 이 수용소를 해방시킨 소련군에 의해 촬영된 기록영화를 볼 수 있다. 수용소로 들어가는 철조망 정문에는 "일함으로서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으며, 현재 이 건물 중에서 나치의 잔학 행위를 전시한 건물은 모두 5개 동(4, 5, 6, 7, 11)이다.
이 5개 동에는 수용자가 사용하던 조잡한 식기, 스푼, 안경테, 가방, 칫솔, 구두, 모자 및 400명을 죽일 수 있는 티크론 가스통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번호가 새겨진 줄무늬 죄수복 등도 전시되어 있다.
한편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4킬로미터를 더 가면 아우슈비츠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여 추가로 지은 비르케니우 수용소가 있다. 이곳은 아우슈비츠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건물에 수십만의 유태인을 수용했다고 한다.
비엘리츠카 (WIELICZKA)
*소금 광산
크라쿠프 동남쪽 15Km에 위치한 이곳은 세계 12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유네스코 최초로 자연 및 문화 유산에 선정 되었다. 전통적인 인사말인 “신의 영광(God Bless You)”은 오래전부터 이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인부들이 서로 지나갈 때 쓰던 인사말이다.
비엘리츠카 소금층은 180만년에서 200만년 전에 형성된 자연이 만든 경이로움이다. 오랫동안 바다였던 이곳은 물이 증발한 후 소금(염화 칼슘)만 남았고 암염이 되기 까지 약 1만 5천 년이 걸렸다.
그 뒤 발생한 지각변동은 이 소금 층이 복잡해진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진흙과 점토로 쌓인 소금은 지하에 흐르는 물에도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다. 소금 층은 서에서 동으로 약 10km정도 뻗어 나갔으며 두께는 500m에서 1.5km에 이른다. 가장 깊은 소금 층은 340m를 내려 가야 한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은 약 5,000년이 넘게 존재해 왔다는 것은 11세기에 알게 되었다. 그 뒤 괄목 할 만한 발전이 뒤따랐으며 1996년 까지 소금을 채취 했었다. 지금은 소금 채취를 중단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14세기 현명한 카시미르 대왕은 소금에 대한 일반법을 성문화 했는데 이 것은 ‘회색의 금’을 캐는 광부들의 법과 특권을 규정한 것이기도 하다.
항상 국가 권력자들의 소유였던 소금 광산의 경영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 위탁하든지 임대하였다. 크라쿠프의 전성기인 야기엘로 왕조 때에는 국가 제정의 1/3이 소금무역에서 얻을 정도였다. 광부들은 소금광산에 대해 천천히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알게 되었고 광산의 비밀과 부를 알게 되었다. 소금을 캐고 난 뒤 남은 공간은 나무를 세워 버티게 하였고, 안으로 흘러 들어온 물은 소금을 얻기 위해 끓였다. 700년이 넘게 존재해 오는 동안 소금 7,500만 톤을 캐내었는데 화차에 싣고 열을 세우면 적도의 1/5길이에 해당한다.
체 코
(The Czech Republic)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부 내륙 지방에 위치한 체코는 1세기부터 켈트인이 거주했으나 로마에 정복된 뒤 5세기에는 슬라브족이 7세기에는 사모국이 8세기 말에는 모라비아 왕국이 들어섰다. 9세기경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족이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 뒤 슬로바키아는 헝가에 점령되었다. 10세기에는 보헤미아 왕국으로 번영하여 보헤미아 왕이 폴란드와 헝가리 왕을 겸임하는 등 국력이 강해졌고 14세기에는 카를4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를 정돌 부강해졌다. 그러나 종교 개혁 운동과 함께 일어난 후스파와 교황파의 전쟁으로 16세기에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 독일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1945년 소련에 의해 해방되어 사회주의가 진행되었으나 그 후 자유화 민주화의 소리가 높아지고 정치 및 경제의 개혁 바람이 불면서 프라하의 봄은 그 결실을 맺는다. 1993년 1월1일 각각 체코와 슬로바키아 독립 국가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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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노(BRNO)
브르노는 프라하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를 잇는 간선을 따라 발달한 도시이다. 과거 모라비아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체코 제2의 도시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브르노의 북쪽에는 모라비아 카르스트라는 석회 대지가 펼 쳐져 있으며, 많은 종유동과 절벽을 볼수 있다.
