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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어(比目魚)를 아는가. 동쪽 바다에 사는 눈이 한쪽에 하나밖에 없어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상상속의 물고기를. 비목동행(比目同行)라고 들었는가. 비목어 두 마리가 서로를 의지해 결국 평생을 붙어 다녀야 한다는 말을. 여기 ‘코트의 비목어’ 정호원(23), 권철현(36)이 있다. 보치아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으로 서로가 서로의 눈과 영혼이 돼주는 두 사람을 <스포츠춘추>가 지난해 베이징패럴림픽에서부터 현재까지 밀착 취재했다. 한국 장애인 스포츠의 현주소를 동시에 다룰 ‘코트의 비목어’는 2회로 나눠 게재될 예정이다. |
(1편에 이어)
“(정)호원이가 죽고 싶다고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권철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숭덕학교 고등부를 졸업할 즈음 (호원이가) 장애인 직업전문학교 문을 두드렸나 봐요. 호원이는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기를 원했어요. 그게 효도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입학 면접이 문제였어요. 뇌병변장애가 있는 호원이가 면접관의 질문에 너무 느리게 말을 하다 보니 면접관이 답을 다 듣기도 전에 다음 면접자에게 질문을 한 모양이에요. 워낙 장애인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라,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린 호원이에겐 꽤 충격이었나 봅니다.”
사실 정호원 같은 중증장애인은 직업학교에선 기피의 대상이다. 중증장애인의 학습과 생활을 도와줄 보조자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직업학교에서 그런 전문 인력을 두는 건 꿈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호원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장애인의 직업훈련을 담당하는 곳에서조차 버림받은 정호원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급기야 죽음까지 생각했다. 만약 정호원이 권철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권철현이 정호원에게 바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면 스무 살의 꽃은 신이 부여한 운명을 스스로 마감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서…선…생님…저…다…다시…운…운…운동…하…면…아…안…될…까요. 선…생…님이…랑…가…같이…요.” 정호원의 진심이었다.
“2004년 아테네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을 기점으로 장애인메달리스트에게도 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어요. 장애인선수들도 비장애인 선수들처럼 운동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권철현은 선뜻 정호원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시 제가 특수체육담당 교사로 근무하던 강원도 장애인공동체 소쩍새마을이 치악산국립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주변이 모두 산이었지요. 호원이한테 그랬어요. ‘네가 나와 함께 운동을 하고 싶다니 고맙다. 하지만 여기 있다 보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고 내가 너와 함께 훈련할 시간도 1, 2시간 밖에 안 된다.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다시 운동만 할 수 있다면 정호원에게 그런 불편쯤은 날아가는 새에게나 던질 일이었다. 정호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쩍새 마을에 입소했고 권철현의 지도로 예전의 기량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해 11월에 열린 전국 뇌성마비인 보치아경기대회에서 개인전과 페어에서 각각 은메달을 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개인전에 출전한 정호원이 홈통을 통해 거리를 재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유혹과 고난
2006년 2월 소쩍새 마을이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하며 권철현은 특수체육담당 교사를 그만뒀다. 새로운 인생을 살 참이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정호원이었다.
“오래 고민했어요. 저야 어떻게 살아도 살겠지만 저만 보고 달려온 호원이는 미래가 막막했거든요. 고민 끝에 호원이에게 말했습니다.”
권철현의 말은 이랬다. '2006년에 브라질 세계보치아선수권대회와 말레시이아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가 열린다. 만약 두 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내고 세계랭킹 1위에 오른다면 사회가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토록 바라는 2008년 베이징패럴림픽에 출전할 때까지 누군가 후원자로 나설 수도 있고 실업팀이 창단될 수도 있다. 네 인생을 위해 내 인생을 기부할 준비가 돼 있으니 내 인생을 위해 네 인생이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둘은 합심했고 훈련에 집중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 5위와 페어 금메달, 아·태 경기대회에선 개인전 동메달과 페어 금메달을 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회는 여전히 그들을 외면했다. 후원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실업팀은 여전히 희망사항이었다. 언제까지고 사비를 털어 훈련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마침 권철현에게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장애인 체육담당교사가 필요한데 맡을 의향이 있느냐는 제의였다. 정규직이었다. 보수도 좋았다. 무엇보다 장애인과 함께 할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속으로 ‘이제 아기 분유값은 해결이 되겠다’싶었어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 할 수 있게 된 셈이지요. 그런데 선뜻 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정호원이 마음에 걸렸다. 장고 끝에 권철현은 아내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여보, 아무래도 거긴 내겐 과분한 자리 같아요. 베이징패럴림픽이 끝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줄 수 있겠어요?”라고. 아내는 ‘딱’ 한마디만 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라고.
