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승(童僧)
함세덕(咸世德)
등장 인물
정심(淨心) : 상좌승 젊은 승들
도념(道念) : 사미승, 14세 과부
미망인(未亡人) : 서울 안대갓집 딸 새댁
초부(樵夫) 노인
인수 : 초부의 아들 총각
미망인의 친척들 참예인(參詣人)들
때 : 초겨울
장소 :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 고찰(深山古刹)
정심 : 남달리 영악하구 귀여운 도련님이었으니까, 부처님께서 몸소 가까이 두시려구 불러가신 모양입니다.
미망인 : 그 애는 극락엘 갔으니 좋겠지만, 내야 그래두 살아 있는 것만 어디 합니까?
정심 : 인간 번뇌 모르구 타계(他界)하는 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미망인 : 그 애 하나를 낳으려구 꼭 백일 기도를 했었어요. 오늘 백일재(百日齋)를 지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정심 : 상심되시겠습니다.
미망인 : (비로소 도념이 자기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쟤가 4월 파일날 내가 불탄제(佛誕祭) 올리러 왔을 때 산목련(山木蓮) 꺾어 주던 애지요?
정심 : 그랬던가요?
미망인 : (도념에게) 아니 너 그 동안 퍽 컸구나.
도념 : (수줍어 고개를 숙인다.)
미망인 : 네가 준 그 목련꽃, 갖다가 병에 꽂아 뒀는데, 보름이나 살았더랬어.
도념 : (희한한 듯) 그래요? 여기선 방에 갖다 두면 향불내에 단박에 시들어 버려요. 역시 동넨 좋군요?
정심 : 그 날 아씨께서 내려가신 후, 얘는 산에서 저절루 나는 생물을 두구 보지 꺾었다구 스님께 여간 꾸중을 듣지 않았답니다.
미망인 : 아이 저를 어쩌나, 나 때문에?
도념 울듯울듯 미망인을 바라본다.
미망인 : 그렇게 나를 자꾸 보지 마라.
정심 : 도념아, 그만 들어가라.
도념 : 네.
미망인 : (나가려는 도념을 붙들며) 그대로 두세요. 잠깐만 더 있다 가게. (도념에게) 아까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두 창 틈으로 들여다보구 있었지?
도념 : 아아니요.
미망인 : 아니가 뭐야? 내가 두 눈으로 확실히 봤는데? 그리구 승방(僧房)에 갔을 때두 벽 뒷문으로 내다보구서 뭘?
도념 : 좌상께서 우리 어머니 얼굴두 꼭 아주머니같이 이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난 아주머니만 보면 왜 그런지 괜히 좋아요.
미망인 : 응? 나같이 생기셨어?
도념 : (울음 섞인 소리로) 그렇지만 마음만은 야차(夜叉)같이 악독하시대요. 그래서 저를 데려가시지 않는대요.
미망인 : 그러시길래 널 버리구 가셨지?
도념 : 그런데 왜 목도리를 안 하구 나오셨어요.
미망인 : (약간 놀라며) 목도리? 응, 방에 벗어 놨어. 골치가 좀 아프길래 바람좀 쐬려구 나왔지.
정심 : 얜 동네 애들 설날 기다리듯, 아씨댁 재 올리는 날만 기다린답니다.
미망인 : 나를 그렇게 보구 싶어했어요?
정심 : 그러믄요. 아주 ‘하이얀 털목도리 한 부인’이라고 아씰 부른답니다.
미망인 : (도념의 두 손을 뺨에다 갖다대며) 나두 왜 그런지 너를 볼 적마다 마음이 끌렸었단다. 너 이 절 떠나서 살구 싶지 않니?
정심 : 아씨,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념 : 살구 싶어요. 동네 내려가서 살구 싶어요. 하지만 스님이 못 내려가게 하시는 걸요.
