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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의 세 가지 테마에 관하여
나는 지금까지도 놀라고 있다.
지난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대파도가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사에 대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특히 그 파도가 밀고 나온 세 가지 테마를 생각할 때마다 그렇다. '엇박' '치우' '한국형 태극'이 그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붉은 악마 현상에로 우선 상식선에서 천천히 접근해보자.
700만이 동원된 대규모의 역동적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것의 대형 사고나 홀리건 따위 폭력이나 인종적 노출이 전혀 없었다. 대 혼돈 속에서 그 나름의 큰 질서를 창조했으니 어떤 의미에서 현대사 속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떠올랐다.
치열한 민족 의식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세계인으로서의 보편 의식과 아시아인으로서의 분권적 융합 의지를 보여주었다. 유럽에 대해 일체의 콤플렉스 없이 대등한 의젓함을 과시했고 승리에 대한 열망과 동시에 외국팀에 대한 관용과 우정을 아낌없이 표현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세계화라는 지구 의식과 지역화라는 민족 의식의 건강한 이중적 교호결합이 잘 나타났으며 아시아 문명권에 대한 편견이나 우월감이 아닌 정당한 문명권적 소속 의식이 그사이에 적절히 나타났다.
그 수많은 군중의 의상이 붉은색 셔츠 일색이어서 통일성과 융합(퓨전)을 드러냈으나 동시에 그 패션은 수천만 가지로 각양각색이어서 철저한 개성과 개체성(아이덴티티)을 과시하였다.
붉은 악마 세대 자신들의 주장대로, '밀실의 네트워크' '방콕 족의 퓨전'이었으니 현대 생명과학, 자유의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이요 '자기 조직화'이며 이른바 '내부공생(內部共生-endosymbiosis)'의 현실화다.
1999년 시애틀에서 벌어진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민 집회가 인터넷 소통만에 의한 거의 우발적 자기 조직화의 대규모 시위로 발전한 것이 그 한 예증이다.
생명체의 발전 과정에서 군집, 종, 집단이 먼저 발생하고 개체는 그뒤에 차차 개별화, 자유화되며 전 과정에서 군집이 개체보다 더 필연적이고 더 가치 있다는 군집발생선행론(群集發生先行論)이 생물학과 진화론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정설(定設)이었으니 이에 따라 코뮤니즘, 나치즘, 파시즘과 공동체주의, 집합주의 같은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 오면서 현대 생물학과 진화론에서 돌연변이, 다양성, 자유의 기제(機制, 메커니즘)에 의해 군집보다 개체가 먼저 발생하며 개체의 가치가 더 중요시되고 그 개체 마다의 숨은 차원으로서 전체성이나 우주 총유출을 각자 자기 나름으로 자기의 생활 형식을 자기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실현하는 공생론이 압도하기 시작했으니, 그에 따라 각 방면에서 공동체주의나 전체주의가 현저히 후퇴하고 개성과 개별성을 철저히 존중하는 전제위에서 각각의 개체가 권리를 나누어 행사하는 분권적인 융합이 더 가치 있고 도리어 진리인 것으로 존중되기 시작하였다.
그 가치관의 결정적 표현이 곧 에코적인 디지털 문명이며 더욱더 결정적인 것으로는 붉은 악마 현상이었던 것이다.
생명의 자기 조직화의 주체는 마음, 영성(靈性)이니 그 핵심이 곧 신(神)이다. 다윈주의나 유물론은 이제 더 이상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최근에 '창조적 진화론'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필연의 대세다.
창조적 진화, 자기 조직화는 첫째, 내면의 의식(마음∙영성∙신령)의 주동성의 원리와 외면의 물질 및 생명의 복잡화 사이의 상호 관계의 원리, 그리고 개체개체가 자기 나름대로의 숨은 영적인 전체성을 자기 생활 형식(life-form)으로 자기 조직화해 나가는 진화의 세가지 원리가 바로 현대의 자유 및 자기 선택의 진화론이요 생물학인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이미 백여 년 전인 1860년, 한반도에서 출현한 동학사상의 제일주제인 '시천주(侍天主, 하느님을 내 안에 모셨다)'의 핵심인 바로 그 '모심[侍]'의 해설 내용이 곧바로 다름아닌 이상의 세 가지 원리라는 점이다.