“당연히 나중에 후회했지요(웃음). 정말 좋은 자리였거든요.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낼께요. 누가 알아요? 호원이와 내가 노력하는 걸 보고 누군가 용기를 얻고 삶의 자세를 바꿀지’라고 말이에요.”
사회복지사인 아내는 남편의 등을 두들기며 격려했다. “당신은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믿어요.”
정호원은 미소가 해맑은 젊은이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아·태 대회를 다녀온 권철현과 정호원은 곧바로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준비에 들어갔다. 권철현이 갑작스런 고열로 시달렸지만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해열제를 먹으며 정호원의 훈련을 독려하던 권철현이 쓰러진 건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맨 그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백혈병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혈병이라니,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의사가 내린 최종진단은 뜻밖이었다.
“혹시 최근에 해외 다녀오신 적 있나요?” 의사가 물었다.
“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를 다녀왔습니다.” 권철현이 말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군요. 백혈병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차트에 무언가를 적던 의사가 고갤 들었다.
“말라리아에요.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만 반드시 절대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권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정호원이 혼자 있는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의사의 절대안정 지시는 다시 훈련을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과 같았던 것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에서 아시아·태평양 장애인경기대회 보치아 BC3에 참가한 정호원이 권철현 코치의 도움을 받아 홈통을 통해 표적구를 바라보고 있다 |
구원의 손길
퇴원 뒤 권철현은 정호원을 비롯한 보치아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은 ‘보치아 실업팀’ 이었다. 기업과 시청 등을 찾아다니며 프리젠테이션을 거듭했다. 물론 상대도 장애인스포츠단의 필요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창단에는 모두 난색을 타냈다.
예산부족으로 비장애인 스포츠단도 꾸리기 힘든 판에 장애인 스포츠단은 꿈도 꾸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권철현은 이즈음 한계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사비를 털어 훈련하는 것도 더는 불가능했다. 장애인 시설이 아닌 사회에서 운동을 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이고자 노력했던 권철현의 실험은 결국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그때였다. 생각지도 않은 후원자가 등장했다.
“2006년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고 귀국비행기를 탔을 때에요. 옆자리에 칠레 동포분이 앉으셨는데 어쩌다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보치아 선수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선 자기 가족들과 상의해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그분이 제게 이메일을 보내셨더라고요.”
내용은 이랬다. '칠레로 돌아간 뒤 가족회의를 했다. 권 감독을 돕기로 했다. 약소하지만 후원금을 보내겠다. 동생 내외도 동참하기로 했다. 부담갖지 말고 받아주면 고맙겠다.'
정호원, 권철현에겐 구원의 손길이자 또 다른 기회였다.
“패럴림픽 선수촌 식당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식사를 하는 이가 있다면 십중팔구 보치아 BC3 선수일 거예요. 보치아 BC3 선수들은 중증장애인이기 때문에 식사는 물론 목욕, 대소변까지 모두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보치아 코치들은 경기력 뿐만 아니라 생활도우미도 겸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보치아 선수들은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설사로 인해 기저귀를 자주 갈까봐서다. 밥도 많이 먹지 않는다. 몸이 무거워져 자신을 드는 이가 힘들어할까봐서다.
