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 廣李의 선고 분들은 전부 나라를 잃었을때에는
너도 나도 조선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해오신 선고 분들이 많습니다
비록은 인구수對比 적은 우리 廣李이나
이름 크기는 하늘의 별 빛입니다
오천년의 광이의 나라충성정신은
신라 내사령공때부터
어어온
충절의 정신입니다...
칠원에서 신라를 지키기 위한 항절이며..
남부여대 廣州로의 긴 행열이며
고려 수절의 암탄공 삭탄공 둔촌공 판서공 들이며..
무릇 어디 그 정신을 열거하기가
어이
하나
이겠습니까..
수없이도 많을진대 廣李로 확인되고.우선 행장을 찾아낸 아래분들을
여러분에게 소개 해드립니다.後孫이 切孫 되거나 以北 출신이여서
묘도 추모도 못하신 분 계십니다 마음으로 추도 부탁드립니다.
廣李여 서로 돕고 단결 하십시요..!!
이는 내사령公-諱한희 公
한음선생의 유훈입니다
..그리고 이번 총선, 가장 참신하고 깨끗한 인물...우리의 별 [이주영님이 창원을지역]에
[이용완님이 전주완산구]에.[이종구님이 강남갑지역]에 출사하신 답니다.
...이민영拜上
의병장.성제 이백래선생
자는 윤선允善,1862년,철종13년,보성군 용문면 대교촌에서 출생
면암 최익현(화서 이항로의 수제자) 문하로
임병찬(문과,전 군수)과 교유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척왜 상소
상경하여 나 철=대종교창시자,오기한,임병찬,최익헌,이 흔선생들과 함께
을사5적에 대하여 주살을 모의하고
동생 이옥래와 장질李容植에게도 6적암살단에 참가하도록
지시하니,
암살단의 기산도 조는 이근택을 저격하여 중상을 입히고
제3조인 이옥래,李鴻來(廣州人),강원상,신태환,유태경,박동원등은
군부대신 권중현을 암살키 위해 寺洞안가은신,저격하였으나
실패함에 암살단원 이용태(廣州人),이종학(廣州人)강원상,이홍래(廣州인)와
나철등이 체포되고
이종학은 교수형
나 철은 10년 유배형에 처해지고 대대적인 검거가 있자
공은 피신, 낙향 은거하였다
낙향후에 1907년에 정세현을 만나,함께
능주 쌍봉산에서 거병하여 맹주 梁會一,선봉 임창모,중군 안기환
의사 이백래등으로 지휘부를 조직,
능주관아 습격,능주헌병분주소 습격,화순분주소 습격
친일자 처단,군수품노획등
3월9일부터 3일간 관내 일경과 교전하고
同福에서 교전중 의병대장 鄭世鉉이 사망하고
공과 양회일등이 체포되었다,
동년 재판에 회부되어 전남 智島에 10년유배형으로 유배중
7월 8일 순종 황제 즉위 특사로 방면되었다
방면된 공은
이듬해 동지들과 함께
1908,1,21일 항일의병을 창의,
의병대장으로올라,호남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니,
수백명의 지사,의사,구왕실관료,구왕실 군인들이 운집하였고
우리 廣州人으로는 [이홍래,이남재,이정재,이병화,이용식]
[이옥래,이양래]가 公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공은 창의 의병을 지휘하여,
1908--1909년까지 장흥, 보성, 승주 ,화순,남원,함평,구례,
순천, 동복 ,강진 ,정읍 등지에서 일헌병과
수회에 걸쳐서 각지 에서 교전하였으며,
남도 안규홍(휘하에는..이양래 廣州人,이경원 廣州人) 의병부대와
연합작전도 전개 일군 주둔지습격 다수의 일경과 친일자를 처단하였다
계속하여 부패한 관료와 일경,일헌병대 분주소에 대한 습격,
독립군 자금준비,관서 파괴,친일파 제거및 습격등등 활약하다가
총격전으로 부상당하여
1909년 5월초부터 보성군 옥암면 대야리 모령부락 안가에
은거중이였는데 ,
친일 밀정 洞長 朴德明에 의해 밀고되었다,
일경은 그동안 의병장 공을 체포키 위해 주력 헌병을 사방팔방에 보내 찾았는데
공의 은신처를 알게되자 장흥 배산 헌병대와 순천일경의 지원을 받아
1909.5.17.밤에 모령 안가를 습격
공을 체포,압송하였고,
3일뒤인 5월 20일 순천 헌병대에서 공개 총살되였으니
아!향년 47세 년추이시다.,
공은 1908-1909년대에 호남지역에서 전설처럼
활동하시던 창의 의병 대장이시다
(출처,이용식傳 이백래.임전일지보성군사료,1988년)
愛國 志士
운암 이병택선생
자는 공준
호는 운암,
충북 중원 지역 만세 시위를 주도
일경에 체포되어 복역,1921년에 중국에 망명
상해임정의 행동및 선동대원으로 활동 열혈.의열단원
독립전쟁 자원.생몰미상
독립애국지사
동초 이종건 선생
일명 동초,1928년 휘문고보 재학중
항일 사건으로 피체 위험이 있자
상해 망명,북경,상해,남경 일대에서 독립군 자금/연락
한독 동맹회 결성 활동,
의열단원,상해임정에 관여하고
25세에,상해임정의원,집정원 부장,
1935년 낙양군관학교 졸업/이후 의열단 지대장
광복군 지대장등을지내며 대일독립유격전참가,
김구주석을 보좌 ,대일전에 참전하고.1946년 김구 주석과 함께 귀국하였으나,
미상.년졸 사망 정부수립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심.처장미상.후손미상
......................................................
독립애국지사
이동하李東下선생
1856(철종 7)∼1919. 한말의 의병·독립운동가.
