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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편/절 |
인용된 성경 |
내 용 |
1절 |
마태 27:46 마르 15:34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부르짖음 |
7, 8절 |
마르 27:39-44 |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심 |
14-16절 |
마태 27:35 마르 16:37 요한 19:28, 33,34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시는 모습에 대한 묘사 (손,발에 못이 박힘, 통증, 목마름 등등) |
18절 |
마태 27:35 루카 23:34 요한 19:23, 24 |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음 |
22절 |
히브 2:12 요한 17:26 |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 |
22-31절 |
사도 13:47 필리 2:9-11 묵시 11:15 |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일어날 결과들을 예언함 |
(시편 22를 인용한 성경말씀)
(이 시의 1차적 의미 : 다윗의 기도의 배경)
1. 이 시는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시로 알려지고 있다(1베드 1:10-12; 루카 24:25, 26, 44-47). 그러므로 이 시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초로 삼고 있지만 그 이상의 훨씬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것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이 시에 있는 극심한 고통의 부르짖음을 인용하신 점에서도 입증된다.
2. 그러나 다윗의 생애의 많은 사건 중 이 시편의 내용과 일치하는 곳은 어디쯤일까? 시인은 과연 어떤 환경에서 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토해야만 했을까? 많은 시편 학자들이 다윗의 위험과 전쟁으로 가득 찬 나름의 환경을 적용하면서 이 시편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없다는 것까지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본인은 사무엘기하권 15장에서19장까지의 내용이 그 배경이 된다고 생각한다.
3. 이 시편의 특징은 죄 고백에 대해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으며 원수들에 대한 저주도 없다는 것이다. 주로 악인에 의해 죽음에 처한 의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사무엘기하권 15-19장의 내용을 묵상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사무엘기하권 15장에서 다윗의 자식인 압살롬의 4년에 걸친 치밀한 반란으로 다윗은 예루살렘성을 떠나게 되며,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심한 굴욕을 겪는다. 사무엘기하권 15:30절에서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고 한다.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가면서 지나간 장소는 천년 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신 그 장소이다(마르 14:32-42). 다윗 시대에도 감람산 마루턱에는 성소가 있었다(1열왕 3:2). 그 환란 중에도 다윗은 계속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었고(1사무 15:31), 다윗의 기도의 응답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서 옛 친구(1사무 16:17) 후새를 만난다.
감람 산마루를 넘어서자 다윗 일행은 베냐민 땅에 들어서게 되며 이곳의 사울왕의 사람에게 많은 수행원이 다 보는 앞에서 다윗을 “피를 흘린 자”라며 심한 모욕을 당한다(2사무 16:5-8). 그러나 다윗은 이 심한 굴욕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에 굴복한다. 다윗은 한결같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로서 저주가 주술적으로 파괴되는 힘을 쓰지 못하게 한다. 다윗은 역경 가운데서도 악을 악으로 갚는데 사로잡히지 않는데(1사무 24:13,17,19; 25:21, 26, 28, 33) 이 점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것을 입증한다(1사무 25:30).
다윗의 병사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윗의 생명을 지키려고 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완전히 임금 한 사람과 결부 시킨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자기 백성과 전쟁을 벌려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 쓰기보다는 자신의 왕위와 생명을 노리는 아들 압살롬의 안전을 더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윗이 심복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마지막 동족상잔의 치욕의 전쟁을 명하면서도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어니라(2사무 18:1-5).
동족간의 살육이 이만에 이르렀고(18:7) 아들 압살롬의 죽음과 승리를 전해 받고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18:33)고 통곡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이러한 다윗의 태도 때문에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휴유증을 겪게 된다.
4. 따라서 아마도 이만명 이상의 참혹한 죽음을 가져온 동족상잔의 치욕의 전쟁과 다윗의 수하들이 분열되고 그 모반의 주모자가 아들 압살롬이었던 다윗 왕을 생각해보라. 다윗의 그 많은 고난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친족과 친지들 간의 상상할 수 없었던 죽음의 투쟁은 다윗으로 하여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라고 이 내부적인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절규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22편에서 열조(4절), 모태(9절) 등의 표현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다.