보치아 BC3 코치는 경기보조는 물론 생활도우미, 간병인, 부모 역할까지 도맡아야 한다. 권철현이 한 선수의 기저귀를 갈고 있다 |
“마음 같아선 낮에 돈 벌고 밤에 훈련을 함께 하고 싶어요. 주변의 도움을 받느니 스스로 모든 걸 충당하고 싶지요. 하지만 제가 없으면 호원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보치아에선 실업팀이 중요하고 후원자의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칠레 동포 후원자분이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
권철현이 말한 칠레 동포는 이혜경 씨 가족이다. 이 씨는 중국과 칠레를 오가는 평범한 무역상으로 부유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그들이 국내 유수의 기업에서도 외면한 후원자역을 자임한 건 재산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정호원과 권철현은 이혜경 씨로부터 훈련비를 지원받으며 다시 패럴림픽 금메달을 향해 신발끈을 고쳐 맸다. 그들이 금메달을 반드시 목에 걸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행운'
2007년 3월부터 정호원, 권철현은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패럴림픽 금메달보다 뽑히기 힘들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보치아 BC3 선수층이 꽤 두터운 편입니다. 보통 대회에 40, 50명가량이 출전해요. 이분들이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선수권대회 등에 출전해 랭킹 포인트를 쌓고, 최종 포인트 순서대로 국가대표가 정해집니다. 이혜경 씨로부터 후원을 받기 전까지 호원이는 랭킹 포인트에서 2위를 달리고 있었어요. 운동여건이 좋아진 만큼 1위를 자신했지요.”
시즌 막판까지 랭킹 2위였던 정호원이 그해 마지막대회인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랭킹 1위에 오르겠다는 게 정호원의 계획이었다. 결승전까진 계획대로 됐다. 정호원이 당시 랭킹 1위 선수를 맞아 5-2로 이기고 있던 것이다. 남은 공은 하나. 이 공만 잘 굴려 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붙인다면 대회 우승과 랭킹 1위는 정호원의 차지였다.
정호원이 공을 굴리는 순간, 권철현은 무릎을 꿇은 채로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왜냐? 우승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감사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앞선 선수권대회에서 다 이긴 경기를 내준 경험이 있었어요. 이번에도 그럴까 싶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호원이가 욕심이 났는지 상대방 공을 밖으로 쳐내려 했어요. 확실히 점수 차를 벌리겠다는 의도였지요. 하지만 계획대로 공을 쳐냈다면 모를까 엉뚱한 공을 건드렸지 뭡니까. 그 공으로 역전패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 역전패와 함께 시즌 랭킹 3위로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정호원, 권철현은 한동안 넋 나간 이들처럼 살았다.
“다른 건 몰라도 멀리서 우릴 도와준 이혜경 씨 생각이 났어요. 이분께 무슨 말을 드려야 하나 고민스러웠습니다.” 못 마시는 술을 입에 대며 권철현은 혼잣말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정호원은 그런 권철현을 보며 “부족한 제자를 용서해주세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들의 운은 다한 듯 보였고, 둘의 인생에서 ‘행운’과는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기적이 벌어졌다.
중증장애인들이 참가하는 보치아 BC3선수들은 마우스핀이나 헤드포인트 등의 별도 보조도구를 사용해 공을 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때도 절대 코치(경기보조자)는 선수에게 공의 방향이나 거리를 지시하거나 조언해선 안 된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호원이와 제가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정리를 하려던 찰나였어요. 그때 갑자기 대한장애인보치아연맹에서 연락이 왔어요. ‘최상의 선수를 뽑기 위해 조만간 패럴림픽 대표 선발전을 열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지요. 이전엔 패럴림픽 대표 선발전이 따로 없었거든요. 속으로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인가 보다’생각했습니다.”
정호원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행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랭킹 포인트를 15점이나 올리며 종합 포인트 53.50으로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았다.
땀은 무색이지만 그 대가는 금색
국가대표로 뽑힌 뒤 훈련은 더 강화됐다. 주변의 소소한 도움도 잇따랐다.
“모 대학 학장님이 허락해줘 그 학교 체육관을 연습장으로 썼어요.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히터를 거의 켜지 않았지요. 한 번씩 학장님이 지나가다 우릴 보시고는 ‘아니 왜 히터를 껐어’하며 다시 난방을 켜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니었다. 유료로 이용하던 구내식당도 “자랑스런 국가대표팀 선수들”이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되레 식당에서 반찬거리를 싸주며 응원을 보냈다.