동학은 후천개벽 사상이다. 후천개벽은 지난 5만 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한 시기) 이후의 인류 문명사 전체가 완전히 바뀌는 대전환이요. 대혼돈의 도래(到來)를 명제화하는 변혁 사상이다.
그리고 이 대전환 속에서 인류가 살아갈 새 삶의 원형을 동학은 계시(하늘로부터의 묵시)에 의해 받았으니 그 모양은, '태극 또는 궁궁'이고 그 뜻은 '혼돈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와 유럽의 대신문들은 요즈음 기회 있을 때마다 현대를 한마디로 '대혼돈(大混沌-Big Chaos)'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도덕적 황폐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한 세계 시장의 실패와 빈부 격차의 심화, 지구 생태계의 전면 오염과 파괴, 그리고 심상치 않은 기상 이변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테러와 전쟁까지 가세한다. 이것에 대해 처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혼돈을 혼돈대로 인정하고 그 혼돈에 침잠하면서도 그 혼돈 나름의 독특하고 보편적인 질서를 찾아 혼돈을 치유 해방함으로써 전지구와 인류를 혼돈에서 탈출시키는 탁월한 통합적 과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과학은 인문학 또는 종교적 사상 속에서의 원형(原型-archetype)으로서의 독특한 '혼돈의 질서'가 나타나 과학을 오히려 촉매함으로써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원형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이른바 '이스트 터닝(east turning-동아시아에 대한 관심 이동)'이라는 대유행이 휩쓰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생각해보자.
동학에서 '혼돈의 질서'라고 부르고 그 모양이 '태극 또는 궁궁'이라는 영부(靈府), 즉 원형, 그리고 동학에 이어 나타난 한국적 동양 우주과학인 정역(正易)에서 여율(呂律)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어서 생각해보자.
먼저 동학의 '태극 또는 궁궁.'
태극은 중국의 주나라 성립 이후 2천 8백 년을 지속되어온 동양의 우주 과학 질서인 주역(周易)의 상징으로서 질서정연한 우주 변화를 의미한다. 궁궁은 19세기 서양 세력이 동양과 전 세계를 휩쓸던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혼란한 시대에 민중의 살길을 예언한 『정감록』의 비결에 나타나는 혼돈의 지형(地形) 또는 풍수(風水)의 원리다. 계룡산이 대표적인 궁궁이다.
그렇다면 '태극 또는 궁궁'은 이미 그 자체로서 '혼돈의 질서'이니 현대와 같은 대혼돈에 대한 처방이자 원형으로서의 역설(逆說, 모순어법)인 것이다.
정역에서 말하는 '여율(呂律)'이란 또 무엇일까? 지난 시절 주역에서 주장하는 우주 질서인 '율려(律呂, 律은 코스모스, 즉 질서요 呂는 카오스, 즉 혼돈이다)'의 순서를 뒤집어, 카오스인 여(呂)를 앞세우고, 그 '여'를 중심으로 한 그 나름의 '율,' 즉 '카오스코스모스,' 줄여서 '카오스모스(질 들뢰즈의 우주 개념)'를 뜻한다.
누군가 나서서 현대 세계의 대혼돈을 처방할 '혼돈의 질서'라는 새 삶의 원형과 이런 사실들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자, 이제 붉은 악마의 세 가지 테마로 옮겨 갈 차례다. 붉은 악마는 월드컵의 그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린 한 달 내내 세 가지 테마를 붙들고 늘어졌다.
'엇박' '치우' '한국형 태극'이다.
먼저 '엇박.'
한 달 내내 응원의 함성은 '대〜한민국'과 '따따따 따따'였다. '대한민국'은 4분박이니 2분박과 함께 질서와 균형과 고요의 박자, 이에 대비해 3분박은 혼돈과 역동과 소란의 박자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의 '대한'의 2분박을 길게 끌어 '대〜한'의 3분박으로 만들어서 혼돈의 박자로 바꾼 뒤에 '민국'의 2분박을 그 뒤에 갑자기 붙여서 전체를 3분박 플러스 2분박의 '혼돈의 질서,' 즉 '엇박'을 창조한 것이다.
'엇'이라는 우리말은 전통 예술에서 서로 반대되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엇가면서도 함께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엇박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전통굿이 곧 '호호굿'인데 '호호굿'이야말로 격동과 고요가 함께 '엇걸이' 또는 '잉아걸이(베틀의 북이 들어가며 동시에 나가는 것)'하는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현대적인 굿 형태다.