5. 아마도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다윗의 탄원이 갑자기 중단되고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문자적으로는 ‘당신이 내게 대답하셨나이다’)라는 확신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다윗은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책략가 아히도빌이 있다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빌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2사무 15:31).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2사무 15:32-34).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과 그 아들들에게 정보를 전하면 내게 그들이 즉시 기별할 것이다고 다윗은 말하며 이에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2사무 15:37). 이것이 바로 시편 22:21의 탄원에서 감사로 대반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다윗의 친구 후새가 바로 다윗의 기도의 응답이다!
6. 앞에서 이 시편의 특징이 주로 악인에 의해 죽음에 처한 의인에 대한 설명뿐, 죄고백에 대해 한마디도 없고 원수들에 대한 저주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다윗의 입장 즉 반란군도 역시 여전히 다윗의 백성이며, 반란군의 수괴 역시 자기의 아들 압살롬일 때 그 소년 곧 아들 압살롬이 모반의 주모자였다 하더라도 자기의 원수로는 여기지 않게 될 터이다. 이럴 때 왕으로서의 탄원이란 악인에 의한 죽음에 처한 의인의 수난으로, 왕으로서 모든 사태의 진상을 이미 파악하고 있을 때의 그러나 절박한 위기 앞에서, 사건의 구체적인 기술보다는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왕의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교훈적이다.
(본문 주해)
A. 의인의 수난과 탄원
(시편 22,1-2)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시나이다
1)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어떤 극단적인 종류의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하나님이여”를 두 번이나 외치며, “어찌”라는 표현이 부르짖음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된 표현이다. 다윗이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른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신 듯하다. 다윗이 낮에도 밤에도 끊임없이 부르짖어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시다.
2) “성령으로 잉태되신 아기 예수님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루카 2:40),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루카 2:43),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루카 2:49-50),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루카 2:51-52).
누가복음의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어린 예수의 첫 번째 특색 있는 행동(43, 46절)과 첫 번째 특색 있는 말(49절)을 묘사하면서 마감된다. 이 둘에 대한 계기와 틀은 예루살렘에서 거행된 유월절이다. 13세 때부터 이스라엘의 젊은이는 참가할 의무가 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은 약 120킬로미터 정도이며 그 당시에는 3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예수는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하시는 행동(46절)은 육친의 관계를 끊는 시험 작업으로 이끌어간다. 49절에서 처음으로 “---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표시되는데 이는 예수의 그 다음 생애를 규정하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이끄는 것이 된다. 선생들과의 토론에서 예수의 대답은 ‘놀라움’을 야기시킨다. 열두살된 예수 안에 이미 그 말씀이, ‘놀라움’을 일으키는 분이 현존하신다(마태 7:28; 13:54; 22:33). 이는 곧 성전을 그의 가르침의 장소로 만들기 위하여 말하자면 이미 발걸음을 내디디신 메시야이며 주님이시다. 52절은 얼마나 참되게 실제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는지를 보여준다.
3) 유대인들은 모세오경과 특히 시편을 매일의 양식으로 암송하며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이를 교육 받는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마리아 찬가(magnificat)에서 구약성경의 인용문들과 암시들로 촘촘히 짜인 직물를 보는 것처럼 깊은 성경의 이해를 보여준다(루카 1:46-55).
4)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도다”라고 하자, 그러자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루카 1:41-47)을 시작으로 마리아 찬가를 시작한다. 46-47에서 영혼과 마음을 원어로 다시 번역하면 “내 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이 하나님 나의 구주에 대하여 기뻐한 것은”으로 된다. 즉 내 혼이 주를 찬양한 것은 현재형이고 내 영이 하나님 나의 구주에 대하여 기뻐한 것은 과거완료형이다. 찬양은 혼적인 세계에 속한 것이나 마리아의 찬송은 그녀의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혼을 통해 표현되었다. 즉 먼저는 마리아의 영이 기쁨을 혼에 전달하여 혼은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이 기쁨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마리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매우 깊은 영성의 여인이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위의 이러한 배경을 묵상해 볼 때, 예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시편 22편의 인용은 어릴 때부터의 어머니로 부터의 깊은 시편 교육과 더불어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늘 그 위에 있었고, 아기 예수의 성장을 ‘놀라움’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그 인용의 의미와 깊이를 다시금 새롭게 한다. 여기서 사박다니(아람어), “버리셨나이까”(히브리어로 아자브)는 관계를 완전히 끝내고 잊어버리는 수준을 말한다.