본관은 광주(廣州). 일명 정래(淨來)경상북도 문경출신.참봉을 지냈다.
1907년 9월 이강년의진(李康#연05義陣)의 참모로 임명되어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의진이 노고성(老姑城)에 주둔할 때
좌익장(左翼將) 김영식(金永軾)과 함께 정예의병 20여명을 이끌고
이화령(梨花嶺)을 파수하기도 하였다.
1908년 이강년의진의 참모장이 되어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해 6월 이강년의병장이 까치성에서 부상, 피체되자
일시 강원도 영월에 피신해 있다가 의병투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권병을(權秉乙)·김성추(金聲秋)·조용필(趙鏞弼)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9월 귀국한 뒤 옛 의병동지인 이은영(李殷榮)·김낙문(金洛文)·
최욱영(崔旭永)·이제재(李提宰)와 새로운 독립운동조직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1915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민단조합(民團組合)을 결성하여
충청남도 지부장이 되어 격문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1916년 8월 경상북도 예천의 박심수(朴尋洙),
안동의 김숙헌(金叔憲)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은 것이 그것이다.
앞서 1915년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면의 김병두(金炳斗),
병천리의 박종식(朴宗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의 이종면(李鍾冕) 등을
항일지하조직인 조선독립의군부에 동참하도록 하였는데,
1915년 4월 박종식이 군자금 250원을 가지고 충청남도 성환역에서 잡히자
위험을 느껴 피신하였으나,
1916년 8월 잡혀 1918년 5월 30일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복역중 청주감옥에서 일본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아 의식불명상태가 되었다.
가족에게 인계되었으나 들것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소리구재에서 순국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雲崗先生倡義錄,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局, 1934)
독립운동가 이병찬(李秉澯)선생
寶城人
옛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밀려드는
일본의 세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융희4년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을 이기지 못한 의사(義士)들이 일어나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기회를 보아 적의 원흉을 저격하기도 하며
혹은 국외로 나가 동지들을 규합, 독립군을 결성하여 적과 대전하기도 하고,
혹은 열강국을 찾아가 국권회복을 호소하는 등,
다양한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 고장 복내면에 당년 24세의 청년으로
분연히 조국광복에 헌신하여 호남의 대표적 역할을 했던 분이 있었는데
바로
우재 이병찬(愚齋 李秉澯)선생이다.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은 병호(秉昊)요, 자(字)는 성부(性夫)이며,
본관은 광주(廣州)로 고려말의 명현 둔촌(遁村)선생 집(集)의 후예요,
입향조(入鄕祖) 양진재공 수관(養眞齋公 秀莞)의 12대 손이며
심재공 정회(心齋公 正會)의 장남이다.
학령(學齡)에 이르러
조선조말 월파 정시림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은인자중하던 차 만주에서
애국지사들의 광복운동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그들과 접선하였다.
선생은 1913년 채기중선생이 주도한 풍기의 대한광복단과
1915년 박상진선생이 주도한 조선회복단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7월 15일 박상진, 우재룡선생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규모로 조직을 정비,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전국에 비밀기관을 설치 운용키로 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전하도 지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16년 겸백면의 박문용선생과 모의하여
복내면 회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이 강제로 부과한
세금 일화 이천원을 징수한 것과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한 돈을 합쳐 독립군 군자금으로 밀송하고
전라남북도를 왕래하면서 비밀조직의 확대,
일제고관과 친일분자의 숙청, 일본 주요기관의 파괴,
독립군자금의 모금을 위해 활동하던중
밀고한 자가 있어 1918년 7월 목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년형을 선고받아
1919년 2월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당시의 선열지사(先烈志士)들의 행적을
일일이 조사 확인하여 훈포장을 추서하고
유족들을 위안해 주었는데 선생께서는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309호 묘지에 이장(移葬)되었다.
후에,
의향(義鄕) 보성인으로서 경향각지에 살고있는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족의 유적을 전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남보성복래중고에,
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합의하여 동상이 제막되다
독립운동가 이용태
이용태선생은 국내에서
안규홍,이홍래등과 의병활동등
독립운동중,일경의 감시와 추적을 받자,1910년에,만주로 망명,
만주에서의 대종교 운동과 함께, 지하 독립 운동을 하심,
상해임정과 독립군 모병,토의를 계획하덩중
만주 동경성 대종교 청사에서
간부 25명전원이 함께 피체,
8년간 만주일본형무소에 복역후 출옥 후 계속독립운동에 관여하심
독립운동가 이용준선생
동생 이용준은
1933년,천진시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하여,
일영사 川恒을 폭탄으로 투척시켜 부상시킴,,
만주일경에 의해 바로 체포되어 여순옥에서 5년간 복역후,,
임정독립군부에 투신하고
대일전 참전하였다
독립운동가,사회민주주의정치이론가 李鐘敬선생
1916년 5월15일에
諱允載(字 仲賢,字秉一,萬洙..1879.3.10 --?졸,인릉참봉,)
의 제3자로 태어 나시엇으며
조부는 諱容赫(일명字용해.윤영,경회,)이시고,
증조는諱정래(기학)이시니 부호군,첨지중추,오위장으로
고조왕제의 근위장을 지낸분이시다.
선생은.여수 수산전문재학중 광주 학생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제적되었으며
일본 유학중에는 지하 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명치대법학부졸 해방이후에는 서민호,김철과 함께 사회대중당을 조직
사회민주주의 정치이론가로
동도의 정치가들로부터 존경과 경의를 받았으며,
한때는 현실정치에 참여 민의원과 국회의원선에 나서기도 하셧다.
자유당시절과 유신체제하에서는 유신철폐등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함께 하신분으로
공의 행적과 건국운동
그리고 정치행로에 반골의 정치인이자
신념가이시다,1982년졸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