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문연, 2008년 7-8월호.
햇빛의 시학
맹문재
1.
노향림의 작품들에서 “햇빛”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푯대이다. 햇빛은 햇살이나 햇볕뿐만 아니라 환함, 기쁨, 생명력, 행복, 열매, 싱싱함, 축제, 장엄, 좋음, 희망 등으로 변주 혹은 확장되는데,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또한 유형화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
시인의 시세계를 밝히고 있는 햇빛의 토대는 예상을 뛰어넘는 거리에 있는 “아픔”이다. 아픔은 슬픔, 시름, 수심, 눈물, 비애, 쓸쓸함, 통한, 폐쇄, 공포, 상처, 절망, 폐허, 막막함, 죽음 등으로 변주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의 시세계는 햇빛과 아픔이, 어두움과 밝음이, 슬픔과 기쁨이, 절망과 희망이, 실재와 상상이 결합관계를 이루고 있다.
햇빛이 아픔과 결합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시인은 대조적인 관계로 이해되는 관습을 극복하고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놓”(「강변 마을」)는다. 아픔과 햇빛을 분리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서로의 토대로 또는 거울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세계관은 시인이 선입견으로 배제하거나 인위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체득한 것이다.
시인이 아픔을 품는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자신을 보호해 줄 조건이 못 된다고 파악하고 평탄하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하여 “슬픔이 배어 있는 나의 오관을 파고드는 소리엔 수천 수만의 날개 뜯는 소리가 켜”(「음악」)지는 것을 듣는다. 시인은 그 과정에서 환경과 적당하게 타협하거나 수정하지 않는다. 진정성을 가져야만 주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2.
어스름이 오면 피가 잘 돌지 않는다.
가로등이 불빛 안에 야윈 등짝을 걸어두고 있다.
비좁고 낡은 터널 안에다 나를 밀어넣는다.
삼십촉 알전구가 흐릿한 눈을 뜬 출입문을 나서면
넓은 세상의 하루가 나를 기다리는 걸까.
고수부지의 바람이 차다.
하안동―이대앞이라 쓴 버스 한대가
흉조처럼 휘익 고가 위로 날아간다.
마악 일어선 갈대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서걱서걱 차렷 자세로 집합한다.
삼삼오오 짝지어 안전모를 쓴 인부들
다 떠난 뒤 반쯤 고개 숙인
삽차와 기중기들 한가하게
마포강 물빛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다.
무심한 강물은 수심이 자꾸 내려간다.
두 손 가득히 물은 돌고 돌아 소용돌이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듯
저희끼리만 깔깔대며 내려간다.
강 하류 어디쯤서 두꺼운 모래톱 걷어내고
물을 떠 모았으나
내가 다다를 곳 두리번거려 찾아보아도
나를 흐르게 할 피가 없다.
어스름이 오면.
―「병」 전문
시인은 “어스름이 오면 피가 잘 돌지 않는”는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심정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비춰주는 “가로등이 불빛 안에 야윈 등짝을 걸어”두었다고, 또 퇴근하는 시민들을 태운 시내버스가 “흉조처럼” 날아가고 있다고 인식한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며 “삽차와 기중기들”을 “마포강 물빛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는 것으로도 바라본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노동자라면 식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밖에서 졸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한가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따스한 것일 수 없다. 시인은 “내가 다다를 곳 두리번거려 찾아보아도/나를 흐르게 할 피가 없다.”고 또다시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하여 “비좁고 낡은 터널 안에다” 자신을 밀어 넣는다.
시인은 왜 “어스름이 오는” 무렵,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아프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반가워하거나 평온하게 여기지 않고 슬퍼하거나 쓸쓸하게 여기는 것일까? 그것은 작품의 제목이 “병”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아프기 때문이다. 시인은 피가 돌지 않을 정도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픔을 겪고 있다. “야윈 등짝” “비좁고” “흐릿한” “차다” “흉조” “고개 숙인” “졸고 있다” “저희끼리만” 등의 시어들이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시인이 아파하는 이유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은 돌고 돌아 소용돌이에서 내려가야 한다고/저희끼리만 깔깔대며 내려”가는데 비해 자신은 환경으로부터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이 점점 물질주의의 심화로 인해 비인간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환경의 요구에 무조건 몸을 맞추지만, 그와 같은 행동은 인간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이 아파하는 모습이 오히려 적응의 본보기로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물질주의며 경쟁주의 등의 거대한 벽을 넘을 수 없음에 절망한다. 그렇지만 그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한 인간 존재로서 대항하려고 한다. “저희끼리만 깔깔대며 내려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것이 그 모습이다. 단순히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강물과 같이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는 한편, 생명력이 강한 강물처럼 끝까지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피가 돌지 않는” 처지를 자신만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자신을 “터널 안에다” 밀어 넣는 아픈 마음으로 “넓은 세상”을 포용한다. “하안동─이대앞이라 쓴 버스”며 “안전모를 쓴 인부들”을 품는 것이다. 시인은 순응의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유리한 환경에 있지 않는 그들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르네 듀보는 현대인들이 환경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 적응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듀보는 산업화된 영국의 도시에 공장이 가득 들어선 이후 황사가 날리고 스모그가 뒤덮였지만 사람들이 잘 살아간 사실을 예로 들고 있다. “수백만의 도시인들은 도시 환경과 산업 환경에 너무나 잘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자동차 배기가스의 악취나 도시 환경의 무질서로 인해서 생긴 볼꼴 사나운 것들에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교통 혼잡으로 인해서 묶여 있거나, 이름 모를 무질서한 차량 행렬의 삭막함을 맞으며 화창한 오후 시간의 대부분을 콘크리트 고가도로 위에서 보내야 하는 사실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현대의 도시 생활은 별이 빛나지 않는 하늘, 가로수 없는 길, 모양이 없는 건물, 맛이 없는 빵, 즐거움이 없는 축하행사, 정신이 없는 희열― 즉 과거에 대한 동경, 현재에 대한 애정,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생활에 인간은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상징화되어 버렸다.”