열차를 이용하여 프라하에서 약 3시간 30분거리에 있으며,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약 2시간이 걸린다. 버스를 이용할수도 있다. 도시의 분 위기는 대체로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이다.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는 커다랗게 휘어져 흐르는 블타바 강에 둘러싸여 있으며 중세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로 1992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계곡 맞은편의 성을 중심으로 중세 그대로의 거리가 펼쳐지는 도시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13세기에 남 보헤미아의 호족이었던 비테크가에 의해 성이 건설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의 시작이다. 1374년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96개의 건물밖에 없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14세기 초엽에 비테크 가의 단절로 인해 로젬베르크 가가 이 지방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16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슈와르첸베르그 가의 지배로 넘어갔는데 각 시대의 영향력을 건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도시는 자연의 조형과 인간의 역사가 어우러져 체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체스키프룸로프 성(CESKY KRUMLOV ZAMECHA ZAHRADA)
보헤미아 지방에서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성채이다. 13세기에 설립된 성은 그 후에도 새로운 건물들이 연달아 건축되어 각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양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거대한 복합 건축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프라하 (PRAHA)
'백탑의 도시', '유럽의 음악 학원', '북쪽의 로마' 등 프라하를 일컫는 말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만큼 프라하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은 9세기 말부터 1천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도 프라하에는 중세 모습 그대로의 거리 풍경이 남아 있다.
프라하만큼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간직한 도시는 전세계를 뒤져보아도 찾기 힘들 정도이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분리파, 입체파 등의 다양한 건축양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프라하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주고 있다.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에도 슬픈 역사가 있었다. 15세기 초엽 종교 개혁자인 후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황제에 대항했던 후스 전쟁은, 30년 전쟁 등 두 번의 걸친 세계 대전, ,프라하의 봄'이라 일컬어지는 개혁 운동 당시의 구소련,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입 등 수 차례의 아픈 상처가 있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강인성이야말로 프라하를 더욱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카를교
1406년에 카를 4세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로 다리에는 돌이 깔려 있다. 다리의 길이는 520M, 폭 10M이며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한가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다리의 가장 큰 특징은 조각상이 양측 난간에 15개씩 합계 30개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성자를 모델로 한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좌우 양측의 다리 기슭에는 각각의 탑이 서 있다. 원래는 통행료를 징수하거나 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탑이었는데 현재는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으므로 탑 위에서 카를교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프라하 성
볼타바 강의 서쪽 강변, 흐랏챠니 언덕 위에서 프라하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역대 왕의 궁성이다. 9세기 중엽에 성의 건축이 시작된 이래 수 차례의 변천을 거쳐 14세기 카를 4세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입구 옆에는 의장복을 입은 위병이 부동 자세로 서 있으며 위병 교대식은 하루에 수 차례에 걸쳐서 거행되고 있다. 서의 출입구는 세 군데로 위병 교대식은 모든 문에서 실시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멋진 장면은 정면 입구에서의 교대식이다.
*성 비트 교회
프라하 성 방향으로 바라볼 때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두 개의 교회 첨탑이다. 교회는 원래 930년에 세워진 로툰다(원동형의 단순한 교회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로 시작되었으나 도중에 몇 차례의 개축을 거친 후 1344년 현재와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로 개축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사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여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교회 내부는 안쪽의 길이 64M, 폭 46M, 높이 46M 나 된다. 규모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볼거리를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황금 소로
1597년에 형성된 거리로 원래는 성안에서 일을 하는 집사 등이 살던 지역이다. 그러다가 차츰 거리 한편에 연금 기사들의 집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황금 소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건물이 작고 아기자기한 모양이며 입구는 몸을 구부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이 일대의 건물들은 대부분 선물 가게로 이용되고 있다.
거리 중간쯤에는 파란색 집이 있는데 작가 프란츠 카프카에게 그의 여동생인 오드라가 작업실로 제공했던 집이다.
*구시가지 광장
구시가지 광장은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프라하와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등장했던 장소로 현재 광장의 중앙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얀후스 동상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틴 교회
구시가지 광장의 동쪽에 서 있는 고딕 양식의 건물로 1365년에 세워진 교회이다. 금장식을 정점으로 하는 두 개의 탑은 높이 80M에 이른다. 교회 앞에 있는 것은 구 시가지 광장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틴 학교로 고딕 양식의 아케이드와 르네상스 양식의 지붕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카를로비바리(Karlovy Vary)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125㎞ 되는 동독과의 국경에 근접한 곳이다. 카를로 비바리라는 지명은 카를 온천이라는 뜻으로 연간 900만명의 휴양객이 유럽 각지에서 찾아오는 곳이다.
이곳은 73℃의 온천수가 매분 2,000ℓ, 12m의 높이로 분출하며, 온천객은 목욕 이외에 온천수를 마시기도 하는데 이는 위 장이나 간장 질환, 당뇨병에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