미망인 : 스님껜 내가 잘 말씀 여쭤 볼게. 오늘이 백일재 마지막 날이니까, 우리 인철이두 편안히 극락에 갔을 거야. 그러니까 너 우리 집에 가서 나를 어머니라구 부르구 살잔 말이야.
도념 : 정말이세요? 거짓말 아니지요? 절 속이시는 건 아니겠지요?
미망인 : 내가 언제 거짓말했니?
도념 : 아아니요, 허지만 모두들 나한테 거짓말만 하니까 통 믿을 수가 없어요.
미망인 : 그럼 나만은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인 줄 알면 되지 않니?
도념 : 네, 저를 꼭 데려가 주세요.
정심 : 도념아, 어데다 어리광을 피구 이러니? 아씨, 얘를 양자 삼으실 생각만은 아예 마십쇼. 스님께서 절대루 허락 안 하실 겁니다.
도념 : 아니에요. 아주머니께서 잘 말씀 여쭈면 됩니다. 스님께서두 절더러 꼭 따라가라구 하실 거예요.
미망인 : 염려 마라. 너 입때까지 서울 못 가 봤지?
도념 : 네, 여기서 멀다지요?
미망인 : 한 400리 간단다.
도념 : 가 보진 못했지만 스님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미망인 : 무슨 말씀?
도념 : 옛날에는 대궐이 있었다구요.
미망인 : 지금두 있어.
도념 : 우리 본산 대웅보전(大雄寶殿)이나 약사당(藥師堂)보다 수십 배나 크다지요?
미망인 : 그럼, 그 뒤루 삥 돌려 성이 있구 동서남북 사대문이 있어. 옛날에 저녁종만 치면 대문을 닫고 댕기지를 못하게 했단다.
도념 : 스님께서두 궁전은 같은 속세 중에서도 그 중 깨끗하구 귀한 곳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절더러, ‘사람이 십선(十善)의 왕위(王位)에 태어나 궁중에 살게 되려면 전생에 그 만한 공덕(功德)을 싸놓지 않으면 안 되니까, 너두 열심히 도를 닦아, 금생(今生)에 좋은 일을 많이 해 놓아 후생(後生)에 가서 고귀한 몸이 되도록 하라.’구 하셨어요.
정심 : 그렇지만 아씨댁은 궁전이 아니라 민간의 집이야.
도념 : 서울은 마찬가지지 뭐에요? 좌상, 좌상께서두 스님께 잘 말씀해 주세요.
미망인 : (도념을 조용히 바라보며) 날더러 ‘어머니.’ 하구 불러 봐.
도념 : (가늘게) 어머니!
미망인 : (그를 껴안으며) 일생 너를 친자식같이 생각하구 내 곁에서 안 놓을 테다.
정심 : (눈물을 닦으며) 스님이 허락하시면 좋겠습니다만 원체가 완고하신 양반이구, 또 얘 어머니 과거가 과거니만치 좀처럼 승낙하실 것 같지 않군요.
미망인 : 너 여기 있거라. 내가 가서 스님께 말씀 여쭙고 올게.
정심 : 양자 달라구 하는 이가 어디 한 분 두 분이었나요?
미망인 원내로 들어간다. 정심 뒤따른다. 도념 입에다 손을 대고 ‘인수 아버지’ 하고 부른다. 멀―리 ‘인수 아버지’하고 산울림 퍼져 온다. 초부 ‘왜 그러니?’ 하며 갈퀴를 들고 들어온다.
도념 : (좋아하며) 난 서울 가요. 난 서울 가게 됐어요.
초부 : 서울?
도념 : 네.
초부 : 너 또 도망가려구 하는 게 아니냐?
도념 : 도망이 뭐에요? 하이얀 털목도리 한 부인이 날 데려다 수영아들을 삼는댔는데.
초부 : 수영아들? 너 그게 정말이니?
도념 : 그러믄요. 지금 스님께 승낙 맡으러 가셨어요.
초부 : 도념이 운 틔었구나.
