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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떠나셨지만 작품과 정신은 남아
-월간 <스토리문학> 주간이셨던 박건호 시인 추모특집
대중가요 작사가로 너무나 잘 알려진 박건호 시인은 본지 스토리문학에서 주간을 맡아오던 중 쓰려져 별세하셨다.
박건호 시인은 스스로를 구원하고 스스로 위안 받으려고 시를 써왔다. 시인이 시적 감성만을 가지고 시를 쓰기는 어려운 시대에 시가 대중적으로 성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오르내린다 해도 그것이 시로써 인정받으려면 다시 문학인들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베스트셀러 시집들은 대중들에게는 인기지만 문학인들에게는 과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은 시인으로 행세하려면 시에 버금가는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필수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얼마만큼 공감을 주든지에 상관없이 시단은 열심히 시평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가는 형국이다. 시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대학교수라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는 시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시는 이래야 한다’는 이론을 저울로 시를 하나하나 달아보고 기준에 미달되는 시들을 공격해오면 대부분의 시인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를 이론적으로 평가하려는 사람들이나 대중적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나 한결같이 ‘독자’를 갈망한다. 시 자체가 감정과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저는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많아야 한다는 게 박건호 시인의 생각이었다. 시 이론가들은 다수의 독자보다는 정선된 독자, 시인의 독자는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에 박건호 시인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기에 시의 독자들은 분명히 줄어들었고 서점에서는 전통적인 시인들의 시집을 기피하는 현상에 이르렀다. 박건호 시인은 시는 여러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대중성 확보가 시단을 기아에서 구출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시를 너무 어렵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시를 써서 스스로를 위안 받았다고 시인은 평소 말해왔다.
박건호 시인은 40여 년 동안 작사가로서 시인의 길을 걸어 왔다. 그 길은 철저한 생활의 길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회한의 길이기도 했다. 무엇인가에 늘 쫓기듯이 옆이나, 뒤를 돌아볼 작은 여유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 결과 두 번의 뇌졸중, 만성신부전증 말기 현상으로 제동이 걸렸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신의 계시로 생각했다. 문학적 갈증으로 탈진하려 할 때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서 적당히 경고 조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난 후 처음으로 바라본 사월의 들판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감격이었다. 가슴은 끊임없이 울렁거리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감격! 아직 잉크물이 마르지 않은 수채화처럼 들판도 강물도 하늘도 모두 다 경이로운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때부터 그는 10여 년 동안 미친 듯이 시를 썼다.
“시는 저에게 있어 구원이었습니다. 시를 쓰지 않았으면 나는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의 변화로 인해 가끔씩 졸도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는 정신적인 구원이긴 했지만 점점 더 갈증을 느꼈습니다. 요즘처럼 시를 열심히 쓸 때엔 그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됩니다. 시를 쓰는 것은 나의 숙명이고 마지막 한 편은 미완성인 채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끝까지 버틸 것인가, 중도에 포기할 것인가를 점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앞으로 아무리 말려도 시를 쓸 것입니다. 우리말로 시에 ‘살’이 끼어서 그렇지요.”라고 그는 수필집 『나는 허수아비』에서 말한다.
그는 1970년도인 20대 초반에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잡혀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시계가 고장 났’느니 ‘우리 삼촌이 XX지원 판사’라느니, ‘내가 누군지 아느냐’느니 갖가지 변병을 늘어놓았는데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아무런 변명 않고 그저 “잘못했습니다. 선처를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순경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훈방조치 하였다고 한다. 그날 담당 순경은 그의 솔직함을 보고 훈방조치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변명하기를 즐겨한다. 가사를 쓸 때도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미사여구를 즐겨 쓴다. 미사여구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잘못 쓰여질 때는 안 쓰느니만 못하다. 그런 가사는 결코 사람들을 공감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그는 노랫말의 기본은 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신의 시에 멜로디가 붙어 노래로 불려 지기를 원한다. 노래를 통해 시가 더욱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래를 대함에 있어서는 편견 있는 시인들이 많다. 대중가요로 만들어지면 무조건 저급이고, 클래식으로 만들어지면 무조건 고급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음악가는 모차르트나 바흐가 아니라 비틀즈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그는,
“시와 노랫말과의 차이는 시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파고든다면 노랫말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해준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시나 노랫말이나 다 같이 사람을 공감시키는 것인데 저는 노랫말을 쓸 때나 시를 쓸 때 모두 마찬가지로 얼마만큼 진실하게 쓰여 졌느냐에 역점을 둡니다. 노랫말은 노래로 불러야 하므로 우선 발음하기가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작곡을 해서 노래로 불리어짐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작업, 즉 공동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 혼자만의 생각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시상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하구요. 반면에 노랫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적이지 않는 것은 히트할 수 없다고 봅니다. 시도 마찬가지겠지요.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곧 휴머니즘 아니겠어요?”