6) 하느님에 의해 심판 받으심.
(마태복음 27,45-46절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주님은 제삼 시 즉 오전 아홉시에 못 박히셨다(마르 15,25).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동안 고통을 당하셨다. 처음 세 시간 동안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핍박받으셨고, 마지막 세 시간 동안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느님에게 심판받으셨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우리 죄를 대신 고난받는 대속물로 여기신 것은 바로 이 시간 동안이었다(이사야서 53,10). 그러므로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는데, 이는 우리 죄와 죄들과 모든 소극적인 것들이 거기서 처리되었고 하느님께서 우리 죄로 인해 그분을 버리셨기 때문이다(46절).
45절의 때까지 사람들은 그들의 불의함을 모두 들어 내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불의한 것을 다 행했다. 그때에 하느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구주를 심판하셨고 그분을 버리셨다.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버리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셨고(1베드2,24; 이사53,6). 우리 죄들을 담당하셨고(1베드2,24; 이사53,6),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2코린5,21).
처음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은 그분께 온갖 불의한 짓을 행했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운이 덮였다. 이 어두움은 하느님니 행하신 것이다. 이 어두움 가운데서 주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막타니"라고 인용된 말씀들을 외치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핍박을 받고 계실 때에는 하느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분은 하느님의 임재를 누렸다. 그러나 후반 정오부터는 하느님이 그분을 버렸으므로 어두움이 임했다. 아버지와의 분리, 이것을 견딜 수 없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크게 소리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신 우리의 대속물이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버리셨다. 이사야 53장은 바로 이 때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십자가의 그분 위에 두셨던 때임을 계시하고 있다.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의로운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이 대속물 위에 올려 놓으셨고 우리의 죄들을 위해 의롭게 심판하셨다.
이 시간 동안 그분은 거기 십자가 위에 있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버리신 것이다. 그분은 죄가 되셨다. 한편으로 주님은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심판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의 문제였다.
(3-5)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1) 3절은 사람의 곤경에서 멀리 사라져 버리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거듭하여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찬송할 근거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2) 시인의 신뢰는 역사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즉 과거에 조상을 위험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은 다윗이 구원을 요청하는 직접적인 탄원의 동기가 된다.
3) 특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듯한 상황은 다윗이 겪고 있는 실제적인 환경과 절망적인 죽음의 위협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6-8)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1) “벌레”(톨라)는 형용사적으로는 붉은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홍색을 띤 지렁이나 구더기류를 일컫는다. 부패물에서 나온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은유적으로 ‘악하고 멸시당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2) “머리를 흔들며”는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마태 27:39)
3) 사람들은 다윗을 비웃으며 여호와께서 저를 구원하시지 않음을 인해 그의 믿음을 조롱한다. 비록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을 경험하였음에도 현실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믿음과는 전혀 다른 공허한 것임을 나타낸다.
4) 시편 22,8에서 사용된 이 표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마태27:42-43).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을 성취하고 있음과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9-10)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아오니
1) 다윗은 자신에게 주님이 베푸셨던 과거의 은혜를 근거로 현재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한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가 수반되어도 좋은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수반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다윗은 죽음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B. 고난이 에워쌈(11-18)
(11-18)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 내게 그 입을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렸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 다윗은 자기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아실 것이 틀림없다는 점을 상기시킨 후(9-10절), 그의 탄원은 절정에 이른다.
2) “바산의 힘센 소”는 갈릴리 동북쪽 팔레스틴 동북부 비옥한 초원지대로 목축에 알맞은 곳이다. 바산의 힘센 소는 의로운 자를 치받는 잔혹하고 포악한 세력을 상징한다(12). 다윗의 마음은 녹은 초밀처럼 사라져 그는 저항할 마음을 잃어 버렸다(14).