도념 : 난 속으루 벌써부터, 언제든지 그 부인 입에서 이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초부 : 네가 하로밤 새에 대갓집 쉬영아들이 된다니, 아주 그야말루 꿈 같구나.
도념 : 그이가 불공 드리기 전에, 나한테 한 얘기가 있어요.
초부 : 뭐라구 했길래?
도념 : ‘아이 그 얘 참 의젓하게두 생겼다. 쉬영아들 삼았으면 좋겠네.’ 아, 이러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군요.
초부 : 나도 서울 가면 한번 찾아가마.
도념 : 네, 꼭 오세요. 사랑에다 모셔 놓구 한 상 잘 차려 드릴께요. 인수 아버지 좋아하시는 술두 많이 드리구요.
초부 : 그래라. (하늘을 쳐다보며) 어째 눈이 올라나 부다.
도념 : 퍽퍽 쏟아져두 좋아요. 샘가에 빙판이 지면 또 물을 어떻게 긷나 하구 걱정했지만 인젠 괜찮아요. 서울 아씨댁엔 시종들이 많으니까 제가 안 길어두 될 거예요. (2, 3보 나가다가 돌연 생각난 듯이 발을 멈추며) 에구 깜박 잊어 버렸드랬네. (하고 급히 비탈길로 달려간다.)
초부 : (펄쩍 뛰며) 너 또 토끼 덫을 쳐놓은 게구나?
도념 : (돌아보며) 걸쳤을 거예요. (하고 쏜살같이 내려간다. 초부, 부근의 낙엽을 긁는다.)
도념의 소리 : 인수 아버지, 인수 아버지.
초부 : (내려다보며) 걸쳤니?
도념의 소리 : 네, 여간 크지 않아요. 망 좀 잘 봐주세요.
초부 : 그래라.
이 때 주지, 미망인과 원내에서 나온다.
초부 : (절하며) 스님, 안녕하셨습니까?
주지 : 음, 많이 했나?
초부 : 어젯밤 바람엔 도토리가 상당히 많이 떨어졌습죠.
주지 : 묵이나 잘 쑤거든 한 목판 갖다 주게.
초부 : 네.
주지 : 참, 그리구 어렵지만 들어가서 손님들 상 좀 날러 주게. 손이 모자라 쩔쩔매구들 있으니. (미망인에게) 말씀만은 고맙습니다마는, 절대루 속세에 안 내보낼 작정이니까, 오늘 이야기는 이대루 거둬 두시지요.
초부, 원내로 들어가며 손을 돌려 도념에게 스님 오신 신호를 한다. 그러나 도념은 모르는 모양이다.
미망인 : 허지만 저 애 앞길두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이대루 절에서 늙히실 작정이시라면 모를까…….
주지 : 늙히지요. 이 더러운 속세에 털끝만치나 서방 정토(西方淨土)의 모습을 갖춘 곳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절밖엔 없으니까요.
미망인 : 세상에서 죄를 짓구 들어왔다면 모를까, 아직껏 동네 구경두 못 한 것을 일생 여기서 보내게 하신다는 건…… 뭐라구 했으면 좋을까. 좀 가혹하시다구……?
주지 : 속세 구경 못 한 게 얼마나 다행합니까?
미망인 : 그렇지만 벌써 부모 생각을 하구 세상에 가서 살구 싶어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나이 먹으면 여기 있는대두 세상 사람들의 번뇌는 자연히 갖게 될 거라구 생각해요.
주지 : 설혹 갖게 되더라두 단지 그리워하구 보구 싶어할 따름이지, 술을 먹구, 계집을 탐내구, 부처님이 말리시는 육계(六戒)를 태연히 범할 염려는 없거든요.
미망인 : 그런 것을 하게 제가 가만두나요?
주지 : 아무리 말리신대두 자연 듣구 보는 게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미망인 : 왜요? 집에서 내보내지 않구 여기서처럼 경문 읽게 하구 수업시키면, 스님께 강의받는 거나 다름없지 않아요?