'대〜한민국' 다음의 장단인 '따따따 따따' 역시 3분박 플러스 2분박으로 엇박, 즉 '혼돈박'이니 마찬가지로 '혼돈의 질서'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음악에서는 '대〜한민국'과 따따따 따따'가 연속되는 경우의 '대〜한민국'은 '불림(일종의 귀신 부르는 소리, 즉 초혼[招魂])'이 되고 뒤의 '따따따 따따'는 '장단'이 되므로 신령한 카오스인 '불림'과 음악적 질서인 코스모스의 '장단'이 플러스되어 결국은 또 하나의 '혼돈의 질서' '카오스모스'가 되는 것이어서 이 역시 하나의 카오스모스 문화인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혼돈이면서 질서인 '엇박'이 음감(音感) 예민한 유럽 선수들을 커다란 당황감과 혼돈 속에 빠트렸고 전통적인 '엇박'에 익숙한 한국 선수들에게는 역동적인 차분함을 선사했다는 것이 월드컵을 구경한 사람들의 중평(衆評)이다. 이 역설에 가득 찬 붉은 악마의 '카오스모스' 문화가 현대 세계에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크 아탈리'나 '질 들뢰즈'는 현대 유럽의 첨단적 철학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21세기 세계 문명에 대한 예상과 전망은 유일하게 '유목 이동 문명'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유럽 및 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주의자들의 문명론이기도 하다. 하기야 지구상에 사는, 더욱이 한반도에 사는 그 누군들 핸드폰과 노트북, 컴퓨터와 비행기, 공항, 승용차, 호텔, 모텔에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인터넷, 그것도 이제는 어디서나 발화∙수신하는 '유비쿼터스'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으며 그것을 벗어나서 인류의 '영적 소통(spiritual communication)'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21세기의 더욱 발전된 도시 유목 이동 문명은 불가피하며 필연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급증하는 세계 인구와 북극 해체로 인한 곡창 저지대의 침수 때문에 제기되는 전지구 식량난과 전지구 생태계 오염 및 세계화로 피해를 보는 민족들의 지역화, 반(反)세계화 주장으로 연결되는 지역 농업 정착 문명 특히 유기농업에 대한 요청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21세기 새 문명은 디지털적 유목 이동과 에코적인 농촌 정착의 이중적 교호결합 문명일 수밖에 없는데 현재의 세계는 세계화 유목주의자들과 반세계화 지역주의자 및 생태주의자들의 대결 투쟁만 있을 뿐 그 양자의 교호결합을 주장하는 새 삶의 원형 제시는 어디에서도 나타난 바가 없다. 이것이 붉은 악마의 그 시뻘건 로고, 치우(蚩尤)의 도깨비 모양과 깊은 관계가 있다면 어쩔 터인가?
4천5백여 년 전 고조선 직전의 배달국(倍達國) 14대 천황인 치우는 당시 과거의 유목을 숙청하고 새로운 농경을 유일 문명으로 고집하는 중국의 황제(皇帝)에 대항하여 동아시아∙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들의 오래된 유목 문명과 반도 및 해안의 새로운 농경 문명을 함께 이중적으로 교호결합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채취∙수렵∙어로 등 생산 양식들을 다양하게 연대하는 복합적 문명을 주장하였다. 74회에 걸친 피의 전쟁은 곧 문명 전쟁이었다.
현대에 와서 다시금 요청되는 이 이중적 내지는 복합적인 문명에 대한 집단적 예언 행위가 다름아닌 붉은 악마의 치우 깃발의 테마라고 해석한다면 너무 억지인가? 역사란 계몽만에 의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신화가 계몽을 앞지르는 것이 또한 역사의 신비다.
붉은 악마들이 여러 종류의 스티커로 이마에도 허리에도 엉덩이에도 바디페인팅한 그 태극기, 망토로 스커트로 블라우스로 둘렀던 그 태극기는 무엇을 상징하는 테마인가?
한국의 태극기, 태극 형상, 태극 사상은 중국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바로 여기에 한국 태극기의 테마가 있다.
