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주의 아들로 조선 태종 14년(1415)에 태어나 성종 13 년(1482)에 죽었다. 세종 23(1441)에
생진문과에 합격한 뒤 경창 부승 성균전적 등을 엮임. 훈구파의 중진으로써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거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뒤 춘추관 기주관 고려사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기도 하 였다. 집현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단종 1년(1453)에는 왕의 명 을 받아
<조선도도> <팔도각도>를 작성하였다. 다음해 <황극치 평도>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렸다. 예종 1년(1469) 그는 지중추관 사를 겸직하면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 성종 1년(1470)에는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모든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능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 <눌재집> <시정기> <삼강사략> <동국도경><농잠서> <축목서> <고려사지리지>등이 있다
중시조(中始祖)는
우리 양씨 성의 시조는 제주의 삼성혈에서 용출하신 良乙那(량을나) 이나 이는 태고 때 일이라 이후의 일은 알수가 없고 구전이나 기록에 나오는 확실한 근거는 신라 와 고려 때부터 인데 이후 조선 시대
중엽부터 족보가 보편화되면서 지역이나 문중에서 추대하여 모신 선조 분이 중 시조이다.
本貫(본관)/남원
派(파)/병부공파
派祖(파조)/梁能讓양능양
관작
號는 돈암 兵部公派 派祖로 976년 고려 경종 1년 봉사를 지낼 때 宋 나라에 들어가 國子監에서 金行成과 같이 典禮와 經義를 講하고 賓貢科에 급제를 하였으며 귀국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영재육성에
공헌하였으며. 성종때 中奉大夫에 책록되였고 兵部 郞中을 거처 東宮 內 侍講學士 에 이르렀다.
1003년 목종 6 년 김치양이 천추태후 황보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로 왕위 계승을 꾀하여 대량원군
순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난정을 피하여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호남 용성의 풍악산 아래 중산동에
은거 하며 평생을 살았으며 용장서원에 제향 되었다. 집성지는 남원 진안 장수 서울 경기 지역이다
양씨의 유래
제주의 역사는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도이(島夷)동영주(東瀛洲)섭라(涉羅)탐모라
(耽牟羅)탁라(탁羅)국 이라 하는 전라도 남해중에 폭이 사백 여리의 땅에 태초에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 라는 삼신인이 땅을 나누어 도읍을 하고 살았다.
출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삼국사기
고려 사기에는(고려사첨부) 태초에 지금의 제주도 진산 북 산진에 세개의 혈(삼성혈) (인터넷 링크)
즉 세개의 땅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삼신인이 솟아올라 피이 육식 즉 가죽 털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살고 있는데 .... 하루는 한라산 정상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니 푸른 띠를 두른 목함이 떠오는 지라 이를
양육하여 열어보니 석함이 나와 깨뜨리니 푸른 옷에 붉은 띠를 한 사자(여기서는 인솔자로 해석)가
나오고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명과 망아지 송아지 등 짐승과 오곡의 종자를 갖이고 왔는데 이 사자의 말씀이 나는 일본국 사자인데 우리 임금님께서 이 세 딸을 낳으셨는데 서해중에 삼신인이 장차 나라를 열 것이나 배필이 없으니 이 삼 선녀를 데려가 배필을 지어 주고 훗일 대업을 이루라는 당부를 하시였다는 말을 남기고 이 사자는 구름 속으로 날아 사라지드라. 삼인이 년차 분취 순서적으로 장가를 드니
정감 토비라 샘물은 달고 땅은 비옥하드라. 활을 쏘아 땅을 정하니 양을나 소거 제일도 고을나 소거
제이도 부을나 소거 제삼도 이드라. 오곡을 파종하고 소와 짐승을 먹이니 날로 번창하였다.
그로부터 십오 대손 양탕은 고후 고청 형제와 삼인이 배를 만들어 탐진에서 관순사로 신라에 이르니 신라는 이때 번성한 시기라 이국인이 입조를 하니 이는 상서러운 일이라 하여 후이 대하고 보개 즉 장식이 잘된 모자 와 이대를 하사하고 령으로 고후 고청과 함께 성주 왕자 의 작위를 하사받고 良을 梁으로 하였다.
출 고려사. 동국통감
일설에는 삼인이 활을 쏘아 땅을 나누어 왕업을 이루니 량 제일도 고 제이도 부 제삼도 인데 신라에
입조 하여 통린국으로 성주 왕자의 작위를 받고 량을 양성으로 개성하였다 한다....가장 고첩에는
삼신인이 나와 있었는데 고려때 良성을 가지신 분이 바다를 건너온 분이 있었는데 왕실에 공을
이루어 적을 하사받으니 대방이라 하였다.
하여튼 하늘과 땅의 기운은 생을 이루니 억조 창생이 다 태여남이 있으리라 중국에서는 천지의 개벽으로 사람이 태여 낫다고 하고 단군 임금은 단목하에서 태여 낫으며 신라의 혁거세와 가락국의 수로왕은
알에서 나왔다 하나 우리의 시조는 지금도 그 유적이 뚜렸한 삼성혈(자체구성화면) 이 있으니 다른
시조와는 특이 하며 확실한 근거가 있도다.