주지 : 이 사방이 탁 트인 산간에서 동네 내려가구 싶어하는 녀석이, 서울 가서 행길에 안 나가려구 하겠습니까?
미망인 : 그럼, 저한테 몇 해만 맡겨 주세요. 데리구 있다가 도루 돌려 보내 드릴 테니.
주지 : 저는 다―만 번뇌의 기반에서 도념이를 미연에 막기 위해 이러는 겁니다. 한번 발을 내려놓구 다시 생각하면 그 때는 버얼써 제 자신이 얼마나 깊은 구렁에서 헤매구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미처 발을 뺄 수가 없이 전신이 죄구렁으로 휩쓸려 들어가거든요. 저두 속세에서 발을 끊구 불문에 귀의할 때까지는 이만저만한 수업과 고행을 쌓은 게 아닙니다. 제가 당해 보구 하는 것이니 자꾸 조르지 말아 주십시오. <중략>
도념 : (홀연히) 스님, 전 세상에 가서 살구 싶어요.
주지 : 닥듸려! 무얼 잘했다구 또 그런 소릴 하구 있니?
도념 : 절더러 거짓말 한다구만 그러지 마시구, 저한테 어머니 계신 데를 가르쳐 주십쇼.
주지 : 네 어미란 대죄를 지은 자야. 너에겐 에미라기보다는 대천지원수라는 게 마땅하겠다. 파계를 한 네 에미 죄의 피가 그 피를 받은 네 심줄에 가뜩 차 있으니까. 너는 남이 한 번 헤일 염주면 두 번 헤어야 한다.
도념 : 왜 밤낮 어머니 욕만 하십니까? 아름다운 관세음보살님은 그 얼굴처럼 마음두 인자하시다구 하시지 않으셨어요? 절에 오는 사람마다 모두들 우리 엄마는 이뻤을 것이라구 허는 걸 보면 스님 말씀 같은 그런 무서운 죄를 지으셨을 리가 없어요.
주지 : 그건 부처님에게만 여쭙는 소리야. 너 유식론(唯識論)에 씌인 경문 알지?
도념 : 네.
주지 : 외면사보살 내면여야차(外面似菩薩 內面如夜叉)라 하셨니라. 네 어미는 바루 이 경문과 같이 얼굴은 보살님같이 아름답지만, 마음은 야차같이 무서운 독물이야.
도념 : 스님, 그렇게 악마 같을 리가 없습니다.
주지 : 네 아비의 죄가 네 에미에게두 옮아서 그러니라.
도념 : 옮다니요?
주지 : 네 아비는 사냥꾼이거든, 하루에두 산 산짐승을 수십마리씩 잡어, 부처님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대악무도한 자야. 빨리 법당으로 들어가자. 냉수에 목욕하구, 내가 부처님께 네가 저지른 죄를 모다 깨끗이 씻어 주도록 기도해 주마.
도념 : 싫어요 싫어요. 하루 종일 향불 냄새를 쐬면 골치가 어찔어찔해요.
주지 : 이게 무슨 죄받을 소리니? (조용히 달래며) 도념아, 너 저 연못을 봐라. 5월이 되면 꽃이 피고, 잎사귀엔 구슬 같은 이슬이 구르구 있지 않니? 저렇게 잔잔한 연못두 한 겹물만 퍼내구 보면 시꺼먼 개흙투성이야. 그것뿐인 줄 아니? 10년 묵은 이무기가 용이 돼서 하늘루 올라갈랴구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비 오기만 기다리구 있단다. 동네두 꼭 저 연못과 마찬가지야. 겉으루 보면 모두 즐겁구 평화한 듯하지만 속에는 모든 죄악과 진애(塵埃)가 들끓는 그야말루 경문에 아로새겨 있는 글자 그대루 오탁(五濁)의 사바(娑婆)니라.
도념 : 아니에요. 모두들 그렇지 않대요. 연못 속에는 연근이라는 뿌럭지가 있지, 이무기는 없대요.
주지 : 누구 그러든? 누가 그래?
