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시계방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제일 먼저 장만한 것이 손목시계였다. 시골 시계방에서 고물이 된 시계들의 부품을 이것저것 뜯어내어 조립한 중고품이었다.
중학생 때 입던 교복이라 저고리의 소매가 짧아서 팔목이 쑥 나오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내 팔목의 시계를 완전 노출시키기에 충분했었다. 팔을 흔들고 걸을 때 마다 스테인리스 시계 줄이 뻔쩍였다.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돕고 있던 동갑나기 동네 계집아이들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꼭 시계를 사야겠다고 그해 겨울동안 장작을 내다 팔아 돈을 모았다. 부모님 몰래 산속에서 나무를 베고 도끼로 패서 말렸다. 주말이면 나뭇짐을 지고 날이 밝기 전에 시오리가 넘는 시장에 다녀와야 했다. 날이 새면 길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몹시도 마음을 졸였다. 장작은 아침밥을 지으려 나오는 읍내 아주머니들이 샀다. 돌아오면서 지게는 산속에 숨겨두고 집으로 왔다.
시골학교 앞 시장 골목에 있는 시계방. 시계방이래야 신품 시계를 파는 가게는 아니었다. 시골에서 신품 시계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고품 시계를 거래하거나 고장 난 헌 시계를 고쳐주는 시계 수리점이다. 시골 시계 수리 점은 상호도 없었다. 그냥 <시계수리>라고 목판때기에 먹 글씨로 써 걸었다. <시개수리>라고 썼다가 누가 뭐랬는지 “개” 자 는 뭉개버리고 그 밑에 좀 작은 글씨로 “계” 라고 고쳐 썼다. 우리는 그 가계를 <임씨 시계방>이라 했다.
시계방 임 사장은 마흔 중반의 아저씨였다. 그래도 우리와는 친구처럼 잘 어울려 주었다. 장난도 치고 간혹 호떡을 사 주기고 하였다. 시계를 사고팔고 고치고 하는 주 고객이 학생들이다 보니 우리와 그렇게 어울려 주는 것도 그 어른께는 고객관리가 아니었겠는가싶다. 우리는 그를 임씨 아저씨라 불렀다. 임씨 아저씨는 항상 헤~ 하고 웃는 사람 좋은 분이었다.
시골시계방은 일거리가 많지 않았다. 한가한 임씨 아저씨는 항상 낮술에 취한 불콰한 얼굴로 이웃가게를 기웃거리거나 길거리 장기판 훈수로 시간을 보내다 손님이 찾으면 얼른 가게로 돌아오곤 하였다.
학생들이 차는 중고시계는 아주 폐기된 시계에서 풀어내어 이것저것 꿰맞춘 조립품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제대로 맞을 리 없다. 안개만 끼어도 습기가 차서 시계바늘이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들어가서 바늘이 멈춰 서기 일쑤였다. 하루건너 고장이 났다. 항상 20 ~30분 빨리 가거나 늦게 갔다. 당연히 그러려니 그리 알고 시간을 짐작해야 했다. 그러다가 크게 차이가 나면 그 고물 시계방에 들려 임씨 아저씨께 보여야 했다.
임씨 아저씨는 둥글고 짧은 고무 통 끝에 렌즈가 박힌 기구를 눈에 물고 철판 같이 조금 널찍하고 얄팍한 칼로 시계의 유리 뚜껑을 열고는 시계바늘을 핀셋으로 끌어당겨 시간을 맞춰주었다. 어떤 때는 뒷면 뚜껑을 열고 맞물려 돌아가다 멈춰 선 톱니바퀴를 슬쩍 건드려 주기도 하였다. 그래도 시원치가 않으면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나사못을 풀고는 여러 부품들을 뜯어내어 하얀 좋이 위에 나란히 놓았다가 다시 조립해 주기도 하였다.
그래봤자 내일이면 또 2~3분씩 늦어지거나 빨라 질 텐데도 신장병환자가 투석을 받듯 일주일에 한 번쯤은 시계방에 가서 바늘을 돌려 놓아야 했다. 그래서 시계방은 아침저녁으로는 학생들이 붐볐다.
임씨 아저씨는 매번 돈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부품을 갈아 넣거나 부품을 모두 풀어서 알코올에 담그고 씻어내는 소제를 해 줄때만 돈을 받았다. 임씨 아저씨는 그것을 붕까이(분해) 소제라고 했다. 모두 당신 가게에서 산 것이고 당신이 조립하여 판 시계들이고 언젠가 더 고물이 되면 다시 당신 가게로 돌아올 물건이니 사후관리야 당연한 것 아닌가.
사실 우리에게는 시간의 맞고 안 맞고 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팔목에 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이 촌놈을 엄청 광나게 하는 것이었다.
또 임씨 아저씨는 간혹 지나가는 학생을 불러 놓고는 “일마야 니 시계 그거 붕까이 소제 한 번 해얄끼다. 오래 됐제” 이렇게 충동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라치면 우리는 “임씨 아저씨 주머니에 돈 떨어졌나 보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가계로 들어서곤 하였다. 시계를 수리하는 탁자위에는 부품이 뜯겨나가 해골이 된 시계의 잔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요즘의 폐차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임씨 아저씨는 곱슬머리에다 유난히도 눈가에 잔주름이 많았다. 매일 눈에다 렌즈를 물고 시계의 부품들을 째려 봐서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요즘은 이 삼 만원만 주어도 시간이 척척 맞는 전자시계를 살 수가 있다. 손목에 차고 목욕을 해도 습기가 차지 않는 완전 방수 제품이다. 집안에는 거실은 물론 방마다 벽시계가 걸려있다. 책상위에는 자명종 사발시계도 있다.
아무 말 없이 시계추만 흔들면서 바늘을 돌리는 것도 있고 재깍재깍 똑 같은 음률로 돌아가는 시계도 있다.
시간마다 그 숫자만큼 뗑뗑 치는 놈도 있고 뻐꾸기가 문을 열고 나와 시간의 숫자만큼 울다가 문을 닫고 들어가는 시계도 있다.
휴대 전화에서도 시간이 나오고 볼펜에서도 기간이 나오는 제품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면 여기저기 전광판 시계가 있고 공원에도 시계탑이 있다.
이렇게 시계가 지천이다 보니 이제는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는 것이 멋이 되었다.
새 시계하나 진열되어 있지 않던 시골 시계방. 목판때기 간판이 덜렁거리며 추녀 밑에 매달려 있던 시골 시계방.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 졸고 앉은 한가한 시계방 임씨 아저씨. 학창시절의 회색 추억이 스물 스물 피어오른다. (E)
*옥 형 길.
-경남 거제산.
-‘83.제3회 방송대 문학상(수필) -’90.월간문학공간 추천신인상.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수필가협회/회원.
-거경문학회. 송파문학회. 산림문학회/회원.
-‘90첫번째 수필집 “남자의 가계부” 출간.
-‘99두번째 수필집 “도시에서 사는 나무들” 출간.
-'04.공무원 정년퇴임. -(현)주식회사 3S 회장.
첫댓글 참 추억에 잠기게하는 내용임니다..나도 내가 직업전선에 들어서서야.시계를 찻는대 요즘은 참 흔하죠..여기 저기 시계가 너무 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