중국 사상, 동아시아 나름의 과학과 철학의 꽃은 역(易)이니 중국엔 주역(周易)이요 한국엔 정역(正易)이다. 사회주의의 변증법과 자본주의의 배제 논리를 동시에 극복할 미래의 인류 철학과 대혼돈을 극복할 탁월한 통합적 과학은 곧 역(易) 사상이라는 확신이 우리 동아시아인보다 도리어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더 짙게 깔려 있다. 태극기는 그 주역과 정역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채 미지수인 '주역∙정역 사이의 관계역' 또는 '간역(間易)'이라는 세 가지 역을 다 포함하고 있는 미래 철학∙미리 과학의 보물 창고다.
그러나 중국의 태극과 한국의 태극은 분명히 같으면서도 다르다. 중국 태극은 흑백(黑白)이고 좌우로 나뉘어 서 있다. 그리고 백 안에 흑점(黑點)이, 흑 안에 백점(白點)이 있다. 네 귀퉁이의 네 괘상, 즉 하늘(乾), 땅(坤), 어둠(坎), 밝음(離)의 사상(四象)은 동서남북 정방(正方)에 뚜렷이 서 있다.
거기에 비해 한국 태극의 음양은 흑백이 아니라 '푸르고 붉음(靑紅)'이며 서 있지 않고 상하로 나뉘어 누워 있다. 두 개의 점은 없고 네 귀퉁이의 하늘(乾), 땅(坤), 어둠(坎), 밝음(離), 또는 제1괘인 건괘와 제2괘인 곤괘, 그리고 제63괘인 수화기제(水火旣濟)괘와 제64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괘, 즉 『역경(易經)』전체 64괘의 압축 괘상인 사상이 각각 동서남북의 간방(間方)에 배치되어 있는데 서있지 않고(역 읽는 해석 방식의 원리에 따라 말한다) 비스듬히 누워 있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이처럼 다를 수가 있는가?
중국인들은 한국의 태극기를 보고 "이것은 태극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형편이다. 태극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왜 이처럼 같으면서도 다를까?
같으면서도 다른 것.
'아니다'이면서도 '그렇다'인 것.
또는 '그렇다'이면서 '아니다'라고 하는 동학의 논리, 생명 차원이나 물질 내지 영성의 차원 변화 논리인 이 '불연기연(不然其然, no-yes, 뇌과학과 생물학과 물리학 및 그 모방인 컴퓨터의 이진법 등의 근본 원리)'론이 다름아닌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고구려사 강탈에 대한 우리의 역사 전쟁의 사관∙전략∙전술에 깊이 적용되어야 할 필수의 원리이기도 하다.
기왕의 한국 태극기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대체로 바탕의 흰색은 순수∙동질성을, 태극은 우주 삼라만상의 근원이요 음양이라는 인간 생명의 원천, 네 괘상은 사상으로 동서남북 공간과 춘하추동 시간의 영허소장(盈虛消長, 비고 차고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의 영원한 질서의 상징으로서 생명∙평화∙조화를 뜻한다.
그렇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만은 아니다.
이 ‘아니다∙그렇다’의 원리가 태극과 함께 대중화되는 날이 온다. 그때 ‘삼태극의 춤’과 ‘정역(正易)에 의한 주역의 해체∙재구성’과 ‘주역∙정역 사이의 관계역(關係易) 또는 간역(間易)의 출현’이 있을 터인데 바로 그때가 ‘새로운 팔괘’가 나타나 태극을 재해석하고 ‘시천주 단전호흡법의 대중화’를 통해 ‘궁궁’을 체득(體得)하는 ‘태극궁궁’의 원형이 과학과 생활 속에서 새 세대 중심의 대문화 혁명을 일으키는 때이다.(나의 회고록『흰 그늘의 길』제3권227쪽과 300쪽 참조).
같으면서도 다른 한국 태극의 참다운 철학은 언제 어디서 나올 것인가?
그때가 바로 이때이다.
붉은 악마 세대(전 인구의 78퍼센트 이상의 10대, 20대, 30대 초반의 남녀)가 월드컵 때 스스로 제시한 세 가지 테마를 스스로 설명하고 자기 인식하기 위해 자기 혼자, 또는 인터넷을 통해 여러 형태로 서로서로 공부하며 토론하기 시작할 때, 그때에 비로소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고 그들로부터 새 문명론, 새 삶의 원형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명론은 바로 문사철(文史哲)로 이루어진다. 엇박(文), 치우(史), 한국 태극(哲)이 새 과학(새로운 역학∙역학으로서의 생명학, 우주생명학)의 성립을 촉매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때가 한국학 최고 최대의 명제인 혜강 최한기의 기철학∙역학과 수운 최제우의 동학∙유불선 및 기독의 창조 통합학 사이의 사상적 이중 교호결합이 실현될 때이다. 그때가 바로 ‘태극궁궁’의 원형이 확대되는 때이다.