라고 반문해왔다.
노래는 작사와 작곡을 합쳐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그러니 노랫말 하나로 모든 것을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온 것의 그의 시각이다. 상호 보완을 통해 한 편의 노래가 완성되고 그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오래도록 사랑받는 명곡이 된다. 박건호 작사가 작사한 대중가요 중에는 ‘라나 에 로스포’가 부른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곁을 떠나간 뒤에/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예예 예예예예 예예예 예예예예(중략)”란 가사의 <사랑해>란 노래가 있고 ’패티 김‘이 부른 “사랑해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저하늘에 태양이 돌고 있는 한 / 당신을 사랑해/ 그대 없이는 못살아 / 나 혼자서는 못살아(중략)”의 <그대 없이는 못살아>란 노래가 있다. 가사만으로 볼 때는 서로 구분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사들에 붙여진 멜로디를 대입해서 보면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가사는 어떤 멜로디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기도 합하는데 반대로 멜로디 또한 어떤 가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그러기에 그는,
“시인들 중에는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대단히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악은 공동 예술임으로 작사가와 작곡가가 서로 의견을 맞추어 양보하여야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변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발전성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사람도 그 자체가 노래가사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때 보배가 되는 수가 있지요.”라고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는 창녀가 등장한다. 창녀는 가장 밑바닥 인생인데 작가는 그를 통해 인생의 진실을 이야기하여 감동을 준다. 존 스타인 백이 일본에 초청되었을 때 일이다. 그는 세미나에 참석했으나 재미가 없어 모든 일정을 변경하고 뒷골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때 일본 작가들은 ‘당신은 1류 작가인 줄 알았는데, 왜 3류 항동을 하느냐’고 비아냥댔다. 그 말을 들은 존 스타인 백은 ‘작가가 어떻게 1류나 3류로 나뉠 수 있느냐?’ 반문했다. 박건호 선생의 생각이 그렇다. 아무리 글이 약한 사람들이라도 그 사람의 글에는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학에서는 아직 수많은 등급이 존재한다. 그 등급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신만이 정통이고 자신만이 문학적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문학적 귀족들의 지적 오만 속에서 한국문학은 스스로 타이타닉 호가 되어 바다로 침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간혹 문학이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문학의 치열함을 설명하는 말이겠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생명에 애착이 강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박건호 선생은 ‘가끔 펜을 집어던지고 깊은 충동에 싸이곤 합니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진실이고, 문학적으로 바른 길일까요? 그것은 나를 피 마르게 괴롭히는 명제중 하나입니다.’라고 말했었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10년 전 쯤의 일이다. 선생의 신장 기능이 떨어져 일주일에 세 번씩 병원에서 피를 정화하며 목숨을 연명하였다. 그때 선생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문득문득 가슴이 서늘하였다고 말했었다. 다행이 신장을 기증한 사람이 있어 제2의 생명을 얻었지만 그 후, 정상인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선생은 문학을 하며 암흑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때조차 선생은 문학이 생명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6년 전에도 선생은 가슴뼈를 톱으로 자르고 심장으로 통하는 두개의 혈관을 왼쪽 다리와 배에서 쓰지 않는 혈관을 떼어다가 교체했다. 그때 선생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고 말했었다. 그때 선생은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진정한 문학은 진정한 삶의 이야기다. 산 사람의 삶은 문학을 통해 수억의 삶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문학은 치열하되 진실해야 한다는 게 박 시인의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박 시인은 “저는 작사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시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치열성을 진실한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라고 말했었다.
