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씨는 현대자동차라는 기업을 넘어 우리나라 재계(財界)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정주영은 ‘자동차 입국’을
꿈꾸며 적극적인 투자로 1976년 우리 고유 모델인 ‘포니’를 생산했다. 포니의 생산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자체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정주영 [ Ju Yung Chung ] 1915 - 2001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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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CEO가 되기까지
1998년
인수한 기아자동차를 포함해 우리나라 자동차의 약 70%를 생산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메이커 현대자동차의 설립자인 정주영은 일제시대인
1915년 강원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에는 누구나 살기가 어려웠고, 그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동생들까지 많은 집에서 부모가 그에게 바라는 삶은 평범한 농부의 삶이었는데, 그런 삶에 만족하기에는 그의 야망이 너무나
컸다.
겨우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는 집에서의 탈출 또는 가출의 연속인 시기였다. 가출했다가 아버지의 손에
끌려 오길 수 차례였다. 1998년에 소떼를 몰고 방북할 때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다던 이야기가 이 즈음의
이야기다. 그는 결국 서울의 북흥상회라는 쌀 가게에서 배달을 하면서 터를 잡았고, 3년 뒤 주인이 가게를 정리하게 되면서 그에게 넘겨 드디어
새로운 경일상회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쌀 자유판매 금지정책에 따라 경일상회를 정리하게 되면서 자동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가지고 있던 돈과 사채로 5,000원의 자본을 만들어 '아도 서비스' 정비 공장을 설립했으나, 얼마 안 되어 화재로
재산을 다 잃었다. 그러나 빚을 내 정비 공장을 다시 세웠고 일제 말기 기업정리령으로 회사가 몰수당하기 전까지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해방된
1945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다시 설립해 미군의 군수용 차량이나 일본 차들을 수리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토건사도 함께 설립했다.
건설업, 자동차,
조선업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토건사를 합병하였다. 이후 미군부대 통역을 하던 기자 출신의
동생이 다리를 놓아 미군에서 여러 공사 건을 수주 받으면서, 건설업의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60년대 고속도로 건설, 댐 건설, 해외 중동
건설의 붐 등 당시 국가 정책과 맞물려 현대건설의 규모 확대와 자본축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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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포니 | 그리고
50, 60년대 자본축적을 바탕으로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자동차는 동생인 정세영이 경영을 맡아 1976년에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이라 불리는 포니 1호를 선보이는 등 지금의 현대자동차가 되기까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현대는 1970년대 조선업에도
진출하여 건설, 자동차, 조선 등에 이르는 재벌 그룹이 되었다.
활발한 정치 사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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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북한 방문
장면 | 정주영은 기업가이면서 동시에 정치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대표적으로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는데, 10년 뒤인 2002년 그의 아들 정몽준 의원이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와 기업인의
정치 참여가 대를 이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는 1998년 소 500마리를 끌고 북한을 방문하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현실화 시켜 정치와는
별도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남북 교류 활성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 정치, 사회 여러 가지 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현대자동차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2001년
사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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