실제로 도시인들은 환경오염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고 풍요롭게 삶을 영위한다.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매우 활발하고 생산력이 높고 수명 또한 짧지 않다. 이전의 사람들이 산업사회가 도래하면 자동차의 증대로 인해 교통 체증이 심해지고 공기가 오염되고 소음으로 시끄럽고 치열한 경쟁으로 고통 받을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도시인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 수질 오염에는 생수를 사 마시는 것으로, 자동차의 소음에는 방음장치를 설치하는 것으로, 충격적인 살인 사건에는 반복적인 인지와 망각으로 이겨낸다.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말라 죽는 가로수, 거짓말투성이로 꾸며진 광고, 대중 속의 고독 들에도 상처받지 않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적응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환경이 병들어 가는데 몸을 맞추는 행동은 자신의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일 뿐, 그리고 인간 가치를 파괴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한 개인이 이 세계에 어떠한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능동적인 적응과 수동적인 적응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에 놓이는 것이다. 적응은 한 개인이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맞추는 행동이 아니라 삶을 영위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반성하는 차원을 넘어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3
해에게서는
언제부턴가 종소리가 난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소리 앞에
무릎 꿇고 한데 모으는 헌 손들
배고픈 영혼들을 위한 한끼의 양식이오니
고개 숙이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늘이 지상의 빈 터에다 간판을 내걸었다.
무료 급식소,
무성한 생명력의 소리 받아먹으려고
고적함을 견디며 서 있는 길고 긴 행렬
깃털처럼 야윈 몸들을 데리고
될 수 있는 한 웅크린다.
아무것도 움직여본 적 없고
스스로를 쳐서 소리 낸 적 없는 몸짓이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동치는
해에게서는
수세기의 깨진 종소리가 난다.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전문
“해”가 따스하게 느껴지는 차원을 넘어 숭고하게 인식되는 연유는 “깨진 종소리”를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깨진 종소리는 “헌 손들” “배고픈 영혼들” “야윈 몸들” 등으로 변주되다가 “한끼의 양식” “무료 급식소” “무성한 생명력” 등과 결합되고 있다. 시인 자신이 아픔의 그림자에 함몰되지 않고 햇빛으로 끌어안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깨진 종소리는 가볍거나 공허하지 않고 단단하다. 큰 울임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로써 아픈 세상을 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푯대로 삼고 있는 햇빛의 세계는 아픔들이 단순하게 합산되거나 종합된 것이 아니다. 아픔들이 논리를 위한 구성 요소로, 다시 말해 낙관주의의 결론을 위해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요소로 인식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유형화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고 개별화된 것이다. 시인은 실존적인 고통의 과정에 몸을 담그고 순응하려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저개발 국가의 빈곤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갈브레이드는 농민들이 가난한 이유로 순응을 들고 있다. “몇 세대 몇 세기나 걸쳐 자기들을 해치는 형태로 되어 있는 사태에 대해 사람들은 거역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성격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극히 합리적인 반응인 것이다. 그들이 말려들고 있는 빈곤의 균형 속의 무서운 지배력을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순응은 최적의 해결책이다.”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빈곤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순응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빈곤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지만 대부분 좌절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갈브레이드는 순응의 거부를, 다시 말해 기초 교육의 보급을 늘려 순응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늘려야 한다고 제시했다. 순응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연대해 “소득이 증가하면 그 결과로서 그 소득 증대를 상쇄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 생겨나, 원래의 빈곤상태로 전체가 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인 ‘빈곤의 균형’으로부터 탈출해야 된다고 역설한 것이다.
갈브레이드가 바람직한 적응을 위해 사람들과 연대를 제시한 것은 주목된다. 연대의 의미는 노향림의 시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배고픈 영혼들을 위한 한끼의 양식이오니/고개 숙이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하늘이 지상의 빈 터에다 간판을 내걸었다./무료 급식소,”는 물론이고,
“매캐하게 쓰레기더미를 태우던/새벽 인부들도 떠나가고/구석의 팬티처럼 벌판 한장 구겨져 있다.”(「내 마음의 벌판」),
“산동네 폐업한 의원 건물 옆 쓰러져 있는/유모차 한대 어디선가 온 어둠들도/망가진 채 쓰러져 나뒹군다.”(「살아 있는 날의 슬픔」),
“언제부턴가 부서진 휠체어 한대/햇빛만 쬐고 앉았다.”(「낯익은 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세계를 아픈 마음으로 끌어안고 햇빛을 지향하는 시인의 인식은 견고하다. 시인은 햇빛과 아픔의 결합이 용이하거나 요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체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불길한 전조의 새라고 알려진 후투티를 당당하게 불러들인다, 스페인 태생 맹인 작곡가인 로드리고의 음악을 가슴으로 듣는다, 왁자하게 일하는 산역꾼들을 따라 장지를 밟는다, 반 자짜리 창문이 덜컹거리는 목공소에서 잠 못 이루고 불빛을 훔친다, 그리고 뜨내기 김씨와 이씨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따끈한 위안을 퍼 후루룩 마신다. 시인은 아픈 몸을 깨진 종소리처럼 울리며 햇빛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가 있음.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