도념 : 동네 사람들 올라올 적마다 물어 봤어요.
주지 : 그럼 동네 녀석들 하는 소리는 정말이구 내 말은 거짓말이란 말이지? 경전이, 부처님 말씀이 모두 거짓말이란 말이지? 오! 이런 불가사리 같은 녀석 봤나? (하고 펄펄 뛴다.)
도념 : 스님, 바른 대루 말이지 저는 이 절에 있기 싫습니다.
주지 : 듣자듣자 하니까 나중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오, 그 눈으로 날 보지 마라. 살생을 하더니 전신에 살이 뻗친 모양이다.
미망인 원내에서 나온다. 뒤따라 그의 모.
도념 : (미망인에게 매달리며) 어머니, 저를 데려가 주세요.
미망인 : 응, 염려 마라.
주지 : 염려 마라니요? 아씨는 그저 애를 데려가실 작정이십니까?
미망인 : 그럼은요.
친정모 : 못한다. 넌 얘 하는 짓을 지금껏 두 눈으로 똑똑히 보구두 이러니?
미망인 : 어머니, 봤기에 더한층 데려가구 싶은 생각이 솟았어요.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면 그런 짓을 다 했겠어요? 지금 이 애를 바른 길루 이끌어 갈라면, 내 사랑 속에서 키우는 것밖에 딴 도리가 없어요.
친정모 : 얘는 전생에 제 부모의 죄를 받구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구할랴구 해두 구할 수 없단다. 홍역 마마하듯 이렇게 피하지 못할 죄가 하나씩 둘씩 발생하지 않니? 얘보담, 우리 인철이 영혼 축원할 도리나 걱정해라.
미망인 : 인철인 기왕 죽은 애니까 재를 다시 지내면 그만 아니에요?
친정모 : 얘가 토끼 목도리를 존상 뒤에다 감춰만 뒀다면 모를까, 젊은 별좌(別座) 얘길 들으니까 어젯밤에 떡 그 더러운 것을 관세음보살님 목에다 걸어 놓구 물끄러미 바라다보구 있었다는구나.
미망인 : (울며 미친 듯이) 어머니, 난 얘 애당초에 생각이나 안 먹었으면 모를까, 한번 먹어 논 것이라 잃구는 살 수가 없어요.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주지 : 아씨께서 진정으로 얘를 사랑하신다면, 눈앞에 두구 노리개를 삼으실랴구 하시지 말구 얘 매디매디에 사무쳐 있는 전생의 죄 속에서 영혼을 구하게 이 절에 둬 주십시오. 자기 한 몸의 죄만 아니라 제 아비 제 어미 죄도 씻어야 할 테니까 얘는 여간한 공덕을 쌓기 전에는 저승에 가서 무서운 지옥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도념 : 스님, 죽어서 지옥에 가더래두 난 내려가겠어요.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 않구 떠나는 사람을 붙들지 않는 것이 우리 절 주의라구 늘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지 : (열화같이 노하며) 수다스러, 한번 못 간다면 못 가는 줄 알어라. (미망인을 보고 선언하듯) 아씨께서 서방님을 잃으시고 외아들마저 잃으신 것두 다 전생에 죄가 많으셨던 탓입니다. 아씨 죄두 미처 벗지 못하시구 이 죄덩이를 데려다가 어떻게 하실랴구 이러십니까? 두번 다시 이 이야기를 끄내시려거든 다신 이 절에 오시지 마십시오.
주지, 뒤도 안 돌아보고 원내로 들어간다. 친정모도 뒤따른다. 미망인, 주지의 말에 찔리어 전신을 부르르 떤다. 염하다 놓친 사람 모양으로 털벅 나무 등걸에 주저앉아 운다.
도념 : 어머님, 이대루 그냥 도망이라두 가시지요.
미망인 : 그렇게는 못 한단다. 넌 이 절에 남어서 스님의 말씀 잘 듣구 있어야 한다.