지난해 초, 시인은 시집『그리운 것은 오래전에 떠났다』와 『나는 허수아비』라는 수필집을 내셨다. 시은은 스스로를 ‘허수아비’라 불렀는데,
“어린 시절 그리운 모습 중에 하나가 들판에 허수아비입니다. 허수아비는 두 눈을 부릅뜨고 팔을 벌린 채 들판에 서서 가을을 지키지요. 그러나 철 지난 허수아비는 외롭습니다. 허수아비에게 죄가 있다면 열심히 들판을 지킨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를 면하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지요. 텅 빈 들판의 허수아비에겐 새떼들도 오지 않습니다. 홀로 남아 잊혀져가고 있을 뿐이지요. 잊혀 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 나를 데려다가 들판을 지키라 해놓고 모두 떠나가지요. 작곡가들이나 가수들은 끊임없이 작품을 써달라고 하고 어느 곡을 취입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 써주는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실제로 한 두 곡만 취입하면 맥이 풀립니다. 작품을 쓰느라 보낸 시간들,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겪은 고통은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렇지만 나는 작곡가들이나 가수들의 부탁에 울며 겨자 먹기로 허수아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은 전성기가 있다가 추수 끝난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가 되어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허수아비의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니 아주 잊혀지는 건 아니지요.”라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선생께서는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하셨고, 우리나라에서 박건호 선생님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그 수많은 곡들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선생님의 대표작은 모닥불이다. 모닥불과 시인이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모닥불>은 현재진행형이다. 청년시절 그날 만리포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세월이 갈수록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아직 대학에도 가지 못한 채 무위도식하던 젊은 시절의 청년 박건호는 시인이 되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해 겨울 같은 동인이었던 박석수가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하는 바람에 그의 상대적 실망감은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를 축하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상식에 가자며 박석수가 찾아왔다. 박청년 박건호와 박석수 시인은 안양으로 내려가 김대규 시인, 김옥기 화백 등과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들과 섞이면서 상대적인 소외감은 더해갔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촌뜨기 문학도는 여관방에서 모든 사람들이 코를 고는 사이에 추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 만리포에서 있었던 흥사단 하기수련회의 여운이었다. 수련회 마지막 날 모래밭에서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한 초롱이나 되는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모닥불은 만리포의 모든 어둠을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들 100여명이 ‘와!’하는 탄성을 질렀다.
“그때 흥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모닥불 피워 놓고/마주 앉아서/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이 구절은 내 인생의 반 이상이 들어있는 구절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던 시인을 회상하니 눈시울이 붉혀져온다.
선생은 약관의 나이에 서정주 시인에게서 첫 시집의 서문을 받으며 문단에 나온 걸로도 유명하다. 시인은 스무 살 때 첫 시집을 냈다. 그는 첫 시집 『영원의 디딤돌』을 내면서 원고지 뭉치를 들고 서정주 시인을 찾아갔다. 박건호 시인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당돌한 청년이었다고 그의 수필집에서 회고한다.
미당 선생이 말씀하시길,
“하루는 어느 애송이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시집을 내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서문을 지어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하고 원고지 뭉치를 내미는데 얼떨결에 한 번 읽어보겠노라고 대답하고 돌려보낸 뒤, 그의 작품을 몇 개 읽어보니 상당한 수준이어서 막걸리라도 한 잔 먹여 보내려고 탕발인 채 급히 쫓아 나가보니 애송이 녀석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더라.”고 회고 했다.
그러니까 미당 선생께서 청년 박건호의 작품을 인정해주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박건호 시인은 첫 시집 『영원의 디딤돌』에서 미당선생의 서문을 받아서 내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당돌한 청년이었나?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진 청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의 아호는 토우(土偶)였다. 송수권 시인이 지어준 호다. 토우라는 것은 흙으로 빚은 인형이란 뜻인데. 송수권 시인이 박건호 시인을 보고 불가마에서 막 구워낸 흙으로 빚은 인형 같다고 해서 붙여준 호다. 그래서 시인은 그 호를 상당히 사랑했었다. 뜨거운 불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색깔을 가질 수 있는 도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대에 토우가 만들어졌던 것은 장난감으로도 만들어졌겠지만 주로 주술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었다. 이제 그가 무덤에 들어간 이상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었다. 어쩌면 토우라는 호를 지어주신 송수권 시인도 박건호 시인에게 영원히 살라고 지어준 것이 아닐까?
월간 스토리문학을 위해 기꺼이 주간을 맡아주셨던 선생님!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시더니 결국 가실 길을 떠나셨지만 그 작품과 정신은 남아 국민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치유하고 어루만져주실 것이다.
-편집부
추모시
말문이 막히다
-박건호 선생님 영전에
김순진
말문이 막힌다는 말
말문이 막혔다는 말
그걸 가르쳐주시려고
그 먼데까지 가시다니요.
선생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무거운데
선생님에 대한 영상은
늘 웃고 계시네요.
여보세요. 선생님!
스토리문학이에요, 하면
어디에요.
크크큭!
그냥 그렇게 묻고
그렇게 웃기만 하셔도
우리에겐 큰 가르침인데
몸을 던져 가르쳐 주시니
가슴 아파도 웃고 살게요.