2008년 9월 9일 베이징패럴림픽 보치아 개인 BC3 준결승전이 열리는 베이징 국가컨벤션센터 펜싱홀에서 정호원과 권철현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우릴 도와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힘줘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정호원이 준결승전에서 만난 포리치로니디스 그리고리오스(그리스)에게 4-1로 지며 결승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원래 호원이 스타일이 무척 공격적이에요. 그래서 이길 때 보면 10점 차가 기본입니다. 하지만 질 때는 너무 허무하게 경기를 내준답니다. 준결승전이 그랬어요. 초반에 경기가 불리하게 전개되니까 빨리 점수를 따라붙으려고 욕심을 부리다 실책을 범하고 말았어요.”
결국 정호원은 3, 4위전에서 M. 페이소토(폴란드)를 12-0으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내심 개인전 금메달을 바랐지만 동메달도 값지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금메달은 팀 동료 박건우가 따냈기에 기쁨도 컸다.
그렇다고 정호원이 금메달과 인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페어에서 박건우와 짝을 이뤄 기어코 금메달을 따냈다.
베이징패럴림픽 보치아 BC3 페어부문 금메달이 확정되자 권철현 감독(사진 가운데)이 정호원(왼쪽)과 박건우(오른쪽)을 격려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엄마와 두 아들이 중증장애인이기에, 게다가 남편이 가출했기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정부의 지원을 받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픈 몸을 이끌고 굳이 하루 16시간씩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위해 주민등록 말소를 하지 않았다. 그 탓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들이 페어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엄마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엄마와 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한…테…아무…마…말…도…못해…못했…어요.” 정호원은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해 엄마에게 미안했고 엄마는 금메달리스트인 아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어 미안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전화기를 부여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이를 지켜보는 권철현도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권철현이 감상에 빠지기엔 금메달 이후가 너무 암울했다.
“보치아는 금메달이 곧 은퇴에요. 생각해보세요. 패럴림픽 금메달리스트한테 한 달에 80만 원의 연금이 나와요. 그 돈을 받는다 치면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사회에 나와 혼자 생활해야 하지요. 그런데 사회는 보치아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조성돼 있지 않아요.” 권철현의 낙담이다.
장애인 시설은 최후의 보루다. 원래 진정한 장애인 복지의 원천은 시설이 아니라 집이다. 권철현은 장애인 스포츠가 하루 빨리 학원이나 시설을 떠나 집에서 이뤄지기 바란다. 그리고 장애인 스포츠가 ‘눈물나는 이들의 가엾은 몸부림’이 아니라 ‘비인기 스포츠’로 자리잡길 원한다.
“제가 한 번 계산을 해봤어요.” 권철현이 말했다. 무슨 계산을?
“보치아 실업팀 한해 예산이요.”
권철현의 계산에 따르면 1년에 3억 원 정도면 패럴림픽에서 보치아 금메달 2, 3개를 딸 수 있는 내실 있는 팀이 생긴단다. 선수 4명과 전임지도자와 생활도우미가 운동하는데 전혀 무리가 따르지 않을 전망이다.
메달의 색깔로 운영비를 책정한다면 한해 수백억 원을 들이고도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한 축구에 비해 1년 3억 원에 금메달 2, 3개가 가능한 보치아가 훨씬 경쟁력 있는 스포츠가 될 것이다.
강원도 속초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근무 중인 권철현 감독. 중증장애 보치아 선수 4명을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현재 권철현은 속초 장애인 복지시설에 근무하고 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간 장애인 스포츠에 큰 관심을 기울여온 속초시가 국내 최초로 보치아 실업팀 창단을 구상 중이란 이야기가 들린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권철현의 꿈이 이뤄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한국장애인스포츠의 큰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다.
정호원은 조만간 권철현과 함께 다시 운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아직 실업팀을 비롯해 뚜렷한 후원자가 나서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은 또 다시 고생을 감수해야할 처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이 한쪽에 하나밖에 없어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상상속의 물고기 비목어처럼 서로를 의지해 다시 한번 운명에 맞설 참이다. 이들을 ‘코트의 비목어’ 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호원은 <스포츠춘추>자신의 꿈을 당당한 목소리로 간명하게 밝혔다.
“포…폼…폼나…게…사…살고…시…싶어…요.”
자, 당신은 어떤가. 폼나게 살고 있는가.(끝)
'코트의 비목어' 장호원과 권철현은 앞으로도 서로의 영혼에 동반자가 되려한다.(사진=스포츠춘추 권일운 기자 |
첫댓글 .............!^^
눈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