도념 : 촛불만 깜박깜박하는 법당을 또 어떻게 혼자 지켜요? 궂은비가 줄줄 내리는 밤이나 부엉이가 우는 새벽엔 무서워 죽겠어요.
미망인 : 너한테는 그게 숙명이니까 내 힘으루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구나.
미망인, 도념을 누구에게 빼앗길 듯이 세차게 안고 운다. 정심, 산문에서 나온다.
정심 : 도념아, 빨리 종 쳐라.
도념 : (눈물을 닦고) 네.
정심, 산문 앞의 등잔에 불을 켜고 다시 원내로 들어간다.
미망인 : 내가 원체 죄가 많은 년이니까 너를 데리고 갔다가 너한테까지 또 무슨 화가 끼칠지, 난 그게 무서워졌다. 어서 들어가자. 그 대신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보름날 달 밝은 밤엔 꼭 널 보러 오마.
미망인, 우는 도념을 달래 가지고 원내로 들어간다. 주위는 차츰차츰 어두워진다. 이윽고 범종 소리 들려온다. 멀리 산울림. 초부, 나무를 안고 나와 지게에 얹고, 담배를 한 대 피운다. 흩날리는 초설을 머리에 받은 채 슬픈 듯한 표정으로 종 소리 듣는다.
―사이―
이윽고 종 소리 그친다. 도념, 고깔을 쓰고 바랑을 걸머쥐고, 깡매기를 들고 나온다.
초부 : (지게를 지고 일어서며) 지금 그 종, 네가 쳤니?
도념 : 그럼은요. 언제 내가 안 치구 다른 이가 쳤나요?
초부 : 밤낮 나무 해 가지구 비탈 내려가면서 듣는 소리지만 오늘은 왜 그런지 유난히 슬프구나.
(일어서다가 도념의 옷차림을 발견하고) 아니 너 갑자기 바랑은 왜 걸머지구 나오니?
도념 : 이번 가면 다시 안 올지 몰라요.
초부 : 왜? 스님이 동냥 나가라구 하시든?
도념 : 아아니요. 몰래 나가려구 해요.
초부 : 이렇게 눈이 오는데, 잘 데두 없을 텐데 어딜 간다구 이러니? 응, 갈 곳이나 있니?
도념 : 조선 팔도 다 돌아다닐걸요 뭐.
초부 : 하 얘, 그런 생각말구, 어서 가서 스님 말씀 잘 듣구 있거라.
도념 : 벌써 언제부터 나가려구 별렀는데요? 그렇지만 스님을 속이고 몰래 도망가기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못갔어요.
초부 : 어머니 아버질 찾기나 했으면 좋겠지만 찾지두 못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없구, 거지밖에 될 게 없을 텐데 잘 생각해서 해라.
도념 : 꼭 찾을 거예요. 내가 동냥 달라구 하니까 방문 열구 웬 부인이 쌀을 퍼 주며 나를 한참 바라보구 있더니 별안간 ‘도념아, 내 아들아, 이게 웬일이냐.’ 하구 맨발바닥으로 뛰어 내려오던 꿈을 여러 번 꾸었어요.
초부 : 가려거든 빨리 가자. 퍽퍽 쏟아지기 전에. 이 길루 갈 테니?
도념 : 비탈길루 가겠어요.
초부 : 그럼 잘― 가라, 난 이 길루 가겠다.
도념 : 네, 안녕히 가세요.
초부, 나무를 지고 내려간다. 도념 두어 걸음 나갈 때 법당에서의 주지의 독경 소리. 발을 멈추고 생각난 듯이 바랑에서 표주박을 꺼내 잣을 한 웅큼 담아서 산문 앞에 놓는다.