나는 4∙19세대이면서도 4∙19의 테마가 무엇인지 몰랐다. 5∙16이 난 뒤에야 비로소 4∙19의 혁명성을 깨닫고, 그때부터 열심히 민족, 민중, 동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우리 공부가 바로 최한기와 최제우의 결합 공부였다. 그러나 예감이었을 뿐 성취는 뒷날로 미루어졌다.
아마 붉은 악마는 지금 이미 그 공부를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다음 세 가지만을 암시한다.
첫째, 한국 태극은 중국 태극이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일태극(一太極)만을 추구한데 비해 그 근본의 북방계 혼돈 질서인 ‘삼태극(三太極, 우주의 원래의 근본 기운이요 셋을 품고 하나 노릇을 하며 음양동정[陰痒動靜]을 이미 제 안에 포함한다)의 춤’을 품고 있다. 먼저 이 방향으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둘째, 한국 태극은 1879년에서 1885년 사이에 충청도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에서 김일부 선생에 의해 공표된 한국역(韓國易, 즉 良易)인 정역(正易) 및 동학과 함께 동학의 원형과 여율론 따위 정역의 역학적 과학 체계를 기준으로 해체∙재구성되어야 할 동아시아 기철학과 중국 주역의 그 풍부한 내용 위에 담대한 새 해석을 가할 때에 비로소 해명∙전개될 것이다.
셋째, 새 시대의 새 우주생명학, 즉 새로운 역(易)은 선천의 주역(先天周易)과 후천의 정역(後天正易) 사이의 상호 관계의 역, 즉 ‘간역(間易)’이 새로운 팔괘(八卦)와 함께 나타나고 성립되며 동학 주문(呪文)인 ‘시천주(侍天主) 단전 호흡법의 대중화’와 함께 ‘궁궁수련(弓弓修練)’이 유행하면서 나타날 새 세대에 의한 새 시대의 새로운 차원의 ‘태극 또는 궁궁.’ 즉 ‘혼돈의 질서’라는 원형과 패러다임의 인식에 비로소 적극적으로 해명∙전개될 것이다.
그 관계의 역, 간역의 예언이 감옥에서 밖으로 내보낸 동학 최수운선생의 두 구절 시 속에 선명히 드러난다.
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의심을 낼 틈이 없고
기둥이 다 낡은 것 같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네.
(燈明水上 無嫌隙,柱似古形 力有餘)
사실 오늘 우리의 개인적∙지역적∙민족적∙문명적∙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삶. 그 총체적인 삶이 처해 있는 과학적 형편은 주역과 정역 사이에 양쪽에 다 걸치며 끼어 있다. 기둥은 낡았으나 아직도 힘이 남았고(先天周易) 등불이 물 위에 밝으니 의심 낼 틈이 없다.(後天正易).
둘 다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
그 이중적 교호 관계 사이에 끼어 있는 지금 우리의 삶 자체의 생명학, 우주생명학, 즉 새 역학이 필요하다. 그것이 한국 태극이고 그 창조적 해석의 주체가 붉은 악마다. 그들이 동아시아 태평양의 새 지구 및 우주 문명을 후천개벽할 주역들,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이다.
새 문명은 천∙지∙인의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탄생한다.
동북공정, 고구려사 문제로 인해 민족 역사에 지금 큰 대중적 관심이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천시(天時) 아닌가?
한국이 동북아, 동아시아 물류 중심(허브)이 된다는 애기는 왜 나오는가?
또 대륙과 해양,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부두가 된다는 애기는 지리(地利)가 아닌가?
동아시아뿐 아니라 아메리카까지도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그럼 또 무슨 조짐인가?
그 천시와 지리를 문화 속에서 통합하는 것, 즉 ‘인화(人和)’를 뜻하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 주체라고 내가 지금까지의 강연을 통해 내내 지적하고 있는 붉은 악마 세대, 즉 여기 앉아 있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이 물음!
새 세대의 공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