그렇게 아픈 선생님도 웃으셨으니
손등으로 눈물 훔치고
정말 웃고 살게요.
* 선생님은 영원한 스토리문학의 주간이십니다.
박건호 시인 연보
1949년 강원도 원주 출생
호는 토우(土偶)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월간 스토리문학 주간
2007년 12월 9일 세상을 떠남
주요 수상내역
1975년 MBC 올해의 최고 인기상
1982년 MBC 올해의 최고 인기상
1982년 KBS 가요대상 작사부문 수상
1982년 카톨릭 가요대상
1983년 KBS 제1회 가사대상
1984년 KBS 제2회 가사대상
1985년 PCI 집계 최다 방송상
1985년 ABU 가요제 그랑프리
1985년 LA 국제가요제 그랑프리
1985년 올림픽조직위원회, MBC 공동주최 <아침의 나라에서>선정
1985년 국무총리 표창
1985년 제1회 한국방송협회 주최 아름다운 노래 대상
1986년 제2회 한국방송협회 주최 아름다운 노래 대상
1990년 최다 저작료 수입 표창(한국음악저작권 협회)
1993년 대전 엑스포 노래 <우리는> 선정
1994년 5월 25일 신장이식수술 후 본격적인 문단활동 시작
1999년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공식 가요 <영원한 우정> 선정
박건호 작사 주요 히트가요 작품
모닥불(박인희 작곡, 노래)
잊혀진 계절(이범희 작곡, 이용 노래)
아! 대한민국(김재일 작곡, 정수라 노래)
단발머리(조용필 작곡, 노래)
슬픈 인연(일본곡, 나미, 공일오비 노래)
풀잎 이슬(김희갑 작곡, 정수라 노래)
그대는 나의 인생( 김희갑 작곡, 한울타리 노래)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이범희 작곡, 민해경 노래)
무정 부르스(김영광 작곡, 강승모 노래)
눈물의 파티(이범희 작곡, 조용필 노래)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김희갑 작곡, 최진희 노래)
당신도 울고 있네요(최종혁 작곡, 김종찬 노래)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오동식 작곡, 장은아 노래)
보이네(김명곤 작곡, 나미 노래)
빙글빙글(김명곤 작곡, 나미 노래)
찰랑찰랑(이호섭 작곡, 이자연 노래)
바람이었나(방기남 작곡, 정수라 노래)
새끼손까락(최주호 작곡, 정종숙 노래)
내 곁에 있어주(김영광 작곡, 이수미 노래)
토요일은 밤이 좋아(이호준 작곡, 김종찬 노래)
환희(김명곤 작곡, 정수라 노래)
빈 의자(최종현 작곡, 장재남 노래)
연인들의 이야기(계동균 작곡, 임수정 노래)
아버지의 의자(김희갑 작곡, 정수라 노래)
인어 이야기(김기웅 작곡, 허림 노래)
기다리게 해놓고(장욱조 작곡, 방주연 노래)
고귀한 선물(오동식 작곡, 장은아 노래)
서울(이범희 작곡, 이용 노래)
모나리자(조용필 작곡, 노래)
아베마리아(계동균 작곡, 김승덕 노래)
어젯밤 이야기(이호준 작곡, 소방차 노래)
구름 같은 인생(김영광 작곡, 이자연 노래)
외로워 마세요(김영광 작곡, 조용필 노래)
내 인생은 나의 것(방기남 작곡, 민해경 노래) 등 3,000여곡 발표
시집
「영원의 디딤돌」1969. 성문각, 「타다가 남은 것들」1989. 다다미디어, 「물의 언어로 쓴 불의 시」1994. 다다미디어, 「고독은 하나의 사이였다」1996. 박우사, 「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1996. 사임당, 「기다림이야 천년을 간들 어떠랴」1997. 춘광, 「나비전설」1998. 토우, 「모닥불 이후」2001. 토우, 「유리상자 안의 신화」2003. 시지시, 「딸랑딸랑 나귀의 방울소리 위에」2006. 모닥불, 「그리운 것은 오래전에 떠났다」2007. 한누리미디어.
가사집
「그 눈물은 지금도 마르지 않았다」1985. 현대악보사, 「모닥불」1989. 다다미디어, 「철새의 편지」1989. 다다미디어.
에세이집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1994. 술래, 「시간의 칼날에 베인 자국」1997. 춘광, 「너와 함께 기뻐하리라(투병기)」1996. 하늘,「나는 허수아비」2007. 한누리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