3)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는 표현은 극심한 갈증으로 인하여 입속에서 혀가 뒤틀린 형국을 일컫는 말이다(15). 이는 십자가 상에서 목마르다고 외치신 예수님의 고통을 예시한다(요한 19:28).
4)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는 주께서 나를 흙속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15). 이 말은 자기를 이러한 절망의 궁지에 처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므로 비록 대적들이 다윗을 조롱하고 있으나 이 궁지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5)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렸나이다”는 악당들이 개때처럼 나를 둘러싸고 사자처럼 내 손발을 물어 뜯었습니다(16).
6)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는 살을 다 뜯어 먹어 치우고 앙상한 뼈만 남았습니다(그러나 다리 뼈들이 부러지지는 않았다)(17절). 이 성취된 모든 예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입증한다(18절, 요한 19:23-24).
C. 사망에서 구원을 간구함(22:19-21상)
(19-21상)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1) 절망적인 환경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한 탄원을 올린다. 특히 시인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기를 간구한다(19절). 다윗은 이미 11절에서 동일한 호소를 한 바 있는데 이러한 부르짖음은 그가 극심한 곤경에 처했음을 묘사한다.
D. 기도의 응답과 찬양(22:21하-26)
(21하-26) 21하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의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서 온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1) 21절하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탄원 중인 다윗에게 대반전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순간에 반응하셨다! 순간에 사망에서 생명안으로 다윗을 옮기셨다! 다윗은 많은 고난을 거치면서 그러나 영적으로는 더욱 성숙해갔다! 할렐루야! 아멘!
2) “주께서 응락하시고”에서 사용된 히브리어의 완료시제는 다윗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의 표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과 애절한 탄원으로 시작한 다윗의 기도는 21하에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2사무 12:10-12). 다윗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징계가 그 집에서 떠나지 않았다. 2사무 12장을 묵상하면 나단선지자가 다윗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는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다윗이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죄가 두 가지니 벌도 두 가지이다. 곧 우리아를 살해한 벌로는 다윗 자신의 집에서 나온 칼이 그 죽일 대상을 찾을 것이다. 이 칼이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모반 사건이다. 간음에 대한 벌로는 다윗 자신의 아들이 뭇 사람들 앞에서 간음할 것이다(1사무 16:22; 20:3). 다윗은 자기 자신에게 사형판결을 이미 내렸다(2사무 12:5).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로 다윗은 새로운 삶을 허락받지만 형벌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2사무 9-12절). 다윗은 여생을 사면받은 죄인으로 살아간다.
다윗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들였듯이 이제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새로운 삶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한다. 우리아의 처가 이제는 다윗의 처 밧세바로 된다.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다른 모든 아들들(2사무 3:2-5; 5:14-16)보다 더 사랑을 받아 왕위 계승자가 된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처럼 문제가 되었던 혼인에서 태여난 바로 그 아들을 사랑하신다(2사무 12:25의 여디디야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를 뜻한다).
4) 21하의 다윗의 깨달음은 삼하 12:10-12의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받아들이는 곧 시편 22편의 다윗의 탄원의 기도가 하나님의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다윗의 자세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섬광같은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5) 다윗의 자아가 완전히 파쇄되고 온전히 주님만을 의뢰할 때 이 순간 하나님과 다윗은 영안에서 하나이다. 그 생사를 초월한 전적인 신뢰가 이 시의 후반부(시편 22:22-31절)가 전반부의 탄원시에서 찬양시가 탈바꿈하게 한다.
시편 22:21하에서 구원의 응답을 얻은 다윗은 22절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게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영안에서 노래한다. 다윗의 이 깨달음 후에 영안에서 찬양하는 22절을 바울 사도가 히브리서 히 2:12절에 인용함으로써 정확한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할렐루야!
6)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무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 2,11-18).
(1)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그의 인간 형제들을 위한 오직 유일한 대제사장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 사도는 히브리서 2,4-3,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논증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4-9로 그리스도의 만물을 향한 통치권의 성립을, 둘째는 10-16절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한 고난을 통하여 구속받을 형제들과 동일하게 되기 위함이었음을, 셋째는 17-18로 그리스도께서 자비하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기 위함이다. 바울은 이의 근거로 4-9절은 시편 8:4-6의 인용으로 시편 8,4-6은 사람에 관한 것이나 히브리서에서는 사람일반에 적용하지 않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련시킨다.
