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례가 동아시아로 전파된 것은 약 1500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동으로 전파한 사람들은 경교의 선교사들로서 인도를 거쳐 7세기 초 당나라까지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 후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들(Giovanni Monte Corvino)에 의해 복음을 전파 하나 명나라에 의해 천주교 뿌리를 못 내리고 200년 후 이태리인 예수회의 마태오 리치에 의해 적응주의 선교 방법으로 다시 뿌리내린다.
일본과 중국에 교회가 창설된 후에도 조선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알려지기 전이었다. 광해군 때 남인 학자 이익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는 백 여년의 준비기간을 가진 후 서양사상을 수용했다.
서양사상은 조선의 지식인들의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17C초 선교사들이 지은 서적들이 조선에 유입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안에 천주교와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가 소개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결과 실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천주교 교리의 책들이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이렇게 그리스도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중국이나 일본 같이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천주교 서적을 통해 조선 사람들 스스로 교리내용을 하나 둘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이려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을 수용한 선구자로서 이벽(李檗, 호는 광암 曠菴)은 한국교회의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같은 남인에 속하는 젊은 학자들이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어사에 모여 강학회를 열고 있었다. 때는 1779년. 겨울. 이벽은 그곳을 찾아간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천주교 기원의 양립 논쟁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으로 북경을 가게 된다 1784년 2월경 북경 북당 교회에서의 예수회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돌아와 한국교회의 반석이 된다.
2. 한국천주 교회의 창설
한국에 돌아온 이승훈은 수표교의 이벽의 집에서 이벽은 요한,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은 사도 요한으로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전례가 정식으로 집전되며 수표교의 신앙 공동체가 최초로 설정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예비자라 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벽이 백성에게 진정 주고자 한 것은 바로 종교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1784년 그들 스스로 이룩한 신앙 공동체였다.
이는 또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창설이 된다. 우리교회의 창설과정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그 후 그들은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지며 명례방 공동체를 형성한다.
주자학을 신봉하며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양반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한문으로 된 서책들도 스스로 소유하지 않고 김범우, 최창현 같은 중인들을 불러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모든 이들에게 전파하려면 바로 이 작업이 필요했으며 이것은 분명 성령의 이끄심이다. 한글이야말로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는 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Koinonia인 것이며 신분의 차이를 없이 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탄생시킨 신앙의 선구자들은 많은 박해를 거치며 순교를 하게 된다. 그 후 장학원 앞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명례방 공동체를 이루며 후에 종현동(지금의 명동 대성당지역)은 복음전파의 중심지가 되며 후에 불랑 주교와 뮈델 주교에 의해 한국교회의 상징인 명동 대성당을 짖는 계기가 된다.
3. 박해와 순교
그러나 복음 전파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많은 박해와 순교로 이어지면서 황사영 백서에 드러나듯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철저한 신앙생활상을 볼 수 있다. 을사 주초적발사건, 가 성직제도, 진산사건 등을 거치며 4대 박해로 이어진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맞게 되나 그도 역시 1년 1개월 만에 순교한다. 이렇게 많은 박해를 통해 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치명을 당하고 만다.
우리나라의 박해는 순수한 종교적인 박해가 아닌 정치와 맞물려 당파싸움이 방편으로 희생제물이 된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교황청과 포르투갈 선교보호권의 대립으로 사제를 요청하였으나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Padroado) 정하상, 유진길 등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 후 최양업 신부의 분골쇄신의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한다.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박해와 순교는 100년간이나 계속 되면서 이 땅에 천주교는 뿌리내리게 된다.
4. 사회적 교회사적 측면
1) 사회적 측면
예비자 1단계로서 한글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이벽에게 있어선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절대적인 사명이었다. 남녀차별, 양반 평민 구별 없이 가르쳤다. 이후의 선교사들도 한글부터 배워야 했었다. 그래야 선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불 사전을 다블로 주교에 의해 편찬이 된다. 그러므로 해서 선교사들에 의해 한글이 유럽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며 조선말기에 우리글의 자긍심이 생기며 한글 학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들에 의해 문법을 체계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신분제도를 뛰어 넘는 혁명적인 성격으로 여인들과 평민들에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또한 첩을 두지 말라는 것으로 여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남편들을 선교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사회운동이 목적이 아니었으며, 남녀차별 없이 모든 이들에게 한글로 된 교리서를 나누어주며 믿으라고 했을 때에 혁명적 사고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이를 바탕으로 동학이 민족 봉기를 하게 된다.
천주교의 가르침이 서학에 밑바탕을 두며 동학에 영향을 미침은 사실이다. 조선 지배층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분제도의 붕괴는 커다란 위기의식으로 대두된 문제 이었다. 황일광 시메온은 하층천민인 백정이었으나 세례 후 정약종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였다. 그는 체포당시 배교하면 평민신분으로 만들어 준다 라고 했을 때 “나에겐 두 개의 천국이 있다. 천민중의 천민인 내가 대가 댁에서 밥상을 받았고, 형제라 불리었다. 또 예수님을 위해 죽으면 이 보다 더 큰 행복을 영원토록 누린다 하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주님이 내게 이렇게 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교하느냐”고 했다니, 초기 양반 순교자들이 받아들인 신앙의 믿음의 깊이에 저절로 숙연해 진다.
2) 교회사적 측면
초대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모방하며 신앙을 증거로 이어나갔던 것이다.
교회사적 측면에서 첫째로는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았고, 한국사적으로 볼 때는 탈 유교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성서를 통해 평등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며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긴다. 셋째, 전례서를 통해 탈 체제를 가져왔고, 넷째, 신심서적으로는 탈 체제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이다.
5. 한국 천주교회 전례의 의의
평생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산사람들에게는 어떤 처지에 있던 희망(녹색)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힘을 얻어 일생을 그리스도를 증거(백색)하며 순교자의 삶을 살다간 그러면서 적색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쉽게 은총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고 삶을 통해 증거 되었던 것이다.
<Ⅰ데살로니카 5, 16-18>의 말씀대로 “늘 항상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 하십시오”를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또한 그리스도의 표징으로 삼으며 산 것은 예수성심신심, 성모신심,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깊었으며, 기도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대 선조 신자들의 순수하게 가졌던 믿음은 주님을 증거하며 예수와 같은 마음과 스테파노와 같은 죽음을 택하며, “주님 저들을 용서 하십시오”하며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려던 그들이었다. 이렇게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초월적인 삶을 현실 생활에서 뿌리내리도록 산 우리의 성인들의 올바른 신심을 따르는 신앙관을 생활화하며 살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6. 결론
오늘날 우리 교회의 문제점인 실천은 없이 형식주의에 빠져있고 사회와 분리되어 교회 공동체에 그냥 머물고 있는 현실을 본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2000년 동안 해왔듯이 쇄신할 수 있는 기능은 있다. 말씀 안에 쇄신하려 노력하고 자성하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순교의 영성에 밑바탕이 된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신념과 소신으로 순교의 결단까지 이르게 한 그들의 숭고한 신앙 정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절대적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 땅위에서 구현되는 그 날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마저도 그분이 모두 채워 주실 것이다.
2001년 2학기 교리신학원학원 한국교회사 기말 report
(이영춘 신부님의 "한국 교회사"를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