도념 : (무릎을 꿇고) 스님, 이 잣은 다람쥐가 겨울에 먹으려구 등걸 구멍에다 모아 둔 것을 제가 아침에 몰래 꺼내 뒀었어요. 어머니 오시면 드리려구요. 동지 섣달 긴긴 밤 잠이 안 오시어 심심하실 때 깨무십시오. (산문에 절을 한 후)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
멀리 동리를 내려다보고 길―게 한숨을 쉰다. 정숙. 원내에서는 목탁과 주지의 염불 소리만 청청히 들릴 뿐, 눈은 점점 펑펑 내리기 시작한다. 도념, 산문을 돌아다보며 돌아다보며 비탈길을 내려간다.
―막―
▶ 줄거리
한 비구니와 사냥꾼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삼밭에 버려진 도념은 주지에 의해 동승이 된다. 도념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자신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 주는 미망인에게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남편을 사별하고 얼마전 아들까지 잃은 미망인 또한 도념에게서 친아들 같은 정을 느껴 도념을 수양 아들로 삼아 함께 서울에 가 살기로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리운 나머지 도념이 어머니의 털목도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고 잡은 토끼 가죽이 법당에서 발견되고, 주지는 도념을 크게 나무란다. 미망인은 아이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가려면 자기의 사랑 속에서 키우는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도념을 데려가길 간청하지만 주지는 도념이 부모의 죄업까지 씻기 위해서는 절에 남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는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도념은 결국 몰래 어머니를 찾아 절을 떠난다.
▶ 핵심 정리
지은이 : 함세덕(咸世德 1915-1950) 극작가. 유치진으로부터 극작술을 배운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에 월북하였다. 그는 좌익 편향의 작품을 썼고 월북했다는 이유로 규제 문인이 되었으나 1988년 모든 작품이 해금되었다. 일제 치하의 그의 작품은 당대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접근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서정성 짙은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여 주었다. 작품으로는 “해연(海燕)”, “동승(童僧)”, “무의도(無衣島) 기행” 등이 있다.
* 갈래 : 희곡. 비극. 낭만주의극
* 성격 : 낭만적. 비극적
* 배경 : 초겨울.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 고찰(深山古刹)
* 주제 :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어린아이의 간절한 마음
* 출전 : <한국 해금 문학 전집>
<참고>
비극: 주동 인물이 운명이나 성격, 상황과 대결하다가 좌절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패배하여 파멸하게 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과 감정을 느끼게 한다.
▶ 작품 해설
함세덕의 작품들은 광복 전 우리 희곡사에서 유치진에 버금가는 탁월한 작품성을 견지하고 있는데도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못했다. 1991년에야 비로소 극단 ‘연우무대’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고 잇달아 다른 작품들도 공연되면서 함세덕의 희곡사적 위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도념의 어머니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 그에 따른 절망과 좌절이 매우 간결하고 긴밀한 극적 구조 속에 용해되어 있다. 도념과 미망인은 서로 마음의 상처를 감싸 줄 수 있는 상대를 발견한다. 미망인은 잃어버린 아들의 모습을 도념에게서 찾고, 도념은 미망인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어머니에게 선물할 털목도리를 만들고자 토끼를 잡아 불상에 걸어 놓고 바라보곤 한 것은 절에서의 계율을 어긴 일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극한적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도념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린아이에게 불도에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주지 스님의 모습에서도 아버지와 같은,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꾼인 초부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린 도념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동정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취급하고 있으면서도 이면적으로는 보다 심원한 불타적 사랑을 변증법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 작품에서 ‘초부’의 역할
도념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고, 도념의 그리움을 이해하여 도와주려 하며, 산사의 종소리에 깊게 감응할 줄 아는 것은 같은 어른이면서도 도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지와 대비된다. 도념의 마음 속 그리움을 이해하여 이를 감싸주는 초부의 넉넉함은 ‘대승적 자비’의 세계를 충분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도념’의 심리적 변화
극작가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를 관객에게 직접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극작가들은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그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배려해야 한다. 도념이 절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① 향불 냄새가 싫다 → ② 연못 속에 이무기 따위는 없다. → ③ ‘바른 대루 말이지 저는 이 절에 있기가 싫습니다.’의 순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