특히 결국 우리가 보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9절에서는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 지셔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하셨고, 이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 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둘째의 신학적 논증 10-16절의 근거로 시편 22,22과 이사야 8,17-18절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셋째는 성육신의 목적이 신실하고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는 것임을 설명한다.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고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시므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2) 시편 22편은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의 처절한 기도를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간절함을 시편 22,1-2에 함축되어 나타난다. 또한 22,22에서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었다는 것과 그 기쁨을 그의 백성들과 나누고 싶어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시편 22편에 나타난 하나님 안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께 투영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적인 삶의 모든 제약 속으로 완전하게 들어오시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간들과 하나가 되신 것이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이 시편의 첫 구절 말씀으로써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데서 드러난 바 사람들과의 연대성은 그의 죽음의 수난에서 완성된다. 이 둘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해 내고 준비하는 것,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지칭한다. 거룩은 단지 구원받은 자들이 계속 해야할 작업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신분상의 성격이다.
(4) 시편에서의 두 번째 의미들(allegorical)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여러 각도에서의 묵상과 체험, 지식과 이해, 무엇 보다도 끝없이 집착해하는 큰 부담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본래의 시편 저자의 의도와 뜻을 최대한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다윗(이스라엘 백성들 중의 한사람이기도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많은 사울왕과의 적대적 관계에서 늘 죽음에 직면하며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주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시편 중에서 아마도 22편이 그가 경험한 가장 치열한 고난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들의 왕위찬탈의 모반과 믿었던 신하들의 분열, 이러한 가장 가까운 자들인 자식과 충신들의 배반이기 때문이다.
시편 22편의 다윗의 고난은 지금까지의 그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의 죄와 무능 때문에 이 상상할 수 없는 피바람의 전쟁을 야기 했다는 자책감과 절망감은 지금까지 그의 어떠한 고난의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이 처참했을 것이다. 자식과 가신들의 전쟁, 모멸감, 수치심, 괘심함, 원망, 죄와 무능, 고뇌, 그러나 일촉즉발의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는 이 구별되는 시편 22편 속으로 들어가 보자!
(5) 자기 때문이라는 다윗의 자기진단이 이 시에서 구체적인 적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버림이라는 절망감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며 절규한다!
당신은 이러한 절망과 자기 포기의 긴박한 환경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어떤 것이든 내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볼 때, 아무 것도 꿈쩍할 수 없으며 극단적인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떤 환경안에서는 내가 미물처럼 전혀 존재감마져 느낄 수가 없을 때, 하나님은 내 안에서 움직이신다!
다윗의 절망적인 환경이 그를 이미 죽은 자로 여기며, 수 만명의 백성들을 동족상잔의 무의미한 전쟁에서 죽게 했으며, 이 모든 고난의 원인이 다윗 본인이라는 자각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데서 유추해 볼 수 있다(2사무 19:4). 그 절망 속으로 그 낮아짐 속으로 하나님은 나타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고난 중에 함께하고 계심을 다윗은 깨닫는다! 할렐루야!
(6) 다윗이 본래 처했던 정황 가운데에서 당한 고난과 극도의 외로움은 주 예수께서 오셔서 당하시므로 모형이 되었다.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서 죽음의 공포에 공감하고 함께 참여하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그러한 외로움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그와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위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이상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다윗의 고난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시인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과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히브 2,11-14에서 그 고난 때문에 ‘나는 너희들의 고난과 지금의 어려움을 잘 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고난이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듯이 고난은 우리를 예수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분과 동일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놀라운 것을 공유하게 된다. 우리가 고난을 지겹고 원수처럼 생각하지 않고 친구로서 바라본다면 고난은 우리가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묵상 중에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떠나심을 절규하는 다윗의 영과 접촉하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심으로 하느님의 떠나심을 체험하면서 외치시는 주님의 절규를 내 영 안에서 공감하며 통곡할 때, 주님께서 바로 나의 운명이시라는 강한 확신을 깨닫게 된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